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망
안 희 연
그것은 사람처럼 걷고 있었다 마음이 어두울 땐 환해지고 환할 땐 희미해졌다 당신은 오래 알던 친구 같군요 무심히 말을 걸어본 적 있지만 대답을 들어본 적은 없다 의자를 내어주어도 앉지 않는다 그것은 오인될 때가 많다 비가 오지 않을 때조차 비를 맞고 있다 독성이 있는 사과일 거라고 심장을 옭아매는 밧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것은 다만 기다리고 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는 풍경을 골똘히 바라볼 뿐이다 수많은 이유로 아침을 사랑하고 그보다 더 사소한 이유로 여름을 증오하는 것처럼 숲이 거기 있다는 이유로 숲을 불태우러 오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것은 조용히 타오른다 까맣게 탄 몸으로 그것은 걷는다 빗방울의 언어가 얼룩만으로만 쓰여지듯 흰 종이가 흰 종이인 채로 남아 있더라도 말해진 것이 있다고 발도 없이 문턱을 넘는다 귓바퀴에 고이는 이름이 된다 익숙한 침묵이 낯선 침묵이 되어 걸어나오는 동안
- 시집〈당근밭 걷기〉문학동네 -
당근밭 걷기 - 예스24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한 사람 안에 포개진 두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는 거”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굉장한 것빛 쪽으로 한 걸음 더 내딛겠다는 의지와 다짐신동엽문학상 수상 작가 안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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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시집 〈당근밭 걷기〉 문학동네 /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