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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어린이답다는 말
출처 경향신문 : https://www.khan.co.kr/article/202605132006005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사이, 아직 초등학생이니 자신은 어린이가 맞다고 주장하는 조카를 학원에서 데려오던 길이었다. 용돈으로 어린이날을 축하받았다는 녀석에게 어버이날 준비는 했느냐고 물었다. 학교에서 다 같이 부모님께 드릴 감사 카드를 만들었단다.
“고모, 그런데 애들이 편지를 못 쓰더라?” 어깨를 으쓱하는 아이에게 “너는, 잘 썼어?” 물으니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있는 그대로 쓰면 되지! 뭐 어려워?”
야무지기가 원! ‘어린이답다’ 하며 볼을 쓰다듬어 주는데, 이내 마음이 켕겼다. 어린이다운 게 뭘까? 편지를 쓰기 어려워했다는 녀석의 친구들은 무엇 때문에 주저했을까? 있는 그대로 쓰면 된다는 조카의 명랑한 확신은 정말 어린이다운 모습인 걸까?
아이들이 ‘인정받는’ 어린이다움에는 어른의 기대가 녹아 있다. <제국의 어린이들>에는 이 관계가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책은 1938년과 1939년에 열린 제1·2회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수상작을 바탕으로, 조선에 살던 아이들의 세계를 펼친다.
책에는 조선인 어린이와 조선에 살던 ‘재조’ 일본인 어린이의 글이 교차한다. 일본인 어린이의 글에서는 제국의 주체로 길러지는 감각이, 조선인 어린이의 글에서는 순응하는 ‘착한 어린이’의 얼굴이 읽힌다.
일례로 충남에 살던 한 조선인 아이가 총독부에 근무하는 경성의 숙부댁에 다녀와서 쓴 ‘경성구경’을 보면, 경성에 도착해 이동하던 중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물은 아이는 “경성에 오면 먼저 조선신궁으로 가서 참배를 하는 거다”라는 숙부의 말을 듣는다. 아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너무 창피했다. 숙부는 역시 훌륭하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아이의 감정은 아이의 것이지만, 그 감정이 향해야 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당시에는 학교 문턱에도 닿지 못한 채 자기 일상을 글로 남길 기회조차 갖지 못한 아이들이 더 많았다. 그들에게 어린이다움이 없었을 리 없다. 다만 기록되지 못한 채 흩어졌다.
시대가 흘러도 어린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은 여전하다. 지난달 취재차 방문한 제주의 한 치유농장에서 들은 이야기가 질문을 현재로 불러왔다. 농장에서는 초등학교 방과후아카데미 친구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돌담 두른 감귤밭에서 다회차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서 농부는 아이들에게 우선 감귤밭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가져보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제안한다. 귤나무가 잘 자라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햇살, 바람, 흙, 물, 곤충, 돌보는 사람까지 아이들은 귤나무를 살리는 것들을 곧잘 찾아낸다. 그런데 “그럼 나를 잘 자라게 해주는 것은 뭘까?” 하고 물으면 주위가 고요해지곤 한다. ‘생각해본 적 없어요’ ‘잘 모르겠어요’ 정도는 예상했지만, “안 좋은 건 많은데, 그건 안 돼요?”라는 말 앞에서 농부는 멈칫할 수밖에 없다.
어버이날 카드에 무얼 써야 할지 망설인 조카의 친구들과, ‘나를 잘 자라게 해주는 것’을 선뜻 떠올리지 못한 아이들을 그저 조심성이 많거나 생각이 깊은 아이들이라고만 넘기기에는 어쩐지 부끄러워진다.
다행히 농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듭되며 아이들은 조금씩 달라졌다고 했다. 자신을 자라게 하는 존재로 농장과 농부를 꼽으며,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좋고 기다려진다는 아이도 생겼다. <제국의 어린이들>의 저자 이영은이 “하지만 어린이들은 자신이 어느 지역에 살건, 어떤 계급에 속하건 즐거운 일상을 보낼 수 있는 신비한 존재”라고 한 것처럼, 아이들에게는 어떤 시대, 어떤 어른도 끝내 다 길들일 수 없는 힘이 있다.
