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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방문 계획
롬 15:22-29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롬 15:22-29 /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 이러한 이유로 나는 번번이 여러분을 방문하지 못하였습니다. 23) 그러나 이제는 여기서 해야 할 일도 끝나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보람도 있어 곧 여러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4) 지금 나는 서바나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그 도중에 로마에 들를 생각입니다. 그곳에서 잠시 여러분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서바나로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그러나 지금은 우선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구제금을 전해 주러 가야 합니다. 26)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형제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형제들을 위해 헌금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27) 그들은 평소부터 예루살렘의 형제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던 터라 이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에서 전해 받아 그 놀라운 영적 복을 누렸으므로 다만 얼마라도 물질적인 도움을 주어 보답할 수 있었으면 하고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8) 그러므로 나는 이 헌금을 전해주어 그들의 선한 일을 이루어 주는 즉시로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려고 합니다. 29)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는 주께서 주신 충만한 복을 함께 갖고 가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마지막 선교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던 바울은 로마교회가 서바나의 선교 기지로서 그 역할을 감당해 주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여러 번 막혔더니(22-24) 바울은 로마에 가서 일하고 싶은 계획이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로마행의 소망을 품어왔습니다. 이제 복음 전파에 대한 그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를 지나 서바나까지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땅에 묻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은 열정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곳에 가지 못해서, 복음을 꼭 들어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입니다.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25-27) 바울은 로마에 들러서 서바나로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 갈 계획을 밝힙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이방인 교회가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방인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영적인 빚을 진 마음으로 물질을 모았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어 주는 감동적인 수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준비된 마음입니다.
서바나로 가리라(28-29) 복음 전파에 대한 그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를 지나 서바나까지 향하고 있습니다. 서바나는 지금의 스페인으로 요나서에 나오는 다시스가 위치한 곳입니다. 시편에서 다시스는 땅 끝으로 묘사됩니다(시 72:8-10). 이사야서에서는 다시스를 하나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으로 언급됩니다(사 66:18-19). 바울은 서바나, 즉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곳이 세상의 끝이었기 때문입니다(행 1:8).
적용: 바울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이 사역은 바울 시대에 완성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우리의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역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도울 수 있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수 있습니다. 넓은 자가 좁은 자를 안을 수 있습니다. 깊은 자가 얕은 자를 품을 수 있습니다. 사이즈와 힘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실과 체력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좋아진다는 것은 곧 믿음의 그릇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아져서 다른 사람을 안고 품을 수 있다면, 내가 받은 복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길 수 있다면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15: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 로마 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았지만, 1:13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여러 차례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로마를 방문하는 것이 늦어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방금 서술한(20, 21절) 바울 사도 자신의 선교 원칙에 뿌리를 둔 장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즉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독특한 사역 방식이 작용한 것이다(Meyer). (2) 복음 전도 사역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지경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워야 할 일이 쉴사이 없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또한 장애 요소가 된 것이다.사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 곳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그의 사역의 원칙으로 삼았기에 연달아 진행되는 복음 전파와 교회를 세우는 일은 바울의 로마행을 본의 아니게 가로막은 외적인 장애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Harrison). 한편 '막혔더니'로 번역된 '에네콰토멘'(* )은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 수동태형으로서 외적인 장애요소가 계속해서 가로막았음을 보여 준다. 즉, 로마 방문 계획이 번번이 성취되지 못한 것이 바울 자신의 고의적인 뜻이 아니었음을 나타내 준다.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 '이제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뉘니'(* )는 일반적으로 '지금', '현재'라는 의미로 쓰이나 바울 서신에서는 새로운 시대나 상황의 전개를 분명하게 할 때에 자주 쓰인다(3:21;5:11;6:22;8:1). 여기서는 특히 상황의 전개를 분명하게 할 때에 자주 쓰인다(3:21;5:11;6:22;8:1). 여기서는 특히 상황의 전개에 관하여 쓰인 것으로 앞절(22절)의 상황과 대조되는 다른 경우가 펼쳐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지방'(* , 토이스 클리마시 투토이스)은 복수이므로 '지방들'을 말하며 바울의 현재 선교하는 지역들을 의미한다. 즉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까지 지중해 동부 지역의 도시들을 가리키며 대체적으로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아, 빌립보, 다메섹 등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곳을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19절). 이제 더 이상 그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할 새로운 곳이 없었기 때문에 좀더 새로운 지역에 눈을 돌리고자 하였다.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 '여러 해 전부터'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 폴론 에톤'(* )은 '상당히 오래 전의 해부터'라고 직역할 수 있다(Robertson). 바울의 서바나와 로마 방문 계획은 갑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계획된 것이었다.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대개 로마 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바울의 서바나에 대한 전도 계획은 그가 지중해 동부 지역에 전도 사역을 치중하였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서바나는 서쪽 변방으로 땅끝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곳에 복음을 전파하기에 앞서 그가 로마에 들르기로 작정했던 것은 로마가 당시 세계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바나 선교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로마 교회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단순히 선교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서만은 아님을 1:11-13에서 보여준다. 즉 선교 계획에 동참하게 하기 전에 저들의 믿음을 확인하고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저희를 견고케 하며, 영적인 사귐을 통해 피차 유익을 받고 안위케하려는 목적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위에서 '원'(* , 에피포디안)이란 '간절한 열망'으로서 본절에서는 서바나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하지 않고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라 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삭제되어 있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서바나'(* , 스파니안)가 삽입되어 있다. 즉 '서바나로 지나가는'(* , 호스 안 포류오 마이 에이스 텐 스파니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바나는 지중해 연안의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 스페인 지역이며 당시 그곳은 로마의 영토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중에 지중해 전지역에 걸쳐 전도하였으나 아직 서바나 지역은 전도하지 못했다. 그는 원래부터 서바나에 대한 선교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교회 내에서의 끊임없는 분쟁과 위기와 바쁜 전도 일정들 때문에 그곳에 전도를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2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어 그 일을 위해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Ernst Kasemann). 여기서 '지나가는 길에'(* , 디아포류오메노스)란 말은 '통과하는 길에'란 뜻으로 로마에서 오래 머물지 않겠다는 바울의 여행 계획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 교회를 향한 무성의한 모습이 아니다. 서바나로 가는 길에 잠깐 들려 간다고한 것은 앞절(20절)에서 밝힌 것처럼 '남의 터위에 건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쓴다'는 바울 사도의선교 원칙에 근거한 것이고 또한 될 수 있는대로 빨리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망과 전도 계획 때문인 것이지 결코 로마 교회를 무성의하게 취급한 것이 아니다.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사도의 관심과 사랑을 생각할진대 더욱 그러하다(1:11-13).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 바울이 서바나를 향한 선교 계획의 중간 기착지로서 로마를 방문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너희를 보고(* , 데아사스다이 휘마스). 여기서 '보고'라고 번역된 '데아사스다이'(* )는 단순 과거행으로서 '본다'는 동작과 행위를 강조한다. 즉 그토록 보기 원했던 로마 교회 성도들을 보는 것이 바울의 방문 이유 중에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바울 사도가 저들의 얼굴 보기를 사모한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한 형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2)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 휘몬 프로톤). 여기서 보듯이 헬라어 성경에는 '교제하여'라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원문 그대로 해석한다면 '먼저 너희의'라는 해석이 되지만 휘몬(* )이란 말이 제2인칭 복수 제 2격이란 점과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상호 관계를 생각할 때 한글 개역 성경에서 '교제하여'란 해석을 덧붙인 것은 행간의 의미를 살려주는 무난한 의역이라 생각된다. 이 어구를 의역한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여러분을 만나'(새 번역), '여러분을 만나 함께 지내면서'(공동번역), '먼저 로마에 있는 여러분을 방문하여 교제를 가진 후에'(현대인의 성경).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교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베푼 구원의 은혜를 들으면서 저들의 믿음을 확인하고 또한 사도 자신이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교 계획(서바나를 향한)을 알려주어 그들도 참여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차 안위를 받는 성격의 사귐이었음을 알 수 있다(1:11-13). 이로써 처음하는 그들이었지만 한 믿음 안에서 한 하나님 아버지의 권속인 형제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 , 에안...아포 메루스 엠플레스도). '약간'(* , 아포 메루스)이란 말은 '얼마동안', '잠시나마'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만족을 받은 후에'(* .. , 에안...엠플레스도)란 말은 '충분한 기쁨을 누린다'는 뜻이다. 즉 오랫동안 사모했던 교인들의 얼굴을 직접 보고 교제를 나누는 사귐을 통해서 저들이 진실로 진리위에 굳게 서 있는 것을 확인한 사역자의 기쁨을 의미하며 또한 바울의 선교 계획에 참여하겠다는 저들의 믿음을 확인한 후에 오는 사역자의 즐거움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도 바
과 지원을 통해서 새로운 선교지로 파송을 받아 복음을 증거해왔다(행 13:1-4;14:26;15:40). 그는 이러한 체험을 상기하면서 이제 마지막이 될지 모를 서바나 선교 계획에 로마 교회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기도, 재정적인 도움, 함께 복음 전파에 수고해 줄 조력자 등의 도움을 받아 로마 교회 이름으로 파송을 받아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서쪽 변방까지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 보건대 바울의 로마 체류 성경이 잠정적이고 제한적인 것이며 또한 그의 방문 목적이 로마 교회와의 교제의 협력가가 지원을 힘입으려 함에 더 강조점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 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과 각 교회들과의 유대 관계가 굉장히 밀접했으며, 바울의 사역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통한 선교 사역이었다는 점이다(J. Murray). 그리고 '바람이라'를 가리키는 '엘피조'(* )란 말은 '내가 바람이라'는 뜻으로 단순히 서바나에 파송받는 것뿐 아니라 본절 전체의 내용을 사도가 기대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왜냐하면 '엘피조'가 '가르'(* , '이는') 이하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 바울은 23절에 사용한 역접을 나타내는 접속사 '그러나 이제는'(* , 뉘니 데)을 반복 사용하여 서바나 선교 계획의 중간 경유지로서 로마를 바로 가야하지만 도중에 예루살렘을 거쳐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그렇게 가기를 소원하였던 로마 교회의 방문을 또 뒤로 미룬 채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母) 교회로서 교회 지도자들 즉 사도들이 있는 교회이지만 지금은 핍박과 어려움 중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위급한 교회를 모든 교회가 협력하여 도와줄 의무가 있었다. 이것은 모교회에 대해 이방 교회가 지녀야 할 당연한 태도이며 그들이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과 기타 이방 교회의 성도들과의 화합과 일치였다. 예루살렘 이외의 모든 교회는 대부분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대 기독교들과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 사이에는 적지 않은 충돌과 마찰이 있었는데 유대 기독교 신자들은 이방인 기독교 개종자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일부는 이방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구약의 규례들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무리들도 있었다(행 15:1, 5). 이러한 형편에서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예루살렘과 이방 교회 간의 관계가 극복되어 견고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리라 생각했었다. 이전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교인들을 돌보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바나바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로부터 헌금을 거두어서 도와준 적이 있었다(행 11:30;12:25). 그리고 바울은 갈 2:10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줄 것을 이방인 교회에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울의 로마 교회의 방문이 다시 한번 불가피하게 지체되었고, 이와 같은 사정을 로마 교회에 알림으로 그들로 하여금 양해를 구하고 있으며 또한 그의 이러한 모범을 따르도록 독려하고 있다(John Calvin).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이러한 구제의 행동을 '성도를 섬기는 일'(* , 디아코논 토이스 하기오이스)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를 섬기는 일'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의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
=====15:26
이는...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고 온 헌금은 고린도, 갈라디아, 마게도냐 등 많은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힘껏 헌금한 것이었다(고전 16:1-3;고후 8, 9장);갈 2:10). 그런데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만 언급한 것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쓸 때 아가야에 있었고 최근에 마게도니아를 지나왔기 때문이다(행 18:12;20:1, 2). 이것은 본 서신이 고린도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아가야는 헬라 명칭 '아카이아'(* )로 고린도의 수도였다. 그들은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헌금을 억지로 하거나 마지 못해서 하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고후 9:5-15) 기쁘게 사랑의 선물을 바울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다. 위에서 '얼마를 동정'의 헬라어는 '코이노니안 티나'(* )인데 '코이노니안'(* )은 일반적으로 '교제', '친교'의 의미이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얼마의 친교'를 세웠다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실제로 공동 번역에서는 '교우로서 정을 나누려고'라고 '친교'의 의미로써 번역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코이노니안'을 '친교'로 해석하기 보다는 '헌금'으로 해석하는 것이 좀더 무난할 듯하다.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 교회의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구제 헌금의 성격을 '자원하는 심령과 의무'라는 관점에서 규정하고 있다. '빚진 자'라고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레타이'(* )는 '오페일로'(* , '빚지다')의 목적 소유격으로 '의무를 가진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손해를 준 사람에게 아직 보상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이 용어를 1:14과 8:12에서도 사용하고 있는데, 자신을 가리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의미심장한 것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무한한 은혜에 대한 채무자적인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의 빚진 자로서 사랑의 봉사와 복음 증거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바울의 이와 같은 태도는 이방인들 또한 유대인들에게 가져야 할 태도이다. 이방인은 유대인에게 복음의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빚진 자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이스'(* )는 '영적인', '성령에 부합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로부터 이방 세계로 전파된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나셨으며 복음의 일차적인 대상 또한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그들의 영적 축복 곧 복음을 이방인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아직도 사단의 권세 아래, 죄악의 어두움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E.F. Harrison). 그런데 지금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유대 기독교 신자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행 10장;11:19-22;15:40, 41)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되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에게 빚진 자들이 된 것이다. 이 '빚'(* , 오페일로)은 상업적 빚의 의미가 아니라 은혜를 크게 입은 자에 대해 느끼는 의미로서 부채감(負債感)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방인 신자들이 그들의 '육신의 것'(* , 엔 토이스 사르키코이스) - 이 단어는 육신의 죄악된 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육신의 일상 생활에 속한 필요한 것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부유한 이방인 성도들이 물질로써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의미함(Robertson)-을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복음의 은혜를 갚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당연한 일인 것이다.
< 설 교 >
서바나를 향한 바울의 비전
로마서 15:20-29 / 김남수 목사
실패하는 사람은 늘 과거의 말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현재의 말을 합니다. 위대한 사람은 미래를 말합니다. 항상 과거에 묶여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현실에 묶여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고 말하고 꿈꾸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그는 내일을 바라보고 꿈꾸며 마음에 비젼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서반아를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서반아는 지금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스페인 - 그는 스페인을 늘 마음속에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이베리아라하고, 라틴어로 히스페니아, 영어로는 스페인이라고 하는, 우리말로 서반아라고 하는 서쪽, 유럽에서 맨 땅끝이라고 말하는 서쪽을 바라보고 항상 꿈꾸고 거기를 갈 꿈에 늘 불타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문명세계의 끝이었고, 구라파의 맨 마지막을 스페인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좀 다릅니다. 고린도 그리스에서 본다면 로마-그리스-스페인입니다. 그리고 영국, 구라파, 미국대륙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세계문화권의 중심이었고, 스페인이 그 끝이고, 그 넘어서 구라파는 해적떼들이 우글거리는 섬나라였을 뿐입니다. 스칸디나비아, 영국, 독일과 같은 번창한 문명국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에서 이 책을 쓰고 겐그리아에서 이 편지를 뵈뵈라고하는 집사님을 통해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부흥되고 열심있는 로마 교회에 이 편지를 전하면서 "내가 당신들을 서반아로 갈때에 당신들과 교제하고 약간의 유익을 받고 당신들의 후원을 받아서 저 서반아까지 선교를 가고 싶습니다"하고 개인적인 편지를 쓰게 되었던 내용입니다.
사실 15장 이전에는 교리와 실천이라고 하는 교리적인 문제와 교리를 받은 사람의 실천의 문제를 다 쓰고 난 다음에 15, 16장에는 거의 개인적인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불타는 꿈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누면서 서반아를 가고 싶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서바나를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가이사랴 감옥에서 고생을 하다가 미결수로, 죄수로 로마로 후송되어 로마 감옥에서 억눌린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반아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주석가들은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겨준 꿈을, 못다 이룬 꿈을, 그 후대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서반아를 그 마음속에 품고 기도할 제목을 두고 그는 순교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을 할 때 서반아를 향한 사도바울의 비젼은 과연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매일 성령께서 선교의 꿈과 환상을 주십니다. 성령은 선교의 영이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됩니다. 선교는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선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교를 날마다 불타는 열정과 꿈을 매일같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매일 주시는 성령의 은혜와 은사와 마음속에 불타는 환상을 무시하고 현실에 묶여서 사는 것입니다. 현실에 묶여 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매일 주시는 환상에 대해서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면 얘깃거리가 많아지고 할 일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시간에 비본질적인 것에 본질을 잃어버리고 비본질적인 것에 묶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바다를 건너 구라파의 맨끝이라고 하는 서반아로 가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일 주시는 성령의 꿈이 매일같이 무시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복음의 의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것에 빠졌기 때문에 저 이방인들을 무관심하고, 유대인들의 우월감에 빠져 있는 동안에 그 복음은 복음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돈케라는 선교사 출신의 유명한 부흥강사는 복음은 전파될 때에만 복음이다. 그것이 전달될때만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12명이 모였었는데 은혜 받고, 사도 바울이 목회를 하므로 큰 부흥이 일어났지만, 계시록에 보니 에베소 교회가 책망을 들었습니다 "너희가 첫 사랑을 버렸다" 은혜 받고 뜨거웠던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교회가 부흥되고 많은 사람이 모이고, 은혜 받고, 은사가 충만했지만 나중에 밖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들에게만 관심이 있을 때에 저들은 안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가운데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성령이 주신 은혜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결국 영적 침체에 들어가고 사랑이 없는 형식적인 그런 교회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선교의 본질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변질됩니다.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변질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못다 이룬 꿈을 남겨두고 간 꿈을 우리 마음속에 뜨거운 꿈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선교라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선교팀들이 짧은 기간동안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복음은 여기서 시작해서 순복음 뉴욕교회가 한 시대에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뉴욕복음화와 함께 세계를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못다 이룬 이 꿈을 우리 마음속에 지니고 남아프리카 끝까지, 카나다를 넘어 알라스카를 지나 중국과 인도까지 보이고 전 세계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이루어 질 곳, 하나님께서 우리시대에 맡긴 우리의 선교지인줄 믿습니다.
