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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2년 9월 11일 주일 오전 예배
사도행전 설교
성경낭독 : 렘 4:11-12, 22-28; 눅 15:1-10
본문 : 행 13:4-12
제목 : “선교지에서의 첫 대결”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23편 1,2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89편 13,14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30편 1,3,6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68편 1,2,3
성찬식 찬송 – 시 65편 5,6 (고정)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선교지에서의 첫 대결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떠나 첫 번째 전도여행에 오릅니다.
이들의 첫 행로는 24킬로미터 쯤 떨어진 항구인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약 100킬로미터 쯤 떨어진 섬인 ‘키프로스’를 향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키프로스’ 섬은 우리 성경에는 ‘구브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이 구브로 섬의 동쪽 해안에 있는 ‘살라미’라는 상업도시에 도착했고, 거기에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에(5절), 다음으로는 섬 반대편인 남서쪽에 있었던 ‘바보’(‘바보’는 오늘날 읽는 방식으로는 ‘파포스’입니다)라는 곳으로 여행했습니다(6절). 바보는 당시 정부 청사가 있었던 행정도시였습니다.
살라미에서 바보까지는 약 180킬로미터 정도 거리가 됩니다. 그리고 6절에서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빠르게 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나는 마을마다 복음 전하는 사역을 하면서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여정을 감안하면, 하루에 여행자가 25-30킬로미터 정도를 걷는다고 가정하고, 또 군데 군데 마을들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적어도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는 걸리는 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에서 들었던 대로 바나바가 구브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4:36), 왜 이 전도 여행의 첫 번째 행선지가 구브로였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단지 4절은 이들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로가 전적으로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된 것이라면, 추측컨대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여기 구브로에
1) ‘이 사도들을 통해서 구원받아야할 어떤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거나’,
2) 아니면 ‘이 구브로에서의 사역이 교회 역사에, 그리고 사도행전 성경에 꼭 기록되어야만 하는 중요한 일들’ 중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이리로 안내하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둘이 모두 이 ‘바보’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서 여기 구원받아야 할 사람을 건지셨고, 동시에 여기에는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자 할 때 알려져야 할 중요한 사실도 드러나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사건을 함께 살펴보도록 합시다.
거짓 선지자 바예수
바나바와 바울이 바보에 이르렀을 때, 성경은 다른 모든 진술을 생략하고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났다”(6절)라고 쓰는 것을 최우선에다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바보에서 일어날 일의 핵심이 이 사람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연히 이 사람과 관련된 사건에서 하나님이 보이시려고 하는 중요한 주제가 드러나게 됩니다.
“바예수”는 누구일까?
오늘 본문에서 이 “바예수”라는 사람은 이름 혹은 직함으로 다양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1) 그의 이름은 “바예수”, 곧 “예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을 리가 없으니 여기에서의 예수는 ‘여호수아’를 의미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러니까 “바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의 아들”이거나, 혹은 여호수아가 ‘구원’을 나타내는 말이니까 “구원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2) 그리고 6절은 이 사람을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죠. 이름이 “여호수아의 아들”인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기가 더 어려울 것입니다.
어쨌거나 오늘 말씀 5절에 보면 살라미에 이미 “유대인의 여러 회당”(헬라어에서 복수형이어서 “회당들”입니다)이 있었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 생각해 보자면, 이 섬 전체에서가 아니라 살라미에만 이미 유대인들의 회당이 여럿 있었다고 하니까, 이것을 구브로 섬 전체로 확장해보면, 아마도 섬 전체에 유대인들이 꽤 살고 있었을테고, 또 이미 회당을 세워서 거기 모일 정도로 나름의 공동체들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구브로 섬이 가로로 약 223km, 세로로 약 96km의 섬입니다. 제주도가 가로 73km, 세로 31km인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큰 섬입니다.
즉 이 “유대인 바예수”를 이해할 때 그 배경으로 ‘유대인’과 ‘유대인들의 회당’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3) 그런데 그는 “거짓 선지자” 혹은 “박수”라고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6절에서 이 두 호칭이 나오고 또 8절을 보시면, 거기에는 “이 박수 엘루마는”이라고 하면서 괄호가 되어서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곧 바예수를 생각할 때는 그가 ‘유대인’일 뿐만 아니라 ‘선지자’, 곧 ‘계시와 관련된 사람’이라는 점도 유념해야 합니다. 유대인 바예수는 하나님의 말씀과 결부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굳이 “거짓 선지자”라고 부른 이유는 아마도 그가 ‘당시 유대교에서 공식적으로는 금하고 있었던 마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당시 유대교의 랍비들은 ‘마술’을 금했는데, 실제로는 비공식적으로 마술을 행하는 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가끔 나옵니다. 신학사전에 나오는 “박수”, 곧 ‘마고스’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마고스는 일종의 ‘마술사’를 의미한다.
