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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Saint Simon and Jude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모퉁잇돌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열둘을 뽑으시고 사도라고 부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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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모퉁잇돌이시라며,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시기 전에 산으로 가셔서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특별히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바쁜 일과를 보내시면서도, 혼자 물러가셔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자주 발견합니다.열두 사도를 뽑으시기 전에도 이렇게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하셨다는 것과 열두 사도를 선택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따른 일이었음을 보여 줍니다.기도가 신앙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많은 활동과 선행을 할지라도, 기도가 빠져 있으면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본인도 행복하지 않을뿐더러 그 활동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도 없습니다.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바쁘면 바쁠수록, 혼자 조용히 하느님 앞에 서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 삶과 신앙의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고, 내가 갈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그리고 기도할 때는 내가 하느님께 청할 것만 찾을 것이 아니라, 어디에 하느님의 뜻이 있는지도 찾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과연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삶과 일 속에서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사도, 곧 파견된 이들로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르심 역시 근본적으로 주님의 복음 전파를 위한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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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택하신 방법은 스스로 인간이 되신 강생의 신비입니다. 인류 역사의 구체적 시간, 구체적 장소라는 제한된 조건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과 복음 선포를 위해서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 열두 제자는 다양하면서도 부족한 인간의 조건을 모두 지닌 우리의 대표자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시몬과 유다는 복음서에서 두드러진 활동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뜨거운 피를 가진 이들입니다. 시몬은 로마에 반대하여 유다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열혈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자기 민족에 대한 식민 통치를 끝내려고 목숨을 걸고, 군사 훈련과 테러 훈련까지 이겨 내며, 나라를 배반한 매국노들의 응징에도 앞장섰던 피 끓는 애국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에도 페르시아에서 선교하다가 톱으로 몸을 자르는 극한 순교로 예수님의 부활을 끝까지 증언했습니다. ‘타대오’라고 불리는 유다도 예루살렘 멸망 후 페르시아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시기 전에 조용히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뽑으시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으로 가득 채우는 것, 그리고 두려움을 버리고 세상에 나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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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흩어진 옛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새롭게 일으킬 새 이스라엘의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려고 산으로 나가십니다. 그리고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고민하시며 하느님께 청하셨을까요? 그것은 열두 제자들의 출신과 성분을 보면 압니다.
먹고사는 일에 매달린 어부들, 민족주의적 열혈당원 시몬, 외세에 힘입어 사는 세리 마태오,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 열두 제자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데 특별한 능력과 재주를 가진 이들도 아니었고, 사회적 명망이 높거나 배운 지식층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공동체는, 신분과 출신, 능력과 재주와 무관하게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서로 잘 결합된 거룩한 성전입니다.
새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교회는 바로 이런 예수님의 뜻 안에서 세워졌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능력과 재주가 탁월한 이들이 중심이 되어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이방인과 외국인을 몰아내던 옛 이스라엘 공동체의 복원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하늘의 별만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이가 어떤 차별도 없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초대되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이스라엘과의 옛 계약을 폐기하시고, 새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의 새 계약을 세우십니다. 열두 제자는 바로 이런 교회의 초석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열혈당원 시몬과 용감한 타대오 역시 차별 없이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 이들임을 기억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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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늘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제가 외국인 입장이기도 했지만, 국적이 다르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낯선 이방인이라는 이질감을 느끼며 살아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
아무리 국적이 다르고 기질이 달라도, 민족주의적인 열혈당원 시몬과 외세의 끄나풀로 여겨지던 세리 마태오가 한 울타리 안에 있어도, 장차 배반자가 될 유다를 열둘 가운데 한 사람으로 품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사도들을 기초로 세워진 공동체 안에서는 이방인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방인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지요. 모퉁잇돌이 하나이고 기초가 하나인데, 그 위에 지어진 건물의 여러 부분들이 어떻게 서로 너는 이방인이라고 배척하면서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치의 근원이 되십니다. 같은 신앙 안에서 서로를 한 시민으로,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하나둘 모여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아름다운 꼴을 갖춘 성전이 지어집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 안에 일치가 없다면 그것은 심각한 병의 징후입니다. 그것은 그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거나, 공동체에 믿음이 없거나, 그 공동체가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에서 떠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즈음 학교에서, 사회에서, 심지어는 교회와 가정 안에서까지 다민족, 다문화에서 비롯되는 어려움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조국을 위한 열혈당원이라는 신분에서 하느님과 복음 선포를 위하여 열혈당원이 된 시몬과, 불가능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힘겨워 하는 이들을 돕는 주보성인으로 알려진 유다 타대오(용감한 사람이라는 뜻) 사도의 전구로 여러 가지 차별을 극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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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인간관계가 기대처럼 고상하고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사사로운 욕심에 물든 세속의 복사판이라고 실망하거나 교회를 멀리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러한 고민이 어제오늘이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숙명처럼 끌어안았던 과제라는 것을 엿보게 합니다.
그 런데 이처럼 현실을 직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속적 탐욕에 일그러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 안에 참으로 ‘초월적’ 순간들이 존재함을 감지하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에 속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간의 어떠한 죄와 약점으로도 손상될 수 없는 초월적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면, 음악의 감동을 떠올리면 좋을 것입니다. 음악에 깊이 감동할 때면 세속적 시간과 공간과 행위 속에 초월이 스며 있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신앙과 숭고한 음악이 모두 초월과 맞닿아 있기에, 음악의 아름다움이 매개가 되어 신앙에 다가가고, 깊은 신앙을 통해 음악의 아름다움에 깊이가 더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신 앙과 음악에 존재하는 초월적 아름다움이 평범한 인간의 삶에서 피어날 수 있다는 좋은 보기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세속적이고 경박한 생활 환경 속에서도 신앙에서 빛나는 초월의 광채를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무리 친근하고 단순한 음률이라 할지라도, 한없이 명랑하고 쾌활한 리듬이라 할지라도, 더없이 깊은 슬픔의 곡조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언제나 순수한 초월적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도 미니코회의 한 수도자는 모차르트 음악의 종교적 힘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여기에서는 침묵이 지배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언젠가 떠올랐던 가장 순수한 희망, 가슴을 있는 대로 에는 탄원을 듣는다.” 그러면서 슬프면서도 영롱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제2악장을 들어 보라고 권유합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를 소리 없이 채우는, 약점투성이인 ‘우리’를 악기 삼아 주님께서 연주하시는 초월적 음률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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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기도하시는 이유는 곧 당신께서 하실 일에 참여시킬 일꾼을 선택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 일꾼들은 곧 주님의 형제요, 친구요, 가족이 됩니다. 사도로 뽑힌 열두 명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원형)입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인 사도들은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거나, 뛰어난 덕행이나 신심을 가졌기 때문에 선발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평범한 보통 사람들입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주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들은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업적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부를 추구하려고 주님을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주님 안에서 살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께서 부르셨고, 주님을 따르고자 세례성사를 받았으며,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하여 세상에 파견을 받는 주님의 일꾼, 사도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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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뽑으신 열두 사도의 명단이 나옵니다. 자격을 모두 갖추었거나 뛰어나서 뽑힌 사도는 없습니다. 모두가 평범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주님의 선택이 먼저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축일은 평범한 사람들의 축일입니다. 보통 사람이지만 주님께서 뽑으신 이들을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우리 역시 평범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감사하는 삶이 먼저입니다. 학생들에게 감사하는 교사는 어긋나지 않습니다. 국민에게 감사하는 정치인은 거만하지 않습니다. 교우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성직자는 목에 힘을 주지 않습니다. 사도들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교우들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 앞에서 업적이 무슨 소용이 있을는지요?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남기면 됩니다. 제자들 가운데 기록이 남아 있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정도입니다. 나머지 분들은 그저 이름만 전해질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그분들은 존경받고 있습니다.
업적과 이름을 남기는 데 매달리는 사람이 많은 오늘날입니다. 많은 것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되돌아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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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끼리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생각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인답게 해 주겠습니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사실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 간의 차이는 눈에 크게 띄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조금 더 참아 주고, 기다려 주고, 덮어 주고, 견디어 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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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본당신부를 했던 본당에서의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글쎄 청년 중에 조직폭력배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조직의 간부급이라는 말이 들리는데, 이 청년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미사에 참석했고 또 청년회 활동에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습니다. 솔직히 걱정되었습니다. 이 청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어떤 형제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저 친구 대단하죠? 폭력조직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요. 아마 곧 손 씻고 열심히 살 것 같습니다.”
저는 은연중에 폭력조직에 속해 있으니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형제님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죄를 짓더라도 그냥 그 자리에 주저하지 않고 열심히 신앙 생활하려는 모습을 예뻐하시지 않을까요? 실제로 이 청년은 제게 조직에서 벗어나겠다고 약속을 굳게 했습니다. 물론 지금 연락이 되지 않아서 어떻게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님을 놓지 않고 있다면 분명히 잘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종종 ‘나 같은 게 어떻게 성당에 나가?’라면서 신앙생활을 멈추는 사람을 봅니다. 또 ‘어떻게 저런 사람이 성당에 나올 수 있어?’라면서 신앙생활을 멈추는 사람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기도를 통해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으며, 기도를 통해 죄를 점점 멀리하게 되고 대신 주님의 뜻에 맞춰서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즉,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는 과정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들어가서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도 어떤 결정에 앞서서 이렇게 밤을 새워 기도하는데, 우리는 자신에게 닥친 많은 일에 대해서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바치고 있었을까요?
죄로 인해 자격이 없다고 차마 기도할 수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다른 누군가가 보기 싫어서 기도를 비롯한 모든 신앙생활을 멈추겠다는 말도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도 기도가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할 수 없는 여건이 찾아와도 무조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도 안 되는 기도할 수 없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기도 없이는 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명언: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야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굴리트).
기도의 힘
두뇌는 편안함을 느낄 때 ‘행복’을 느끼게 하는 화학물질인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분비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주 편안하고 안정적일 때보다 자극을 받고 새로운 활동을 할 때 즐거움을 느끼고 두뇌활동이 활발해진다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변화되고 싶다’라는 말을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이 변화가 단순히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만을 추구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때는 오히려 두뇌가 멈춰버리고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렵고 힘들어도 자극과 새로운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이 힘든 것이지, 잠시 뒤에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때 본인이 그토록 원하는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를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처음 할 때는 어떻습니까? 너무나 힘듭니다. 기도하기에는 너무 바쁘고, 보이지 않는 주님께 바치는 기도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바치는 기도를 통해 큰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변화도 얻게 됩니다.
이래도 기도하는 것을 멈추겠습니까?
세상에 스쳐지나가는 것들이 아니라 양떼들의 영혼 구원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게 하소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전 세계 본당 사제들의 모델이자 수호성인이신 비안네 신부님의 평생에 걸친 사목터, 아르스를 순례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영혼 구원을 향한 사목적 열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아르스 성당, 신부님께서 가난한 소녀들을 위해 설립한 섭리의 집, 평생에 걸친 신부님의 십자가이자 열정적 사목 현장이었던 고해소 앞에서 기도하며, 참으로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습니다.
저도 나름 가난하게 산다고 노력하지만, 비안네 신부님의 청빈한 삶 앞에는 그야말로 새발의 피요, 포크레인 앞의 삽이더군요.
비안네 신부님께서는 언제나 밀물처럼 밀려드는 수많은 당신의 양떼들의 영혼 구원에 최우선권을 두었습니다.
몸상태가 너무 않좋을 때는 '오늘은 제가 좀 피곤하니 내일 오시면 안될까요?' 라고 말하며 양해를 구해도, 누가 뭐라는 사람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상태가 좋거나 안좋거나, 언제나 고해소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좁고 답답한 고해소 안에서 하루 열시간, 열네 시간, 열여섯 시간을 쭈그리고 앉아 계셨습니다.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하겠다는 마음에 지신의 건강이나 휴식, 의식주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의복이나 육신적 삶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쓰지 않고 잊고살았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가 끝나자마자 비안네 신부님은 식어빠진 감자 한알이나 말라 비틀어진 빵 한조각을 우걱우걱 씹으며 서둘러 고해소로 들어가셨습니다.
비안네 신부님께서 입고 다니시던 단벌 수단이 얼마나 낡았던지, 너덜너덜 더 이상 수선이 불가능했습니다. 보다 못한 본당 신자들이 돈을 모아 수단한벌 해입으시라고 드렸습니다.
그런데 일 주일이 지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가도 너덜너덜한 수단은 그대로였습니다. 속이 상한 신자들이 비안네 신부님을 찾아가 따졌더니...그 돈은 이미 가난한 사람 위해 다 써버린 후였습니다.
3년간의 보좌 신부 역할을 마무리한 비안네 신부님은, 아르스본당에 첫 본당 주임 사제로 발령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아르스 본당은 해당 교구내에서 가장 척박한 시골 본당, 신자들의 신심이 약하기로 유명한 본당이었습니다. 총 신자수는 230명에 불과했습니다.
본당 신자들은 비안네 신부님께서 아르스로 부임해오시자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얼마나 덜떨어지셨으면 이 오지로 발령받으셨을까?' 생각하며, 부임 후 첫번째 주일 대미사에는 아무도 참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님은 아르스 본당 신자수가 230명이라는 말을 듣고, 230명이나 되는 신자들의 영혼이 당신의 손에 맡겨졌다는 사실에, 너무나 가슴이 설레고 떨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안네 신부님께서 본당 신자들뿐만 아니라 교구내 동료 사제들로부터 비난 받을 정도로 지나치게 청빈하게 사셨던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즉시 답이 나오더군요. 비안네 신부님께서 지니고 계셨던 양떼들을 향한 뜨거운 사목적 열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안네 신부님 마음 안에는 신자들의 영혼 구원을 향한 사목적 열정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당신께서 집전하시는 고백성사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서고 구원받는 모습에 더 이상 그에게 세상의 좋은 것들은 별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제들이 비안네 신부님 그리고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성 시몬과 유다 사도의 사목적 열정을 본받아, 세상의 지나가는 것들보다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영혼 구원을 향한 열정으로 활활 불타오르기를 기도합니다.
기도의 힘을 믿지 않는 것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보다 훨씬 안 좋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성체조배실이 가까이 있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성체조배실에서는 잠을 자도 힘을 얻습니다. 저의 일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 중의 하나는 박사학위 심사를 받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긴장하지 않으려 해도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도입니다.
심사 전날 저는 성체 앞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지새운 것은 아니고 그만 잠이 들어 자고 말았습니다. 깨어보니 새벽이었습니다. 실제로 기도한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은 꽤 됩니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논문 발표를 하러 갔는데 신기하게 전혀 떨리지 않았습니다. 하도 안 떨려서 그런지 교수들이 질문하는데 딴 생각까지 해서 질문을 못 알아듣기도 했습니다. 아는 척을 하지 않고 그냥 할 말 없다고 했습니다. 저를 보던 많은 분들로부터 “오!!!”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교수가 질문하면 한 마디라도 해야 하는데 제가 할 말 없다고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조금 단순하게 질문을 해서 몇 마디 했습니다. 저보다는 발표를 보러온 분들이 더 긴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심사가 끝나고 나서 저는 논문발표를 완전히 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점수는 매우 좋았습니다.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보니 긴장되는 일이 있더라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을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뽑기 위해 산에 오르시어 밤새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만나신 것입니다. 그래야 관계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고 믿는 관계라야 오래갑니다. 그리고는 평지로 내려오셔서 질병도 고쳐주시고 복음말씀도 전하셨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을 주시기 위해 산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신앙인의 모든 에너지는 기도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내가 평소 생활하던 평지가 아니라 사람들의 간섭에서 벗어난 산이어야 합니다. 이 산만 있다면 삶에서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질병은 이런 에너지 공급처를 찾지 못한 데 있습니다. 그래서 소진되어 무력감에 빠지고 급기야 생을 스스로 마감하기도 합니다. 큰 결정을 하거나 인간관계를 위해, 그리고 이웃에게 더 좋은 것들을 주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밤을 지새우고 나면 완전히 다시 충전될 산을 마련해야합니다.
