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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역사적 사실 세가지
1. 기독교가 카톨릭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개신교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에 나선 1517년 이전까지는 카톨릭이 기독교였고 로마카톨릭이 기독교의 중심이었으며 그들중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가 개신교가 되었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반대입니다. 기독교는 초대교회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존재하여 왔으며, 카톨릭은 251-313년 무렵에, 우상숭배, 황제숭배, 여신 숭배 교인들이 기독교로 부터 빠져나가 다수를 형성하며 마치 정통인양 행세하기 시작하여 형성된 이단 종파입니다.
성경대로 모인 모임들의 역사는 얼마전 간추린 글로된 영문 교회사를 참조하실 수 있고, 전도출판사에서 출간한 "순례하는 교회사"에 자세히 나옵니다.
성경적인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에 합류하지도않았으며 로마 카톨릭은 항상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들을 고문, 살육하며, 그들의 재산을 탈취하기를 계속해왔습니다.
로마 카톨릭 밖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로 모였던 모임의 역사는 아래와 같은 이름들을 포함합니다.
몬타누스파, 파울파, 노바티안, 도나티스트, 네스토리우스, 알비파, 왈덴지안, 보고밀, 서부독일 형제단, 보헤미아 형제단, 페트로드부르시안, 재침례파, 모라비아 형제단, 플리머스 형제단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카톨릭 교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으며 틈틈이 성경을 번역하고 복사하여 전도하였습니다. 그런 자들이 카톨릭에 붙잡히면 그들은 종교재판소를 세워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이 고문하던 방법들로는 팔다리 칼로 자르기, 항문에 말뚝박기, 머리를 눌러서 눈알이 빠져 나올 때까지 계속하여 눌러 머리통이 터져 죽게하기, 여자들이 마귀와 교접하였는지를 확인한다며 성기를 검사하고 말뚝박기, 어린이는 바위에 메쳐 죽이기, 노인들은 침상채로 태워죽이기, 유황을 머리위에 올려놓고 태워 죽이며 유황물이 머리와 얼굴에 타들어가게 하여 죽이기 등의 방법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존폭스의 순교사화, 브로드벤트의 순례하는 교회사, 존 밀튼의 실락원은 이것을 증언합니다. 로마 교황은 바로 그 인간 도축센터의 수장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지금은 매우 거룩한 척하면서 다음의 대환난을 통해 대살육과 고문을 준비중에 있습니다.
카톨릭과 기독교가 같은 종교이겠습니까? 그것은 조폭들과 조폭들에게 살육을 당한 피해자가 같은 편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때 타당한 말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로마 카톨릭 밖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로 침례파, 혹은 형제단으로 불리었으며, 이 세상이, 이 세상신이 결코 말살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 않아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날 교황과 정상회담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교황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나설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를 추종하며 따르는 자들이 모두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아나밥티스트(재침례교도들,재세례파)
지난번에 성경에 충실한 교회 모임의 역사를 세계교회사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원저자는 토마스 캐씨디 박사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침례교 목사로서 은퇴하였으나 침례교 신학교수로도 지내며 여러가지 저술을 해온 사람입니다. 저와는 개인적으로 많이 교제해본 적이 있습니다. 딘 버건( Dean Burgon Society) 학회 회장으로도 추대된 적이 있으나 킹제임스 성경의 무오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직을 사양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99% 정도만 신뢰하는데 그것이 다른 어떤 번역보다 낫지만 오류가 있다는 입장이고 그것이 우수한 이유는 바탕원문인 TR과 벤하임 맛소라가 정확했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취하고있습니다. 이분은 성경을 200회 이상 읽고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도 많이 읽은 분입니다. 그가 쓴 교회사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필요한 부분들을 거의 모두 망라했다는 생각을 갖게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설명하는 재침례파에 대해 들어보기 원합니다.