마기승은 원래 바사 제국 하에서 승려가 되었던 메대 사람들이다......이들은 바예수처럼 마술을 업으로 삼는 누구에게든 적용되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는 마고스가 ‘거짓 선지자’와 병행되어 있다. 그래서 아마도 이 구절에서 이 단어는‘하나님의 이름을 마술적으로 사용하려 시도했을지도 모르는 가정 철학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는 아마 유대교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마술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식적으로 유대의 회당 같은 곳에서 활동할 수는 없었겠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마술의 도구로 사용하는’ 유대교를 베이스로 두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7절에서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다”라고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그는 총독의 측근이었습니다.
7절 말씀에 이 총독이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했는데, 오늘날에는 소위 ‘마술사’라고 불리는 사람, 우리 정서로 치자면 ‘무당’이나 ‘점술가’와 같은 사람을 정치인이 의사결정을 위하여 가까이 두는 일을 두고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하는 이가 아무도 없겠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보자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고대 세계는 중요한 결정을 위하여 신탁을 의지하는 것이 매우 상식적인 일이고, 그가 바예수의 어떤 점에 이끌렸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성경이 이 상황을 두고 “총독 서기오 바울은 거짓 선지자에게 이끌릴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라고 하지 않고 거꾸로 그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무지몽매했기 때문에 거짓 종교에 이끌린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바예수가 “거짓 선지자”였을지 몰라도, 정치인의 입장에서 행정 도시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바예수는 총독에게 크게 도움이 될 정도로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바예수는 자기가 원했던 권력이나 영향력을 유대교의 회당 안에서는 이루지 못하였으나 정치인과의 연결을 통해서 이루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충돌!
바로 이 바예수와 바나바/바울이 만나게 되는 일은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했기 때문”(7절)입니다. 그리고 8절을 보시면, 바로 이 대목에서 이 바예수를 “박수 엘루마”라고 부르면서, 그가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을 썼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바예수는 총독이 믿지 못하게 막았을까요?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만,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면, 바예수의 입장에서는 바나바와 바울의 등장이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바보는 유명한 여신, 곧 ‘파피아’라고 불리는, 그리스의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되는 여신 숭배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총독 서기오 바울은 ‘파피아를 섬기는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로부터 사람들을 뽑아서 내각에 앉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바예수가 이 자리를 차지한 것은, 어찌됐건 간에 그가 총독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다른 종교들로부터 접한 사람이 아니라 정작 유대교와 같은 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야웨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총독에게 접근했을 때, 그로서는 상당한 위협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선지자로서의 어떤 지위’ 같은 것이, 제대로 된 야웨의 말씀을 가진 이들로부터 공격당하면 일거에 모두 무너져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바예수는 총독이 바나바와 바울의 전하는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막는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대결 – 징벌 – 믿음
이제 이러한 정황 속에서, 기독교 선교사였던 바나바와 바울에 대항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한 번 지켜보도록 합시다. 이것을 살피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울과 바예수의 대결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해 봅시다. 3구분은
대결 – 징벌 – 믿음
의 구도입니다.
9절과 10절에서 바울과 바예수는 ‘대결’하고,
11절에 바예수에 대한 ‘징벌’이 나타나고,
12절에 이를 보고 그 결과로서 총독이 ‘믿게 된 것’이 나타납니다.
1. 대결
1)
먼저 대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9절에서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이전 설교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사도행전적 교회의 건설에 있어 ‘성령님’의 등장은 압도적입니다. 우리는 1차 전도여행의 시작에서부터 “성령님께서 지시하셔서” 되었다는 것을 2절에서 보았고, 이 전도여행의 행로를 지시하시는 것도 4절에서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교회의 건설과 성령님의 임재가 일치되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듯, 새 시대의 교회의 주도권은 항상 ‘성령님’께서 쥐고 계심을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바울이 말을 시작할 때 여기 “성령이 충만하였다”라는 말씀이 덧붙여진 것은 ‘권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죠.
