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장 병법가 오기(吳起) (9)
BC 387년이면 조ㆍ한ㆍ위 삼진(三晉)이 정식으로 제후로 인정받은 지 16년 째 되는 해이다.
이 해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를 주도해 나갔던 위문후가 세상을 떠났다.
총 재위 기간은 38년.
중산을 다스리던 세자 격(擊)이 귀환하여 군위에 올랐다.
그가 위무후(魏武侯)다.
같은 해에 조(趙)나라에서는 조무후가 죽고 세자 장(章)이 즉위했다.
그가 조경후(趙敬侯)다.
이듬해 조경후는 도읍을 진양에서 한단(邯鄲)으로 옮겼다.
보다 중원 세력을 넓히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이 무렵 해서 가장 전국시대다운 냉혹한 사건 하나가 동방의 대국 제(齊)나라에서 벌어졌다.
제나라 재상 전화(田和)가 국권을 전횡하던 중 아예 임금을 내쫓고 자신이 직접 임금에 오른 것이었다.
이때 전화에게 쫓겨나 바닷가로 추방당한 제나라 임금은 제강공.
재위 19년에 일어난 일이니 BC 387년이다.
제강공(齊康公)은 그 후 7년이 지나 바닷가에서 쓸쓸히 죽는다.
이 사건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전에 조ㆍ한ㆍ위나라가 진(晉)나라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국을 이루었지만 진나라 공실을 완전히 멸망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화(田和)는 아예 자신이 제(齊)나라 공실의 주인이 되었다.
찬탈을 한 것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꿈 같은 일이다.
그만큼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태공망을 시조(始祖)로 하는 제나라 군주는 지금까지 강씨(姜氏)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전씨(田氏)로 바뀌었다.
그래서 사가(史家)들은 전화 이후의 제(齊)나라를 '전제(田齊)'라 불러 강성(姜姓)의 제나라와 구별하고 있다.
전화의 시호는 태공(太公)이다.
이에 사람들은 그를 제태공(齊太公)이라 부른다.
제나라의 시조 태공망이 알면 지하에서도 통곡할 일이었다.
위무후가 즉위한 이후에도 오기(吳起)는 서하 태수를 지내며 여전히 국방에 전념하고 있었다.
한 번은 위무후(魏武侯)가 각 고을을 순행하던 중 서하 땅에 이르렀다.
위무후는 오기를 대동하고 배에 올라 국경 일대를 시찰하였다.
물결은 셌고 산은 험했다.
위무후(魏武侯)는 주변 산세를 둘러보다가 흡족한 듯 중얼거렸다.
"서하(西河)야말로 천연 요새로다. 이처럼 함한 산하야말로 위나라의 보배가 아니겠는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오기(吳起)는 위(魏)나라의 부국강병을 지형 덕분으로 여기는 위무후의 말이 못마땅했다.
그는 정색을 하고 위무후에게 아뢰었다.
"험한 산하가 어찌 나라의 보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위(魏)나라가 천하 열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선군(先君, 위문후)의 덕행 덕분입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지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군주의 덕행일 뿐 산하의 험준함은 그 다음입니다. 만일 주공께서 덕(德)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이 모두 적이 될 것입니다."
오기의 간언에 위무후(魏武侯)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옳은 말씀이오. 내 생각이 짧았소."
말은 이렇게 했으나 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오기의 말 속에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냄새가 짙게 풍겨 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마지막 말이 위무후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러댔다.
- 주공께서 덕(德)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이 모두 적이 될 것입니다.
덕이 없으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뜻이 아닌가.
젊고 패기에 찬 위무후(魏武侯)는 흥이 깨져 도읍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재상인 위성(魏成)이 죽었다.
위무후는 후임 재상에 노대신인 전문(田文)을 임명했다.
전문은 위문후 때부터의 대신으로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상문(商文)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오기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당연히 신임 재상은 나라에 공이 큰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오기(吳起)는 자주 도읍에 올라와 지내고 있었다.
그는 불쾌함을 이기지 못하고 신임 재상 전문(田文)을 찾아가 따지듯 말햇다.
"그대와 나의 공로를 비교해보고자 하는데 그대 생각은 어떠하오?"
전문(田文)은 오기의 마음을 짐작하고 공손히 대답했다.
"좋은 일이오."
오기(吳起)가 본격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삼군의 대장이 되어 병졸들과 함께 북을 치며 나라를 지킨 공을 돌아보면 그대와 나 중 누가 낫소?"
"내가 어찌 그대의 공을 따를 수 있으리오."
"그럼 백관을 다스리고 만 백성을 따르게 하여 국고(國庫)를 충실히 한 점에서는 그대와 나 중 누가 낫소?"