미국 최초 가톨릭 종교를 가진 대통령이 된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 때 역시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이와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당신 손에 있는 권력으로 세계의 역사와 운명이 좌우됩니다. 당신은 노련한 전문가인 수많은 보좌관을 데리고 있습니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그 많은 보좌관들은 제각기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당신에게 조언을 할 것이고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됩니다. 당신은 당신을 보좌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모두 경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판단을 내려야 할 때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하느님 앞에 묵상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장 큰 권력을 가진 두 대통령의 대화가 결국엔 하느님께 의지해야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위 두 대통령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모든 판단을 기도를 통해 할 때 하느님은 항상 좋은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기도의 힘을 믿지 못하는 것이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안 좋습니다. 선물을 믿어야 선물을 주는 사람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선물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기도의 힘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마귀들도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힘을 청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7월에 함께 산행한 분들과 조촐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그것도 동부에 사는 분들이기에 그리 멀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오는 데 7시간 걸렸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함께 저녁 먹기 위해서 7시간 운전하고 온 겁니다. 지난번 2시간 걸려서 미사를 도와주었는데, 어쩌면 저도 미사를 도와주기 위해서 7시간 운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조선팔도를 혼자서 사목했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열정과 헌신에 비하면 7시간 운전은 내세울 게 못 됩니다.
뉴욕의 한인 가톨릭 방송과 간략한 대담을 했습니다. 제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미국의 한인 공동체도 고령화되고 있고, 젊은이들은 현지의 미국인 성당에 가기에 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어떤 대안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교회가 당면한 위기이며, 도전입니다. 실적과 성과에 치중한 사목, 본당 신설과 신축에 치중한 사목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가졌던 영적인 충만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제, 겸손한 사제,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아는 사제, 말씀에 충실한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대화하는 가정, 기도하는 가정, 감사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간절히 청했듯이, 누룩이 되는 사제, 기름을 준비한 신앙인이 있다면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하실 겁니다.
신문을 보는 사람도 줄어들고, 젊은이들은 영어가 친숙한데 가톨릭 평화신문을 위한 구상과 대책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신문의 제작과 발행은 처음 접하는 사목입니다. 주님께서 눈이 먼 소경에게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셨고, 소경은 눈을 떴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의 기사가 독자들의 마음을 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리, 성서, 나눔, 사목, 교회 소식을 통해서 경쟁과 성공의 문이 아닌, 희생과 사랑의 문을 열고 싶습니다. 그 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죽은 소녀를 향해서 ‘탈리타 쿰(일어나라)’이라고 말씀하셨고, 죽었던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의 기사가 절망과 근심, 고통과 원망 중인 사람을 희망과 믿음, 인내와 용서로 일으켜 세우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을 사랑하는 직원이 있습니다. 어려운 중에도 광고를 주는 고마운 분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문을 읽어주시는 독자가 있습니다.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해서는 다가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행복은 해야 할 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친구처럼 다가온다고 합니다.
오늘은 시몬과 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사도들이 직면한 문제는 제게 주어진 문제와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변변히 머물 공동체도 없었습니다. 재정적인 뒷받침도 없었습니다. 확고한 교리도 없었습니다. 교계제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였고,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을 넘어 고린토, 갈라디아, 필립비, 골로세이, 에페소, 로마까지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시련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고, 사도들은 주님의 모퉁이 돌 위에 세워진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하늘 기를 나누며 살아갑시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체 생명체도 사람도 기가 나오고 하느님도 예수님도 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서 어떤 기나 나오는지 자신도 남들도 이미 압니다.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자 병자들을 예수님은 사랑의 기로 보셨겠지요.
사도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늘나라의 기를 느꼈기에 따르게 되었겠지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기가 사람들의 기를 하늘로 들어 올렸을 겁니다.
정치 경제 사회 세상 분야의 기만 받지 말고 하늘 기도 받고 삽시다.
하느님의 말씀님인 예수님은 하느님의 기로 세상사신 게 확실합니다.
예수님의 기를 받아 세상 필요한 곳에 하늘 기를 나누며 살아갑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시고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사도들의 경우, 그들은 당대 뛰어난 인간적인 능력이나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지도자들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어부들과 세리, 그리고 열혈당원, 그리고 배반자 유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신 끝에 그 평범한 사람들을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열두 사도들의 경우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와 성모님을 모셨던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 순교한 것으로 전승이 전해집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는 평범했을지 몰라도 주님의 성령께서 함께하시면서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사도로서의 사명을 이루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지난 시간 세례를 통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도록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그분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사는 삶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제나 영원히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있어야 할 곳>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열두 사도가 뽑힙니다
아버지와 갈림 없이 하나인
예수님께로부터
거룩하고 평화 가득한
하느님의 기운 넘치는 산에서
영광스럽게 뽑힌
열두 사도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님과 함께
아픈 사람들이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사람답지 못한 삶을 강요당한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커다란 무리가 되어 살아가는
산 아래 거칠고 메마른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속된 세상의 게걸스러움과 더러움
말끔히 씻어낸
티 없이 거룩하고 깨끗한 성당에서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도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당신이 먼저 세상 깊숙이 들어가시고
우리에게 따르라고 하십니다
열두 사도를 뽑으신 후
그들과 함께 그들보다 앞장서서
아픈 이
굶주린 이
고통 받는 이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셨듯이
열두 사도는 있었습니다
예수님 곁에 예수님과 함께
비록 인간적인 두려움에
주님의 십자가 여정을 피했지만
마침내 주님을 따라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과연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습니까
제자를 뽑으심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신 다음 내려오시어 제자 열둘을 뽑으셨다. 어느사이 예수님은 군중들 속에 제자들을 있게 하셨다. 제자들의 위치는 평지였다. 유다, 예루살렘, 그리고 해안지대 티로와 시돈이었다.
별다른 특별함이 없다. 군중은 예수님께 다가왔고 제자들은 바라볼 뿐이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군중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쫒아 내신다. 제자들은 관망하며 이를 보고 있다.
모두가 주님의 제자들로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신 후 내려 오시어 우리도 뽑으신다, 우리도 처음에는 평지에 있고 해안에 위치해 있다. 우리를 군중 속에 있게 하고, 우리는 관망하며 예수님을 바라다 본다. 들도, 호수도, 그리고 바다도 아직은 평온하다. 소강상태이다. 선택된 사람, 뽑힌 사람, 이렇게 무덤덤 시작할 것이다. 곧 그런 속에서 제자의 사명이 생겨날 것이다. 평지의 각도가 높아질 때즈음 제자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제자들이 각오를 달리할 때가 올 것이다.
오늘은 제자로써 완성된 성 시몬과 성 다태오 사도 축일이다. 이들 축일은 신앙인으로 평지에서가 아닌 삶의 고도를 높이며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후 멋진 축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렇게 시작했다.
< 사도 >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승천 후에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들이 직접 목격한(체험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또 예수님의 말씀들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증언한 증인들입니다.
그들의 증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증언은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다.” 라는 증언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은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우리는 믿는다.”는 증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받아들였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곧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믿음이 없다면, 본 것과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지 않을 것이고, 혹시 증언하더라도 믿음 없이 하는 증언은 증언이 아닙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사도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에 대해서 정의를 내린다면, 사도는 ‘믿는 사람’이고, ‘증언하는 사람’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고,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고, ‘교회의 주춧돌’이고,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열두 사도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이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일에 거기까지만 말하고, 그들의 위대함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도들을 깎아내리는 말이 될 뿐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사도들이 평범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겉’이 아니라 ‘속’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들이 내적으로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두드러진 특징은(자격은) ‘믿음과 열정’입니다.
물론 그들의 믿음과 열정이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믿음과 열정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차츰 깊어지고 강해졌고, 또 나중에 성령을 받은 뒤에 완성되었습니다.
저절로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 완성은 그들 자신들이 받은 은총에 온전히 응답했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도들은 모두 위대한 선교사들이고, 순교자들이고, 성인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과 죽음을, 믿음과 열정과 노력을 본받아야 합니다.
본받는다는 것은 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삶을, 또 그들의 믿음과 열정과 노력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을 본받아서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너무 거창한 일로만 생각할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일로만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위해서만 기도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사도들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수난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항상,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고, 사도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인들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또 인류 전체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고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위대한 사도가 되어서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고, 그들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사도들 자신들도 충실하게 노력함으로써 그 기도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은 항상 은총과 응답이 합해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사도들을 본받는 일도,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은총으로 도와주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유다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러나 유다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사도들을 본받는 일은, 그들의 헌신적인 선교활동을 본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 걸으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그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의 위치에서 한 사람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공동체와 거리를 두고서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랑 없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생활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따라서 선교활동과 사랑 실천은 사실상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지난 토요일 이경자 사비나 자매님의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그 전에 문상가서 들은 유가족들의 이야기가 자꾸 떠오릅니다. “10년 치매을 잃는 동안 자식의 얼굴은 잊어버리셨지만, 기도할 때 주모경과 사도신경은 잊지 않고 바치셨어요.” 아마도 그분은 주님께 대한 확신 속에서 깊은 친교와 일치를 간직하고 계셨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제자들을 뽑으셨을까? 훗날 교회에서 사도들이라고 불림을 받을 제자들을 뽑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자못 궁금합니다. 아마도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이겠죠. 그리고 주님과 가까운 사람. 그냥 술 먹고 노는데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서로를 잘 알고 서로가 원하는 것과 서로 하려고 하는 것을 존중하고 환영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함께하고자 하며 실제로 함께 나서는 사람들이겠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주님과 함께 구원의 십자가 길을 기꺼이 걸어갑시다.
기도와 삶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그리스도 예수님-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사도 축일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는 12사도중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바로 그 인물입니다. 두 분 사도 역시 예수님의 삶을 통해 기도도 많이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 삶은 기도의 학교입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기도의 학교의 학생들인 우리들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입니다.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기도는 항구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살아갈수록 답은 기도뿐임을, 또 기도에는 늘 초보자인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자 기도의 사람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눈들어 기도하라 눈들면 어디나 하늘이요 직립인간의 사람입니다. 기도는 말 그대로 하느님과 대화의 소통이요, 소통은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소통해야 충만한 생명과 사랑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성도 없습니다.
공동체의 일치도, 분별의 지혜도 기도의 열매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신 예수님은 바로 기도의 모범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도의 모범이신 주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늘 하느님과 소통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 예수님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얼마나 치열한 기도의 삶이셨는지 잘 드러납니다. 기도도 보고 배웁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기도의 대가이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그대로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밤샘기도중에 예수님은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 주로 밤시간은 하느님과 일치의 관상기도 시간이었고, 말그대로 낮의 활동과 밤의 관상이 조화를 이룬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새삼 영육을 새롭게 충전하라 있는 밤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부르십니다. 기도를 통한 분별이요 사도들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요, 사도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받아 예수님의 선교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제자와 사도, 바로 우리 신원의 양면성입니다.
그러니 우리들 역시 안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자 밖으로는 사도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 장면을 통해 분명 제자들 공동체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새삼 공동체의 일치에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열두 사도의 면면을 보십시오. 참으로 다양합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어 예수님을 중심으로 무수히 모여드는 군중들이요, 그대로 예수님은 이들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깨닫습니다. 기도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러 온 사람들이었고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다 낫게 되었다 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이 모두가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 일치에서 나오는 능력임이 분명합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으니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기도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참으로 기도를 통해 함께 주님과 소통할 때 치유요 변화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바로 오늘 에페소서에서 바오로가 교회공동체의 본질을 잘 알려줍니다. 우리는 모두가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공동체입니다.
바로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은 바로 공동체의 모퉁잇돌이 즉 중심이 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잘 결합된 이 건물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난다고 바오로 사도는 고백합니다. 교회공동체 역시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는 유기적 공동체임을 봅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성장에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다음 묘사를 통해 공동체는 그대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반영함을 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교회공동체로 지어지고 있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인 공동체 건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가 ‘하느님의 거처’라니 얼마나 은혜로운 공동체인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집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교회 공동체를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거처로 성장, 성숙시켜 주십니다. 아멘.
'우릴 통해'(루카 6장 12~19)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요 전능하신 분이 사랑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에 오셔서 복음선포하시는데 도울 짝이 필요하셨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밤샘기도를 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잘 이루어가기 위해 협조자를 택하시는것은 매우 중요!
혼자보다 함께는 힘이 있습니다.
뜻을 같이 한다는 것 함께하는 이유가 분명하면 목표를 이루는게 쉬워집니다.
작은 불씨인 우리 하나하나가 깨어 빛을 밝히면 택하신 이유를 알게 되고 주님께서 우릴 통해 일하심을 감사하게 됩니다.
주님 뜻을 거스르는 협조자는 무늬만 그렇지 실상 해방꾼이니 분간을 잘해야합니다.
'주님 계획하신 일 우릴 통해 이루어지리다.'
곽승룡 비오 신부님
오늘은 시몬과 타대오 사도축일입니다. 열두 사도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마태오와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혁명 당원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그리고 후에 배반자가 된 가리옷 사람 유다입니다.
사도는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옆에서 살았던 자들도 역시 사도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방금 뽑은 사람들이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교회입니다. 그 예수님의 새 교회가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구원을 위해 봉사하러 나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들은 부르심과 응답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모세라면, 12명의 제자들은 새 이스라엘의 새 부족들입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악령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다양한 출신의 사도들이 모인 교회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병든 자들, 약한 자들을 향하여 구원하러 갑니다. 이것이 사도, 신자, 교회입니다.
오늘의 교회, 우리는 어떤가요...
군중들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신자 아닌 사람들도 예수님의 모상인 교회, 우리 안에서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초대해야 하지 않을 지요...
< 위로와 도전을 받는 우리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리고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유다와 시몬 사도는 예수님 생전이나 사후에도 거의 그 존재와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 사도들입니다.
왜 드러나지 않을까요? 실제로 별 활동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복음과 사도행전과 서간들에 많이 등장하지 않는 것뿐이지 사도로서의 활동은 많았을 것이고 실제로 전승에는 주무대와 먼 곳에서 그러니까 페르시아와 같이 먼 곳에서 복음 선포를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다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옆에 있었던 마르코나 루카처럼 그의 행적을 전해주는 사람이 옆에 없었을 뿐일 겁니다.
그러니까 더 멀리 변방으로 갔기 때문에 덜 알려졌을 거라는 얘기이고, 어쩌면 주님의 형제들이기에 더 드러나는 것을 조심하였고, 더 험지를 택해서 멀리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두 사도가 주님의 형제들이라면 두 분이 어떻게 주님의 제자와 사도가 되었을지 생각게 됩니다.
형제였으니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았을 거잖아요?
그런데 그럼에도 두 분은 어찌 주님의 제자가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어려서부터 너무도 비범하셔서 스승삼은 걸까요?
아니, 비범한 것을 넘어 신성을 보이셔서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고 다음으로 사도까지 되신 걸까요?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부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원의식을 가지고 사셨다고 얘기하고 있고 그래서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사셨다고 쳐도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을 잘 아는 두 분이 예수님을 스승이나 주님으로 믿고 따르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밤새 기도하시고 사도로 뽑으셨지만 두 분은 뽑혔을 때 수락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밤새 고민했을 겁니다.
