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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익은 열매들에게 문안하라
롬 16:1-6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롬 16:1-6 / [문안] 겐그레아 출신인 우리의 자매 뵈뵈 부인이 곧 여러분을 방문하러 갈 것입니다. 그분은 교회의 열성적인 일꾼입니다. 2) 주님 안에서 일하는 형제 여러분의 자매로서 따뜻이 맞아 주십시오. 여러분이 도울 수 있는 한 힘껏 그분을 도와주십시오. 그분은 나뿐 아니라 어려움을 당한 많은 형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3)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이 부부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일해 온 나의 동역자일 뿐만 아니라 4) 목숨을 걸고 나를 살려 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과 믿음의 형제들이 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5) 그들의 집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에게도 문안해 주십시오. 나의 좋은 친구인 에배네도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맨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입니다. 6) 우리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도와준 마리아에게도 문안해 주십시오.
바울은 그동안 함께 사역했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마무리 인사를 하면서, 먼저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동역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뵈뵈를 천거한 바울(1-2) 겐그리아는 고린도에서 동쪽으로 약 10.5km 떨어진 항구 도시로서 무역과 상업,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기록한 서신을 뵈뵈를 통해 로마 교회에 보냅니다. 뵈뵈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일꾼인지, 아니면 집사로 섬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아이들과 함께 수를 세는데도 제외가 될 정도로 낮은 신분으로 취급되었습니다(마 14:21; 15:38). 그러나 바울은 뵈뵈를 로마 교회에 귀중한 서신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임명하고, 교회에 천거하면서 성도로서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 섬길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뵈뵈는 이미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 뿐 아니라 바울의 보호자가 될 만큼 섬김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3-4) 바울은 성도들의 문안 인사 가운데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가장 먼저 문안 인사를 합니다. 동역자란 함께 일하는 자, 돕는 자, 하나님의 일꾼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부는 바울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동역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방 교회들도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부부는 원래 로마에 살고 있었으나 글라우디오 황제의 박해로 인해 로마에서 고린도로 도피했습니다(41-45년). 그때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를 더욱 열심히 믿고 에베소에까지 동행하였으며(행 18:18, 26; 고전 16:19), 후에 로마로 돌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아름다운 전형을 보여줍니다(고전 9:5).
가정교회, 에배네도, 마리아에게 문안(5-6) 초대 기독교는 회당과 같이 일정하게 모이는 장소가 없어서 보통 개인의 가정집에 모였으며, 이것이 자연스럽게 가정교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가정 교회 안에 있던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성도들에게도 문안할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고전 16:19; 골 4:15; 몬 2). 바울이 사랑으로 제자를 삼은 에배네도는 현재 터키인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맺은 이방인의 열매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리아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떤 수고를 하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로마교회가 다 알 수 있는 섬김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적용: 바울이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함께 생명을 바쳐 헌신적으로 동역했던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당신은 어떻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까?
네트워크는 컴퓨터들이 통신 기술을 이용하여 그물망처럼 연결된 통신 이용 형태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어 복음을 힘차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많은 지체들의 동역 위에 세워집니다. 각기 다른 환경과 달란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협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16:1
겐그레아 - '겐그레아'(Cenchreae)는 고린도에서 남동쪽으로 약 11Km 떨어진 항구 도시로서 당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인 고린도의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시 고린도에 도착하여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고린도 교회를 세웠는데(행 18:1-18), 바로 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복음이 그 주변의 여러 도시로 전파되었고, 그 결과 세워진 교회 가운데 하나가 겐그레아 교회이다(고후 1:1, E.F. Harrison).
교회의 일군 - 이는 헬라어 '디아코논 테스 여클레시아스'(* )로 번역되어 있는데 여기서 '디아코논'(* )은 '디아코노스'(* )의 여성 목적격으로 '교회에서 섬기는 자', '사역자'라는 의미이다(KJV, NIV). 그러나 '집사'라고 번역하기도 한다(RSV, JB, NEB). 초대 교회에서 '집사'라는 직분은 회중의 인정을 받아 교회의 기물이나 그 밖의 봉사를 관장하는 역할로서 대부분 남자들이 봉사하고 있었다(빌 1:1). 그러나 후에 여자들도 집사로 임명되었다(딤전 3:11). 바울이 '뵈뵈'라는 여집사를 로마 교회에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여자들이 집사로 봉사한 사실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벌써 알려져 있는 사실임을 볼 수 있다(Lenski). 집사직은 여인들도 자신들의 기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Murray). 당시 교회에서 여자 집사들은 심방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 그리고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과 같은 남자들의 손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일들을 독립적으로 담당했었다(Godet).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겐그레아 교회는 어느 정도 교회 조직을 갖춘 교회로서 다른 교회보다 더 진보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뵈뵈 - '뵈뵈'(* , 포이벤)는 '밝다', '빛을 발하다'의 뜻으로 그녀는 바울이 로마 교회에 추천할 정도로 겐그레아 교회에서 믿음이 탁월한 사람이었다(Murray). 바울은 '뵈뵈'를 '우리의 자매'(* , 아델펜 헤몬)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육신적인 혈연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신자를 가리킨다(Robertson).
