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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선교. 사찰의 다리는 기능을 빼고 사바세계와 청정도량을 구분짓거나 연결하는 의미가 있다. 승선교는 우리나라 무지개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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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선암사 그리고 1984년 봄
계절은 오월 초순이지만 여름날을 방불할 만큼 무더운 날씨였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선암사에 닿아야 한다. 언뜻 시계를 쳐다보니 벌써 오후 5시가 지났다.
결혼식장에서 점심밥을 얻어먹고 나서 그냥 나오기 미안했던 게 원인이다. 밥값을 한답시고 이런 저런 일들을 거들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걸어서라면 내일 새벽까지 걸어도 선암사에 닿지 못할 것이다. 지나가는 차라도 얻어타야만 할 상황이다.
달리는 차들에겐 눈이 없다. 태워달라고 손을 들었지만 못 본 척 지나가 버릴 뿐이다. 그러나 1톤 짜리 봉고 트럭이 가까이 오더니 내 앞에 멈춰 선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걸 그 순간 다시 느꼈다. 앞에는 앉을 자리가 없으니 짐칸이라도 좋다면 타라고 한다. 지금 내가 어디 더운 밥 찬 밥 가릴 처지던가.
한참을 가노라니 빨간 액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발 밑에서 물컹물컹한 것이 밟히는 게 수상쩍긴 했다. 도대체 이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돼지 피가 분명해 보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내가 탄 트럭은 초파일에 절에 오는 대중들을 대접하려고 잡은 돼지고기를 나르는 중이었다 한다.
원주 스님을 찾아가서 하루밤 잠자리를 청했더니 강당으로 쓰이는 만세루로 안내했다. 그곳엔 순천 대학생불교연합회 학생들이 나보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과 이야기 동무가 되어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밤을 꼬박 지새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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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인당. 타원형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다. 장마 때 이곳에다 물을 담아두고 물의 속도를 줄여 토사 유출을 막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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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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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암사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양식이다. 단아하면서 정중한 모양이 돋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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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막 아침 세수를 끝내고 만세루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그냥 가려는데 이번엔 부르는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렸다.
"너, 오늘 내 심부름 좀 해야겠다."
순간 직감이 왔다. 어젯밤 원주이신 현오 스님이 내게 자랑 비슷하게 늘어놓던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절엔 글씨 잘 쓰는 스님이 있는데 사월 초파일이면 이 근방은 물론 서울에서까지 글씨를 받으러 온다. 그런데 이 양반 성미가 워낙 괴팍한 게 아니라서 글씨 받으려다가 삐끗 잘못했다가는 목침으로 얻어맞기 일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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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검당. 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한 건물로 설선당과 마주보고 있는 'ㅁ'자형 승방이다. 문을 열면 부엌이니 얼른 문을 닫고 돌아서게 된다. 심검당의 부엌은 교묘하게 속인들의 출입을 막는 건축적 장치이다. 환기창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처방으로 수자 해자를 투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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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남명 스님을 만나다
오호라, 이 양반이 바로 어젯밤 현오 스님이 말씀하시던 그 양반이신가. 스님의 뒤를 따라갔다. 심검당 부엌을 지나서 문지방을 하나 더 넘어가자 거기에 스님의 거처가 있었다. 툇마루가 딸린 작은 방이었다. 스님은 방에 들어가서 먹과 벼루, 작설차 따위를 내왔다.
"오늘 내 손님이 굉장히 많을 거다. 너, 오늘 먹 갈고 차 좀 끓여야겠다."
그리고나서 한참 있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인다.
"설선당 공양간에 가서 내가 달란다고 곡차하고 참외하고 안주 좀 가져오너라."
절간에서 아주 드러내놓고 술을 마시다니. 아니, 세상에 뭐 이런 '땡땡이중'이 다 있단 말인가. 내가 망설이고 가만히 서 있자 스님이 다시 한 번 채근했다.
"아, 이놈아. 거기서 뭐하고 있어. 빨리 가서 곡차 가져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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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검당 부엌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 일로향실. 남명스님과의 추억이 깃든 곳이다. 마당 가운데 심어진 자산홍 한 그루가 마치 남명 스님의 넋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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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스님이 다시 방에서 방명록 겸 회계장부를 꺼내 왔다. 거기다 돈을 받는 대로 적어 넣으라는 것이다. 아침 9시가 되기 전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심검당 안마당 앞이 꽤나 북적거렸다. 스님은 먼저 온 순서대로 차근차근 글씨를 써주었다.