웨슬레는 세계는 우리의 교구다라고 말했든 것처럼 세계가 교구가 되어질 줄 믿습니다. 이번에 부흥회 하면서 보니 교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큽니다. 이제는 교회라는 개념을 가지고 선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교구가 한 나라씩을 맡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홀트 양자회에서 입양을 하듯이 최근에는 미전도종족을 입양하는 기관이 생겼습니다. 전 세계의 동일한 언어권에 한번도 선교사가 가보지 않은 복음전파하지 않은 선교부족 미전도종족이 15,000이나 된다고 합니다. 리스트를 만들어서 한 교회씩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마치 아이를 입양하듯이 한 종족을 입양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꿈을 우리 마음속에 계속해서 받아들였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실줄 믿습니다. 우리가 선교의 마음이 있으면 꿈이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선교를 갈 수 있습니다. 멀리 스페인을 가지 않아도 되고 히스페닉이 있는 곳 어디든지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우리가 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선교를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서 함께 있어주고, 한번 안아주고,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에게 신발을 신겨주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머지않아 그들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사도바울이 가졌던 거룩한 꿈의 열정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본질을 이해하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되는 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준비할 때에 하나님은 축복하시기로 결심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우리에게 넘치게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아프리카 선교, 중공 선교, 그리고 남미까지 어렵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마음을 아시고 우리에게 많이 축복 하실수록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로 마음 잡수시고 시작하신 줄 믿습니다. 시작일 뿐입니다. 여러분 가정과 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결심하시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축복하시지 않을 수가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고아 사업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에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선교하고, 앞으로도 우리 자체의 fact 비만에 걸려 교회가 변질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일을 계속 하려는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불타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선교팀이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강하게 믿음과 확신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10년 20년 이내에 하나님의 역사에 위대한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도장을 찍어 주셨습니다. 이 역사는 미국에서 시작해서 아르헨티나 그리고 땅끝까지...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편만할때까지" 하나님의 역사의 거대한 물결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그 사명을 받고 여러분이 뜨거운 마음으로 사도 바울의 꿈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 북극에서부터 시작해서 적도인 에콰도르에서 저 남극까지 티베트의 히말라야산 꼭대기에서 시작해서 남태평양의 폴리네이션스까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편만하고 우리가 받은 축복이 저들에게도 축복이 될 수 있는 영원한 복음의 전달자로 이 불타는 꿈이 사도 바울에게서 여러분 마음속에 전달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전의 사람
로마서 15:22-23 / 조상호 목사
EX) 찰리 패덕은 유명한 달리기 선수였습니다. 찰리 패덕이 어느 날 클리브랜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서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하는 중에 "바로 이 강당 안에 미래의 올림픽 챔피언이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연설이 끝난 후, 언제나 주변에서만 어슬렁거리는 아주 야위고 다리만 껑충한 흑인아이가 찰리 패덕에게 다가와 수줍어하며 말했습니다. "제가 미래의 어느 날엔가 최고의 달리기 선수가 될 수 있다면, 저는 그 일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찰리 패덕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네! 젊은이! 자네가 그것을 자네의 목표로 삼고 모든 것을 그 일에 쏟아 붓는다면, 분명 자네는 그렇게 될 수 있네." 그 흑인 아이는 찰리 패덕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열심히 달렸습니다. 드디어 1936년 뮌헨 올림픽에서 그는 세계 기록을 갱신하고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가 바로 제시 오웬즈라는 선수입니다. 제시 오웬즈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을 그를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날 껑충한 또 다른 한 흑인 소년이 사람들 틈을 헤치고 다가와 오웬즈에게 말했습니다. "저도 꼭 언젠가는 올림픽 출전 달리기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제시 오웬즈는 옛날을 생각하면서 그 소년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얘야, 큰 꿈을 가져라. 그리고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그것에 쏟아 부어라." 제시 오웬즈의 말을 들은 이 흑인 아이도 열심히 달렸습니다. 정확히 오웬즈의 말을 들은 지 12년 후, 1948년의 올림픽에서 그도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가 바로 헤리슨 달라드라는 선수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제시 오웬즈와 헤리슨 달라드처럼 여러분들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만한 꿈이 있습니까? 남은 인생동안 계속해서 달려갈 비전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도 아깝지 않은 그런 꿈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오늘날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는 비전 없이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려운 분들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먹고 살 돈은 있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할 빵이 있습니다. 집안에 돈도 있고, 냉장고에 빵도 있지만, 마음속에 꿈이 없습니다. 가슴속에 불타오르는 비전이 없습니다.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울타리 밖을 볼 생각도, 나갈 생각도 못하는 것이 오늘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다릅니다. 우리 기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비전의 종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안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꿈꾸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비전을 품은 사람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꿈의 그릇만큼, 비전의 크기만큼 역사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거룩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탁월한 비져너리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비전의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1) 목표를 세우라(Set Your Goal)
비전을 이루는 가장 첫번째 단계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 바울에게는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과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로마서 1장 13절과 15절 등을 보면, 그는 당시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를 향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불붙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가는 것이 바울의 1차 목표였습니다. 그 다음 그에게 2차 목표가 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바울은 지중해 동부지역인 서바나, 즉 지금의 스페인으로 가는 것을 2차 목표로 삼았습니다. 또 2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바울은 실현 가능한 로마를 공략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세웠습니다. 그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가지고 나아가는 허풍장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계를 밟아 가고자 했습니다. 그는 로마를 거쳐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땅 끝으로 여기던 서바나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장기적인 2차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서바나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 바로 주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말씀하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이루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비전의 사람, 바울에게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세계 복음화를 위해 로마를 전진기지로 정하고 그곳을 통해 당시에 땅 끝으로 여기던 서바나를 공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은 코메디언이나 개그맨이 잘합니다. 시장통의 약장수도 말은 잘합니다. 비전의 사람은 구체적인 각론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의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표는 믿음의 선언이요, 비전의 옷이기 때문입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목표설정입니다. 목표를 정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목표가 우리들을 이끌어 가는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목표는 온갖 어려움과 역경을 극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EX)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농촌에서 태어나 16세에 디트로이트로 가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이 세운 회사의 직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점점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가 한번은 에디슨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에디슨에게 한 가지만 질문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가솔린이 기계를 돌릴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들은 에디슨은 두말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포드는 에디슨의 이 한마디 대답에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자동차 엔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자동차 엔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3년이 지났으나 실패했습니다. 다시 5년,6년이 지났으나 또 실패했습니다. 7년,8년이 지나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13년만에 헨리 포드는 자동차 엔진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실패의 난관이 있다고 할지라도 목표를 이룰 때까지 좌절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바울에게는 세계 복음화라는 비전과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비전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매를 맞아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돌에 맞아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배가 파선을 당하여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비전으로 인하여 어떠한 난관에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나아갔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도 바울과 같은 비전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살맛 나게 하는 비전,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게 하는 비전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2) 최선을 다하라(Do your best)
목표를 세웠으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목표는 얼마든지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향해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비전의 사람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시대의 요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는 큰 꿈을 가졌지만, 현실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애굽으로 끌려갈 때, 어떻게 하면 도망갈까 궁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할 때도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살이하면서도 최선을 다하여 일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보디발 장군의 모든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가정총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 그는 옥중에서 억울하게 옥살이할 때도 어떻게 하면 쇠사슬을 벗어날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감옥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오늘날의 교도소장과 같은 전옥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옥에 있는 모든 죄수를 관리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입니다. EX) 미국의 베리학교는 유명한 학교라고 합니다. 그 학교를 창설한 사람이 마르다 베리 여사입니다. 베리 여사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농촌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어떻게 하든지 교육을 시키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리의 꿈은 꺼지지 않고 불탔으나 돈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기도 중에 당시 거부였던 헨리 포드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포드는 그녀에게 고작 한 다임,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해서 80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모욕과 멸시감을 느낀 나머지, 화를 내고 받은 돈을 팽개치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리여사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포드로부터 받은 한 다임을 가지고 가서 씨앗 한 봉지를 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정성껏 길렀습니다. 첫해에 작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것을 다 팔아 씨앗을 사서 점점 농사의 규모를 키워 나갔습니다. 여러 번 반복 끝에 드디어 그녀는 건물을 하나 세웠습니다. 그리고 헨리 포드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포드씨! 몇 해전에 주었던 한 다임으로 이루어 놓은 성과를 보십시오.건물 한 채가 지어졌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포드는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 보았습니다. 헨리 포드는 베리여사가 세워놓은 건물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100만불을 즉석에서 헌금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베리 학교는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80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크나큰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진정한 비전의 사람은 주어진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처해진 현실을 인정합니다. 비전의 사람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미래는 무시한 채, 현실만을 바라보는 현실주의자도 아닙니다. 비전의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처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로마를 거쳐서 서바나에 가고자하는 비전과 목표를 세웠지만, 그에게 놓여있는 현실은 암담 했습니다. 로마에 가기를 수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길이 막혔습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그가 비전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제자리에 주저 않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해 주의 일을 했습니다. 25절과 2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의 비전은 로마와 서바나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지만 그 길이 막히자, 그는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핍박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고린도와 갈라디아와 마게도니아 등 많은 이방인들이 드린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해외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었지만, 그 길이 막히자 그는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그는 처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해외선교의 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현실을 통하지 않고 미래가 오지 않습니다. 현실을 거쳐서 미래가 주어집니다. 찬란한 미래가 저절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EX) 지금은 고참가수가 되었지만, 가수 조용필씨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70년대 중반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통해 일약 정상급 가스로 발돋움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대마초를 피워 가수활동을 오랫동안 못하다가 겨우 80년에 해금되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가 <창 밖의 여자>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정상급 가수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창 밖의 여자를 모르면 간첩이었습니다.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의 20년이나 지났지만, 그의 인터뷰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가 창 밖의 여자를 부르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피를 목에서부터 토해내었다는 것입니다. 그 노래 중에 고음을 내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고음을 내기 위해서 대야에 피를 토하며 연습했다고 합니다. 또 일반적으로 가수들이 노래를 취입할 때 2~30번 정도 녹음을 하는데, 반해 조용필씨는 <창 밖의 여자>를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때는 무려 100번 이상을 계속해서 녹음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창 밖의 여자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류 가수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가수들 뒤에서 춤추는 댁밴서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관절이 다 상하도록 연습을 해야 댁댄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의사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과학자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최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도 바울과 같은 열심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듯이 사방이 꽉 막혀 있어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미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지금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3) 자신을 점검하라(Feed Back Yourself)
본문 25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 교회에서 드린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모교회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려고 했습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 교회에서 모은 구제 헌금을 직접 가져가지 않고, 그의 신실한 동역자들을 통해서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길은 멀고, 또 주위에 바울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그는 직접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바울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예루살렘 행을 감행하고 있습니까? 그는 예루살렘 모 교회에 자기의 선교사역을 보고함으로 하나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확증하기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영적인 점검과 새로운 영적 충만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휴가철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점검하지 않고 운전을 하다가, 큰 코 다칠 수도 있습니다. 엑셀레이터를 밟는다고 자동차가 무한정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엔진 오일도 점검하고, 라디에이터의 물도 점검하고, 타이어도 점검하고 브레이크도 점검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점검하여 수리해 주지 않으면 자동차가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에서 멈추어 버리기도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것도 좋지만, 때때로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뉴질랜드에서 6개월에 한번 씩 자동차를 점검하고 W.O.F(자동차 정비필증)를 받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점검하고 재충전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전의 사람, 사도 바울의 선교행적을 추적해 보면, 한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또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과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항상 베이스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베이스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점검과 새로운 충전을 위해서였습니다. 충전 없이 계속해서 일할 수 없습니다. 건전지를 계속해서 사용하면 방전되는 것처럼, 우리도 계속해서 나아가면 새로운 충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순복음교회에서는 매년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합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1년에 한번씩 모교회에 모여서 영적 재충전을 갖습니다. 그리고 민족과 열방을 그리스도 앞에 인도하기 위한 선교사명을 재확인합니다. 건강진단을 해서 선교사들의 건강상태를 점검해 줍니다. 여러 가지 목회자료와 사역자료들을 공급해 줍니다. 선교대회에 참석한 사역자들은 선교대회가 끝나면, 다시 각 임지에 돌아가 1년 동안 열심히 사역을 합니다. 사역자들에게 자기 점검과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무작정 뛰어다닌다고 말씀이 쏟아지지 않습니다. 무작정 달린다고 목표에 빨리 도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EX) 17세기 초, 미국 이민 초창기 때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에서 미 서부에서 금이 난다는 소식을 듣고 금을 캐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미국 동부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착한 그들은 서부에 있는 금광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한 무리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말을 타고 서쪽으로 달린 반면에, 다른 한 무리는 6일을 달리고 꼭 7일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예배를 드리고 휴식을 취하며달리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눈앞에, 앞서 가던 무리들이 길가에 앉아 있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추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앞서 타고 가던 말들이 계속 달리다 보니, 병에 걸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달린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되, 스스로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충전 받으시기 바랍니다. 비전의 사람, 바울은 자기를 점검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새로운 충전을 받으며 사역하던 사람이었습니다.