먼저 그의 글을 다루기 전에 재침례파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참고 글들이 있으며, 그 글들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기를 원합니다.
http://en.wikipedia.org/wiki/Anabaptist
http://religion.wikia.com/wiki/Anabaptist
http://www.thirdway.com/menno/?Page=1777|Anabaptist+Beliefs
위의 사이트들은 대개 주류 개신교들이나, 카톨릭의 입장에서 쓰인 글들입니다. 이들은 대개 재침례파들의 시작을 1525년으로 혹은 그 무렵으로 보아서 재침례교인들의 역할이나 활동을 축소시켜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누가 기술하느냐에 때라 크게 달라집니다. 이들은 재침례파가 유아세례를 거부하거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유아세례가 정당하다는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쯔빙글리는 “ 지난 300년 동안 재침례파는 교회들에 혼란을 가져왔고, 지금도 그 치유가 무효화되고 있다,.. “ 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그가 적어도 13세기에 재침례파가 있었다고 믿은 증거일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재침례파가 바로 후사이트라고 말합니다. 후사이트란, 쟌 후스가 보헤미아 여왕의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로서 침례는 믿음의 고백이 있은 후에 받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카톨릭에 의해 화형당한 이후,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쟌 후스는 1400년 경 사람이므로 적어도 그 이전에 재침례파가 존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면 재침례파는 적어도 1200 AD 이전에 존재하였으며 그들 스스로는 그들 모임의 뿌리를 초대교회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주류교회나 카톨릭은 이점을 인정하기를 아주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 재침례파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운동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침례교의 모체가 된 원형들이었습니다.
카톨릭이나 유사 카톨릭이 재침례파를 언급할 때는 자주 뮌스터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재침례파들 중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스스로 벌인 부끄러운 역사의 한 사건이었습니다 1525년경부터 1535년 사이에 뮌스터 시를 재침례교도들이 점령하여 여러가지 어리석은 행동들을 행하였으며 그들 지도자들 중에는 일부 다처제를 유지한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당시 카톨릭에 좋은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재침례교인들의 입지를 크게 좁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반기독교 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다루기를 아주 기뻐합니다.
다음의 사이트는 그들의 교리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http://anabaptistchurch.org/anabaptist_theology.htm
이제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캐씨디 박사의 설명을 요약하여 번역해봅니다.
-재침례파-
크리스쳔이라는 말이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편의상 부르거나 비난하기 위해 불렀던 호칭이었듯이 재침례파란 말도 재침례파들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 카톨릭 등 유아침례 시행자들이 한번 침례받은 사람들을 다시 쓸데없이 침례베푼다 하여 비난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침례교도들 입장에서는 단지 한번만 침례베풀 뿐이며 유아침례나 세례는 침례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었고, 믿음의 고백을 분명히 한 사람들에 한하여 완전 침수에 의한 침례만이 진정한 침례이므로 재침례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다. 즉 재침례란 없으며 온전한 침례만이 단 한번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이들은 아나뱁티스트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카타뱁티스트라고 불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물을 뿌려서 세례하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담가서 침수예식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비더토이퍼(Wieder Taufer 다시 잠그는 사람) 라고 불리웠다.
이들에 대한 비방으로는 그들을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들로 비방하는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세르베투스나 소시누스 같은 유니테리언들도 유니테리언 아나밥티스트로 불리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권 교회들의 비방수법은 소아시아 지역의 파울파와 프랑스 등지의 알비파(프랑스 청교도들)을 마니교도로 비방하던 수법과 비슷하다.
재침례교도를 설명하는데 그들은 뮌스터 사건을 매우 중요시한다 ( 뮌스터 사건은 사이비 재침례파 광신도들의 어떤 비류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세속적 독립행정과 일부 다처체를 포함하는 비정상적 무리들이었음)
아나밥티스트(재침례교도)들은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가졌는데 그것들은 도나티스트, 알비, 왈덴지안, 파울파,후사이트(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 위클리프파, 등의 무리들에게서 발견되던 신념들과 거의 동일한 것들이었다.
재침례파들이 믿었던 것들
1) Christian Charity
크리스쳔 자선을 중요시했다-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만족하였으며, 진정한 형제 사랑을 실천하였다. 기꺼이 그들의 세상 재화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를 기뻐했다
2) Regenerated Church Members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으로의 교회구성- 배타적으로 오직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으로 구성된 교회를 유지했다
3) Believers Baptism
믿는 자들의 침례 – 그들은 유아침례, 유아세례를 거부했다. 뉴맨은 평하기를 “유아침례에 대한 그들의 저항의 진지함과 강경함은 재침례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을 이룬다”
쉴레이따임의 신앙고백(재침례파 신앙고백)은 “침례가 회개와 삶의 변화를 배우고 그들의 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거되어졌다는 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져야 한다”
고 하였다. 즉 재침례파에 있어서 유아침례 반대는 가장 강력한 특징들 중의 하나이었다.