그런데 두 분이 수락을 놓고 기도하지 않고 고민했다고 제가 말하는 뜻은 두 분이 이때까지는 아직 기도할 줄 모르고 고민하는 수준이었을 거라고.
아직 하느님 체험이 크게 없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수준이 아니었다고, 특히 열혈당원이었던 시몬은 더 그랬을 거라고 제가 생각하는 거지요.
우리도 자주 기도할 것을 고민하고 심지어 번민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 지점이 우리가 이 두 분에게서 위로를 받는 지점이고, 또한 도전도 받는 지점입니다.
사도들도 기도할 때 고민하였다는 것은 사도들도 그러니 우리가 그런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위로가 되고, 그러나 이랬던 사도들이 나중에는 멀리까지 가 목숨까지 바쳐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은 앞으로 우리도 그래야 된다는 도전이 되는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는 그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 두 사도에게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기도보다는 고민하는 두 사도에게서 위로도 받고 도전도 받는 오늘입니다.
하느님의 강한 힘 <루카 6, 12-19>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의 전능한 힘은 어디서 나올까? 우리는 그 힘을 어디서 받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을까? 산 위에서 병자, 마귀 들린 자 모두가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사도들을 따라 하느님을 전하는 사명을 완수하려면 우리 안에 하느님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힘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힘을 낼 수 없으며 사랑의 힘이 우리를 구하고 온 인류를 구하게 합니다.
주님이 참사랑이신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오늘 아침 도서 기도에 코린토전서 “사도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전하였다.” 하신 것같이 십자가는 겉보기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유대인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요구하지만,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힘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일이 사람의 눈에는 약해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이는 수치와 고난의 도구이며 벌의 도구이지만 그리스도가 지고 땅 위에 우뚝 세우신 십자가의 힘은 어떤 힘보다 강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벗을 위해 아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면 그보다 강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흐르는 피로 우리 힘의 원천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생명을 주신 것은 참 힘이어서 받은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데 죽기까지 사랑함으로써 가장 힘 있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나누어 주지 못하면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힘 있는 교회가 되려면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고 깨달은 바를 전해야 합니다. 아니,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용기와 힘이 솟아오르면 하느님의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침 미사에 참례한 사람은 미사 끝에 복음을 전할 의무가 지워지는데 그 복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 당신은 십자가 없는 길을 가시렵니까? 아니면 십자가 있는 길을 가시렵니까? 십자가 있는 길을 가고자 하시면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순간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것을 십자가의 힘으로 극복하고, 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가난한 마음을 지니시면 행복해집니다.
오늘 하루 십자가의 힘으로 살아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악에서 구해지도록 기도합니다.
현상을 통해 진상을 보는 영적 통찰
최민석 신부님
하늘 저리도 높은데 가을은 벌써 깊다. 말없이 자랑도 없이 나뭇잎마다 단풍이나 곱게 물들이면서 하루하루 가만가만 깊어 가는 가을이다. 아! 내 인생의 가을도 왔다. 나는 얼마나 깊은가. 나의 생도 고운 단풍으로 물들고 있는가.
나뭇잎에 아침이슬 맺듯 자고 나면 내게도 이마에 맑디맑은 기쁨 서리기를 나 아직 기도한다. 풀잎 끝에 대롱거리는 이슬방울은 물방울이 아니라 풀잎의 열매 같다. 열매 맺기를 간절히 바라는 풀잎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셨기에 잠시지만 세상에서 가장 영롱한 빛깔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풀잎의 열매를 맺어 주신 것이다.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아름다운 자리들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젖을 물고 있는 어머니의 품속, 바람에 날린 씨앗이 떨어진 자리, 그 생명이 움트는 자리, 개망초 꽃 핀 자리, 낙엽이 뒹군 자리, 풀벌레 울던 자리다. 지금 나 여기 현존이 주님의 자리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 6-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건이 발생했다. 벌거벗긴 몸으로 나무에 못 박혀 땀과 피를 쏟으며 헐떡이다가 마지막으로 무슨 큰 소리를 지르며 숨을 거두신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숨을 거두며 ‘진짜로 하신 일’을 필립비를 통해서 밝히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이루신 일’은 피와 땀을 쏟으며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일은 예수님이 아닌 누구라도 육체를 지닌 사람이라면 한다. 생으로 몸을 나무에 못 박아 걸어 놓는데 피와 땀을 쏟으며 헐떡이다가 숨을 거두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진짜일은, 다시 말해 그 날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상’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죽도록 순종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신 일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께 대한 ‘순명’이라는 그런 말씀이다.
우리 신앙인은 마땅히 십자가 ‘현상’을 통해서 이 ‘진상’을 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깨어 있지 않으면 눈이 흐려서 현상을 꿰뚫어 그 속에 감추어진 진상을 바로 보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자면 우선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속지 않아야 하는데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노자는 오색(五色)이 영인목맹(令人目盲)이라, 온갖 현상이 사람 눈을 멀게 한다고 했다.
나도 어제 밤 내내 아픈 몸을 부둥켜안고 밤새 뒤척이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해 졌다. 새벽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드는 생각이다. 몸이 힘들어 하는 동안 아픈 상황에 빠져 버려 아파하는 그 속뜻을 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그 진상을 보려면 우선 힘들어 하는 몸에 속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이 힘들어하는 것에 휘둘리다 아픔의 진상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을 떠난 어디에 따로 실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동시에 바로 여기 너희들 안에 있다고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루가17,21)
현상을 떠나 다른 어디에서 진상을 찾는다면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현상에 눈길이 갇혀도 물론 진상을 보지 못할 것이지만 어떻게 하면 현상을 보면서도 거기에 속거나 갇히지 않고 그것을 통하여 진상을 꿰뚫어 볼 것인가? 이것이 요즘 내 마음의 영적 과제인 ‘현존을 통한 통찰’이다.
귀한 사람들
윤정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사도들의 후계자이신 주교님들은 매우 귀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뽑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당의 신부님, 수녀님들은 귀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뽑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 사목의 협조자이신 신자 분들도 매우 귀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뽑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고 뽑으신 귀한 사람들입니다. 단순히 주님의 명령을 실행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분께서 직접 뜨거운 기도로 마음에 품은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살아가며 때로는 어이없을 만큼 실망하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주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후 뽑으신 이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십시오. 늘 주님께서 그 기도를 바치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다시금 되새겨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의 ‘요한 복음 주해’에서(Lib. 12,1: PG 74,707-7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지도자와 스승들 및 당신의 신적 신비들의 전달자들을 세우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등불처럼 빛나고 유다 민족만이 아니라 태양 아래 있는 다른 모든 이와 세상 곳곳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비추어 주라고 명하십니다. 다음 말씀을 하는 사람은 사실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예로운 직무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우선하여 제자들을 영광스러운 사도직에로 부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진리의 기둥과 기초로 삼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신 같은 목적으로 당신도 제자들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써 그들 사도직의 위대함과 그 직무의 비할 수 없는 영광을 보여 주시고 동시에 사도단 조직의 형태를 넌지시 제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신 것처럼 당신도 제자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면, 그 제자들의 모방자가 되어야 하는 우리는 아버지께서 무슨 목적으로 아드님을 보내셨는지를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들 사명의 다양성을 설명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에로 부르러 왔다.” 그리고 다른 데에서도 이렇게 주장하십니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실상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몇 마디 말씀으로 사도단의 조직을 완결지으시면서, 사도들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신 것처럼 당신도 그들을 보낸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도들이 당신처럼 죄인들을 회개에로 부르고 육신적으로든 영신적으로든 고통당하는 이들을 고쳐 주고 만사를 운영하는 데 있어 자기 뜻이 아닌 그들을 보내 주신 분의 뜻만을 찾고, 그분의 참되신 가르침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역시 그들의 의무임을 알게 되도록 하심이었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읽어 보면 거룩한 사도들이 이 모든 것을 지키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스로의 삶이
아니라 함께하는
선택과 응답의
삶입니다.
구원의 길은
기도로 시작합니다.
밤을 새운
간절한 사랑의
기도로 사도들은
선택됩니다.
사도들은
하느님께 필요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사람들을 통해
깊어집니다.
사도들의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가
사는 곳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망가뜨린
세상을 우리가
치유하게 하십니다.
사랑의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기도안에
가득찬 사랑을
만나는 시간 되십시오.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길을
걸어갑시다.
구원의 역사가
다시 쓰러진
이들을 향합니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응답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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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때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아실 것입니다. 엄청난 유대인들이 학살된 장소지요.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은 한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히틀러의 명령이라고 해도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독일 병사들은 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양심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학살을 할 때 마약 같은 향정신성 의약품을 복용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약을 먹은 것도 또 양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수용서 안에 하나만 놔두고 모든 화장실을 없앴던 것이 결정적인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을 모두 이용할 수 없어서 수용소의 한적한 곳에서 급한 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끄럼 없이 아무데서 급한 일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어디나 다 더러웠으니까요. 점차 수용소 전체가 더러운 용변 자국으로 가득 찼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의 모습이 짐승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느끼자 독일군인들 역시 짐승 취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짐승을 죽인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고 취급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방 역시 그렇게 나를 대우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을 때, 우리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를 별 것 아닌 것처럼, 아무런 능력과 힘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대우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열 두 명의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뽑으셨을까요? 당시에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던 그리고 많은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을 뽑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보다는 손가락질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뽑으셨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 역시 너무나도 소중한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 각자를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또 존중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될 때,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주님의 참된 자녀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산이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배경도 없고 힘이 없다고 좌절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대신 주님의 자녀답게 스스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는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일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즐기는 일이다. 그런데 현명한 사람들은 나중 것을 성취한다(로건 피어설 스미스).
‘~카더라’
‘카더라’ 통신이라는 말을 들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불확실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서 사실인 척 이야기하면서 혼란을 주는 소식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글에서 봤는데, ‘카더라’라는 말을 칭찬할 때 쓰라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 그러더군.”으로 시작하는 칭찬법입니다.
“누가 그러던데. 자네가 가장 성실하고 훌륭하다고.”
“우리 아버지가 그러던데. 형제님의 인상이 너무 좋대요.”
이런 식으로 칭찬하게 될 때, 뜬소문으로 골탕을 먹이는 ‘카더라’ 통신이 오히려 커다란 힘을 얻게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도 이렇게 칭찬해보면 어떨까요? 저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던데요. 여러분을 너무나도 사랑하신데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교구 성소국장으로 일을 하면서 당연직으로 ‘교구청회의, 본당분할장기계획수립위원회, 사제평생교육위원회, 사제평의회, 유학 및 연수사제추천위원회, 해외선교위원회, 옹기장학회’의 일을 하게 됩니다. 매주 모임이 있는 회의도 있고, 주제에 따라 모이는 회의도 있고, 사안에 따라 모이는 회의도 있습니다. 회의는 주관 부서가 있고, 저는 주로 의견을 듣는 편입니다. 주관 부서에서 자료를 준비하고, 기획하기 때문입니다.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을 지내면서 정호승 시인의 ‘연어’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
사람의 손에서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일 뿐
너를 사랑하고 죽으러 가는 한낮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배고픈 별빛들이 오랜만에 나를 포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밤을 밝히리라.”
연어는 거친 바다를 살다 삶의 끝자락에 이르면 다시금 태어났던 강으로 돌아오는데 시인은 그 이유가 엄마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 사랑이 깊은 바다와 거센 풍랑을 이겨내게 하고, 그 사랑이 아득한 먼 기억 속의 강가로 연어를 이끌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연어가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다시금 삶의 원천인 강가로 돌아오듯이 우리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그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곳은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타대오) 성인의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주셨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갔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며 거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입니다. 나누고 살기에도 바쁜 인생입니다. 늘 감사드리고, 항상 기도하고, 언제나 기뻐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답이다 -기도와 교회 공동체-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의 모범이자 교회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선명히 계시됩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 둘을 뽑으셨다.”
기도의 열매가 열 두 사도 공동체입니다. 예수님 마음대로 뽑으신 사도들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대로 부르신 사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선택이란 큰 일을 앞두고 이처럼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늘 외딴곳에 물러나 하느님과 깊은 친교의 기도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중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시어 당신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열두 사도의 면면이 참 흥미롭습니다. 참 다양한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중심한 다양성의 일치를 이룬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잠시 제자와 사도의 차이에 대해 나눕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는 제자들이요 예수님께 선교차 파견 받아 떠날 때는 사도입니다. 복음의 열두 제자가 동시에 열두 사도였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입니다. 안으로는 늘 주님과 함께하는 관상의 제자, 밖으로는 늘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의 사도라 함이 적절합니다.
그러니 제자와 사도는 관상과 활동의 리듬처럼 우리 신원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주님의 제자로서 관상중에 주님의 영으로 충전되는 시간이요 미사가 끝나면 우리는 활동의 사도로 세상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됩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의 열매가 사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 역시 거대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치려고 온 이들이었고,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됩니다.
예수님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에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썼다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는 하느님의 치유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역시 말씀도 듣고 질병도 치유하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열두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위에 세워진 건물이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교회공동체입니다. 오늘 에페소서가 교회공동체의 신비를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복음의 열두 사도들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신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공동체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교회공동체의 중심임을 천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며,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공동체인 우리 교회입니다.
이어져 연결되면 살고, 끊어져 고립단절되면 죽습니다. 이어져 주님의 교회 공동체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우리를 교회공동체에 부르시어 주님과 하나로 연결되어 살게 하셨으니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만약 부르심의 은총으로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교회는 살아있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몸입니다. 죽은 공동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적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역시 성장, 성숙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처인 교회 공동체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이 거하시는 하느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 내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교회공동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는 소통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이 생명이라면 하느님과의 불통은 죽음입니다. 하여 개인이든 공동체든 살기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공동체 일치의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수직적 소통인 기도와 함께 가는 이웃과의 수평적 소통의 대화와 사랑입니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과의 소통과 함께 가는 이웃과의 소통입니다. ‘하느님의 일’인 기도가 잘 될 때 ‘함께 사는 일’도 수월해집니다. 하여 사부 성 베네딕도도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인 공동전례기도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교회공동체의 일치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도입니다. 숨쉬듯이 끊임없이 깨어 기도할 때 하느님과 이웃과의 원활한 소통으로 공동체도 살고 개인도 삽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개인과 공동체의 내적성장이요 성숙입니다. 바로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역시 복음의 백성들처럼 주님의 말씀도 듣고 성체도 모시고 영육의 질병도 치유받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와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내적분열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당신과의 일치를 견고히 해 주십니다. 매일의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치유되고 내외적으로 성장, 성숙하는 개인이요 공동체입니다.
아멘.
참된 스승과 제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열둘을 따로 뽑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혁명당원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반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26,31)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일 없는 사람들, 나약한 사람들이 뽑힌 것입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반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요한15,6). 이것이 스승의 참 모습입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이지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함 투성이였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제자로서 역할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혁명당원 시몬은 늘 전투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투와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새 삶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아직 사랑이 여물지 못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여자는 결혼 후 남자가 변하길 바라지만 남자는 변하지 않는 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와는 반대로 변한답니다. 또한 “남자는 결혼해도 여자가 변하지 않길 바라지만 여자는 변한답니다”. 여자도 역시 남자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게 변한답니다. 집에서는 체육복을 입고 그야말로 아줌마가 된답니다. 서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데 부족함에 대해 서로 잔소리만 늘어가면 불행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할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례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스승 앞에 참된 제자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함께 어울리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대방과의 다름을 생각하고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립3,21).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타대오)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어 뽑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누가 뽑혔느냐보다 누가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습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누가 사도로 적임자인가 고심하셨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사도들 중에는 신분이나 자격이나 능력 등 내놓을만한 이들이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 그들을 사도로 뽑은 기준이 되었을까?