“야웨 하나님께서는 유대교나 혹은 여기에서 파생된 어떤 계시종교(바예수가 ‘선지자’였던 것을 주목)의 편에서 말씀하시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 새로 생긴 신앙, 곧 기독교의 편에서 말씀하신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말한 것은, 그가 등에 업고 있는 권위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지지’를 받으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외적으로는 선지자라 불리었던 바예수와 전혀 다릅니다. 바예수는 명색이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가 동일하게 야웨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 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지를 받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합의 시대에 둘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거짓 선지자였던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서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왕상 22:11)고 하였고, 참 선지자 미가야는 “여호와의 보좌 앞에 하늘의 만군이 서 있을 때”(19절) 여호와께서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20절)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미가야의 말을 듣고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여기 성령님이 나옵니다) 나를 떠나 언제 너한테 말씀하더냐?”(24절)라고 했지만, 실제로 아합은 이 전쟁에서 전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의 입에 권위를 주셨는지를 현저하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비슷하게, 우리는 여기 이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문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예수 중 누구를 지지하고 계신지, 신흥 종교인 기독교와 옛 종교인 유대교나 그로부터 파생한 종교들 중 어느 종교를 지지하고 계신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2)
그리고 여기 ‘잠재적으로’ 나타나 있는 점도 같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중에 계셨을 때, 예수님의 비난을 주로 받았던 바리새인들은 다른 어떤 점보다도 그들이 ‘이익을 위하여 종교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 책망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저 유명한 ‘팔복’에 상응하는 ‘팔화’가 등장하는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님께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한다”(마 23:16)고 비판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은 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23절)고도 하시고,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25절)고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들을 두고 주님께서는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13절)고 정리하셨습니다.
곧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의 기득권’을 위하여 종교를 사용하는 이들을 ‘거짓 종교’라고 규정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유대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를 잘 압니다.
그들이 구주를 거역한 주된 이유는 ‘그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입니다! 곧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이것인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으로 인한 이익’이 우선 되는 종교, 그것이 주로 거짓 종교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는 ‘선정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문자적으로 ‘종교’를 사용하나 ‘권력에 도착된’ 인물의 대표자로 선정된 셈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연유로 거기 총독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들어갔는지 몰라도, 그가 가진 것은 ‘권력’이었습니다. 유대교라는 종교를 사용하여 ‘권력’을 쥐고 있고, 또 그 권력에 위해가 가해질 것이 우려되자 ‘하나님의 사자들’을 대적하여 갖은 방법으로 “총독이 믿지 못하게 힘쓴”(8절) 바예수야말로, 과거 유대교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가졌던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종교는 언제나 빌립보서 3장 19절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사도 바울은 이 말씀에서(19절) “자기의 배를 신으로 삼는 자들”을 바로 그 앞절(18절)에서 “그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빌 3:18)고 하였습니다. 즉 여기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는 거짓 종교가 가진 ‘권력 도착적 인물’로 의도적으로 선별된 인물입니다.
3)
따라서 바울의 입으로부터 쏟아지는 저주의 말들은 ‘매우 종교적’입니다.
이 저주의 말들은 절대 ‘그냥 기분이 나빠서’ 쏟아내는 맹목적인 저주들이 아닙니다.
내용을 잘 보십시오.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
“궤계”는 ‘속이는 것’이고, “악행”은 말 그대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저주는 바예수가 이전에 어떤 일들을 하면서 살아왔을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바울이 하는 말이라기에는 너무 책임 없어 보입니다. 아마 바예수 입장에서는
“아니, 당신이 나를 언제 봤다고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하는거냐?”
라고 황당해했을 법합니다.
하지만 이 저주는 ‘진지하게 고려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기분 나빠서 아무거나 막 상대방한테 공격적인 말을 아무거나 한 것이 아니라, 바예수가 행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진리’, 곧 바울이 조금 전에 “성령이 충만하여” 말했다고 한 것과 정반대되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을 하는 참 선지자인 바울과는 달리, 바예수는 ‘인간의 말’, ‘거짓의 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저주한 것입니다.
즉, 이 저주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의 편인지’, 곧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누가 업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입으로서’ 말하고 있는데, 가짜 선지자였던 바예수는 이 저주에서 드러나듯 ‘선지자’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사실은 거짓만 말하는 자인 것입니다. 정확히 성령으로 말하는 사도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자식”이나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자”라는 저주도 역시 마찬가지의 이야기입니다.
저주의 핵심은 역시 ‘하나님의 권위’를 가졌는지, ‘악의 편에 있는지’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바울의 입에 계십니다. 하지만 바예수는 “마귀의 자식”, 곧 이 말은 ‘디아볼로스의 아들’인데, ‘디아볼로스’는 “마귀”일수도 있지만, ‘중상자’, ‘고소자’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중상모략하는 자’죠. 이 역시 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가 ‘선지자’였다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선지자로 불렸지만 실은 거짓을 말하는 자였던 것이죠. 바울은 성령님을 통하여 말씀하시지만, 바예수는 “중상모략”하거나 “주의 길을 굽게” 합니다. 바울의 저주는 바예수가 ‘거짓’ 선지자임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주제로 행해짐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어느 편에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2. 징벌
자, 이제 징벌로 넘어가보도록 합시다.