천거하노니 - 바울은 뵈뵈를 로마 교회에 추천(推薦)하고 있다. '천거하노니'로 번역된 헬라어 '쉬니스테미'(* )는 신약성경에서 (1) '소개한다', '추천한다'(고후 3:1;5:12)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는 '추천한다'의 의미이다. 바울은 로마에 갈 계획을 세웠으나 곧바로 갈 처지가 안 되었기에(15:25) 다른 사람을 통해서 먼저 본 서신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던 중 뵈뵈가 로마로 떠나려고 하였으므로 그녀 편에 본 서신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뵈뵈가 본 서신의 전달자라고 인정하는데 대부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Godet, Murray). 그녀가 본 서신의 전달자라는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녀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추론해 보면 바울이 뵈뵈를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간곡히 추천한 사실과 뵈뵈가 로마에 도착한 시점에 로마서가 로마 교회에 전달된 사실을 통해서 볼 때 뵈뵈가 본 서신의 전달자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Lenski).
=====16:2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 바울의 이러한 언급은 로마 성도들의 열렬한 환대의 전통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당시 이방인 신자들에 대한 유대 우월주의를 고려한 것이었다(Dunn). 겐그레아 지역에서 바울의 서신을 가지고 당시 제국의 수도 로마를 방문하는 뵈뵈에게는 로마 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가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혹 그녀를 배타적으로 여기거나 그들의 우월감으로 천시(賤視)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로마 교회를 방문하는 뵈뵈를 로마 교회가 정중하게 영접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보호자 - 이는 헬라어로 '프로스타티스'(* )로 일반적으로 남성에게만 사용되는 단언이다. 즉 어떤 공동체의 합법적인 우두머리나 대변인을 뜻할 때 사용되어졌다(Bauer). 당시 여인들은 법적인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유일하게 여성형으로 사용된 이 단어는 어려울때나 위급할 때 도와주는 '후원자', '구원자', '조력자'(helper, NEB)라는 의미를 가진다. 헬라 문화권에서 후원자, 또는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물질이 부유한 사람들이었다(Dunn). 여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당시에 이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킬 때 이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바울은 그의 선교 사역에 경제적 도움을 준 뵈뵈의 따뜻한 배려에 관해서 그녀를 '보호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사실로 보아 뵈뵈는 부자였고 사회적으로 유력한 여성임을 알 수 있다.
=====16:3
동역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르구스'(* )는 '함께 일하는 사람', '돕는 사람'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는 대부분 바울 서신에서 사용되어졌는데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이 용어를 사용했다. 첫째, 그의 동역자들을 지칭함으로 그들의 수고를 치하하고 그들의 권위를 강화시켜 주기 위해 사용하였다. 둘째, 바울 자신 역시 동역자로 언급함으로 모두 다 하나님의 조력자들이며 함께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들이라는 점을 나타낼 때 사용하였다(G. Kittel).
브리스가와 아굴라 - 바울은 그의 동역자 중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부부로서 바울이 고린도를 전도할 때 만났던 사람들이다(행 18:2). 그들은 원래 로마에서 살았으나 로마의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의 유대인 추방 명령 때문에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살고 있었다(행 18:2). 또한 그들은 바울과 동일한 직업인 장막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므로 바울과 함께 평상시에는 그들의 집에 거하면서 장막을 만들었으며 또 한편으로 복음을 힘써 전하였던 것이다(행 18:3). 여기서 브리스가는 통상적으로 브리스길라(* , 프리스킬라. 행 18:18)라고 불려졌는데 이것은 앗시리아족의 여성을 나타내는 브리스가의 애칭이다(Robertson). 바울이 그들 부부를 호칭(呼稱)하는 데 있어서 대개 아굴라 보다 브리스가를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브리스가'가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더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이해하고 믿음의 도리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자기 남편, 아굴라보다 더 성숙해 있기 때문이다(Bruce). 이는 행 18:23-26에서 나타난 바대로 그들 부부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아볼로에게 믿음의 도에 대해서 자세한 교리를 가르친 것에 대해 '브리스가'먼저 언급된 데서도 유추된다. 아무튼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의 선교 여행에 동행하여 에베소까지 갔으며(행 18:18, 19) 거기서 오랫동안 체류하면서 바울의 목회 사역을 돕다가 글라우디오 황제가 사망하자 바울이 로마서를 뵈뵈의 편으로 보낼 무렵에는 로마에 돌아갔던 것으로 추측된다(Harrison, Murray, Lenski).
문안하라 - '아스파사스데'(* )는 서신서에서 가장 일반적인 인사의 형태로서 '아스파조마이'(* )의 제 1부정 과거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너희들이 문안하라'는 뜻이다. 바울은 인사를 사랑의 표현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1:7;고전 1:1-3;고후 1:2;갈 1:2, 3). 특히 본절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도가 명령형을 사용하여 그의 독자들에게 서로 문안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H. Windisch).
=====16: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 바울의 복음 사역을 조력(助力)함에 있어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헌신이 어느 정도인지 잘 표현되어 있다.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톤 테아우톤 트라켈론 휘페데칸'(* )으로 '사형 집행자의 도끼 밑에 자기 목을 내어 놓다'라고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핍박의 손길에서 바울의 생명을 구하고자 극단적인 위험을 겪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이다(John Murray, Dunn). 이 사건이 고린도에서 일어났는지(행 23:12), 아니면 에베소나 그 밖의 지역에서 일어났는지 그리고 언제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Godet, Meyer). 아마도 이 사건은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와 유대인들이 폭동(暴動)을 일으켜 바울의 목숨을 해하려고 할 때 바울의 생명을 구하려고 온갖 극단적인 위험을 무릅쓴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행 19:28-31;고전 16:8, 9, 19). 그러나 확실한 것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바울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와 함께 일사 각오로 생사 고락을 함께 하였다는 점이다(Meyer). 이처럼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자신의 복음 사역을 돕기 위하여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한 것에 대하여 바울은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복음 사역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사역자들을 도운 그리스도인 부부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준고 있다.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희생적인 헌신으로 복음 사역을 도와준 것에 대해 바울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 교회까지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있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약간은 과장적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말한 듯하다. (1) 헌신적으로 조력한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한 바울의 존경과 경의뿐 아니라 그들의 영향과 그 소식이 넓은 지역으로까지 퍼져 있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Dunn). (2) 본 서신의 수신자들인 로마의 성도들이 그들의 모본을 따르도록 한다. (3) 바울의 이방인 선교 사역에 많은 신실한 동역자들이 헌신적으로 그를 도와준 것에 대해 말함으로써 로마 성도들에게 이방인 복음 사역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이 선교 사역에 동참하도록 한다.