사실,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사도로 뽑힐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가진 자들로 보이지 않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 그렇고,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열혈 당원 시몬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밤 새워 누구를 사도로 뽑기에 적합한가를 고심했다기보다, 어떤 제자가 하느님의 뜻인지 기도하셨음을 말해줍니다.곧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 밤 새워 기도하셨음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열둘을 뽑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에 뽑힌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뽑으셨기에 거룩한 사도들이 된 이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뽑힌 후에도 여전히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 않습니다.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그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유다와 시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시몬이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지 타대오, 곧 “용감한 자”라고 불렸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십니다,”(에페 2,20)
그렇습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처럼,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말입니다. 바로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나 봅니다.
이처럼, ‘기초’는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은 드러내지 않듯이, 사도들은 교회공동체를 떠받들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이들을 당신의 사도로 부르시고 파견하고 계십니다. 겸손한 이들은 세상에 녹아,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우리도 겸손한 자 되어,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하라 하신 바를 행하고,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알려주신 바를 선포하는 겸손함을 주소서!
이름 없이도 사랑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부르심에 조건은 없지만 응답은 있어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리고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
오늘은 두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왜 이 두 분은 같이 축일을 지낼까 하는 점에서 묵상을 해봤습니다.
역사적인 근거는 확실하지 않지만 하나는 두 분이 같이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셨다는 공통점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형제들일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 13장 55절에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는 구절이 나오지요. 그래서 오늘은 주님의 형제요, 제자요, 사도인 두 분을 묵상해봤습니다. 우리도 두 분처럼 주님의 형제요 제자요 사도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친형제인지 사촌형제인지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지만 형제가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키 힘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시몬이 혁명 당원이었으니 시몬에게는 예수님이 혁명의 우두머리로 여겨져 제자단에 합류할 수도 있었겠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혁명의 생각이 전혀 없으셨기에 시몬과 유다를 제자와 사도로 뽑으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지요.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 신앙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인간적인 관계나 요소가 선택의 변수가 될 수 없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서 능력이 많아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니지요.
그보다는 하느님이 당신 뜻대로 누군가를 선택하시고 그에게 직분에 걸 맞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보면 주님도 그렇고 두 사도도 형제라는 인간적인 관계를 생각지 않고 하느님의 선택에 순종한 것입니다.
주님은 육신의 형제를 12사도로 뽑으신 것이 아니라 같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래서 영적인 형제인 유다와 시몬을 뽑으신 거고, 유다와 시몬도 육신의 형제가 아니라 주님과 같은 하느님의 자녀요 영적인 형제로 사도가 된 것입니다.
복음에서 보면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을 인간적인 관계로 묶으려고 할 때 주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당신과 같이 실천하면 다 영적인 어머니이고 형제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도 시몬과 유다 사도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형제가 되고 제자와 사도가 되도록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지요.
이 부르심에는 하느님의 뜻만 있지 우리의 인간적인 조건은 없습니다.
출신이나 능력이나 인간적인 관계 같은 것이 부르심의 조건이 아니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 있고 나머지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에 우리의 인간적인 조건은 없지만 우리의 응답은 있어야 하고 그것도 사랑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묵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두 사도는 열두 사도들 중의 두 사도들로서, 시몬은 사도들의 이름 목록에서 열한 번째에 놓인 사도이고, 가나 출신으로서 유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혁명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성 유다는 타대오라고도 하며 최후 만찬 때 주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여쭈어본 사도였다. 성서에서는 유다를 가리옷 사람 유다와 구별하고 있다.
복음: 루카 6,12-19: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을 계속할 제자들을 선택하신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마르 3,14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 중에 하나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즉 제자의 신분은 그분의 도구나 심부름꾼이나 종이 아니라, 당신의 일을 함께 생각하고 염려하고 기쁨을 나누는 친구의 신분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죄 많고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친구로서 대하시는 것을 볼 때 참으로 큰 은총이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의 모습들을 보면 서로가 완전히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모두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한 공동체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각자가 모두 다르지만 주님 안에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당신을 각자가 처한 삶의 장에서 증거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또 사도로 선택받은 이들이 그렇게 특별한 교육도 받은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보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인간의 힘과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모두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신분으로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한 자격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미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당신 사업의 중책을 맡기기 위해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제자는 본시 배우는 사람이요, 스승이란 가르치는 분이다. 여기서 제자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스승에게 배우는 자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말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언제나 배우고 따르며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부름을 받은 우리의 할 도리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께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뵈올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열두 사도들이 믿음에 있어서 또 실천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런 결점은 있을 것이다. 아니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선택해 주신 그분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사랑의 삶을 산다면 우리도 그분을 닮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이란, 즉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생활하고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사랑과 선을 선포하는 사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성 시몬과 성 유다는 열두 사도의 일원이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기 전까지 유다 국가의 민족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결성된 열혈당의 일원이었습니다(6,15). 따라서 그는 구약의 하느님 말씀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선교하다가 톱으로 몸이 잘리는 형벌을 받아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마태 10,3; 마르 3,18)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유다 1,1)로 기록된 유다서의 저자는 아닙니다. 유다서 저자가 사도라는 확실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 사도는 유다 지방에서 선교하다 순교했다고 전해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사도로 뽑으셨지요(6,12-13). 그분께서는 계시와 기도의 장소인 '산'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오직 하느님 눈으로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적인 성숙도나 효율을 선발기준으로 삼으셨다면 그 누구도 뽑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 복음선포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느님의 계획은 그렇게 인간적인 기준이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 2,19-20)
우리도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답게 처신해야겠습니다. 곧 어떤 일이나 사물을 대할 때 나의 생각이나 뜻이 아니라 먼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뽑힌 사도들처럼 세상적인 야망이나 계획, 행동방식, 습관, 가치관을 떨쳐내고 모퉁잇돌이신 그분으로 옷을 바꿔 입어야겠지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우리 안에는 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사랑이신 분께 되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은 사랑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선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선을 되돌림으로써 '좋음' 자체이신 그분과 일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선의 사도, 정의와 평화의 사도로 부르시고 파견하신 주님의 뜻임을 상기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내 인생길에 늘 동행해주시며 사랑의 도구로 삼아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기도하시며 사도들을 뽑으신 예수님처럼 주님 안에서 주님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를 모퉁잇돌 삼아 죽기까지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주님을 선포했던 사도들을 본받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님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맹인이었던 바르티메오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애타게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모습이 다가옵니다. 시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볼 수 없게 되었기에 그의 답답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가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할 때 얼마나 간절함을 갖고 청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옵니다. 이러한 간절함을 갖고서 기도해 본적이 없기에 오늘 저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한 순간의 기도라도 최선을 다하고 간절함을 갖고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규칙적으로 기도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밤새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 보면서 예수님께서 왜 기도가 필요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그만큼 간절하고 아버지의 뜻이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하실 때마다 자신의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알고자 노력하셨음을 복음서는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께서는 기도 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고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산’을 찾으시는 이유는 한적하고 당신과 아버지 단 둘이 있기에 방해 받지 않는 장소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워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살피시고 난 뒤에 뽑으셨던 사도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바로 당신의 사도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의 사도들 한 분 한 분을 기억하시는 예수님의 기억 속에 마찬가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도 기억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면서 참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이고 사제인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깨닫습니다.
열두 사도들의 면면을 보면, 참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당신의 사도로 뽑으십니다. 그 중에는 우리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참으로 함께하기 힘든 제자들의 조합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구체적으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무지한 어부, 로마제국에 협력하며 민족을 배신한 세리에 이어서 그와 맞서는 정반대의 신분으로 반 로마 세력이었던 열혈당원마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뽑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 뜻의 신비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역시 이러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있을 때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나를 미리 알려 주시는 것 같습니다.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함을 알려 주십니다.
‘아는 것이 힘’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이 아는 것이 힘이고 출세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람이 성공을 가져다 준다고 이들을 찾는 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경향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추세가 가져다 주는 심각한 문제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인 사회에서는 인간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 만이 보입니다. 그래서 다시 ‘인간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눈은 ‘아버지의 뜻을 찾는 것’에서 나옵니다. 매사에서 아버지의 뜻을 찾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주시고 기억해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뜻을 찾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초대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축하를 드립니다.
과묵하고 충실했던 주님의 사도, 시몬과 유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서를 읽다보면 베드로나 안드레아, 야고보나 요한처럼 자주 등장하는 사도들이 있는가 하면, 거의 침묵하고 계셔서 그 존재감이 미미해보이는 사도들도 계십니다. 그들은 나중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을 제외하고, 10번째, 11번째로 소개되고 있는 사도들인데, 시몬과 유다(타대오) 사도입니다.
시몬 사도에 대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그가 갈릴래아 카나 출신이며 전직 열혈당원이었다는 것 뿐입니다. 그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유추할뿐입니다. ‘유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 폭력과 살상도 마다하지 않던 독립군 유다가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군사로 변화되었다.’
유다 사도의 이름은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딱 세차례에 걸쳐 아주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번에 걸쳐 등장하는 사도들의 명단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빠져있습니다. 대신 타대오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유다 사도를 예수님의 형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유다 사도는 메소포타미아 지방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수호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백과사전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모호한 인물에 대해서는 신뢰할만한 정보가 없다.”
두 사도들에 대한 관련 자료나 문헌이 적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베드로 사도나 요한 사도처럼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도단 내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해서 그 영향력이 미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쪽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묵하면서도 충직했습니다. 고민하고 따지기보다는 묵묵히 실천했습니다. ‘스승님의 모든 말씀은 내게 있어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목숨걸고 준수해야 할 명령입니다!’라고 여기며 목숨걸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에 충실했습니다. 사도로서 자신의 신원에 걸맞게 살려고 애를 쓰다보니 따로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 추수할 일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 앞에서 말하기 보다는, 하루 온종일 죽기살기로 헌신하고 뛰어다닐 일꾼이 필요했었는데, 그들이 바로 시몬과 유다 사도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도 많은 말보다는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주님을 증거할 또 다른 시몬과 유다 사도가 필요합니다.
박미라 도미틸라 님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주시고, 베드로라는 반석위에 12사도라는 기둥을 세우시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백성들이 벽돌 한 장 한 장이 되어 천주교회라는 건물을 2,000년 동안 이 땅에 다 지으시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통하여 대희년을 선포하셨지요.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에 그러한 것들이 사도 바오로께서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서간(독서 말씀) 안에 잘 드러나 있어 너무나 기쁩니다.
그 어떤 죽음의 세력도 무너뜨릴 수 없는 튼튼한 집! 우리가 지금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 있는 그 집 안에 들어 와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대희년이 지난 지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집을 짓는데 일조하는 것이 아니라, 잘 지어진 집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가꾸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노력여하에 따라 그 집안에 들어오지 못했거나 아직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들어 와 살고픈 마음을 갖게 할 수도 멀리 멀리 달아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묵주 기도 성월이며 전교의 달 막바지에 와 있네요.
선교의 수호자이신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단 한 번도 밖에 나와서 선교를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일상 안에서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영혼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거룩한 의향을 가지고 온전히 주님께 봉헌함으로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의 집 안에 들어 와 살게 하셨지요.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매일 매순간 그렇게 살지 못하여 아무도 끌어 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할까요?
그 집을 짓는데 동참한 많은 성인들이 자신이 당하는 고통 하나도 헛되이 하지 않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쓰셨다는데, 하루하루의 삶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잊은 채 자신의 안위만을 찾고, 조금만 몸이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불평하기에만 급급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내 삶의 모습으로 인해 하느님의 집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게 살아야 할 텐데요. 나에게 주어진 그 소중한 시간들을 헛되이 보내는 일 없이 내 생각이 늘 거룩하여지도록 ?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더 거룩하여지도록 ? 내게 오는 모든 고통이나 힘든 모든 일들도 그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도록 ? 그래서 주님의 집이 튼튼하게 지어지는데 보탬이 되신 많은 성인들처럼 - 나도 주님의 집이 아름답게 꾸며지는데 보탬이 되어 - 단 한 사람이라도 나로 인하여 주님의 집에 들어 와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어제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 보렵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막연한 시간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는 시간입니다.
불러 모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부르심을 통해
부르심의 잔을 마시는
사도가 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있기에
제자들이 있고
사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가장 큰 열망을
희망안에서
만나게됩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이 사건을 통해
부르심의 근원이
뽑으시는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불완전한 이들을
부르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기억하는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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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의 세포는 매순간 다시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부 세포는 28일 만에 모든 세포가 바뀌고, 손발톱은 180일, 피 속의 적혈구는 120일, 그리고 뼈와 근육계통은 200일 정도면 새로운 세포로 완벽하게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몸이 7개월이 지나면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몸으로 바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조금 이해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보면 어떻습니까? 상당히 낯선 느낌을 받게 되지요. 계속해서 몸의 세포가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부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거의 7개월이 지나면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서 사는 것이 아닐까 라는 우스운 상상을 해보게도 됩니다.
이렇게 내 몸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의 내 몸이 좋다면서 세포를 바꾸지 않겠다고 말해도 내 몸은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변하고 있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변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변해야만 합니다.
이런 몸의 변화를 떠올리다보니 문득 내 머릿속 생각은 왜 바뀌지 못할까 싶습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지나도 그 머릿속 생각을 바꾸지 못해서 여전히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우리의 생각을 잘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변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 몸이 계속해서 변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보다 더 좋은 쪽으로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좋은 생각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12사도를 뽑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제자들의 모습은 사실 아주 형편없었지요. 단점들이 너무나도 많이 보이는 왜 저런 사람들을 제자들로 뽑았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뜻에 맞게 변화됩니다. 단 한 사람, 그 변화를 거부했던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이었습니다. 그 변화를 거부했기에 그는 결국 주님을 팔아넘기고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변화되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쪽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그래서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우리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이 주님의 바람을 얼마나 따르고 있는 우리였을까요? 그 변화를 거부한다면, 또 나쁜 쪽으로의 변화만을 추구한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같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김연수).
말
버스 맨 뒷자리에 남학생 넷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배짱 좋은 여학생이 남학생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 덜컥 앉는 것입니다. 그러자 한 명의 남학생이 슬쩍 비꼬면서 말합니다.
“개밥에 도토리가 끼었네.”
다른 남학생들은 재미있다고 큰소리를 내면서 웃었지요. 하지만 이 여학생은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그냥 앉아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내릴 때가 되었나 봅니다. 자리에 일어나 내리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개밥들아 잘 가라. 이 도토리 내린다.”