"그 또한 내가 그대를 따를 수 없소."
"진(秦)나라 군사들이 감히 동쪽을 넘보지 못하게 하고, 한(韓)나라와 조(趙)나라를 복종케 한 점에서는 그대와 나 중 누가 공이 많소?"
전문(田文)이 또 대답했다.
"나는 그대의 공에 미치지 못하오."
이에 오기(吳起)가 두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그대는 이 세 가지가 나보다 다 못하면서 어찌 나를 제쳐두고 재상에 오를 수 있단 말이오?"
전문(田文)은 여전히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재상에 오른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오. 지금 주공께선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으시오. 때문에 늘 나라 일을 염려하고, 백성들과 친하지 못할까 걱정하며, 대신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을까 불안해 하시오."
"이러한 때 필요한 것은 주공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일이오. 이 점에 있어서 그대가 적합하겠소? 아니면 내가 적합하겠소?"
다분히 위무후의 서하 순행 때 오기(吳起)가 배 안에서 협박성 짙은 말을 겨냥한 말이었다.
오기(吳起)가 어찌 그 말뜻을 모르랴.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그대가 더 적합하오."
"주공께서 나를 재상에 임명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그제야 오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전문(田文) 앞을 물러났다.
그런데 전문(田文)은 나이가 너무 많았다.
재상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위무후(魏武侯)는 위문후의 사위이자 자신의 매부인 공숙좌(公叔座)를 재상에 임명했다.
이것이 또 한 번 오기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 전문(田文)은 분명히 나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재상이 되었을 때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공숙좌(公叔座)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공로나 능력 면에서 그가 나보다 뛰어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불평이 공숙좌의 귀에 들어갔다.
공숙좌(公叔座)는 틈날 때마다 중얼거렸다.
"오기(吳起)가 있는 한 나의 자리는 불안하다."
하인 중에 똑똑한 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 하인이 공숙좌에게 계책을 내었다.
"오기(吳起)를 내쫓을 수 있는 묘책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오기는 공(功)과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성품입니다. 주공께 찾아가 이러이러하게 아뢰십시오."
하인의 말을 들은 공숙좌(公叔座)는 다음날 위무후를 찾아가 말했다.
"오기(吳起)는 재능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공께서는 오기를 너무 박대하고 계십니다. 그가 우리 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갈까 염려됩니다."
위무후(魏武侯)가 물었다.
"오기는 선군 때부터의 장군인데 그럴 리가 있소?"
"사람 마음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주공께서는 시험 삼아 오기에게 공녀(公女)를 아내로 주겠다고 말씀해 보십시오. "
"만일 오기가 위(魏)나라에 머무를 생각이 있다면 공녀를 받을 것이요, 머무를 마음이 없으면 틀림없이 사양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오기의 마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로다."
이렇게 함정을 파 놓은 공숙좌(公叔座)는 그 날 저녁 오기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였다.
오기(吳起)가 공숙좌와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는데 공숙좌의 아내가 나와 거들먹거리며 남편을 마구 천대하였다. 눈꼴이 시어 못 볼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공숙좌(公叔座)는 쩔쩔매며 아내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었다.
오기(吳起)는 속으로 생각했다.
"공실 여자는 아내로 삼을 것이 못 되는구나.'
그런데 다음날 위무후(魏武侯)가 오기를 불러 뜻밖의 말을 하였다.
"과인에게 아직 시집가지 않은 누이가 있는데 장군과 짝을 맺게 해주고 싶소. 장군은 이를 어찌 생각하오?"
오기(吳起)는 속으로 어리둥절하는 가운데서도 전날 목격한 공숙좌의 아내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는 정중히 고개를 저었다.
"신이 어찌 공녀(公女)를 아내로 맞아들 일 수 있겠습니까? 주공의 마음은 감사하나 사양하겠습니다."
이때부터 위무후(魏武侯)는 오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난날 서하에서 자신의 공을 내세울 때부터 이 자는 이미 딴 마음을 품고 있었구나. 이런 자에게 어찌 요직을 맡길 수 있으리오.'
이에 그는 적당한 핑계를 대어 오기의 서하 태수 인수(印綬)를 거두어들이고, 그것으로도 불안하여 아예 장군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오기(吳起)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총명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대번에 위무후가 자기를 의심하고 경계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 신변이 위험하다.'
마침내 그는 위(魏)나라에서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
어느 날 밤, 어둠을 이용해 초(楚)나라로 달아났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이 모든 게 공숙좌의 하인이 세운 계책에 의한 것일 줄이야.
당대 최고의 병법가인 오기(吳起)가 일개 하인에 의해 모든 지위를 잃고 망명객이 된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
첫댓글 감사합니다~.^
연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