(4)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국가와 교회의 분리 – 국가는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서 그들의 권한이 합법적인 모든 사안들에서 순종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양심의 문제들에 관한한 국가는 간섭할 권한이 없다- 이것은 그들이 로마카톨릭이 권력을 등에 업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을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에 주장되어졌던 바이다.
(5) Liberty of Conscience양심의 자유- 이것은 재침례파의 근본적인 교의였으며 믿는 자들의 제사장직에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6) Rejection of the Magistracy. 행정 치안관직의 거부- 당시에 행정치안판사, 치안관직은 로마 카톨릭 혹은 국가종교(정교회, 성공회)의 세속적 오른팔 왼팔로서 그들의 교리와 칙령을 실행하는 도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직책을 재침례파들은 거부했습니다.
(7) Rejection of Oath Taking. 맹세의 거부- 다만 그들은 사실에 대한 증언과 미래에 대한 약속은 구분하였습니다.
(8) Rejection of Military Service. 군복무의 거부
20세기 이전의 대부분의 전쟁들은 어느 국가의 종교를 다른 국가의 국민들에게 강요 강압하기 위한 전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 로마 카톨릭(혹은 정교회)의 교의를 그것을 안믿는 국가 국민들에게 강요하기 위한 전쟁이 대부분이었다고 보고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9) Rejection of Capital Punishment. 극형 반대
극형이 주로 신앙이 다른 사람들, 양심범들을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화형 참수형 사지절단형등으로 처형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이것을 반대하였습니다.
(10) The Millennial Return of Christ.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재림
재침례파들은 어거스틴의 신학을 거부했으며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으로 카톨릭의 기초를 놓았고 무천년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재침례파들은 그 무천년설을 거부하였습니다. 따라서 재침례파들은 예수님이 천년왕국 이전에 강림하셔서 천년왕국의 국왕으로 통치하실것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일부 사이비 재침례교 광신도들은 천년왕국에 그들이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재침례교도들은 그 지나침을 거부했다.
(11) The Free Will of Man. 인간의자유의지
재침례교도들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지 안믿을지를 택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12) Salvation by Grace through Faith.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에 의한 구원
재침례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은혜가 죄인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참여할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분과의 완성된 연합에 들어가게 해주는 위대한 변화의 매개체라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또 구원의 열매로서 선행들을 강조하였으나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열매를 보지 않고는 침례 베풀지 않았습니다.
(13) Christ-like living.그리스도를 닮은 삶
카톨릭이나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침례교인들은 금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삶, 자아부정의 수고, 고난에 많은 강조가 주어졌으며 재침례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사치스러운 삶, 개인 치장, 사교 오락, 부의 축적 등 거의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 어울리지 않는것으로 여겨졌습니다.
(14) The Lord's Supper for Church Members Only.
교회 지체들만이 참여하는 주님의 만찬
그들은 오직 침례받은자들만을 주님의 만찬에 허용하였으며 엄중한 훈육이 형제들에게 베풀어지기 전에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쉴레이다임 신앙고백은 “ 그리스도의 흘려진 피의 한방울이라도 마시는 자는 그에 앞서 먼저 그리스도의 한 몸에 침례에 의해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15) Separation From Unbelief. 불신자들로부터 분리
재침례파들은 개혁초기에는 어느 정도 자유를 사랑하는 재침례교도들이 그들의 도움을 개혁운동에 도움을 제공하기는 했습니다만 타종교 단체들과 손을 잡기를 거부했으며 개혁파들이 순전한 기독교에로 돌아가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여질 때까지 그러했습니다. 몇 몇 재침례파 지도자들은 개혁주의자들과 토론하기를 그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되기까지 계속했습니다!
(16) Cooperation Among Churches. 교회들 사이에서의 협력
여건이허락할 때 재침례파교회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공동 목적을 위해 협력했습니다. 왈덴지안처럼 재침례파들은 순회설교가들로 특징지어졌습니다.