여학생을 비꼬는 말이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나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말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남에게 힘을 주는 말인지, 아니면 남의 힘을 빼는 말인지를 말입니다. 그런데 남의 힘을 빼는 말은 부메랑이 되어서 결국 나의 힘을 빼는 치명적인 말이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번 떠나면 다시는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지요. 첫째는 한번 지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기회이고, 둘째가 활의 시위를 떠난 화살이며, 셋째가 우리 입에서 떠난 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이란 일단 내게서 떠나면 나 자신에게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되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님
지난 수요일에 멀리 시애틀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40년 전에 미국으로 떠났던 분입니다. 명동까지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저의 묵상 글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을 방문하여 성지순례를 하였고, 저를 만나고 싶어서 방문을 하셨습니다. 사무실에서 담소를 나누었고, 교구청 소개를 해 드렸고, 다음에는 시애틀에서 만날 것을 이야기하며 헤어졌습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칼과 총이 아니라, 문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입니다. 매일 묵상 글을 적는 것은 저 자신의 성찰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감사할 일입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사도들을 선발하셨습니다. 오늘은 시몬과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동창 신부님 중에 시몬은 2명입니다. 한 분은 오랜 시간 군 사목을 하였고, 지금은 본당에서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분은 신학교에서 영성지도를 하였고, 저와 함께 신학생들을 위한 30일 피정 지도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상설고해 사제로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축일을 지내는 동창 신부님들이 모두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축일을 맞이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교구청에는 추기경님과 더불어 15명이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저를 성소국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제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외적인 능력을 바라실 것입니다. 성소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조직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고, 능력과 영성을 겸비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신학교에 입학 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제가 주관하는 행사들을 원만하게 진행하는 것일 것입니다. 성소국의 소식지를 새로이 개편하였고, 사제 양성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으며, 예비 신학생을 위한 교재를 제작하고 있고, 예비 신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고, 본당 성소 후원회 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능력과 더불어 내적인 힘을 바라실 것입니다.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하고, 기도와 묵상을 깊이하고, 직원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기를 원할 것입니다. 교구청의 동료 사제들과 원활하게 지내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지난 3년을 돌아보면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직원들에게는 4가지 유형의 지도자가 있다고 합니다.
가장 힘들어하는 지도자는 멍청한데 부지런한 지도자입니다. 이런 지도자와 함께 일하면 뒷감당을 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선택하고, 결정한 일들이 수시로 변경되고 바뀌기 때문입니다. 직원들에게 인내와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힘들어 하는 지도자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지도자입니다. 이런 지도자와 함께 일하면 매일 야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것들을 기획하고, 제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기 힘들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직원들의 능력도 커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런 지도자였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좋아하는 지도자는 멍청하고, 게으른 지도자입니다. 당장은 편하고 좋지만 이런 지도자와 함께 일을 하면 능력을 키우기 힘들 것입니다. 기회도 도전도 없기 때문입니다. 추운겨울을 맞이해야하는 베짱이처럼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직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지도자는 똑똑하지만 약간 게으른 지도자입니다. 앞날을 내다볼 수 있기 때문에 운영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결과와 성과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복지와 휴가를 즐길 수 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면 여행도 하고, 문화행사도 하고,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저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궁금합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것들은 ‘기도, 희생, 나눔, 봉사’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않아서 재미있지는 않지만 우리 영혼을 맑게 하고,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는 빛이 됩니다.기도는 향기가 되어 지친 이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나눔은 알찬 열매를 맺어 더 큰 축복으로 돌아옵니다.사랑은 깊은 샘물 같아서 할수록 더 큰 사랑이 솟아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연어가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다시금 삶의 원천인 강가로 돌아오듯이 우리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그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곳은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주셨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갔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며 거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입니다. 나누고 살기에도 바쁜 인생입니다. 늘 감사드리고, 항상 기도하고, 언제나 기뻐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의 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기도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나라가 국기문란, 국정농단 사건으로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럴수록 깨어 기도하며 제자리에서 제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와 일과 성독(렉시오 디비나)은 수도생활을 떠받치는 3대 기둥이라 합니다. 하여 ‘기도에는 신비가神?家가 되어야 하고 일에는 전문가專門家가 되어야 하고 성독聖讀에는 학자學者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또 ‘수도자들은 기도에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성서의 사람들은 모두가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기도의 모범이자 기도의 대가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소통이 원활해야 이웃과의 소통도 원활해 집니다. 하느님과의 소통과 이웃과의 소통은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은 중대한 일을 앞두었을 때는 온통 산에서 밤을 지새워 기도하셨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날 때쯤은 외딴곳에 물러가시어 동터올 때까지 아버지와 깊은 친교를 나누셨습니다. 산에서 아버지와 만나는 밤시간은 그대로 영육을 충전시키는 ‘관상觀想의 샘’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복음 서두의 묘사가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입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이어 기도로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시어 사도라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열둘 중 시몬과 유다 사도의 축일을 지냅니다.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기 위해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타대오라 불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열매가 열두 사도입니다. 열두 사도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해 열두 사도를 택한 것입니다. 우리의 수도성소 역시 똑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한 것입니다. 바로 성소는 주님의 신비로운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와 사도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들은 모두가 주님의 제자들이지만 주님의 제자들이라 하여 다 사도가 아닙니다. 제자는 주님으로부터 배우며 따르는 이들이고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띠고 파견된 이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구별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주님께 끊임없이 배우고 따르는 제자들이면서 복음 선포의 사도직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 모두가 안으로는 관상觀想의 제자들이고 밖으로는 활동活動의 사도들이라 함이 맞습니다. 제자이며 사도로서의 신자들에게 우선적인 일이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기도의 소통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은 분별의 지혜도 기도로부터 나왔고, 능력의 말씀도 치유와 구마의 기적도 기도로부터 나왔습니다. 기도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고,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다 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말씀도 듣고 영육의 질병도 치유되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기도의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의 말씀은 바오로 사도의 기도를 통한 깨달음이 분명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통해 교회공동체 일원으로서 우리의 신원을 정확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외국인도 이방인도 아닌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는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가톨릭 교회의 자랑스런 전통이고 완벽한 시스템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적 공동체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 점을 잘 지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는 현재진행형의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를 이루어 주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우리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주님의 거룩한 성전인 공동체가 '하느님의 거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만나야 할 곳은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의 공동체요 미사전례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수도교회공동체가 거룩한 성전으로 잘 자라나고, 하느님의 거처로 잘 지어질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은혜로운 참 만남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친히 뽑으신 열두 사도들의 명단 안에는 두 명의 시몬이 등장합니다. 수제자가 된 어부 출신의 시몬 베드로, 그리고 전직 ‘열혈당원’ 시몬.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열혈당원 시몬의 삶은 이름에 걸맞게 유다 독립을 위한 목숨 건 투쟁의 삶이었습니다. 비록 계란으로 바위치기지만 작은 힘이라도 보태 이 불의하고 암담한 현실을 한번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로마 식민통치의 종식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바쳐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하 군사훈련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테러와 살상을 위한 예행연습에도 충실했습니다.
당시 열혈당원들이 지니고 있었던 조국의 독립을 향한 열정과 과격함은 기록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당시 저명한 유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들에게 있어 조국의 독립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정당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살상도 파괴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들은 로마황제와 타협하던 이들, 우리로 치면 친일파 매국노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며 응징했습니다.
당시 열혈당원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유일하며 영원한 왕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로마 황제는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의 왕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로마가 요구하는 세금을 바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법규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하며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예루살렘 함락이후 열혈당원들은 그 유명한 마사다 요새로 올라가 끝까지 항전하다가 숨졌습니다.
이런 열혈당원 시몬이 기적처럼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적인 분노와 열정,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 찬 열혈당원 시몬을 물끄러미 바라보십니다. 이윽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그에게 건네십니다. 적개심과 폭력성으로 가득했던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십니다. 마침내 한 마리 순한 양처럼 변화되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까지 불사하던 그가 이제는 사랑과 자비의 열혈당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매국노를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던 그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선포자로서의 열정으로 끓어오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강렬한 애국심과 저항정신은 이제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변환되었습니다. 결국 유다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던 그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한 인간의 만남은 그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혼동으로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 안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 어떤 것이 더 큰 것인지? 삶의 질서를 잡게 도와주십니다. 마침내 이승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던 삶의 전환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과 한 인간의 ‘참 만남’은 이렇게 큰 은총과 선물로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과의 그 은혜로운 ‘참 만남’을 이뤄냈습니까? 그리고 그 ‘참 만남’ 이후 실제적인 삶의 전환을 이뤄냈습니까?
♣ 열린 공동체의 사랑의 일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해져 그들이 당신을 처치하려고 모의까지 하는 시점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사도로 뽑으십니다(6,12). 죽음으로 치닫는 길목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려는 열정을 더욱 불태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였을까요? 무엇보다도 그 공동체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수난의 사랑을 위해 부르신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것은 이기적인 목표나 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재능이나 지식, 부와 권력, 인품과 성격 등에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작용하는 열린 이 공동체의 구성원은 모두가 동등한 부르심에 사랑의 사도가 됩니다.
주님께서 뽑으신 사도들은 개방성과 동등성을 특징으로 하는 예수님의 학교에서 사랑을 체득했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기도와 말씀의 경청, 치유와 용서 체험, 함께 생명을 나누는 식사와 대화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수난의 사랑을 살아낼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형성된 이 공동체는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하여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거룩한 성전, 하느님의 거처입니다(에페 2,20). 따라서 이 공동체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장하는 사랑의 배움터요 은총의 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나 하느님의 집이 되어 모든 이를 그리로 인도해야 할 사랑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사랑을 위해 뽑힌 이들은 인간적인 부족함과 다양성에도 사랑 실천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 되었습니다. 성 시몬과 성 유다도 사랑의 길을 항구히 걸었던 열두 사도의 일원이었습니다. 사도 시몬은 로마의 지배에 맞서 민족 해방을 위해 싸운 열혈당원이었는데(루카 6,15), 페르시아 지방에서 선교하다가 톱으로 몸이 잘리는 형벌을 받아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타대오’(마르 3,18)라고도 불리는 유다 사도는 서기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 페르시아 지방에서 선교하다 순교했다고 전합니다(시몬과 유다의 수난기). 그들은 사랑으로 불러주신 예수님을 따라 목숨을 바쳐 사랑의 절정을 보여줌으로써 부르심에 충실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사도들을 본받아 예수님을 관계의 중심,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온힘과 온 마음을 다해 죽기까지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사랑을 위해 차별과 배척과 단절의 문을 열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내놓는 열정이 타올랐으면 합니다.
그 길은 내가 죽어야 남을 살릴 수 있기에 쉽지 않은 길이지요. 그렇지만 하느님의 사랑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묵묵히 그분의 뜻을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랑 실천이라는 공통의 목표 앞에 모두를 받아들이고, 공동의 선을 실현해가는 진정한 ‘사랑의 일꾼’이 되어야겠지요.
오늘 이 사회가 병들고, 그래서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내 마음 속에,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 예수님을 모퉁잇돌로 모시고, 성령 안에서 일치하여, 담대하게 주님의 길을 가는 오늘의 사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인 우리가 다른 이들을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주님의 성전으로 인도하는 쓸모 있는 도구이길 희망합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루카 6,12)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살아가노라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누구나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내 머리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사실 가장중요한 것은 조용히 기도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일입니다.
내 머리와 인맥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얻은 결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면 헛수고만 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12명의 사도들을 선발하시면서 무척 고민이 많았나 봅니다.
아마도 당신이 작성한 명단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기도를 시작했는데 하느님께서는 다른 몀단을 자꾸만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 사람은 도저히 아니라고 말씀드리지만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우기시는 겁니다.
밤새 고민하며 기도하며 결국 내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명단을 발표합니다.
장고 끝에 악수인가요?
그 명단 끝에는 차마 뽑고 싶지 않았던 "유다 이스가리옷"이라는 이름이 들어갑니다.
결국 예수님의 생각이 맞지 않았나요!
예수님은 내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늘 고민하셨고 그래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밤새워 기도하시곤 하셨지요.
그런데 우리는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보다는 내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땡깡을 부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내 생각과 뜻을 잘 정리하되 적어도 하느님께서 그것을 원하시는지 제발 여쭈어나 봅시다.
다른 사람의 조언은 잘도 구하면서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조언을 구하지 않다니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멘!"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 열둘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타대오)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뽑기 위해, 밤 새워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밤 새워 기도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누구를 뽑을까 누가 적임자인가 고심하셨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사도들 중에는 신분이나 자격이나 능력 등 내놓을만한 이들이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 그들을 사도로 뽑은 기준이 되었을까?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사도로 뽑힐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가진 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도 그렇고,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열혈 당원 시몬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에 뽑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뽑으셨기에 그들이 거룩한 사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밤 새워 기도하셨음은 누구를 사도로 뽑기에 적합한가를 고심하셨다기보다, 어떤 제자가 하느님의 뜻인지인지를 기도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으로 뽑힌 이들이요,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유다와 시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시몬이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지 타대오, 곧 “용감한 자”라고 불렸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이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십니다,”(에페 2,20)
그렇습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입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 없고,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아마도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사실, 기초는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이들을 당신의 사도로 부르시고 파견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겸손한 자 되어,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도들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드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뽑으신
사도들은
우리의 삶을 안내하는
안내자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힘으로 누군가를
지배하는 사람이 아닌
당신들의 삶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안내해 주는
안내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픈 우리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루카 6, 18)
우리의 이 아픈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는
안내자가 필요한
요즈음의 시간입니다.
어느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삶의 길을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올바른 삶을 위해
삶을 묵묵히 떠받치는
주춧돌과 기둥들이
간절히 필요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보여주신 삶은
권력을 통한 야망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권위를 통한
진정성있는
소통이었음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이 시간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아픔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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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보다가 소위 울렁증 증세가 나타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내용이 나와 있었습니다. 이 내용에 관심이 많이 가더군요. 왜냐하면 제가 한 때는 엄청난 울렁증으로 고생했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중요한 발표를 할 때 두렵고 떨리는 경우를 이야기하면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마음으로 이런 공포와 불안감을 억누르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즉,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마음을 바로 잡자. 나는 겁도 없고 확신에 찬 발표자다. 이러한 자신감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자.’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생각과 달리 계속 떨다가 겨우 마치거나 아니면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내려오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 현실의 세계에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긴 마음잡은 대로 다 되는 경우가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모두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다 이루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공간을 넓힐 것을 이야기합니다. 즉,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군.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지.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괜찮아. 이런 불안한 마음을 언제 체험해보겠어? 나는 이렇게 떨리는 기분이 좋아.’ 등으로 부정적인 생각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마음을 넓혀 불안을 그 안에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 이런 식으로 울렁증을 없앴기 때문에 공감이 컸습니다. 그 부정적인 마음까지도 포용하는 긍정적인 마음이 넓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지요. 그러면서 부정적인 마음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폭 좁게 만들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천년 전에 오신 예수님께서 가장 주력하신 것이 바로 이 마음을 넓히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 당신이 뽑은 제자들을 보면 부족함이 너무나도 많은 것처럼 보이는 마음이 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성격도 그리 좋지 않고, 유혹에도 자주 넘어가서 좌절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넓혀주십니다. 자신의 부족함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랐듯이, 우리 역시 세상의 것들을 첫째 자리에 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첫째 자리에 놓고 주님을 따라야 마음의 크기도 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공간을 넓혀나갈수록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아집니다. 그리고 내 삶을 더욱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렇게 좋은 길로 부르시는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남이 보는 행복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행복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김별아).