글씨를 받아가는 사람이 농부면 농부에게 맞는 글귀를, 상인이면 상인에 맞는 글귀를, 교수면 교수에 맞는 글을 자유자재로 써주는 것이다. 그렇게 딱 맞는 글귀가 어디 숨어 있다가 뛰쳐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 때는 '둥글 원(圓)'자가 들어갈 자리에 달랑 동그라미만 그려 넣기도 하고, 글자가 들어갈 자리에 그림을 집어넣기도 하는데 그 편이 훨씬 더 멋져 보였다.
구경하는 사람의 입에서나 글씨를 받아가려고 서 있는 사람에게서나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한 장 쓰고 나면 스님은 잊지 않고 곡차를 마시곤 했다. 글씨를 쓰기 위해 곡차를 마시는 건지, 곡차를 마시기 위해 글씨를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차 끓여 손님 대접하랴, 대접에 곡차 따르랴, 장부 정리하랴 나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글씨를 받은 사람은 묻는다.
"스님, 얼마나 시주할까요?" "오백원도 좋고 천원도 좋고, 없으면 그냥 가던지 알아서 혀."
말끝엔 꼭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영산홍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보고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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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통전 궁창의 방아찧는 두마리 토끼. 원통전은 원만하기가 보름달 같기 때문에 곧잘 달에 비유되고 불교 설화에 나오는 토끼는 헌신과 희생을 상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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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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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조전 천장의 자라와 물고기. 자라는 용궁으로 향하는 인도자이며 물고기는 원천적 자유와 수행의 상징을 나타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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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글씨값에 차등을 두다
그러나 돈 꽤나 있는 듯 보이는 사람이 예상보다 적게 돈을 내면 그냥 두지 않았다. 한 번은 이리(현 익산) 라이온스 클럽 사람들 20여명이 몰려와서 단체로 글씨를 받아갔다. 글씨를 받은 그들이 멀리 사라질 즈음 스님이 갑자기 나를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너, 저 사람들한테 시줏돈 얼마나 받았냐?" "30만원 받았는데요." "빨리 가서 그놈들 이리 끌고 와라." "아니, 왜요?" "아, 이 녀석아. 끌고 오라면 끌고 오기나 혀."
일주문 아래까지 달려가서 그들의 발길을 돌려세웠다. 스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쓴 글씨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하던 그들이 글씨를 내놓자마자 스님은 두 말 없이 쫙쫙 찢어버렸다.
"야, 이놈들아, 내 글씨가 그렇게 값어치 없는 줄 알어. 먹고살만헌 사람들이 그러면 못 써."
수시로 막걸리와 안주를 가지러 설선당 공양간을 들락거렸다. 소설 쓰는 송기숙 전남대 교수도 왔다 갔고 내로라하는 서울의 교수들도 왔다갔다. 드물게는 국회의원들도 얼굴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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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검당 뒤에 있는 커다란 동백나무. 남명 스님은 동백은 봄에 피기 때문에 '춘백'이며 진짜 동백은 한 겨울에 피는 차나무 꽃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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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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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이었다. <민족경제론>의 저자이자 지금은 고인인 박현채 선생과 <한용운 평전>을 쓴 안병직 서울대 교수께서 오셨다. 박현채 선생과 난 조금 안면이 있었지만 그냥 가벼운 눈인사만 나누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안병직 교수가 배시시 웃으면서 스님에게 묻는다.
"스님, 이 친구 언제쯤이나 다시 감옥에 갈는지 관상 한 번만 봐 주세요." "당분간은 걱정 없겄어. 그냥 편히 살어. "
키가 작달막하고 근육질인 체격을 가진 박현채 선생은 가만히 웃고만 계신다. 정치경제학자인 박현채 선생은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파란만장한 생애를 걸어온 분이다. 그렇게 십여 분쯤이나 얘기를 나누다 두 분은 자리를 뜨신다. 두 분을 배웅 나갔다.
"선생님, 몸 조심 하세요." "그래, 실천하면서 살자."
