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李陸史 1904-1944)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 또는 원삼이었고 개명은 활(活) 자는 태경 아호는 육사였는데 육사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二六四호에서 사용하였다.
이육사의 아버지는 이황의 13대손인 가호였고 어머니는 허길이었으며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공부한 그는 영천 소재의 백학학교와 보문의숙, 교남학교를 다녔고 1926년 북경조선군관학교와 1930년 북경대학 사회학과를 다녔다고 하지만 사실여부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1925년에 이육사는 형 원기 아우 원유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7년에는 장진홍이 주도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육사는 이어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1930년 대구 격문사건에 연루되어 모두 17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육사는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와 있던 중 일본 관헌에서 붙잡혀 북경으로 송치된 후 1944년 1월 북경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육사의 문학활동은 조선일보 대구지사에 근무하던 1936년 1월 3일자「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935년《신조선》에 춘추 삼제 황혼 등을 발표하였고 그 뒤 비판, 조광 등 여러 잡지에 시, 소설, 평론, 문학평론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 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그의 아우 원조에 의하여 서울 출판사에서 육사 시집이 초간본이 발간되었고 대표작으로는 청포도, 황혼, 절정, 광야 등이 있고 1968년 그의 시비가 안동에 건립되었다.
그가 살았던 생가는 1975년에 안동댐이 수몰되면서 안동시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 뒤에 그 집에 무당이 살다가 어딘가로 옮겨 간 뒤 그 집은 굳게 문이 잠긴채 폐가가 되고 말았다.
문을 열자 곰팡이가 가득 슨 벽에선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고, 다른 방에는 무당이 사용하던 불상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서 사람들을 맞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