4) 함께 기도하라(Prayer With Others)
많은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30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바울은 매우 간절하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서바나 선교계획과 앞으로 예루살렘 방문시 닥쳐올지 모를 유대인들의 위협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긴급히 SOS 구조 요청하듯,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0절 이하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비전을 이루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에 가장 크게 쓰임 받았던 사도 바울도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병이 낫고, 악귀가 나가고, 수많은 무리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던 능력의 사람, 바울도 기도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마18:19)의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는 합심 중보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EX) 여러 해 전 달나라를 향하여 아폴로 13호를 쏘아 올릴 때에 미국의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아폴로 13호는 현대 과학의 걸작품입니다. 이것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완벽합니다. 이것이 고장날 확률은 백만분지 일입니다." 모든 사람의 확신 속에 아폴로 13호는 달나라를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지구로부터 2만 마일을 벗어나지 못한 지역에서 그만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산소통이 터져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돌아올 방법도 막막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미국 텍사스 휴스톤에 있는 우주 지휘소에 비상연락을 취하고 회신을 기다릴 수 밖에 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휴스톤에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2만 마일이나 떨어진 우주선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주 지휘소에서는 다만 북극성을 바라보며 방향을 잡아서 돌아오라고 회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우주의 미아가 될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때에 미국의 대통령은 전국민에게 함께 아침 9시에 기도하자고 호소했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군인도, 어린이도, 온 국민이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폴로 13호가 무사히 태평양에 떨어진 것입니다. 구조된 우주 비행사는 배에 오르자마자 군목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그 주간 타임지 표지에 실렸습니다. 우주 비행사 중의 한 사람인 스위저트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지구에 계신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힘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기도 보다, 두 사람의 기도소리가 큽니다. 두 사람의 기도보다 열 사람의 기도 소리가 큽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기도에도 들어주시지만, 함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기도를 서둘러서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좋은 중보기도자, 신실한 기도의 동역자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때마다 시마다 함께 기도함으로 비전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바울처럼 여러분들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만한 꿈이 있습니까? 남은 인생동안 계속해서 달려갈 비전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도 아깝지 않은 그런 꿈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비전이 없는 분들은 오늘 이 시간 비전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꼭 붙잡으십시오. 또 비전이 있는 분들은 비전의 사람, 바울을 배우십시오. 구체적으로 바울의 삶을 배우십시오. 비전에 따른 목표를 세우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때때로 자신을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충전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함으로써 세운 비전을 이루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주 안의 사귐과 나눔과 기쁨
로마서 15:22-33 /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널리 알려지자(롬1:8) 그들을 만나보고 싶은 간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을 만나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하고(롬1:11) 피차에 안위함을 얻으며(롬1:12) 다른 이방인 교회에서 거둔 것과 같은 열매를 로마 교회에서도 맺기 위해 여러 번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롬1:13).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로마서를 쓰며 그 머리 부분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롬1:10-13로 돌아가 읽어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가 언급하고자 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교리에 대한 설명을 사실상 다 마치자 로마를 방문하여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고자 하는 그의 희망과 계획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합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원한 것은 거기에 오래 머물기 위해서나 거기를 궁극목적지로 삼아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궁극적으로 가기를 원하는 곳은 서바나 곧 스페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에 가서 눌러앉아 전도를 하거나 목회를 할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 바로 앞서서 쓰기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15:20) 한 것과 일치하는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이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오늘 본문 23절에서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고 썼습니다. “이 지방”이란 롬15:19에서 읽듯이 그가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의 지역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선교의 지경을 넓혀 일루리곤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한 바울에게 있어서 이제 서쪽으로 더 나아가면 로마인데 로마에는 이미 복음이 전해졌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신자들이 생겨났으므로 그가 일할 곳으로 남은 지역은 로마를 넘어 서쪽 끝에 있는 스페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스페인은 로마 제국 내에서 비교적 새로 개발된 지역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이미 저명한 시인, 극작가, 저술가 들을 배출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페인이 새로운 세계이기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뜻을 품었을 것이고, 또 높은 지적, 정신적, 문화적 토양의 땅이기에 거기서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리라 생각하여 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일이었습니다. 본문 25-28절을 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목적은 가난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에서 거둔 연보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게도냐는 빌립보나 데살로니가 같은 도시들이 있는 그리스 북쪽의 지역이었고, 아가야는 아덴이나 고린도 같은 도시들이 있는 그리스 남쪽의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일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거둔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은 사도 바울에게는 스페인으로 가는 일을 잠시 연기할 가치가 있을 만큼 중요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거둔 연보이니만큼 지체하지 않고 빨리 전달해야 했을 것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의 유대와 일치감을 공고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이방인 교회에 대하여 의구심이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 예루살렘의 교회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의 마음을 보다 활짝 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향해 품은 사랑의 열매를 확실하게 전달한 다음에 로마에 들렸다가 스페인으로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먼저 들렸다가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려한 것이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선교계획이었음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우리는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글 속에서 또 다른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귀중한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지역과 족속의 벽을 넘어서서 주 안에서 갖는 사귐과 나눔과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2-24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그토록 만나고 싶어 몇 번이고 로마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들과 사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과 만나 사귀면 기쁨을 가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이 자기를 스페인으로 보내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그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한 주님 예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나눔의 정신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로마의 성도들과 만나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을 충만히 그들과 나누게 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 충만한 복을 그들과 너무나 나누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본문 32절에서는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러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그들에게 기쁨으로 갈 것이라 하고, 자기로 하여금 그들과 편히 쉬게 하라는 부탁까지 합니다. 참으로 편안하게 도움도 청하며 서로 나눌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며 그들이 기도로 자기의 사역에 동참해줄 것을 구하기도 합니다. 본문 30-3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예루살렘 행이 위험한 길임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행20:22-23에 보면 그 자신이 말하기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신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인 로마의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들이라고 얕보지 않았습니다. 동등하게 사귀고 모든 것을 꼭 같이 나누는 자세를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개하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성도들은 또 어떻습니까? 본문 26-27절을 다시 봅니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역과 족속의 차이를 뛰어넘어서 기쁨으로 연보를 한 것입니다. 나누기를 기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먼저 예루살렘의 성도들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빚을 졌고 그들에게서 영적인 것을 나누어 받았다는 것입니다. 받았으니 주기도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으로든 물질적인 것으로든 서로 나누며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귐과 나눔과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글을 본문 33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이라는 기원으로 끝냅니다.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평강을 주실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 안에서 누리는 사귐과 나눔과 기쁨을 말한 후에 기원하는 평강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귐과 나눔과 기쁨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첫 번째 죄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형이 아우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쳐 죽인 일 아닙니까? 형제 사이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사귐과 나눔과 기쁨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인류의 역사는 반목과 원수짐과 싸움과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 아니었습니까? 서로 사이에 이기주의의 높은 담을 쌓고 상호의 무관심과 의심과 불안과 경계 속에 살아온 것 아닙니까? 한 마디로 평강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이 역사 속에서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벽을 치우시고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사이의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평강의 관계를 다시 세우시려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우리에게 사귐과 나눔과 기쁨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오시기를 고대하는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다시 깊이 묵상하는 이번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교우들 사이에, 교회와 우리 사회 사이에 평강이 회복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이념적으로, 계층 간에, 한미자유무역 협정 때문에 갈리고 대립하는 정치세력들이나 국민들 사이에서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우리 모두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의무
로마서 15:25-29 / 임덕순 목사
자식을 키우는 일은 부모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이 의무는 국방의 의무나 납세의 의무보다 훨씬 더 힘든 의무입니다.
오늘같이 학비부담이 많은 사회에서 자식 한 명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학비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를 아이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키우는 일은 단지 고달픈 의무만이 아니라 행복한 의무입니다.
자식을 잘 키우면 그게 보람이 되기 때문이고, 키우는 것 자체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한 의무를 위해서 부모들은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키우는 일과 마찬가지로 보람 있고 행복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선교를 명령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게 성경의 내용입니다. 나는 교회의 존재가 선교라고 알고 있으며, 이것을 힘쓰는 것을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신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우리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말씀과 체험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선교가 우리들이 꼭 해야만 할 사명이라면, 기왕이면 부득이 해서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선교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기도요, 다른 하나는 물질로 헌금하여 선교사를 뒷받침하는 것인데, 헌금을 드리면 우리의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기도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 헌금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선교헌금을 힘껏 하는 일은 내가 선교사가 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전문가인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고 결국 피선교지의 영혼들은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성도의 죄를 꾸짖고 회개하라고 책망을 하면 대개 "아멘" 하며 받지만 물질 문제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면 그때부터는 귀를 닫아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 물질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바르게 관리하는 청지기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돈에 특별히 인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런 분에게도 오늘 말씀이 힘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선교헌금 좀 잘 드리자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선교헌금을 힘껏 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복음에 목말라 하는 영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 소풍을 가서 준비해 간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옆에 굶주리고 배고파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돌아앉아서 자기 가족끼리만 먹을 수 있겠습니까? 오라고 해서 나누어 먹던지, 아니면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몰래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데로 가서 자기 가족들 하고만 먹으면 마음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그들을 불러 나누어 먹는 것이 떳떳할 것이고, 나누어 먹고 나면 보람 있고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일이 그런 일입니다. 배고픈 사람 외면하고 너만 먹으면서 맛있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복음이 풍성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도시에는 보이는 것이 교회요 농촌에도 교회가 마을마다 세워져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문맹이 거의 없어서 누구나 성경책을 쉽게 사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듣고 싶거나 은혜가 그리워지면 언제든지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면 거기에는 새벽마다 말씀을 설교하는 목사님이 있고, 기도할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국처럼 은혜생활 하기 쉬운 나라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볼때 한국은 먹을 것이 넘치고 넘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가까운 일본에는 가도 가도 교회가 보이지 않으며 주일에 예배한번 참석하려고 한다면 수 시간씩 자동차로 달려가야만 예배에 참석할 수가 있습니다.
북한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거의 전부이고, 그와 비슷한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저 모슬렘 권과 불교권의 나라들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남미나 필리핀 등지에는 기독교라는 이름의 천주교에 출석은 하고 있으나,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다만 자기들의 수호신의 이름이 예수인줄로 아는 그런 정도의 신자들이 태반입니다.
이 세상에는 교회가 없는 곳이 많고, 교회에 가더라도 복음은 들을 수 없는 곳도 많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책상도 책도 공책도 없이 공부를 하는데, 땅바닥에 돌로 글씨를 쓰고 왼손으로 지우면서 공부를 하지만 저녁과 아침밥을 굶고 왔기 때문에 어깨가 축 늘어지고 눈동자가 풀어져서 공부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아침마다 죽을 끓여 먹이고 있는데, 그 죽을 얻어먹기 위하여 부모들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과 육이 디룩디룩 살쪄 있는데, 이렇게 잘 먹고 잘 산다고 자랑만 하면서 그들의 굶주림을 몰라라 해도 될까요? 그래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성안의 사람들이 다 굶어죽는 것을 보고 차라리 적진에 가서 구걸을 하자고 아람 진에 갔던 문둥이 네 명은, 적은 모두 도망했고 먹을 것만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 실컷 먹다가, “성중은 주려 죽는데 우리만 먹고 마시고 있으니 우리의 행위가 선하지 못하구나. 만일 밝는 아침까지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벌이 우리 머리에 임하지 않겠느냐”(왕하7:9) 하고 밤중에 가서 소식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모르드개가 “너는 왕궁에 있으니 문제없다고 이때에 잠잠하면 우리는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겠지만 너와 네 집은 멸망하리라.”(더4:14)고 했을 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에게 가서 자기 민족을 구해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문제없이 평안하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남을 구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을 알고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서양 나라들은 옛날에 선교를 하면서 선교사를 이용하여 피 선교국가의 정보를 빼내고 침략하여 식민지를 삼아 지배 한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선교를 받았던 나라들은 서구의 선교사를 침략자의 하수인으로 생각하고 적대감을 갖는 게 사실이며, 또한 서양 나라들의 경제 사정도 어려워졌고, 그들의 믿음도 식어져서 요즈음은 서방 선교사가 격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대신 한국은 6.25 후인 1953년 지엔피 40달러밖에 되지 않는 가난한 나라였는데 지금은 2만 불이나 되었으니 500배나 성장했습니다. 모든 나라가 다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에 나타난 기적이며 축복입니다.
그런데 한국경제의 성장은 한국 교회의 부흥과 시기를 같이 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 한국교회에 부흥을 주시고 한국에 경제발전을 겸하여 주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일본은 경제는 있으나 교회가 없고, 한 때 한국과 함께 네 마리의 용이라고 일컬었던 홍콩, 대만, 싱가포르는 너무나 작은 섬에 불과합니다.
아세아에서 선교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한국만이 고난 속에서 자란 순수하고 뜨거운 믿음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경제력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매우 복스러운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가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미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려운 사람들이 손 벌릴 때 눈 감고 외면하면 벌이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주신 물질을 바로 관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8:17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적든 많든 물질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또한 그 물질을 얻은 자신마저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자도, 한 달란트 맡은 자도, 다 주인의 것을 맡았노라고 돌아와 회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신 물질은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원하시는 만큼 사용해야 합니다.
호흡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 산소로 채워주셨고,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에 바다와 강과 지하에 물을 채워 주셨습니다. 자녀를 주신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먹이고 입히고 신기고 교육시키는데 얼마의 물질이 필요한 줄을 아십니다. 그래서 필요한 물질을 얻도록 건강도 주시고 일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물질을 순전히 자기 가족들만 먹고 마시고 입고 가르치는 일에 주신 물질을 다 소비해 버린다면 기뻐하지 않으신 다는 것을 밝혀 주셨습니다.
“이웃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힘껏 일하라.”(엡4:28)고 하신 말씀을 보면, 우리의 수입 중 상당한 부분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쓰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구제이며 해외 선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얼마 전 국민여동생이라는 문근영양이 기부를 많이 한다는 소식이 들려서 국민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습니다. 가수 김장훈씨도 남모르게 기부한다고 합니다.
그 김장훈씨와 친구사이인 홍콩의 배우 성룡이라는 사람이 김장훈의 선행을 듣고 돈 만불과 함께 한글로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고는 자기도 그동안 번 5천억원 정도의 재산 전부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엊그제 뉴스를 보니까 개그맨 유재석씨와 박명수씨도 억대의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나 혼자 잘 먹고 마시는 것이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이 모아서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겨준다고 자식이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뼈 빠지게 벌어서 유산으로 다 주고 가면 자식들이 그것으로 잘되고 성공하는 경우보다, 게으르고 타락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차라리 내가 모은 재산은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사용하고, 자식들에게는 바르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지혜롭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사회에 기부하는 일보다 훨씬 더 급하고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 일에 급하십니다. 명심하십시다.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분들이 땀 흘리며 애써서 모은 재산을 잘못 관리하여 사기도 당하고 손해도 보는 일들을 들으면서 마음이 몹시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이 모은 물질이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며, 자손들에게 축복이 되어 물려지며, 남들에게도 유익을 주도록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합니다.
그것은 구제와 선교를 위해 사용하는 것 이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일을 권고합니다. 순종해 주기를 당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물질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하나님이 더 주십니다. 이것은 나의 확신이며 성경의 약속입니다. 주인의 한 므나를 가지고 가서 열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열 므나를 더 맡겼지만, 한 므나를 가지고 갔다가 도로 한 므나 가지고 온 사람에게서는 한 므나마저도 빼앗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재능과 물질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계획성 있게 사용한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은 지금보다 넉넉하게 하실 것이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만큼 선한 일을 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배부르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의 진의입니다.
돈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물욕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은 필경 망하고 말지만, 의로운 일을 남보다 더 많이 하고 싶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책임지고 의에 배부르게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셋째, 빛 된 삶을 살 것을 명령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어디에 마음을 쏟고 살아갈까요? 다른 사람 볼 것없이 자신이 요즘 어떻게 사는지 생각해보면 알 것입니다.
요즘 무엇에 신경 쓰고 무엇에 목매달고 무엇 때문에 실망하고 무엇 때문에 죽을 지경인지, 무엇 때문에 싸우고 무엇 때문에 속이고 무엇 때문에 자살하기도 하는지 가만히 보시기 바랍니다.
최진실 안재환이 왜 자살했나요? 그들이 돈이 없나요? 인기가 없나요? 남보다 미모가 없나요? 아마도 더 벌기 위해서이고 더 많이 모으기 위해서이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경제가 어려워져서 크게 실망하는 사람들의 실망하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더 많은 이익을 남기려고 주식을 사고 투자했는데 투자한 돈을 잃게 될지도 몰라서 근심하는 것이지요? 요즘 사람들은 거의가 먹고 입고 살만큼은 살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잘 살고 더 부자 되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진실이나 안재환만큼 가진 것도 없고 인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지요? 경제위기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그렇다고 우리가 굶게 생겼습니까?
먹는 것이야 얼마나 들겠습니까? 사실은 너무 먹어서 비만이 문제 아닙니까? 옷이 없어서 헐벗는 사람 있습니까? 옷이야 한 두 해 안산다고 헐벗겠습니까? 그동안 산 옷도 많지 않습니까? 한 두해 옷을 사지 않는다고 해서 벗고 살 사람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요즘 세계적으로 경제위기가 심각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기의 실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정말로 벌써 월급이 줄었습니까?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 ‘아 위기가 오는구나, 그럼 절약해야겠다.’ 하고는 지갑을 닫고 물건을 사지 않으니까 위기가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소비를 축소시키면 물건이 팔리지 않으니 공장 가동을 축소하거나 문을 닫습니다.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공장을 닫게 되고, 공장이 닫히면 공장과 매장의 직원을 해고하게 됩니다.
직원들이 해고당하면 수입이 없어지니까 이제는 사고 싶어도 물건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전에는 살 수 있었지만 경제위기라는 말에 절약하느라고 일부러 사지 않았지만, 물건을 사지 않았더니 정말로 살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경제위기라는 위기감이 진짜 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감과 위기는 어디서 오느냐? 더 부자가 되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식량 소출이 적어서 생기거나 석유가 나지 않아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금융업자들이 돈을 더 벌려고 신용 없는 사람들의 집을 잡고 돈을 빌려주고, 그 증서를 채권으로 만들어 팔고 다시 파는 등 파생상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집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생긴 문제입니다.
즉 끝없는 돈 욕심이 오늘의 경제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돈 문제만 크게 생각하면 정말 위기가 옵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 성도는 알아야 하고, 돈보다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살면 경제 위기도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다가 어떤 노후를 맞이하려고 하십니까? 자식들만 위해서 살다가 손자나 봐주고 집이나 지켜주는 노인이 되렵니까? 돈만 오그려 쥐고 날마다 고민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한 푼 써보지 못한 채 저금통장만 남겨놓고 죽으렵니까?
“저분은 일평생 주님 뜻대로 사신 분이다. 저분은 평생을 남들 도우며 산 어른이시다. 저분은 우리의 삶의 참된 모범이 되어 주셨다.” 하면서 우리들을 존경하고 뒤따라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모범이 되라고 부름 받은 한가람 성도들이여, 두고두고 뒤따라 올 자손만대에 축복의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만 하는 자식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정말로 바르게 살아 봅시다.
우리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명령인 선교에 열심을 내봅시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는데 죽도록 은 못해도 힘은 다해봅시다.
강경제일교회에 이복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집도 땅도 남편도 아들도 없는, 정부에서 주는 배급 쌀과 교회가 드린 방에서 사는 80대 여 집사님이셨습니다.
