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jjhānaṃ khamati
alagaddūpamasuttaṃ 뱀의 비유 경 (M22)
atha kho bhagavā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tuṇhībhūtaṃ maṅkubhūtaṃ
pattakkhandhaṃ adhomukhaṃ pajjhāyantaṃ appaṭibhānaṃ viditvā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etadavoca —
세존께서는 전에 독수리 사냥꾼 이었던 아릿타 비구가 말없이 의기소침하여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이고 우울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을 못하는 것을 아시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238. “idha, bhikkhave, ekacce moghapuris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
suttaṃ, geyyaṃ, veyyākaraṇaṃ, gāthaṃ, udānaṃ, itivuttakaṃ, jātakaṃ,
abbhutadhammaṃ, vedallaṃ.
te t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tesaṃ dhammānaṃ paññāya atthaṃ na upaparikkhanti.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anupaparikkhataṃ na nijjhānaṃ khamanti.
te upārambhānisaṃsā ceva dhammaṃ pariyāpuṇanti itivādappamokkhānisaṃsā ca.
yassa catthāya dhammaṃ pariyāpuṇanti tañcassa atthaṃ nānubhonti.
tesaṃ te dhammā duggahitā dīgharattaṃ ahitāya dukkhāya saṃvattanti.
taṃ kissa hetu? duggahitattā, bhikkhave, dhammānaṃ.
1O.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미혹한 자들이 경 · 응송 · 수기 · 게송 · 감흥어 · 여시어 ·
본생담 · 미증유법 · 문답과 같은 법을 배우지만
그 법을 배워 통찰지로 그 법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
그 법의 뜻을 통찰지로 자세히 살피지 않을 때 그들에게 그 법들은 확립되지 못한다.716)
그들은 오직 다른 이들을 논박하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법을 배우므로
법을 배우는 그 궁극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한다.
그들이 잘못 파악한 그 법들은 그들을 긴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법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716) “원문의 anupaparikkataṃ(자세히 살피지 않음)은 anupaparikkhatānaṃ으로 읽어서 그들을 수식하는 소유격의 복수형으로 해석해야 한다. '확립 되지 못한다.(na nijjhānaṃ khamanti).'는 것은 na upaṭṭhahanti(확립되지 못한다.), na āpāthaṃ āgacchanti(그 영역에 들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이 부분에서 계, 정, 혜, 도, 과, 윤회(vaṭṭa), 윤회에서 벗어남(vivaṭṭa)을 설했다고 이렇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이다.”(MA.ii.106)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alagaddatthiko alagaddagavesī alagaddapariyesanaṃ caramāno.
so passeyya mahantaṃ alagaddaṃ.
tamenaṃ bhoge vā naṅguṭṭhe vā gaṇheyya.
tassa so alagaddo paṭiparivattitvā hatthe vā bāhāya vā aññatarasmiṃ vā
aṅgapaccaṅge ḍaṃseyya .
so tatonidānaṃ maraṇaṃ vā nigaccheyya maraṇamattaṃ vā dukkhaṃ. taṃ kissa hetu?
duggahitattā, bhikkhave, alagaddass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땅꾼이 뱀을 원하고 뱀을 탐색하고 뱀을 찾아다니다가 큰 뱀을 보았다 하자.
그 사람이 그 뱀의 몸통이나 꼬리를 잡는다면
그 뱀은 되돌아서 그 사람의 손이나 팔이나 몸의 다른 부분을 물어버릴 것이다.
그 때문에 [134] 그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도 하고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뱀을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e kulaputt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
suttaṃ, geyyaṃ, veyyākaraṇaṃ, gāthaṃ, udānaṃ, itivuttakaṃ, jātakaṃ,
abbhutadhammaṃ, vedallaṃ.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경 · 응송 · 수기 · 게송 ·
감흥어 · 여시어 · 본생담 · 미증유법 · 문답과 같은 법을 배운다.
그들은 그 법을 배워 통찰지로써 그 법들의 뜻을 자세히 살펴본다.
그 법의 뜻을 통찰지로 자세히 살필 때 그들에게 그 법들은 확립된다.
그들은 오직 다른 이들을 논박하고 자기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법을 배우지 않으므로
법을 배우는 그 궁극의 의미를 체득한다.
그들이 잘 파악한 그 법들은 그들을 긴 세월 이익과 행복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법을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초불>
te t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tesaṃ dhammānaṃ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nti.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taṃ nijjhānaṃ khamanti.
te na ceva upārambhānisaṃs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na itivādappamokkhānisaṃsā ca.
yassa catthāya dhammaṃ pariyāpuṇanti, tañcassa atthaṃ anubhonti.
tesaṃ te dhammā suggahitā dīgharattaṃ atthāya hitāya sukhāya saṃvattanti.
taṃ kissa hetu? suggahitattā, bhikkhave, dhammānaṃ.
그들은 그 가르침을 배운 후, 그 가르침들의 의미를 지혜로 조사한다.
그들이 지혜로 그 가르침들의 의미를 조사할 때, 그 가르침들은 깊은 통찰을 견딘다.
