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추계곡 노루귀
금세기 들어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발열성 호흡기 질환은 전 세계로 퍼져 지구촌은 큰 혼란을 겪었다. 이제 코로나 사태가 서서히 종식되어 정상적 일상생활로 회복해 가는 즈음이다. 나는 교직 말년 근무지가 거제여서 그곳에 원룸을 정해 주중 머물다 주말은 창원으로 돌아왔다. 첫해는 낯선 임지에 그런대로 적응해서 무난히 넘기고 이듬해 봄 신학기를 앞두고 코로나가 덮쳤다.
정년을 이태 남겼던 봄방학에 코로나가 걷잡을 수 없을 상황으로 번져 각급 학교는 문을 닫아 신학기 개학이 연기되었다. 교직원들은 필수 인력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유래가 없는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나는 거제로 건너가질 못하고 창원에서 갑갑한 나날을 보냈다. 차를 운전하지 않는 나는 대중교통이 께름칙했다. 시내버스나 열차 이용은 자제하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녔다.
그해 신학기 개학이 기약 없이 연기된 삼월 한 달을 나는 안식월로 삼았다. 집에서부터 걸어 용추계곡을 드나들며 무르익는 봄날을 보냈다. 어떤 날은 도시락을 싸서 현관을 나서 진례산성으로까지 올라 온종일을 보내고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왔다. 사흘이 멀다시피 자주 다녀 골짜기의 등고선을 그려낼 정도였다. 이른 봄 용추계곡에 피는 야생화 탐방의 묘미에 흠뻑 빠졌다.
가랑잎을 비집고 여린 꽃대를 밀어 올려 앙증맞은 꽃을 피운 분홍색 노루귀는 환상적이었다. 노루귀에 이어 변산바람꽃과 얼레지꽃도 아름다웠다. 연이어 현호색이 군락을 이루어 피었고 난초를 닮은 산자고도 은근히 예뻤다. 개별꽃과 남산제비꽃도 뒤를 이었다. 나는 그해 봄에 이와 같은 야생화 탐방으로 코로나가 가져다준 단절과 유폐를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으로 잘 활용했다.
이후 남은 내 교직 2년은 코로나 와중에 비대면 원격수업도 해보고 작년 봄 정년을 맞아 뭍으로 건너왔다. 퇴직 후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한 해를 보냈더니 코로나는 시들해져 간다. 신묘년 새해를 맞은 지가 거의 두 달이 된 이월 셋째 월요일은 음력으로 이월 초하루였다. 어제는 의림사 계곡으로 야생화 탐방을 다녀왔는데 이번엔 점심 식후 느긋하게 용추계곡으로 발길을 나섰다.
퇴촌삼거리에서 창원대학 앞으로 가니 거리에는 새내기들이 북적거려 코로나가 물러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도청 인근 도로에는 점심 식후 짧은 시간일지라도 일광욕을 겸해 산책을 나선 직원들이 삼삼오오 거닐었다. 나는 창원중앙역으로 올라가 철길 굴다리를 지나 길상사 경내를 둘러 숲속 나들이 길로 들었다. 쉬엄쉬엄 걸어 내정병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에서 용추계곡으로 향해 갔다.
내정병봉 숲은 청청한 소나무를 비롯한 낙엽 활엽수가 혼효림으로 섞여 자랐다. 좁은 골짜기의 맞은편 비음산 날개봉이 지척으로 가까웠다. 산허리로 걸쳐진 길섶에 양지꽃 잎사귀가 점점이 파릇했다. 그새 내린 비에 잎맥을 부풀려 키워 언젠가 노란 꽃잎을 펼쳐 달지 싶었다. 용추고개로 오르는 갈림길에서 용추계곡으로 들어 우곡사로 넘는 이정표에서 성내 포곡정을 향해 올라갔다.
봄이 오는 길목 용추계곡 식생은 겨울을 난 맥문동이 파릇하게 생기를 띠었다. 지피식물로 자라는 마삭도 바탕 기질을 살려 풋풋해 보였다. 반(半)상록성인 인동덩굴과 쥐똥나무도 수액이 오르면서 푸른 잎을 보여주었다. 개울을 건너 너럭바위 쉼터를 앞둔 산기슭으로 가서 살펴볼 야생화 있어 두리번거리며 찾아봤다. 그 자리는 이른 봄이면 해마다 피는 연분홍 노루귀꽃 자생지였다.
돌 틈 가랑잎을 비집고 피어난 노루귀꽃 두 송이를 발견했다. 여린 꽃대를 밀어 올려 보송보송한 솜털을 단 꽃봉오리를 다소곳이 감싸 개화가 다 되지 않은 채였다. 숲속 나들이 길로 빙글 둘러 가도 노루귀는 내 앞에 의연한 자태로 아름다운 품격을 유지했다. 두 송이가 보였지만 주변에는 연이어 여러 송이 노루귀가 꽃을 피우지 싶다. 봄은 이렇게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오더이다. 23.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