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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8월 29일 국치일
문대식 추천 0 조회 202 20.08.21 03: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서울종합방재센터(옛 안기부 청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다목적광장"이 바로 경술국치의 현장인 '통감관저'가 있던 자리이다. 도로의 진입로는 예전과 거의 동일한 구조로 남아 있으며,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 역시 여전하다. 현재는 몇 개의 공원벤치와 농구골대만 설치되어 있었을 뿐 아무런 흔적이나 표시조차 남아있지 않다.

ⓒ2005 이순우

8월 29일은 95주년이 되는 국치일(國恥日)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나라를 강탈당했던 그날을 우리는 '나라가 부끄러운 날'로 기억하고자 했다. 정든 고향을 등지고 러시아를 유랑하던 고려인들은 대욕일(大辱日)로 기념했다.

그런데, 지금 8월 29일을 국치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반백의 노인들은 달력에 표시돼 있던 '국치일'이라는 빨간 글씨를 기억할지 모르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 8월 29일은 낯설기만 한 날이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들은 국치일을 다시 기념일로 제정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국치일 그 기념과 망각의 역사

그렇다면, 국치일은 그간 어떻게 기억되고 언제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것일까. 1910년 8월 29일로 거슬러 올라가 그 기념과 망각의 역사를 짚어보자.

1910년 8월 29일 서울의 아침은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였다.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은 1주일 전인 8월 22일 비밀리에 체결돼 망국은 기정사실이었다. 다만 이 날은 대내외에 그 비보를 공포하는 날이었다.

예비검속으로 눈과 귀를 단단히 막아놓은 상태였지만, 거리에는 완전무장한 경찰과 헌병이 쫙 깔렸고 기마대는 쉴 새 없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마침내 남산 밑에 자리한 통감부에 군복차림의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완용 등 대한제국 대신들을 거느리고 나타나 행복증진과 동양평화를 약속하며 조약을 정식 발표했다.

'제1조 한국의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넘겨 준다'로 시작되는 총 8개항의 조약은 순종황제 서명 없이 공포됐고,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라가 망했다. 백성들은 졸지에 망국민으로 전락했다. 왕조가 사라졌건만, 자결로 항의하는 황족은 없었다. 그와 달리 존경받던 선비 황현은 벼슬을 하지 않아 나라의 녹을 먹은 적이 없었음에도 500년 동안 선비를 길러준 나라에서 그냥 망국을 구경할 수만 없다면서 약을 먹고 자결했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씨 부친이자 당시 금산군수였던 홍범식도 그날로 소나무에 목을 맸다.

임정 3대 기념일이었으나 이젠 잊혀진 국치일




그렇게 8월 29일은 망국민에게는 부끄럽지만 반드시 상기해야 하는 국치일이 되었다. 국내는 물론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국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이 날을 기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건국기념일, 3·1 기념일과 함께 8·29 국치기념일을 3대 기념일의 하나로 추념했다.

그들의 표현대로 '우리의 뼈 속에 깊이 새긴 가장 비참하고 가장 절통한, 민족이 오래도록 되새겨야 할' 이 날이 오면 어김없이 기념식을 거행하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만주 동포들은 '국치추념가'(작사 검소년)를 부르며 이날을 곱씹었다.

1.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은 / 조국의 운명이 떠난 날이니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여라 / 갈수록 종 설움 더욱 아프다
2. 조상의 피로써 지킨 옛집은 / 백주에 남에게 빼앗기고서
처량히 사방에 표랑하노니 / 눈물을 뿌려서 조상하리라
3. 어디를 가든지 세상 사람은 / 우리를 가리켜 망국노라네
천고에 치욕이 예서 더할까 / 후손을 위하여 눈물 뿌려라
4.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때니 / 아픔과 슬픔을 항상 머금고
복수의 총칼을 굳게 잡고서 / 지옥의 쇠문을 깨뜰지어다

국내에서는 물론 합법적인 기념식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8·29를 전후한 시기만 되면 아연 긴장하고 경계를 강화해야 했다. 한 신문은 3·1운동이 발발했던 1919년 8·29 국치기념일 정경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29일에는 각 상점이 일제히 철시하되 마치 예약한 듯하고, 잡상인이라도 문을 연 자가 전무하며, 외국인도 문을 열지 않았다. 오전 10시경에 북악산에 큰 태극기를 달고 만세를 불렀다. 적은 헌병 순사를 총동원해 하루 종일 자동차로 시가를 횡행했고 골목마다 헌병이 지켰다.

남대문, 종로통에 인산인해를 이루며 왕래하는 사람들은 소곤소곤 귓속말을 할 뿐이었다. 용산의 일본군은 하루 종일 포를 쏘아 한성을 위협했다. 적은 28일부터 공연히 행인 수십 명을 체포하여 격문살포 혐의로 악형을 가했다. 인심의 혼란은 전시보다 더한 듯하며 적은 비상경찰 및 정탐을 경성 모든 곳에 깔아놓았다. (<독립신문> 1919년 9월 9일자)

이렇게 매년 8·29 국치일만 되면 '국치기념일을 잊지 말자'는 격문 살포나 낙서 사건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형무소 정치범들이 국치일 단식동맹을 조직하거나 노동자들이 국치일을 기념하는 총파업을 계획하기도 했다.

8.29만 되면 긴장한 일제 경찰... 박정희 시대 달력에서조차 사라져

국치일로부터 34년 11개월 보름 만인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다. 미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당장 국치기념일부터 폐지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국치기념일 행사가 계속됐다.

1946년 국치기념일, 해방은 됐으나 아직 독립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좌우투쟁이 치열했던 상황을 반영하듯 좌우익은 국치기념일 행사도 별도로 진행했다. 우익은 애국단체연합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8.29 국치기념국민대회를 개최했고,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로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국치일기념식을 거행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엔 공식적인 기념식이 개최되지 않았으나, 달력에서는 국치일이 기념일로 온존했다. 8월 29일을 맞이해 국치를 기념하는 대신 순국선열을 추도하는 행사가 중앙청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런데 친일세력이 주축을 이룬 이승만 시대에는 달력으로나마 기념됐던 국치일이 사람들 뇌리에서 사라진 건 언제일까. 해방과 함께 국치일에 대한 기념의 효력이 상실되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져 갔을 것이고, 한일관계가 복원되는 박정희 시대에 들어와서는 달력에서도 슬그머니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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