=====16:5
저의 교회 - '저의 교회'(* , 텐 카트 오이콘 아우톤 여클레시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로마 가정 교회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Meyer). 바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독립된 교회 건물보다는 성도들의 가정집을 정규적인 회합(會合)의 장소로 사용한 것이 보편적이었으며(10, 11, 14, 15절;고전 16:19;골 4:15) 몇 개의 가정 교회들이 모여 하나의 지역 교회를 이루었다(Dunn). 여기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 교회로 로마의 전체 교회에 포함된 하나의 교회에 불과하다. 성경에 나오는 초대 교회에서 대표적인 가정 교회는 마가의 다락방(행 1:13), 빌립보에 있는 루디아의 집 (행 16:40),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의 집 (몬 1:2), 라오디게아에 있는 눔바의 집(골 4:15)등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앙과 참된 형제애로 이루어진 가정 교회는 초대 교회의 신앙과 생활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에배네도(* , 에파이네토스) - 이것은 '칭찬을 받을 만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는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 중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인 에베소를 중심으로 아시아 지방에서 전도하는 과정에서 얻은 최초의 이방인 회심자로 여겨진다(Godet, Meyer, Dunn). 그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함께 바울의 전도를 받아 회심한 자였다(Dunn). 그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함께 바울의 전도를 받아 회심한 자였다(Dunn). 그후 자연스럽게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 교회에 속해 함께 일을 도우면서 에베소에서 로마까지 복음의 동역자로 함께 수고한 것으로 보인다(Godet). 아시아에서...
열매니라 - '에배네도'를 가리켜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 , 아파르케 테스 아시아스)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은 뒤이어 많은 사람의 열매가 맺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암시한다(고전 16:15, 16). 또한 바울은 그를 가리켜 '사랑하는'(* , 아가페톤)이라는 수식어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에배네도가 아시아의 첫 개종자로서 주의 사역에 대해 열심이 있었음으로 바울이 그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6:6
마리아 - 헬라어는 '마리안'(* )으로 이름의 뜻은 '높여진 자'이다. 어떤 사본(P46,* , D, F, G)에는 히브리어형인 '마리암'(* )으로 나온다. 이 이름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인을 나타낸다(Robertson, Dunn). 신약성경에는 마리아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7명의 여인이 나온다. (1) 예수의 어머니(마 1:16;막 6:3;눅 1:41), (2) 막달라 마리아(마 27:56;막 15:40;눅 8:2), (3) 야고보의 어머니(마 27:56;막 15:40), (4) 글로바의 아내(요 19:25), (5) 마르다의 동생(눅 10:39;요 11:1), (6) 마가 요한의 어머니(행 12:12), 마지막으로 본절에 나타난 마리아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들은 한결같이 신앙이 훌륭한 여인들이었다. 본절에 소개된 마리아에 대해서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이란 표현 이외에 자세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이 간단한 소개로도 우리는 (1) 그녀가 로마 교회 초창기(草創期)의 한 회원이라는 것과 (2) 로마 교회가 그녀의 수고와 헌신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사실과(Murray) (3) 뵈뵈나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활동적으로 바울의 사역에 참여해 왔을 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사람처럼 바울의 배후에서 그의 선교 사역을 헌신적으로 지원해왔음을 알 수 있다(Godet).