박현채 선생은 억센 두 손으로 내 손을 꽉 쥐어주시고 차츰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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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당으로 쓰이는 만세루. 심검당으로 들어가는 오른쪽에 있는 정면 5칸 측명 2칸의 맞배지붕 건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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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시간이 흘러 어느 새 프랑스 사람들이 '늑대와 개 사이'라고 부른다는 황혼이 조계산 자락에 숙식을 청해왔다. 그제서야 생각난 듯 스님에게 법명을 물었다.
"나 말이야 ? 나는 대천(大天)이라고 한다."
난 약간의 장난기를 섞어서 빈정거리듯 말했다.
"너무 거창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남명(南冥)이라고 불러라." "그것두 거창하긴 마찬가지네요. 근데 할아버지, 오늘 좀 부대끼시겠어요?" "왜 이놈아!" "아, 할아버지는 스님이기 전에 명색이 예술가잖아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글씨를 마구 남발하셨으니!" "예끼 이놈, 너도 술이나 한 잔 해라."
나는 스님이 따라주는 술을 넙죽 받아 마셨다.
"너, 잔말 말고 입산해라." "싫어요. 난 절방에서 나는 홀애비 냄새가 너무 싫거든요." "그러지 말고 입산해라. 그래서 나한테 동양학도 배우고 부처님 말씀도 배우고." "할아버지, 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예요. 그리고 이 절에 스님들 많은데 왜 하필 저를 보고 그러세요?" "그 놈들은 말귀가 어두워." "그런데 할아버지, 술 마시면 허무를 이길 수 있나요? 나중엔 허무가 허무를 새끼치진 않던가요?" "예끼 이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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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쪽에서 바라본 심검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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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검당 안 일로향실. 위에 보이는 다락마루는 음식물 창고로 사용하거나 더운 여름철 스님들의 쉼터로 사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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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행색으로 보아하니 기생같아 보이는 여자들 3명이 왔다. 나중에 확인하니 역시 순천의 기생들이었다. 시간을 보아하니 그들이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 될 것 같았다. 그들은 스님에게 글씨를 청했다. 그러나 스님은 다짜고짜 욕을 퍼붓더니 막무가내로 그 중의 한 여자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너희, XXX들은 부처님한테 올 때도 이렇게 새빨갛게 루즈 쳐 바르고 오냐? 이리 와. 이X들아, 뽀뽀나 한 번 하게."
뜻밖의 사태 앞에서 여자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조금 후 스님이 다시 고쳐 말했다.
"정 글씨 받고 싶으면 가서 세수하고 루즈 깨끗이 지우고 와."
스님에게 글씨를 받고 나서 여자들이 묻는다.
"스님, 얼마나 시주하면 돼요?"
스님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툭, 던지듯 말씀하신다.
"그냥 술이나 한 잔 줘." "그럼 저녁 무렵에 저희들이 차를 보내겠습니다."
스님과 단둘이 앉아 곡차잔을 기울였다. 스님이 천천히 참외를 깎으면서 말씀하셨다.
"너 아까 나한테 글씨 남발한다고 욕했지? 우리 절에는 범종이 없다. 그 종 만드는 돈을 내가 책임지고 있다. 오늘 2000만원 가량 만들어야 한다. 방명록 한 번 가지고 와봐라."
지금 내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 모르지만 그날 하루 1000만원이 넘는 돈이 모였던 것 같다. 갑자기 스님이 얼마쯤인지 짐작할 수 없는 돈 뭉치를 불쑥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넣어두거라. 앞으로 먼 길 다니려면 돈이 필요할 게다."
스님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제게 스님은 스님이 아니라 그냥 할아버지일 뿐입니다. 제가 양말이나 몇 켤레 사드릴께요."
스님은 불같이 화를 내더니 참외를 깎던 과도를 내 목에다 바짝 들이댔다.
"이놈아, 이래도 안 받을 테냐?" "안 받아요."
스님이 손에 든 돈을 반쯤 덜어냈다.
"그럼, 이것만 받어라."
그마저도 나는 거절했다. 스님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슬그머니 칼을 내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림 두 폭을 꺼내왔다.
"이걸 갖고 다니다 돈 떨어지면 팔아서 써라. 인사동 가지고 가면 아마 몇 백은 받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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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통전 뒷담의 매화나무. 꽃망울은 작지만 바라보는 이에게 기품을 느끼게 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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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봄이면 다시 피어나는 그의 사랑
스님과 단둘의 나누는 술자리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스님은 자신의 앨범을 꺼내오더니 내게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별 하나를 단 전두환이 부인 이순자와 함께 스님을 모시고 찍은 사진도 들어 있었다.
