삭까의 질문 경(D21)에 나타나는 sati의 의미를 헤아리면서
삭까(인드라)의 질문 Sakkapañha Sutta(D21) 제석문경(帝釋問經)은
욕계천인 삼십삼천의 신들의 왕인 삭까가 (죽음이 임박하여)
시동(侍童)으로 빤짜시카를 데리고 세존을 찾아뵈면서 전개되는 경입니다.
본 경에 나타나는 sati와 관련된 단어를 중심으로 의견을 드려보겠습니다.
빤짜시카의 노래에 나오는 [sakyaputtova jhānena, ekodi nipako sato.]
'마치 사꺄의 후예인 그 성자가 禪을 통해서 일념이 되고 현명하고 마음챙겨서'
과거에 있었던 일화에 대한 대화에서
[kacci me sā, bhante, bhaginī bhagavantaṃ abhivādesi?
sarati bhagavā tassā bhaginiyā vacanan”ti?
“abhivādesi maṃ sā, devānaminda, bhaginī, sarāmahaṃ tassā bhaginiyā vacanaṃ.
api cāhaṃ āyasmato nemisaddena tamhā samādhimhā vuṭṭhito”ti.]
'세존이시여, 그런데 그 여인이 세존께 저의 [이름으로] 절을 올렸습니까?
세존께서는 그 여인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신들의 왕이여, 그 여인은 나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나는 그 여인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존자의 마차 바퀴소리를 듣고 그 삼매로부터 나왔습니다.'
삭까의 질문에 과거 고삐까(Gopikā)라는 여자가
삼십삼천의 일원이 되어, 삭까의 아들로 태어나게 된 고빠까(Gopaka)가 되고
Gopikā 등의 시중을 받았던 과거의 3명의 비구가 그 후 간답바의 무리에 태어나고 나서
Gopikā가 이들 비구들에게 질책하는 대화가 나옵니다. 이런 질책을 받고 난 상황에 대해
[tesaṃ, bhante, gopakena devaputtena paṭicoditānaṃ
dve devā diṭṭheva dhamme satiṃ paṭilabhiṃsu kāyaṃ brahmapurohitaṃ,
eko pana devo kāme ajjhāvasi.] 초불 번역이 다음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들은 신의 아들 고빠까의 질책을 받은 뒤 두 명의 신은
그때 그 자리에서 바로 마음챙김을 닦아서 범보천의 신의 몸을 받았으며
한 명은 계속 감각적 욕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번역도 가능하지 싶습니다.
'세존이시여, 신의 아들 고빠까의 질책을 받은 그들 중에
두 명의 신은 그 자리에서 (색계 초선의 중간인 범보천)
사띠를 얻어 범보천 몸을 얻었더랬지만, </범보천 무리에 대한 사띠를 얻었더랬지만 >
그러나 다른 한 명의 신은 감각적 욕망들(욕계)에 머물렀더랬습니다.'
여기서는 '사띠'의 의미는 보류해 두겠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게송에서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들 고따마의 제자들은 고빠까의 질책을 받고
그것을 잘 이해한 뒤 절박함이 생겼다.
“오, 돌아가서 정진합시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의 하인이 되지 맙시다.”라고.'
[tesaṃ duve vīriyamārabhiṃsu, anussaraṃ gotamasāsanāni.
“idheva cittāni virājayitvā, kāmesu ādīnavamaddasaṃsu.]
'그들 가운데 두 명은 정진을 시작하여 고따마의 교법을 계속해서 생각하였다.
바로 여기서 마음을 티끌이 없게 한 뒤 감각적 욕망들에서 위험을 보았다.'
다음과 같은 AI 번역도 가능하지 싶습니다.
그들 중 둘은 노력을 시작했다, 고타마의 가르침들을 기억하면서.
바로 여기에서 [그들의] 마음들을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위험을 그들은 보았다.
앞의 '사띠를 얻어 범보천 몸을'에서
사띠는 붇다 교법(gotamasāsanāni)에 대한 기억의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게송의 내용은
[buddho janindatthi manussaloke,
kāmābhibhū sakyamunīti ñāyati.
tasseva te puttā satiyā vihīnā,
coditā mayā te satimajjhalatthuṃ.]
