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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온 직후 페이스 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2월부터 7월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남미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숨이 끊길 것 같은 고지대 등반, 추워서 이빨이 부서질 것처럼 떨리던 야영, 거센 바람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화산 트레킹… , 참 강렬한 기억이네요. 그때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동행이 있어 버틸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평생 못 봤을 풍경도 고맙습니다. |
약 반년 동안 아홉 개의 나라를 돌아봤으니, 여정이 빠듯했지 싶다. 풍토와 음식과 문화가 다른 남미 생활이란 고생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고지대 등반에 따른 산소 부족과 급변하는 기후, 이러저러한 상황 속에서 동행과 상부상조한 모습들이 보이는 듯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붉게 물든 새벽 피츠로이, 우주 같은 산속에서 홀로 있던 시간, 내 빵을 받아먹던 여우, 귀여운 궁둥이의 양떼를 치던 목동, 주인은 없지만, 사랑받는 길 위의 개들, 그리고 길 위의 사람들… 아, 말로 다 담는 거 포기… 이제 발 안 닿는 바다에 뜰 수 있고, 다이빙에 용기가 생겼고, 기타도 쳤고, 탱고도 췄고, 누구에게든 인사할 수 있고, 길바닥 아무데나 앉을 수 있고, 어느 지붕 아래든 잘 수 있습니다. 아직 남미에 있는 여행자, 남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합니다. 막판에 서울 오고 싶었는데 취소. |
여행 이전과 이후의 변화가 보인다. 전엔 남의 눈이 있어, 하지 못했던 일들, 또한 자신감도 없었고, 소심했었고, 용기조차 없어서 시도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문화가 다른 남미에서는 가능했다. 생존을 위한 적응이다. 마주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한다는 것, 길바닥 아무데나 퍼질러 앉을 수 있다는 것, 나무 뒤에서 볼일 보는 일들,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이런 행위는 어쩔 수 없는 적응이다. 이상하게 보일까봐, 옷을 버릴까봐, 조신하게 비데 위에 앉았던 일과 대비 되었을 것이다. 몇 줄 생략~.
우선, 여행을 떠난 이유부터 말씀드려야겠죠. 당시의 카톡 대화창을 보면 온통 절망과 험담뿐입니다. 대화창은 사라졌지만 어딘가에 그 말과 기운이 떠돌 거라 슬픕니다. 회사를 퇴사하고, 병원에 다니고, 문득 30대 중반이기에, 그저 쉬고 싶었습니다. 이왕 쉰다면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하고 싶었습니다. 아예 다른 세계에, 그래, 남미다! 혼자 발톱 빠지게 걷고 그 탓하며 울자. 지금보다 나은 인간이 되겠지. 물론 여행을 다녀와서 개과천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서울에 무섭게 적응하고 회사를 다니고, 생활을 합니다. |
그렇다. 험담과 이간질, 이 얼마나 비열한 짓인가.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면 죽음도 불사하겠는가.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면 섬뜩한 느낌이 든다. 작가는 이런 환경이 심적으로 고통스러웠나보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답답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어 남미 행을 결행한 것 같다. “발톱 빠질 정도로 많이 걷고, 고생 좀 사서하자!” 고 나섰다. 그 결단과 용기에 박수를 친다. 낙담하지 않고 환경을 바꿔보려는 의지와 열정이 돋보인다. 그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달라진 점은 있습니다. 이전보다 행복합니다. 여행 중에는 아프고 짜증나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여행이라 해도 멋지고 괜찮은 일만 일어나진 안잖아요. 게다가 오랜 여행은 일상이 되지요. 하지만 그 기간에 어느 때보다 많이 행복하다, 아름답다, 좋다, 란 말을 했습니다. 가장 본능에 충실했습니다. 먹고 싶음 먹고, 자고 싶음 잤습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어요. |
불안도, 고생도, 외로움도 행복이 되고, 아름답고, 좋다는 작가의 마음에 이해가 간다. 여행이란 치유의 기능도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작가는 심한 고생 뒤에 찾아오는 행복감을 언급한다. 모르는 이들 앞에서 자유, 상대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 남의 이목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자세, 자기 취향대로, 자기 본성대로 행동할 분위기였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여행은 일종의 현실 도피이고, 피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들어보자.
남미에 가면 세계일주 중인 분도 많고, 저보다 체력과 지식, ‘여행력’이 뛰어난 분도 숱합니다. 너무나 평범한 제가 여행에 부딪치는 이야기가 웃길 때도 있을 겁니다. 비웃을 지도요! 괜찮습니다. 그저 “있잖아요.”라고 말을 거는 악의 없는 누군가를 만난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의 얘기가 공감이 가거나 약간의 환기가 될 수도…. 고맙습니다. |
작가는 남과 비교할까봐 걱정을 하는 듯하다. 읽어보니까 재미만 있었는데, 겸손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를 누구와 비교를 할 때 어색해진다. 비교는 그렇다 치자. 가끔 이런 생각도 한다. 상대가 자기 생각과 달리할 때 왜 불편해질까? 한 편이 되어주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심리작용에서 일까? 그것도 아니면, 백인백색을 자기 잣대로 동일시해서 일까? 어쩌면 포용력 문제일 것 같기도 하지만, 때때로 달라지는 자신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겠나.
이런 작가도 있고, 저런 작가도 있어야 조화롭고 재미가 있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 똑같은 중남미지만 여러 작가의 개성과 성향에 따라 재미가 다름을 알게 되어 굳이 같은 작가에게만 매달리지 않는다. 균형 감각이란 넓게 보아야 생기는 것 같다. 하지만 편식이 특기인 나는, 내가 남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여성 작가의 여행기에 혹하고 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저자의 이야기를 보고 ‘비교’란 낱말이 떠올라, 갑자기 황희 정승이 생각났다.
방촌厖村 황희黃喜 정승이 길을 가다가 논을 가는 농부에게, 방촌이, “저 누렁소와 검은 소 두 마리 중에 어느 소가 일을 잘하는가?” 하고 물었다. 논을 갈다 말고, 일부러 논 밖으로 나와 방촌의 귀에 대고, “누렁소가 더 잘하오!” 했다. 방촌이 어이가 없어 “뭘, 그런 걸 가지고 일부러 이러시오!” 하니까. 농부는 얼굴을 붉히며, “두 마리 소가 자기 딴에는 애먹고 일하는데, 한 쪽이 못한다고 하면 듣는 소 기분 나쁠 것이 아니오!“, “아무리 짐승이지만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잖소!” 뼈 있는 한마디를 하고는 논으로 들어갔다. 농부의 사려 깊은 말씀에 방촌은 크게 깨닫고, 농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는 고사가 있다. 끝. 2020.3.7.토. 2020.3.12. 목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