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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한국근대사 인물(김창룡/백선엽/정일권/김종필/차지철/김재규)
문대식 추천 0 조회 698 20.08.11 20: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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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 35세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 40세 암살

김창룡
1916년 7월 18일 ~ 1956년 1월 30일
태어난 곳 함경남도 영흥군
복무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복무 기간 1940년 ~ 1956년
최종 계급 관동군 헌병 오장/대한민국 육군 소장 (중장 추증)
주요 참전
전투/전쟁
태평양전쟁, 한국 전쟁

김창룡(金昌龍, 1916년 7월 18일[1] ~ 1956년 1월 30일)은 일본군대한민국 국군 군인이었으며, 김구 암살의 배후로 종종 지목받는 인물이다.

목차

[편집] 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영흥군 출신이다. 1940년부터 만주에서 관동군 헌병보조원과 헌병 이등병으로 근무했다. 1941년 소련 국경 부근에서 첩보 부대원으로 이력을 시작하여 이후 평생 동안 정보 공작의 전문가로 살아가게 되었다.

 

1943년 상하이에서 파견되어 활동 중이던 중국공산당왕근례를 체포하였고, 이로 인해 왕근례가 이끌던 비밀 조직이 일망타진되는 성과를 올렸다. 김창룡은 공로를 인정받아 오장(伍長)으로 진급하였으며 이후로도 많은 비밀 조직을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편집] 미군정과 제1공화국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후 고향에 돌아왔는데,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두 차례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출했다. 1946년 결국 월남하였고,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속성으로 졸업한 뒤 1947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첩보 부대에 근무한 경력으로 쓰임새를 인정받아 정보소대 소대장을 맡았으며,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한 소련군 장교의 사진 촬영 사실을 적발해 그를 추방하게 하는 등 곧 능력을 드러냈다.

 

북한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김창룡은 반공 전선의 일선에 섰다. 남로당 간부들인 이재복이중업 등을 체포하였고, 남로당의 거물인 김삼룡, 이주하도 그의 손에 체포되었다. 군내에서 송호성 등이 좌익과 연계를 갖고 있다며 숙군 작업도 주도했는데, 그에게 용공 세력으로 지목 받은 장교들은 대개 송호성처럼 광복군이었거나 오동기처럼 중국군 소속으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8월 1일 부산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서울 수복 후에는 부역자를 가려내 처벌하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아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북진할 때 평양지구 특무대장으로 일하다가 1·4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일을 계속했다. 이때 김창룡은 35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이미 권력 실세였다. 그는 수사권을 독점했으며, 이승만과 직통 보고 라인을 갖고 있었다.

 

종전 뒤에도 대통령 이승만의 각별한 신임 속에 제1공화국의 각종 공안 사건들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용공 사건, 간첩 사건들은 후에 조작이라는 진술이 나왔다.

 

예를 들어 1949년 제14연대장 오동기 등이 연루된 인민해방군 사건이나, 1950년 남로당 이강국의 연인이라는 김수임을 체포해 처형한 사건, 소총을 관 속에 숨겨 대구로 이동하던 불순 분자들을 적발한 사건, 부산 정치 파동의 빌미가 된 부산 금정산 공비 사건 등이 있다. 1953년 국제간첩 정국은을 적발한 사건도 이범석의 족청계 숙청을 위해 조작 또는 과장된 사건이라는 설이 있었다.[2] 동해안 1군단이 연루된 동해안 반란사건, 1955년 한국 전쟁 때 북으로 간 조소앙이 이승만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개천절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편집] 사망

특무대를 이끌며 군에서 좌익 세력을 솎아내는 숙군 작업을 주도한데다, 일제의 헌병으로 일하면서 배운 공작 기법과 고문 수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조작 사건을 무수히 일으킨 것으로 평가된 그는 군과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적을 많이 만들었고, 결국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서울 원효로 1가 출근길에 정체불명의 사람들로부터 권총 다섯 발을 맞고 사망(40세)했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암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적십자병원으로 직접 찾아가 유해를 살펴본 뒤 그 날짜로 김창룡을 중장으로 추서했다.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해 애도의 뜻을 표한 후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군은 전국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수사에 착수했으며, 전군 장병의 휴가 및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3]

 

2월 3일 김창룡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 날 하룻동안 전 육해공군 부대가 조기를 게양하였고 장병들에게는 가무음곡과 음주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승만은 그 날 조사에서 "김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비문을 직접 써서 보낸 후 범인 체포를 거듭 독촉하였다.[4]

 

김창룡의 묘비 비명은 이병도가 썼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니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이병도의 비명은 "동란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 명"이라는 김창룡의 업적도 소개했다. 그러나 이 업적에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도 포함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5]

 

범인은 한달 후에 그의 특무대 부하로 대령인 허태영 등 현직 군인들로 밝혀졌다.

허태영은 김창룡의 전횡과 비리를 보다 못해 군 민주화를 위해 거사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다른 배후가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정확한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편집] 김구 암살 사건

그는 제1공화국 시절 각종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있었으며, 특히 김구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설 또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될 때 김창룡은 육군본부 정보국의 방첩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체포된 안두희에게 여러 편의를 보아준 사실이 있다. 심지어 김창룡이 김구 암살의 배후일 뿐 아니라 역시 김구 암살과 관련이 있던 채병덕, 장은산, 신성모의 입을 막기 위하여 이들의 죽음에도 개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러한 소문들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편집] 사후

시신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으나 그가 국립묘지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 계속되어 찬반 양론이 있다.[6] [7]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도 포함되었다.

[편집] 평가

윤치영은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8]

[편집] 김창룡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함께 보기

[편집] 참고자료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김창룡, 일제관동군헌병에서 대한민국특무부대장까지 (김혜진)〉,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21
  • 강준만 (2004).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3권》. 인물과사상사, 13~15
  • 박준성 (1992년년 5월월). 김창룡과 그의 묘갈. 《함께보는 우리역사》. 2007년 12월 21일에 확인.

[편집] 주석

  1. 김창룡과 그의 묘갈에 따르면, 공식 문서에는 1920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임채민. “[잘 몰랐던 경남문학지대]⑤함안 출신 양우정(하)”, 《경남도민일보》, 2007년 7월 4일 작성. 2008년 7월 8일 확인.
  3.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김창룡, 일제관동군헌병에서 대한민국특무부대장까지 (김혜진)〉,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서울: 청년사, 194쪽. ISBN 9788972783121
  4. 진덕규 외 (1990). 〈사료:1950년의 정치적 중요사건 (한길사 편집실)〉, 《1950년대의 인식》. 한길사, 437쪽
  5. 정지환 (2004).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독립기자 정지환의 역사추적기》. 인물과사상사, 31~33쪽
  6. 심규상. “김창룡 묘 이장 찬반 '맞대결' 시위”, 《오마이뉴스》, 2006년 6월 6일 작성. 2008년 7월 8일 확인.
  7. 시민연대 “친일파 김창룡 묘 국립묘지서 옮겨라””, 《경향신문》, 2008년 6월 6일 작성. 2009년 6월 8일 확인.
  8. 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308페이지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은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혹은 CC-SA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을 따릅니다.
 

 

이번 글부터는 개인적으로 자료를 밝히겠습니다. 다만 페이지까지 나오면 너무 길어지고.. 또 일부 자료에 대한 선입견과 불신도 있으실터라 관련 이야기는 '조갑제, 복거일, 전여옥'에 관한 인물 평전을 다룬 다른 글에서 하도록 하죠..

이번 이야기의 대부분의 자료는 조갑제의 홈페이지의 '고문과 조작의 뿌리'

 

 

( 나중에 많은 내용이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에서 반복됨)
백선엽의 '군과 나' 이전에 읽은 신동아의 관련 기사나
기타 여러 잡다한 글에서 자료를 얻었음을 밝혀드립니다.

1. 문제적 인물 김창룡 1916년 함경도 영흥출신입니다. 30년대 많은 '경제력은 없어서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야심차고 능력 ( 그것이 어떤 것인가는 별도로 해도) 있는 젊은이들이 걸은 것처럼 일본 하급 군인의 길로 접어 들었죠...


백선엽, 정일권,박정희등의 경우처럼 '정식 군사 코스'가 아니라 북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헌병대의 군속으로 시작하여 사환의 일을 보면서 3년 뒤엔 관동군 헌병보조원이 되고 곧 헌병부사관이 되어 주로 항일 중국인 조직( 당연히 조선인들도 있었겠죠..) 을 파괴하는 정보수집 업무에 종사했습니다.


몇년전에 '박정희 신드롬'을 취재하는 문화방송 기자가 '박정희는 일본군 헌병 대위 출신'이라는 망언을 남겨서 밥값을 못한 적이 있는데.. 순수 보병 출신인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김창룡은 말 그대로 정보통으로 활약했죠..


2. 업계의 특성상 자신의 '활약'에 대해서 대단히 자랑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맞는지는 아직 학자들이 조사해본 적이 없으니 일제 행적은 그렇지만...

해방후의 '대공 투쟁' 능력을 보면

그때 역시 대단한 활약을 했으리라는 건 예상할수 있겠죠..


당연히 해방 후 친척의 신고로 북한에서 전범 취급을 당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일설에는 하도 두들겨 맞아서 38선을 넘어올때 미군 경비병이 놀랐다고

하는데 -_-;; (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 거지 꼴로 서울까지 내려온 그는 만군 출신 장교 박기병의 소개로 원용덕( 세브란스 의대-군의관- 헌병 총사령관,

결국 김창룡의 동지이자 경쟁자가 됩니다.)의 추천을 얻어

사병으로 들어갔다가 육사 3기로 입학, 임관했습니다. 



일제때 활약을 해방후에 이어서 그는 정보소대장이 되어 군내의 좌익색출을

담당, 상부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백선엽의 동아일보 연재물인 '지리산'에서

대숙군 편에 보면 '이북에서 배운 노래가 울려퍼졌다고 하급장교 전원을 잡아서

똑같은 진술서를 쓰게 한' '업적'이 나오고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에 보면 '

국가의 장교들에게도 정치적 성향에 대한 자술서를 쓰게 할'

( 저자가 지적하듯이 그럼 일반 민간인들 알기는 x 같이 알았겠죠..)

정도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죠..


 

 


3. 전쟁 전의 김창룡의 위세를 알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조선경비대

시절 초대 법무감 겸 감찰감이었던 김완룡은 유동열 통위부장의 지시에 따라

김창룡의 전직비행을 조사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비리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를 다 잡아먹은 이를 왜 군 간부로 쓰느냐'는 생각때문인데

김창룡의 근무 부대에 갔더니 중대장인 이성가( 중국군 출신) 지프 차에

쇠사슬을 채워 움직이지 못하게 해놓고 끈질기에 김창룡의 구명을 호소하여

조사를 못하게 만들었다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4. 사실상 이 시대의 군 정보부대의 활약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 파악이 필요한 셈이죠... 지금이야 민간 파트 정보 업무는 국정원이 하고 군 관련 정보및 방첩은 기무사가 합니다. ( 이건 비밀이 아니죠..) 문제는 이런 분할은 1961년 5.16에서 비로서 시작됩니다. 물론 2공화국때 이런 안이 나왔고

이후락 ( 3공화국때 그 유명한)이 초대 책임자로 부임할뻔햇습니다만...


다시말해 50년대는 군사 정보 기관이 민간인을 무소불위로 감시하고 고문하고 하는 세상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섬뜩하죠 ^^) 더군다나 숙군과 같은

군 내부의 대규모 사업이 펼처질때 기민한 정보력을 필요로 했던 군수뇌부

( 아직은 정치 초년병인)로서는 이런 저런 손을 친일 경찰출신들에게

벌릴수 밖에 없었고 이것은 친일경찰-헌병및 특무대 장교-

군의 정치 세력화 이바지라는 선례를 남기게 되죠..


5. 또한 6.25가 나게 되면서 경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위축된 군의 위상이

커지면서 이러한 선례는 한국정치사에 크나큰 오점으로 남게 됩니다.


6.25가 나자 김창룡은 1950년 8월 1일 부산 CIC 대장으로 임명됐다가 서울 수복 뒤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부역자와 서울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지휘했고 평양지구특무대장으로 발령받았으나 1.4후퇴 바람에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합동수사본부장 일을 계속했습니다.


연재 예정중인 '3등국민의 철학-부역자 문제'에서도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지만 당시의 무분별한 부역자 점검및 학살 문제는 당대에도 문제가 되었고 ( 유병진 회고록)..때로는 기상천외한 추리가 동원되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학살에 김창룡이 어른 거린 것은 당연한 일이죠.. 더군다나 '북한지역에 있는 시민은 일단 내통자로 보는' ( 안용현 한국전 비사, 와다 하루끼 조선전쟁)류의 사고로서

평양 지역의 특무대장일을 지속했다면 아마.... 상상하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6. 전두환의 예에서 보듯이 계엄하에서 합동수사본부장은 사실상 수사권을 독점한 자리로서 이승만과의 직통보고 루트를 늘 갖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범석 국방 장관 시절에도 그 역시 이런 보고루트를 신뢰햇다는데 후일의 차지철의 예에서 보듯이 독재자와의 이 직통선이야말로 권력이 나오는 원천이었죠.


김창룡은 위험한 전선보다는 후방에서 항상 독재자의 측근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 직통선을 확보했고, 그래서 권력행사를 무자비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차지철도 마찬가지 입니다.) '드물게 그를 이해해주는 사람'인

김안일은 김창룡을 이렇게 평합니다. "반공의식이 투철했고 일에 대한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나 두 가지 단점이 있었다. 공(功) 앞에선 전우가 없었고,

이해가 상반되는 사람을 용공으로 모는 버릇이 있었다."