11절에 보시면 이 바예수에게 주어진 징벌은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어서 네가 소경이 되어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라는 징벌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예수가 “즉시” 이 징벌대로 받아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들은 말씀들을 잘 이해했다면, 바예수가 받은 형벌 또한 앞서 말해왔던 것과 같은 맥락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실 것입니다.
즉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면서, 이제 진짜 야웨 하나님께서 어느 편에 계신지 그 권위를 인정해 준 기독교의 사도, 선교사였던 바울”에 반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유대교나 유대교로부터 파생된 종교의 선지자인 바예수의 대결, 곧 이 대결이 그야말로 ‘선지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였다면, 그가 받은 형벌 또한 그와 관련된 것이었음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물어보면 금방 대답이 나옵니다.
“왜 바예수는 특별히 소경이 되는 벌을 받았을까요?”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 전체 주제와 관련된 사실을 곧바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눈이 먼 예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크게 세 가지 예를 생각해 봅시다.
1) 첫째는 구약 성경에서 애굽에 내려졌던 ‘흑암’입니다.
이 징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이에게’ 거국적으로 임한 어둠으로, ‘징벌로서’ 어둠이 내린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가장 처음의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초로 삼는다면 이후의 예들도 다 여기에 포함되거나 연결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둘째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소경을 고쳐주신 후, ‘진짜 소경’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셨는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 9:3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육체적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은 더 본질적인 소경 됨, 더 본질적인 어둠을 보여주기 위한 방편에 불과합니다. 진짜 소경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진짜 어둠이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인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애굽의 흑암’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어둠에 덮입니다.
3) 나머지 셋째는 바울 자신이 당했던 소경 됨입니다.
이것은 본문의 연관성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같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고, 그 등장 인물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고, 따라서 바예수에게 소경 됨이 임했을 때 바울은 즉시 ‘자기 자신의 일’을 떠올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소경 됨도 같은 것을 보여줍니다. 왜 그가 소경이 되었습니까? 애굽의 흑암이나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육체적으로는 눈을 뜨고 있었으나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당했던 소경 됨은 ‘본질적 소경’, ‘실제적 소경’이었던 그에게, 하나님께서 ‘육체적 체험’을 안겨주신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이 징벌의 예를 살펴보면, 바예수에게 임한 징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가 분명해집니다.
1) 우리가 첫째 주제, 곧 ‘대결’의 주제에서는 바울에게 임했던 성령 충만과 바예수에게 했던 저주의 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곧 ‘하나님께서 이제 누구 편에 계시는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면,
2) 이제 두 번째 주제, 곧 징벌에 있어서는 이 징벌의 성격이 보여주는 바에 있어서 첫 번째 주제와 연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눈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영적 어둠’, 곧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징벌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항거한 것에 대한 징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바예수에게 임한 징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전도 여행을 떠나 유대교를 만나고, 또 유대교에서 파생된 선지자를 만나고, 또 하나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워가는 이 과정이 ‘하나님이 누구의 편에 계신지’, 또 ‘반면 하나님은 누구를 징계하고 계신지’, 또 그 징계의 성격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하여 새로이 교회를 세우고 계시고, 원래는 계시종교였던 유대교는 이제 계시종교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3. 믿음
마지막 셋째 주제인 믿음, 곧 12절에 나타나 있는 믿음은 일종의 ‘후렴’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역사가, 성령님의 임하심이 나타났을 때마다, 거기 믿는 이들이 결과적으로 언급된 많은 본문들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 12절의 말씀은 일종의 ‘확증’으로서, 아멘! 하고 도장을 찍는 것,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들을 확인시켜 주는 것, 그런 일종의 ‘후렴’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설교 시간의 대부분을 말씀의 의미를 찾는 데에 다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일의 전반을 모두 듣고 난 후에 알게 되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교회가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서 세계로 확장되어 가는 첫 시점에 서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처음 파송되었고, 그 중에서도 이 1차 전도여행의 첫 행선지가 바로 여기 ‘살라미’와 ‘바보’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제 13장부터 14장 끝까지 계속되는 1차 전도여행의 여정을 보시게 되면 바울과 바나바의 여행이 크게 세 부분 정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아시게 될 것인데(구브로 섬 -> 비시디아 안디옥 ->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이 세 부분의 행선지들마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주제는 ‘유대인들과의 전쟁’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핀 ‘바보’에서의 ‘바예수’와의 싸움은 이 일들의 전초전에 해당하는 것임을, 13장의 나머지 부분과 14장을 다 읽어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무엇인가요?
