念根(satindriya)
[S48:10]은 5根(信/精進/念/定/慧)에 대한 분석이 상세하게 나오는 경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念根(기억의 기능)을 아래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본경의 satindriyaṃ, satimā, satinepakkena, saritā, anussaritā라고 표현된
sati나 saritā라는 단어는 同音異語도 아니고
일상적인 용어나 전문수행 용어로 구별될 아무런 근거도
그래서 '마음챙김'이랄지 '기억'이랄지 '생각' 등으로 달리 번역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자연스런 번역을 위해서
'나열/열거' 등의 의미가 포함된 '기억(隨念, anussaritā)'을 '생각(/상기)'으로 번역하는 것은 가능하나
아무런 족보도 없는 '마음챙김'이라는 표현이 이제는 대세가 되어
AI까지 이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여기서의 念(sati)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또한 身과 法은 어떤 의미이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고 있을까요?
vineyya에 대해 고려해야 할 여러 가지 측면의 문제는 제쳐둔다면
대체적인 의미는 드러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경에 나타나는 念根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그럼에도 여러 異說들에 대해 붇다나 그 직계제자가 면전에서 설명해 주셔도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
그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챙김의 기능이라 한다. <초불>
“katamañca, bhikkhave, satindriyaṃ?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so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 pe ... citte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ndriyaṃ.
비구들이여, 마음챙김의 기능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 비구들이여, 고귀한 제자는 마음챙김이 있고, 최상의 마음챙김 숙련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해지고 말해진 것도 기억하고 상기하는 자이다.
그는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며 머물고,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며, 마음챙김이 있어,
세상에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고; 느낌들에 대해 ... 마음에 대해 ...
법들에 대해 법들을 관찰하며 머물고,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며, 마음챙김이 있어,
세상에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다 -
비구들이여, 이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이라고 불린다.
AI 번역과 설명
katamañca: katama (의문형용사, 중성 단수 주격) + ca (접속사) - "그리고 무엇이"
bhikkhave: 명사 bhikkhu의 남성 복수 호격 - "비구들이여"
satindriyaṃ: 복합어 sati + indriya, 중성 단수 주격 - "마음챙김의 기능"
idha: 부사 - "여기에서"
ariyasāvako: 복합어, 남성 단수 주격 - "고귀한 제자"
satimā: 형용사, 남성 단수 주격 - "마음챙김이 있는"
paramena: 형용사, 중성 단수 구격 - "최상의"
satinepakkena: 복합어, 중성 단수 구격 - "마음챙김의 숙련"
samannāgato: 과거분사, 남성 단수 주격 - "갖춘"
cirakatampi: cirakataṃ (오래 전에 행해진) + pi (강조사), 중성 단수 대격
cirabhāsitampi: cirabhāsitaṃ (오래 전에 말해진) + pi (강조사), 중성 단수 대격
saritā: 명사, 남성 단수 주격 - "기억하는 자"
anussaritā: 명사, 남성 단수 주격 - "상기하는 자"
so: 대명사, 남성 단수 주격 - "그는" (ariyasāvako를 지칭)
kāye: 명사 kāya의 남성 단수 처격 - "몸에 대해"
kāyānupassī: 복합어, 남성 단수 주격 - "몸을 관찰하는"
viharati: 동사, 현재 3인칭 단수 - "머문다"
ātāpī: 형용사, 남성 단수 주격 - "열심인"
sampajāno: 형용사, 남성 단수 주격 - "분명히 알아차리는"
satimā: 형용사, 남성 단수 주격 - "마음챙김이 있는"
vineyya: 절대분사 - "제거하고"
loke: 명사 loka의 남성 단수 처격 - "세상에서"
abhijjhādomanassaṃ: 복합어, 중성 단수 대격 - "탐욕과 근심"
vedanāsu, citte, dhammesu: 각각 vedanā, citta, dhamma의 복수 처격 - "느낌들에 대해", "마음에 대해", "법들에 대해"
pe: 생략 표시
idaṃ: 지시대명사, 중성 단수 주격 - "이것이"
vuccati: 동사, 현재 수동 3인칭 단수 - "불린다"
첫댓글
망조가 보일 때 누군가는 '전언만 있고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라고 하더니
'직접적인 녹취'가 나오자 <조작>일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조작이 아닌 것이 증명되면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고 이런저런 의미로 말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닌 것이 증명되면 또 다른 번명이나 논리를 개발하게 될 자들이....
sati의 의미는 논에서도 기억이라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본 카페에 이미 올려 두었습니다.