< 설 교 >
바울의 문안과 마지막 부탁
로마서 16장 / 민병석 목사
본문 : 로마서 16 : 1 - 27) 서 론 :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대한 바울의 문안과 마지막 부탁으로 마쳐집니다. 로마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읽고 연구해야 할 위대한 기독교 교리서입니다. 로마서는 이처럼 교리적인 면에서 문장을 다루었기 때문에 딱딱한 맛이 나서 흥미를 갖기가 어려우며 좀처럼 소화시키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서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부지런히 배워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실 생활에 적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소망 있는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뵈뵈의 천거 1절부터 16절까지는 바울의 복음 안에서의 친구 이름이 다정하게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 처음 이름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뵈뵈’라고 하는 여자 성도입니다. 바울은 그를 자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뵈뵈 자매는 바울이 쓴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가서 전달한 일꾼입니다. 그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뵈뵈는 이곳 교회에서 교회를 섬겨온 일꾼으로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온 내용이 두 가지로 크게 나뉘어 있습니다.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뵈뵈 자매가 바울을 위해 그의 복음사역이나 그의 생활을 섬세하게 돌보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뵈뵈를 로마교회에 보내면서 그를 주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똑같이 뵈뵈와 같이 주의 일에 전념하거나 힘겨운 일을 감당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주안에서 이토록 수고하는 성도들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합당한 대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2. 바울의 문안을 받은 로마교회의 성도들 3절부터 16절에 이르도록 21명의 성도들이 바울의 문안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아니었지만 예루살렘교회나 바울이 전도 여행시 세운 교회성도들이 로마교회에 많이 있었습니다. (1) 먼저 바울은 아글라와 브리스가 내외에게 문안했습니다. 이들은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장막장사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복음 동역 자들입니다. 이들 부부는 부부가 합심하여 바울의 복음사역을 도와주었으며 바울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 놓을만한 뜨거운 사랑으로 협력했다고 칭찬해 주고 있습니다. (2) 다음에 바울은 에베네도에게 문안하라고 말하고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고 일렀습니다. 에베네도는 바울에 의하여 회심한 성도로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많이 수고했다고 말하고 있는 마리아는 봉사의 일꾼입니다. (3) 다음에 바울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바울의 친척일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혔던 사람이요 사도들에게까지 유명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4) 바울은 암볼리아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 암볼리아는 특별히 주안에서 바울의 사랑을 받은 성도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의 사랑을 받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주의 종과 등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5)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스다구에게 문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는 아벨레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 아벨레란 사람은 주안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형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안에서 인정을 받는 일은 중요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하려고 힘쓰는 사람이 끝까지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6) 바울은 또 아리스도볼로의 권속에게와 바울의 친척 헤리디온에게와 나깃수의 권속 중 주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할 것과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와 버시에게도 문안을 부탁했습니다. (7) 바울은 13절에서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루포의 존재에 대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골고다에 올라간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일 것이라고 말합니다(막15:21). 이 외에도 많은 성도들에게 문안 할 것을 전했습니다. 3. 거스리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경고 바울은 마지막으로 교회를 거스리는 자들에 대한 엄한 경종을 잊지 아니했습니다.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법도를 무시하거나 주의 종의 경종을 경히 여기면 안됩니다. 그리고 바른 교훈을 거스려도 안됩니다. 이들로 인하여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인가? 이에 대하여 18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들은 자기 배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리의 복음도 아니고 바른 계명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공교란 말은 교묘하게 꾸며낸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자라나는 가라지 들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자들을 잘 살펴서 저희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떠난다는 말은 격리란 말로 그들에게 가까이 하지 말고 그들과 교제하지 말며 그들의 일에 동참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19절에서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한데 지혜로우란 말은 선을 배우라는 말입니다. 악한데 미련 하라는 말은 악을 바라지도 말고 악과 타협하지도 말고 악에 접근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결 론 : 25절로 27절까지는 바울의 송영사입니다. 바울은 25절에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던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감취었던 것이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복음의 계시는 놀라운 것입니다. 바울은 ‘나의 복음’이란 말로 담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복음으로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끝까지 믿음으로 견고히 하실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선교 동역자들의 헌신
로마서 16:1-5 / 이정익 목사
사도바울은 희대의 인물입니다. 20세기가 지났지만 그만한 인물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출신성분이 좋았습니다. 부잣집 아들이었고 다소에서 예루살렘까지 유학했던 사람이었으며 당대의 학문 주류였던 헬라철학에 능통했던 명사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또한 정통 바리새인이었고 철두철미하게 경건으로 율법을 지켰습니다. 거기에 사명감이 출중하여 유대교인으로서 유대교를 위하여 열중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나 회심하여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를 위해서 그 열정을 불태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1세기 초에 예루살렘과 그리스와 로마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고 회심과 변화가 일어났고 그의 발이 멈추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심지어 옥중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외쳤던 인물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와 체질이 다릅니다. DNA가 다릅니다. 그래서인지 마침내 사도로서 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성공하게 된 원인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
사도바울은 전도자로서, 사도로서 열정적으로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는 평생 4번에 걸쳐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1차 여행은 바나바와 함께 기원후 44년, 48세 때에 떠났습니다(행 13:1-14:28). 그들은 수리아 안디옥을 시작으로 구브로의 살라미, 바보,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루스드라, 앗달리아, 실루기아를 거쳐 다시 원점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거리가 2,000km였습니다. 또한 2차 여행은 기원후 51년, 55세 때에 떠났습니다(행 15:36-18:2). 그 때에는 바나바와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생질인 마가를 동행시키자고 했지만 바울은 아직 성숙치 못하다 하여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결별하였고 바울은 바나바 대신 실라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드로아, 네압볼리, 마게도냐,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에베소, 가이사랴, 예루살렘, 두로, 시돈, 그리스를 거쳐 다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여행 길이가 자그마치 1만km나 됩니다. 또한 3차 여행은 54년 58세 때에 출발합니다(행 18:23-21:16). 그 때에는 수리아 안디옥을 출발하여 다소, 브루기아, 에베소, 드로아, 네압볼리, 마게도냐, 아덴, 마게도냐, 드로아,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 밀레도, 바보, 두로, 돌레마이, 가이사랴, 예루살렘을 거쳐 돌아오게 됩니다. 그 여행거리도 1만km였습니다.
그리고 4차 여행은 기원후 62년, 66세 때에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종교적인 문제로 상소하였다가 석방되어 전도길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전도 여정도 5천km나 되었습니다. 이 네 번의 여행 여정을 합하면 35,000km나 됩니다. 당시 로마 군단이 하루 행군하는 거리가 보통 25km였는데 바울의 전도여행은 거리상 매일 10km씩 이동한 꼴입니다. 그렇게 그는 충실하게 전도여행을 하며 많은 회심자들을 만들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가서 고백하기를 “나는 달려갈 길을 다 가고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켰다”(고후 4:7-8)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준비하셨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수고한 자나 씨를 뿌린 사람은 기대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은 그만큼의 기대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그의 인생에서 사도로서 여한이 없을 만큼 열정적으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64년 68세로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인생이었습니다.