그분에게 선교가 주님의 명령이라고 알려드렸더니, 노구를 이끌고 가서 남의 비닐하우스 농장에 품팔이하여 한 달 분 만원씩 열 두 달치 12만원을 벌어다 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십 이 만원을 더 벌어 가지고 와서 하는 말씀이, "목사님!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 내년도에도 살아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올해 죽으면 내년도 선교헌금을 못 할 것 같아서 내년 치도 내려고 다시 벌어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선교헌금을 건네받으며 얼마나 존경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자식도 없고 땅도 없고 남겨놓은 유산이 없었지만 그렇게 산 아름다운 삶의 자세를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렇게 사는 분이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어느 대전의 김밥장수 할머니는 김밥 팔아 모은 50억 재산을 충남대학에 희사했답니다. 충남대학은 그 돈 50억 없어도 정부가 주는 보조금과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얼마든지 해나갈 수가 있지만 단돈 몇 백 달러가 없어서 선교지에서는 사역이 중단되고 굶주린 사람들을 돕지 못하는 안타까운 선교사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생명 값으로 죄에서 구원받고 영생의 내세를 확약 받은 성도인 우리가 평생 내 자식만 위해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아이에게 태권도나 피아노 하나만 가르쳐도 한 달에 10만원은 들어가는데 그 하나 가르쳐 준 것이 그의 생애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부모가 성실하게 일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식의 장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건강보조식품 하나 사먹는 데는 얼마나 돈이 필요합니까?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도움이 될 줄 아십니까? "
선교한다." 하면서 아이 한명의 과외비보다도 적게 작정했다면, 건강식품 하나 사먹는 것 만큼도 하지 않는다면 말로만 선교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입으로만 선교하고 입으로만 헌신하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여러분이 선교헌금을 얼마 드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선교를 위하여 사업하고, 선교를 위하여 자녀를 기르고, 선교를 위하여 장래 계획을 세우는 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야 여러분과 자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여러분이 사는 것 답게 사는 당당함을 누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참되고 가치 있고 보람 있고 복이 되는 삶이 있다는 것, 행복이 있고 자랑할 만 한 삶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그렇게 살아드리는 생활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삶으로 예배하는 사람들과 그런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께서 찾는 교회가 되어 보십시다. “한가람 교회는 정말 교회가 할일을 다하더라. 그 교회 가서 배우자! 저 한가람 교회 사람들은 성실하고 진실하게 일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정말 가치 있게 쓰더라. 그들을 보니 왠지 머리가 숙여지더라! 우리도 그들처럼 살아야겠다.”라고 하게 해봅시다. 그것이 세상의 빛이요 교계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갖 세워진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이 자기들의 모 교회 인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해 주어서 감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27절에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 진자니, 만일 이방인 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누어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들이 헌금을 기쁜 마음으로 보냈지만 사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정신적인 축복을 나누어가졌으면 물질로 도울 의무도 있지 않으냐”는 말입니다.
기왕에 해야 할 의무를 기쁜 마음으로 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선교를 기왕이면 기쁨으로 감당하여 행복한 의무로 삼읍시다. 그래서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과 우리 이웃들 모두에게 복이 되게 살아갑시다.
바울의 끝없는 도전
롬 15장 22~29절 / 하용조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류의 역사가 BC와 AD로 나뉘었듯이, 한 개인의 인생사에서도 BC와 AD로 나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출생, 결혼, 직업적 성공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해 알고 느끼며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세상이나 개인의 역사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명, 빛, 사랑을 체험할 때 가능합니다.
바울의 대변화
신약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인생이 변화된 인물들이 많이 있지만 결정적인 모델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신약 성경의 12권을 쓸 정도로 학문과 지성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골수 유대인이었으며 정통 바리새인이었고 행동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빛으로, 성령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갔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이 사건이 그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는 ‘큰 자’라는 뜻의 사울에서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고 우상처럼 섬겼던 자신의 학문, 철학, 신념, 예술 등을 버리고 거리의 전도사로, 감옥의 사도로 변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직업, 결혼, 이상, 꿈 등 모든 것들을 접고 예수님을 위한 종이 됩니다. 사도 바울의 변신은 기독교사에 기록될 만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끝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삶의 전부를 헌신하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여기서 바울은 항상 로마로 향하는 비전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 말씀에서 바울이 항상 로마 전도에 대한 꿈과 환상을 갖고 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로마 복음화를 꿈꾸는 바울
이 말씀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에 해당합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의 전도 여정이 끝나는 게 아니라,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들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체포당하고 재판을 받은 후 죄수의 신분으로 최후 변론을 하기 위해 로마로 가게 됩니다.
어느 영화나 드라마의 주제처럼 ‘나는 로마에 가고 싶다’, ‘나는 로마를 보고 싶다’는 것이 바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사도행전 23장 11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은 로마에 가고 싶다고 했고, 23장에서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로마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로마로 가서 예수님을 증거해야 한다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바울의 로마행 동기와 목적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사도 바울을 죽이기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겠다고 서약한 자객이 40명이나 생겨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로마로 가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의 꿈은 로마로 가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로마는 바울의 인생에서 종착역이 아니고 통과역에 불과합니다. 바울에게 로마보다 더 큰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이 23, 24절 말씀에 있습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이 말씀에서 바울의 꿈은 로마에 정착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면 약간의 교제를 하고 도움을 받아서 서바나로 가려하고 있습니다. 그의 서바나행에 대해 로마가 중간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향해
첫째, 바울의 종착역은 지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갔다가 서바나로 가도 그이 종착역이 아닙니다. 바울은 서바나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종착역은 예루살렘, 사마리아, 중앙아시아, 3차에 걸쳐 전도 여행을 했던 유럽도 아닙니다. 더구나 꿈에 그리던 로마도 아니고 로마에서 도움을 받아 가려 했던 서바나도 아닙니다. 바울의 비전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는 천국가는 날까지 온 땅에 이르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9년 전에 하나님께서 열두 가정을 모으시고 지하실을 빌어 온누리교회를 시작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2,000명의 젊은이들을 주시면 전 세계에 하나님을 전하겠다며 소박한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7년 만에 2,000명의 청년들이 온누리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거기서 비전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지난 19년 동안 온누리교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2천/1만’이라는 비전이 심겨졌습니다. 이번에 사역자로 파송 받은 한 형제도 우리가 가진 비전에 감염된 것 같습니다. 그 형제는 컴퓨터 기술을 갖고 칭타오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는 선교사도, 목회자도 아닙니다. 선교사이나 목회자는 비전의 열매대로 선교지로 가는 것뿐이지만, 실제로 평신도들은 비전을 잉태한 채 선교지로 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먼저 준비하고 꿈을 안고 가는 것입니다.
2천/1만 비전은 온누리교회가 5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세계의 미전도 국가에 파송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많은 헌금을 투입해 끊임없이 선교 사역하는 이유도 그런 비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ACTS 29’를 말합니다.
처음 우리가 ‘ACTS 29’를 선포했을 때, 인공위성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터넷 TV를 경험하게 하시더니, 이제 분수에 넘치도록 전 세계 오대양 육대주에 전파를 발사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인공위성 9개 사용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인공위성은 로마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서바나로 향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서바나행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비전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주시는 것은 다름 아닌 땅끝까지 복음 전파에 대한 사명감입니다.
높은 세계를 바라본 바울
둘째,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항상 지평선 너머의 세계를 응시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 제도, 프로그램 등에 얽매이지 않고 인명이나 철학 그리고 사상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높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앞마당만 바라보고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걸 하려면 저게 걸리고 저걸 하려면 이게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은 멋지게 하지만, 손과 발은 거미줄에 걸린 양 옴짝달싹하지 않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며, 당장 눈앞에 있는 일들을 하게 되니까 다른 일을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언제나 지평선 너머 높은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얻어맞고 죽을 고비를 당하며, 감옥에 갇혀서도 철창 사이로 지평선 너머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입으며 잘 사는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좋은 집, 옷, 직장을 가진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본능은 단순히 먹고 싸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안전한 곳에 먹을 것을 쌓아 놓고 하루 세 끼를 먹는 일에 만족한다면 짐승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거나 다른 주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반짝이는 눈으로 높은 세계를 바라봅니다. 참된 비전은 머무르지 않고 참된 비전은 소유하지 않으며 참된 꿈은 누리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의 자유로운 정신 세계
셋째,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지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어렵고 힘들면 불평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끝까지 불평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어려움을 겪어도 어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부탁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정신 세계는 떳떳하고 자유로웠습니다. 그에 관한 내용은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잘 기록돼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바울은 언제 그런 고생을 했냐 싶을 정도로 항상 평안합니다. 수없이 얻어 맞고 쫓겨 다니며 굶주렸어도 그의 삶에서 그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갖고 삽니다. 그래서 화려하고 찬란했던 기억들을 묵상하곤 합니다. 그리고 현실이 어려우면 얼굴에 가득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표정을 짓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똑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보통 사람들이 겪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는 고상하고 품위 있게 살아도 되는 자격과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지만,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정당한 이유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겪었던 고난의 강도만큼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그의 꿈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됩니다. 끊임없는 도전이요, 모험이요, 열정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바울이 가졌던 비전들을 우리에게도 주셨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대학에 가고 못가고, 결혼을 하고 못하고, 취업을 하고 못하고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슴을 불태우고 관습과 문화와 제도를 뒤바꿔 복음의 전도자로서 자신을 거리로 내모는 일들이 내면에서 꿈틀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온누리교회가 목적이 아닙니다. 인공위성도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로마로, 서바나로, 중앙아시아로 가게 하셨듯이 그런 것들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온누리교회를 붙잡는다면 그것은 우상으로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온누리교회를 사용하실 뿐이지 온누리교회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제도, 건물, 이념 등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개혁도 하나의 과정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개혁이란 우리가 잘 해보자는 의지이지 그것에 매달리는 순간 우리는 개혁의 노예가 돼 버립니다. 돈은 사용하는 것이지 소유하려는 순간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25, 26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큰 비전과 동시에 작은 사역도…
바울은 지평선 너머 높은 세계를 바라보며 엄청난 비전을 말하지만, 이번엔 아주 사소한 일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인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유대 성도들을 위해 헌금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의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27절 말씀을 봅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성령 받은 유대인들은 바울을 통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유대인들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신령한 것을 나눠 갖게 되었으므로 유대인들에게 물질로 보상하는 일은 마땅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어려운 유대 성도들을 위해 기꺼이 헌금한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크고 원대한 비전을 꿈꾼다면, 반대로 연약하고 힘없는 개개인은 모두 소외되고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큰 비전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사소한 일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자신을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고백하면서 마케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의 헌금을 갖고 예루살렘의 어려운 유대 성도들을 위로하고 상담해 줍니다. 28, 29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인공위성 사업 후 다음 비전을 향해
바울은 작은 사건을 말하면서 동시에 서바나에 대한 큰 비전을 말합니다. 저는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이 큰 비전에 열중하다가 다른 작은 일들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길 바랍니다. 큰 비전을 가진 사람이 집에서 애나 보고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폭력이라는 고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자꾸 묻자, 뺨을 때리면서 왜 나의 비전을 모르냐고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주위에 있는 소박한 개개인을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개인적인 사소한 일로 큰 비전을 망쳐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온누리교회가 큰 비전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누리교회를 우상으로 만들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끊임없이 도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인공위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어떤 일로도 스스로 얽매이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위해 끊임없이 지평선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다음 목적지를 향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길이 막힐 때
롬 15장 22~29절 / 이대성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인생의 길이 막힐 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인생의 길이 막힐 때” 여러분!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목표하고 달려가는데 그 길이 갑자기 막힐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장애물들이 생기고, 자꾸만 내 길이 가로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힘으로 풀어보려 하지만, 도무지 해결이 안될 때 우리는 이내 곧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에게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은 로마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고, 로마를 경유해서 서바나로 가고자 함이었습니다. 서바나는 현재의 스페인으로 그 당시에는 스페인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외에도 사도행전 19장 21절에 보면 로마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로마로 가고자 했던 목적은 무엇일까요? 다른 이유 없습니다.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서...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순수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가는 길은 잘 열리지 않았던 겁니다. 도대체 왜 로마로 가는 길이 자꾸 막혔을까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서 로마로 가려고 하는데 웬일인지 로마로 가는 길은 자꾸만 막히고 정반대 상황이 펼쳐져서 꼬이기만 하는 겁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를 분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계획에 차이가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를 향한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다같이 22절과 23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고자 했는데 여려 번 막혔다는 겁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강한만큼 가고자 하는 길이 막힐 때 그는 너무나도 힘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밀어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 그 길이 자꾸만 막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해도 중요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의 뜻은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해 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꿈을 주십니다. 열정도 일어나게 하고, 소원도 일어나게 하고, 뭔가 충만해지는 의욕이 넘쳐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하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생각대로 밀고 나가면 상황은 ‘전혀 아니올씨다.’인 겁니다. 바로 이 때 우리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 순간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 우리가 항상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때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핵심은 타이밍입니다.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타이밍이 뭡니까? 가장 적절한 때! 무조건 빠른 게 좋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그 타이밍을 모르면 굉장히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주시고 어떤 말씀을 하셨다면 그 다음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고집과 방식으로 무조건 밀고 나가다 보면 반드시 사고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만 사고 다발 지역이 되고 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가장 정확한 때에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추는 것만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타이밍이 맞춰지지 않으면 엉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 대해서 반드시 이루어 주시겠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냐는 겁니다. ‘언제’라고 하는 분명한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이 ‘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게 하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그 때를 기다림에 있어 ‘내 욕망인가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한다면 그 다음은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에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마음! 이게 바로 믿음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탐정 소설을 읽어 보면 굉장히 흥미진진하지요? 그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소설 속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매 순간 긴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이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헤쳐 나가고...
그런데 여러분? 작가는 이런 긴장감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작가는 이미 풀 스토리를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읽는 사람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고 있지만 소설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다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타이밍의 귀재이십니다. 성경에 많은 예가 있지만 특별히 에스더서가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하나도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고도 흥미진진하게 역사하신 책이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하만이라는 아주 간교한 사람이 왕을 설득해서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아 죽이고 이를 기화로 유대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세워 놓고는 교묘하게 악을 행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제 날만 새면 모르드개가 죽고 유대인들이 몰살당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전날 밤 늦은 시각에 왕이 도무지 잠이 안 오는 겁니다. 그래서 왕실에 있던 역사 기록서를 가져오게 해서 그것을 읽게 됩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다 보니 놀랍게도 장대에 매달아야 할 사람은 모르드개가 아니라 하만이요, 모르드개는 오히려 상을 줘야 할 일등공신임을 알게 된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는 극적 사건이 모르드개가 매달리기 바로 전날 밤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왕이 잠이 안 온 것이 우연히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왕이 뒤척이다가 책을 읽게 되는 바로 그것이 우연이 아닌 겁니다. 이로 인해 대반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확한 순간에 하나님의 개입이 빛나는 책이 바로 에스더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에스더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 여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손길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 안식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홍해가 딱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겁니다.
뒤에는 애굽의 병사들이 쫓아오면서 사막의 모래가 폭풍처럼 일어나고 있는 살벌한 바로 그 순간,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통과하게 하시고 추격해 오던 애굽 군사들이 적당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물이 침몰하면서 그들을 수장시켜 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타이밍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정확하게 일하시는 스펙타클한 역사의 현장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확한 시계를 차고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시계를 차고 있지만,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계를 동시에 다 보고 계시다가 하나님의 때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역사에는 하나님의 카운트 다운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일이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시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요, 시간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가 시계를 다루듯이 하나님은 시간을 다루십니다. 시간을 멈출 수도 있고, 늦출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태양을 멈춘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온전히 다스리시기에 우리 삶을 돌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시간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시간의 통제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과 나중되시며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 길이 막힐 때는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길을 준비해 놓고서 우리로 하여금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더 낫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때에 따라 역사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이 당장에 이루어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손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비록 지금 길이 막혀 있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길이 막힐 때 우리는 너무나도 급하게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정한 시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금방 초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정한 시간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간을 통제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잠언 16장 9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 말은 그 모든 흐름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시간을 가지고 움직이고 계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장 무엇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행동이 느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최상의 순간에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로마를 가고자 했던 계획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그 자세한 내용이 어디에 나옵니까?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후반부에 로마로 들어가는 사도 바울의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 가고자 했던 로마행이 막히다가 사도행전 후반부에 길이 열리는데, 놀랍게도 죄수가 되어서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가고 있습니다. 로마의 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되어가는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생각이 복잡해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복음을 위해 헌신해 왔는데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입니다. 로마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 바울은 미래가 불투명해 보입니다.
사자의 밥이 될 수도 있고, 검투사에 찔려 죽을 수도 있는 그런 불행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복음을 위해 모든 걸 바치던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가고자 했던 로마로 죽으러 갈 수도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사도 바울을 길이 척척 열리게 하지 않으시고 왜 지금 이렇게 죄인으로 가게 하시는 걸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다 보면 이처럼 우리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면 고난이 올 것이다.’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분들은 다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고난이 닥치면 받아들이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막힘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후에 많은 유대인 동족들이 그의 신변을 노렸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그래서 곳곳에서 바울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았단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가 혼자 로마로 가려고 했다면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자객들,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던 사람들에게 로마로 가기 전에 아마도 살해당했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죄수로 호송되어 가기 때문에 오히려 바울의 신변이 지켜진 겁니다.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까지 군인들이 바울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사도 바울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로마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기에 오히려 자기를 지키는 수비대는 물론이요, 고관들에게 변론하면서 예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접근할 수 없는 그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열린 것입니다.