(17) The Authority of the Scriptures. 성경의 권위
재침례교도들은 성경을 믿음과 실천의문제들에서 그들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권위로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경인가? 이것은 흥미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왈덴지안들은 13세기 초에 로마어와 튜튼어로 번역하였으며 침례교인들은 이성경들 번역본들을 루터의 번역이후 200년이 지난 시점까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오래된 독일어 성경은 침례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 ( J. T. Christian, p 91)
이 독일어 성경은 테플판이었는데 14세기부터였으며 로마 종교가 사용하던 라틴 벌게이트와는 상당히 달랐고 인쇄술 초기부터 루터 번역본을 만들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루터 성경은 그것의 영향을 받았음을 많은 곳에서 보여줍니다. 브로드벤트에 의하면 (112페이지) 재침례파들과 메노나이트들에 의하여 한 세기 동안 사용되었습니다. 이 왈덴지안 성경은 올드 라틴(150AD)에 곧바로 연결되었으며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을 보전하였다는 살아있는 생수의 흐름으로 표시 주목되어집니다.
(18) Salvation Through the Blood of Christ.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원
Jarrel 이 올바르게 주목한 바는 “ 이것은 그들이 유니테리언도. 누구나 구원론자들도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죄를 위하여 어느 인간의 피로도 대속될 수 없으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하여 건전하여 있었음이 틀림없다.
(19) Missions. 선교사 파송
재침례교도들은 다수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자렐이 인용한 에버츠에 의하면 “ 그들은 단호히 결심한 유럽전역의 성경서적 행상인들과 선교사들이었다”
재침례교도들에게는 신앙생활이란 활동적이고 공격적이며 사도다움이었습니다. 그중의 한 특징은 다수 침례였습니다. 뮌스터에서는 1534년 한주에 1400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때로는 한 마을 전체가 한 침례식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위에 덧붙여, 그들은 모든 인간의 죄 본성과 유아들의 안전성, 엄격한 교회 징계, 개교회의 그들의 지도자를 선임할 권리를 믿었습니다.
비록 초기에는 개혁주의자들이 하는 바를 재침례파들이 지지하였지만 곧바로 그들은 사건들의 진행에 실망하였으며 그들 자신들이 선을 넘어섰음을 깨달았습니다. 머지않아 침례교도들은 두개의 전선들로부터 핍박을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카톨릭과 개신교도들로부터. 1529년 스파이어 루터파 공의회에서 재침례파들에 대한 사형을 선언하였습니다.
1536년 루터는 멜랑흐톤이 작성한 각서에 서명하였는데 재침례파들에 대한 사형처벌에 동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직 헤쎄의 란그레이브 루터파 왕 필립공만이 재침례파들을 죽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였고 그의 영지는 수많은 재침례파들을 위한 도피처로 제공되었습니다. 쯔빙글리는 분노하였으며 “ 아래로 내려가려는 자들로 과연 아래로 내려가게 하라”(침례교인들은 침수받으니까, 익사시키라는 뜻) 하였는데 그것은 수많은 재침례교도들을 익사시킴으로 사형시키는 것을 증가시켰습니다.
쯔빙글리는 일찍이 재침례교도들과의 토론에서 실망한 나머지, 스위스 정부와 함께 재침례파들을 멸종시키기위하여 무자비하게 수많은 재침례교도들을 살육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모라비아, 네델란드, 라인강 강변지역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존 칼빈 역시 재침례파들을 경멸하였으며 “재침례파들은 반동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임에 처해져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칼빈의 치열한 갈등은 세르베투스와 재침례파와 소시니안들이었으며 그들은 그에게 없애야 할 이단들이었습니다. 그는 곧 결단하기를 “그들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화형 아니면 칼이었습니다.”(뉴만 223페이지) 왈덴지안의 유입으로 네델란드는 개혁시대 유럽에서 가장 자유가 보장되는 곳으로 변했습니다.
모든 종류의 신앙이 네델란드에서는 용인되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재침례파들이 네델란드에서는 1533년까지 가장 번성하였으며 메노나이트로 불리웠습니다.
1555년부터 제수이트의 음모는 네델란드에도 종교재판을 가져와 알바공은 1567년부터 73년까지 그 나라를 황폐화시켰습니다. 대학살 행위들이 칼빈주의자들과 재침례파들에게 동시에 자행되었습니다. 윌리엄 오랜지공은 홀랜드를 구원한 사람이었으며 유트레이트 협약은 선언하기를 “ 개개인은 신앙에 있어서 자유롭다 어느 누구도 신앙 예배에 관하여 괴로움을 받거나 심문받아서는 안된다” 고 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 1세 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수많은 재침례파들이 불태워지거나 그 나라에서 익사형을 받았습니다. 야콥 후터는 블라우록의 보호를 받아 숨은 장소들에서 모임들을 가졌습니다.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고문과 죽음의 형벌들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끊임없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전역에서 자라났으며 후터는 인스부르크에서 1536년 화형을 당하였고 그 바톤은 주님의 위대한 사역을 용감히 수행했던 한스 맨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발드사살 휩마이어는 1524년 발행한 전도지에서 “ 이단을 화형시키는 것은 성경적으로 정당화 될수 없다.