물론 우리는 여기에서 ‘완고한 유대인’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으나 회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그리스도께서 새로이 설립하신 새 언약의 교회조차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죽이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저 유대인들의 완고함! 그것을 물론 발견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들은 그 이상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시작인 오늘 본문의 ‘바예수’에게로부터 더더욱 분명하게 이 주제를 발견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 말씀 전체의 숙고를 통해서 계속 알게되는 바로 이 사실이지요! 곧
“야웨 신앙이란, 계시 신앙이고, 계시 신앙이란 성령님께로 말미암으며,
바로 그런데, 이 계시의 말씀의 주체이신 성령님께서는
더 이상은 저기 계시지 아니하시고 여기에 계신다!”
이것이 우리가 사도와 바예수와의 싸움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 시대의 교회도 교회입니다. 옛 언약 시대의 교회도 교회이구요.
그런데 과거에나 지금에나,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은 ‘그럴듯한 외형’을 통하여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당을 형성하고, 많은 사람이 모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라고 불러주는 곳에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디에 있나요? 얼마 전에 오후 설교를 통해서 루터의 정의도, 칼빈의 정의도 배우셨지만, 교회는 명백하게 ‘말씀’과 ‘성례’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는, 말씀과 성례의 주인이신 ‘성령님께서’ 계실 때, 거기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1) 유대교는 말씀의 종교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유대교 선지자가 기독교의 사도들을 만났을 때, 기독교의 사도들의 입에는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지만, 유대교 선지자들에게는 “궤계와 악행”, “디아볼로스, 곧 중상모략의 자식”,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말씀” 밖에는 없었습니다.
2) 기독교의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또 ‘성령님의 권능’으로, 참으로 소경된 자에게 그 현상의 현시로서 현실적 어둠을 징벌로 내렸습니다만, 유대교의 선지자는 자신이 어둠 속에 있음을 확인했을 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3) 유대교는 예수님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여기 새 시대의 교회의 사도들이 본토를 떠나 구브로 섬에 와 있는 이 지경까지도, 끊임없이 ‘돈의 종교’, ‘권력과 결탁한 종교’, ‘세속에 찌든 종교’였습니다. 기독교의 사도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을 가지고 왔을 때, 정작 유대교의 선지자가 한 일은 권력의 힘을 빌어 그것을 막으려는 것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계를 향하여 뻗어나가기를 시작하는 이 교회가 거짓된 것들과 싸우는 이 모습을 보면서, 교회가 어떠해야 할지를 깨닫지 않습니까?
1) 우리는 진실로 계시종교여야합니다. 교회의 입술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득해야 합니다.
2) 그리고 우리는 ‘어둠 속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빛 속에’ 있습니다. 어둠이 무엇이며 빛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알려지심 속에 함께 거하는 것만이 빛이며, 그 바깥은 어둠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속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어둠입니다.
3) 따라서 참 교회는 ‘권력’이나 ‘돈’ 같은 것이 정체성일 수 없습니다. 유대교가 그랬듯이, 정권과 결탁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은 ‘세상 종교’들이 하는 짓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교, 성령님의 권능의 종교는 그런 일들을 혐오합니다.
정 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주중 뉴스에 전광훈 씨의 사랑제일교회가 500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기사를 쓴 ‘세상 사람’인 기자는 이것을 두고 “알박기를 하면 결국에 큰 돈을 얻어낼 수 있다는 대단히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평했습니다. 원래 처음 시에서 제시했던 금액은 80억이었고, 법원이 조정안으로 내놓은 것이 150억이었는데, 여섯 번이나 명도 소송을 집행했으나 성도들의 물리력 동원으로 모두 무산되고 결국 500억을 받아냈다는 것입니다. 건설 정책 연구원의 말을 들어보니 “앞으로는 종교시설처럼 원활한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요소가 있으면 처음부터 사업지에서 배제하겠다”고 합니다. 교회가 이런 꼴을 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주중에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습니다.
“500억을 손에 쥐고 세습까지 성공했으니 그야말로 성공했다. 하지만 목사 주제에 하나님도, 최후에 받을 형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새언약 시대에 세우신 교회는 ‘계시를 말하는 교회’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회’입니다. 유대교가 배제되고 망한 것은 그들이 이와는 정반대로 행했기 때문인데, 오늘날 교회들이 그런 방향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전도여행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발견하게 되는 이 교회의 성격에 대해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