특히 상좌부 부동의 준거라고 하는 [청정도론]에서 똑 같은 취지로 설명하고
[아비담마 길라잡이]에서도 그러한 취지이며
북방 논서에서도 같은 의미로 설명합니다.
이상과 같은 설명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위의 경문이나 그 외 4부 니까야에 이러한 의미로 쓰이지 않은 경문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최상의 기억능력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해지고 말해진 것도 기억하고 상기할수 있다
문자가 없어 기억능력에 의존해야만 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최상의 기억능력은 꼭 필요한 기능이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은 사띠를 마음챙김(깨어있는 마음)으로 번역하고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사띠의 어원이 기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사띠를 기억으로만 적용시키면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아닐까요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할때의 사띠는 마음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로 바로 알아챌수 있는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몸으로 뭔가를 할때도 마음은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을때가 많습니다 그런상태에서는 몸에서 몸을 관찰함이 될수가 없겠죠 봄봄님은 사띠를 모두 기억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아니면 기억으로 사용할때도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할때의 사띠는 마음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로 바로 알아챌수 있는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설명의 근거가 되는 경문이 있는지요?
봄봄이 본 카페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사념처는 정온에 속한다는 것이고 [알아챌 수]는 굳이 분류하자면 [혜온]이지 싶습니다.
다만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지 싶습니다.
즉 붇다로부터 혹은 제자로부터 배운 수행 방법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anupassī viharati 지켜보면서 산다]입니다.
그 결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그 다음의 상황이지 싶습니다.
기억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경문에 나타납니다. 모두 기억.
하나는 바른 기억으로 번역되는 정념으로 이른바 4념처
[4가지 수행주제인 신수심법이라는 대상(처)에 대한 념념불망하는 기억 혹은
수행방법에 대한 념념불망하는 기억에 의해서 4가지 수행주제를 지켜 봄] 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달콤했던 추억(기억)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삿된 기억이지 싶습니다.
경문에는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다만 [코끼리가 숲을 기억한다.]라는 문맥에서는 갈애를 의미합니다.
몇 번 말씀드린 비유이지만
동쪽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면서 잠시 자리에 눈이 팔려 급히 앉아서
마음은 동쪽으로 가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
몸은 왠지 서쪽으로 가는 것 같은 착각이 계속해서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안내 방송을 들으면 분명히 동쪽으로 가는 것이 맞는데
몸이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 번 헷갈리면 바른 안내 방송을 들어도
수정이 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 우리 중생들입니다.
처음 배울 때 잘 배워야지 잘못된 습관은 바르게 고치는 것은 엄청 어렵지 싶습니다.
그래서 가는 방향이 잘못 되면 가는 만큼이 아니라
그 몇 배의 고생을 해도 바른 방향을 잡기란 지난하지 싶습니다.
그러면 신수심법 사념처 수행은 신수심법에 대해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의미네요
사띠를 기억으로 보냐 마음챙김으로 보냐에 따라 수행방법이 너무 달리지게 됩니다
[4가지 수행주제인 신수심법이라는 대상(처)에 대한 념념불망하는 기억 혹은
수행방법에 대한 념념불망하는 기억에 의해서 4가지 수행주제를 지켜 봄] 이고
사념처 수행에 대해 어떻게 하는것인지 혹 경에 설명이 되어진 부분이 위 설명 말고 더 있나요?
봄봄님의 사념처 수행하는 방법을 들어볼수 있을까요
달리 표현하면 부처님이 주신 수행주제인 身(受心法)을 기억에 의해서 집중하라.
(身 등의 대상을 잊지 말고 기억하여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고/집중하고 그래서
지켜보면서 살아라, -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어떤 방법(마음가짐)으로?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여기에 나타나는 sampajāno가 '즉시 앎'이지 싶습니다.(실시간으로 앎)
念에 의한 作意가 대상을 만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즉 念-作意(-意)-法(대상/신수심법)
신념처의 백골관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사체를 자신의 몸과 겹쳐서 '상상'하는 수행법입니다.
4념처는 기본적으로 (內로) 삼매수행입니다.