우리가 가야할 길
뇌과학 연구를 보면, 우리의 뇌는 이기적인 방법으로 성취를 이룰 때보다 남을 배려하고 함께 기쁨을 나눌 때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이 결혼한 사람보다 심장병 같은 질환 발병률도 높고 우울증 같은 심리적 문제도 더 많은 것이라고 하네요.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이기적인 생각을 버려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보다는 배려하고 함께 하는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순간의 만족을 이루는 이기적인 욕심이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어떤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처음부터 생활 자체를 힘들게 할 정도의 중독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적은 양으로부터 충분히 만족을 볼 수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 만족이 점점 더 크고 자극적인 것을 요구하게 되어 결국은 이 중독에서 헤어 나오기가 힘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뇌가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모습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합니다. 즉, 혼자만의 욕심 채우기가 아니라, 배려하고 함께 기쁨을 나누도록 설계되어 있음을 기억하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뇌과학 연구를 보다보니, 주님께서 왜 우리에게 어떻게든 사랑하라고 강조하셨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살기를 바라는 주님,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결심한 것은 말을 하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묵상 글을 쓰면서 절두산 성지에서 새남터 성지까지 걸어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꾸르실료 회관에서 동창회를 마치고 모두들 각자의 자리로 갔습니다. 저는 마음먹은 대로 걸어 보았습니다. 정말 가을바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강가에 놓여있는 의자에 잠시 앉아도 보았습니다. 억새와 꽃을 보았고,흘러가는 강물을 보았습니다. 강물이 도착할 바다도 생각을 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낚시를 하는 사람, 저와 같이 걷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신앙의 모습을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를 하십니다. 모인 사람들 중에서 제자를 뽑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신앙은 기도와 실천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춘천교구로 가서 사목을 하는 선배신부님이 있습니다. 작은 본당에서 손수 밥을 해서 먹고, 빨래도 하고, 사무실도 지키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서울에서의 사목도 좋았지만 시골 본당에서 사목을 하고 싶어 하셨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춘천교구의 교구장님도 기꺼이 신부님의 요청을 받아 주셨습니다.
꿈을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가지입니다. 꿈을 간직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혼자만의 꿈으로 머물지 않고 더불어 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질문을 하십니다. ‘어떻게 매일 묵상 글을 쓰시나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체질입니다. 신학교에서 ‘설교학’ 강의를 하기 때문에 모범을 보이고 싶었습니다.기도가 부족한데 아침 2시간을 기도할 수 있는 것도 기쁨입니다. 만나는 사람, 보이는 것들,읽었던 책들은 모두 묵상의 주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많은 보물을 심어 주셨습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런 보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은 남을 도와주는 걸인을 통해서 보물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 외로운 이, 병든 이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하였습니다. 시작은 작았지만 하느님께서 풍성한 결실을 맺어 주셨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들입니다. 꿈을 가질 수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첫 발걸음을 디딜 수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뒤에는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화답송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저 넓은 우주를 130억 년 전에 만드신 것입니다. 35억 년 전에 지구별에 생명의 씨앗을 심어 주셨습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찬미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기도의 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해서 사람이고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분도수도회의 모토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일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나 사도에게 기도는 필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이 제자들이요 예수님의 파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사도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자 사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거룩한 신원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대가였습니다. 늘 기도를 통해 아버지와 소통하셨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외딴곳에 물러나 기도하셨고 오늘과 같이 12사도를 선택하는 중요한 일을 하실 때는 반드시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산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만나는 거룩한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복음의 서두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기도를 통한 분별의 지혜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기도의 은총으로 뽑힌 12사도 공동체가 참 풍요롭고 놀랍습니다. 다 다른 색깔, 모양, 크기의 사도들입니다. 말 그대로 다양성의 일치가 바로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 기도의 열매들이었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 역시 예수님 기도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바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두 사도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새삼 성소는 예수님 기도의 열매이자 하느님의 귀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기도 역시 보고 배웁니다. 제자들이나 사도들이 예수님의 기도를 보고 배웠듯이 수도원을 찾는 모든 이들 역시 수도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보고 배웁니다. 하여 믿는 이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식이자 밥이 기도입니다.
영혼의 힘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기도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기도의 힘이, 하느님의 힘이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아, 바로 이것이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기도할 때 영육의 정화와 성화에 이어 예수님처럼 말씀의 은사도 받고, 치유의 은사도 받습니다. 이런 이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바오로는 신도들이 된 이방인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신원입니다. 성도들(saints; 희랍어 hagioi)은 ‘분리된 사람들(people set apart)’이란 뜻으로 ‘다른(different)’ 사람들을, 세례받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니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인 우리는 모두 거룩한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지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모퉁이돌이 된 건물로서의 교회입니다. 그러니 신약의 성전은 한 장소에 벽돌로 지어진 성전이 아니라 사람들로 이루어진 성전을 뜻합니다. 그러니 어디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는 곳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이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심오한 신비가 잘 드러납니다. 고정된, 건물로서의 교회공동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는 살아있는 공동체요, 이 교회공동체가 바로 ‘하느님의 거처’가 된다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교회공동체의 성장과 성숙에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교회공동체를 끊임없이 성장, 성숙시켜 주십니다.
아멘.
뽑힌 이들의 귀소 본능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기념하는 성 시몬과 성 유다는 열두 사도의 일원이었습니다. 카나 출신인(마태 10,4) 시몬은 유대 민족 해방을 위해 싸운 열혈당원이었다가(루카 6,15) 제자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지방에서 선교하다가 톱으로 몸이 잘리는 형벌을 받아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시몬은 로마를 반대하는 유대 민족의 열혈당원이라 불릴 만큼 구약의 하느님 말씀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마태 10,3; 마르 3,18)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가 유다서의 필자라는 주장이 있으나 서간의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유다 1,1)로서 사도라는 확실성이 없기에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주석 성경, 유다 서간 입문, 970). 유다 사도는 유다 지방에서 선교하다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사도로 뽑으셨습니다(6,12-13). 그분께서는 계시와 기도의 장소인 '산'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인간적인 잣대가 아니라 하느님 눈으로 사도들을 뽑으신 것입니다.
아마도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민족해방이라는 전혀 다른 목적을 추구했던 열혈당원인 시몬이나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쉽게 치우치는 성질 급한 베드로 같은 사람은 오히려 복음선포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해 뽑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하고 인간적인 허물이 많은 이들을 도구로 삼아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어나가십니다. 이렇듯 사람의 생각보다 깊고 넓으며, 한없이 높으신 주님께서는 미약한 인간을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그렇게 인간적인 기준이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 2,19-20)
우리도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답게 처신해야겠습니다. 곧 어떤 일이나 사물을 대할 때 나의 생각이나 뜻이 아니라 먼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뽑힌 사도들처럼 세상적인 야망이나 계획, 행동방식, 습관, 가치관을 떨쳐내고 모퉁잇돌이신 그분으로 옷을 바꿔 입어야 합니다.
철새나 연어와 같은 동물들에게는 계절이 바뀌면서 본래의 삶의 자리를 찾아가는 귀소(歸巢)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인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아가곤 합니다. 사도로 파견된 이들이 찾아 되돌아가야 할 고향은 하느님뿐입니다. 사랑으로 지음 받았으니 사랑이신 분께 되돌아가는 것이 본분이겠지요.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요 또 다른 사도로서 살아가야 할 우리의 소명입니다.
오늘도 기도하시며 사도들을 뽑으신 예수님과, 자신의 가치 기준과 행동방식을 버리고 그분이 보여주신 길을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죽기까지 따랐던 사도들을 본받아 하느님께 돌아가는 복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루카 6,12-13)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밤을 새워 본 적이 있습니까?
뜬 눈으로 밤샌 적도 꽤 있지요?
잠못 이루는 그 숱한 밤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예수님께서도 밤을 새운 적이 꽤 많았나 봅니다.
예수님은 중대한 일이 있을 적마다 밤새워 기도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밤새 고민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안돌아가는 머리로 이 생각 저 생각하고 걱정하고 고민하지만 정작 기도는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걱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기도하면 하느님과 함께 고민하는 것이고 걱정하면 나 혼자 고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느냐고 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고민거리가 있으세요?
그렇다면 걱정은 내려놓고 하느님께 기도하십시오.
열심히 기도하고나서 나오는 답으로 결론을 자신있게 내리십시오.
주님과의 일치인 친교
-이종경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랐던 이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기 위해서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을 잘 뽑게 해달라는 청원의 순간이기도 했겠지만, 동시에 성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실제로 열두 제자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사명은 외부로 나가서 전교를 하고 놀라운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닌 ‘주님과의 친교’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도’라고도 불린 제자들이 해야 할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지만, 그보다 앞서 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친교였습니다.
그분과의 친교는 외적 사명을 수행한 후에 갖는 휴식의 의미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친교는 사명을 위한 준비단계가 아니라, 오히려 사명의 최종 목표였습니다.
일하기 위해서 친교가 있었던 게 아니라, 친교를 위해서 일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제자들의 눈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친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기쁘고 좋은 것을 알아볼 수 있는 행복은 바로 예수님과의 친교로 말미암아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과거에 사도들을 부르셨듯이 오늘도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로 초대하십니다.
부르심과 행복.
-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에게 선택된 사람은 행복합니다. 에페서 1장 18절에 부르심 받은 사람은 희망에 찬 삶, 영광의 상속자, 하느님의 강력함 힘으로 믿는 이들을 뛰어나게 한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 할 때는 다른 의미로 받아 들여겠지만 하느님이 준비한 큰 은총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사도뿐 아니라 모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행복한 이유는 주님이 그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성사도 하느님의 자녀 되고 자비를 받아 희망을 가지게 되고, 하느님의 은총의 능력으로 어떤 고난도 극복하고 주님의 영광에 참례합니다.
그러나 사도로 불리었어도 사도로 살지 않으면 유다스 같이 되고 부름을 따라 사는 이는 베드로사도 그와 12사도 같이 상속의 영광에 참례하게 됩니다.
주님은 사도를 당신에게 부름은 주님의 사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왕 중의 왕 이시만 가장 섬기는 사람으로 사셨고 대 사제로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사셨고 대 예언자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셨듯이 우리도 부르심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모든 이에게 희망이 되어 다른 이들을 섬기고, 하느님의 모든 상속을 나누며 사람과 사람의 연결고리가 되고, 강력한 힘을 말씀을 통해 받고 모든 이가 하느님의 사랑의 은총을 받게 하여야 합니다.
부르심은 받은 사람은 그 부르심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하느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교회 안에 여러 직무에 부르심 받은 사람은 그 직무에 따르는 의무를 다하여야 행복한 사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 축일 맞이하여 부르심이 행복해 지려면 우리도 각자가 하느님의 일에 초대받은 대로 봉사하고 나누고 친교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에페서 1장 23절 “ 교회는 그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분의 충만 입니다.” 하심 같이 모든 믿는 이들이 부르심으로 하느님의 충만함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열 둘을 뽑으셨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삶의 아름다운 기회를
언제나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서두루는 법이
없으십니다.
희망은 모든 것안에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끕니다.
천상의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열 두 사도들을
기도로 뽑으십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당신의 사도들은
어둠을 이겨내는
빛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으며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저마다 처해 있는
고통안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희망으로 이끌고 계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언제나 희망의 주체는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뽑으신
사도들은 아픔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희망으로
새로이 시작하는
일치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도들을 통해
보여주신 일치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희망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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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성공하고자 한다면 ‘3P’가 있어야 한답니다. 첫째 P는 Plan(계획)이고, 두 번째 P는 Practice(행동, 실천)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P가 뜻밖입니다. 글쎄 Prayer(기도)라고 하네요. 사실 세상 사람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P만 있으면 충분히 성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 P역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부족하고 나약함으로 인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동심원>
-송영진 모세 신부님-
10월 28일의 복음 말씀은 루카복음 6장 12절-16절,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와 루카복음 6장 17절-19절, '예수님과 군중'입니다.
어떤 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셔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삼으시고(루카 6,13),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시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루카 6,17).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또 그들의 병도 고쳐 주시고, 그들을 괴롭히는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루카 6,18-19). 이 내용에서 여러 겹의 동심원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고 원을 그릴 때, 중심에서 가장 가까운 원은 사도들이고, 그 바깥 원은 사도가 아닌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또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 뭔가를 청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동심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차별하신 일은 아니고, 사람들 사이에 신분이나 계급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는 일도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 쪽에서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가느냐?
아니냐? 의 차이입니다.
물론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사람들이지만, 사도들 쪽에서 생각하면 그들은 예수님 곁에 바짝 다가간 사람들입니다.
사도들 가운데에서도 거리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였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바로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고, 아마도 배반자 유다는 가장 바깥에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는 편애하시고, 누구는 멀리 하신 것이 아닌데, 제자들 쪽에서 노력의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몸은 예수님 곁에 있을 때가 많았지만, 마음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한 세리들은(루카 5,29)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예수님 곁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다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만지고 병이 나은 여자는(루카 8,44) 예수님 곁으로 다가가려고 무척 애를 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군중은 몸은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로 가시는데 군중이 그분을 밀어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루카 8,43)."
예수님을 밀어 댈 정도였다면 몸이 거의 완전히 밀착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그 군중은 예수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라고 말하면서 믿지 않고 세례도 안 받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말은 하지 않고 '구원'을 동심원으로 설명합니다.
원의 중심에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계시고, 가장 가까운 원은 성인 성녀들, 그 다음에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신앙인들, 그 다음에는 기회가 없어서 세례는 못 받았지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산 사람들, 그 다음에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 기회는 없었지만 착하게 산 사람들...
그렇게 생각하면 구원받을 사람이 대단히 많게 됩니다.
지금 이 표현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구심력은 약하고 원심력은 강한 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수록 더 멀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완전히 떨어져 나갈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밀어내신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 쪽에서 그렇게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원의 중심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력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유혹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유혹은 우리를 원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원심력 같은 것입니다.
그 유혹들이 항상 끊임없이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물리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당에서 지내긴 하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GOP 지역 같은 곳에서 근무하느라고 장기간 성당에 가지 못하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세속적인 어떤 것을 중심으로 해서 살고 있는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스스로 구심력을 끊어버리고 원심력을 따라서 떠나버렸습니다.
그랬다가 회개하고 다시 구심력을 따라서 중심을 향해서 돌아왔습니다.
큰아들은 몸만 아버지 곁에 있었고 마음으로는 원심력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 곁을 떠난 적이 없는데, 큰아들 자신의 마음이 아버지 곁을 떠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즐기고 기뻐하자고 큰아들을 타이르는 말은(루카 15,32) 원심력을 끊고 구심력을 회복하라는 권고입니다.
어느 날 어린이 몇 명이 정원에서 꽃씨를 열심히 심고 그 꽃씨가 잘 자라도록 물을 정성껏 뿌려 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린이들은 집 안 창문가로 달려가서 정원에 꽃이 피어있는지 살펴보았지요. 어린이들은 꽃씨를 심으면 꽃씨가 밤사이에 자라서 꽃이 피리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꽃씨를 심으면 곧바로 자라나 꽃을 피울 수가 있을까요? 어린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심은 꽃씨는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대단히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이들은 꽃씨를 심고 물을 정성껏 뿌리면서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꽃이 핀다는 사실을 모르고 너무 성급하게 결과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대대로 되지 않자 실망해서 심어 놓은 꽃씨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요.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 꽃씨는 싹도 피워 보지 못하고 시들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급한 기대로 인해 인내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꼬집는 예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솔직히 내 행동에 대해서 곧바로 좋은 결과가 나오길 우리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꽃이 피지 않는 것처럼 좋은 결과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커다란 욕심이며 착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주님의 능력이라면 하룻밤 사이에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전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과 욕심을 가지고 서둘러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려는 노력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주님과 멀어지면서,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의 치유라는 효과를 곧바로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기뻤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사실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나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그렇게 노력했습니다. 분명히 손만 대어도 치유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조차도 꺼려합니다. 각종 핑계를 대면서 오히려 주님 곁을 떠나려고 하지요. 바빠서요, 능력이 없어서요, 저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많잖아요……. 등등의 말을 통해 우리는 각종 핑계를 대며 주님 곁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려는 나의 노력들을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노력이 있어야 주님의 은총과 사랑도 곧바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 그리고 말없는 행동에 의해 혼과 혼이 마주친다(법정).