많은 동역자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이웃이, 친구가, 동료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전도할 때 혼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가 시작되자마자 12제자부터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훈련하셔서 전도사역을 맡기시고 승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도바울 곁에는 아주 좋은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로마서를 끝맺으면서 사도바울은 그 동역자들을 일일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바울에게 참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이 처음 회심하고 난후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위장 전향이라고 생각하여 경계심을 풀지 않았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바울 곁에 서서 여전히 경계하는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이해시켜서 친교하고 신뢰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1차 전도여행 때에는 직접 동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바나바는 잊을 수 없는 동역자였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도 이 바나바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이 얼마나 어색합니까? 그분들을 잘 안내하여 적응시키고 안착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나바의 역할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나바는 잊을 수 없는 동역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에서 여러번 동역자 바나바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뵈뵈입니다. 1절을 보면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겐그레아는 고린도의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로 교통 요충지였습니다. 뵈뵈는 그곳 출신의 여집사였습니다. 뵈뵈는 “빛을 발하다”라는 뜻인데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이 뵈뵈를 천거한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속히 로마를 가려고 했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아 가지 못하고 먼저 뵈뵈를 보내면서 그 편에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2절)고 당부하였습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개종한 유대인들로 이방인에 대해서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뵈뵈가 겐그레아 사람이고 이방인이라 하여 소홀히 하지 말고 정중히 영접하라고 당부하고 또 그에게 소용되는 물품을 도와주라고 당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그토록 뵈뵈 집사를 자상하게 배려하였을까요? 그 이유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뵈뵈는 사도바울이 어려울 때 상당한 위안을 준 집사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려울 때 위로하고 도와준 사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이는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여러 계층의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냥 스쳐가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성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떠난 후에도 잊을 수 없는 분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뵈뵈 집사는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집사였습니다.
세 번째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입니다. 3절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동역자라고 표현합니다. 그 말은 이들이 사도바울의 사역에 상당한 역할을 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들을 고린도에서 만났습니다(행 18:2). 이 두 사람은 부부로 원래 로마에 거주하였는데 황제 글라우디오 시대에 유대인 추방령을 내려서 고린도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사도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언제나 아내인 브리스가를 먼저 부르고 남편인 아굴라를 나중에 부릅니다. 그것은 아내가 더 활동적이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아내 브리스가는 성경공부를 잘 가르쳤다고 합니다. 행 18:23-26을 보면 그들이 아볼로를 만났습니다. 그는 당대에 언변과 웅변에 뛰어났던 사람으로 전도자였는데 요한에 법도만 알고 있었지 성령도 못받았고 성령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가가 아볼로에게 믿음의 도리를 가르쳤고 성령에 대해서 교육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 이 부부는 바울과 에베소까지 동행(행 18:18-19)하였고 오랫동안 동역자로 활동하였습니다. 후에 로마황제 글라우디오가 죽자 로마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부부를 잘 도와주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두 부부를 이렇게 챙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4절을 보면 “저희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자기의 목이라도 내 놓았나니”라는 표현은 사형집행자의 도끼 밑에 자기 목을 대신 내놓는 상황을 표현한 말입니다. 즉 이는 바울이 전도하다가 극심하게 핍박을 받을 때에 그를 구하고자 이들이 극단적인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 같습니다. 아마 에베소에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죽이려 할때 바울을 구하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개입했던 사건을 회상하며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행 19:28-31, 고전 16:9, 19). 그러니까 이 부부는 일사각오로 사도바울과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두 부부에게 존경을 표하며 감사하고 있고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저를 본 받으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에배네도입니다. 5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배네도라는 말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함께 전도하였는데 그 때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회심한 자가 에배네도였습니다. 그는 회심 후 브리스가와 에베소에서 로마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에배네도를 말하면서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에배네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열매였으니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첫사랑이 귀하고 첫 자식이 귀한 법입니다. 전도를 해서 처음 열매를 맺었으니 그 열매가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시아에 와서 전도해서 첫열매로 에배네도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다음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입니다. 13절에는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막 15:21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이 구레네 시몬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루포인데 사도바울은 그 루포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13절)라고 말합니다. 루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봉사나 헌신이나 충성도가 아주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어머니를 가리켜 “그는 곧 나의 어머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 구레네 시몬의 집에서 유숙하였는데 그때 바울은 가족들을 떠나 아주 외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루포의 어머니가 그를 자식처럼 모성어린 돌봄과 따뜻한 친절과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지금 로마에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그에게 문안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디모데입니다. 