아이는 부모나 사회의 기대에 맞춰 완성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저마다의 감각과 속도로 자라는 존재다. 그렇다면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라도록 질문을 곁에 놓아두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정답을 맞히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귤나무가 자라는 조건을 찾듯 자신을 자라게 하는 것들을 아이 스스로 알아차리게 하는 질문 말이다. 아무래도 꽤 성가신 고모가 될 것 같다.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빛명상
순수한 마음을
더욱 강렬하게
감싸는
빛VIIT의 놀라운 힘
그러면 빛VIIT을 잘 받기위한 자세는 어떨까? 우선 바닥이나 의자에 편안히 앉는다. 허리는 곧게 펴고 두 눈은 살짝 감는다. 양손을 어깨 너비로 벌리고 살짝 들어 올려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한다. 이렇게 하면 손을 통해 보다 쉽게 빛VIIT을 느낄 수 있다. 이때,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마음가짐이다. 아무리 좋은 자세를 취하고, 빛VIIT봉입물과 인터넷 빛VIIT명상을 이용해도 머릿속에 잡념이 생기고, 내면에 집중하지 못하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학회장님은 이런 일화를 들여주었다.
“하루는 열 명의 사람이 모인자리에서 빛VIIT을 주었어요.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더니 신비로운 현상이 나와 있었습니다. 사진 속에서 나는 뒷줄에 앉은 사람들 앞을 지나며 빛VIIT을 펼치고 있는데 빛VIIT줄기들은 앞줄에 앉은 어린아이와 한 아주머니 쪽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어요. 그 아주머니는 평소에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빛VIIT을 받고 나서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어요.”
이처럼 빛VIIT이 유독 어린아이와 아주머니에게 향했던 이유는 뭘까? 이들은 마음가짐이 아주 순수(純粹)했기 때문이다. 동심을 가진 어린아이는 빛VIIT을 준다는 선의를 추호의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아주머니는 학회장님의 빛VIIT을 받으면 틀림없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믿음과 걷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잡념과 의심 대신에 긍정과 확신, 간절함이 자리 잡은 순수한 마음이 있었다.
학회장님이 뒷줄의 사람들을 향해 빛을 펼치는데 빛줄기들은 앞줄 사람들을 향해 뻗어가고 있다.
이처럼 어린아이로 대표되는 ‘순수’의 뜻은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는 마음’이다. 이러한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예수와 노자 그리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매우 중요시했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나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 『마태복음』 18장
기를 모아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같이 할 수 있는가? - 『노자』 10장
어린이는 신이 인간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보낸 사신이다. - 타고르
아이와 같이 있으면 영혼이 치료된다. - 도스토옙스키
이상과 같이 당신은 세상 그 어느 명상법보다 간편하게 빛VIIT명상을 할 수 있다. 하루 5~10분만 빛VIIT명상을 하면 초광력超光力, 빛VIIT과의 교류를 통해 엄청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은 앞서 학회장님이 빛VIIT을 펼쳐서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잘 기억할 것이다. 이제 당신은 빛VIIT명상을 통해 그 초자연적인 현상 속의 당사자가 된다.
출처 : 해독제 2012년 7월 7일 초판 1쇄 P. 125~131
사진출처 : 빛VIIT으로 오는 우주의 힘 초광력 P. 123
사진출처 : 빛VIIT으로 오는 우주의 힘 초광력 P. 125
대꼬바리 걸뱅이
오늘은 어릴 적 불알 친구가 찾아왔다. 이름이 기억이 날 듯 하면서 떠오르지 않았다. 그 친구는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서 혹시나 하고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는 옛날 이야기를 했다. 나랑 같이 하교하는 길이었는데, 거지 아이가 살이 다 드러나는 헤진 옷을 입고 달달 떨면서 밥풀이 말라붙은 깡통을 앞에 놓고, 오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각설이 타령’으로 끼니를 때우고, 틈틈이 동냥을 하거나 남의 집 일을 해 주곤 했다.