그리스도 자신은 가라지들은 알곡과 함께 자라도록 해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불태우러 혹은 죽이려 오시지 않았고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것도 더욱 풍성히 주시려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들이 살아있는 한 그들이 개선되고 회개하도록 기도하고 바라야 합니다. 그들이 만일 이성적인 호소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설득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대로 그대로 버려두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잘못을 화형이나 칼에 의하여 발견하게 강요될수는 없는 것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단에 관해서는 “한번 두번의 권고한 다음, 멀리하라고(디도서 3:10) 왜냐하면 왜곡된 사람은 범죄하는 것이며 그 스스로가 정죄받기 때문이라(디도서 3:11)” 말하였습니다- 역자 주
결론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지구상에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진정한 모임들이 항상 있어왔으며, 이 모임은 바로 침례교도들 (형제단)에 의해 주도되고 맥을 이어왔습니다. 이 침례교도들은 카톨릭과도, 개신교도들과도 전혀 달랐습니다. 침례교도들(형제단)은 16세기 17세기에 일어난 개혁주의자들, 개신교들과 전혀 다른 무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고대 사람들입니다. 오래된 무리인 것이며 주님의 교훈들을 그대로 따르는 피흘린 자취를 밟아온 무리로서 그리스도의 시대로부터 20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걸어온 무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침례교의 유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로마 카톨릭과 대등했던 교세의
도나티스트들
용량 초과로 올리지 못합니다.
6. 도나티스트들에 대한 역사가들의 증언
(1) Crespin 크레스핀
The Donatists arose in Numidia, in the year 311, and they soon extended over Africa. They taught that the church should be a holy body. Crespin, a French historian, says that they held the following views:
First, for purity of church members, by asserting that none ought to be admitted into the church but such as are visibly true believers and true saints. Secondly, for purity of church discipline. Thirdly, for the independency of each church. Fourthly, they baptized again those whose first baptism they had reason to doubt. They were consequently termed rebaptizers and Anabaptists.
도나티스트들은 누미디아에서 311년 일어났고 그들은 곧 아프리카로 확대되었으며 그들은 교회가 거룩한 몸이라고 가르쳤다. 프랑스 역사가 크레스핀은 말하기를 그들은 다음의 견해들을 가졌다고 한다.
- 첫째 교회 구성원들은 순수함인데 아무도 진정한 믿는자이며 진실한 성도임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한 교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 둘째 교회의 순전함을 위해 징계가 행해졌다.
- 셋째 각교회는 독립적이었다
- 넷째 그들은 그들이 첫 침례를 의심할 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을 다시 침례하였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재침례자들 혹은 아나밥티스트(재침례자파)로 불리웠다.
(2) David Benedict 데이빗 베네딕트
In his early historical writings David Benedict, the Baptist historian, wrote with much caution of the denominational character of the Donatists. He followed closely the statements of other writers in his history; but in his last days he went into the original sources and produced a remarkable book called a "History of the Donatists" (Pawtucket,
1875). In that book he recedes from his noncommittal position and classes them as Baptists. He quite freely shows from Augustine and Optatus, who were contemporaries, that the Donatists rejected infant baptism and were congregational in their form of government.
침례교 사가 David Benedict 는 그의 이른 역사기술에서 도나티스트들의 교파적 특성에 대하여 매우 조심성있게 기술하였다. 그는 그의 역사에서 다른 기자들의 진술을 면밀히 검토하였으나 말년에 그의 원래의 근거들로 돌아가 주목할만한 책을 내놓았는데 도나티스트들의 역사(1875년 Pawtucket 발행)를 내놓았다. 그 책에서 그는 종전의 입장에서 물러나 그들(도나티스트)들을 침례교도들로 분류하였다. 그는 아주 풍부하게 어거스틴과 옵타투스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당대의 사람들로서 도나티스트들이 유아침례를 거부하였으며 또한 교회 조직에 있어서 회중교회 형태를 취하였다고 보여준다.