21절에는 “나의 동역자 디모데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아주 좋은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둘의 만남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이라고도 부릅니다. 플라톤은 원래 정치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를 만나 대화하면서 철학자가 되기로 꿈을 바꾸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책 한권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유명해진 것은 제자 플라톤이 그의 철학을 이론화하여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이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도 없었을 것이고 플라톤도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서 유명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의 만남을 아주 좋은 만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디모데는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비중있는 동역자였습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헬라에서 크게 성공하기를 기대하였고 어머니는 장차 아들이 좋은 전도자가 되는 것을 바랬습니다. 결국 디모데는 어머니의 기도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전도할 때 디모데가 동행했습니다(행 17-18장). 또한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디모데가 나서서 해결하였습니다(고전 4:17, 16:10).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디모데를 동역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전 4:17에서는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전도자로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전도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능력이 있었고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거기에 좋은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바울에게는 아주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로마서를 끝내면서 그동안 도와주고 힘이 되어준 동역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도가 성공한 것이 이같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곁에 좋은 친구나 이웃, 좋은 동료가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려움을 준 사람들
사도바울의 전도 여정에는 아픔을 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딤후 4:10을 보면 그 아픔을 준 네 사람 “데마, 그레스게, 디도, 알렉산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여기 데마는 초기 사도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바울은 그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픈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한 여집사가 도중에 절로 돌아간 일입니다. 물론 그분의 성장배경이 절과 밀접해서 그런 것이지만 그 사건은 가장 마음 아픈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사도바울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나를 버리고”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곤경에 처한 바울을 버리고 돌아간 것도 문제지만 신앙마저 버린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픈 마음을 안겨준 경우입니다. 딤후 4:14을 보면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조심하라 그가 우리에게 심히 대적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알렉산더는 당시 구리세공업자 즉 대장장이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바울을 따라다니다가 후에 배교하여 이단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재판받을 때 불리한 증언을 함으로 바울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건을 생각하면서 “주께서 그가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모든 심판을 주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그를 조심하라고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할 수 있으면 우리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하다가 보면 개중에는 두 번 다시 생각하기조차 싫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 대부분이 심장병을 가지고 있고 사모들의 8-90%가 우울증을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목회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산기도를 갔는데 산에 고목나무 하나가 밑둥이 시커멓게 다 썩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도 목회하니?”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기록된 좋은 동역자들은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직장에서든지 일터에서든지 사역지에서든지 살아가는 현장에서 누구에게나 좋은 동역자로 힘이 되고 언덕이 되어주는, 주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될만한 역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동역자들
로마서 16:1-16 / 조상호 목사
지난주에는 청년들과 함께 오클랜드에서 있었던 2000년도 뉴질랜드 코스타 수련회에 다녀왔습니다. 화요일 오전 일찍 크라이스트처치공항을 출발하여 오클랜드공항에 도착 한 후, 곧 바로 1시간20분 정도 떨어진 캠프로 이동하여 계속 그곳에서 3박4일의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에 수련회를 마치고 오클랜드 순복음교회에서 있었던 송정미, 김명식, 이삼열, 등의 조인트 찬양 콘서트에 참석하고 어제 토요일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코스타 집회를 마치고 크라이스트처치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번 코스타 수련회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몇 가지로 정리를 하면 이렇습니다. 첫째로 뉴질랜드 한국교회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수련회였습니다. 원래 이번 집회는 늦게 결정이 된 관계로 200명 참석을 목표로 준비했었습니다. 그 숫자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작년 호주 코스타 집회도 뉴질랜드에서 참석한 100명을 포함하여 350명 정도밖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주의 거대한 교민사회에 비해 작은 뉴질랜드 교민사회에 200명의 참석은 일견 타당한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집회에는 목표숫자보다 무려 두배 이상인 410명이 등록하였고, 강사, 스텝, 자원봉사자들 까지 합치면 무려 440명을 훨씬 상회하는 인원이 참석한 집회였습니다. 또 참석숫자 뿐 아니라, 퀸스타운, 더니든, 웰링톤, 로토루아, 해밀톤, 오클랜드 등지의 전국각지에서 참석하여 명실상부한 뉴질랜드 한인교회 연합수련회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이번 집회는 뉴질랜드에 새로운 소망과 비전을 제시해 준 수련회였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 동안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이민자 청년들이나, 유학생 청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도 없었습니다. 물론 뉴질랜드 이민역사가 얼마 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부모님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 그리고 우리 어른들이 우리 청년들에게 정확한 비전을 심어주지 못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오신 강사님들을 통해 뉴질랜드에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그 강사님들은 청년들 안에 잠재되어 있던 능력들을 발견케 하셨습니다. 완전히 식어버린 청년들을 뜨겁게 달구어 주셨습니다. 내재되어 있던 꿈들을 깨내어 주었습니다. 제가 그 동안 학창시절과 청년시절에 피교육자 입장에서 수많은 수련회에 참석하였고, 그리고 지도자가 되어 교육자 입장에서 수많은 수련회를 준비하고 인도했지만, 이번 코스타 집회는 과거의 수련회와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수련회는 매일 아침 7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7시부터 저녁12시, 저녁1시까지 단 1분도 휴식시간이 없었습니다. 