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전에 올린 글이지만 몇가지 보충을 해서 다시 올렸습니다.아버님께 꼭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80년대 좋은 센타들이 몇명 있었지만 오늘은 갑자기 조동우 선수가 생각납니다.
조동우는 57년생으로 경복고,연세대,삼성전자 출신으로 국가대표를 79,81,85년 ABC 대표선수였습니다.
고향은 대구이며,마산고를 다니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농구를 하지 않겠냐는 경복고 감독의 스카우트로 경복고로 전학옵니다.
농구는 그 때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시작했습니다.
누나 조규영도 국가대표 출신이며,조흥은행에서 방열 감독 지도를 받기도 했습니다.
항간에 조동우의 누나가 조영란이란 애기가 있는데 잘못 알려진 얘기며,조영란은 조동우와 동갑입니다.
조영란은 185의 신장으로 골밑 몸싸움에 강하며 80년 홍콩ABC때 중국을 이기는데 크게 기여한 선수입니다.당시 중국을 예상외로 크게 이겼는데 박찬숙만 있고 조영란이 없었다면 중국을 그렇게 크게 이기기 힘들었습니다.이후 조영란이 미국에 이민가고 대표팀에서 빠지면서 한국은 중국과의 골밑대결에서 고전하게 됩니다.물론 당시 한국이 이긴적이 더 많기는 하지만...
조영란이 이민가고 한국은 후임자를 찾아야 하는데 당시 후임자로 거론된 적이 있는 선수가 한국화장품의 전미애였습니다.
그런데 전미애는 현재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님에게 시집을 일찍가는 바람에 대표팀 선발은 무산되었습니다.(이 부분은 정정하겠습니다.
다른 농구팬이 답글을 달아 주셨는데 전미애가 대표팀으로 선발이 되었고 존스배에서 활약했는데 일찍 시집가는 관계로 선수생활을 오래하지 않았습니다.)
조동우는 나이상으로는 이충희 1년 선배입니다.
실업 입단할 때 억대 연봉의 시초는 이충희가 아니고 조동우입니다.
삼성에서는 조동우를 스카우트하고 1년 후에 이충희가 현대에 간 후 이런말을 합니다.
"결코 조동우를 이충희와 바꾸지 않겠다".
이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센타가 귀했고,슈터들은 많이 있기 때문에 삼성의 입장에서는 조동우가 이충희보다 더 소중하다 라는 의미로 보여집니다.
전 농구인과 농구팬들이 통탄해 하는 86년 아시안게임 중국전과 87년 ABC중국전은 조동우가 있었으면 이겼을 경기입니다.
중국전은 TV중계 안 한 경기 빼고는 한 경기도 빼지 않고 다 보았습니다.
86년 아시안 게임 중국전에서 한국은 10점 이상 중국에 앞서 가다가 중국의 중거리 슈터 장용준(188)의 3점슛 4방으로 역전패를 하게 됩니다.
경기 종료 몇분 안남겨 놓고 한국이 점수가 3-5점 정도 뒤져있었을 때 김유택이 자유투를 얻었는데 림도 안맞고 자유투를 실패합니다.
이 실패로 한국은 경기를 승리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유택이 소속팀 체육관에서 팀 동료들이 자는 시간에 나와서 자유투 연습을 했는데 공이 튀는 소리가 나면 동료들이 잠에서 깰까봐 자유투를 던지고 빨리 림 근처로 달려가 공이 튀지 않게 바로 잡았다는 일화가 방열 교수님이 쓰신 책에 나옵니다.
방열 교수님이 당시 기아 감독이었습니다.
김유택은 이 자유투 연습의 결과로 경기 중 자유투 성공률이 높아집니다.
제 기억에 큰 경기에서 자유투를 실패하는 모습을 별로 못 보았습니다.
얘기가 잠깐 옆으로 흘렀네요.
한국은 86년 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주전센타들의 파울트러블(아마 5반칙 퇴장으로 기억)로 김성욱(192)이 들어와서 종료직전에 3점슛을 날리는데 실패합니다.
그 상황을 설명하면 종료직전 한국이 3점을 뒤져 있었는데 중국 수비수 3명이 이충희를 에워 싸서 노랑머리 김성욱에 노마크 3점슛 찬스가 났는데 버저 비터와 동시에 3점슛을 던졌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김성욱은 슈터가 아니니 김성욱을 탓할일은 아닙니다.
86년 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패배한 후 이충희가 조동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이 있었으면 중국을 이겼을 텐데...."
(조동우가 이충희의 1년 선배입니다.조동우와 이충희는 한번도 같은 팀에서 선수생활을 한적이 없었고 그나마 같은 팀에서 선수생활을 한적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대표팀에서입니다.
