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동의 법흥사지 전탑과 임청각에서 역사를 회고하다.
법흥동(法興洞)은 본래 안동부 동부의 지역으로서, 법흥사가 있었으므로 법흥골, 또는 법흥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신세동에 편입되고,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의하여 신세동의 일부를 갈라서 이곳에 있는 영남산의 이름을 따서 영남정이라고 부르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법흥동으로 고쳤다. 이곳 법흥동 중앙선 열차가 지나는 곳에 나라 안에 제일 큰 신세동 칠층전탑이 있다. 전체높이 17m에 이르는 이 벽돌탑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칠층탑으로 통일신라 전에 세웠다고 하며 고려말인 1381년에 중수되었고 성종 18년에 개축되었으나 조선중엽에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법흥사가 부의 동쪽에 있다”고 되어 있고,『영가지』의 지도에도 법흥사와 함께 표시가 되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전탑이 있는 자리와 일치한다. 또『영가지』에는 절의 규모가 세 칸만 남아있다고 하였다.
박효수라는 사람은 “이 절에 오르면 황홀하여 공중에 있는 것 같다. 열두 봉우리들이 서로 등지기도 하고 마주보기도 하네. 들비는 빛이 먹처럼 짙어서 모든 자취를 검게 덮어버리고, 호수에 날이 개니 가늘게 밝은 자태를 희롱한다. 먼 마을의 단풍든 나무에는 저녁볕이 머무르고, 높은 산 차운 소나무에는 가을안개 물러간다”는 내용의 시를 지어 낙동강이 흘러가는 곳에 위치한 이곳의 아름다운 정경을 노래했다. 하지만 이 법흥사 칠층전탑의 수난은 조선시대 때에도 그치지 않았다.『영가지』의 기록에 이 탑 위에 있던 금동장식들을 객사를 만드는데 쓰기위하여 거두어 들였다고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전탑 바로 옆으로 중앙선 기차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기차길 옆 오막살이가 아니라 “기차길 옆 칠층전탑”이 되고 말았다. 수없이 지나다니는 열차의 진동음에 탑은 점차로 손상되어가고 있고 그보다 일제 때 이 탑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기단부의 모양을 변형시켰을 뿐더러 시멘트를 발라 원형이 크게 훼손된 채로 서있을 뿐이다.
임청각의 군자정에서 낙동강 물을 바라보다
탑에서 조금 내려가면 기와지붕들이 연달아 있는 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임청각이다. 조선 세조 때 현감을 지낸 이준이 안동에 내려와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임청각(臨淸閣)은 중종 10년에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짓고, 퇴계 이황이 약관(若冠)에 임청각 액자를 썼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농암(聾岩) 이현보(李賢輔)가 글을 남긴 아름다운 집이다. 아흔아홉칸 집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이 집은 중앙선 철도가 만들어지면서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철거되어 50여칸만 남아있는데 군자정(君子亭)은 임청각의 사랑채로 별당 형식의 정자건물이다. 보물 제 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군자정에 올라서 바라보면 멀리 낙동강이 보이고 동쪽의 작은 연못에는 수련이 피어있다.
이 집을 한국의 빼어난 건축가 중의 한사람이었던 김수근은 ‘인간적인 칫수를 반영하여 지은 집이다’라고 설명했을 정도로 겸허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의 개념을 연출해 지은 집이다.
이 집의 주인이 석주 이상룡 선생이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의해 무너지자 재산을 거의 다 팔아서 서간도로 이주하여 훗날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암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32년 길림성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한 이상룡 선생의 동생이 안동교회에서 3.1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이런 집들이 나라곳곳에 많이 있었을까? 아니다. 세종 13년에 공포된 ‘가옥 건축규정은 대단히 까다로웠다.
‘나라에 가사家舍제도가 없어서 일반 백성들의 집이 귀족들의 집을 지나치고, 귀족의 집이 궁궐을 능가하는 정도로 치장하려고 다투어대니 상하가 넘나들어 참으로 외람되다. 이제부터는 임금의 친형제나 왕자. 공주의 집은 50칸, 대군의 집은 거기에 10칸을 더하고, 2품 이상은 30칸 3품 이하는 30칸, 백성의 집은 10칸을 넘지 않게 하라.’
특히 민간주택엔 주춧돌 말고는 네모반듯하고 표면을 고르게 다듬은 돌은 쓸 수 없었고, 화려한 색상의 단청도 할 수 없었다, “
2021년 6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