일례로 로마로 가는 도중에 풍랑이 일어나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죄수인 바울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무사히 빠져나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는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훨씬 더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지요.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한 가지 사건 그 이상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한 가지 사건 속에 수많은 비밀을 숨겨두고서 그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당장 무엇이 안 되면 죽느니 사느니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안달을 합니다. 하나님 빨리 빨리... 모든 게 다 빨리 빨리 입니다.
어떤 분은 조폭도 아닌데 지금 당장 하나님께 응답해 달라고 다그칩니다. 또 어떤 분은 나름 시간을 준다면서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 할 테니까 하나님께서 금식기도 끝나는 날 반드시 응답해 달라고... 안 그러면 자기 죽는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늘상 이렇다 보니 어떤 분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도까지 합니다. ‘하나님, 저는 인내심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에게 지금 당장 인내심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무조건 빠른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
여러분! 우리가 때를 말할 때 헬라어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얘기하는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알기 쉽게 한 번 구분해 보겠습니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때요, 카이로스는 특정한 때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크로노스는 세상적인 때를 말하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바로 그 때! 그 완전 안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카이로스의 때를 기다리며 세상 때인 크로노스의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카이로스의 때를 바라보며 크로노스의 시기를 인내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의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입니다. 왜 우리는 일이 잘 안되면 울고불고 좌절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뜻이 더 강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식들에 대해서도 부모들이 실망하고 좌절하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만히 보면 그 이유는 부모 욕심과 의욕이 너무 강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신 뜻이 아니라 내 자식에 대한 욕망. 이것이 늦어지는 것 같으니까 마구 하나님께 닦달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의 뜻이 너무 강하면 때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기에 날마다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나의 고집이 꺾여서 온전히 순종하는 훈련.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기다림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내 욕망을 내려놓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 그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쉽게 이루어지면 그게 불안한 겁니다.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은 기다리게 하시고 더 좋은 것은 더 기다리게 하십니다. 왜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려울까요?
우리의 힘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게 돌아갈 때, 사람들이 자꾸만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 그것은 기다림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그 기다림에서 실패하면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귀한 은혜는 바로 이 기다림을 통해 받은 은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큽니다. 아무리 좋은 뜻과 계획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심장에 심어주었던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것은 그가 가졌던 비전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신념 속에 심어주셨던 비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16절 이후에 보면 드디어 로마로 들어간 바울이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소원했던 것이 다 이루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빌었던 소원은 사도 바울 개인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결코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언제 이루어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일을 왜 하려고 하는가?’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 소원과 열망의 출처가 어디냐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었다면 하나님은 세상만사를 다 제쳐두고서라도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로마로 가는 도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났을 때. 그 때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다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죄수인 바울이 일어나 지휘를 합니다. 사도행전의 이 마지막 장면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장면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떵떵거리고 자랑하고 교만한 것 같은데 유라굴로 같은 광풍이 한번 불어 닥치면 모두 다 죽는다고 야단법석입니다. 별 볼일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빛이 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를 로마로 가게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24절에서 25절 말씀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러분! 사도 바울의 이런 담대한 선포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소원! 오래 전에 가졌던 로마를 향한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비전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는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기에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배를 로마로 이끌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 배에서 죽음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향해 담대하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우리가 인생의 배를 타고 감에 있어 풍랑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별의 별 희한한 일들이 터질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의 담대함, 자신감의 배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 소원, 비전, 뜻. ‘나는 이렇게 주를 위해 살리라!’ 이 거룩한 사명을 붙든다면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지켜주실 것이고, 인생의 모든 방해물이 있음에도 우리의 목적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같이 28절과 29절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확한 때에 가장 기가 막힌 방식으로 사도 바울을 로마에 이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과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 소원과 비전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결단코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막을 자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소원과 아름다운 비전을 여러분이 많이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소원 바로 그것을 우리가 품고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신감이요, 담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기에 저와 여러분은 늘 항상 승리의 예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후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기에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 안에서 살고 있음에도 자꾸 길이 막히고 점점 더 힘들어진다 해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험난한 인생길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살고자 애쓰고 힘쓸 때에 영적 싸움에서 넉넉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울의 세 가지 소원
롬 15장 22~33절 / 김준범목사
마게도냐와 고린도 지역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복음의 빚진 자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27절).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신령한 것을 받았으니 빚진 자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과 육신의 것을 나누는 것은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27절). 그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고 풍족해서 도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고 극심한 가난으로 힘들었지만, 오히려 기쁨과 자원함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습니다(26절, 고후 8:2). 교회 역사 가운데 모든 신실한 교회들이 다 그렇게 했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것도 영국과 미국과 호주와 캐나다와 화란의 교회와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많은 젊은 선교사들을 이곳에 보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지만, 낯선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후원하였습니다.
토론토 대학교의 의학교수였던 올리버 에비슨 박사는 조선에 의료 선교가 필요하다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강연에 감명을 받아 교수직을 그만 두고 아내와 세 자녀를 데리고 조선 땅에 왔습니다(1893년 8월). 7년 동안의 사역 후 안식년으로 잠시 귀국한 에비슨은 뉴욕에서 열린 만국 선교대회에 참석해서 조선의 선교에 대해 발표하면서, 보다 큰 규모의 병원 설립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는데, 그의 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은 한 노인이 그에게 찾아와 병원 건축 기금 1만 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그 장로님의 이름은 바로 루이스 세브란스(1838~1913)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이 설립되었습니다. 세브란스 씨는 1907년에 서울에 직접 와서 병원의 건물을 보고는 만족해하면서, 의학생들을 가르칠 공간과 입원실이 없는 것을 보고 3만 달러를 추가로 기부하였습니다. 그 건물이 완공되던 해인 1913년에 세브란스 씨는 별세했지만, 그 자녀들은 세브란스 장로님의 유지를 따라 세브란스 병원에 12만 4500달러를 더 기부했다고 합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22-24, 28-29절)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일을 마친 후에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로마에 가기를 소원하였습니다(22-23절, 롬 1:10-13). 바울은 왜 그토록 로마에 가기를 소원하였습니까?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과 복음 안에서 교제하면서 로마 교회를 복음 위에 더욱 굳건하게 세우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24절). 로마 교회는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로마 교회는 지정학적으로 볼 때 이방인 선교의 요충지였습니다. 동시에 로마 교회는 매우 세속적인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종교 백화점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이방 종교들이 있었습니다. 로마는 그런 로마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만일 로마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정확하게 붙잡지 못하여 변질되고 흔들리면 로마 제국 내의 복음 전파가 크게 위축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바울은 이를 염려하여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의 복음의 진수를 전해주고서 그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말씀으로 권면하고 더 잘 세워주기를 원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가 바울의 선교 사역의 후원 교회가 되고 동역 교회가 되어주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이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24절)고 말할 때에, 바울은 바로 이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바울의 1,2,3차 선교 여행은 안디옥 교회가 주로 후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 교회도 이방인 선교의 책임과 부담을 져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로마의 이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빚진 자로서 로마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꼭 로마에 가서 그곳의 성도들과 교제하고 그들의 후원을 받아 스페인에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23-24, 28-32절)
또한 바울은 로마를 지나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서바나로 가리라”(28절). 사도 바울은 이사야 66장에 예언된 대로 “다시스”에도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을 보기를 원했습니다(롬 15:21; 사 66:19 참고). 다시스는 다름아닌 스페인의 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꼭 스페인에서도 복음 전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스페인에 가기까지에는 여러 험난한 일들이 예상되었습니다. 당장 예루살렘에 가서도 유대 땅에 있는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31절)로 인해 거센 반발이 예상되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것 역시 이제까지 여러 번 길이 막혀왔던 일입니다. 선한 일이라고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에는 언제나 도전과 반대와 위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열망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였고,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30-32절).
우리도 우리의 남은 삶에 대한 분명한 소원과 꿈과 열망과 계획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은 삶에 대해 어떤 계획과 목표와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이럭저럭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 땅에서 허투루 살다가 주님 앞에 서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위해 하나라도 무언가를 더 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모든 불편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무언가를 계속 꿈꿨고 소원했고 열망했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의 꿈과 열망과 소원은 복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모든 허탄한 소원을 버리고, 선한 것을 소원하고 꿈꾸고 계획하고 열망하며 기도합시다. 그 소원을 위해 힘써 일합시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올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충성스럽게 그 일을 하고, 또한 교회의 복음 사역에 동참합시다. 그렇게 살 때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함께 해주시며 우리의 삶을 복 주실 것입니다(33절). 그렇게 살다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 하시는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가리라
이재훈목사 / 롬 15:22~33
오늘 본문에 이르러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중요한 목적이 나타납니다. <로마서>는 복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서신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설명하는 목적이 교리적인 논쟁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선교적 목적을 위해 설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이 선교의 도구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자체로 선교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능력을 체험한 이들은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전해지도록 하는 일에 기쁨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만일 이 일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자일 수 있습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선교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선교 대상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복음 전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기쁨의 일입니다.
지난 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 직무를 받은 일,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일을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받는 은혜가 있고, 나를 통해서 은혜가 전달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한 중요한 목적을 소개합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주후 57년경 <로마서>를 썼습니다. 고린도에서의 사역, 로마 제국 동쪽 변방에서 사역을 마치고 이제 서쪽 스페인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예루살렘이 기근으로 인해 극심한 가난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로마 교회를 방문해 성도들과 얼마 동안 교제하고, 기쁨을 나누고, 서로 격려하고, 로마 교회의 후원을 받아서 스페인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4차 전도여행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곧 선교단체
“내가 스페인에 갈 때 여러분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내가 지나는 길에 여러분에게 들러 얼마간 여러분과 기쁨을 나눈 후에 여러분의 후원으로 그곳에 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24절).
바울이 고린도에서 이제 서버나(스페인)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는 길에 로마 교회에 들러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신령한 은사를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롬 1:11)고 했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 머무르면서 얼마 기간 동안 휴식을 취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지역에 영적 전쟁이 매우 심했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에 바울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휴식도 취하고, 로마 교회의 후원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로마 교회의 후원을 기대하는 이유는스페인이 복음의 불모지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중심지인 로마 교회는 그래도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습니니다. 그래서 그들의 후원을 받아 최종 목적지인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한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마지막 부분에서 후원에 관한 것을 잠시 언급한 것 외에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복음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집중적으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 교회에게 후원을 받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로마 교회가 복음으로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복음 안에서 하나 되고, 복음으로 건강하게 세워지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후원하는 것이 당연하고, 기쁨의 일이며, 논란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무슨 일을 하든지 논란이 되고, 다툼이 되고, 어려워집니다.
온전한 복음을 깨닫고 체험하는 교회는 곧 선교 단체가 됩니다. 바울 시대에는 선교 단체가 따로 없었습니다. 교회가 곧 선교단체였습니다. 안디옥교회가 곧 안디옥 선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복음 안에서 잘 세움으로 로마 교회가 곧 로마 선교회 역할을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에 있지만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 자신이 로마를 여러 차례 방문하고자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로마 동쪽 지역에 회개할 일을 계속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동부 지역의 일이 잘 마무리 되었고, “여기까지다”라는 하나님의 신호를 확인했기에 새로운 지역, 서쪽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과거 아메리카 대륙 동부 지역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서부를 향해 개척해 나가듯이, 당시 로마 제국에서 스페인은 문명 지역의 거의 끝부분, 당시로 말하면 땅 끝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물론 미개척 된 많은 땅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로마 지역에서는 땅 끝과 같은 지역이 스페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쪽을 향하여,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그 지역을 향해서 나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자 했는데,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주셨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먼저 방문해서 마게도니야, 아가야 지역 성도들이 보낸 헌금을 전달하고 스페인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은행에서 송금하는 체계가 없었기에 사람들이 일일이 전달해야 했습니다.
바울의 향후 일정과 계획 등을 보면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구별할 줄 아는 영적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뜻도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울이 하고자 하는 것은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 스페인으로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넓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서 로마 교회를 먼저 가고자 했는데, 하나님이 동쪽 지역에 더 초점을 두도록 했고, 예루살렘교회를 가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도 그는 아시아 지역에 더 머물며 사역하고자 했는데, 성령님이 막으시고 유럽으로 건너가게 하셔서 빌립보교회가 탄생하고, 마게도니아 대륙으로 건너가 사역해야 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께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 하나님이 시급하게 하고자 하시는 일들을 잘 분별합니다. 바울에게는 자신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으로 가고, 로마 교회를 경유해서 가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는데 정반대인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예루살렘에 들러 구제헌금을 전달하고, 그들과 함께 서버나(스페인)로 가고자 한다는 계획을 편지에 담아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세 개 지역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로마, 스페인입니다. 이 세 지역을 사도 바울은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늘 포함해야 할 선교의 중요한 영역, 총체적 선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꼭 포함해야 할 요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제선교의 시급성
첫째, 예루살렘교회를 향해서 구제선교의 시급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기꺼이 얼마를 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쁨으로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진 사람들입니다. 만일 이방 사람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들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적인 것들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25~27절).
‘그러나 지금은’이라는 단어는 바울은 곧바로 로마 교회에 가서 스페인으로 가고자 원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마케도니아, 아가야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을 먼저 전달해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빚을 갚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를 통해서 복음이 전달되었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우리에게 흘러왔으니 그들의 육신적인 필요, 가난 가운데 있는 그들을 우리가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마케도니아, 아가야 사람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드린 헌물 가운데는 바울에 대한 후원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 진정한 향기는 어디에서 날까요? 강제적, 의무적으로 하는 일에는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일이 되긴 합니다. 그러나 향기는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향기는 지원함에서 나옵니다. 시키지 않아도, 부탁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서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따라 자원해서 헌신함을 하나님이 향기로 받으십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서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모금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기쁘게 자원해서 드려진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드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구제하는 일. 지구촌에 기근과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끊임없는 후원이 있지만, 여전히 가난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에게 삶의 일부분을 나눠서 끊임없이 도와야 합니다. 선교에서 구제는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배고픈 이들에게 빵을 만들어 먹여주셨습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고 사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들리지 않습니다. 시급한 일,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구제와 구호가 선교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전방개척선교의 중요성
둘째, 바울이 바라보고 있는 지역은 스페인입니다. 전방개척선교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곳에 복음 전하기를 열망했습니다. 이는 남의 터 위에 집을 짓지 않으려는 뜻에서였습니다”(20절).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그들에게 이 열매를 확실히 전달한 후에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가려고 합니다”(28절).
‘이 열매’는 구제헌금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드려진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 성도들의 향기로운 제물, 하나님께 드려진 열매를 확실하게 전달하고 스페인으로 가고자 합니다. 최종 목적지는 스페인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로마 제국의 서쪽 변방, 땅 끝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들려지지 않는 곳,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곳을 향해서 끊임없이 사역지를 옮겼습니다.
어느 병원에 갔더니 이런 표어가 있었습니다. ‘First and Best.’ 첫 번째 그리고 최고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바울이 떠올랐습니다. 최초 이방인의 사도이면서 가장 모범적인 사역자가 바울입니다. 1~3차 전도여행을 마치는 시점에 그는 또 다시 스페인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4차 전도여행을 꿈꾸는 바울의 멈추지 않는 열정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 바울이 <로마서>의 표현대로 로마를 경유해서 스페인으로 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일단 예루살렘에 가서 구제헌금을 전달한 것 자체가 엄청나게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 여정에서 바울이 스페인으로 갔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서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바울이 꾸었던 스페인 선교의 꿈으로 인한 열매가 무엇일까요? 톰 라이트라는 학자는 “하나님이 스페인으로 가고자 <로마서>를 썼던 것 자체가 더 큰 열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스페인으로 가서 직접 선교를 했어도 열매가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로마서>가 기록된 통로가 됨으로서 전 세계에 미친 복음의 영향력은 바울이 스페인으로 가서 사역한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페인 선교를 꿈꾼 바울을 통해서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일리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전으로 꿈꾸는 사람들의 목적 그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하지 않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지상명령, 위대한 계명
셋째, 바울이 바라보았던 로마 교회는 선교적 교회로서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압니다”(29절).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간다고 했습니다. 그냥 복이 아니라 충만한 복이요, 세상의 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야 할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충만한 복을 깨닫고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최우선 사명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 교회 안에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두 가지 명령과 계명이 있습니다. 지상 명령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데 그 이전에 <요한복음> 13장에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지상명령이 있고, 위대한 계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주심으로 복음 안에서 함께 충만하게 합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망의 복이요, 위로의 복이요,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축복을 복음 안에서 충만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서>를 읽고 묵상한 온누리교회가 바울이 로마 교회가 경험하기를 원했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누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동체, 순, 가정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 흘러넘칠 때 온누리교회를 통해서 온 열방에 바울이 꿈꿨던 전방개척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와 같은 지역에 구제선교가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교회들이 선교적 교회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선교 역사는 중보기도의 역사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에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 역사는 곧 중보기도의 역사입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고 성령의 사랑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해 여러분도 나와 함께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 주십시오. 내가 유대에 있는 순종치 않는 사람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며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내 봉사가 성도들에게 받을 만한 것이 되며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쁨으로 여러분에게 가서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아멘”(30~33절).
