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시의 언어 1 / 이종수 (시인)
“우리가 본 것을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우리가 본 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 안에 있지 않다.” (미셸 푸코)
경직된 사고를 벗어라. 새로운 세상의 표현,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찾아라.
의심 없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은 없다. 끊임없이 해체하고 새로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라.
나이를 떠나 생명에 대한 즐거움이 용솟음치면 지금 바로 앞에 보이는 대상의 본뜻과는 다르게
되받아쳐서 표현하라.
그 자리에서 이해되고 모든 비밀이 풀려버리는 것보다 돌려 말하니
바로 그것인 새로운 언어를 재배치하는 것도 중요하다.
있는 그대로 나타내라는 말과 전혀 반대의 뜻 같지만 생명 있는 그 원초적인 발성으로 가는 길은
또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고추밭에 갈 적에/건너는 또랑물//찰방찰방 맨발로/건너는 또랑물//목화밭에 갈 때도 건너는 또랑물//
찰방찰방 고기 새끼/붙잡는 또랑물
- 권태응, <또랑물>
동무 동무 들동무/들판으로 다니고/아지랑이 물결 속/나물 캐러 다니고//동무 동무 놀동무/노래하고 다니고/
솔솔 바람 품 가슴/손목 잡고 다니고//동무 동무 글동무/글 배우러 다니고/동네 앞길 환한 길/“가갸 거겨” 다니고
- 권태응, <동무 동무>
1행이 걸어간다 해바라기 꽃길 따라
2행이 걸어간다 랄랄랄 시냇물 따라
3행이 걸어간다 겅중겅중 걸어간다
4행이 걸어간다 악기들과 걸어간다
5행이 걸어간다 콧노래 부르며 걸어간다
6행이 걸어간다 발 달린 가을도 걸어간다
7행이 걸어간다 하늘을 와삭와삭 베어 먹으며
8행이 걸어간다 사과나무 걸어간다
9행이 걸어간다 포도나무 걸어간다
- 함기석, <즐거운 소풍>
시의 형태와 분위기는 다르지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찰방찰방’ ‘동무 동무 놀동무’처럼
의성어와 새롭게 만든 말로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간 권태응 동요와 즐거운 소풍날 하면 으레 신이 나서
한껏 어우러지면서도 뿔뿔히 흩어질 것 같이 넘치는 분위기 때문이리라.
그저 뒤로 쳐지는 배경만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사과나무, 포도나무의 재배치만으로 즐거운 소풍을
완성하고 있는 것도 새로운 말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한 시인, 곧 시의 언어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루이 1세
루이 2세
루이 3세
루이 4세
루이 5세
루이 6세
루이 7세
루이 8세
루이 9세
루이 10세(세칭 고집쟁이)
루이 11세
루이 12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
루이 18세
그리고는 끝…
도대체 어찌된 사람들이
스물까지도 다 셀 줄 모르게 생겨먹었을까?
- 자크 프레베르, <멋진 家門>
“그것은 우리를 닮은 어느 노래/너는 나를 사랑하고/나는 너를 사랑했지/우리는 둘이서 함께 살았지/
나를 사랑하던 너와/너를 사랑하던 나는/그러나 인생은 사랑하던 사람들을/어느샌가/소리도 없이/
갈라놓아 버리고/바다는 헤어진 사람들의/발자국을 모래 위에서 지워버리네”라는
고엽(枯葉)이란 샹숑으로 널리 알려진 자크 프레베르의 시다.
혁명의 와중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단명했던 왕조를 긴 호명과 짧은 한탄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태종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 하고 외우던 조선 왕조를 패러디하거나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들이란
노래방 가사를 패러디하는 형식으로 ‘멋진 왕조’ ‘멋진 위인들’ 같은 시로 만들어보아도 좋을 듯하다.
우선 문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뭔가 예쁜 것을
뭔가 간단한 것을
뭔가 예쁜 것을
뭔가 유용한 것을 그릴 것
그 다음엔 그림을
정원이나
숲이나
혹은 밀림 속
나무에 걸어 놓을 것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
때로는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여러 해가 걸려서
결심하기도 한다
실망하지 말 것
기다릴 것
필요하다면 여러 해를 기다릴 것
새가 빨리 오고 늦게 오는 것은
그림의 성공과는 무관한 것
새가 날아올 때는
혹 새가 날아오거든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킬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
그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지울 것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리고는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골라
나무의 초상을 그릴 것
푸른 잎새와 싱싱한 바람과
햇빛의 가루를 또한 그릴 것
그리고는 새가 결심하여 노래하기를 기다릴 것
혹 새가 노래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쁜 징조
그림이 잘못된 징조
그러나 새가 노래하면 좋은 징조
당신이 싸인해도 좋다는 징조
그러거든 당신을 살며시
새의 깃털 하나를 뽑아서
그림 한 구석에 당신 이름을 쓰라
- 자크 프레베르,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기다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누군간에게 이런 초상화를 요청한다면 제풀이 지쳐 안 그리고 만다고 말할 만큼, 구운 밤을 모래에 심어
싹이 날 때에 임과 이별하겠다는 고려 속요 ‘정석가’처럼 굳은 결심 아니고는 기다릴 수 없는 ‘새의 노래’가
무엇인지 생각한다면 이 시에 들인 시인의 공력이 느껴진다.
이것은 누군가의 시나 그림에 부탁할 수 있는 정신의 한 대목일 수 있다.