당시 국가대표 농구선수의 연금지급 방식은 아시안게임에서 두번 연달아 금메달을 따면 연금을 지급받는 방식이었습니다.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중국을 이기고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연금을 지급받을 수 있었고 모든 당시 대부분의 농구인은 직전 벌어진 국제경기인 85년 ABC에서 한국이 중국을 이겼고,한국의 안방에서 경기가 벌어지므로 당연히 한국이 우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우승을 했으면 연금해당이 되는 선수는 이충희,박인규였는데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습니다.)
당시 조동우가 86년 아시안게임에서 빠진 이유는 국가대표에서 연습경기를 하다가 아군인 이문규에게 깔려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는데 이문규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팀 선수에게 밀려 넘어져서 그런 일이 벌어졌고,조동우는 큰 부상을 입고 대표팀에서 빠지며 그 자리에 역시 무릎수술을 받고 재활중이던 임정명이 들어옵니다.
이런 일화를 보더라도 조동우의 존재감은 상당히 컸습니다.
한국은 중국과의 경기에서 첫번째 중국의 공격이 실패해서 리바운드돼서 나오면 그 수비 리바운드를 잡지 못하고 중국 선수에게 빼았기고 그것을 중국선수가 세컨샷을 성공시키는 문제점을 늘 보여왔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80년대 내내 이어집니다.
조동우는 신장이 197입니다. 맨발로 197입니다.농구화를 신으면 200에 육박합니다.
적어도 조동우가 있었다면 김유택과 더불어 쌍돗대를 형성했더라면 중국팀의 세컨샷을 허용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을 테고 한국은 통한의 역전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란 것입니다.
87년 ABC때도 중국에게 역전패를 당하는데 어렵게 득점하고 쉽게 실점하는 하는 것 때문이었지요.
당시는 이문규,한기범이 교대로 김유택의 파트너로 뛰었는데 이문규는 외곽슛과 투지는 있으나 190으로 신장이 작고 한기범은 207로 신장은 크나 너무 마르고 투지가 부족하고...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조동우가 있었으면 중국을 이겼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아니! 이겼습니다.
한국농구 역사적으로 남겨두고 기억해 두어야 할 이런 경기를 TV중계 하지 않았던 것이 안타깝습니다.
방송사 입장도 이해합니다.
직전에 벌어졌던 83년 ABC 중국과의 대결에서 63:92로 크게 졌으니 중계 안 한 것이 방송사 입장에서는 오히려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한차원 높게 생각한다면 그동안 한국을 괴롭혀 왔던 238의 거인 무티에추가 은퇴한 이후 첫번째 대결이므로 한국이 이길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중계를 했다면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도 합니다.
조동우가 대표팀으로 선발되고 뛰었던 85년 말레이지아 ABC중국전은 한국이 중국을 이겼습니다.
이 경기는 TV중계가 안되어서 당시 대표팀 코치였던 정광석 감독님께 22년이 지난 2007년 12월6일에 잠실 학생체욱관에서 여쭤 보았는데 중국전 베스트 5는 허재-이충희-이문규-김유택-조동우 라고 하셨습니다.
김현준이 이충희의 교체멤버로 뛰었고,이원우도 가드로 자주 기용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210센티미터가 넘는 선수가 1명(이름은 모릅니다.) 베스트 5로 뛰었는데 하여튼 한국은 조동우,김유택의 포스트진들이 잘 싸우고 74:65로 이겼습니다.
한 아마농구 평론가님의 조사에 의하면 중국과의 경기에서 한국이 승리한 경기중 한국이 전반전을 앞섰던 유일한 경기랍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한국은 중국에 처음부터 앞서 나갔고 한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3점슛 제도가 국제경기에 처음으로 도입되고 첫번째로 중국과 맞붙은 대결인데 이충희,허재,김현준등 슈터들이 컨디션이 좋아서 슛이 잘 들어갔는데,그 밑바탕에는 조동우,김유택의 포스트맨들이 중국과의 골밑대결에서 밀리지 않고 오히려 다소 근소하게나마 우세했기 때문입니다.
보충설명을 하자면 예를들어 이충희가 슛을 던질 때 두가지의 마음으로 슛을 던진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이 슛을 던져서 안들어가고 중국선수에게 리바운드를 뺏기면 어찌하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던질때와
"아니야 내가 던져서 안들어가도 골밑에서 동우형이나 유택이가 리바운드를 잡아 줄꺼야"라는 믿음을 가지고 던질 때를 비교하자면 후자가 훨씬 슛적중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것이 슈터도 중요하지만 포스트맨들도 중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85년 ABC부터 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부상을 당할 때 까지 당시 조동우는 부상없이 몸상태가 완벽했습니다.아픈데가 없었습니다.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87년 방콕 ABC때도 조동우가 있었다면 중국을 이겼을 거고 그랬다면 조동우의 존재감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많은 농구팬들이 조동우를 은퇴후에도 더 많이 기억했을 거구요.
