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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주장은 대부분 유언비어를 마치 진실처럼 호도하는 것입니다. 군관학교 입학시의 혈서사건이나 졸업시의 답사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만들기 위해 근거없는 개인의 회고담을 역사적 사실처럼 포장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역사의식으로 박정희가 친일파라면 박정희는 광복군 제2중대장이고 따라서 독립투사입니다. 족보도 밝혀지지 않은 자가 독립투사후손이라고 사칭하는 이 시대의 기준을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박정희의 광복군 경력은 재해석되어야 마땅합니다.
[근거 1]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 세사람이 제8단을 떠나 북경에 도착한 것은 1945년 9월 21일이었다. 북평(北平:북경)에 도착한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 세 사람은 귀국선을 타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을 알았다. 북평에서 가까운 항구인 천진(天津)에는 부산과 인천으로 이어지는 귀국선이 있 었지만 엄청난 귀국인파로 인해 당분간은 승선이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북경과 같은 유서깊고 큰 도시에서 무작정 무위도식할 수는 없었다. 북평에는 이 무렵 만주군이나 일본군에 복무하다 중국 각지에서 몰려든 장병들이 광복군(光復軍)에 편입하고 있었다.
이 조직이 얼마 뒤 국내에 들어가면 그대로 국군이 된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편입을 희망하던 실정이었다. 새 광복군의 총사령은 광복군 주북평판사처장(駐北平辦事處長)인 중국군 소장 출신인 최용덕(崔用德, 뒷날 공군참모총장)장군 이었고, 연락책임자는 중국군 장교출신인 이성가(李成佳, 뒷날 예비역 육군소장) 중위였다. 박, 신, 이 세사람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뒤늦게나마 조국을 위한다는 뜻에서 이 새 광복군에 가입하기로 결정하고, 동포가 경영하는 중국음식점인 덕경루(德慶樓)의 안내로 광복군에 정식가입하기로 이른다.
광복군 제3지대(지대장 백파 김학규장군) 주평진대대는 다음과 같은 간부진을 구성하게 된다. 대대장 신현준(만군 상위), 제1중대장 이주일(만군 중위), 제2중대장 박정희(만군중위) 제3중대장 윤영구(尹暎九, 학병출신, 일군소위), 정훈관 정필선(鄭弼善.광복군 공작원)이었다. 박정희 등이 소속해 있던 새 광복군은 10만명의 대군을 목표로 편성해 있다가 해방된 조국으로 보무당당하게 개선하겠다는 것이 광복군총사령 최용덕장군 등의 계획이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조선을 배후조종하고 있던 소련측은 미국의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방해하고 반대했다. 1945년 12월10일 오전 11시 쯤, 광복군 평진대대는 야외훈련중 무장한 중국군부대의 습격을 받고 전원 체포된다. 체포된 이들은 북신교(北新橋)의 막사까지 연행되어 부대원들은 모두 해산되고 간부급들은 영창에 감금당한다. 몇시간 뒤 모두 풀려났지만 부대내에 침투한 연안파(延安派.중국 공산당계)들의 모함의 결과였음이 판명된다. 동족간의 이념투쟁은 구걸의 삶 을 이어가던 남의 나라 땅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보기였다. 이 일이 있은 얼마 뒤 박정희를 중대장동무라고 부르며 시비를 걸어오는 연안계 부대원들의 도전을 받는 일도 있게 된다. 따라서 박정희는 1946년4 월29일 북경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좌익사상에 대해서는 최소한 냉소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근거 2]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은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박정희를 소개받은 김정균은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보고 박정희를 김구 선생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 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릅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 후에 김정균에게 말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고합니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습니다. 그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안 됬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 것이다 라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군관학교를 보내려고 하였으나 박정희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 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박정희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 때도 김정균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에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정균과 박정희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근거 3]
(한국 광복군 창설)
1937 년 7 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항전을 개시 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민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 혁명당이 쭉쭉이 분열되고 조선 혁명당이 새로 생기고,미주 대한독립단이 쇠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 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 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 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 독립당 및 미주와 해외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이하 중략)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을 다해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중요 인사를 초청해서 한국 광복군 설립식을 거행 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있던 조성환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제 1지대를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가명) 제 2지대장을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 학규 3지대장을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 등의 한국 청년 전지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5 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사령부 정치부에 일보고 있던 김 문호를 한국 광복군 정모처 제 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조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광복군 상해 임정의 일체 비용은 미주,멕시코,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 총회에서 10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1944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지대를 찾어온 것을 지대장 김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이하 중략)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이하 중략) (백범의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군대에서 탈출하여 온 때는 바로 1944년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김정균의 일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근거 4]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습니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한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정희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공개된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임정 당시 가명 안훈·安勳)의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 증빙 문건 등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후의 생존자였던 조경한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주계장(정훈장교)등 임시정부핵심요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구체적인 지위와 활동상을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지대 3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제8 여단에 근무하고 있던 시기와 매우 일치합니다)
본토(대한제국)에서는 마침 1943년 8월 1일 조선인 학도의용군 지원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수많은 조선인 청년(4,385명)이 남양과 중국 전선에 배치 되었고 그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1944 년 7월에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합니다.