( 그리고 이건 조갑제의 개인평이기도 하죠 -_-;;)


7.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친일경찰과 헌병 출신들은 늘 불안했습니다.

일제 때부터 그들은 아래로부터 배척받고 있는 자신들의 신세를 잘 알고 있었거

위를 보고 살아야 하며, 권력자의 신임만이 생존의 지름길이란 사실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 신임을 받으려면 고문 기술자로서의 필요성을

인정받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뭐 없는 사건도 만들고, 무고한 사람도

공산당으로 몰아야 했으며,당연히 고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죠.


 

김근태 의원의 회고록인 '남영동'에 보면 이근안에게 당하는 칠성판 물고문

방식과 전기 고문 방식이 처절할 정도로 자세히 나옵니다. 공개 계시판에서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정말로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방식이 1940년대

조선어 학회사건 피해자들의 회고록에 나오는 바로 그 방식이라는 거죠...

일제-50년대 -80년대- 최근의 모 사건에서 이어지는 화려한 전통인지 -_-;;;


하여간 이런 컴플렉스를 사회의 양심세력과 독립운동가들을 대상으로 적용한 것이 일제였고 이승만 정권이었고 그 주구는 바로 김창룡이었습니다. 특무대에서 특히 부정적 기능을 많이 한 것은 취조를 전문으로 하는 고등계 출신자이었고 특무대에서 일했던 김모 당시 수사관은 "고등계 출신자들은 조작이나 고문에 대해선 양심이 마비된 것 같았다. 고문을 통해서 피의자와 한판 승부를 하여 자백이란 걸 받아내는 데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고 회고했다고 하죠

8. 김창룡의 생애에서 가장 화려한 업무 중에 하나가 바로 암살사건입니다. -_-;;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김창룡은 신초식과 송용고 2인에게

권총 3발을 맞고 죽게 되죠.. 당연히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수표 추적 -_-;;

결과 허태영 대령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드러납니다.


허태영은 조선주둔군 헌병출신으로서 가족 이야기니 신빙성은 의심스럽지만 반일 활동과 기타 여러 일때문에 보복을 피해서 헌병대에 입대하였다는 전력이

있습니다. ( 개인적으로 좀 뻥 같습니다.) 솔직히 만주군 계통 헌병 장교들은

일제때나 해방이후에나 조선주둔군 출신과 트러블이 심했는데요...

하여간 사건 당시에는 해임되어서 무보직 상태였죠..


 

9. 일단 '사형 판결'로 일단락이 되었습니다만 허태영 부인의 탄원으로

강문봉, 공국진 두 장군이 배후인것으로 드러나죠.. 그리고

그 위에는 정일권 장군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상당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자 이승만이 백선엽 ( 다른 사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에게 '덕( 원용덕)이냐? 권( 정일권)이냐?라는 메모를 보여주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 사건은 군 내부의 알력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으로 평가되었습니다.


10. 결국 재판관은 백선엽으로 하고 이승만의 지시로 강문봉 장군 선까지

수사하는 걸로 결론짓죠.. 군법회의 전반내내 요구사항이었던 정일권 장군의

증언은 결국 불문에 붙여졌습니다. 후에 이들은 사형 판결을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후 4.19 후에 의거가 인정받아 사면됩니다.


 

재판정에서 강문봉 장군은 진주만 기습의 예를 들면서 '특무대와 일반 군과의 지휘권 알력'때문에 결단을 내릴수 밖에 없었다고 하고..

허태영은 옥중 수기에서 김창룡이 여러 이권에 개입해서 20억원의 이득을 챙겼으며 다음의 여러 사건을 조작했다는 말을 남깁니다.

관사건
1951년 합동수사본부장이던 김창룡은 지리산의 공비가 부산에서 무기를 구입, 장례식을 가장하여 지리산으로 운반하려 했다는 사건을
적발했다고 대통령에게 허위보고했다.

삼각산 사건
9.28수복 후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로써 삼각산 뒤편의 모 부락을 자치하고 있던 주민들을 공산분자라고 날조,
이들이 서울시 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꾸며 불법으로 살상하고 대통령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조병창 사건

 
1952년에 부산 조병창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방화인지 실화인지 판단할 증거가 없었다. 김창룡은 한 지방민을 매수하여 대남간첩으로 가장시켜 이 간첩이 조병창 직원에게 지령하여 방화한 것이라고 날조했다. 대남간첩 역을 한 사람은 그 뒤 인천특무대에 문관으로 채용되었다.

김종평 장군 사건

1952년, 특무부대장 당시 반목관게에 있던 김종평(金宗平) 정보국장을 거세하기 위하여 만든 사건이다.
 
 김종평 장군이 이형근(李亨根) 대장(제 1군 단장), 이용문(李龍文) 장군(육본 작전국장), 심언봉(沈彦俸) 장군(헌병사령관) 및
민국당 등과 공모하여 이대통령이 동해제 1군단을 방문할 때 암살하고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로 했다고 조작했다.
날조의 규모가 너무 커서 상부에서 받아드려지지 않자 김종평 장군만 투옥시켰다.

여기서 조병창 사건은 일설에는 북한에서 파견된 남도부가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부산 정치 파동의 도화선이었던 '부산 공비 출몰+동래에 놀러간 미군 장교 사망' 사건은
 존 할러데이의 '한국전쟁의 전개과정'과 이범석의 회고록은 '북한 게릴라의 소행'이라고 하고
선우종원과 커밍스의 견해는 '남한 정부의 조작- 미군 대령도 죽일정도 -_-;;'라고 하죠..

11. 백선엽의 견해로는 강문봉, 공국진 두 사람이 모두 특무대에 모종의 비위 사실이 탐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실질적인 피해자이자 의문의 인물인 정일권은 회고록에서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12. 김창룡을 보면 단순히 '민족정기'를 떠나서 한 인간의 권력욕과 그것을 이용하려는 절대 권력 ( 일제, 이승만)의 미묘한 조화에 경악합니다. 삐뚤어진 권력욕구를 적절히 이용했던 정치 9단의 권력, 선동성, 인권알기를 x 같이 아는 사회, 전쟁,,, 일제및 50년대의 기술자들은 자연퇴장햇지만 그러한 모습이 완전히 사회에서 사라졌을까요? 이제는 경제력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기괴한 사람들이 나오는것이 아닌가 합니다.


백선엽 : 32세 육군참모총장

 

- 1949년 여순반란 남로당 박정희 구호

-1961년 5.16후 퇴역 후 외교관

- 교통부장관(지하철 1기 사업수행) 

 

- 생존

 

백선엽
출생 1920년 11월 23일
일제 강점기 한국 평안남도
거주지 대한민국
국적 일본 제국의 국기 일본 제국, 만주국의 국기 만주국,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직업 교사, 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
백선엽
1920년 11월 23일 ~
복무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복무 기간 1940년대 초 ~ 1960년
최종 계급 만주군 중위/대한민국 육군 대장
주요 참전
전투/전쟁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기타 이력 교통부 장관


백선엽 (白善燁, 1920년 11월 23일(음력 10월 11일) ~ )은 일제 강점기의 교사, 군인이자 대한민국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이다. 만주국의 장교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았고, 해방 직후에는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했다.

 

이내 소련군이 이북지역에 진주하게 되자, 1945년 12월에 월남하게 된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에서 활동하였고, 훗날 대한민국의 창군주역으로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대한민국 국군 장군으로 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예편 후에는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의 외교관을 지냈다. 2009년 3월 23일 대한민국 명예 육군 원수로 추천되었으나,

 만주군의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기에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수록되었다.[1] 평안남도 출신.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출생과 성장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교직에 종사했다. 그러나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1940년 3월 펑톈(奉天) 군관학교에 진학하였다. 1942년 12월에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 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 배속되어 3년 동안 근무 하였다. 1943년 12월 러허성에서 간도특설대 기박련(기관총,박격포 중대를 말한다.)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간도특설대'는 종래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 1938년 12월 1일 창설되었는데, 사령부는 간도성 연길(延吉) 부근 명원구에 있었다. 보병 기갑 혼성 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명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한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 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이 부대는 1938년 12월 창설 직후 간도, 길림, 통화 일대에 출몰하는 안창길(安昌吉), 양정우(楊靖宇), 진한장(陳翰章), 최현(崔賢) 등의 반만 항일(反滿抗日) 세력의 토벌에 투입되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다.

 

백선엽이 이 부대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간도특설대'에서 김찬규, 송석하(宋錫夏), 김석범, 신현준(申鉉俊), 이용(李龍), 임충식(任忠植), 윤춘근(尹春根), 박창암(朴菖岩)등과 함께 근무했음을 밝히고 있다(《군과 나》, 111쪽). 백선엽의 회고록에 의하면 '간도특설대의 임무는 팔로군 토벌에 주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1944년 봄 열하성(熱河省)과 중국 북부에서는 팔로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일제는 만군 3개 여단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백선엽이 속한 중대도 여기에 차출되어 열하성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는 열하성의 팔로군 토벌에 종군하여 특수공작, 특히 정보 수집으로 공적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열하의 작전이 끝나자 그는 원대복귀명을 받고 휴가를 얻어 고향인 평양에 들러 결혼한 후 소속 부대에 귀대했다. 그러나 귀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제가 패망하게 되었고, 패망 당시 백선엽은 만주국군 중위였다. 그는 만주로 진격해 오는 소련군을 만나 명월구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편집] 한국전쟁 발발 이전

종전 후, 조선으로 돌아와 당시 민중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받고 있었던 고당 조만식을 찾아갔다. 이때 조만식은 그를 비서로 채용하여 백선엽은 해방직후 잠시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2] 이후 조만식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지만, 김일성공산주의 지배를 반대해, 1945년 12월 24일에 월남하였다.

 

월남 후 1945년 12월 5일에 만들어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 26일에 임관하여, 같은 해 1월 15일에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입대하여 제5연대장을 맡았다.[3]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다.

 

육본 정보국장 재직 중이던 1948년에 발생한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 및 숙군 사업을 지휘하였다.

이때 같은 만주군 출신으로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던 중 체포된 박정희(당시 소령)의 구명에 힘쓰기도 했다.[4]

[편집] 한국전쟁 발발 이후

국군 1사단장 시절
백선엽

1950년 6월 25일에 백선엽은 당시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열흘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육군 제1사단을 지휘하였으나, T-34/85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퇴하면서도 사단 편제는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개전 초기 한국군 전방 사단 중에서 편제를 유지하며 후퇴한 사단은 백선엽 대령의 1사단과 김종오 대령의 6사단(춘천 주둔), 이성가 대령의 8사단(강릉 주둔)이 유일하였다. 대구로 후퇴하던 중 이 공로로 백선엽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한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되어 지원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하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2]

 

그가 나가보니 한국군이 후퇴하고 있었고, 당시 병사들은 이틀을 굶은 상태였다 한다.[2] 그는 후퇴하는 한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2]

 

그후 미 1기병사단, 미 24보병사단과 평양 점령을 경쟁하여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부대가 되기도 하였다.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한 1사단은 중공군의 반격에 밀려 다른 유엔군과 함께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미국이 북한중국과 휴전협상을 시작했을때 백선엽은 휴전회담의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였고, 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어 군단장으로 다시 강릉으로 부임하였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야전사령부"를 구성하였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인 1952년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기존에도 2군단이 있었으나, 1950년 11월 중공군 2차 공세시 덕천, 영원에서 괴멸하자 해체된 바 있다(이후 한동안 한국군 사단들은 군단급 이상 사령부 없이 미군 각 군단에 분산배치되기도 하였다).

 

그 후,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군 근대화를 위한 미국 군사유학 강화(본인 자신도 레벤워스 미 참모대학으로 군사 유학을 다녀옴), 10개 상비사단 창설(11사단 ~ 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등을 추진하였다.

 

1954년 2월에는 동양 최초로 제 1야전군을 창설하여 155마일 휴전선 방어책임을 미8군으로부터 사실상 인수 받아, 43개월의 장기간 동안 초대 1군사령관으로 야전군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1957년 5월, 다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59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취임, 한국군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그러나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장교들에 의한 청군 운동으로 1960년 5월 31일 퇴역했다.

[편집] 퇴역 후

퇴역 후는 외교관에 임명되어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를 거쳐 박정희 정권에서 교통부 장관으로 서울의 1기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친동생인 백인엽이 인천광역시에 소재해 있는 인천대학교를 비롯한 선인재단의 여러 사립학교를 설립과 운영하였으나, 재단 내부의 비리와 부패 행위로 말미암아 1994년 선인재단의 모든 학교는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이로 인해 백선엽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도 하였다.