그 아이는 이름이 없고 항상 대꼬바리(긴 담뱃대)를 허리춤에 차고 다녀, 우리는 그 아이를 ‘대꼬바리 걸뱅이’라고 불렀다. 그 아이가 불렀던 각설이 타령은 전설의 이야기가 되었고, 가끔 문화극장에서 ‘극’으로 보는 각설이 타령은 그때만큼 구성지지가 않았다. 정말 애절하게 호소하던 그 눈빛과 휘굽은 숟가락으로 두들기던 깡통 소리가 아니었다.
그 친구는 지난 시절을 되새기면서 그 아이가 추워하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가 내가 도로 되돌아가서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 아이에게 덮어 주더라고 했다. 그 당시 외투 하나 얻어 입으려면 위의 형들에서 나까지 몇 차례를 거쳐야 했는데, 그것을 선뜻 벗어 주고 왔던 것이었다.
반 아이 중에서 항상 도시락을 갖고 다니지 않는 몇 명 아이들에게는 소나무 가지 두 개씩을 꺾어주고, 도시락 뚜껑을 수만큼 거두어서 주고는 내가 앞장서고 뒤따르게 하여 한두 숟가락의 밥과 반찬을 거두어서 먹게 하였다고 했다.
그 친구는 한 동네 살았던 친구였는데, 나와 우리 집에 대하여 많은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때로는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서는 동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한 개씩 나눠주기도 하고, 마당 청소를 시키고 청마루를 닦게 한 후 강냉이 떡을 나눠 주다가 꾸지람을 듣는 것도 많이 보았다고 했다.
하루는 학교에서 우유 배급을 할 때는 없는 집 아이에게 한 쪽씩 더 부어 주다가, 끝에 몇 명이 남았을 때 바닥이 나자 내 것을 도로 붓고 담임 선생님이 탁자 안에 감춰 놓은 몫까지 끄집어내어 나누어 주고, 혼자 남아 벌 청소를 했다. 그런데 두 바가지씩 받은 아이들이 모두 남아 같이 청소를 한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두꺼비(담임 선생님 별명)가 와서 엉엉 울다가 온 교실 아이들이 우유 배급 받은 것을 내놓고 함께 울었던 이야기도 기억해 냈다.
아마 어린 시절에도 나는 약간 이 분야에 끼가 있었나 보다. 그 친구는 “어린 시절,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며 커서 어른이 되면 뭐가 돼도 될 것이라고들 했다.”고 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역시 이 친구가 틀림없다는 생각에 달려왔다고 했다.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남을 도와주면 그것이 언젠가는 나에게, 내 후손에게 열 배, 백 배가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내가 남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도와주기는커녕 그 위치를 역이용할 때에는 후일 내가 그 위치를 떠난 후에 나와 내 후손에게 역시 열 배, 백 배의 아픔과 통한이 올 것이다. 그래서 좋은 일 한답시고 떠벌리지 말고, 좋은 위치에 있을 때 많이 베풀어 주라고 했던가?
어른이 된 지금도 그때 그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큰 부자가 되어 어떻게 해보고 싶었던 동심의 꿈은 전혀 딴 방향이 되어, 우주의 힘 초광력超光力을 베풀고 있다. 이 힘을 개인의 사리사욕에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허세를 부리는 사람도 많았다. 사랑같이 감미로운 유혹으로 접근해 오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는 이 힘을 자기의 것으로 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세우는 졸부도 있었다. 어떤 동작에서 이 힘이 나오는가 하여 초광력超光力을 받으면서 눈을 빠끔히 뜨고 보다가, 내 눈과 마주치자 얼른 감아 버리는 스님이나 기공사도 있었다.
그러나 이 힘은 세상의 명예나 권력, 부, 잔재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10년, 20년에 걸쳐 안 해본 것이 없고, 안 가본 곳이 없고, 있는 재산 다 날렸다는 사람들 중에도 이 힘 한 번만 받으면 금방 기적이 일어나는 줄 착각하고 오는 사람도 많다. 물론 첫 번에 기적도 자주 일어난다. 그 경우는 그 사람이 그분을 향한 진실하고 진정한 마음을 가졌을 때일 것이다.