80년대 중국과의 상대전적도 앞섰을 테고요.
79년 나고야 ABC 일본전을 한국이 패배하는데 일본전은 TV로 중계했습니다.
제 기억은 이 일본전은 조동우가 신선우보다 더 장시간 기용이 되었습니다.
중국전은 중계하지 않았는데
한국은 79년 나고야 ABC 중국전에서 중국에 불과 6점차로 패배합니다.(94:88로 기억합니다.)
238의 장신 무티에추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그것도 경기종료 몇 분 안남겨놓고 역전패를 합니다.
당시 한국의 센타진은 조동우,신선우,임정명 등이 있었는데 이 세 선수가 무티에추를 수비하느라 얼마나 수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83년 홍콩 ABC를 끝으로 한국에게는 지긋지긋했던 중국의 무티에추(238)가 은퇴합니다
아 또 옆으로 얘기가 샜군요.
80년대 중반 중국 센타진 얘깁니다.
당시 중국 센타진은 송리강,왕리빈,후앙윤롱 등의 신예들이었는데 2미터가 조금 넘는 선수들입니다.
조동우와 비슷한 기량의 소유자들입니다.결코 조동우보다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이 아닙니다.
아시아 탑 클래스인 중국 센타들과 비슷한 기량이라면 조동우는 분명 좋은 선수입니다.
조동우 신장도 197이니 2미터가 조금 넘는 신장으로 제압하지도 못했을 거고요.
88년 서울 올림픽 동영상 한국:중국전을 보면 아실 겁니다.
중국 센타진은 김유택,이문규가 버티는 한국 포스트진을 결코 압도하지 못합니다.
김유택은 말랐으나 승부욕과 스피드,유연성으로 극복했고,이문규는 190으로 신장이 작았으나 투지로서 자신의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중국을 이기느냐 못이기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조동우가 김유택과 같이 86,87년 중국전에 대표팀 4,5번을 같이 형성했더라면 허재,이충희,김현준의 1,2,3번의 근소한 우세를 바탕으로 중국을 무조건 이겼을 것이고, 80년대 중국과의 상대전적도 앞섰을 것입니다.
왜 한국의 1,2,3번을 중국보다 확연한 우세가 아닌 근소한 우세라고 얘기하냐면
중국의 1번 공루밍은 신장이 172로 작지만 리딩이 좋고 빠르고 속공 가담능력이 탁월합니다.
공루밍은 현 중국 포인트 가드인 리우웨이(190)보다는 리딩에 있어서는 몇 등급 위인 선수였습니다.
2,3번인 장용준,리야광은 신장이 188로 이충희,김현준보다 크고 이충희,김현준보다 외곽슛이 많이 떨어지는 선수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꿈에서라도 이 대표팀 라인업을 보고 싶습니다.
허재-이충희-김현준-김유택-조동우
조동우가 중국과의 대결,더 자세히 말하자면 238의 무티에추와의 대결에서 제대로 수비못하고 조기 파울트러블에 걸렸다는 부분 때문에 평가절하 되는 면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 대표팀 센타 중에 238의 무티에추를 제대로 막은 선수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무티에추는 신장이 크므로 세계무대에 내 놓아도 그 선수를 수비할 수 있는 선수는 몇 안되었습니다.
일본의 오카야마(228)은 무티에추보다 기량이 약간 처지고,북한의 이명훈(232)은 무티에추와 대결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 이명훈은 90년대 선수라서 마주칠 일이 없었겠군요.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중국전 때는 신선우가 맹활약했는데 상대는 무티에추가 아니고 228의 한평산이었습니다.한평산은 무티에추보다 한 등급 아래의 선수였습니다.
무티에추는 몸무게가 좀 나가서 몸빵으로 밀어 붙였지만 한평산은 마른 체형의 선수였습니다.
그렇다고 신선우의 활약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동우나 신선우 다 좋은 선수였습니다.
중국은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에 패배한 후 대표팀 은퇴를 한 무티에추를 다시 대표팀에 불러 들입니다.
아! 한가지 빠뜨렸네요.
87년 농구대잔치에서 삼성전자가 우승할 때 조동우도 우승 멤버 중의 한 명입니다.
조동우는 매너도 상당히 좋은 선수였습니다.
한번도 상대팀 선수와 시비에 휘말린 적이 없었습니다.
성격적으로 순한 선수였습니다.
이 순한 성격이 투쟁심을 필요로 하는 농구경기에서 마이너스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조동우가 보고 싶습니다.
더불어 김유택도 보고 싶습니다.
이 분들 핸드폰 번호 좀 남겨주세요.