 

2009년 3월 23일,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기념하여 백선엽을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할 계획임이 보도되었다. 실행된다면 백선엽은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 보유자가 된다.[5][1][6]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명예 원수로 추대함에 따라 한국 전쟁 참전군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1]

 

만주군의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기에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수록되었으며,

이 때문에 명예원수로의 추대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편집] 최근 근황

81세의 백선엽 장군(왼쪽)
  • 2002년4월9일 경기도 동두천시 미 보병 제2사단 캠프 케이시에서 열린 '제너럴 백선엽 히어로 룸' 개관식에서 백선엽 예비역대장(왼쪽)이 러셀 아너레이 미 2사단장과 함께 자신의 흉상과 업적이 새겨진 현판을 보고 있다. 동두천시 미2사단 캠프 케이시에서 2002년4월9일 개관식을 갖은 이 기념관은 미군측이 부대 근접전투 전술훈련장(the Close Combat Tactical Trainer)을 백장군 이름으로 명명, 사후 강평실로 사용한다. 100여평 규모의 기념관은 중·소대 전투훈련 상황을 부대원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강평할수 있도록 시설을 마련했다. [7]
  • 2008년 5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다.
  • 2009년2월 미 보병재단의 제리 화이트(예비역 소장) 회장이 백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2009년 3월 19일 개관 예정인 미국 국립보병박물관에 소장할 “백 장군의 생생한 전투 경험담을 직접 녹음해 달라”고 요청했다. 화이트 회장은 “백 장군의 육성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돈독하게 유지되는 한·미동맹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백 장군은 미 보병학교 졸업식에 열릴 박물관 개관식에 외국 장교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됐다.[8]
  • 2010년3월10일 육군 1사단은 백선엽 장군 기념석을 제막했다. 육군 보병 1사단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초청해 그의 전승과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 제막식을 열었다. 전쟁 지휘관 개인의 이름을 단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9]
  • 2010년 6월 21일 '한국전쟁기념재단'이 출범했다. 여기서 백선엽이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10]

[편집] 그에 대한 미국의 평가

미국은 주한미군사령관 이취임식때는 "존경하는 백선엽장군"이라는 말로 인사말로 시작하는 전통이 있으며, 미군 장성진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캡스톤 그룹의 해외연수 프로그램의 필수코스가 '한국에 찾아가 백선엽장군 만나기'이다 [11] 또한 주한 미8군에서 카투사 장병들을 대상으로 백선엽 장군 보드(General Paik Board)를 주관함으로써 백선엽 장군의 활약상에 대해 높이 치하하고있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백선엽을 연기한 배우

[편집] 주석

  1. [오늘의 세상] 대한민국 첫 '명예원수(元帥)' 나온다 조선일보 2009.03.23
  2. (창간89특집/1920년생들) 25세에 광복… 6·25와 4·19 겪고 50代에 한강의 기적 일궈 조선일보 2009년 03월 05일자
  3. 1945년 12월에~제5연대장을 맡았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196~197쪽.
  4. 6·25 전쟁 60년 -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5) 박정희 살리기 중앙일보 2010년 08월 04일자
  5. >디지털뉴스팀. “"정부, 백선엽씨 '명예원수' 추대 검토"”, 《한국경제》, 2009년 3월 23일 작성. 2009년 3월 23일 확인..
  6. "6·25 참전용사 기리는 계기 된다면 만족" 문화일보 2009-03-23
  7. 백선엽 장군 기념관 개관식 :: 네이버 뉴스
  8. ‘백선엽 전투 경험 육성’ 미국에 영구 보존- 중앙일보 뉴스
  9. ‘잊혀진 전쟁’ 6·25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중앙일보 뉴스
  10. 프런티어타임스
  11. http://www.army.mil.kr/army_catalog/305/data/038.pdf


전 임
유재흥
제4대 합참의장
1959년 2월 ~ 1960년 5월
후 임
최영희
전 임
강서룡
제19대 교통부 장관
1969년 10월 21일 ~ 1971년 1월 28일
후 임
장성환
전 임
이종찬
제7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1952년 7월 23일 ~ 1954년 2월 13일
후 임
정일권
전 임
이형근
제10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1957년 5월 18일 ~ 1959년 2월 22일
후 임
송요찬

 

 

수갑 찬 박정희 눈가가 붉어졌다 … “한번 살려 주십시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전등불은 아직 켜지 않은 상태였다. 사무실 안으로는 아직 겨울 석양의 자락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밀려오는 어둠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면서 사무실 전체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김안일 방첩과장은 말을 이어갔다. “박정희 소령이 마지막으로 국장님을 한번 뵙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꼭 만나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대로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군사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모든 증거가 나와 사형이 확정됐지만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한민국 군대에 파고 든 남로당 조직들을 검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당신 말대로 한번 박 소령을 만나봅시다.” 내가 그렇게 대답했다. 김안일 소령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걸어나갔다. 잠시 기다렸던 것 같았다. 박 소령이 문 밖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니면 김안일 소령이 계단을 걸어 내려가 지하 1층의 감방에서 박 소령을 데리고 올라왔는지는 기억이 없다.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49년 2월 당시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의 결정에 따라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55년 원주의 1군사령부 사령관인 백선엽 대장(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에서 셋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 신고를 받은 뒤 격려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군복을 벗었다가 6·25 전쟁이 터진 뒤 복직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조금 있으려니 내 사무실 문이 열렸다. 당시 나는 사무실 중간에 있었던 응접세트 의자의 중앙에 앉아 있었다. 김안일 소령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박정희 소령이었다. 작은 키에 다부진 인상, 과묵한 표정은 그 전해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 반란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을 때 만났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그는 광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검거됐다. 그의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 치안국장으로부터 건네받아 마지막으로 내게 넘겼던 군대 내의 남로당 조직 명단에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내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그 명단을 건네받아 수사에 착수한 뒤 별도의 과정을 거쳐 붙잡힌 것으로 기억한다.

김안일 과장은 아무 말 없이 내게 손짓으로 박 소령을 가리켰다. 김 과장은 내 왼쪽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박 소령은 내 정면에 서 있었다. 그와 나의 중간에는 기다란 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거리는 5m쯤이었다.

이미 어둑해진 무렵이었다. 박 소령과 나 사이에는 그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얼굴 표정이 처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군복 차림이었다. 계급장은 달고 있지 않았다.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사무실 문을 걸어 들어와 응접세트 끝에 섰다. 이어 박 소령은 약간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그러고서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우선, 그 의자에 앉으시라”고 권했다. 머뭇거리던 박정희 소령이 의자에 앉았다. 나와는 얼굴을 마주 보고서 앉은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박 소령은 꼿꼿한 자세였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고 끝에 조금 걸터앉은 상태였다. 나는 그가 자리를 제대로 잡고 앉아 나를 마주 바라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 차례였다. 나는 박 소령이 김안일 과장을 통해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냈던 터라, 그가 스스로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계속 기다렸다. 내가 먼저 입을 열 처지는 아니었다. 죽음의 길로 내몰린, 이제 10여 일이 지나면 수색의 처형장으로 끌려갈 박 소령이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왠지 모르게 말이 없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박 소령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상황이 10여 초 흘렀던 것 같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승과 저승으로 엇갈릴지 모를 운명에 놓인 박 소령과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는 시간으로는 꽤 길었다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박 소령의 얼굴이 잠시 움직였다. 어둑해진 사무실이었지만 내 눈도 그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얼굴을 조금 찡그리는 듯하더니 박 소령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간단했다. 아무런 수식이 없었다. “한번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이 박 소령의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 그의 눈에는 눈물이 도는 듯했다.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도 내 눈에 들어왔다. 꼭 할 말만을 강하게 내뱉었지만, 그는 격한 감정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의연(毅然)하기도 했지만, 처연(悽然)하기도 했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선 사람임에는 분명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반드시 해야 할 말 한마디만 얼른 내뱉는 점에서 그는 꿋꿋했다. 비굴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제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그는 많은 감회에 휩싸여 그를 끝내 이기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줄곧 지켜보면서 잠시 동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를 살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주 엄혹한 시절이었다. 좌익은 발호했고, 급기야 제주 폭동에 이어 여수와 순천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벌어졌던 때였다. 군대 내부의 좌익을 척결하는 것은 신생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려 있는 중차대(重且大)한 작업이었다.

그 숙군을 지휘하고 있는 내가 사형이 확정된 사람을 살려주는 일에 아무런 생각 없이 앞장설 수 있는 처지가 결코 아니었다.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내각과 미 군사고문단, 나아가 일반 시민 모두 이 작업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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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토벌에서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백선엽


백선엽( 白善燁 1920~ )
1951 육군 제1군단장
1952 육군 참모청장
1960 연합참모본부 의장
1969 교통부 장관
1973 한국종합화합공업주식회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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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구(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경희대 강사)

빨치산 토벌과의 숙명적 관계


백선엽, 만주에서 항일 세력을 토벌하던 만군 중위, 해방 후 체포를 피해 월남했던 청년,
 
그후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빨치산 토벌에 깊이 관여했던 장교,
한국전쟁 때 1만 5천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고향 평양에 1착으로 입성했던 장군,
 
전쟁중 '白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쥐잡기 작전'을 통해 빨치산활동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던 장성,
 
30대의 나이에 두 번씩이나 참모총장을 역임했던 입지적전인 군인,
 

 

그리고 전역한 이후에도 대사, 장관, 국영기업체 사장 등을

 

역임했던 대단히 관운이 좋았던 인물. 이상이 그의 화려했던 경력이다.
 
이러한 경력 중에서도 그가 월남한 반공 장교로서 빨치산 토벌과 맺었던
뗄래야 뗄 수 없는 숙명적 관계가 유독 돋보인다.

백선엽은 평양에서 진남포 쪽으로 28km떨어진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1920년 11월 23일 태어났다. 백선엽과 마찬가지로 남한에서 유명한 반공 장교가 되었던 그의 동생 백인엽(白仁燁)도 2년 후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은 중간 정도의 지주로서 부근에서 비교적 명문 가문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 백윤상(白潤相)도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을 나왔다 한다.
 
그러나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함으로써 그의 가족은 평양 시내로 이사를 했고,
어머니가 생활을 꾸려야 했던 그때부터 생활은 어려워졌다.

 

약송(若松)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비가 덜 드는 평양사범학교로 진학했다.



만주에서의 친일 활동

평양사범학교 졸업반 때 그는 후일 비행사로 이름을 날린 박승환(朴承煥)과 이상열(李相烈) 등 만주군관학교 학생들을 알게 돼
이들로부터 군인이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1940년 봄 그는 봉천(奉天)에 있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만주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浮儀)를 황제로 하여 1932년 3월 수립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있었다.
 
만주군관학교는 이러한 만군의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여기에는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등이 입학했고 이들은 졸업 후 만군에 배치되었다.
사실상 관동군의 예하부대라 할 수 있는 만군은 주로 항일 세력의 토벌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만주군관학교는 처음으로 봉천에 있다가 나중에는 신경(新京)으로 옮겼는데, 다수의 조선인들이 여기를 거쳐 만군 장교로 임관되었다.

 

 

 
정일권(丁一權, 봉천 5기), 김찬규(金燦圭, 봉천5기로 이후 백일(白一)로 개명함), 김석범(金錫範, 봉천 5기),
최남근(崔楠根, 봉천 7기),
 
박임항(朴林恒, 신경 1기), 이주일(李周一, 신경 1기), 김동하(金東河, 신경 1기),
박정희(朴正熙, 신경 2기), 이한림(李翰林, 신경 2기),
강문봉(姜文奉, 신경 5기) 등이 그들이다.
이들 중 성적이 좋은 정일권, 박정희 등 일부는 일본 육사에 편입하기도 했다.

1941년 12월 만주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한 백선엽은 만주 동북부의 자므스
(佳木斯)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곧 그는 '간도특설대'의 조선인 부대로 전출, 이후 3년 동안 거기서 근무하게 된다.
 
 '간도특설대'는 종래의 조선인 국경감시대를 폐지하는 대신 1938년 12월 1일 창설되었는데,
사령부는 간도성 연길(延吉) 부근 명원구에 있었다.
보병 기갑 혼성 부대로 출발한 이 부대는 당초 360명으로 발족되었으나 나중에는 800명 가까이 늘어났다 한다.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의 반 수와 소대장 이하 전 사병은 조선인이었다.

이 부대는 1938년 12월 창설 직후 간도, 길림, 통화 일대에 출몰하는 안창길
(安昌吉), 양정우(楊靖宇), 진한장(陳翰章), 최현(崔賢) 등의 반만 항일(反滿抗日) 세력의 토벌에 투입되었다.
 
백선엽이 이 부대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간도특설대'에서
김찬규, 송석하(宋錫夏), 김석범, 신현준(申鉉俊), 이용(李龍), 임충식(任忠植), 윤춘근(尹春根), 박창암(朴菖岩)등과 함께
 근무했음을 밝히고 있다(《군과 나》, 111쪽).

1944년 봄 열하성(熱河省)과 중국 북부에서는 팔로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일제는 만군 3개 여단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백선엽이 속한 중대도 여기에 차출되어 열하성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는 열하성의 팔로군 토벌에 종군하여 특수공작, 특히 정보 수집으로 공적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열하의 작전이 끝나자 그는 원대복귀명을 받고 휴가를 얻어 고향인 평양에 들러 결혼한 후 소속 부대에 귀대했다.
 
그러나 귀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제가 패망하게 되었고, 그는 만주로 진격해 오는 소련군을 만나 명월구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일제의 패망과 월남

일제의 패망은 그 밑에서 부일(附日)했던 친일파 조선인들,
특히 직접적으로 항일 운동의 진압에 종사했던 조선인들에게는 파멸의 의미했을 것이다.
백선엽은 이러한 파멸을 앞에 두고 신속하게 대처한다.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을 때 그는 소련군을 따라온 한인 통역에게 조선 사람의장래가 어떻게 될지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조선은 곧 독립된다. 국호는 동진(東震)공화국이 될 것이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붙잡혀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빨리 고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하순, 그는 부인과 함께 그곳을 떠나 도보로 고향을 향했다.
그는 연길과 용정(龍井)을 거쳐 무산(茂山)에서 두만강을 건너 동해안 성진(城津)으로 향했다.
 