'부처님은 인간의 세상에서 지배자입니다.
그분은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사꺄무니라고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그분의 아들들인데 마음챙김을 놓아버렸습니다.
저의 질책을 받은 그들은 마음챙김을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마음챙김은 기억을 잊어버렸지만 다시 기억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동일한 경우가
[api ca kho opapātiko opapātikaṃ sāreti –
‘sarasi tvaṃ, mārisa, sarasi tvaṃ, mārisa, yattha mayaṃ pubbe brahmacariyaṃ acarimhā’ti.
So evamāha – ‘sarāmi, mārisa, sarāmi, mārisā’ti.
‘그러나 [먼저 그곳에] 화현한 자가 [나중에 그곳에] 화현한 그에게
'존자여, 당신은 기억 하십니까?
우리는 전생에 청정범행을 닦았지 않습니까?'라고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그러면 그는 '존자여, 기억합니다. 존자여, 기억하구말구요.'라고 말한다.’
[Dandho, bhikkhave, satuppādo; atha kho so satto khippaṃyeva visesagāmī hoti.
Sotānugatānaṃ, bhikkhave, dhammānaṃ, vacasā paricitānaṃ, manasānupekkhitānaṃ,
diṭṭhiyā suppaṭividdhānaṃ ayaṃ catuttho ānisaṃso pāṭikaṅkho.]
'그러면 그에게 느리게 마음챙김이 일어난다. <* 늦게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중생은 재빨리 특별함으로 인도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귀로 들은 것들, 외워서 친숙해진 것들, 마음으로 숙고한 것들,
견해로 완전히 꿰뚫은 것들에서 기대되는 네 번째 이익이다.'
동일한 의미가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tiṇṇaṃ tesaṃ āvasinettha eko,
gandhabbakāyūpagato vasīno.
dve ca sambodhipathānusārino,
devepi hīḷenti samāhitattā.]
'그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아직 여기에 머물면서 간답바 무리에 섞여서 살지만
두 분은 바른 깨달음의 길을 계속해서 생각하여 <*따라 가는 자>
신들조차도 하시(下視)하나니 스스로 삼매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
[“svāhaṃ amūḷhapaññassa , viharaṃ sāsane rato.
ñāyena viharissāmi, sampajāno paṭissato.
“imaṃ kho ahaṃ, bhante, tatiyaṃ atthavasaṃ sampassamāno
evarūpaṃ vedapaṭilābhaṃ somanassapaṭilābhaṃ pavedemi.
그런 저는 미혹하지 않는 통찰지를 지닌 분의 교법을 좋아하며 머물 것이니
바른 방법으로 잘 알아차리고 마음챙겨 머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제가 이러한 감격과 이러한 기쁨을 설하는 세 번째 이익입니다.]
본 경에 나타나는 sati도 기억의 의미입니다.
기억이란 입력의 측면, 저장의 측면, 출력의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행위와 한 말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이고
누군가 한 말(붇다의 교설 등)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입니다.
수행 방법이나 교법을 기억하고 있다가, 기억하고 있는 상태에서
앞으로 할 것을 기억해 내는 것도 사띠이고, 그래서 직접 경험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도 사띠이고,
이와 같이 경험한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어떤 경계에 대할 때 기억해 내는 것도 사띠이지 싶습니다.
앞으로 할 것을 기억해 내는 의미인지, 기억에 의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인지,
주의를 기울여 대상을 대면하는 것인지, 대면하여 경험한 내용을 기억하는 것인지
경험된 기억이 그 다음에도 작동되는 것인지, 그 앞 뒤 문맥에 따라 어감을 헤아려야 하지만
기억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하지 싶습니다.