하루에 정말 16시간 18시간 계속된 집회였습니다. 밥 먹고 강의, 밥 먹고 찬양, 밥 먹고 기도, 아무튼지 하루 종일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놀라운 것은 참석한 청년들의 대부분이 젊은 아이들이 표현대로 땡땡히 치는 청년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보통 수련회를 하면 '몇 시까지 오라', '빨리 일어나라', '밥 먹어라', '잠자라', '졸지 마라' 등의 이러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데, 이번 코스타 집회는 그러한 말들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진행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히려 시간 시간마다 제일 앞자리 앉으려고 거룩한 의자 쟁탈전이 벌어져서 조금만 늦게 가면 자리가 없어 뒷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강의나 집회 시간에는 강사님들의 말씀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옆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다 받아 적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또 찬양시간에는 정말 열정적으로 껑충껑충 뛰며 찬양하고, 기도 시간에는 강사님들이 절제를 시켜야 청년들이 기도를 멈출 정도로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셋째로 이번 집회는 뉴질랜드 한인교회들과 청년들이 하나되는, 연합하는 귀한 집회였습니다. 호주 코스타는 그 동안 4년에 걸쳐서 연합을 하지 못했는데, 뉴질랜드는 첫 번째 수련회에서 많은 교회들이 연합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작년에 저희 교회에서도 호주 코스타 수련회에 8명을 보내었지만, 시드니에 있는 한인교회들은 호주 코스타수련회에 거의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드니에 있는 청년들은 아예 코스타 집회에 대해서 알지도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한 교회의 독주 때문이었습니다. 코스타 본부에서는 한인교회들의 연합을 조건으로 96년에 1회를 시작하도록 허락을 했는데, 한 교회가 너무 주도적으로 나서다 보니, 2회, 3회, 4회가 되어서도 한인교회들이 연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교회의 자체 수련회처럼 썰렁한 수련회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뉴질랜드는 1회부터 연합이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 준비 때부터 연합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간의 고비가 있었습니다. 원래 뉴질랜드 코스타집회를 처음에 준비할 때는 오클랜드에 있는 한인기독청년모임인 KYCF를 중심으로 한 코스타로 준비되었었습니다. 그러자 오클랜드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호주처럼 냉담한 반응이었습니다. 호주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KYCF라는 한 단체만이 준비하는 코스타 수련회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습니다. 오히려 분열이 될 까,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있는 코스타 본부에서 한인교회들이 연합하여 준비하지 않으면 집회를 허락할 수 없다는 정식 요청이 있은 후, KYCF라는 한인기독청년회를 인도하는 목사님께서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많은 교회들이 준비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많은 교회들이 코스타 수련회를 위해서 몇천불씩 헌금을 하고, 복음성가 가수들을 수행하는 연주자들의 항공료를 부담하고, 수련회 기간 동안 식당봉사로 청년들을 섬기고, 다른 지역에서 온 청년들을 위해 차량으로 봉사하고, 음향 등의 값비싼 시설들을 빌려주고, 행사 기간 내내 설거지로 봉사하고, 강의나 설교 테잎을 복사하는 등, 많은 교회들이 함께 힘을 모았습니다. 결국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힘이었지만, 작은 힘들이 모이자 엄청난 힘으로 커졌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믿기로 이번 코스타 집회에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진 것은 다름 아닌, 연합을 기뻐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합을 기뻐하셔서 우리 청년들을 깨워주신 줄로 믿습니다. 뉴질랜드의 한인 교회들이 한인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동역하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 청년들을 뒤집어 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동역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코 독불장군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나 홀로'를 외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거의 모든 인물은 동역의 원리에 따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삼손과 같이 나 홀로'를 외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도 있지만, 모세와 같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는 여호수아와 아론과 훌 이라는 걸출한 동역자가 사역 내내 곁에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그가 자신의 정적인 사울왕을 피해 아둘람 굴로 도망갈 때, 동역자 400명이 다윗의 곁에 있었습니다. 또 다윗이 그일라로 나아갈 때에는 그의 곁에 600명이 있었습니다. 또 기드온 사사를 보십시오. 그의 곁에 누가 있었습니까? 그의 곁에 용맹스러운 300명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의 곁에 누가 있었습니까? 12명의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함께 동역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로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등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 동역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러한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제가 대충 한번 세어보았는데, 실명이 37명, 무명이 최소한 3명으로 도합 40여명이나 됩니다. 그 사람들이 다 바울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동역자들의 특징을 한 번 보겠습니다.
1) 성별을 초월한 동역자들
사도 바울 곁에는 남녀를 구분하지 아니하고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여자도 사람인가?"하며 아예 여성들을 짐승 취급하는 여성차별이 있었는데, 그러한 가운데 바울에게 여성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다고 해서 바울을 성차별주의자라고 합니다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에서 고린도교회 내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고 하며 교회 내에서 어지럽히는 여자 성도들을 보고 그들을 꾸짖기 위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분명히 사도 바울은 여자 동역자들과 함께 사역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0여명의 인물들 중에서 가장 먼저 여자 동역자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누구입니까? 뵈뵈입니다. 본문의 '일꾼'이라는 헬라어는 '디아코논'이라는 단어로 오늘날로 말하면 섬기는 사람을 뜻하는 집사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뵈뵈라는 여집사와 동역했습니다. 또 2절을 보겠습니다. " 너희가 주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뵈뵈 여집사님은 사도 바울의 신실한 후원자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은 남녀 유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동역자로 남녀 차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에 의하면 수많은 남자 동역자들도 있었지만, 뵈뵈, 브리스길라, 마리아, 유니아, 드루보사, 버시, 드루배나, 루포와 그 어머니, 그리고 율리아와 자매 등으로 11명이나 되는 여자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주의 일에서, 교회 안에서는 남녀 차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EX) 이번 코스타집회에서 한가지 재미난 일을 목격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 복음성가 가수이신 송정미 사모님이 오셨습니다. 