성진에서 평양으로 들어갈 교통수단을 찾았으나 해방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교통은 마비된 상태였다.
그는 계속 동해안을 따라 함흥(咸興), 고원(高原)까지 내려온 다음, 태백산맥으로 들어가 양덕(陽德)을 거쳐 9월 말 평양에 도착했다.
소련군을 피하기 위해 그는 1개월에 걸쳐 장장 800km를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단 평양으로 피신해 온 백선엽은 마침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의 비서실장으로 있던 친척뻘인 송호경(宋昊經)의 소개로
고당의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金日成)이 급격히 부상되자,
 백선엽은 만주국의 군관으로 만주에서 공산계 게릴라들을 추격해 다닌 사실이나
열하성에서 팔로군 토벌에 공을 세운 전력이 폭로될까봐 무척 우려했던 것 같다.
 
10월 하순에는 소련군의 지도로 창설된 적위대(赤緯隊)에 의해 그의 동생 백인엽이 맡고 있던 고당의 경호대도 해산되었다.
 
메이지 대학을 다니던 중 학도병으로 나가 일본 항공병 소위로 해방을 맞았던 백인엽은 해방 직후 고당의 경호를 맡고 있었다.
이때쯤 원용덕(元容德)이 백선엽을 찾아왔다. 일제가 패망했을 때 원용덕, 정일권 등의 만군 장교들은 신경에 모였다.
 
이들은 치안 조직을 만들어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라는 이름을 내걸고 소련군의 눈을 피해 국내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용덕은 그 마지막 대열을 이끌고 국내로 돌아오다가 평양에 들린 것이다.
원용덕의 방문을 받은 백선엽은 불안하고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한 채 자신은 감시당하고 있다며 지체없이 남하할 것을 권했다.
원용덕과 그 일행은 곧장 평양을 떠났다.
 
얼마 후 정일권도 백선엽을 찾았다.
정일권 역시 원용덕 등과 같이 국내 귀환을 준비하다가,
소련군에게 억류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가던 중 수송열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쳐 오던 길이었다.
정일권백선엽의 동생 백인엽과 함께 그해 12월 초 남행길에 올랐다.

12월말에는 김찬규와 최남근이 백선엽을 찾았다. 백선엽은 이들과 함께 남행을 결심했다.
장사꾼으로 변장한 이들은 한 작은 역에서 기차를 타고 해주에서 내렸다.
밀항선을 마련하지 못한 그들은 12월 27일 밤 청단(靑丹) 부근에서 38선을 넘을 수 있었다.
38선을 넘은 직후 논두렁에서 한숨 돌리고 있을 때,
 김찬규가 "서울에 가면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해야겠다"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을 '백일(白一)'로 고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후 김찬규는 김백일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들은 다음해인 1946년 1월 초순 서울에 도착했다.



국방경비대 참여와 제5연대 창설

당시 만주와 북에서 친일을 했던 사람들은 처벌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탈출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군, 경찰, 반공청년단 등 반공 기구에서 활동하게 된다.
서울에 도착한 백선엽, 김백일, 최남근 세 사람도 곧 군에 참여했다.
 
이들은
이미 미군정의 국방경비대에 참여하고 있던 정일권과 백인엽의 권유를 받고 협의 끝에 국방경비대에 참여하게 됐던 것이다.
1946년 2월 26일 이들 세 사람은 군사영어학교를 거친 것으로 하여 중위로 임관, 연대 창설 요원의 보직을 부여받았다.
중위로 임관된 것은 만군에서의 과거 경력이 감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그들이 이응준(李應俊) 군사국 고문에 의해 임관, 보직을 부여받던 장면
(《한국사 비사》상권, 101~102)이다.

제군들이 오기를 기다렸소, 젊은이들이 연대를 창설하는데 몹시 고생하고
있으니,
최남근 중위는 대구에 가서 제6연대를, 백선엽 중위는 부산에 가서 제5연대를 창설해주게. 몹시 고생들하고 있으니 곧 부임해 주기 바라네,
그리고 김백일 중위는 전라북도에 가서 제3연대 창설을 담당해 주기 바라네.
젊은이를 붙여 돕게 할 테니 잘 부탁하네.

즉 이들은 서류상으로만 군사영어학교 졸업생으로 되어 있을 뿐,
태릉(泰陵)에 있는 학교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채 임관되자마자 임지로 발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 국방경비대 창설을 막 시작하여 장교가 부족했던 미군정청은 과거의 군 경력만을 감안하였고,
그 경력이 어떠했던 간에 즉시 임관, 배치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군 중위 백선엽은 하루아침에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1946년 3월 1일 백선엽은 이후락(李厚洛), 백남권(白南權), 김익렬(金益烈) 등과 함께 부산 제5연대에 부임했다
.
 
백선엽이 부임했을 때 박병권(朴炳權), 이치업(李致業), 오덕준(吳德俊) 등이 이미 연대 창설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으나
 선배격인 백선엽이 대대장 겸 A중대를 맡게 되었다.
이때 부산지구 제5연대에 모병된 사람들 중에는 노재현(盧載鉉), 박진경(朴珍景), 김창룡(金昌龍) 등이 있었다.
 
 김창룡은 이후 경비사관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된 후 군 내부의 좌익 세력 검거에 활약하게 된다.
 백선엽은 이후 2년 동안 제5연대에서 중령까지 진급했다.
 
1974년 12월 1일 부산에서 제3여단이 창설,
제5연대가 그예하에 들어가게 되자 백선엽을 제3여단 참모장으로 전보되었다가,
1948년 4월 11일에는 통위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에 보직되었다



빨치산 토벌과 월남 반공 장교

정보국장을 맡게 된 백선엽은 그의 증언록 《실록 지리산》에서 직책상 폭동
진압과 빨치산 토벌에 적극 관계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폭동이나 빨치산 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이 주된 활동이었던 듯하다.
 
4ㆍ3 제주민주항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시사해 준다.

요즘 들어 사회 일각에서 4ㆍ3사건을 미군정과 경찰에 대항한
민중 항쟁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이는 당시 29만 제주도민을 모두 폭동 동조자로 내모는 일이 아닐 수 없다.

4ㆍ3사건은.....가장 커다란 요인은 당시 제주도가 처해 있던 특수한 환경을
이용해 무력으로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좌익 세력 들의 집요한 공작이었다
(《실록 지리산》, 110~ 111쪽)

한편 여수ㆍ순천 사건과 관련, 선견대의 일원으로 광주에 내려갔던 백선엽은
송호성(宋虎聲) 사령관과 합류해 진압 작전에 깊이 관여했고,
미 군사고문관인 하우스만(James Hausman)과 밤을 새워 가며 전황을 점검하고 작전 계획을 짰다고 한다.

여수ㆍ순천 사건 진압 직후 일시 숙군 업무를 지휘했던 백선엽은 1949년 7월 22일 광주 주둔 5사단장으로 전직되어,
직접 호남 지역의 서남 지구 빨치산 토벌을 지휘하게 되었다. 당시 빨치산들은 7월 공세, 9월 공세 등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9월 중순 그는 자기 휘하 15연대 소속의 1개 대대가 광양에서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그 중 수백 명이 생포되는 '광양 사건'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위하의 제15연대가 전남 보성군 문덕면 한천 부락을 통비(通匪) 부락이라 하여 3백 호를 불태워 버린 일도 있었다.
백선엽은 그 일과 관련,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사죄했다고 했다.

1949년 겨울에 들어서면서부터 상황은 반전되었다.
식량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빨치산 세력은 진압군의 동계 토벌로 붕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백선엽이 담당했던 호남의 서남 지구에서도 빨치산 토벌이 본격화되었고,
10월에는 전남도당 유격대 사령관인 최현(崔賢)이 사살된 것을 계기로
백아산, 모후산, 조계산 등 서남 지구 빨치산 거점들이 쉽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군경 합동 작전으로 진행된 1949년의 동계 토벌은 빨치산들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1950년 3월 막을 내렸다.
호남 일대에도 1950년 2월 5일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일제 말기 간도특설대에서 반만 항일 세력들을 뒤쫓던 경험과 열하성에서 팔로군을 토벌했던 백선엽의 경험은
서남 지구에서 빨치산을 토벌하던 이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와 관련, 그는 "군ㆍ관ㆍ경이 긴밀한 협조 체제를 갖춰야만 빨치산 토벌에 성공을 기할 수 있다는 교훈은
이미 만주군 시절 만주와 북간도, 만리장성 서쪽 기동(冀東) 지구에서의 토벌 경험에서 체득한 바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실록 지리산》, 284쪽). 1950년 4월 백선엽은 제1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최남근의 사형과 박정희의 구명


백선엽은 빨치산 세력과 이 같은 숙명적인 인연을 맺고 있던 중 숙군(肅軍)에도 깊이 관여하게 된다.
즉 여수ㆍ순천 사건은 군 내부에 숙군의 회오리를 몰고 왔고,
당시 정보국장으로 있던 백선엽은 전국적인 숙군 작업을 총지휘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숙군에 필요한 정보는 군 자체에서 수집한 정보와 경찰에서 넘겨 준 자료가 기초가 되었다
특히 경찰에서 넘겨 준 자료에는 일제 당시부터 좌익혐의자로 지목 받았던 사람들 중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숙군의 선풍이 불자 육군 본부 별관은 사실상 숙군사령부가 되었다.
2층에는 혐의자 체포를 맡았던 헌병사령부가 있었고 3층에는 정보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안일(金安一) 정보국 특별조사과(SIS) 과장제1여단 정보참모 김창룡 대위가 조사반을 지휘했고,
특히 일제 때 관동군의 정보 계통에서 근무했던 김창룡은 숙군 과정에서 악명을 떨쳤다.
 
조사반원 중에는 군의 요청에 따라 경찰 정보 계통에서 일하다 이때 정보국으로 전속된 사람들도 많았다.
또한 정보국은 김종필(金鍾泌), 이병희(李秉禧), 이영근(李永根), 이희성(李熺性) 등
당시 막 임관된 육사 8기생들을 조사관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여수ㆍ순천 사건 직후부터 이듬해 7월까지 진행된 숙군 과정에서 전군의 5%에 해당하는 총 4, 749명의 장병들이 처벌을 받았다.
재판 결과 90% 정도는 불명예 제대를 했지만 나머지는 사형 또는 유기징역에 처해진 셈이다.

숙군 과정에서 그와 함께 사선을 넘었던 최남근 중령도 여수ㆍ순천 사건과 관련, '지리산으로 들어가 김지회와 공모한 죄'로 걸려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백선엽은 당시 정보국 과장이었던 김점곤(金點坤)이 제출한 보고서를 읽고 "이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심정을 굳혔다고 밝히고 있다(《실록 지리산》, 219쪽).
결국 최남근은 사형 당했다. 그가 죽을 때 외친 소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대한민국 만세!"였다고 한다.

한편 백선엽은 숙군 과정에서 검거되었던 박정희의 구명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 좌익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상태였다.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백선엽에게 박정희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를 만나 줄 것을 부탁했다.
 
박정희를 만난 백선엽은 도움을 부탁하면서도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백선엽은 정보국 고문관인 이드 대위를 통하여 하우스만 대위와 로버츠(William Roberts) 준장에게 박 소령의 구명을 요청했고,
육군 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형 집행정지 조치를 얻어냄으로써 그를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그후 그는 박정희가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도록 배려했다.

무고한 사람들의 처벌됨으로써 말썽이 되었던 숙군 과정에 대해 그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옥석을 가리기 힘들었던 만큼 무리한 일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바로 1년 후에 터지는 동족상잔의 대 전란을 앞두고 적어도 군내의 좌익 조직을 일소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서도 다행이다
(《실록 지리산》, 220쪽)."



●백(白)야전전투 사령부의 '쥐잡기 작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백선엽은 제1사단장으로 문산 방면의 방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국군이 후퇴하면서 제1사단도 같이 밀렸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유엔군이 북진할 때 그의 사단은 미 제1기갑 사단을 제치고 1착으로 평양에 입성하기도 했다.
그때의 감격을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일개 월남 청년이 장군이 되어 1만 5천여 한미 장병을 지휘하여 고행을 탈환하러 진군하는 감회를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내 생애 최고의 날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지나치는 부락에는 벌써 주민들이 내건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군과 나》, 103쪽)

1951년 4월 7일 백선엽은 고 김백일 소장의 후임으로 제1군단장에 임명되었다.
타고 가던 경비행기가 악천후로 대관령 산중에 추락하면서 제1군단장이었던 김백일이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김백일은 백선엽과 '간도특설대'에서 같이 근무했고 38도선도 같이 넘었던 동료였다.
 제1군단장으로 근무하던 중 1951년 7월 그는 휴전회담 한국측 대표를 잠시 맡았다가 9월에 다시 군단장에 복귀했다.

그해 11월 백선엽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을 소탕하는 토벌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부대 이름은 '백(白) 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 작전 명칭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
그 예하 부대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비롯하여 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 등의 3개 사단과 태백산 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지리산 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등의 4개 전투경찰 연대 및 7개 전투경찰 대대등 전체적으로 4개사단 규모였다.
당시 지리산에는 이현상(李鉉相)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구군단의 주력 3, 800여 명이 출몰하고 있었다.