혹시나 하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오면 ‘역시나’가 된다. 우주의 힘, 초광력超光力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진실을 보고 있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이 빈손으로 와도 그분은 기꺼이 맞아 주시고 말끔히 이루어 주시고 기쁨과 행복의 새 출발을 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순수한 본심을 원한다. 이 시간부터라도 노력해 보자. 새 마음으로 새롭게 선하게 살자.
출처 : 빛VIIT으로 오는 우주의 힘 초광력超光力
1996.07.10. 1판 1쇄 P. 153~155
동심은 최고의 창조력
모든 아이들이 일등을 하는 사회는 있을 수 없고 하나의 잣대만을 놓고 하는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은 소수 일 뿐이다. 한 명의 승리자를 만들기 위해 나머지 아홉 명은 패자로 만들어 버리는 교육은 결국 사회전체를 패배자의 집단으로 만들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에 전능한 능력자가 아니라 한 사회의 훌륭한 시민으로서 성실하고 진솔하게 삶을 꾸려 나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아이들의 맑고 투명한 마음속에 자꾸만 어른들의 관념을 애써 주입한다면 아이는 새로운 발상과 창조를 하지 못하고 점점 어둡고 무겁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틀에 박힌 지식위주의 교육보다 더 앞서 행해져야 하는 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연의 소중함과 마음의 순수함을 먼저 알게 하는 일이다. 지식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교육은 결국 아이들의 감성과 사고를 메마르게 하고 자연과 동떨어진 기계인간을 양성할 뿐이다.
넓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우리 자신들은 물론 아이들의 운명은 벌써 거대한 우주의 스케줄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고 거부하려고 해도 사과나무는 사과나무로, 감나무는 감나무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과나무의 주인이 그 나무에 다른 과일 나무의 가지를 접붙이기를 하듯 근본적으로 해결책이 없는 한 기존의 그릇을 거스르거나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아이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지 않고 방관하거나 완전 방목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사과나무라 하더라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튼튼한 뿌리와 비옥한 거름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타고난 틀 안에서도 최상의 열매를 맺어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선조와 아이들의 중간에 서있는 우리들이 그 매개자로서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부모란 바로 이 매개자의 입장에서 아이들이 타고난 본연의 순수함이 상처받지 않고 잘자라 향기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아이들의 삶을 비옥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원천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에서 온다. 이러한 근본 바탕이 충실히 지켜지는 상태에서 교육이 행해져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아이들을 올바르게 창조적인 미래의 일꾼으로 성장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제 답답한 과외 공부를 하기 전에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아이들에게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고 인정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어떨까. 적어도 하루수업,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3분 만이라도 빛VIIT명상을 하게 하면 긍정적인 에너지와 활력을 접하고 학교 전체가 활력에 넘치게 될 것은 물론 우리나라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창조,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는 발상은 자유로움에서 나온다. 마음이 갇혀있지 않고 자유로운 순간, 그 순수한 마음에 지혜가 깃드는 것이다. 더 이상 하나의 잣대로 아이들을 옭아매려하지 말고 한 아이, 한 아이의 마음에 깃든 그 고유의 색깔, 반짝거리는 빛VIIT알갱이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이야 말로 최고의 창조력을 낳는 기본 바탕이다.
출처 : 물음표(?) 2005/07/10 초판2쇄 P.160~164 中
첫댓글 순수 간절함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순수함에 담기는 빛,
아이들의 마음이 무한히 자라도록 바라볼 수 있는 어른,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게 됩니다 .
감사합니다 .
감사드립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빛을 담을 수
있도록 늘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순수한 동심의 소중함...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잘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순수한 동심의 창의성,
감사합니다.
파라과이 어린이날은 8월 16일입니다. 이유는? 검색해 보심 압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처럼 빛VIIT이 유독 어린아이와 아주머니에게 향했던 이유는 뭘까?
이들에게는 잡념과 의심 대신에 긍정과 확신, 간절함이 자리 잡은 순수함이 있었다.
깨우침의 귀한 빛글, 마음에 담습니다~ 감사합니다~
동심은 최고의 창조력...빛책속의 귀한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빛 의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