시 창작법의 함축 같기도 하다.
다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절망’을 새롭게 비추고 있는 시를 보자.
광장의 벤치 위에
어떤 사람이 앉아
사람이 지나가면 부른다
그는 외안경에 낡은 회색옷
엽궐련을 피우며 앉아 있다
그를 보면 안 된다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가 보이지도 않는 양
그냥 지나쳐야 한다
그가 보이거든
그의 말이 들리거든
걸음을 재촉하여 지나쳐야 한다
혹 그가 신호라도 한다면
당신이 그의 곁에 가 앉을 수밖에
그러면 그는 당신을 보고 미소짓고
당신은 참혹한 고통을 보고
그 사람은 계속 웃기만 하고
당신도 똑같이 웃게 되고
웃을수록 당신의 고통은 더욱 참혹하고
고통이 더 할수록 더욱 어쩔 수 없이 웃게 되고
당신은 거기 벤치 위에
미소지으며 꼼짝 못하고 앉는다
곁에는 아이들이 놀고
행인들 조용히 지나가고
새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고
당신은 벤치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
당신은 안다 당신은 안다
이제 다시는 이 아이들처럼
놀 수 없음을
이제 다시는 조용히
이 행인들처럼 지나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이 새들처럼
이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나아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 자크 프레베르, <절망이 벤치 위에 앉아 있다>
‘절망’이란 말을 ‘로또’로 바꾸어보라.
‘절망’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가까이 있지 않은가.
‘절망’에 붙들려 미소지으며 더는 이쪽 삶으로 건너올 수 없는 때를 생각해보면 얼마나 섬뜩한가.
내 삶에 있어 ‘절망’이란 어떻게 왔는가, 혹 벗어났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가,
써본다면 어떤 시가 나올 수 있을까.
시의 언어는 함축의 묘미에도 있지만 재발견에 있기도 하다.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몸이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베어 나오는 그 환상통,
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듯 아픈데도, 갑자기 없어져 버린 듯한 날
한 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木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상실감일까? 새가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허리 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 끝으로 사라진다
발자국은 없고, 바퀴자국만 선명한 골목길이 흔들린다
사는 일이, 저렇게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라면 얼마나 가벼울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창 밖,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분명 팔과 다리이고, 또 그것은 분명 몸에 붙어 있는데
사라져버린 듯한 그 상처에서, 끝없이 통증이 스며나오는 것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 김신용, <환상통>
내 아픔을 나무의 환상통에서 다시 보는 것일까?
어느 때는 한몸이 되었다가 상처를 주기도 했던 ‘지게’와 ‘새’의 환상통. 제각기 아픔을 시로 승화시키고자 할 때
어떻게 쓸 것인가 생각하게 해주는 시다.
“翩翩黃鳥(편편황조) 훨훨나는 저 꾀꼬리/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서로 정답구나/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울사
이 내 몸은/誰其與歸(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황조가) 일찍이 꾀꼬리에게서 느끼는 원초적인 감정이나
“붉은 바위 가에/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꽃을 꺾어 받자오리다".(헌화가)에
나온 새로운 의미의 ‘꽃’과 ‘수로부인’, 더 나아가 주술적이면서도 늦깍이 사랑의 세레나데로
지금까지 불려지는 것을 생각해 보면 작기 가지고 있는 환상통을 떠올려 시를 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저기 씨앗 파는 사람
장터, 한 귀퉁이에서, 신문지 위에 상추 쑥갓 같은 씨앗봉지들을 올려놓고
한 봉지 천 원씩에 팔고 있는 사람
그렇게 씨앗을 팔아서는 해장국 한 그릇 값도
집으로 돌아갈 시골 버스비도 못 만들 것 같은,
누구의 신발에 묻어 왔다가 거기 떨어진, 젖은 나뭇잎 같은 시선 떨구고
오가는 사람 그림자 그늘 삼아 앉아 있는 사람
그러나 지난 번 장날에도 있었고
오늘 장날에도 어김없이 보여,
자신은 불경을 깨칠 뜻이 못된다고 여겨, 매일 山寺 뒤에,
감나무 밤나무 같은 유실수를 심는 것으로써, 자신을 공양하던, 어느 수행자처럼
자신은 씨앗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
씨앗을 팔고 있는 것 같은 사람,
지난 장날, 마당의 잡풀 뽑아낸 자리 작은 꽃밭을 만들고 싶다는 내게
<잡풀>은 없다고
엉겅퀴도 내 마당에 심고 가꾸면 꽃이 되는 거라고 말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으면서도
내 잡풀 마당에 예쁜 보랏빛 제비꽃 한 송이를 숨겨주었으면서도
자신은 억새풀밭 가꾸지 못해, 아무렇게나 키 자란 忘草처럼 보이던 사람
물 마른 天沓 같은 얼굴, 낡은 보릿대 모자에 가리고
저기, 씨앗 파는 사람
- 김신용, <도장골 시편-씨앗 파는 사람>
어쩌면 씨앗이 되지 못한다고 여겨 씨앗을 팔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은 시인 자신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환상통을 겪고 있어 만나는 사람마다 만나는 풀, 구름에게서도 환상통을 말하는. ‘즐거운 소풍’처럼
새로운 배치만으로도 그 이전 것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도 좋지만 누군가는 만날 것 같은 사람, 그 사람을 보는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쏠렸는지
뚜렷하게 드러나는 시를 써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환상통이야말로 그 대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시의 원동력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