첫댓글 아라한도 다시는 존재로 돌아오지 않으려면 기억이 있어야 합니다 법에 대한 연기에 대한 세상의 실체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결국 무명으로 돌아간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윤회가 있었다는것도 숙명통으로 과거의 기억을 읽어낼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유일하게 나라고 할만한 것은 오직 기억이지 않을까도 생각됩니다 오온이 나라고 한 기억 때문에 또다시 나를 만들고 윤회하고 오온이 나가 아니다라는 기억이 있기에 또다시 나를 만들지 않을수도 있는것이고
만일 저장된 기억이 사라진다면 숙명통도 있을수 없을것입니다
아래 경을 보면 색수상행식이 기억된다고 합니다 과학이 발달해서 만일 저정보를 그대로 가져다 한 사람의 뇌에 저장하면 그사람은 100% 그 정보의 사람이 되는것이고 그걸 나라고 여기겠죠 결론은 기억도 나라고 할수 없다
해탈은 열반을 의지 하지만 열반은 무엇을 의지 하는가? 물의면 붓다의 답은 야 너무 나갔다 질문의 한계를 모르네 하심
열반은 궁극적 행복이고 오온의 소멸이지만 언어로 표현 불가능
3.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들이든 바라문들이든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 억하는 자들은
모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 [取蘊]를 기억하는 것 이지 그 외 다른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든 다섯가지의 집착된 존 재의 다발(오취온)이나 그들 가운데 어떤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과거에 나는 이러한 물질(몸)을 가졌다.'라고 기억하면서 그는 단지 물질을 기
억한다.
'과거에 나는 이러한 느낌을 가졌다.'라고 기억하면서 그는 단지 느낌을 기억한다.
'과거에 나는 이러한 인식(지각)을 가졌다.'라고 기억하면서 그는 단지 인식을 기억
한다.
‘과거에 나는 이러한 형성을 가졌다.'라고 기억하면서 그는 단지 형성을 기억한다.
‘과거에 나는 이러한 의식을 가졌다.'라고 기억하면서 그는 단지 의식을 기억한 다.”
(과거에 이와 같은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기억한다면 그는 바로 의식을 기억 하는 것이다)
사념처 1: 마음 챙김이란 무엇인가?
37 보리분법 혹은 37 조도품 가운데 항상 제일 먼저 나타나는 가르침은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 四念處' 이다. 마음챙김은 빨리어 사띠sati의 역어 인데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기억' 이다. 그러나 초기 불전에서 사띠는 기억이라는 의미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일때는 주로접두어 아누anu를 붙여 아눗사띠 라는 술어를 사용하거나 사라나sarana라는 단어가 쓰인다. 물론 수행과 관계없는 문맥에서는 사띠가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한국에서 사띠는 마음챙김으로 정착이 되고 있다.
21세기 중국의 안세고安世高 스님은 불설 대안반수의경에서 아나빠나 즉 들숨 날숨을 안반安般으로 음사하고 있으며, 사띠는 념이 아닌 수의守意, 즉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는 기능으로 의역하고 있다. 상윳따니까야 의 '운나 바라문 경' 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바라문이여, 다섯가지 감각기능은 마노意를 의지한다.
마노가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노는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노는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챙김은 무엇을 의지 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해탈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을 의지 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열반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 버렸다.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잡지 못하였구나. 바라문이여,
청정범행을 닦는것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으로 완성되고
열반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다
@연기 이처럼 마음챙김은 마음을 해탈과 연결 시켜주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는 마음챙김을 다음의 다섯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마음챙김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둘째. 마음 챙김은 문지기와 같아서 대상을 통해서 불선법이 일어 나는것을 막는다,
셋째. 마음챙김은 대상을 거머쥐는것이다. 마음챙김으로 대상을 철저하게 거머쥐고 통찰지 로써 관찰한다. 넷째. 마음챙김은 대상에 대한 확립이다. 다섯째. 마음챙김은 마음을 보호한다.
(오늘 아침 ‘입력 – 저장 – 출력’에 대해 생각하다가보니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할 때의 行과 오온(五蘊)에서의 行이 용어는 같지만 뜻이 다르듯이, 경에서 기억하는 일과 관련된 사띠라는 용어와 수행에서 말하는 사띠라는 용어가 단어는 같지만 뜻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