세 가지 기도제목입니다. 유대에 있는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의 복음을 배격하고 바울을 공격하는 이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구제봉사가 열납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쁨으로 로마 교회와 함께 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입니까?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는 중보기도를 통해서 일했습니다. 위대한 꿈을 꾸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위대한 기도가 드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기도 속에 파묻혀야 열매 맺습니다. 위대한 꿈일수록 많은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함께 하는 합력, 합심, 중보기도입니다. 선교사를 위해서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선교사들이 만나는 모든 고난과 장벽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풀릴 것입니다. 온누리교회가 더욱 복음 안에서 강건한 교회로 세워질 것입니다. 끊임없이 함께 마음을 다해 복음 전파를 위해서 기도하는 온누리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구원, 목적으로서의 예수
롬 15장 22~29절 / 박용규목사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경험하고서도 얼마 가지 못해서 기쁨, 감격, 동기도 시들해진 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변화와 성숙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분명한 목적을 깨달았을 때, 우리의 삶은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성경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 다니엘 등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부르신 삶의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따라가야 할 예수님의 생애가 그러했습니다. 요한복음 8:29은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목적을 따라 사역하셨을 때, 혼자 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셨다고 고백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삶보다 더 축복된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노력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입니다. 열심히 공부했을 때,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나 땀 흘려서 최선을 다해 일을 하면 경제적인 안정을 얻는 것입니다. 땀 흘려 운동하면 건강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둘째, 내가 노력해서 안 되는 변화가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서 거룩해지는 변화, 복음의 진리를 발견했을 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과 평안, 현실에 대한 염려,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로마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은 유대교에 정통한 율법학자였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인생의 궤도가 바뀐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의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고백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자기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한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확실하게 믿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서 알아가는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네 복음서 중에 한 권이라도 진지하게 읽고 묵상하면서 예수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면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릭 워렌 목사는 자신의 책인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 Life)"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시작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의 근원이시다.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목적으로서의 예수의 삶은 어떻게 세워질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저항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을 알라(22-24절)
사도바울은 로마서의 기록목적에 대해서 다시 기술하면서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에 가려고 여러번 노력했지만 방해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으면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 자신이 이곳에서는 일할 곳이 없으며,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충분히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서머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당시 서머나는 오늘의 스페인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서머나를 문명의 끝으로 보았습니다.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의 로마교회를 향한 믿음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저항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을 자신 속에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 1장 16절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 능력이 자신에게 임했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을 저항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에까지, 그곳에서 로마교회 성도들과 교제하고 서머나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도, 선교, 구제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옳고 틀렸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는 의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서 지옥 가야 할 인생들이 천국 백성이 된 것 아닙니까? 오늘 사도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자신의 열심과 능력이 어떤 업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헌신과 충성이 하나님의 열심과 은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복음의 능력이 자신 가운데 임하므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땅 끝까지 가서 흑암 속에 있는 영혼들을 생명의 세계로, 진노와 형벌 가운데 있는 영혼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저항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이라는 고백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과 신앙을 자신이 선택해서 얻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었고 자신이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헌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의 지혜, 능력, 열심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면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자랑이 나옵니까? "나는 당신과 달라!" 라고 외치며, 자신은 다른 이들과 영적인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보상 받을 조건을 꺼내놓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독살스러운 말 한마디에 브엘세바로 도망을 가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내 생명을 거두어 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능력으로 바알의 제단을 불태우고 영적승리를 했었는데, 왜 이 모양입니까?" 라고 한탄을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열왕기상 19장 18절은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갈멜산의 영적전투는 하늘에서 불이 임한 능력이 너의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의 가치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영원을 준비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야 끊임없는 세상으로부터의 유혹과 도전에 쓰러지지 않고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조국교회 가장 큰 약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잘 믿어서 어떻게 성공하느냐? 어떻게 기도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는가?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어떻게 더 높이 쓰시는가?’ 하는 쪽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좋으면 우리를 더 낮추십니다.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때로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게 하십니다. 가혹한 삶의 현실을 맞이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저항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을,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이 은혜를 입은 자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끼리 모여서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지적하는 삼류인생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저항할 수 없는 십자가의 은혜 앞에 붙들려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 겸손과 온유로 섬기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이 삶의 수단으로서 예수가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예수가 될 때, 참된 구원이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 은혜의 복음에 빚진 자로 살라(26-27절)
바울은 서머나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였습니다. 바울은 선교사역을 위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변경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과 기근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대인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궁핍한 상황이 마게도냐, 현재 그리스 북부 알바니아 지역, 아가야는 그리스 남부지역,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4절은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마게도냐 지역 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소개하면서 헌금을 단순히 자신의 소원을 위해서 드리는 물질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 위한 도구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드리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7절은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영적인 선물,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구제를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아가야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에게서 시작된 복음의 신령한 축복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영적인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죄악된 세상 속에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우리끼리 "나 구원 받았네~ 너 구원 받았네~ 우리 구원 받았네~" 하면서 찬양을 드리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정도의 수준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낸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 나라, 새로운 통치, 질서, 새로운 목적과 삶의 가치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에 빚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4절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라고 말씀합니다. 왜 사도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빚진 자로 고백하겠습니까?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했다는 고백입니다. 복음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기 위해서 죄인의 괴수처럼 살았던 자신을 부르시고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게 하신 하나님 은혜의 복음은 자신이 한 평생 붙잡을 수 있는 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기독교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강한 존재가 아니라 불안과 절망에 빠져있는 나약한 존재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신앙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라고 설파했습니다. 그의 나이 22세 때, 그가 쓴 일기에는 "온 세계가 다 무너져도 내가 붙들고 놓지 않을 진리,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내가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진리를 나는 발견해야 된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한 철학자도 진리를 찾기 위해 구도자의 삶을 살았는데,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복음이 우리의 삶에 수단,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라면, 하나님 은혜의 복음에 빚진 자로 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은행에 많은 부채를 갖고 있다면 마음에 얼마나 부담이 되겠습니까? ‘언제 저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잠이 오기나 하겠습니까? 그 빚을 다 갚았을 때 자유,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아갈 때에 목적으로서의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복음은 집착이나 중독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집착은 다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고전 13:4-7).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안전과 유익을 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랄드 메이(Gerald May) 라는 기독교 정신과 교수의 "중독과 은혜"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은혜는 억압과 중독, 그 밖의 모든 인간의 마음의 자유를 집착과 중독에서 벗어나게 한다" 라고 합니다. 복음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이 충만할 때, 복음에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왜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이 땅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확실한 목적이 있는 자들은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목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우편 그늘이 되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복음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자유를 맛보며 승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뜻과 다를 때
롬 15장 22~29절 / 이대성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님 뜻과 다를 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주님 뜻과 다를 때” 여러분! 이것이 진정 주님 뜻인 줄 믿고서 찬양하며 나아감에도 그 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고 확신하고서 힘차게 달려가는 데도 그 길이 막힐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풀어보려 안간 힘을 써 보지만 도무지 해결이 안 될 때 우린 이내 곧 절망하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에게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은 로마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고, 로마를 경유해서 서바나로 가고자 함이었습니다. 서바나는 현재의 스페인으로 그 당시에는 스페인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외에도 사도행전 19장 21절에 보면 로마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로마로 가고자 했던 목적은 무엇일까요? 다른 이유 없습니다.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서...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순수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가는 길은 잘 열리지 않았던 겁니다.
도대체 왜 로마로 가는 길이 자꾸 막혔을까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서 로마로 가려고 하는데 웬일인지 로마로 가는 길은 자꾸만 막히고 정반대 상황이 펼쳐져서 꼬이기만 하는 겁니다. 이럴 때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 할지라도 우린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계획에 차이가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를 향한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다같이 22절과 23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고자 했는데 여려 번 막혔다는 겁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만큼 가고자 하는 길이 막힐 때 그는 너무나도 힘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앞 길을 활짝 열어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 그 길이 자꾸만 막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해도 중요한 사실을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은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해 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꿈을 주십니다. 열정도 소원도 생기고 의욕이 넘쳐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하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생각대로 밀고 나가면 상황은 ‘전혀 아니올씨다.’인 겁니다. 바로 이 때 우리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 순간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 우리가 항상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때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핵심은 타이밍입니다. 그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타이밍이 뭡니까? 가장 적절한 때! 무조건 빠른 게 좋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그 타이밍을 모르면 굉장히 혼란스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주시고 어떤 말씀을 하셨다면 그 다음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고집과 방식으로 무조건 밀고 나가다 보면 반드시 사고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만 사고 다발 지역이 되고 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가장 정확한 때에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추는 것만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타이밍이 맞춰지지 않으면 엉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 대해서 반드시 이루어 주시겠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냐는 겁니다. ‘언제’라고 하는 분명한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이 ‘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게 하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그 때를 기다림에 있어 ‘내 욕망인가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한다면 그 다음은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에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마음!’ 이게 바로 믿음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탐정 소설을 읽어 보면 굉장히 흥미진진하지요? 그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소설 속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매 순간 긴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이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헤쳐 나가고...
그런데 여러분? 작가는 이런 긴장감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작가는 이미 풀 스토리를 다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읽는 사람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고 있지만 소설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다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타이밍의 귀재이십니다. 성경에 많은 예가 있지만 특별히 에스더서가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1도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고도 흥미진진하게 역사하신 책이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하만이라는 아주 간교한 사람이 왕을 설득해서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아 죽이고 이를 기화로 유대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세워 놓고는 교묘하게 악을 행하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날만 새면 모르드개가 죽고 유대인들이 몰살당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전날 밤 늦은 시각에 왕이 도무지 잠이 안 오는 겁니다. 그래서 왕실에 있던 역사 기록서를 가져오게 해서 그것을 읽게 됩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다 보니 놀랍게도 장대에 매달아야 할 사람은 모르드개가 아니라 하만이요, 모르드개는 오히려 상을 줘야 할 일등공신임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는 극적 사건이 모르드개가 매달리기 바로 전날 밤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왕이 잠이 안 온 것이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왕이 뒤척이다가 책을 읽게 되는 바로 그것이 우연이 아닌 겁니다.
이로 인해 대반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확한 순간에 하나님의 개입이 빛나는 책이 바로 에스더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에스더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 여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왕 바로의 손길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 마음에 안정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홍해가 딱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겁니다.
뒤에는 애굽의 병사들이 쫓아오면서 사막의 모래가 폭풍처럼 일어나고 있는 살벌한 바로 그 순간,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통과하게 하시고 추격해 오던 애굽 군사들이 적당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물벽이 합쳐지면서 그들을 수장시켜 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타이밍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정확하게 일하시는 스펙타클한 역사의 현장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확한 시계를 차고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시계를 차고 있지만,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계를 동시에 다 보고 계시다가 하나님의 때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역사에는 하나님의 카운트 다운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일이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시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요, 시간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가 시계를 다루듯이 하나님은 시간을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멈출 수도 있고, 늦출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태양을 멈춘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온전히 다스리시기에 우리 삶을 돌볼 수 있으십니다. 우리는 현재 시간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시간의 통제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전적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과 나중되시며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 길이 막힐 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길을 준비해 놓고서 우리로 하여금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더 낫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때에 따라 역사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일이 당장에 이루어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와 늘 함께 하심을 믿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늘 함께 하심을 내가 믿는다면 비록 지금 길이 꽉 막혀 있다 할지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하나님 뜻대로 기도했음에도 앞길이 꽉 막혀 있으면 너무나 성급하게도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정한 시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나도 모르게 초조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정한 시간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내 시간을 통제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늘 함께 하실진대 지금 앞길이 꽉 막혀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잠언 16장 3절과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여러분! 이 말은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일을 간섭해 주실 줄 믿고 확신하기에 나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시간을 가지고 움직이고 계심을 믿는다는 고백인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장 그 무엇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행동이 느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가장 최적의 순간에 최고의 방법으로 저와 여러분을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로마를 가고자 했던 사도 바울의 계획이 여러 번 막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참으로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 가고자 했던 로마행이 막히다가 사도행전 후반부에 길이 열리는데, 놀랍게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되고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생각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복음을 위해 헌신해 왔는데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입니다. 로마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 바울은 미래가 불투명해 보입니다.
사자의 밥이 될 수도 있고, 검투사에 찔려 죽을 수도 있는 그런 불행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복음을 위해 모든 걸 바치던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가고자 했던 로마가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그 누구보다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사도 바울을 길이 척척 열리게 하지 않으시고 왜 지금 이렇게 죄인으로 가게 하시는 걸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다 보면 이처럼 우리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면 고난이 올 것이다.’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분들은 다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고난이 닥치면 받아들이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막힘 속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후에 많은 유대인 동족들이 그의 신변을 노렸습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바울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았단 말이지요.
따라서 그가 혼자 로마로 가려고 했다면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자객들,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던 사람들에게 로마로 가기도 전에 아마도 살해당했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죄수로 호송되어 가기 때문에 오히려 바울의 신변이 지켜진 겁니다.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까지 군인들이 바울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사도 바울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로마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기에 오히려 자기를 지키는 수비대는 물론이요, 고관대작들에게 변론하면서 예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열린 것입니다.
일례로 로마로 가는 도중에 풍랑이 일어나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죄수인 바울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무사히 빠져나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는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훨씬 더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한 가지 사건 그 이상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한 가지 사건 속에 수많은 비밀을 숨겨두고서 그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당장 무엇이 안 되면 죽느니 사느니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안달을 합니다. ‘하나님 빨리 빨리...’ 모든 게 다 빨리 빨리 입니다. 어떤 분은 조폭도 아닌데 지금 당장 하나님께 응답해 달라고 다그칩니다.
또 어떤 분은 나름 시간을 준다면서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 할 테니까 하나님께서 금식기도 끝나는 날 반드시 응답해 달라고... 안 그러면 자기 죽는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늘상 이렇다 보니 어떤 분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도까지 합니다. ‘하나님, 저는 인내심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제발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무조건 빠른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인 것입니다.
우리가 때를 말할 때 헬라어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얘기하는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알기 쉽게 한번 구분해 보겠습니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때, 카이로스는 특정한 때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크로노스는 세상적인 때를 말하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바로 그 때! 그 완전 안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카이로스의 때를 기다리면서 세상 때인 크로노스의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카이로스의 때를 바라보면서 크로노스의 시기를 인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의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입니다. 왜 우리는 일이 잘 안되면 울고불고 좌절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뜻이 더 강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식들에 대해서도 부모들이 실망하고 좌절하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만히 보면 그 이유는 부모 욕심과 의욕이 너무 강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신 뜻이 아니라 내 자식에 대한 욕망. 이것이 늦어지는 것 같으니까 마구 하나님께 닥달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이 너무 강해서 때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기에 날마다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에 내 고집이 꺾여서 온전히 순종하는 훈련.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기다림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내 욕망을 내려놓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장 그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쉽게 이루어지면 그게 불안한 겁니다.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은 기다리게 하시고 더 좋은 것은 더 기다리게 하십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려울까요? 내 힘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게 돌아갈 때 사람들은 자꾸만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은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신뢰하느냐?’ 그것은 기다림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그 기다림에 실패하면 승리할 수 없는 겁니다. 제가 받은 귀한 은혜는 바로 이 기다림을 통해 받은 은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큽니다. 아무리 좋은 뜻과 계획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심장에 심어주었던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것은 그가 가졌던 비전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신념 속에 심어주셨던 비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16절 이후에 보면 드디어 로마로 들어간 바울이 고관대작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소원했던 것이 다 이루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빌었던 소원은 사도 바울 개인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할진대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결코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언제 이루어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일을 왜 하려고 하는가?’ 이 질문 앞에 명확한 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 소원과 열망의 출처가 어디냐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었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만사를 다 제쳐두고서라도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로마로 가는 도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났을 때. 그 때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다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죄수인 바울이 일어나 지휘를 합니다. 사도행전의 이 마지막 장면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장면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떵떵거리고 자랑하고 교만한 것 같은데 유라굴로 같은 광풍이 한번 불어 닥치면 모두 다 죽는다고 야단법석입니다. 별 볼일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빛이 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를 로마로 가게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24절에서 25절 말씀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러분! 사도 바울의 이런 담대한 선포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소원! 오래 전에 가졌던 로마를 향한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에 대한 비전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는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기에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배를 로마로 이끌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 배에서 죽음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향해 담대하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우리가 인생의 배를 타고 감에 있어 풍랑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별의 별 희한한 일들이 터질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의 담대함, 자신감의 배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거룩한 비전을 꽉 붙든다면 그 비전을 이루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지켜주실 것이고, 인생 여정에 있어 그 어떤 방해물이 있어도 우리의 목적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28절과 29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확한 때에 가장 기가 막힌 방법으로 사도 바울을 로마에 이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과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 소원과 비전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결단코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막을 자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소원과 아름다운 비전을 여러분이 많이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소원 바로 그것을 우리가 품고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의 자신감이요, 담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기에 저와 여러분은 늘 항상 승리의 예감을 가지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후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 사명을 발견하고 주님 뜻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일진대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믿음 안에서 살고 있음에도 자꾸만 길이 막히고 점점 더 힘들어진다 해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고서 다시금 힘차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험난한 인생길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발견하고 주님 뜻대로 살고자 애쓰고 힘쓸 때에 사탄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넉넉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는 길이 자꾸 막힐 때
이대성목사 / 롬 15:22-29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가는 길이 자꾸 막힐 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가는 길이 자꾸 막힐 때” 여러분! 나는 100%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행동으로 옮겼는데 나중에 보니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적은 없으셨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분별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서 담대히 나아갔는데 생명의 빛이 아닌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다가 그 길이 갑자기 막힐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장애물이 생기고, 자꾸만 내 길이 가로막힐 때가 있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도대체 어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에게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은 로마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고, 로마를 경유해서 서바나로 가고자 함이었습니다. 서바나는 현재의 스페인으로, 그 당시에는 스페인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오늘 본문 외에도 사도행전 19장 21절에 보면 로마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토록 로마로 가고자 했던 목적은 무엇일까요? 다른 이유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를 위해서...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순수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가는 길은 잘 열리지 않았던 겁니다. 도대체 왜 로마로 가는 길이 자꾸 막혔을까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서 로마로 가려고 하는데 웬일인지 로마로 가는 길은 자꾸만 막히고 오히려 정반대 상황이 펼쳐져서 점점 더 꼬이기만 하는 겁니다. 가는 길이 자꾸 막힐 때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계획과 인간 계획에 차이가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향한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다같이 22절과 23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고자 했는데 여러 번 막혔다는 겁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밀어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도 왜 그 길이 자꾸만 막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해도 중요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의 뜻은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해 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꿈을 주십니다. 열정도 일어나게 하고, 소원도 일어나게 하고, 뭔가 충만해 지는 의욕이 넘쳐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하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생각대로 밀고 나가면 상황은 ‘전혀 아니올씨다.’인 겁니다. 바로 이 때 우리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 순간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 우리가 항상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때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핵심은 타이밍입니다.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타이밍이 뭡니까? ‘가장 적절한 때!’ 무조건 빠른 게 좋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그 타이밍을 모르면 굉장히 혼란스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주시고 어떤 말씀을 하셨다면 그 다음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고집과 방식으로 무조건 밀고 나가다 보면 반드시 사고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만 사고 다발 지역이 되고 마는 겁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가장 정확한 때에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추는 것만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타이밍이 맞춰지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 대해서 반드시 이루어 주시겠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냐는 겁니다. ‘언제’라고 하는 분명한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이 ‘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게 하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그 때를 기다림에 있어 ‘내 욕망인가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하는 작업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한다면 그 다음은 가만히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에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마음! 이게 바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탐정 소설을 읽어 보면 굉장히 흥미진진하지요? 그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소설속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매 순간 긴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이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헤쳐 나가고...