함께하는 여정
-정희완 신부님-
살면 살수록 세상 일이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고 대부분 다 사람들과 더불어서 해야 하는 일이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당신의 공적 생활을 시작하시며 첫 번째로 하신 일이 당신과 더불어 하느님의 일을 함께할 동반자로 제자들을 뽑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사람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증언해 줄 사람들, 그리고 당신의 뒤를 이어 예수님이 하시고자 한 일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아 세우신 일은 바로 사람들과 더불어 당신의 일을 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제자들과 함께한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특별히 가르침을 주는 내밀한 친밀성을 드러내기도 하셨고, 또 제자들의 오해와 배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그 안에 내밀성을 지니기도 하고 또 배신과 오해의 곡절을 겪기도 합니다. 진정한 관계는 단순히 한순간의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즉 첫눈에 반해 즉흥적으로 엮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여정 안에서 여러 과정을 통해 형성됩니다. 좋은 관계, 참다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서로 몸으로 함께하는 과정과, 관계를 맺은 쌍방 간의 책임과 의무가 요구됩니다.
힘의 법칙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서 12 사도를 뽑으시고 산 위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예수님에게서 치유의 힘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치유를 위해 내뿜는 힘도 대단하셨지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도 대단하셨습니다.
내뿜는 힘이 대단하셨기에 끌어들이는 힘도 대단하셨겠지만 아무튼 힘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리 대단한 힘을 지니시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힘을 내려 해도 금방 지치고 힘이 나지 않는데, 우리는 인간이기에 선천적으로 힘이 없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저절로 힘이 대단하신 것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오늘 복음의 앞부분을 보면 산위의 기도에서 그 힘을 얻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산은 어떤 곳입니까?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느라 방전된 전기를 다시 충전하는 곳입니다.
악령들과 씨름하기 위한 힘을 받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곳입니다.
하느님을 호흡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과 만나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곳입니다.
주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받고 이렇게 심호흡을 한 다음 이제 세상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러나 내려오시자마자 사람들은 몰려듭니다.
이렇게 몰려들면 이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시달리시겠습니까?
이들과 씨름하다 곧 기운이 바닥나겠지요?
우리 같으면 그럴 거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충전을 받지 않고 씨름을 하면 바닥나겠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충전을 받으며 씨름을 하면 힘이 더 생깁니다.
이는 마치 영양 섭취를 충분히 하지 않고 과도한 일이나 운동을 하면 지치고 힘이 바닥나지만 적절한 영양 섭취를 하면서 운동을 하면 근육에 힘이 더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저에게 힘들어 죽겠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면 제가 말해 줍니다.
힘들어야 힘이 들어오고 힘이 들어와야 힘을 낼 수 있다고 말입니다.
힘들다는 말은 힘+들어오다, 즉 “힘”과 “들어오다”의 합성어이고 힘이 들어온다는 말의 준말입니다.
힘들다고 턱걸이를 하지 않으면 알통에 힘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로서 하느님 사랑을 받아 힘을 얻습니다.
이 하느님 사랑은 사람들을 위해 써야지만 그 힘이 커집니다.
마치 물을 받아들여 가두기만 하면 썩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물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듯이, 그래서 흘러가게 해야지 썩지 않고 새로운 물을 받을 수 있듯이 기도로 하느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고 그래서 힘들지만 하느님 사랑의 물줄기에서 힘을 얻기만 하면 그 힘든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성장케 하고 우리 사랑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사랑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둘 중의 하나이거나 둘 다입니다.
기도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힘을 받지 않거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고 나누지 않거나.
전쟁터에서 치열한 격전을 치루고 막사로 돌아온 해병은 허리에 찬 수통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글쎄 수통에 무려 다섯 군데나 탄환에 맞은 흔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빗발치는 총알이 해병의 머리 위로, 옆으로, 겨드랑이 사이로, 가랑이 사이로, 맹렬이 스쳤지만 정작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고, 대신 수통만이 탄환을 맞은 것입니다.
이렇게 무사한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단순히 운이 좋아서일까요? 바로 주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총알이 날라 오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스스로 탄환을 피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 누구도 날아오는 총알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주님의 보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준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깜짝 놀랄만한 기적으로 응답해 주셨지요. 바로 이러한 믿음이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믿음은 한 없이 부족합니다. 아니 엉뚱한 믿음으로 인해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행할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 고장에 폭우가 쏟아져 그 지역이 물바다가 되고 말았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떤 형제님께서는 비를 피해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마침 보트에 탄 사람이 오더니 이 형제님께 위험하니 빨리 타라고 했습니다. 이에 형제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하느님께서 돌봐주실 것입니다.”
수위가 계속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사람이 보트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 형제님을 보고는 타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형제님은 하느님께서 돌봐주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침내 수위가 너무 높아져서 이 형제님은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천국에 가서 하느님을 만나자 이 형제님이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돌봐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이에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두 번이나 보트를 보내줬잖아. 뭘 더 바랐던 거야?”
맞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형제님을 돌보는데 최선을 다하셨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살피기보다는 내 뜻을 내세워서 하느님의 돌보심을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을 제외한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 모두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내세우기 보다는 주님의 뜻을 내세우는데 최선을 다했기에, 주님을 끝까지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내세우는데 최선을 다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주님께서 마련하신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주님의 돌보심에 감사하는 기도를 바칩시다.
기도하시는 예수님
-서북원 신부님-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예를 들어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나 하느님의 일을 하실 때 밤새 기도하십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 왜 기도를 하실까요? 사제로서 가장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회사 상사로서 지도자로서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얼마나 기도하고 결정하는지요?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겠다고 항상 다짐하면서도 결정의 순간에 기도하지 않고 그냥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마는 것은 아닌지요? 많은 경우 기도하지 않고 결정했기에 아픔으로 다가오는 결과들을 맞이한 적은 없었습니까? 밤새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신앙인 역시 기도를 일상화해야 합니다. 사실 아직도 많은 신자들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로지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않은 것만 큰 죄라고 생각합니다. 죄는 하느님과 갈라지는 모든 상태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분명 하느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신앙인에게 기도는 하느님과 멀어지지 않도록 묶어주는 끈입니다. 온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해 기도할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을 기다리는 군중
-이종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시기 전 밤을 새워 기도하셨는데, 그만큼 ‘사도들’의 직무가 중요했음을 말해 준다. 그들의 직무는 왜 중요한가? 바로 그들을 기다리는 ‘군중’, 곧 ‘길 잃은 양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는 누구보다도 중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도들의 직무와 권위가 존중받는 것은 이들의 손길과 발걸음이 미치고 있는 이름 없는 군중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군중에게 파견되고 있는 사도들의 수는 넉넉한가?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선정하시고 나서도 여전히 ‘목자 없는 양들처럼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수확할 밭의 주인에게 일꾼들을 보내달라는 청을 하신 바 있다. 그리고 이런 당부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신학전문대학원에는 연륜도 지긋하고 덕망도 높은 어른들이 수도자나 젊은 학생들과 함께 열심히 신학을 배우고 있다. 이분들의 신앙의 열정과 진지함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이런 분들에게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사목자의 권위를 부여하고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파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 이러한 시도에서 생기는 부작용이나 교회 내적 진통을 미리 염려하면서 ‘평신도 사도’라는 개념에 난색을 표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사실상 평신도 사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았는가? 충분한 연륜과 경험, 인간적 재능과 신앙의 덕목을 두루 갖춘 분들이 하느님을 갈망하는 군중에게 다가가 예수님의 역할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이러한 비전은 다른 가상적인 어려움을 이겨낼 만큼 무게 있게 느껴진다. ‘사도들을 기다리는 군중’을 먼저 생각한다면, 밤을 새우고 숙고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교회도 더 많은 사도들을 뽑을 방도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깊고 심오한 삶의 이동>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평생 살아오시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가 머릿속에 떠오르겠지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좋은 재능들, 건강, 맺어주신 아름다운 인연들, 명예, 부, 사랑...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스승이 아닐까요?
참 인간의 길, 참 삶의 길이 무엇인지 지식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온 몸으로 보여주신 스승, 부족하고 덜떨어진 나를 더 넓은 바다로, 더 광대한 지평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신 스승, 인생에 있어서 보다 가치 있는 대상, 보다 소중한 영역들이 무엇인지 일깨워준 스승...
여러 축복 가운데 그런 스승을 만난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제자로 불림 받은 열두 사도들은 행운아 중의 행운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스승 중의 스승,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찾아가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열두 사도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재수좋은 사람들, 가장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자들의 삶, 한마디로 별 볼 일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무미건조했고 퀴퀴한 냄새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답답한 새장 안에 갇혀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인생, 꼬여도 어찌 이리 꼬였나?’ 하며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기를 쓰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들의 삶을 한바탕 흔들어놓으십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일종의 혼동상태 앞에서 제자들은 어리둥절했겠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시작된 ‘깊고 심오한 삶의 이동’을 통해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의미 있는 인생의 후반부로 나아가게 됩니다.
인생의 전반전과는 사뭇 양상이 다른 인생의 오후입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 하느님의 정렬 상태가 전반전과는 크게 달라진 인생의 후반부입니다.
복음서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굵직굵직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 앞에 설 때 마다 일상을 탈출하십니다. 산에 오르시거나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내각 구성’이란 중차대한 과제를 앞에 두고 밤까지 새워가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본위의 삶을 철저하게도 배척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들릴 듯 말 듯 한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 아리송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결국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히 순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 기도하시면서 기다리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식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의 식별, 그를 위한 기다림, 그것은 길고도 지루한 작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참으로 가슴 설레는 묵상작업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거짓 나를 찾아내고 진정한 나의 참모습을 찾아나가는 위대한 작업입니다
<독서> : 참 행복이신 주님
-경규봉 신부님-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행복하기 위하여 땀 흘려 일하며 수고한다. 재물, 명예, 지위 등을 구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작은 기쁨, 즐거움, 편안함, 안락함 등에 매달리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해야 할 일을 하기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의미와 가치, 보람을 추구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이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과 다투고 서로 속이며 죄를 짓는 것도 행복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러한 것들은 필요하다. 재물, 명예, 지위도 필요하고 편안함과 안락함, 기쁨과 즐거움도 필요하다. 이러한 것들이 없는 삶은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지치게 한다. 의미와 보람, 가치가 없이 일한다는 것은 죽을 맛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할지라도 사람은 꼭 행복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욕망은 우주를 다 갖는다 해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제 아무리 많은 것을 갖추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을 넘어선 절대자 하느님을 지향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채워주시지 않는 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이 세상의 것에 얽매이는 까닭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감각적인 것을 통해 행복을 구하고, 감각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우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이교도 법정에서 해결하려는 자세를 꾸짖는다. 이러한 처신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하지 않다. 성도들은 종말의 하느님 백성으로서 온 세상을 심판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교도의 법정에 고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편이 더 낫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깨끗해지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얽매여 교우끼리 속이고 소송하며 세상의 쾌락에 빠지지 말도록 가르친다.
사도 바울로는 행복의 본질이신 주님을 다마스커스로 가는 노상에서 강하게 체험했다. 주님에 대한 체험은 그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유대교인에서 그가 박해하던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것이다. 주님을 체험한 그는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찾았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 행복을 위해서는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이나 시련도 참아 견딜 수 있었다. 이처럼 참 행복을 직접 체험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우들에게 세상 것에 얽매이지 말고 진정한 행복인 주님을 추구하도록 가르친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돌아가서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듯이(마태 13,44-45)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팔아도 아깝지 않다.
순교자 성월인 9월,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순교성인들을 본받아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세상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하자.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작은 기쁨과 쾌락을 버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복음화와 세속화 사이에서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自負心을 自慢心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부심이 교만하게 강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 자부심은 자만심과 다르고 자부심은 강할수록 좋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자만심은 겸손이 결여된 착시적 자기 추켜세움이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우월감이라면,
올바른 자부심은 겸손하지만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신분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수도자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무엇 하러 수도자가 됩니까?
수도자라는 자부심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먹고살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일과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일과 직업을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자기 역할에 대한 자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신앙에 대해 진정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존중하지만 나의 신앙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신앙에 충실하고, 우리 신앙에 충실할 때 우리는 세속적인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몸을 성령의 성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온갖 탐욕과 쾌락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고 자기를 성령의 깨끗해진 그리스도의 정배로 생각하는 사람이 불륜을 저질 수는 없을 것이며 이웃을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성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형제에게 불의한 일을 하지 않을뿐더러 형제끼리 문제가 생겼다 해도 세상 법정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꾸짖는 코린토의 성도들은 이런 면에서 진정한 자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고 그 당시 그리스의 타락한 문화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문화 안에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신앙을 잘 토착화시키고 있는가?
우리 문화의 잘못된 면을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복음으로 심판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문화 안에서 나의 세속화와 세상의 복음화 중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이것이 오늘 코린토 교회 신자들을 자문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제가 오늘 새벽 ‘단 1초의 말 한 마디’라는 글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이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인생의 순간을 느낄 때가 있다.
“고마워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사람의 따뜻함을 알 때가 있다.
“힘내세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용기가 되살아날 때가 있다.
“축하해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행복이 넘치는 때가 있다.
“용서하세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짧은 말에서, 인간의 약한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안녕.” 1초 동안 할 수 있는 짧은 말이, 일생 동안의 이별을 가져올 때가 있다.
1초라는 시간. ‘똑딱’하면 지나가는 시간이고, 그래서 분명히 짧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1초라는 시간이 나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가장 긴 시간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짧은 글에서는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가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지, 또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신중하셨는지를 오늘 복음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써 쉽게 선택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간단하게 선택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우리들은 과연 어떤 선택의 순간에서 얼마나 신중했으며,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하느님께 얼마나 기도했나요? 혹시 자기 자신만의 1초의 짧은 생각으로 내 이웃에게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완벽할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자신의 그 부족한 부분을 기도를 통해서 채울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결정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중하게 생각했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한 면으로만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신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떠한 결정을 위해서는 밤을 새우시면서 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쉽게 말하고 쉽게 판단하는 우리들의 못된 행동들을 이제는 버렸으면 합니다. 그때 짧아 보이는 1초라는 시간도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결정이나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주님께 기도합시다.
조건 없는 부르심
-최혜영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뽑으실 때도 산에 가셔서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제자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제자 공동체, 나아가 그리스도 교회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라는 말을 생전의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예수님의 직제자에게만 사용하였습니다.
갈릴래아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세리였던 마태오와 열혈당원인 시몬,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한 제자단에 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누구누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교회에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단을 생각한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나를 불러주신 예수님 안에서 이웃의 약점이나 잘못을 받아줄 수 있는 관대함이 커지기를 기원해봅니다.