만나뵙고 소주한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혹시 제 글을 보시면 연락한번 주시기 바랍니다.
제 이메일 주소는
younger30@naver.com입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전 어릴때 무티에추란 이름도 모르고 무지하게 큰 선수네~~반칙이다~~ 이러며 봤던 기억이 있네요. 무티에추가 지금 온다면 어느 정도 할까요? 키가 무려 238이라니.
당시의 무티에추는 굳이 센타 세계랭킹을 매겨보자면 랭킹 5위안에는 들어갈 겁니다. 아시아에는 그 선수를 막을 선수는 당시에 일본의 오카야마(228)정도입니다.79년 ABC결승에서 중국의 무티에추와 일본의 오카야마가 맞대결을 펼치는데 한국 경기가 아니므로 중계가 되지 않았습니다.무티에추의 중국이 오카야마의 일본을 10점 이상차로 이긴 것으로 보아 무티에추의 기량이 더 좋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당시의 무티에추를 지금의 서장훈,김주성 앞에 데리고 와서 맞대결을 하라고 하면 무티에추는 아무 것도 못할 것입니다.키는 크지만 느렸고 야오밍처럼 출중한 기량을 가지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장훈과 김주성의 스피드 앞에 무티에추는 꿔다 논 보릿자루 신세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여러분들 90년대의 북한의 이명훈(234)을 아실 것입니다. 두 선수를 굳이 비교하자면 무티에추가 이명훈보다 기량이 약간 더 좋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런 올드팬의 생생한 기록은 참 찾아보기 힘드네요^^
kr3456님! 위의 제 이메일로 연락처를 남겨주세요.제가 전에 약속드린 것이 있어서요.
86 아시아 게임 중국전때 허재가 5분만에 부상으로 코트에 나간 것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죠. 허재만 있었어도..
그것을 기억하시는군요.맞습니다.
조동우선수가 간염이었나요. 하여간 그것때문에 전성기가 짧았죠. 한국선수중 공식 경기중 첫 덩크슛을 한 선수로도 기억되는데요.
한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선수네요.............. 조동기는 아는데...........;;;;;;;;;; 글보면 김유택정도 되는거 같은데....... 아쉽네요.............................................
저두 조동기인줄... 기아에서 뛰던.. 예전에 꼬마때 애들이랑 농구할때 이충희~~ 이러면서 슛던지던게 생각나네요.. 허재-이충희-김유택 <--요라인 무섭네요 ㅎ 이문규와 조동우는 본적이.. ^^;
전통의 라이벌이었던 현대의 박종천 이장수 이문규 등의 인사이드 라인업과 삼성의 임정명 조동우 안준호 등의 농대 초창기 경기들이 생각나는군요. 인사이드에서는 확실히 조동우의 삼성이 우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박종천이 194 정도의 신장으로 조동우와 매치업이 되었지만 부상이 잦았고 이문규 이장수 등은 조동우에 비해 신장이나 파워에서 밀렸던 것 같구요. 외곽에서도 박수교 이원우 이충희 대 신동찬 김현준 박인규의 대결이 불꽃 튀었었죠.
개인적으로도 그 시절이 기아,삼성,현대의 3강 시대보다 더 재미있었어요.
무태추와 오카야마의 83년 ABC 대결은 우리나라 TV에서 중계했습니다. 둘다 기동력이 무지 떨어지는 선수였죠. 물론 40분 내내 뛰지 못하고요. 무태추는 당시 서서 덩크슛하는 선수였지만 기술이나 다른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자 농구의 진월방을 박찬숙이 충분히 막았듯이 서장훈이 10년만 일찍 나왔으면 막았을 듯...
86년 아시안 게임은 아마 조동우가 있으면 이겼을 지도 모릅니다. 중국 센터진의 높이가 낮았으니까요. 제 기억으로는 왕리빈과 송타오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둘다 크기 보다는 빠르고 운동능력이 좋은 선수였죠. 외곽도 갖춘... 당시 결승전은 직접가서 봤는데 마지막 3점차일 때 김현준에게 2명, 이충희에게 3명이 붙었는데 왜 인사이드더 2명을 넣었으며 당시 슛감각이 가장 좋았던 이민현이 아웃오브바운드를 나갔는지가 의문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당시 왕리빈 선수와 조동우 선수 간의 기량차는 상당했었습니다. 중국팀에서 왕리빈을 효과적으로 활용을 못한 탓이지, 개인기량으로만 따진다면 90년대까지의 중국(중공) 팀 빅맨들 중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88 올림픽 때는 김유택 선수가 이 선수를 상대로 참 잘해줬어요. 오히려 김유택같이 스피드와 유연성이 좋은 선수가 왕리빈에게 상성을 보일 수 있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