그런데 여러분? 작가는 이런 긴장감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작가는 이미 풀 스토리를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읽는 사람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고 있지만, 소설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다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타이밍의 귀재이십니다. 성경에 많은 예가 있지만 특별히 에스더서가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1도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고도 흥미진진하게 역사하신 책이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하만이라는 아주 간교한 사람이 왕을 설득해서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아 죽이고 이를 기화로 유대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세워 놓고는 교묘하게 악을 행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제 날만 새면 모르드개가 죽고 유대인들이 몰살당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전날 밤 늦은 시각에 왕이 도무지 잠이 안 오는 겁니다. 그래서 왕실에 있던 역사 기록서를 가져오게 해서 그것을 읽게 됩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다보니 놀랍게도 장대에 매달아야 할 사람은 모르드개가 아니라 하만이요, 모르드개는 오히려 상을 줘야 할 일등공신임을 알게 된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는 극적 사건이 모르드개가 매달리기 바로 전날 밤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왕이 잠이 안 온 것이 우연히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왕이 뒤척이다가 책을 읽게 되는 바로 그것이 우연이 아닌 겁니다.
이로 인해 대반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확한 타이밍에 하나님의 개입이 빛나는 책이 에스더서입니다. 그런데 에스더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 여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손길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 안식을 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홍해가 딱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겁니다. 뒤에는 애굽의 병사들이 쫓아오면서 사막의 모래가 폭풍처럼 일어나고 있는 살벌한 바로 그 순간,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통과하게 하시고 추격해 오던 애굽 군사들이 적당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물이 침몰하면서 그들을 수장시켜 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타이밍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정확하게 일하시는 스펙타클한 역사의 현장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확한 시계를 차고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시계를 차고 있지만,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계를 동시에 다 보고 계시다가 하나님의 때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역사에는 하나님의 카운트 다운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일이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시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요, 시간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가 시계를 다루듯이 하나님은 시간을 다루십니다. 시간을 멈출 수도 있고, 늦출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태양을 멈춘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온전히 다스리시기에 우리 삶을 돌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시간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시간의 통제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과 나중되시며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가는 길이 자꾸 막힐 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길을 준비해 놓고서 우리로 하여금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우리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더 낫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다름 아닌 때에 따라 역사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이 당장에 이루어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즉 하나님의 손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비록 지금 가는 길이 꽉 막혀 있어도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는 길이 막힐 때 너무나도 급하게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정한 시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금방 초조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정한 시간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간을 통제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잠언 16장 3절과 9절 말씀입니다.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여러분! 이 말은 그 모든 흐름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시간을 가지고 움직이고 계심을 온전히 믿기에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장 무엇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답답해 할 정도로 행동이 굼뜬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최상의 순간에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를 가고자 했던 계획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이 어디에 나옵니까?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후반부에 보면 로마로 들어가는 사도 바울의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 가고자 했던 로마행이 막히다가 사도행전 후반부에 길이 활짝 열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죄수가 되어서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가고 있습니다. 로마의 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되어가는 바울을 만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생각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복음을 위해 헌신해 왔는데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입니다. 로마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 바울은 미래가 불투명해 보입니다.
사자의 밥이 될 수도 있고, 검투사에 찔려 죽을 수도 있는 그런 불행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 복음을 위해 모든 걸 바치던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가고자 했던 로마로 죽으러 갈 수도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예수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사도 바울을 길이 척척 열리게 하지 않으시고 왜 지금 이렇게 죄인으로 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다 보면 이처럼 우리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면 고난이 올 것이다.’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분들은 다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고난이 닥치면 받아들이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막힘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후에 많은 유대인 동족들이 그의 신변을 노렸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그래서 곳곳에서 바울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단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가 혼자 로마로 가려고 했다면 아마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자객들,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던 사람들에게 로마로 가기 전에 살해당했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죄수로 호송되어 가기 때문에 오히려 바울의 신변이 지켜진 겁니다.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까지 군인들이 바울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사도 바울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로마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의 죄수였기에 오히려 자기를 지키는 수비대는 물론이요, 고관들에게 변론하면서 예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접근할 수 없는 그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열린 것입니다.
일례로 로마로 가는 도중에 풍랑이 일어나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죄수인 바울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무사히 빠져나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하심, 하나님의 배려는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훨씬 더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지요.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한 가지 사건 그 이상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한 가지 사건 속에 수많은 비밀을 숨겨두고서 나아갈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당장 무엇이 안 되면 죽느니 사느니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안달을 합니다. “하나님 빨리 빨리...” 모든 게 다 빨리 빨리 입니다.
어떤 분은 조폭도 아닌데 지금 당장 하나님께 응답해 달라고 다그칩니다. 또 어떤 분은 나름 시간을 준다면서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 할테니까 하나님께서 금식기도 끝나는 날 반드시 응답해 달라고... 안 그러면 자기 죽는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늘상 이렇다 보니 어떤 분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도까지 합니다. ‘하나님, 저는 인내심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에게 지금 당장 인내심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조건 빠른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
여러분! 우리가 때를 말할 때마다 헬라어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얘기하는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알기 쉽게 한 번 구분해 보겠습니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때요, 카이로스는 특정한 때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크로노스는 세상적인 때를 말하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바로 그 때! 그 완전 안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카이로스의 때를 기다리면서 세상 때인 크로노스의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카이로스의 때를 바라보면서 크로노스의 시기를 인내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의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입니다. 왜 우리는 일이 잘 안되면 울고불고 좌절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뜻이 너무 강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식들에 대해서도 부모들이 실망하고 좌절하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만히 보면 그 이유는 부모 욕심과 의욕이 너무 강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신 뜻이 아니라 내 자식에 대한 욕망. 이것이 늦어지는 것 같으니까 마구 하나님께 닦달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이 너무 강하면 때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기에 날마다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고집이 꺾여서 온전히 순종하는 훈련!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기다림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내 욕망을 내려놓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당장 그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쉽게 이루어지면 그게 불안한 겁니다.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은 기다리게 하시고 더 좋은 것은 더 기다리게 하십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려울까요? 내 힘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게 돌아갈 때, 사람들은 자꾸만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 그것은 기다림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그 기다림에서 실패하면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귀한 은혜는 바로 이 기다림을 통해 받은 은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큽니다. 아무리 좋은 뜻과 계획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심장에 심어주었던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것은 그가 가졌던 비전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신념 속에 심어주셨던 비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16절 이후에 보면 드디어 로마로 들어간 바울이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소원했던 것이 다 이루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빌었던 소원은 사도 바울 개인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표가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결코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함에 있어 그것이 언제 이루어지느냐가 중요치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일을 왜 하려고 하느냐?’ 이 질문 앞에 명확한 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 소원과 열망의 출처가 도대체 어디냐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었다면 하나님은 세상 만사를 다 제쳐두고서라도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로마로 가는 도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났을 때, 그 때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다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죄수인 바울이 일어나 지휘를 합니다. 사도행전의 이 마지막 장면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장면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떵떵거리고 자랑하고 교만한 것 같은데 유라굴로 같은 광풍이 한번 불어 닥치면, 모두 다 죽는다고 야단법석입니다. 별 볼일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빛이 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를 로마로 가게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24절에서 25절 말씀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러분! 이러한 사도 바울의 담대한 선포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소원! 오래 전에 가졌던 로마를 향한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비전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는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기에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배를 로마로 이끌어 주실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 배에서 죽음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향해 담대하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힘차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우리가 인생의 배를 타고 감에 있어 풍랑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별의 별 희한한 일들이 터질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의 담대함, 자신감의 배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주를 위해 살리라!’ 이 거룩한 사명을 온전히 붙든다면 그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지켜주실 것이고, 그 어떤 방해 속에서도 우리 목적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28절과 29절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확한 때에 가장 기가 막힌 방식으로 사도 바울을 로마에 이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의 소원과 비전은 무엇이십니까? 그 소원과 비전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결단코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막을 자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소원과 아름다운 비전을 여러분이 많이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소원!’ 바로 그것을 우리가 품고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우리의 자신감이요, 담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기에 우리는 늘 항상 승리의 예감을 가지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주님 뜻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기에 나를 통해서 하나님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비록 믿음 안에서 살고 있음에도 자꾸 길이 막히고 점점 더 힘들어진다 해도 당신이 택하신 자녀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 주의 백성답게 험난한 인생길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 뜻을 분별하고 주님 뜻대로 살고자 애쓰고 힘쓸 때에, 사탄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함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는 길이 자꾸 막힐 때
이대성목사 / 롬 15:22-29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가는 길이 자꾸 막힐 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가는 길이 자꾸 막힐 때” 여러분! 나는 100%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행동으로 옮겼는데 나중에 보니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적은 없으셨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분별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서 담대히 나아갔는데 생명의 빛이 아닌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다가 그 길이 갑자기 막힐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장애물이 생기고, 자꾸만 내 길이 가로막힐 때가 있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도대체 어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에게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은 로마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고, 로마를 경유해서 서바나로 가고자 함이었습니다. 서바나는 현재의 스페인으로, 그 당시에는 스페인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오늘 본문 외에도 사도행전 19장 21절에 보면 로마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토록 로마로 가고자 했던 목적은 무엇일까요? 다른 이유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를 위해서...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순수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가는 길은 잘 열리지 않았던 겁니다. 도대체 왜 로마로 가는 길이 자꾸 막혔을까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서 로마로 가려고 하는데 웬일인지 로마로 가는 길은 자꾸만 막히고 오히려 정반대 상황이 펼쳐져서 점점 더 꼬이기만 하는 겁니다. 가는 길이 자꾸 막힐 때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계획과 인간 계획에 차이가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향한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다같이 22절과 23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고자 했는데 여러 번 막혔다는 겁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밀어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도 왜 그 길이 자꾸만 막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해도 중요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의 뜻은 내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해 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꿈을 주십니다. 열정도 일어나게 하고, 소원도 일어나게 하고, 뭔가 충만해 지는 의욕이 넘쳐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하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생각대로 밀고 나가면 상황은 ‘전혀 아니올씨다.’인 겁니다. 바로 이 때 우리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 순간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 우리가 항상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때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핵심은 타이밍입니다.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타이밍이 뭡니까? ‘가장 적절한 때!’ 무조건 빠른 게 좋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그 타이밍을 모르면 굉장히 혼란스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주시고 어떤 말씀을 하셨다면 그 다음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고집과 방식으로 무조건 밀고 나가다 보면 반드시 사고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만 사고 다발 지역이 되고 마는 겁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가장 정확한 때에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추는 것만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타이밍이 맞춰지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 대해서 반드시 이루어 주시겠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냐는 겁니다. ‘언제’라고 하는 분명한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이 ‘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게 하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그 때를 기다림에 있어 ‘내 욕망인가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하는 작업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한다면 그 다음은 가만히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에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마음! 이게 바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탐정 소설을 읽어 보면 굉장히 흥미진진하지요? 그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소설속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매 순간 긴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이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헤쳐 나가고...
그런데 여러분? 작가는 이런 긴장감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작가는 이미 풀 스토리를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읽는 사람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고 있지만, 소설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다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타이밍의 귀재이십니다. 성경에 많은 예가 있지만 특별히 에스더서가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일도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강력하고도 흥미진진하게 역사하신 책이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하만이라는 아주 간교한 사람이 왕을 설득해서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아 죽이고 이를 기화로 유대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세워 놓고는 교묘하게 악을 행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제 날만 새면 모르드개가 죽고 유대인들이 몰살당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전날 밤 늦은 시각에 왕이 도무지 잠이 안 오는 겁니다. 그래서 왕실에 있던 역사 기록서를 가져오게 해서 그것을 읽게 됩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다보니 놀랍게도 장대에 매달아야 할 사람은 모르드개가 아니라 하만이요, 모르드개는 오히려 상을 줘야 할 일등공신임을 알게 된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는 극적 사건이 모르드개가 매달리기 바로 전날 밤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왕이 잠이 안 온 것이 우연히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왕이 뒤척이다가 책을 읽게 되는 바로 그것이 우연이 아닌 겁니다.
이로 인해 대반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확한 타이밍에 하나님의 개입이 빛나는 책이 에스더서입니다. 그런데 에스더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 여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손길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 안식을 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홍해가 딱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겁니다. 뒤에는 애굽의 병사들이 쫓아오면서 사막의 모래가 폭풍처럼 일어나고 있는 살벌한 바로 그 순간,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통과하게 하시고 추격해 오던 애굽 군사들이 적당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물이 침몰하면서 그들을 수장시켜 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타이밍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정확하게 일하시는 스펙타클한 역사의 현장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확한 시계를 차고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시계를 차고 있지만,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계를 동시에 다 보고 계시다가 하나님의 때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역사에는 하나님의 카운트 다운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일이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시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요, 시간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가 시계를 다루듯이 하나님은 시간을 다루십니다. 시간을 멈출 수도 있고, 늦출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태양을 멈춘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온전히 다스리시기에 우리 삶을 돌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시간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시간의 통제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과 나중되시며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가는 길이 자꾸 막힐 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길을 준비해 놓고서 우리로 하여금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우리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더 낫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다름 아닌 때에 따라 역사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이 당장에 이루어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즉 하나님의 손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비록 지금 가는 길이 꽉 막혀 있어도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는 길이 막힐 때 너무나도 급하게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정한 시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금방 초조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정한 시간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간을 통제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잠언 16장 3절과 9절 말씀입니다.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여러분! 이 말은 그 모든 흐름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시간을 가지고 움직이고 계심을 온전히 믿기에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장 무엇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답답해 할 정도로 행동이 굼뜬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최상의 순간에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를 가고자 했던 계획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이 어디에 나옵니까?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후반부에 보면 로마로 들어가는 사도 바울의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 가고자 했던 로마행이 막히다가 사도행전 후반부에 길이 활짝 열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죄수가 되어서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가고 있습니다. 로마의 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되어가는 바울을 만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생각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복음을 위해 헌신해 왔는데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입니다. 로마로 재판을 받으러 가는 바울은 미래가 불투명해 보입니다.