12월 초 제1기 작전이 개시되었다.
제1기 작전은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독' 속에 갇힌 빨치산들을 토끼몰이식으로 포위, 압축함으로써 지리산 근거지를 분쇄하는 것이었다.
19일부터 시작된 제2기 작전은 지리산 외곽의 거점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952년 1월 15일부터 시작된 제3기 작전은 지리산을 재차 포위, 공격함으로써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해 1월 말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육본 자료에 따르면 토벌 결과 5, 800여명이 사살되고 5, 7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미측 자료에는 9천여 명이 사살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숫자는 토벌 이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지리산 3, 800명, 그 주변 4천 명이라는 예상 숫자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쥐잡기 작전'은 지리산과 그 주변의 빨치산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리지웨어(Matthew B. Ridgway) 작전 본부는 1952년 3월, 아직도 3천 정도의 빨치산들이 그 지역에 남아 있다고 추정했다.
예상보다 많은 빨치산들이 사살 또는 포로가 된 것은 빨치산들의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거나
아니면 순수한 민간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토벌 과정에서의 진압군의 야만적인 비행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별로 없었을까? 아니면 엄청난 진상이 은폐되어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백선엽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휘부의 지침과는 달리 말단 부대가 비행을 저지르고 허위 보고로 무마하는 경우, 그것을 완전히 확인해 진위를 가리기란 참으로 어렵다......당시로서는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토벌 부대의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혹시라도 부하 장병들의 비행으로 희생된 넋들이 있었다면 그들의 명복을 빌고 싶은 심정이다(《실록 지리산》, 78쪽).



승승장구의 관운

백선엽은 1952년 4월 제2군단장으로 보직되었고,
그해 7월에는 부산정치파동 과정에서 병력 파견 요청을 거부한 이종찬 총장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32세.
그후 그는 1954년 2월 제1야전군 사령관으로 잠시 전직되었다가 1957년 5월 재차 참모총장에 역임되었다.
이와 관련, 이승만의 후원을 받았던 만군 출신, 특히 이북 출신의 젊은 장교들은 전쟁을 거치면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크게 정일권이 이끄는 함경도 출신의 관북파백선엽이 이끄는 평안도 출신의 서북파로 나뉘어 있었고,
 이승만은 이들을 경쟁시킴으로써 군의 충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백선엽과 정일권을 교대로 참모총장에 임명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였다.
 
 1960년 5월 31일 연합참모본부 의장을 끝으로 그는 군에서 전역했다.
 
이후 그는 중화민국을 비롯, 각국 대사를 역임했고 1969년 10월에는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1970년대에는 충주비료주식회사 사장, 호남 비료주식회사 사장,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이 같은 승승장구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백선엽 개인 자체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소박하다.
'선천적인 재능이 있는 장군이라기보다
꾸준히 자신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후천적인 입지전적 장군'
'절대로 남을 궁지에 몰아 놓지 않는 사람' 또는 '남을 도와주는 것을 일종의 도락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 등등.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자주적인 통일 국가가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
그러나 현실은 남쪽에는 친미, 북쪽에는 친소적인 북단국가가 들어서는 반대의 결과가 되었다.
 
그러한 뒤틀린 역사 속에서 친일 장교 출신들은 친미적인 반쪽 분단국가의 반공 장교로서
빨치산들을 토벌, 말살시키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친일의 매국은 반공의 애국으로 변신했다.

 

 만군 출신의 월남 반공 장교였던 백선엽의 눈부신 성공 이면에는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정일권 : 33세 육군참모총장 ->국무총리-

 

77세 사망

 

정일권
1917년 11월 21일 ~ 1994년 1월 17일
태어난 곳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소련 연해주 니콜리스크(現우수리스크(본적은 함경북도 경원군)
죽은 곳 미국의 국기 미국 하와이
복무 일본 제국의 국기 일본 제국, 만주국의 국기 만주국,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복무 기간 1940년 ~ 1957년
최종 계급 만주군 상위/대한민국 육군 대장
주요 참전
전투/전쟁
태평양 전쟁(만주에서 주 활동),한국 전쟁
기타 이력 국무총리, 외교관, 국회의장

정일권(丁一權,일본식 이름: 中島一權, 1917년 11월 21일 ~ 1994년 1월 17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군인 복무시 5대, 8대 참모총장을 지냈고 예편후 3대, 5대 주미국 대사, 11대 외무부장관, 9대 국무총리, 국정자문회의 위원 등을 지냈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생애초기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現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북도 경원군이다. 1922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가 극동지역에 밀려와 극동혁명위원회가 창설되면서 제정 러시아의 극동군 통역장교인 부친이 면직되고 감시받게 되자 모친과 함께 함경남도 경원군으로 돌아왔다. 부친도 간신히 처형을 모면하고 경원으로 돌아왔다. 1924년 봄 경원보통학교에 입학해 6년 과정을 마치고

 1930년만주용정의 영신중학교(1921년 5월 개교)에 입학했다.

 

 1934년 5학년 재학 중 일본 관헌의 정책에 따라 영신중학이 학교법인 광명학원에 흡수되었고, 이듬해 광명중학교를 졸업했다.

[편집] 군인활동

[편집] 일본제국&만주국 장교 활동

1935년 5월 광명중학교의 영어교사 장내원의 권유와 교련 교관의 추천을 받아 만주국 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중앙육군훈런처(봉천군관학교)에 합격했다. 같은 해 6월 1일자로 치치하얼 제3교도대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 중앙육군훈련처에서 정식 과정을 이수했다.

 

 1937년 9월 5기로 졸업한 뒤 성적 우수자로서 동기생 김석범에 이어[2],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추천됐다. 병과를 보병에서 기병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1년간 만주군 기병훈련소 갑종후보 과정을 거쳤다. 그 뒤 훗카이도에 있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기병과 본과에 들어갔다.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 55기를 졸업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와 만주군 소위로 임관해 만주군 지린부대 교관에 보임되었다. 만주군 헌병 장교로 계인주,최남근 등과 함께 일본이 시베리아 철도를 폭파하려고 만든 특수부대 돌격대에서 3개월간 폭파훈련을 받은 뒤 독립헌병대에 배치되어 랴오허 방면으로 출동했다.

 

 1941년 신징(신경)에 있는 만주군 총사령부 고급부관실에서 근무하면서 3월에 헌병중위로 진급했다. 1942년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했다.

 

만주국 헌병 상위(대위)로 진급한 후 간도헌병대 대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만주국 고급장교 양성기관인 고등군사학교(1943년 신징에 설립)에 제2기생 합격자 25명 가운데 유일한 조선인으로 입교했다. 졸업을 앞두고 일제의 패망을 맞이했다.

[편집] 소련군 포로생활과 월남

일제 패망 후 1945년 8월 18일 소련군이 신징에 입성하자, 조선인교민회와 베이징에서 파견된 독립연합민단장 신숙, 그리고 군관학교 출신인 이한림,최주종,김동하,윤태일 등과 논의해 과거 만주군과 관동군 출신 조선인 군인 400여명을 모아 '신경보안사령부'를 만들어 사령관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중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 총통의 장남이자 국부군 중장이며 청년원정권 편련총감부 주임 겸 동북외교대표인 장징궈를 만나 무기와 예산을 지원받았다. 같은달 사령관 직위를 김석범에게 넘겨주었으나 소련군 보안부대인 KGB본부로 연행당했다.

 

KGB본부에서 신경보안사령부를 즉시 해산시키고 무기를 반납하며, 만주군 장교 출신인 만큼 모스크바로 가서 6개월간 군사교육(재교육)을 받고 북조선으로 가 군대 창설에 종사할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감옥에서 정일권은 소련군을 비방한 사실이 발각되어 '악질분자'로 규정되어 시베리아 유형이 결정되었다. 같은 해 12월 중순 국부군 출신 및 만주국 관료 출신 등과 함께 신징역에서 기차를 타고 소련과 만주 국경을 향해 가던 도중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하얼빈으로 가 만주군 시절부터 알고 있던 같은 고향(함경북도 경원) 출신 아편장수 김만옥의 도움으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들어왔다.

평양에서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의 비서실에서 봉천군관학교 후배인 백선엽을 만나고 다시 개성을 거쳐 12월 29일 서울로 들어왔다.

[편집] 대한민국 군인활동

서울로 온 뒤, 1945년 12월 15일 미군정청에서 창설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다.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 중 1차로 졸업하고 정위(대위)로 임관하여 국방경비대 제1연대 중대장을 거쳐 제4연대장 겸 경비대 총참모장을 역임하였다.[3]

 

1948년 1월 만주 신경군관학교 4기생 출신이자 신경보안사령부에 함께 있었던 예관수와 함께 '공산군의 유격전법과 경비와 토벌'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1949년 3월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을 지냈고, 미국참모대학에 유학했다. 귀환명령을 받고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 한국전쟁 개전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1950년 6월 30일에는 전사(戰死)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을 대신하여 제5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였으며 동시에 3군총사령관(三軍總司令官)을 겸임하였다.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절 국민방위군 사건,거창민간인 학살사건 등이 문제가 되자 사임했다.

 

그 뒤 1952년, 미국 참모대학을 졸업한뒤 1960년, 하버드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를 졸업하였다.

또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를 수료하였다. 1

954년에는 백선엽 참모총장을 대신하여 다시 제8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이어 1956년 합동참모본부 총장(合同參謀本部總長)에 발령되었다.

1957년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과 동시에 주 터키대사로 임명되었다.

[편집] 정치 활동

예편 후 주터키 대사(1957년 1월), 주프랑스 대사, 주미국 대사등 지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허정 과도정부 시절 주미대사에 임명되어 남미 각국 대사를 겸임하다가 장면 정권 출범 후 사임했다. 하버드대학 유학 중이던 1961년 5.16 군사쿠테타가 일어나자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미국 조야를 다니며 군사정부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각국 대사와 유엔총회 한국대표등을 지낸 뒤 1963년 12월 12일 제3공화국이 출범할 때 외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1964년 박정희 정권에서 강행한 한일협정 회담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가 이어지고 최두선 국무총리가 사임하자 4월부터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1970년 12월까지 6년 7개월 동안 재임했다. 1966년 12월부터 1967년 6월까지 외무부 장관을 겸임했다.

 

 1965년 2월 이른바 '불도저내각','돌격내각'이라 불리면서 일본을 방문해 사토 에이사쿠 수상과 회담을 마무리하고 6월 한일협정을 조인하는데 앞장섰다. 1970년부터 1971년까지 민주공화당 의장 상임고문을 지냈으며, 19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서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통과될 때 민주공화당 의장을 맡았으며, 협력위원회 제8회 합동위원회 한국 측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유신체제 아래 입법부가 행정부의 시녀노릇을 해 국회가 '통법부'나 '행정부의 시녀'라고 세간의 조롱을 받을 때 1973년부터 1979년까지 국회의장을 지냈다.

 

1980년 신군부 집권 이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제5공화국국정자문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정계원로이자 시민사회단체 원로로 자유수호구국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는

제6공화국 시절 1989년 한국자유총연맹 초대 총재가 되었고,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을 지냈다.

1994년 1월 미국 하와이에서 병사했다.

[편집] 수상경력

  • 을지무공훈장
  • 태극무공훈장
  • 수교훈장 흥인장
  • 청조근정훈장
  • 금성충무무공훈장
  • 미국은성훈장
  • 미국특수십자훈장

[편집] 사후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정인숙 살해사건 때 피살당한 정인숙의 아들인 정성일1991년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냈다가 한달 만에 소를 취하하였다.[4] 한편 정일권은 면담을 요구하는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의 면담도 거절하였고, 아들 정성일의 친자 승인 요구를 끝까지 거절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북한에 있는 여학생들을 잡아다 군대 위안부를 설치했다는 주장이 있으며, 당시 일본의 신문에서도 이에 대한 보도를 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료는 증거 뿐만 아니라 증인까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알아 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 자료

[편집] 주석

  1. 태어난곳은 러시아 연해주이지만, 본적은 함경북도 경원군
  2.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만주의 친일파"(2004년 3월 7일)
  3. 1946년 1월 15일~: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196쪽.
  4. 《경향신문》(2007.3.14.) 3共 ‘의문의 피살’ 정인숙 아들이 ‘골프장 사장 납치극’ 주도
전 임
채병덕
제5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1950년 6월 30일 ~ 1951년 6월 22일
후 임
이종찬
전 임
백선엽
제8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1954년 2월 14일 ~ 1956년 6월 26일
후 임
이형근
전 임
이형근
제2대 합참의장
1956년 6월 ~ 1957년 5월
후 임
유재흥
전 임
양유찬
제3대 주미국 대사
1960년 5월 - 1960년 9월
후 임
장이욱
전 임
장이욱
제5대 주미국 대사
1961년 6월 - 1963년 4월
후 임
김정렬
전 임
김용식
제11대 외무부장관
1963년 12월 17일 - 1964년 7월 24일
후 임
이동원
전 임
최두선
제9대 국무총리
1964년 5월 10일 - 1970년 12월 20일
후 임
백두진
전 임
이동원
제13대 외무부장관
1966년 12월 - 1967년 6월 29일
후 임
최규하
전 임
백두진
제9대 국회 1·2기 국회의장
1973년 3월 12일 ~ 1979년 3월 11일
후 임
백두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속초·양양·고성)한병기
(홍천·인제)이교선
제9대 국회의원(속초시·인제군·고성군·양양군)
1973년 3월 12일 - 1979년 3월 11일
민주공화당
김인기
후 임
정일권,함종빈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정일권,김인기
제10대 국회의원(속초시·인제군·고성군·양양군)
1979년 3월 12일 - 1980년 10월 27일
민주공화당
함종빈
후 임
(강릉·명주·양양)
이범준,이봉모
(속초·양구·인제·고성)
허경구,정재철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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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 그는 누구인가...

 


※탁사(濁史)로 얼룩진 "한국의 부도옹"
정일권(丁一權,1917~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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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丁一權,1917~1994)

1947 조선경비대 참모총장, 조선경비사관학교장
1950 3군 총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
1960,61 주미대사
1963 제 3공화국 외무부 장관
1964 국무총리
1966 외무부장관 겸임
1973 제 9대 국회의장
1976 국회의장 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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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연(외국어대 강사)

●정일권, 그는 누구인가...

