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봉은사를 둘러 보다
지금의 절 자리는, 예전에는 한강 이남의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분위기도 한적했다. 낮은 산 언덕에 자리를 잡았으니, 절 자리로서는 좋은 곳이었다.
지금은 서울의 노란자위 땅이 되었다. 서울 중에서도 중심이라는 강남의 중심지가 되었으니 또 다른 의미에서 덜할 나위 없이 좋은 터가 되었다. 여기에 터 잡으므로 한국의 절 중에 가장 부자 절이라는 말을 듣는다. 봉은사를 둘러보고 대구에 내려왔더니 신문에 봉은사가 정부로부터 430억 원 가까이 보상을 받는다는 기사가 나왔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여곡절 끝에 여기에 자리 잡았지만, 역시 명당에 자리 잡았다. 부처님의 가호라고 할까.
절에 이르니 금년 겨울 들어 제일 추운 날씨라는데도 절의 주차장은 차들이 가득하다. 요즘은 큰 절 일수록 주차비와 입장료를 내야 한다. 사찰도 운영하려면 돈이 들테니, 주차비를 받아야 하겠지. 그러나 우리 중생에게는 무소유, 무소유 하면서 돈을 가벼이 하라고 세뇌시켜 놓고서는------.
절에 들리면 아내는 반드시 법당에 들려 기원도 하고, 공양도 한다. 지금까지는 만 원을 시주했는데, 부잣절이라서 손이 오그라든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기와불사에 시주하는 돈은 여뉘 사찰과 마찬가지로 만 원이니, 돈으로 기죽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쓸데 없는 번뇌는 털어버리고 사찰의 경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찰에 경내에는 다양한 절집들이 흩어져 있다. 중생을 위한 찻집도 있으니, 사찰 경내의 길들은 약간의 오르막이었고, 간혹 눈이 녹지 않는 곳도 있었다. 노인이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것은 미끄럼 주의이다. 조심조심 걸었다. 걱정이 된다면서 아들이 따라나선다. 날씨가 차고, 눈도 남아 있었으나. 아들의 집에 갇혀 있다 나와서인지 기분이 상쾌하다. 더구나 걷기가 운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절의 뒤편까지 둘러보았다.
봉은사 영산전은 조선 후기에 지은 사찰 건물로서, 서울시 유형 문화재 227호이다. 영산전에 모시는 부처님은 석가모니 불이다. 이 절의 영산전도 석가모니 불이고, 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 존자가 협시한다. 그 주위에는 16나한도 모셨다. 그 외에 온돌 구조를 한 건축물이 많이 들어서 있다. 스님이 수행하는 곳이고, 대중들이 절에 와서 머무는 공간인가 보다.
주불전인 영산전은 석가가 마가다 국의 왕사성에 머물 때 주위에 있는 영축산에 자주 올라서 설법했다. 불제자를 위시하여 수 많는 중생들이 모여 들었다. 그 모습을 그린 그림이 영산회상도이다. 영산전의 후불 탱화가 영산회상도인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진다. 봉은사의 여러 건물들은 조선 후기나 일제강점기에 건축한 것이 많아서 건축사에서 기릴 만큼 오래 된 건축믈은 아니다.
봉은사가 자랑할 만한 문화재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추사 글씨 板殿(판전)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봉은사라는 부자절을 답사한 것보다는 추사의 판전 글씨가 더 흥미를 자극했다. 추사가 말년에 과천에 은거 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봉은사를 찾아가서 머물기도 했다. 그때 봉은사에는 남호 영기 스님(1820-1872)이 화엄경을 직접 글씨를 써서 판각하였다. 화엄경 판각이 끝나서, 화엄경판을 보관할 창고 건물을 지었다. 그 건물에 달 현판을 추사에게 부탁했다. (1856년 10월) 그때 추사가 쓴 글씨가 지금 화엄경판고의 현판인 ‘판전’이다. 전해오는 말로는 판전을 쓴 지 3일 후에 추사가 죽었다고 하니, 추사가 이 세상에 남긴 글 중에 가장 마지막 글일 것이다. 현판에도 71세 나이로 과천에 머물면서, 병중인데도 글씨를 쓴다고 쓰여 있다.
板殿의 글씨를 보면 어린아이 글씨마냥 미숙하고, 유치하다. 서예미학에서는 졸(拙)이라고 한다, 졸작(拙作)이라고 하면 작품으로서 질이 떨어진다는 뜻이지만, 판전에서 拙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중국미학에 生中孰이요, 孰中生이라는 말이 있다. 작품이 미숙해보이지만 능숙함이 들어 있고, 능숙한 솜씨인데도 다듬지 않아서 생기가 도는 듯한 작품을 말한다. 예술작품으로 최고의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바로 추사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판전을 두고 한 말이다.
나는 책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판전이란 글씨를 오래 동안 바라보았다. 拙하면서 결코 미숙하게 느껴지지 않는 작풉을 감상하고는 발길을 옮겼다. 경판고 바로 옆에 사찰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이 있었다. ‘판전 특별 100일 기도 안내판이었다. 특별 기도에 참여하려면 100만 원을 공양하라고 하였다. 안내판을 보자 마음이 싸아 해지면서 모처럼 느껴오던 예술감상의 기분이 식어진다. 발길을 돌렸다. 내리막 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니 법당에서 기원을 끝낸 아내가 절 마당에 나와서 우리를 찾고 있었다.
이 절에는 추사의 판전 이외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있었다.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여래 삼불좌상(보물 1819호)은 조선의 효종 2년(1651)에 당대의 최고의 조각가인 승원 스님이 조성하였다.
그 보다도 1996년 1월 7일에 봉안한 미륵대불은 높이가 23m에 이르러서, 봉은사의 상징이 되었다. 엄청난 불사를 최근에 하였다는 것은 봉은사가 부자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부자절의 면모를 나무랄 수는 없지만 기분은 좀 그렇다.
절 밖은 최근에 조성된 도시로서 서울을 대표하는 최첨단 시설들이 밀집해 있다. 현대를 상징하는 시설들이 기를 왕성하게 뿜고 있으니 옛과 지금이 균형을 맞추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봉은사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음은 바람직하다. 봉은사로 하여 조화를 중시하는 조선의 혼이 이곳에도 머문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