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신진 시집
산지니시인선 022
쪽수: 176쪽
판형: 125*210
ISBN: 979-11-6861-374-4 03810
가격: 14,000원
발행일: 2024년 10월 28일
책 소개
존재와 생명을 노래하는 시인, 신진의 열한 번째 시집 출간
스쳐 지나가는 것들로 점철된 세상을 통탄하며
공생공락하는 공동체를 염원하다
1974년 시문학의 추천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등단 50년을 맞는 신진 시인이 5년 만에 신작 시집을 출간한다. 신진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인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에는 표제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를 포함하여 49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인 신진 시인은 50년 작품 활동을 통해 치열한 현실과 맞서면서 자연과 하나 됨,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추구해왔다.
우리는 스쳐 사라지는 일들로 가득한, 경험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한 경험이 사라지고, 모든 경험이 상품을 소비하듯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시 또한 경험의 시가 줄어들고 수사와 상상력으로 채워진 언어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신진 시인은 경험을 강조하는 시인이다. 일상의 순간을 구체적인 언어로 포착하고, 삶의 철학을 역설의 단어로 풀어낸 시를 통해 진솔한 깨우침을 독자에게 전한다.
시는 세상 모든 곳에 널려 있다
시, 가장 구체적인 삶의 과정이자 경험의 표현
「시 쓰지 마라」, 「개 같은 시」, 「허접쓰레기」와 같은 ‘시에 대한 시(meta-poem)’에서는 시인의 시론과 시적 지향이 잘 드러난다.
시 쓰려거든/시 쓰지 마라//시는 이미/사방에 널려 있다//시를 쓰노라면/시를 날리고 마느니//시를 쓰겠다면 시를 버려야 하고/시를 만나자면 시를 잊어야 한다// (「시 쓰지 마라」 중)
시인은 ‘시는 이미/사방에 널려 있다’라고 말하며 ‘시’란 자연과 사물과 소통하는 삶의 양식임을 강조한다. 「개 같은 시」와 「허접쓰레기」에서는 “AI 챗 견종/그런 시들이 넘쳐나고 있다”라고 우려하고, “놀고 자빠지고 처박고 미끄러지는 환상언어의/신통방통한 시가 녹내장의 눈을 반짝거리고 있다”라고 비판한다. 잘 다듬어진 매끄러운 언어로 채워진 시의 언어들이 마치 ‘녹내장의 눈’처럼 삶의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가워서 짖고 같이 놀자고 짖고 끌러달라며 짖고/가만있는 보름달 보고 짖고 똥파리 덥석 잡아 삼키고//반가우면 달려들어 남의 옷 다 버려놓는 개새끼!/그런 개 같은 시가 그립다 (「개 같은 시」 중에서)
시인은 “반가우면 달려들어 남의 옷 다 버려놓는 개새끼”라는 표현으로 자발적인 생명의 의욕을 의미하는 ‘개 같은 시’를 쓰고 싶다고 말한다. 시인의 시가 자연과 사물의 생명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러한 경험의 시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난폭한 현실을 풍자하고 시와 시인의 위치를 다시 생각하다
일상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공존과 평등을 지향하는 노경의 철학을 말하다
12장으로 구성된 장시 「혁명본색」에서 시인은 난폭한 현실을 비판하지만 마침내 ‘비관할 수 없는 희망’을 찾아낸다. 이 장시를 통해 시인이 인식한 인간상, 세계관, 현실과 미래 전망을 서술한다. 이 장시는 6.25 당시 부산 범천동에서 태어난 시인의 유년의 기억인 “미군 매형에게 초콜릿을 조르던/동네 친구의 아슬아슬한 평화”로부터 시작한다. 혁명조차 ‘상품’으로 전락한 현실에서 회의와 비관을 벗어나기 힘들고, 시인이나 학자, 법률가나 정치지도자 모두 요령을 부리는 ‘건달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통탄한다. 진정성의 경험과 감각이 사라진, 허상만 남은 세계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사회와 가족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적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인은 자본과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기 이전, 평등하고 서로 돕고 배려하며 환대하는 인간상을 그리워하며 “그 방 가는 문 아직 있을까?”라고 거듭 묻는다.
“기침이 열흘을 넘긴” 아내의 이야기나 황사가 심하여 ‘개집 단속’을 해야 하는(「봄 걱정」) 일상의 사소한 염려부터 시인 자신이 수술대 위에서 ‘홍매’를 떠올렸던(「결장암 수술대 위의 홍매」) 삶의 중대한 사건까지 시인은 지속적으로 일상의 경험을 섬세하게 붙잡고 시의 언어로 표현해낸다. 「오른손잡이의 오류」에서는 공존과 평등의 가치를 다시 환기하며,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에서는 “비 맞지 않는 자 어디 있더냐”라고 물으면서 공감과 공존의 삶을 제안한다. 시인은 「허공」, 「하나 목숨」, 「꿈속 경주」, 「나이아가라를 그리며」, 「수제비」, 「건강을 위하여」, 「달리도 칠게장」, 「이승의 일」, 「개꿈을 품다」, 「좁쌀영감」의 작품에서 나이 듦에 대한 시적 사유를 드러낸다. ‘웃는 일이 우는 일’이었고(「단풍구경」) ‘중심이 허공’이라는(「허공」) 노경의 역설은 구체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노년의 진솔한 깨우침을 들려준다.