그들은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가르침을 배우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가르침을 배우는지, 그 목적을 그들은 경험한다.
그들에게 그 가르침들은 잘 이해되어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과 안녕으로 이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가르침들이 잘 이해되었기 때문이다.<AI>
본 경에 나오는 몇 단어에 대한 의견입니다.
attha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언급하면 본문에 나오듯이
'의미' 혹은 '이익'이라는 우리들에게는 전혀 다른 범주이지만 같은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중심 되는 의미는 계란의 '알(√ṛ / artha)'과 같이 여겨져서
'결과(열매)', '이익', '획득', 혹은 '의미'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것 같습니다.
gahita는 기본적으로 '잡다'라는 의미에서 '파악' 혹은 '이해'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것 같다.
그래서 대상(법)을 '잡아'야 '파악'이 가능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 마음에 둔(담은) 것(antaraṃ kata / karoti)이 대상(법)이 되겠지만.
여기에서는 nijjhānaṃ khamanti라는 단어에 집중하여 의견을 드려 보겠습니다.
단수형인 khamati의 의미는
'견디다', '인내하다', '용인하다', '忍辱(인욕)하다', '받아들이다', '수용하다'라는 어감으로 여겨지고
khanti가 명사형으로 나타납니다. 아래 nijjhānakkhanti를 참고하십시요.
nijjhāna[ni+jhāna]의 ni는 '아래로', '밖으로', '아님(부정)' 등을 나타내는 접두사이고
jhāna는 '(불) 태우다',와 '드러나다(보이다)'라는 어원이 다른 두 가지 의미의 단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jhāyati, pajjhāyati, apajjhāyati, nijjhāyati, upanijjhāyati, ujjhāyati, abhijjhāyati등의 단어는
이 둘 중의 한 가지 어원의 단어이거나 혹은 둘 모두를 의미할(同音異語) 수도 있습니다.
본 경의 nijjhāna는 參禪의 禪와 같은 의미로 쓰이면
nijjhānaṃ khamanti를 우리말로 의역하면 '納得되다'라는 의미이지 싶습니다.
이러한 용례는
[tatheva dhammaṃ avibhāvayitvā, bahussutānaṃ anisāmayatthaṃ.
sayaṃ ajānaṃ avitiṇṇakaṅkho, kiṃ so pare sakkhati nijjhapetuṃ.
마찬가지로 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박학한 이들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으며,
스스로 알지 못하고 의심을 건너지 못한 채, 어찌 그가 다른 이들을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neva kho asakkhi bhāradvājo māṇavo vāseṭṭhaṃ māṇavaṃ saññāpetuṃ,
na pana asakkhi vāseṭṭho māṇavo bhāradvājaṃ māṇavaṃ saññāpetuṃ.
바라드와자 바라문 학도는 와셋타 바라문 학도를 납득시킬 수 없었고
와셋타 바라문 학도도 바라드와자 바라문 학도를 납득시킬 수 없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aññatreva, āvuso musil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musil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391)
그대는 자기 스스로의 지혜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 죽음이 있다.'라고 압니까?”
391) “(1) 어떤 자는 남을 믿고 그 '믿음(saddhā)'을 통해서 그가 말한 것을 사실(bhūta)이라고 받아들인다. (2) 어떤 자는 앉아서 생각하면서 그가 좋아하는 이론(kāraṇa)에 대해서 '이것이 옳다.'고 하면서 '좋아함(ruci)'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3) 어떤 자는 '오랫동안 이것이 사실이라고 전해 들었다.' 라면서 '구전(anussava)'을 통해서 받아들인다. (4) 어떤 자는 일으킨 생각(vitakka)을 통해서 어떤 이론을 확립한다. 이렇게 하여 '이것이 옳다.'라고 '이론적인 생각(ākāra-parivitakka)'을 받아들인다. (5) 어떤 자는 생각을 하다가 어떤 견해가 떠오르면 그 이론을 사색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이것이 옳다.'고 하면서 그 '사색하여 얻은 견해(dṭṭhi-nijjhāna-kkhanti)'를 받아들인다.
장로는 이러한 이론들을 모두 내던지고 자기 스스로의 지혜(paccakkha-ñāṇa)를 통해서 통찰한 것(paṭividdha-bhāva)을 질문하면서 '도반 사윗타여, 믿음과 관계없이 …'라고 말한 것이다.”(SA.ii.122)]
반면에 앞에 언급된 [pajjhāyantaṃ 우울한 표정으로]는 '완전히 燃燒된'이라는 의미이지 싶은데
요즘 우리들이 사용하는 속칭 '멘붕' 상태, 즉 '완전히 멍한' 경우이지 싶습니다.
이 단어는 參禪의 禪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abhijjhāyati는 '지나치게(abhi) 불탄다(jhāyat)'라는 의미에서 貪을 의미합니다.
[abhijjhālu hoti.
yaṃ taṃ parassa paravittūpakaraṇaṃ taṃ abhijjhātā hoti —
‘aho vata yaṃ parassa taṃ mama assā’ti.
그는 간탐한다.
그는 '오, 저 사람 것이 내 것이라면.'이라고 남의 재산과 재물을 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