사자의 밥이 될 수도 있고, 검투사에 찔려 죽을 수도 있는 그런 불행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 복음을 위해 모든 걸 바치던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가고자 했던 로마로 죽으러 갈 수도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예수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사도 바울을 길이 척척 열리게 하지 않으시고 왜 지금 이렇게 죄인으로 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다 보면 이처럼 우리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면 고난이 올 것이다.’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분들은 다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고난이 닥치면 받아들이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막힘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후에 많은 유대인 동족들이 그의 신변을 노렸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그래서 곳곳에서 바울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단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가 혼자 로마로 가려고 했다면 아마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자객들,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던 사람들에게 로마로 가기 전에 살해당했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죄수로 호송되어 가기 때문에 오히려 바울의 신변이 지켜진 겁니다.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까지 군인들이 바울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사도 바울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로마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의 죄수였기에 오히려 자기를 지키는 수비대는 물론이요, 고관들에게 변론하면서 예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접근할 수 없는 그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열린 것입니다.
일례로 로마로 가는 도중에 풍랑이 일어나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죄수인 바울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무사히 빠져나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하심, 하나님의 배려는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훨씬 더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한 가지 사건 그 이상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한 가지 사건 속에 수많은 비밀을 숨겨두고서 나아갈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당장 무엇이 안 되면 죽느니 사느니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안달을 합니다. “하나님 빨리 빨리...” 모든 게 다 빨리 빨리 입니다.
어떤 분은 조폭도 아닌데 지금 당장 하나님께 응답해 달라고 다그칩니다. 또 어떤 분은 나름 시간을 준다면서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 할테니까 하나님께서 금식기도 끝나는 날 반드시 응답해 달라고... 안 그러면 자기 죽는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늘상 이렇다 보니 어떤 분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도까지 합니다. ‘하나님, 저는 인내심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에게 지금 당장 인내심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무조건 빠른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
여러분! 우리가 때를 말할 때마다 헬라어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얘기하는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알기 쉽게 한 번 구분해 보겠습니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때요, 카이로스는 특정한 때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크로노스는 세상적인 때를 말하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바로 그 때! 그 완전 안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카이로스의 때를 기다리면서 세상 때인 크로노스의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카이로스의 때를 바라보면서 크로노스의 시기를 인내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의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함입니다. 왜 우리는 일이 잘 안되면 울고불고 좌절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의 뜻이 너무 강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식들에 대해서도 부모들이 실망하고 좌절하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만히 보면 그 이유는 부모 욕심과 의욕이 너무 강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신 뜻이 아니라 내 자식에 대한 욕망. 이것이 늦어지는 것 같으니까 마구 하나님께 닦달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이 너무 강하면 때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기에 날마다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고집이 꺾여서 온전히 순종하는 훈련!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기다림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내 욕망을 내려놓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당장 그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쉽게 이루어지면 그게 불안한 겁니다.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은 기다리게 하시고 더 좋은 것은 더 기다리게 하십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려울까요? 내 힘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게 돌아갈 때, 사람들은 자꾸만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 그것은 기다림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그 기다림에서 실패하면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귀한 은혜는 바로 이 기다림을 통해 받은 은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큽니다. 아무리 좋은 뜻과 계획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심장에 심어주었던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것은 그가 가졌던 비전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신념 속에 심어주셨던 비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16절 이후에 보면 드디어 로마로 들어간 바울이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소원했던 것이 다 이루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빌었던 소원은 사도 바울 개인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표가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결코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함에 있어 그것이 언제 이루어지느냐가 중요치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일을 왜 하려고 하느냐?’ 이 질문 앞에 명확한 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 소원과 열망의 출처가 도대체 어디냐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었다면 하나님은 세상 만사를 다 제쳐두고서라도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로마로 가는 도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났을 때, 그 때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다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죄수인 바울이 일어나 지휘를 합니다. 사도행전의 이 마지막 장면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장면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떵떵거리고 자랑하고 교만한 것 같은데 유라굴로 같은 광풍이 한번 불어 닥치면, 모두 다 죽는다고 야단법석입니다. 별 볼일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빛이 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를 로마로 가게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24절에서 25절 말씀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러분! 이러한 사도 바울의 담대한 선포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소원! 오래 전에 가졌던 로마를 향한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비전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는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기에 아무리 풍랑이 일어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배를 로마로 이끌어 주실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 배에서 죽음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향해 담대하라고, 염려하지 말라고 힘차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우리가 인생의 배를 타고 감에 있어 풍랑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별의 별 희한한 일들이 터질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의 담대함, 자신감의 배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주를 위해 살리라!’ 이 거룩한 사명을 온전히 붙든다면 그 사명을 다 이루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지켜주실 것이고, 그 어떤 방해 속에서도 우리 목적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28절과 29절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확한 때에 가장 기가 막힌 방식으로 사도 바울을 로마에 이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의 소원과 비전은 무엇이십니까? 그 소원과 비전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결단코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막을 자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소원과 아름다운 비전을 여러분이 많이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소원!’ 바로 그것을 우리가 품고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우리의 자신감이요, 담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기에 우리는 늘 항상 승리의 예감을 가지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주님 뜻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기에 나를 통해서 하나님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비록 믿음 안에서 살고 있음에도 자꾸 길이 막히고 점점 더 힘들어진다 해도 당신이 택하신 자녀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 주의 백성답게 험난한 인생길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 뜻을 분별하고 주님 뜻대로 살고자 애쓰고 힘쓸 때에, 사탄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함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축복의 사자
롬 15장 22~33절 / 민병석목사
서 론 :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다니는 축복의 사자로 여겼습니다. 그는 로마교회를 방문할 것을 전해 주면서 “내가 저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사도 바울 뿐 아니라 누구이든 축복의 사자들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종말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계시를 받은 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 편지를 받는 대상을 ‘교회의 사자’란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자란 말은 보내심을 받은 전권대사란 뜻인데 이처럼 바울은 다른 사람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전권대사로 그가 보내심을 받았을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1. 바울의 선교적 사명
바울은 언제든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자임을 자부하면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갔습니다.
(1)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의 종착지인 고린도에 머물고 있으면서 로마교회에 보내는 이 서신을 썼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방에서 복음을 편만하게 전한 터라 이제 그는 로마를 거쳐 서바나(지금의 스페인) 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새로운 의욕에 불탔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회심한 후에는 복음전파의 사신이 되어 아시아 지방을 전도 활동지역으로 하여 그의 생애를 보내 왔습니다. 그는 1차 전도여행으로 45년부터 48년까지 3년간을 갈라디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음에 그는 2차 전도여행으로 50년부터 53년까지 헬라에서 지냈습니다. 그후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지로 에베소에 가서 54년부터 57년에 이르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라고 고린도에서 겨울동안 3개월 머무는 동안 이 로마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2)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생애를 복음의 전도의 사명자로 스스로 바친 것은 빚진 자의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빚진 자임을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누구든지 먼저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빚진 자의 입장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 주변에는 아직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들에게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 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빚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갚지 아니하면 화가 임합니다. 복음의 빚은 그 책임이 더 무겁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 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겔3:17,18).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고전9:16).
(3)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를 섬기려는 바울의 열심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기에 앞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섬기는 일로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당시 모든 교회의 모교회로 볼 수 있었습니다.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나왔으며 오순절의 성령강림 하심으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 그곳 성도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회에서 이들을 위하여 헌금하고 바울의 손에 의탁하여 그 돈을 예루살렘교회로 보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일을 마친 후에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갈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그의 계획대로 이루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는 그 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모함으로 체포되어 한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어 갔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2. 충만한 축복의 사자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록 가난했지만 그에게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말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6:9). 하나님의 종들은 적어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이 같은 사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 해야 할 것입니다.
(1) 바울이 말한 축복의 사자란 천국의 비밀을 전달하는 축복의 사자를 말합니다. 복음전도의 사명자는 바로 천국비밀의 전달자입니다. 천국의 비밀은 복음으로 밝히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복음전도의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가치는 온 세상의 소유보다 더 위대하고 소중합니다. 축복의 사자인 하나님의 종들은 이 천국의 비밀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는 사명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2) 바울이 말한 축복의 사자란 평안을 전달하는 평안의 사자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대로 내 보내시면서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나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 올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축복이 심방하는 가정에 그대로 머물러 그 가정에서 주님의 평안이 임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3) 바울이 말한 축복의 사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는 말씀의 사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이르러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보고 그 과부에게 이처럼 말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그날까지 그 통에 가루는 다 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전했습니다. 엘리야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입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은 그 말씀에 책임을 져 주십니다.
결 론 : 바울은 15장을 마감함에 로마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기 목자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하면 그 종은 영력과 능력의 종으로 역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은과 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있는 축복의 사자입니다. 그를 축복의 사자로 영접하고 순종할 때 그 축복과 평안이 그 집에 임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롬 15장 28~29절 / 김충식목사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마28:16-20) 그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4 이하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역시 제자들에게 선언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인데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면 제자들이 권능을 받을 것이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선포하십니다. 이후에 제자들은 나라와 민족과 지역을 차별하지 않고 복음을 들고 선교현장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울이라는 사람을 회심시킨 후 그를 이방인의 선교사로 삼으시어 세계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로마서 15장의 본문 말씀도 사도바울이 로마를 들려서 당시 땅 끝이라고 생각했던 스페인까지 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달합니다. 바울서신을 읽어보면 대부분의 서신들마다 그 교회를 방문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들이 바울을 존경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당시 열악한 여행 조건 속에서도 계속적으로 선교지를 향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끊임없이 선교지를 방문하려 했던 것은 선교지에서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선교여행을 하려면 몇 달 내지 몇 년이 걸렸으며 문화의 차이와 음식이 입에 맞지 않기에 여행 자체가 힘이 듭니다. 또 오랫동안 여행을 하려면 경제적인 문제가 뒤따릅니다. 가는 곳마다 적대감이나 반감을 가진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수용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많은 위험이 있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선교지를 계속적으로 순회하고 방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시 하나님이 그곳에서 바울을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기다리신 하나님은 지금도 선교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선교지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고 영적 존재이기에 자신이 직접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것도 육체를 가진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으셨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사람을 통해 하시려 했습니다. 노아를 들어 쓰신 것도,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직접 선교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실패함으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 오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 분이 곧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교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가장 큰 이유는 제자들과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성도님들과 함께 선교지를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벌써 다녀왔어야 하는데 선교여행이 힘들고 고생이 될 것 같아 머뭇거리다가 늦었습니다. 선교여행은 다른 여행과는 다릅니다. 불편하고 고생합니다. 잠자리가 좋지 않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비행기를 타고 선교지를 방문해야 합니다. 교통이 좋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 여행의 일정은 재미가 없습니다. 좋은 지역을 다니며 관광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문화권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또한 선교여행은 다른 여행에 비해 경비가 많이 듭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많은 돈을 들여 갈 것이 무엇이냐 그 경비를 차라리 선교지에 보내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 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지는 방문해야합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선교여행을 통해 큰 보람과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선교지를 방문할 때에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고 힘을 줄 수 있으며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의식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선교팀을 보면서 ‘우리들도 선교해야 되겠다’는 의식을 갖게 됩니다. 또한 그들의 전통적인 문화와 종교 속에서 벗어났다는 죄의식을 가질 수도 있는데 선교팀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참 잘됐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우리들도 저런 사람들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선교여행에 초등부 학생이 부모님과 함께 동행했습니다. 이 아이가 과연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여행 자체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다가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겠습니까? 그 어린이와 어머니는 짧은 선교일정을 마치고 중간에 돌아 왔습니다.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머니에게 많은 떼를 썼다고 합니다. 말레이시아를 경유하여 미얀마까지 갔어야 하는데 왜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왔느냐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달래면서 ‘시간이 주어지면 다른 좋은 곳을 여행하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는 어머니에게 ‘무슨 좋은 곳을 가느냐? 선교여행을 해야지’ 하더랍니다. 선교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어른이든, 아이들이든 보람과 의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김영해 집사님의 아들인 동영이와 준원이도 3년 전 말레이시아 선교지를 다녀와서 지금도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망설이고 멈칫거리지만 그래도 결단하고 선교지를 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축복된 일입니다. 바울은 선교지를 방문할 때에 혼자 가지 않았습니다. 디모데, 실라, 마가, 누가, 디도와 같은 사람들이 항상 동행하였습니다. 좋지 않은 환경을 감내해야 하며 또한 많은 것을 투자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과 동행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시고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시고 사람을 통해서 선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야 합니다. 땅 끝까지라도 가야 합니다. 선교지 방문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선교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선교를 하면서 어느 때는 시행착오를 하기도 하고 문제점들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처음 방문 했을 때에 보았던 선교지 사람들의 열정과 순박함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선교의 효과가 나타나지 아니하고 지지부진한 것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실망하기도 합니다. 힘들게 선교비를 보내어 교회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교회 주변에 풀들이 많이 나고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폐허가 된 것같은 교회를 볼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과연 선교를 계속 해야 될까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교인들이 힘껏 헌금한 선교비를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이런 시행착오와 문제점들 속에서도 복음화를 이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선교지를 방문할 때에도 선교지에 항상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인들 간에 반목하는 경우도 있고, 적그리스도와 거짓교사들이 넘나들고, 이단들이 들끓고, 파당을 짓거나 율법주의로 전락되고,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갈등을 겪는 교회들도 수없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문제점이 많은 교회를 열매 맺게 하시고 그 교회들을 통하여 세계 복음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선교지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에 국가적으로는 쇄국정책을 쓸 때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지식층들은 대부분 교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선교사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각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지고 병원이 세워지면서 주도권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복음 자체 보다는 부수적인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6.25전쟁 이후에는 구호물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느 분이 미국에 있는 사람들과 가까워서 더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는가 했습니다. 밀가루와 분유를 얻기 위해 교회를 다닌 적도 있습니다. 복음의 순수성은 사라지고 이해관계만 남는 것 같아 선교가 실패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도 한국교회를 이만큼 세우셨고, 복음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하시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를 많이 하는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난 11월 25일은 OECD 개발원조위원회에 우리나라가 24번째 가입국이 된 날입니다.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할 일이 많고 주어야 할 대상들이 많습니다. 빈민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국은 밖을 향해 더 많은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세계와 더불어 함께 생존하는 것이고 앞으로 더 큰 축복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선교는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우리를 통해서 선교지의 복음화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효율적인 선교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기도하고, 물품이나 선교비를 보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교역량을 증대시키기를 원하시고, 효율적인 선교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지역마다 선교의 방법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장과 동떨어지지 아니한 실제적인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가서 보아야 합니다. 선교지를 관리하는 것도 나라와 지역마다 달라야 합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서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장조사를 철저히 할 때 더 나은 활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시집간 딸집을 다녀왔습니다. 2005년에 결혼시키고 이사를 한 후 2번째 방문입니다. 이번에 딸집을 가게 된 연유도 외손자가 도너츠가 먹고 싶다고 하여 도너츠 한 상자를 사가지고 갔습니다. 오랜만에 방문하여서인지 딸집이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할 수 없습니다. 한 시간 동안이나 옷도 벗지 못하고 앉아있다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딸집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들이 있어서인지 많이 어지럽혀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딸집이 우리 집보다 더 생동감이 있고 살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 이곳이 젊은이들이 사는 집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딸집에 비하여 우리 집이 깨끗하고 나도 젊다고 생각했는데 딸집을 보니 우리 집은 우중충하고 생기가 없는 노인들이 사는 집같이 느껴졌습니다. 딸집은 지저분한 것 같아도 색깔부터 달라보였으며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보고는 ‘이제 우리 집도 좀 어지럽혀야겠구나 울긋불긋하고 사람이 사는 것 같은 것이 있어야겠구나’ 했습니다. 가보니 차이점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선교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보아야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와 미얀마의 선교방법이 달라야 할 것 같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원주민은 선교 센터를 중심으로 하여 지속적으로 전도하고 교육하고 사람을 키우고 관리해주면 수백 명씩 회심자가 생길 수 있고 큰 교회를 이룰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미얀마는 그렇게 선교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얀마는 불교국가입니다. 불교 종주국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미얀마에 들어오는 관광객 90%이상이 불교 성지순례 객들입니다. 미얀마 수도 양곤의 중심지에는 「쉐다곤 파고다」라는 불교를 상징하는 웅장한 사원이 있고, 그 사원을 중심으로 하여 생활권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곳의 선교방법은 달라야 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특성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든 역동적이고, 도전적이고, 활동적이고, 독선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람들에게 배타심을 주기가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내보내실 때 “뱀처럼 지혜로우라”(마10:16) 말씀하셨는데 미얀마 같은 지역에서는 무작정 전도하고 회심시키려는 것보다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파고들어 복음을 전하고 교육을 시켜, 이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깨달음의 문화가 몸에 배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봉헌식을 하는데 현지인이 간증을 합니다. 자신의 몸이 불치병으로 너무 아파서 오랫동안 고생하고 낙심하고 있는데 목사님과 교인들이 오셔서 계속적으로 기도해주었을 때에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를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선교지마다 선교의 방법과 기술이 달라야 합니다. 이처럼 효율적인 선교를 하기 위해 하나님은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결코 멈추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도, 다윗을 선택하신 것도, 베드로와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도, 바울을 선택하신 것도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서 선택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로, 선교비로 선교하며 동시에 선교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곳에는 복음을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선교해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선교하는 사람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6:38을 보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약속하고 있습니다.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선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나가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는 선교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고 합니다. 선교와 영혼구원을 위해 이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교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