열세번째 사도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김경희 수녀님-
언젠가 ‘열세번째 사도’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약하고 성격이 급했으며 용기가 없는 충실치 못한 제자였고, 야고보와 요한은 야심이 있었으며, 필립보는 맹목적이었다고 합니다. 필립보는 지성과 통찰력이 부족하여 자신이 직접 빠져보지 않고서는 영적 진리를 알아볼 수 없었고, 유다는 신뢰할 수 없었으며 하느님 나라보다 돈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태오는 사기꾼인데다 과거가 깨끗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토마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는 냉소적이고, 열혈당원 시몬은 싸움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었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기는 했지만 감성이 섬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르톨로메오와 작은 야고보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바르톨로메오와 작은 야고보는 재능이 없었고, 세상에 기여할 바가 없었습니다. 수줍고 내성적이었습니다. 카리스마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수한 동기, 지성과 통찰력, 성실함, 깨끗한 과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성숙함, 섬세한 감성, 옳은 것을 선포하는 용기, 기쁨과 낙천성, 특별한 재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부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따르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저를 부르신 23년 전을 기억해 봅니다. 수녀원에 입회할 때 제 모습은 너무나 여리고 미숙했으며 아무런 재능도 없었고 세상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를 주님께서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한 발자국씩 걸음마부터 가르치셨으며 섬세한 사랑으로 주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저에게 참 기쁨은 ‘제가 주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앎이 ‘영원한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대한 앎의 밀도가 점점 깊어지면서 이제는 시편 138편으로 주님께 고백합니다.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합니다. 신들 앞에서 당신께 찬미 노래 부릅니다.’ 아멘.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이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몇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늘 실패로 끝났습니다. 밤을 꼬박 샌다는 것, 그것도 기도하며 지샌다는 것,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철야기도하시는 분들 정말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기간 동안 가끔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상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녁 무렵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십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아주 자주, 시도 때도 없이 철야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순간들은 당신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절대 절명의 순간, 삶의 분수령이 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당신의 제자들을 뽑기 위해서,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제자 선발에 큰 중요성을 두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뽑기 위해 밤을 꼬박 지새우시며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충만한 감사의 정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저를 위해서도 열렬히 기도해주실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내 성소, 비록 너무나 부족하고 부당해서 정말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토록 철저하게도 부족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소중히 여겨주시니 다시금 힘을 냅니다. 내가 이토록 나약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해주시고 걱정해주시니 모든 것 그분께 맡기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막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하는 후배들과 살아가면서 늘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다 따라가는 그 휘황찬란한 길, ‘때깔 나는’ 길을 뒤로 하고 너무나 가파른 언덕길, 어찌 보면 너무나 팍팍해서 짜증나고 숨 막히는 길을 선택하는 우리 어린 수도자들,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마다 하느님의 현존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어린 수도자들입니다. 저보다 세상의 때가 훨씬 덜 묻은 형제들입니다. 마치 산속 깊숙이 몰래 피어있는 들꽃 한 송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형제들입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마다 우리 가운데 활발히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확인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든 수행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여정에 동행해주시기를, 그들을 축복해주시기를, 그들의 인생길을 환히 밝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창열 신부님-
예수님은 바쁘신 일정 중에서도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성부 하느님과 일치하였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이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었다. 특히 예수님은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기도 하셨다. 공생활 시작 전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면서 기도하셨고, 수난 전에 게세마니 동산에서도 밤새 기도하셨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제자들 가운데서 사도들을 선발하실 목적으로 철야기도 하기도 하셨다. 이처럼 중대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중대한 결정을 하거나 큰일에 앞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신 후, 날이 밝자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마르코 복음 3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고” 선발하셨다. 또 사도들을 뽑은 목적은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3,13-15)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 그렇듯이, 사도들을 선발한 목적 또한 그들을 당신 곁에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나는 이제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당신의 친구처럼 대하시고, 그들과 우의를 나누시고자 하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인간적인 도움과 협조, 우애를 나누시며 생활하셨다.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셨고, 많은 부인네들이 그분을 도왔다. 그것이 예수님께는 행복이기도 하셨다. 하느님께는 부족함이 없고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지만, 우리와의 친밀한 사귐과 우애를 나누고자 하신다.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가? 이런 사실로 보아, 하느님은 나로 인해서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발한 중요한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선포하게 하고, 마귀를 쫓는 구마의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복음 선포는 예수님의 일차적인 사명이었고,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세례 받은 신자들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할 중대한 의무를 갖는다. 또한 사도들에게 마귀를 쫓는 능력을 주신 것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하고 하느님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함이다. 예수님도 공생활을 통해서 이 은사적인 구마 사목을 통해서 악의 세력에 적극 대처하시고, 그 영향으로 질병에 구속되어 있던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셨다.
사도들이 받은 이 두 가지 사명은, 오늘 우리 교회가 세상 가운데 건설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계속해야 할 중대한 사명이다. 복음 선포와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는 서로 긴밀한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어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려고 파견하신 것처럼, 매 미사 때마다 파견되는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바로 그러한 사명을 이행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뜻이고, 곧 파견하시는 목적인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다
-이회진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당신 곁에 부르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서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들과 함께 평지에 서신 이유는 그곳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당신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군중을 이루었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과 띠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이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질병을 고쳐줄 의사로서 만나게 될 희망으로서의 예수님, 더러운 영을 쫒아내 줄 희망으로서의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 손이라 한 번 대어 보면 은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루가 복음 사가에게 있어서 이 희망의 첫 번째 자리는 병의 치유나 악령을 쫒아내는 일 혹은 은총을 얻는 일이 아닌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신앙을 사는 이유를 어떤 복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성당에 다니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돈을 더 많이 버는 것, 일이 잘 풀려 만사(萬事)가 잘되는 것, 가족이 아무런 탈도 나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사는 것, 혹은 은총을 많이 받아 원하는 데로 복을 많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바로 신앙을 사는 이유라고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런데 루가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군중들에게 있어 그들의 “희망사항”을 열거하면서 그 첫 자리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놓고 있습니다.
물론 군중의 희망사항이 말씀을 듣는 것 하나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며 다른 것을 또한 바라고 있었고, 예수님과 루가 복음 사가 역시 그것을 외면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인식하기를 요구합니다.
바로 우리가 신앙을 사는 이유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에 있어서 앞뒤가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분이 그들에게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삶의 이유와 힘을 주는 희망의 힘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신 이유는 그들의 병을 낳게 해 주고, 마귀를 쫒아내 주고, 복을 주어서 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살아갈 이유와 힘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병을 낳게 해 건강하게 만드는 것, 고민을 풀어주고 기도를 들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인 이유는 그분이 우리에게 “삶의 이유”와 “살아나갈 힘”을 말씀을 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루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사는 “희망의 이유”와 “희망의 힘”의 첫 자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한편, 그것은 2000년 전 평지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군중에게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나 마찬가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늘 누군가 제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당신 때문이라 말하겠습니다. 아멘.”
밤 새워 기도하신 예수님의 선택
- 이기양 신부님-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1년 계획을 세우려면 먼저 씨앗을 뿌리고, 100년 계획을 세우려면 지도자를 양성하라는 중국 속담이 있지요. 무엇보다도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라나 기업이 잘 되려면 좋은 사람들이 자리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회사가 크고 돈이 많아도 경영자가 한번 잘못하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나 회사의 리더들은 좋은 인재를 찾으려고 백방의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이것은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페인 축구를 대표하는 레알 마드리드 팀에는 지네딘 지단이라는 프랑스인 축구 선수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 선수의 1년 연봉은 무려 800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11명이 한 팀이 되는 축구단에서 단 한 사람의 연봉이 다른 10명의 선수 몫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 선수 한 사람을 쓰느니 10명의 다른 선수들을 데려오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많은 돈을 주고 그 선수를 기용하고 있는 겁니다.
능력 있는 한 사람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십만 명 이상의 신도를 자랑하는 개신교 교회가 있는가 하면 단 몇 십 명의 신도만으로 힘에 부쳐서 망해 나가는 개척 교회도 수없이 많습니다. 역시 어떤 목사님이냐에 따라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사람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천주교회입니다. 어느 한 개인의 능력이 드러나기보다는 조직으로 운영이 되는 천주교회는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하나 된 교회라는 천주교회의 특성을 2000년의 역사 안에 증거 해 왔습니다. 신부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2년이나 5년이 지나면 바뀌게 됩니다. 한 사람이 지나치게 오래 능력을 떨치면 이단으로 치우치기가 쉽다는 것을 과거의 역사 안에서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름대로 끊임없이 조직을 움직이지만 우리 교회 안에서도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당 신부가 어떤 마음으로 일 하느냐에 따라 복음적으로 잘 성숙되어 가는 본당이 있는가 하면 바람 잘 날 없이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는 본당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목자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본당의 상황과 같은 모습을 반 구역과 단체들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반장이나 구역장 또는 단체장이나 사목위원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모습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사목자의 위치에 있으면 이런 모습이 한 눈에 다 들어옵니다.
얼른 보기에도 활성화가 잘 되고 깊은 친교가 맺어지는 반이 있는가 하면 무엇을 하자고 제안을 해도 시큰둥하고 잘 모여지지 않는 반이 있습니다. 리더가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세상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사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열 두 사람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도들을 뽑으시는 예수님의 스타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재를 뽑아 쓰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시지요. 세상 사람들은 인재를 뽑을 때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실력이 있으며 사람을 통솔하는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를 우선으로 살펴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무렵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루가 6,12-13)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밤새도록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재를 뽑는 평가 기준과 예수님께서 사도를 뽑으신 기준이 전혀 달랐다는 것은 뽑힌 사도들의 명단을 보면 여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열두 사도 중에는 학벌이 좋은 사람도 없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도 없으며, 성격이 유순한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혈질인 베드로에,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혁명 당원 시몬이 있는가하면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세리 마태오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 중에는 후에 스승을 배반하게 될 이스가리옷 사람 유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예수님의 기준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밤새워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돈 많은 사람도, 박식한 사람도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만을 택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즉 복음적으로 열심하고 최선을 다하며 하느님께 그 결과를 맡기는 겸손한 이들을 사도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가을이 되면 본당의 사목위원들의 임기가 만료됩니다. 새로운 사목위원들과 단체장, 또 구역장들을 뽑아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지요. 사목자로서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적이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뽑힌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많은 생각과 고민이 저를 더욱 더 기도하게 만듭니다.
돈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기업을 하거나 세상의 흐름에 맞춰 가는 곳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세상의 지식을 많이 가진 박식한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하느님께 충실하고 겸손하며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길 줄 아는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으로 뽑힐 때 공동체는 더욱 복음화가 되고 참으로 성숙해 질 것입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나와 가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가며 노력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늘의 한 조각만을 바라보며 평생을 이기적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느님의 일꾼으로 뽑혀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작은 도구가 되어 하느님의 일을 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을 사목자인 저는 경험으로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삼으셨듯이 오늘날 하느님의 일꾼으로 뽑힌다는 것은 역시 보이는 본당 신부를 통해서입니다. 본당 신부의 사목에 협조자로서 불림을 받는다는 것을 본당 신부를 통해서 하느님의 손길이 움직인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좋은 공동체를 만들고 하느님의 뜻을 펼쳐나가는 바탕인 것입니다.
한편 신자들은 뽑힌 사람들이 복음적인 열정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숙되지 않은 공동체일수록 뽑힌 일꾼들의 흠을 잡고 입방아를 찧는 일에 열을 올리는 것을 봅니다.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지요. 자신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면서 어려운 결단을 내려서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일해 보려고 하는 사람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밤 새워 기도하시고 마침내 열두 사도를 뽑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뽑힌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은총입니다. 뽑힌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쁜 마음으로 “예!”하고 응답할 수 있고 헌신할 수 있는 참된 봉사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제자(弟子)와 사도(使徒)의 의미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장엄한 과정을 거쳐 12제자를 선발하신 사실과 그분의 계속된 치유행적을 보도하는 내용이다.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12제자를 엄선하신 사실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다. 우선 마르코복음(3,13-19)은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당신이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불러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고 하면서, 이는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악령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태오복음은 파견설교(10장)의 범주 안에서 12제자의 선발(10,1-4)을 다루고 있는데, 예수께서 12제자를 따로 선발하신 다음, 그들에게 엄격한 여장규칙과 함께 악령제어와 질병치유의 능력을 주어 파견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루가는 12제자의 선발목적이나, 사도로 선발된 제자들의 능력이나 임무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선발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12제자의 선발을 위해 산에 올라가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서가 보도하는 내용을 모두 종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하루 일과를 마치실 즈음,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가) 이는 당신을 따르고 있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열 두 제자를 선발하여 사도로 삼아 당신 곁에 두시기 위함이었다.(마르코)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좇아 열둘을 선발하시어(루가),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악령을 제어하고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과 임무를 주어 세상에 파견하셨다(마태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선발하는 장소로 산을 택하셨다. 산은 예로부터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장소로서 여기서 소명과 결단이 이루어진다.(출애 3,1; 4,27; 18,5; 24,13; 1열왕 19,8; 에제 28,14)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기도하는 장소이며, 하느님의 권위와 계시가 드러나는 장소이다.(마르 9,2; 마태 17,1; 루가 9,28) 예수께서는 여기서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이 대목 외에 어느 곳에서도 예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적은 없으시다. 12제자를 선발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고 특별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12제자들은 이렇게 산에서 사도로 뽑혔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보듯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굶주리고, 병고에 허덕이며,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고쳐 주셨다.
루가는 이렇게 산(山)과 평지(平地)를 구분하고 있다. 산은 기도와 소명의 장소요, 평지는 선포와 활동의 장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루가복음사가가 오늘 복음에서 산과 평지, 즉 소명과 활동을 함께 묶어둔 이유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에서 기도하셨고, 평지에서 치유의 활동을 계속하셨다.
예수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 중에 12제자가 뽑혀 사도가 되었다면 12사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스승이신 예수의 모범을 따를 일이다. 바로 예수님처럼 산에서 기도하고 평지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산과 평지를 분명히 구분되나 서로 뗄 수는 없듯이, 제자와 사도 또한 분명히 구분되나 뗄 수 없는 것이다.
통상 ‘제자(弟子)’란 역사적 예수의 공생활 중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을 일컫는 말이요, ‘사도(使徒)’란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복음선포의 지상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산에서는 제자이나 평지에서는 사도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신자란 예수님 앞에서는 제자로 불림을 받았고, 세상 앞에서는 사도로 파견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는 충실한 제자로, 세상을 향해서는 용감한 사도로 말이다. 예수 없는 제자 없고, 세상없는 사도 없다.......◆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어제 젠 베르데와의 만남이 서울시 교육 연수원에서 있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한 사람씩 자신들과 젠 베르데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참 좋은 만남의 시간이었다.
한 사람씨 나와서 자기를 소개하면서 자기가 만난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콰테말라에서 온 단원과 스코틀렌드 출신의 단원의 체험담이 꽤나 감동적이었다. 특히 콰테말라에서 온 단원의 체험담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기는 젠베르데에 들어오기 전에 증권회사의 회장님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은행 업무를 담당할 직원이 필요하여 자기 남동생을 소개시켜서 자기와 함께 일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돈이 은행으로는 입금이 되었는데 현금이 없어져서 조사해본 결과 자기 남동생이 바로 그 범인이었다는 것이다. 남 동생이 감옥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가 일년 반 동안의 월급으로 겨우 갚았다는 것이다.
도저히 그런 남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고 용서하라는 복음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동생을 용서해주게 되었고 그녀의 행동을 보고 회사 직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을 보았다고 사람들이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말씀만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라는 말씀이 어제 젠베르데와의 만남을 생각하게 한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복음의 체험담을 들려 주었고 나는 무대 아래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산에 있고 나는 평지에 있는 모습이었다.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산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평지에 내려와서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산은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요, 평지는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체험한 것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듯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주어야할 사제, 수도자, 신자들의 입에서 복음의 이야기를 듣기가 어렵다.
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가 아니라 평지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 뿐이다. 왜 그런가? 하느님이 계신 산으로 올라 가지 않고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평지에만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평지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고 또 다시 산에 올라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힘을 얻어 다시 평지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들이다. 산에 오르지 않고 늘 평지에만 머무른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신음(呻吟)하면서 신을 求하는 자" 이것이 가장 옳은 자세라고 빠스칼은 말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산에 오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산에서 만난 하느님을 평지(삶의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복음 선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