평생 내 손가락 먼 곳을 가리켰으나/그곳에 이른 때 없고//평생 내 손가락 꼭대기를 가리켰으나/그곳에 오른 적 없고//평생 내 손가락 나를 가리켰으나/그에도 닿은 적 없다//죽어서는 지구의 중심을 가리키리라/이번에는 그 중심/허공에 가닿으리라 (「허공」 전문)
저자 소개
신진(辛進)
1974년 이원섭, 김남조 시인에 의해 『시문학』 추천을 받고 활동. 문학박사(성균관대). 전원문학회, 목마시동인, 얼토시, 문학인길벗 외 동인 활동.
시집으로 『목적 있는 풍경』, 『장난감 마을의 연가』, 『멀리뛰기』, 『강(江)』, 『녹색엽서』, 『귀가』, 『미련』, 『석기시대』. 시선집으로 『풍경에서 순간으로』, 『사랑시선』 등.
논저로 『우리 시의 상징성 연구』, 『한국 현대시 읽기』, 『창작문학론 강의』, 『한국시의 이론』, 『차이 나는 시 쓰기-차유의 시론』 외 다수.
창작동화 『낙타가시꽃의 탈출』, 동화집 『반려인간』, 귀촌 에세이 『촌놈 되기』 외 공저 다수.
시문학상, 한국광역시문학상 대상, 봉생문화상, 부산시인협회상 본상, 부산시문화상, 설송문학상, 낙동강문학상, 문덕수문학상 등 수상.
현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책 속으로
걷지 못하고 나앉아 있는 슬픔을 지날 때에는
걷는 슬픔이여 너도 잠시 멈추었다 가라
너도 슬픔이고
못 걷는 슬픔이었지 않느냐?
못 걷는 슬픔에게 예를 갖춘다 해서
금세 일어나 걷기야 하겠냐마는
지나가던 슬픔이 걸음 멈추고 다독이는 동안
그도 매무새 추스를 수 있을 것이니
이이나 저이나
슬픔은 슬픔끼리 영판 닮지 않았더냐
같은 체온
같은 맥박
한통속 사연
언제 비 오지 않는 날 있더냐
아침결에 한 식구
서로 얼굴 살핀 후에 제가끔 길을 나서듯
걷는 슬픔이여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에는
잠시 등짝 다독이며 얼굴 살피다 가라
비 맞지 않는 자 어디 있더냐
슬픔이 슬픔을 잊지 않고 우산그늘 나눌 때
못 걷는 슬픔도 멈춤
그 다음 동작을 기억하려니
_「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전문
시 쓰려거든
시 쓰지 마라
시는 이미
사방에 널려 있다
시를 쓰노라면
시를 날리고 마느니
시를 쓰겠다면 시를 버려야 하고
시를 만나자면 시를 잊어야 한다
지우고 잊고 잃은 시는
눈비 맞고 눈총 맞으며
맨발로 물 위를 걷는 소금쟁이가 되고
허공에 집터를 보는 거미가 되고
어른의 여문 손아귀를 펴고 녹이는
조막손 되고 꽃잎이 되고
드디어는
흘러가는
한 줄 문장으로
천지간에 빨래줄 모양 널릴 것이니
시 쓰지 마라
시를 구하려거든
시는 세상천지 이미 널려 있다
_「시 쓰지 마라」 전문
차례
시인의 말 하나
제1부
수평잡기 | 비우지 마라 | 오른손잡이의 오류 |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 모르는 게 아는 것이다 | 그리운 못난이 | 설악산 가을 ‘명상의 길’ | 단풍구경 | 초짜 전문 마을 | 엄광산 소나무의 안목(眼目) | 수제비 | 기러기와 오리 | 가을 야구장 | 시 쓰지 마라 | 아침 | 허공
제2부
이승의 일 | 꿈속 경주(競走) | 하나 목숨 | 사랑과 증오 | 웃음치료 | 개꿈을 품다 | 허접쓰레기 | 간사(奸邪) | 좁쌀영감 | 내 지인(知人) | 자식 작목반 | 집에 가기 | 결장암 수술대 위의 홍매(紅梅) | 건강을 위하여 | 달리도(達里島) 칠게장 | 복 많았네
제3부
스승 | 나는 나쁜 인간이 좋다 | 나이아가라를 그리며 | 집게의 집 | 차마고도 | 가젤의 낙원 | 개 같은 시 | 낚시세상 | 봄 걱정 | 택배 | 자아실현 | 국립묘지에서 | 시소 | 소리 질러요 | 속삭임 | 길을 잃고 헤매었던 이
제4부
장시 혁명본색
해설: 경험시와 역설_구모룡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