 


해방 이후 우리 나라의 고관 현직들 가운데 정일권만큼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도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팔방미인" "한국의 부도옹(不 翁,오똑이)"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군의 최고 책임자인 총참모장을 거쳐 주미ㆍ주불 대사 및 외무장관을 지낸 다음, 최장수 국무총리, 최장수 국회의장을 역임하면서 이승만 정권 때부터 유신 말기에 이르기까지 순풀에 돛 단 듯 질주를 거듭해 온 정일권.
 

 

그러나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의 친일 경력과, 영욕이 부침 하는 격동의 시국에서 권력에 영합하는 처세술로 목숨을 부지해 온 사실은 휘황찬란한 경력과 명성의 그늘에 가려 그 동안 어둠 저편에 파묻혀 있었다. 흔히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일컫는 국무총리를 6년 7개월,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을 6년 동안이나 역임하면서 최장수 신기록 타이틀을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는 정일권의 드러나지 않는 뒷면에는 어떤 것들이 감춰져 있을까?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의 "우수한 군인"

 


1938년 광명중학교 교정. "앞으로 군에 입대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유망하고 현명한 길이다." 번뜩이는 예복을 차려 입은 한 장교의 일장 연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있던 정일권이 자신의 모교인 광명중학교에 가서 졸업 예정 자들을 모아 놓고 졸업 후의 진학 지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 소위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설명하면서 특히 취업문이 넓지 않았던 한인 학생들에게 입대를 강력히 종용했다. 마침 당시는 중일전쟁이 일어나 중국 대륙에서 전쟁이 확대되고 있었고,
이듬해 4월에는 신경(新京)에 4년제 군관학교가 생기게 되어, 정일권의 설득은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우리 청년들에게 먹혀들어 갔다.
 
신경군관학교가 제 1기생을 모집하게 되자 광명중학교의 우등생들도 다투어 몰려갔다.
그해 한인 13명이 입교했는데 그들 가운데 11명이 광명학교 출신이었다.
신경군관학교 제 1기생들을 포함하여 그후 군관학교를 졸업한 만군 출신들이 이때부터 정일권과 친교를 유지하면서 가까운 선후배로 뭉쳐져 해방 후 한국군으로 옮겨오게 된다.

이주일(李周一), 박임항(朴林恒), 이한림(李瀚林), 최주종(崔周種), 강문봉(姜文奉), 김동하(金東河)등이 그들인데 모두 해방 후 국군으로 편입되어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정일권을 정점으로 한 관북파(세칭 알래스카 부대)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만주국 장교로서 정일권의 존재는 만주에 있는 모든 군인과 조선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봉천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수석을 한 후 만주국 사령관의 전속부관으로 배속된데다가, 일본 장교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만주군 육군대학에 근무할 때 그는 화려한 견장에 백마를 타고 출근했다. 그때 계급이 대위, 이 같은 견장이나 승마 출퇴근은 만주군 육군대학 출신에게만 주어지는 명예였다.
 
만주군 육군대학이란 일본 본토의 육군대학과 같은 격의 현역장교 교육기관인데 그곳을 거치면 주장까지 진급은 보장되는 것이 관례였다.
 
한인으로는 일본에서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과 홍사익(洪思翊)등 두 명이 일본 육군대학을 나와 중장까지 올라갔고
 만주에서는 정일권만이 그 과정을 거쳤다.
정일권은 일본 육사에서도 수석을 하여 만주 편입 수석생에게 주는 일본 군부대신의 군도(軍刀)를 상으로 받았다.
 
정씨는 이 군도를 집에다 잘 보관하여 있었는데, 당시 장교들은 정씨의 집에 왔다가 이 칼을 보고는 정중히 거수 경례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항일투쟁의 길이 아닌 일신의 출세와 장래를 보장받기 위해 일제에 투항하기를 종용한 정일권의 행위를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그의 언변에 넘어가 압제에 시달리던 헐벗은 민족과 조국의 현실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주군관학교에 진학한 자들이 이후 한국군의 주요한 흐름을 이루게 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한편 태평양전쟁 초기 위세를 떨쳤던 일본군도 시간이 흐를수록 패색이 짙어지다가 결국 항복하기에 이르고 만주군도 풍지박산되었다. 관동군 소속이건 만주군 출신이건 모두 어딘가에 거처를 잡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었다.
 
종전시 만주군 헌병 대위였던 정일권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빨리 변신하였다.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만주교민보안대"를 만들어 사령관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보안대에는 이한림, 최장언(崔昌彦), 최주종, 김석범(金錫範) 등 만주군 출신의 정일권 추종자들이 참여했으며, 며칠 후에는 만주군의 고참 중교(중령)인 원용덕(元容德)이 가세했다.
 보안대 창설 직후 이들은 모양상 광복군으로 조직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즉각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로 간판을 바꿔 달기도 했다.
 
또 뒷날까지 애창된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치는 애국의 깃발,.........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보아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을 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 라는 가사로 이루어진 새 군가를 만들어 힘차래 불러제끼기도 했다. 선열들의 눈물과 땀과 피가 짙게 베어 있는 "광복과 애국"이라는 단어가 친일파의 재빠른 탈바꿈 속에서 졸지에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정일권은 최창언과 최주종을 대동하고 정세를 살피러 서울로 들어와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의 박승환(朴承煥)등과 접촉했지만, 건준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곧 만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소련군에 의한 보안대의 무장 해제와 해산 명령, 그리고 자신의 체포였다.
체포된 후 수사관으로부터 소련 유학을 권유받고 유학의 결심을 굳힌 정일권은 유학 직전 자격시험에서 불합격함으로써
시베리아행 숙청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불합격의 사유는 "소련군 보초를 죽이고 도망하자"는 중학 동창 최 아무개의 제의를 덜컥 수락함으로써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 때문이었다. 그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만들어진 소련 정보부대의 함정에 빠졌던 것이다.
 
우수한 만주군 장교에서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관으로, 그리고 소련으로의 유학 결심에서 월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변신의 대가"로서의 정일권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닐까?



●"일본군의 한국군化"와 이승만의 총애

소련군 포로 열차에서 극적으로 탈출, 월남한 정일권은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였다.

1945년 12월 5일 미군정에 의해 설치된 군사영어학교해방 후 최초로 설립된 군사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는 두 가시 목적으로 설립된 것으로, 하나는 흔히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기초적인 군사영어를 가르쳐 미군 지휘관의 통역관을 양성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30여 개에 이르고 있던 자생적인 민간 군사 단체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조선국군준비대학병동맹처럼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을 지지하는 민간 군사 단체들을 통제 또는 해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학교는 그 자체로서는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이 학교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이후 군의 최고 요직을 점하면서 한국군의 형성과 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관이었다. 한마디로 군사영어학교는 한국군의 모태이자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군의 모태요 출발점인 이 학교에 민족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946년 4월 폐교될 때까지 200명이 입교하였으나 총 졸업 인원은 110명이었다.
 
임관자 110명을 출신 별로 보면 일본군 출신이 87명,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출신이 21명 그리고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다.
이는 사실상 거의 전부가 일본군이나 마찬가지였다. 정확이 말하면 "일본군의 한국군화"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1945년의 해방이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었다면 또는 미군정의 일제 잔재 부활 정책이 없었다면,
전범자 또는 반민족행위자로 처벌되었을지도 모를 대상이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한국군화 현상은 군사영어학교가 해체된 후 1946년 5월 1일 설치된 조선경비대에도 그대로 지속된다.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정일권은 대위로 임관, 이후 조선경비대 참모총장 및 조선경비사관학교장을 역임하였다.
 
육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경비사관학교는 당시 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의 용병"이라고 혹평하면서 입교를 거부할 정도로
친미 성향의 간부 양성소 역할을 했는데, 정일권은 그 학교의 교장을 지낸 것이다.

한편 한국군 창설과정에 주역을 담당한 정일권이 이승만(李承晩)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된 것은 1
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수ㆍ순천 사건 이후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무장유격대를 소탕한 뒤부터였다.
 
1949년 3월 1일 당시 참모차장 자리에 있던 정일권은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관을 자청, 6개월만에 지리산과 백운산 일대의 무장유격대를 대부분 섬멸하고 그 과정에서 유격대장 김지회(金智會)를 사살한 후 서울로 귀향하였다.
 
이 일로 정일권은 경무대에서 이승만으로부터 직접 대한민국 개인표창 1호를 수여 받게 되고,
 이후 오랜 기간동안 이승만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다.



●한국전쟁과 정일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30일 정일권은 제5대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된다.
 
그의 총장 재임 중에 작전권 이양에 관한 협정(일명 대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일권의 회고록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자주권과 직결되어 있는 작전 지휘권의 이양에 대해 정씨는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는 커녕 "유엔군과의 작전 통일을 기하기 위한 대통령 각하의 고충 어린 결정"이라는 이름 아래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일국 군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참모총장으로서는 너무 단견이 아니었나 하는 평가도 가능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전시 중이던 1950년 7월 말, 뒷날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바꿀 중요한 인사 발령이 있었다. 당시 육군정보국 소속 문관으로 근문 중이던 박정희(朴正熙)의 현역 복귀에 대해 정보국장 장도영(張都暎)대령과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이 건의를 올린 것이다. 이에 대해 정일권은 "포병지휘관 확보가 시급한 만큼 박정희 문관을 현역으로 복직 상신함"이란 문서의 결제란에 흔쾌히 사인했다.
 
박정희 문관은 1950년7월 31일자로 현역에 복귀, 소령의 계급장을 다시 달게 된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불필요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만약 당시에 정씨가 결재하지 않았다면 5ㆍ16군부 쿠데타와 그 이후에 전개된 왜곡되고 굴절된 정치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정부가 또다시 부산 임시 수도에 정착했던 1951년, 세간의 관심은 대구로 집중되고 있었다. 한국군 내부에서 발생한 두 가지 사건에 대한 공판이 대구에서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민방위군 독직 사건이었다. 먼저 표면화된 것은 국민방위군 사건이었다.
 
국민방위군은 한국전쟁중인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되어 제2군민병에 해당하는 만 17~40세의 남자들이 이에 편입됨으로써 만들어진 준군대조직이었다. 전선의 후퇴가 시작되어 방위군을 집단적으로 후방 이송하게 되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이용, 막대한 돈과 물자를 부정 처분하여 사복을 채웠다.
 
 그 결과 보급 부족으로 천 수백 명의 사망자와 병자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1951년 2월에 발생하였다.
 
 당시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崔德新)준장}과 제9연대{연대장 오익경(吳益慶)대령}는 사단장의 방침인
"건벽청야(建壁靑野)"에 의한 지리산 남부 지역 공비소탕 작전을 전개,
 
 제 3대대{대대장 한동석(韓東錫)소령}가 2월 10일 신원면을 장악했다.
 제3대대는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 8백~1천여 명을 신원초등 학교에 수용했다.
 
2월 11일 한 동석은 대부분이 노약자와 어린아이. 부녀자들인 수용 주민 가운데 군경가족이나 지방유지 가족을 가려낸 후,
나머지 6백여 명을 뒷산인 박산 골짜기로 끌고 가서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하고 시체에 휘발유를 끼얹어 불태워 버렸다.
그후 공비 및 통비분자 187명을 처형했다는 허위 보고를 올렸던 것이다.

6월 15일 헌병사령부에서는 국민방위군 사건의 피의자로 11명을 체포하여
고등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정가에서는 정일권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마침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이 사임하고 이기붕(李起鵬)이 후임에 들어앉자
 정일권은 육군 참모총장직을 조용히 사임하고 미국 참모대학으로의 유학을 서둘렀다. 6월 23일 정일권의 미국 유학이 발령 났고,
그 후임으로 이종찬 소장이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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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 35세 5.16 군사혁명- 영원한 제2인자 -생존

 
 
김종필
김종필
(1999년 국무총리로 재임할 당시)
출생 1926년 1월 7일(1926-01-07) (84)
충청남도 부여 외산면 반교리
거주지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
별칭 호(號)는 운정(雲庭), 별칭은 JP
종교 기독교
배우자 박영옥
자녀 아들 김진, 딸 김예리
부모 아버지 김상배, 어머니 이정훈
친척 김종락, 형 김종익, 장인 박상희, 처삼촌 박정희, 사촌동서 한병기
운정 김종필
1926년 1월 7일
별명 호(號)는 운정(雲庭), 별칭은 JP
태어난 곳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복무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49년 5월 ~ 1963년 1월
최종 계급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준장
주요 참전
전투/전쟁
한국 전쟁
기타 이력 11대 국무총리, 국무총리 서리, 31대 국무총리

김종필(金鍾泌, 약칭 JP, 1926년 1월 7일 부여 ~ )은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박정희5.16 군사 정변을 일으킬 당시 중령이었고 박정희의 질녀와 결혼했으며 35살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 후 예편하였다.

 

9선 국회의원(제6 ~ 10, 13 ~ 16대)과 제11대, 제3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삼김’(三金)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으며, 민주공화당(공화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민자당),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대표를 지냈다.

 

1947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부 2년을 수료하고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의 중심 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였으며, 공화당의 내분으로 정계를 은퇴하였다.

 

1971년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정계에 복귀하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공화당 총재를 맡았으나 신군부의 압력으로 정계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1

 

987년 정계 복귀하여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1990년 3당합당을 하여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총재가 되었다. 2004년 18대 총선거 낙선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제3공화국제4공화국 당시 제2인자였으며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과 함께 박정희의 후계자 또는 잠재적 대안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1971년 6월 4일부터 1975년 12월 18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1대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1998년 3월 3일부터 1998년 8월 17일까지 국무총리 서리를, 1998년 8월 18일부터 2000년 1월 12일까지 제3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호(號)는 운정(雲庭)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편집] 출생과 소년기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서 아버지 김상배(金相培)와 어머니 이정훈(李貞薰)의 다섯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의 72대손이자[1] 김해 김씨 안경공파(安敬公派)로 안경공(安敬公) 김영정(金永貞)의 13대손이었다.