밖의 대상으로 흩어지지 않고 자신을 대상으로(內로) 하는 수행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내로 지켜보면서 살게 되면 마음이 삼매에 들게 되고
삼매에 들게 되면
그렇게 지켜 보든 대상을 他로 지켜보는 것이 外로이고, 지견이 생겨나지 싶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위 수행방법은 들어 보았습니다만 저방식으로 수행은 한번도 한적이 없습니다
신념처 수행 설명이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고 대부분 이런식으로 나오니 대부분 호흡관찰로 하던데
저도 호흡관찰로 주로 하고 있습니다
〈대념처경〉에 나타나는 신념처의 내용, 즉, 구체적 수행법은 다음과 같다
호흡의 출입에 대한 알아차림
몸의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
몸의 행동에 대한 알아차림
몸을 구성하는 32가지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몸의 4대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죽은 시체에 대한 관찰
죽은 시체를 짐승들이 쪼아 먹는 모습에 대한 관찰
해골에 살과 피와 힘줄이 뒤엉켜 있는 모습에 대한 관찰
해골에 피와 힘줄이 뒤엉켜 있는 모습에 대한 관찰
해골에 힘줄만 남아 붙어 있는 모습에 대한 관찰
해골과 뼈가 흩어져 있는 모습에 대한 관찰
해골이 하얗게 바랜 모습에 대한 관찰
해골이 뼈 무더기로 변한 모습에 대한 관찰
뼈가 삭아 티끌로 변한 모습에 대한 관찰
@연기 위도 알아차림이라고 했네요
호흡의 출입에 대한 기억
몸의 상태에 대한 기억
몸의 행동에 대한 기억
몸을 구성하는 32가지 요소에 대한 기억
몸의 4대 요소에 대한 기억
죽은 시체에 대한 관찰
죽은 시체를 짐승들이 쪼아 먹는 모습에 대한 관찰
해골에 살과 피와 힘줄이 뒤엉켜 있는 모습에 대한 관찰
...
위 내용을 보면 자신의 몸에 관련된것은 알아차림(기억)
밖의 대상은 관찰이라고 했네요
아래는 호흡에 관한 경전의 수행설명 입니다
@연기 어떻게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숲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집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사띠를 확립하여 앉는다.
사띠하여 숨을 들이쉬고 사띠하여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안다.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안다.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안다.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
몸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
몸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
마치 도공이 길게 돌리면서 길게 돌린다고 알고,
짧게 돌리면서 짧게 돌린다고 아는 것처럼,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몸에서 일어나는 요소들을 관찰하며 머문다.
몸에서 사라지는 요소들을 관찰하며 머문다.
몸에서 일어나는 요소들과 사라지는 요소들을 관찰하며 머문다.
‘몸이구나’라고 그의 사띠가 현전하나니,
그것은 오직 지혜를 증장하게 하고, 오직 사띠를 강하게 한다.
@연기 이제 그는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처음부분과
"전면에 사띠를 확립하여 앉는다.
사띠하여 숨을 들이쉬고 사띠하여 숨을 내쉰다".
마지막
"몸이구나’라고 그의 사띠가 현전하나니,
그것은 오직 지혜를 증장하게 하고, 오직 사띠를 강하게 한다."
이부분에서 사띠가 언급되는군요
기억으로 바꾸면
"전면에 기억을 확립하여 앉는다.
기억하며 숨을 들이쉬고 기억하며 숨을 내쉰다".
"몸이구나’라고 그의 기억이 현전하나니,
그것은 오직 지혜를 증장하게 하고, 오직 기억을 강하게 한다."
위 수행의 결과는 지헤를 증장하게 하고 기억을 강하게 하는것인지
알아차림을 강하게 하는것인지는
수행결과를 보고 알려주세요^^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고 , 알아차림(기억)을 확립한 자가 되어,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고가 반복적으로 계속되면 확립되는것이 사띠가 아닐까요?
즉 보통 사념처 수행을 하면 내가 처음에는 사띠를 가지고 하는게 아니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고가 반복되다 보면 나에게 사띠가 확립된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아직 초보 수행자는 사띠가 없다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요?
즉 근면하게, 실시간으로 앎을 반복하다보면 (기억/알아차림) 이 확립된다
기억이 확립된다는것은 기억한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된다가 되고
알아차림이 확립된다는것은 이제 바로바로 알아차릴수 있게 된다는 것이고
봄봄님 설명으로 공부하다 보니 나는 아직 사띠를 확립하지도 못한것 같네 --;
수행한다면서 대념처경도 자세히 읽지도 않았네요 몇번이고 다시 읽고 수행에 집중해야겠습니다
봄봄님 덕분에 공부 많이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