어느 한 순간, 스님의 눈길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듯 싶더니 꺼이꺼이 늙은 거위 울음 같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주위의 적막이 무색해졌다. 한참을 울고 난 후 스님은 내게 말했다.
"이 사진이 내 마누라 사진이다."
스님은 젊었을 때 자신이 의사였다고 했다. 각시는 그의 첫사랑이었다. 둘은 결혼해서 3년쯤 같이 살았는데 서독으로 유학을 떠난 여자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이나 돌아올까, 내일이나 돌아올까? 출문망(出門望)하기 십여 년. 36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올께끼'로 입산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술 한잔 마시면 각시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다.
난 가만히 이 철딱서니 없는 늙은 중을 바라보았다. 그의 대책 없는 순정이 마음을 사무치게 했다. 마음 밑바닥에서 연민이란 놈이 꾸역꾸역 올라왔다. 스님은 대중들이 모여 노는 만세루로 나를 끌고 가더니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스님의 방으로 돌아와 몇 잔의 술을 나눠 마시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빵빵' 경적 소리가 들렸다.
"왔다. 아까 그 기생들이다. 나랑 같이 놀러 가자." "전 기생집 같은 건 오래 전에 졸업했습니다. 다녀오세요."
몇 번 청했으나 듣지 않자 스님은 방을 뛰쳐나갔다. 홀로 남겨진 방안, 몇 줄기 눈물이 내 야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생이여. 더 빌어먹을 사랑이여.
세상의 허무에 눈뜨기 시작하던 청춘의 한 때, 내게도 중이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긴 했다. 그러나 난 끝내 중이 되지 않았다. 세상에 남아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이렇게 무위도식하며 살 줄 알았던들, 걷다보면 어느 새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마는 그런 세월일 줄 진작에 알았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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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무소인 창파당 앞 방지 옆에 선 수형이 멋진 처진올벚나무.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고 연한 홍색이며 산형꽃차례에 2∼5 송이의 꽃이 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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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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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무소인 창파당에 투각된 수자와 해자. 역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처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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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20년이 흐른 후
십여 년 세월이 흐른 뒤 난 전주의 화가들과 함께 다시 선암사를 찾았다. 남명 스님이 보고 싶어서였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스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스님에게서 남명 스님이 통영 미륵도엔가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겨우 얻어들었을 뿐이다.
지난 4월 10일, 남해의 지인들과 함께 선암사에 갔다. 종무소로 쓰는 청파당 방지 옆 처진 올벚나무 아래 서서 잠시 남명 스님을 생각했다. 생각컨대 스님은 벌써 세상을 버렸을 것이다. 윤회를 생각했다. 사람이 죽으면 윤회를 하는지 그걸로 끝인지 나로선 짐작조차 못할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네 삶 속에 깃든 슬픔만큼은 윤회를 거듭한다는 걸 절실히 깨닫곤 한다. 세월을 무상증여하고 얻은 대가치곤 아주 하찮은 것이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내 이야기를 읽은 분들 가운데는 남명 스님을 가리켜 땡초라고 손가락질 할 분들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에 속하는 일이다. 내가 본 남명 스님은 무장무애한 스님이었다. 얽매임도 걸리적거림도 없는 자재하는 바람이었다. 그런 그를 얽매이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첫사랑의 추억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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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암사 일주문. 화려한 공포를 지닌 배흘림기둥 2개가 인상적인 맞배지붕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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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기 |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괴목마을 조계산 선암사. 아마 지금쯤은 붉으면서도 결코 빨갛지는 않은 600년 묵은 아홉 그루의 영산홍이 피었을 것이다. 선암사 칠전선원 호남제일선원 문 오른쪽 옆에 있는 600년 된 영산홍이 떠오른다.
그 영산홍 아래 서면 가만 가만 타오르는 그리움에 비록 사나이라 할지라도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을 수 없을지니, 그대도 이 봄 기회 있어 선암사에 가시거든 한 방울 눈물로 온갖 세상 티끌을 씻고 오시기 바란다. 해마다 영산홍 필 무렵이면 내 귀에는 환청처럼 낯익은 소리가 들려온다.
"영산홍이 좋습니다. 꽃구경이나 하고 가시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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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님, 고운 추억 빛나는 글, 아름답게 마음에 남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