 

그의 집안이 충남 갑부라는 소리를 듣게된 것은 할아버지 김현택으로, 할아버지 김현택은 부지런하여 생전에 쌀 2000섬지기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했으며[1] 김현택의 대에 가세를 일으켰다 한다.

 

3대 독자였던 아버지 김상배는 토지측량사를 지냈다.[1] 토지등록 분규 등을 잘 해결해 신망을 얻은 후 규암면장과 부여면장으로 지역사회의 유지가 되었으며, 어머니 이정훈은 전주 이씨 선비댁 출신으로 아버지 김상배보다 12년 연하였다.

 

위로 김종익, 김종락 등의 네명의 형이 있었는데 맏형 김종호는 마흔살이 넘어 공무원 시험을 거쳐 서울시 종로구청 주사로 근무했 고, 70년에서 80년까지는 중앙곡물협회 회장직을 맡았다.[1] 둘째 형 종익은 민주공화당 6,7,8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아들만 일곱 명을 두었다. 막내 동생 김종식은 중학교 시절 6·25 전쟁 중에 실종됐다. 그뒤 김종필은 실종된 막내동생을 오랫동안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그의 측근인 보좌관 김석야2000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총리께서 수십년 동안 막내동생을 찾 으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 하였다.[1]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유복한 소년기를 보냈다. 그뒤 공주중학교[2]를 거쳐 1944년 3월 공주고등학교를 졸업[3]하고 1945년 4월 대전사범학교 강습과(講習科)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부 2년을 수료하였다.

[편집] 군인 생활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1949년 5월에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에 임관했다. 그 뒤 주로 참모직을 역임하고 1949년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중위로 있었다.[4] 1950년 6월에는 육군 대위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육군 정보국 북한반장에 임명, 갑작스런 남침으로 무너지는 전선을 시찰하고 전세를 정확히 보고하였으며, 1계급 특별승진하여 육군 대위가 되었다.

 

1951년 육군 대위로 있을 때 제1차 도미 유학 장교단 150인 중 한사람에 선발되어 미국으로 유학, 미국 조지아 포트베닝(Ft Benning)의 미국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육군보병학교를 수료하였다. 1952년 4월에는 미국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군에서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하다가 소령을 거쳐 1958년 중령으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으로 부임하였다.

다른 기수보다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 것이 8년 정도 늦었던 그의 동기들은 군 운영체계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1960년 8월 24일 김종필과 석정선 중령은 성당에 미사중이던 장면 국무총리를 찾아가 서면으로 정군을 요구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서면은 전달되지 않았고, 이는 후에 그가 항명파동에 연루되는 계기가 되었다.

[편집] 5.16 군사 정변

[편집] 5.16 전후

이 부분의 본문은 5·16 군사 정변입니다.

1960년에 일어난 항명 파동으로 육군 중령에서 예편하였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김종필은 한때 ‘사상계’를 찾아가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에서 탈락하였다. 그러나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꾸준히 박정희 등과 교류하였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준비한다.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였고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하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 육군 중령이 되었다. 이어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였고,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한편 박정희가 5.16을 거사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그는 5.16 군사정변 이후 그는 내가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5.16을 기획했다고 하였다.

 

1961년 5월부터 1963년 1월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고, 1961년 7월에는 잡지 《사상계》의 동인이었던 함석헌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자 사상계사 사장인 장준하를 불러 취조하였다. 1963년 1월에는 육군 준장에서 예편하였고 중앙정보부장직도 사퇴하였다. 이어 민주공화당의 사전조직인 재건당을 창당하였고, 같은 해 2월에는 민주공화당 창당 조직에 참여하였다.

[편집] 장준하 취조 과정

1961년 7월호의 함석헌의 5.16 군사정변 비판 칼럼을 문제삼아 장준하를 소환했다. 사상계 7월호가 나가고 4,5일 뒤, 퇴근시간이 되어갈 무렵 사상계사에 군인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혁명군에서 나왔다면서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사장과 편집 책임자를 모시러 오겠으니 그 시각까지 나와 있어 달라는 용건을 전했다.[5]

 

다음날 장준하는 편집 책임자인 취재부장 고성훈과 함께 지정한 시각인 아침 7시에 회사로 나갔다. 검정 지프차 하나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고 다른 군인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차는 장준하와 고성훈을 싣고 가 남산 밑 회현동 어딘가에 있는 허름한 2층 집의 한 방에다 내려놓았다.[5]

 

20분뒤 김종필[6]이 나타났고 김종필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5.16 군사정변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칼럼을 문제삼았다.

  • 김종필 :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이 따위 글을 도대체 무슨 저의로 여기에 실었소? 성스러운 혁명 과업 수행에서 당신은 우리 군사혁명을 모독하자는 거요? 이걸 싣게 된 경위와 목적을 말하시오.[7]

    * 장준하 : 이 글은 내가 직접 함 선생께 부탁해서 내손으로 받아다 내가 읽어 보고 실은 것이오.[7]

장준하는 말을 계속했다.

  • 장준하 : 여러분은 이 글을 좋지 않게 보는 모양이오만 내 나름으로는 이 글이야말로 군사혁명을 일으킨 여러분을 위하고 혁명 과업을 수행하는 데[7] 있어 가장 시의에 맞는 충언이라고 확신하여 실은 것이외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으로, 당장은 다소 거슬리는 데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 확신이 틀리지 않는 한 여러분을 위하고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충정이 들어 있는 글인 것만은 틀림없소.
  •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 기관이 혁명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잘한다는 말 이외의 다른 말들은 일체 하고 있지 않소.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나라의 향방이 옳은 길로 걸어가는 것 같지가 않고, 또한 뜻있는 여러 사람들이 말로는 못하지만 생각은 나와 같기 때문에 충고로 이 글을 실은 겁니다. 나와 함 선생 외에는 이런 시기에 이런 충고를 할 사람이 없소.[8]

장준하의 말에 김종필은 앞으로 밀어놓았던 책을 급히 집어다 빨간 줄 투성이가 된 문제의 글과 권두언을 펴 여기저기 한줄씩 읽어주며 장준하에게 들이댔다.[8] 그는 이것은 무슨 소리이며 이것도 충고냐는 식으로 윽박질러 물었고, 이에 장준하는 항의했다.[8]

장준하 : 왜 남의 글을 그런 대목만 부분적으로 떼어서 문제 삼으십니까? 전체를 가지고 말 하시오.

김종필 : 어디 잡지를 읽는 사람들이 앞뒤를 다 읽고 맞추어 해석해요? 대부분이 이런 자극적인 부분의 문구들에 의해 현혹되기 마련 아니오?[8]

그러나 김종필은 그가 장도영과 같은 고향이라는 점을 문제삼았다.[9] 그러나 장준하는 장도영과의 관련을 부인하였다.

장도영과 나는 같은 평북 출신이긴 하지만 그 사람은 용천 출신이고 나는 삭주가 고향이외다. 일본군에 잠깐 같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알고는 있지만 그 사람과 무관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지난 행적을 그다지 좋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과 나를 연관시키는 것은 나를 모독하는 것입니다.[9]

장준하의 대답에 김종필은 흥미를 느껴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고, 장준하는 숨길 것이 없고 해서 자신이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장도영에 대한 추억을 진술하였다.

 

장준하에 의하면 '장준하와 장도영은 중국 서주에서 같이 있었다. 그 곳에서 한인 탈영 사건이 자주 일어나자 학도병들에 대한 감시와 핍박이 심했다. 그때 장도영은 일본도를 빼들고 탈주하는 자는 자기가 먼저 처단하겠다고 설치다가 장준하와 총돌했다.

 

그리고 탈출이 어려운 쓰카다 부대로 같이 옮겨가서는 장준하가 벌인 '잔반 거부 운동'으로 두 사람은 반목한다.[9]' 성이 같고 고향이 이웃해 있다고 해서 서로 호흡이 맞는 것도 아니었다.[9] 같은 서북인 출신이라 하지만 장준하로서는 장도영의 이름을 들어 그 당으로 모니 참을수가 없었[10]다.

 

김종필이 장준하와 장도영의 사이를 의심할 만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이 무렵에 사상계사에서 사상문고 100권 출간 기념 리셉션을 창경궁(昌慶宮)의 수정궁(水晶宮)에서 열었[10]던 것이었다. 당시 사상계의 국제적인 명성 때문에 그날이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인데도 미국 대사가 직접 참석하고 내외 귀빈이 수도 없이 모였는데 쿠데타 군부에서도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이하 그 일파가 모두 왕림했다. 그때 박정희와 김종필 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10] 그리고 7월 5일 장도영 일파는 모두 체포되었다.

[편집] 정치 활동

[편집] 3공 시절

1971년 ~ 1975년, 1998년 ~ 2000년에 걸쳐 두 차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으며, 1963년 6대 국회 때부터 의정활동을 하여 총 9번 임기를 채웠다. 이것은 김영삼, 박준규와 함께 최다선 국회의원 기록이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박정희의 핵심 브레인으로 일명 혁명공약을 기초하였으며,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초대 부장으로 취임하였고, 1962년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있을 때부터 박정희의 공과중 하나로 기록되는 한일협정의 실질적인 교섭을 담당했다.

 

 1963년 1월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기 위해 육군준장으로 예편(군번 13517)하였고, 재건당이라는 가칭 조직을 창당했다가, 2월부터 정구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를 이끌었다. 이후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야당 인사들은 구정치인 정정법으로 묶어놓고 자신들만의 사전조직을 비밀리에 결성했다며 비난하였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63년 12월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선출되었다. 1964년 8월에는 미국으로 유학, 미국 하버드 대학교 정치경제하계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왔다.

 

1965년 6월, 당시 일본 외무상인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비밀 접촉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합의해 협정 체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약탈 문화재 반환, 재일동포 지위, 동해어업권,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 원폭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은 모조리 무시한 채 경제적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모든 문제의 종결을 선언해버려 이 후 한일 관계에 계속되는 불안정을 초래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었으나 극심한 부정·타락 선거라는 이유로 그 이듬해에 의원직을 사퇴했다.[11] 1960년대 후반 박정희가 3선 후 물러난다는 선언을 하면서 그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차기 유력주자로 떠올랐다.

 

이는 박정희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는 원인이 됐다. 박정희의 견제를 받자 그는 당원직을 사퇴하고 일시적으로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편집] 유신 시대

1970년 12월 민주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 1971년 3월 민주공화당 부총재를 지냈다. 박정희의 견제와 반대 세력의 움직임으로 한때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삼선개헌10월 유신에 협조하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1972년 5월엔 PTP 명예 총재에 선출되기도 했다. 1974년 일요화가회 명예회장, 1974년 5월 5.16민족상 이사장,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등을 지냈다. 유신정권의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실권을 유지했다. 1976년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에 취임했고, 1977년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에 선출되었다.[11]

 

정권의 2인자로 끊임없이 박정희와 갈등하였고, 박정희는 그 대신 그의 형 김종익을 대신 충남 부여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내보냈다. 이후 김종익은 7, 8, 9대 의원을 지내게 되었다. JP가 박전대통령과의 갈등 때 문에 파란을 겪고 있을 때 당시 정권측에서 부여지역 민심을 달래기 위해 동생 대신 억 지로 부여지역구에 출마시킨 것이었다.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한 후 1979년 11월 12일 민주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총재로 선출되고,[12]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이른바 ‘서울의 봄’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0년에는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되고 재산환수를 당한다.[13] 이후 타의에 의한 정계은퇴를 하게 되었고, 1979년 11월에는 5.16 민족상 재단 총재를 지냈다.

 

박정희 사후 공화당계 정당의 유력자로 부상하면서 재야 운동가들은 그에게 민주적인 선거 절차에 의한 정권 교체에 협조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집] 야당 정치인

[편집] 유신 붕괴 직후

1980년 5월 17일 새벽, 신군부 인사에 의해 체포되어 감금당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 18일에 신군부는 김종필 등 10여 명을 유신 시대의 부정축재자로 언론에 발표하였다. 신군부에 의해 모욕적인 대우와 감금을 당하면서 그는 전두환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경사령관 노태우 소장이 김종필이 감금된 지하감옥을 방문, 존댓말을 쓰며 깍듯이 예우하였고 자주 그를 방문하였다. 신군부 인사 중 유일하게 김종필에게 깍듯이 대하자 노태우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린 김종필은 노태우에게 처세술을 알려 주었다.