(3) Governor Henry D’Anvers truly remarks: 헨리 당베르
Augustine’s third and fourth books against the Donatists demonstrated that they denied Infant baptism, wherein he maintained the argument for Infant baptism against them with great zeal, enforcing it with severe arguments (D’Anvers, A Treatise on Baptism. 223, London, 1674).
헨리 당베르 총독의 언급
어거스틴의 도나티스트들에 대한 제 3권과 4권은 그들이 유아침례를 부정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기서 그는 유아침례에 대한 주장을 그들에 대한 큰 열정과 혹독한 주장들로 계속 유지한다.(당베르 런던 1674)
(하토브 주: 헨리 드앙베르는 영국 공화정 혁명당시 크롬웰과 함께 의회파를 이끈 장군이었으며 영국이 카톨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던 사람이었고 1686년 네델란드에서 죽었음)
(4) Neander 네안데르
The Donatists stood for liberty of conscience, and they were opposed to the persecuting power of the State Church, They were, says Neander, "the most important and influential church division which we have to mention in this period" (Neander,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III. 258). Neander continues:
도나티스트들은 양심의 자유를 위해 섰으며 그들은 국가교회(국가와 교회가 결탁한 상태의 교회)가 탄압하는 권력에 반대하였다. 네안데르는 말하기를 그것들이 우리가 이시대에 언급해야할 가장 중요하고도 영향력있는 교회 분파이다.(기독교와 교회의 역사 3-258, 네안데르)
Thus the Bishop Donatus, of Carthage, in 347, rejected the imperial commissioners, Paulus and Marcarius, with the acclamation: "Quid est imperatori cum eccleaia?" (Optatus, Milev., De Schismati Donat. 1. iii. c. 3). And truly indeed the emperor should not have had anything to do with the control of the church.
카르타고의 도나투스 감독은 347년에 황제의 대리인들인 파울루스와 마르카리우스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 황제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과연 황제는 교회를 통제할 아무런 이유를 가지지 않았다. 도나티스트 감독 페틸란은 어거스틴이 그에게 여러 번 글을 썼는데, 결코 핍박한적이 없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언급하며, 말하기를
The Donatist Bishop Petilian, in Africa, against whom Augustine wrote, appealed to Christ and the apostles who never persecuted. "Think you," says he, "to serve God by killing us with your hand? Ye err, if ye, poor mortals, think this; God has not hangmen for priests. Christ teaches us to bear wrong, not to revenge it," The Donatist bishop Gaudentius says: "God appointed prophets and fishermen, not princes and soldiers, to spread the faith."
“너희는 생각해보라, 너희 손으로 우리를 죽임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느냐? 너희는 그릇되었다, 너희 불쌍한, 죽어갈 인생들아, 이것을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위한 교수형을 집행할 사람들을 안갖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릇된 것을 참으라하시며 그것을 보복하라 하시지 않는다” 도나티스트 감독 가우덴티우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선지자들과 어부들을 세우셨지, 왕들과 군인들을 세우시지 않았어” 하였다.
http://www.pbministries.org/History/John%20T.%20Christian/vol1/history_03.htm
2015. 12. 28 하토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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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나티스트'가 311년에 일어났다'면 그들은 밖으로 나온 '(지하) 카타콤'의 신자들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나티스트에 관한 자료는 무엇이 있는지요?]
침례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침례교 역사는 참으로 방대합니다. 전도출판사의 순례하는 교회, 의 10배 분량으로 영문으로 되어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캐롤박사의 피흘린 자취보다 훨씬 상세합니다.
도나티스트는 251년의 노바티안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카톨릭의 출발을 저는 251년으로 보고 있으며 그 시작은 코르넬리우스였다고 믿어집니다. 그들은 황제숭배에 굴복했던 사람들이며 신사참배에 굴복한 사람과 같았고, 노바티안은 오늘날 출옥성도들과 같았습니다. 그래도 북아프리카에서는 도나티스트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으니까 그들을 멸종시키고자 로마 카톨릭은 모하멧드를 개발해냈고 그 조건으로 도나티스트 멸종과
@하토브 예루살렘 탈환, 헌납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탈환 헌납이 이루어지지 않자 십자군 운동을 일으킨 것이고요. 나중에 아시시의 프랜시스를 통해서 중재되고 합의된 것이 터키까지는 이슬람으로 남겨두고, 유럽은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무어족의 스페인, 코르시카 등이 분쟁지역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