그동안 박 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시절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아니다라는 주장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고 논란만이 가중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불과 17개월 정도(1944년 4월 1일~1945년 8월 15일)에 불과한 만주군 복무 시절은 친일적인 측면이 너무도 강조된 반면 광복군으로 활동한 7개월(1945년 9월 21일~1946년 4월 29일)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폄하된 점에서 보면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근거 5]
현 광복회장 김우전씨는 1944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투쟁한 인물인데 1945년도에 ‘일본군내 조선인 병사에 고함’이란 전단을 작성한 것으로 최근 확인되었습니다. 이 역시 스스로 일본군 내의 사정을 그만큼 알고 일본군 내 조선인과의 연계 가능성을 증명해 주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광복軍 투쟁 전단 첫 공개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
그 전단은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金祐銓·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이 전단을 지난 3월 확보했으나 작성자를 알 수 없어 광복회에 조회를 의뢰, 김 회장이 직접 선전문을 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입니다.
[근거 6]
백범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권을 거치면서도 그 누구 하나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아니 하였습니다. 오직 박정희 대통령께서.. 5.16 혁명을 성공시킨 후 1962 년 김구 선생님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들에게 건국 공로 훈포장을 수여 하시었습니다. 이것이 제일 먼저 박 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열우당 김희선이 할아버지라고 사칭하는 백파 김학규장군입니다. 백파는 광복군 제3지대장이었고 박정희는 그 아래의 제2중대장이었습니다. 백파는 독립투사라는 이승만에 의해 평생을 감옥에 갇히고 핍박받았습니다. 이런 백파를 4.19혁명 후 석방시킨 이가 바로 박정희입니다. 그분아니라 중풍으로 고생하는 백파를 보훈병원에 입원시키고 돌본 이가 박정희입니다. 박정희는 김학규를 광복군 상관으로 깎듯이 모신 것입니다.
백강 조경한 선생외에 상해임정 요인들과 그때 당시 광복군 대부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서 5.16 혁명 직후에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고 광복회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항일 기념비와 탑 그리고 동상들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록물 역시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스스로 백강 조경한(안훈) 선생을 찾아가서 다까끼 마사오라고 밝힌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요? 만약 박정희가 부끄러운 짓을 하였다면 당당히 임정요인들을 찾아가서 다까키 마사오라고 밝히며 큰 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광복군과 상해 임정을 계승하고 광복군 정신을 살리겠다는 뜻을 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동한 동학농민의 난 역시도 박정희가 처음으로 혁명이었다고 정의했습니다.
첫댓글 이 글을 올리고 박사모님들의 반응을 살펴 보았습니다. 너무 도전적인 화두여서 그런지 아무도 답글을 주지 않으시더군요. 그러나 박정희대통령이 근거없는 주장에 의해 얼마나 친일파라고 매도당해 왔습니까? 언제까지나 친일파가 아니야라고 할 게 아니라 이젠 박정희는 독립투사라고 주장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근거없는 박정희대통령 매도의 대표적인 사례는 군관학교 입학시 썼다고 알려진 혈서와 군관학교 졸업시 읽었다는 답사입니다. 이 둘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혈서는 박대통령의 동료교사가 '자기가 쓰라고 권했다'는 개인적 주장이고, 답사는 일본인 졸업생이 했을 뿐 박정희 생도는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