 

자신의 고사와 이승만, 박정희 시절의 2인자들의 몰락과 비참한 최후를 설명하며 절대 1인자(당시 1인자란 전두환을 지칭)에게 밉보이지 말 것, 전두환이 서운하게 하더라도 절대 서운한 표현을 해서는 안되며 서운함을 드러냈을 경우 아랫사람과 주변의 이간질하는 세력이 나타나 관계를 악화시킨다는 것 등 2인자로서의 처세술을 노태우에게 일러주었다.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구 민주공화당, 유정회계 인사들은 한국국민당을 창당해 활동했다. 그러나 정치금지가 해제되면서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자 구 공화당, 유정회 인사들은 그를 총재로 받들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편집] 정치 금지와 복귀

1980년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에 정치활동이 정지당한 채 1987년까지 야인생활을 하며 지냈다.[11] 그가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그의 친인척에게도 불이익이 가해졌다. 그의 여섯째 동생 김종관은 대전고를 나왔고 육군중위로 제대, 62년 건설부 산하 직원이 되어 주택공사 과장, 한 남동 외인주택 관리소장 등으로 일했으나 전 두환정권이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잃었다.[1] 김종관의 부인이었던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부인 신홍자 역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학교에서 해직되었다.[1]

 

이후 1987년 정계에 복귀하여 10월에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추대되었으며 신민주공화당의 출범 직후 구 민주공화당과 유정회의 후신인 국민당을 흡수했다. 87년 8월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4위로 낙선하였다. 이듬해인 1988년 4월에는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편집] 삼당 합당과 탈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로부터 삼당합당의 제의가 오자 고려 끝에 노태우의 제안을 수용하였다. 1990년 초 삼당합당을 통하여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통합하여 민주자유당 출범에 참여하여 다시 집권여당의 정치인이 되고, 1990년 2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92년 3월 민주자유당 대표위원, 김영삼 정부 초기에 다시 집권 민주자유당의 대표가 되었으나, 내각제를 추진하려는 그의 견해와 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하려는 김영삼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등하게 되었다. 한편 차기 대선유력주자로 거론되었으나 노태우는 박철언을 선택하려 했고, 이후 김영삼 계열이 집단 탈당조짐을 보이자 노태우는 김영삼을 후계자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선 예비주자로서의 기회를 얻지도 못하였다.

 

그는 내각 책임제 개헌을 주장했는데 김영삼과 13대 대권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1993년 2월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 문민정부 출범 이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신군부, 하나회 등 전두환 계열의 군부 숙청 이후 당내 군부세력을 제거하려던 김영삼과의 불화 끝에 1995년 2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독자정당을 다시 창당하였다. 이후 구 박정희, 전두환 정권 출신 인사들과 지지층의 표심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편집] 공동 여당 창립

[편집] DJP연대와 국민의 정부 출범

이 부분의 본문은 국민의 정부입니다.

1995년 3월 자유민주연합 총재에 추대되었고, 1996년 4월에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념적으로 차이가 있는 김대중과 손을 잡아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일명 DJP 연합), 1997년 11월에는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로 정계일선에서 물러났다.

 

그가 김대중과 손잡고 DJP 연합을 하자 보수주의 세력에서는 그의 DJP 연합을 놓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후 국민의 정부의 첫 국무총리 서리로 5개월간 일하다가 다시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을 놓고 김대중과 갈등하였고, 총리직에서 사퇴하였다. 그가 총리직에서 사퇴하자 이한동이 뒤를 잇게 되었다.

 

2000년에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자민련은 17석을 얻는 데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2001년 9월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한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김종필은 소수야당의 총재로 남게 되었다. 1999년 2월 10일부터 11일 인도를 방문했다. 김종필은 한국이 파트너 국가로 참가한 인도 엔지니어링 무역 박람회 [IETF’99]의 개막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99년 6월 12일 제1회 자랑스런 미술인상(미술인 지원에 공로)을 받았고, 1998년 7월 한국미술협회 _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에 선정되었으며 1998년 5월의 홍콩 아시아위크지 앙케이트 조사에 아시아 유력인사 50인 35위에 선정되었다. 1999년 미국 마퀴스후즈후사의 99년판 후즈 후 인 더 월드에 등재되었다.

[편집] 2000년대 이후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고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4년 민주당, 한나라당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권한이 발의되자 그는 탄핵에 동의하였다.[14]

 

2004년에는 탄핵 역풍에 이겨내지 못하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이 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하고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도 낙선하여 자민련에서 아무도 비례대표가 나오지 않자,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 선언을 하였다. 이로서 김종필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종결된 것이고 김종필은 대통령에 끝내 당선되지 못했다.

 

이후 충청권 지역 정당으로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이 만들어졌지만 자신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2007년 대선에서도 한나라당 후보인 이명박을 지지하였다. 2008년 3월 26일, 김종필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서울 강남에서 회동을 갖고 한나라당 공천 결과가 편파적으로 진행됐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명박을 강력히 성토했다.[15] 2000년대 이후 한성디지털대학교의 명예 석좌교수에 위촉되기도 하였다.

[편집] 가족 관계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딸 김예리는 이화여대를 나와 코오롱 그룹 회장 이원만의 차남 이동보(코오롱관광 대표)와 결혼했으나 헤어졌다. 김예리는 지난 대선 텔리비전 토론회에서 JP의 분장이나 코디네이 터를 맡고, 지방 나들이에도 동행하는 등 적 극적인 조언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들 김진은 고려대학교 출신으로 경제학과 재학중 미국 유타대 유학중 대학에 서 만난 과테말라 아가씨 리디아(로스앤 젤레스 산업대 졸업)와 결혼해 2남1녀를 두었다.[1]

  • 할아버지 : 김현택
  • 아버지 : 김상배(金相培, 별세)
  • 어머니 : 이정훈(李貞薰, 본관은 전주, 별세)
    • 형 : 김종호(별세, 공무원, 서울 종로구청 주사, 중앙곡물협회 회장 역임)
    • 형수 : 김복례(1918년 ~ , 7남매)
      • 조카 : 김성태(작고)
      • 질부 : 김순란(1940년 - , 상인,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남편과 사별후 80년대 에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 뉴욕에서 상점 운영, 1남 1녀)
      • 조카딸: 김춘태씨(1939년 - )
      • 조카사위 : 조병창(1931년 - , 예비역 육군 소령, 3남)
      • 조카딸 : 김춘자(1942년 - )
      • 조카 : 김인태(기업인, 금진상공 대표)
      • 조카 : 김익태(기업인, 남양 콘테이너 사장)
      • 조카 : 김지태(중소기업 이사 로 재직)
      • 조카딸: 김승자(1957년 - , 숙명여대 졸업)
      • 조카사위 : 박홍식씨(1953년 - , 전기통신연구소 연구 실장)
    • 형 : 김종익(金鍾翊, 1918년 6월 27일 - 2000년 12월 20일, 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 형수 : 이의렴(별세)
      • 조카 : 김황태(삼성전자 차장)
      • 조카딸 : 김일태(교육자, 프랑스 프로방스대학교 문학박사, 동덕여대 교수)
    • 형 : 김종락(金鍾珞, 1920년 5월 16일 - , 현 대한야구협회 상임고문)
    • 형수 : 나카 도가와 사나에(일본인, 한국명 김초묘, 1920년 - )
      • 조카딸 : 김숙자(1940년 - , 미국 시애틀 거주)
      • 조카사위 : 신인수씨(1939년 - , 재미사업가)
      • 조카 : 김정태(1947년 -
      • 조카 : 김민태(1949년 -
      • 조카 : 김휘태(1952년 -
      • 조카 : 김이태(1957년 -
      • 조카 : 김의태(1974년 - , 인도네시아에서 제조업)
    • 형 : 김종소(1925년 - )
    • 형수 : ?
      • 조카 : 김한태(1948년, 기업인, 건설회사 전무 역임)
    • 형수 : 박춘규(1932년 - )
      • 조카 : 김형준(1965년 - ,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에 유학중)
      • 조카 : 김우준(1967년 - , 회사원)
      • 조카 : 김범준(1969년 - , 연세대학교 졸업, 행정고시에 합격 후 공무원으로 재직중)
    • 동생 : 김종관(1930년 - )
    • 제수 : 신홍자(1942년 - , 교사, 전두환 집권 후 강제 해직됨)
      • 조카 : 김진태(1968년 - )
      • 조카 : 김혜진(1974년 - )
  • 아내 : 박영옥(朴榮玉, 1929년 9월 28일 - 박상희의 딸, 박정희의 질녀)
  • 장인 : 박상희(朴相熙, )
    • 처제 : 박계옥, 공무원
    • 처제 : 박민정(별세)
    • 처제 : 박금자(별세,
    • 동서 : 반기언(1942년 - , 공무원,ㅡ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 근무)
      • 처이질 : 승재(1970년 - )
      • 처이질 : 정하(1973년 - )
      • 처이질녀 : 정현씨(1978년 - )
    • 처제 : 박설자(1949년 - , 숙명여대 졸업)
    • 동서 : 김희용(1945년, 기업인, 벽산그룹 부회장, 벽산그룹 김인득회장의 차남)
      • 처이질 : 김태식(1974년 - )
      • 처이질녀 : 김소원(1980년 - )
      • 처이질: 김식(1981년 - )

[편집] 상훈

  • 2000년 1월 17일 ~ 1월 25일 서울경제신문 주최 명사미술전 출품-휘호 (백상기념관)
  • 1999년 6월 한국미술협회 제1회 자랑스런 미술인상(미술인 지원에 공로)
  • 1998년 10월 압둘아지르왕 훈장 (사우디아라비아)
  • 1978년 2월 대훈장(아르헨티나)
  • 1977년 10월 아르헨티나 대십자훈장
  • 1977년 10월 중화민국 대수보훈장
  • 1975년 10월 아프리카 가봉 대훈장
  • 1975년 10월 적십자대장 태극장
  • 1975년 10월 칠레 대훈장
  • 1974년 11월 수교훈장 광화대장
  • 1973년 6월 훈일등욱일대훈장(일본)
  • 1971년 12월 청조 근정 훈장
  • 1971년 6월 수교훈장 광화장
  • 1966년10월 보국 일등 훈장(베트남)
  • 1966년 7월 로훈장(이탈리아)
  • 1966년 10월 공로 대훈장(파라과이)
  • 1963년 1월 일등 보국 훈장 통일장
  • 1961년 10월 대수보정 훈장 (중화민국)
  • 1955년 1월 은성 충무무공 훈장
  • 1954년 9월 동성 훈장(미국).

[편집] 학위

  • 1963년 미국 훼어리디킨슨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64년 미국 롱아일랜드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66년 중앙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66년 미국 웨스트민스턴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 1974년 홍익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 1992년 미국 유타주립대학교 명예 정치학박사
  • 1995년 미국 오레곤과학기술원 명예 과학박사 겸 및 명예이사직
  • 1998년 동의대학교 명예 경제학박사
  • 1998년 명지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98년 11월 공주대학교 명예 교육학박사
  • 1998년 일본 규슈 대학 명예박사
  • 광주대학교 명예행정학 박사
  • 일본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명예국제정치학 박사

[편집] 평가

[편집] 일화

아들 김진은 고려대 경제학과 재학중 미국 유타대 유학중 대학에 서 만난 과테말라 여성 리디아와 결혼했다. 당시 그의 반응에 대한 측근의 진술로는 '김총리가 미처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진씨가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 다음이 라 김총리도 속수무책으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1]

[편집] 저서

  • 《JP칼럼》
  • 《JP화첩》
  • 《새 역사의 고동》

[편집] 기타

  • 1992년 12월 한국소설가협회 명예회원
  • 1993년 6월 한국 펜클럽 평생회원

[편집] 취미

  • 수필, 그림, 서예, 바둑, 전자오르간, 만돌린, 검도

[편집] 좌우명

  •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
  • 상선여수(上善如水)

[편집] 김종필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관련 서적

  • 김종필, 《JP 칼럼》 (프로젝트409, 1997)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2》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9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편집] 같이보기

[편집] 참고자료

전 임
백두진
제11대 대한민국국무총리
1971년 6월 4일 - 1975년 12월 18일
후 임
최규하
전 임
고건
대한민국국무총리 서리
1998년 3월 3일 - 1998년 8월 17일
후 임
김종필
전 임
김종필
(국무총리 서리)
제31대 대한민국국무총리
1998년 8월 18일 - 2000년 1월 12일
후 임
박태준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부여군 갑)이석기
(부여군 을)이종순
제6대 국회의원(부여군)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민주공화당
후 임
김종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김종필
제7대 국회의원(부여군)
1967년 7월 1일 - 1968년 6월 2일 [16]
민주공화당
후 임
(7대)김종익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김옥선,김종익
제10대 국회의원(부여군·서천군·보령군)
1979년 3월 12일 - 1980년 7월 4일 [17]
민주공화당
조중연
후 임
이상익,조중연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부여군·서천군·보령군)
이상익,김옥선
제13대 국회의원(부여군)
1988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신민주공화당민주자유당
후 임
김종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김종필
제14대 국회의원(부여군)
1992년 5월 30일 - 1996년 5월 29일
민주자유당자유민주연합
후 임
김종필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김종필
제15대 국회의원(부여군)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자유민주연합
후 임
김학원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편집] 주석

  1. http://www.donga.com/fbin/news_plus?d=news129&f=np129bb010.html
  2.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3. 고교 평준화를 해야하는 진짜 이유 - 오마이뉴스
  4. 제2공화국과 장면 (이용원 지음 | 범우사 | 1999) pp259
  5. 박경수,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3) 300페이지
  6. 박경수,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3) 301페이지
  7. 박경수,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3) 302페이지
  8. 박경수,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3) 303페이지
  9. 박경수,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3) 304페이지
  10. 박경수,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3) 305페이지
  11.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942a
  12. 共和總裁에 金鍾泌씨”, 《경향신문》, 1979년 11월 12일 작성, p. 1. 2009년 5월 5일 확인.
  13. 金鍾泌 前共和總裁등 9명 議員辭退書 수리”, 《동아일보》, 1980년 7월 3일 작성. 2008년 3월 29일 확인.
  14. 자민련 계열 의원 중 일부는 당론과 달리 노무현 탄핵에 반대하기도 했다.
  15. '김영삼-김종필' 회동, '이명박에 배신당했다' 맹성토
  16. 1968년 5월에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6월 2일 민주공화당 당적을 이탈함으로써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17. 1980년 7월 4일 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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