바로 코스타 국제총무로서 전세계의 모든 코스타 수련회를 기획하고 조정하는 업무를 하고 계시는 곽수광목사님의 사모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첫날 집회를 마치고 지역교회 목사님들과 강사님들의 모임에서 송정미 사모님이 자신을 '사모'라고 부르는 것보다 '자매'라고 불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곽수광 목사님의 사모로서 자신이 온 것이 아니라 찬양 강사로 왔고, 또 자신을 청년들이 '사모님'으로 부르면 너무 고상해서 청년들이 어려워하지만, 자신을 '자매'라고 부르면 청년들과 격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 이왕이면 자신을 '자매'라고 불러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전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요청이고 해서 공식적으로는 행사 기간 중에는 '자매님'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이야기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계시던 남편이신 곽수광목사님께서 "저는 요, 항상 역 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자신을 곽수광목사라고 부르기보다는 가수 송정미의 남편이라고만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남자로서 역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박장대소하고 웃었지만, 하나님의 일은 남녀가 따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나는 남자라는 이유로 앉아서 대접만 받으려고 하고, 연약한 여자라는 이유로 앉아서 대접만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작은 예수, 예수를 따르는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섬기는 일, 봉사하는 일에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이 남자 성도이든, 여자 성도이든 열심히 주의 일에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
2) 목숨을 건 동역자들
사도 바울에게는 목숨을 건 훌륭한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브리스가는 사도행전18장에 의하면 브리스길라라고 불려졌습니다. 브리스길라라는 이름은 앗시리아족의 여성을 나타내는 브리스가의 애칭입니다. 브리스가나 브리스길라나 같은 이름입니다. 아내 브리스길라와 남편 아굴라 부부는 참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보통 남편이 믿음이 좋으면 아내가 믿음이 좋지 않든지, 아내가 믿음이 좋으면 남편이 좋지 않든지 부부가 다같이 믿음이 좋은 부부가 드문데,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는 믿음이 좋은 부부였습니다. 그 부부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이익만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EX) 지난 10월26일 자 신문에 <배은망덕한 제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던 적이 있습니다. 지방의 모 대학 자동차공학과 이모 교수는 대학 및 대학원생 제자들의 등록금까지 대신 지불해 줄만큼 제자들을 극진히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치다가, 제자들과 같이 작년 5월에 벤쳐 기업을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를 설립한 지 1년만에, 지난 6월 갑자기 제자들이 집단 사직한 뒤 다른 회사를 설립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승의 회사에서 사직한 것 뿐 아니라, 자신들의 스승이 총2억원을 들여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한 신기술의 연구자료와 프로그램 등을 훔쳐 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설립한 회사에서 똑같은 제품을 생산하려다가, 발각이 되어 구속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요지경이 되다보니, 하루아침에 배반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일어납니다. 의리라는 말은 박물관에 가야 찾을 수 있을 만큼 의리도 예의도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목숨걸고 헌신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 부부는 목을 내어놓았다고 했습니다. 목을 내어놓았다는 원어는 사형집행자의 도끼 날에 자기 목을 내놓았다는 뜻입니다. 순교의 각오로 사도 바울을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동역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이 목베이려고 하는데, 바울 대신 "바울 선생님! 저리 가세요, 저희들이 대신 죽겠습니다. 저희들의 목을 치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는 본문 4절을 읽고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믿음의 동역자, 목숨걸고 함께 나아가는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아굴라부부와 같은 믿음의 부부를 찾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가정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은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헌신하며 목숨걸고 헌신한 아굴라 부부와 같은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헌신한 동역자들
바울 선생 곁에는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했던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또 12절을 보겠습니다.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사도 바울의 사역 현장에는 많은 헌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질로 바울선생의 사역에 동역했습니다. 열정으로 바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가정을 내놓으면서까지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5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저희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는 것은 그들의 가정 교회를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성도들을 위해서 개방했습니다. 성도들을 위해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고 교제를 나누는 장소로 허락했습니다. EX) 제가 더니든에서 사역할 때, 유학생들이 1주일에 최소 한번, 평균 두 번씩 저희 사택에 왔습니다. 물론 제가 초청한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불시에 찾아 온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요, 저희 집의 냉장고에 음식이라도 많으면 그래도 괜찮은데 냉장고에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아내가 대단히 난처해했습니다. 집안에 뭐라도 있으면 그것을 해서 먹이고 또 싸서 보냅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미역국을 끓여서 학생들을 대접하곤 했습니다. 미역 줄기를 조금만 물에 불려도 몇 솥단지의 국을 끓일 수 있잖습니까? 그래서 저희 집에서 식사한 학생들이나 손님들은 대개가 한번씩은 미역국을 드셔본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김모라는 학생에게 밥을 해서 주는데, 그 학생이 "전도사님!(그 때는 전도사 시절이었습니다) 전도사님댁은 미역국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받은 질문이라 저는 할 말이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집사람은 미역국을 정말 좋아합니다만, 저는 하도 먹어서 질려버렸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싫어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집에서 미역국만 끓이면 저는 물 말아먹든지, 비빔밥 해서 먹든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전도사님댁은 미역국을 좋아하시나 봐요? 미역국을 잘 드시는 것 같아요"라고 질문을 해서 얼떨결에 "응, 우리 집은 미역국을 제일 좋아해"라고 거짓말을 해 버렸습니다. 저는 솔직히 미역국을 싫어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지 손님들이 저희 집에 오면 아내가 대단히 난처해했습니다. 먹이고 싶고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먹을 것이 없어서 미역국을 끓이면서도 "또 미역국!"이라는 말이 나올까봐 노심초사하며 학생들을 섬긴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경험을 했는데, 가정을 개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주, 두주도 아니고 아예 permanently하게 아굴라 부부가 가정을 성도에게 개방했다는 것은 대단한 헌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 아굴라 부부는 우리들의 모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오늘의 시대 가운데에서 헌신된 아굴라와 같은 부부를 찾으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아굴라와 같이 헌신된 부부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마리아처럼 드루배나와 두루보사처럼 기쁨으로 섬기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4) 인정받은 동역자들
바울 곁에는 인정받은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굴라 부부는 그들의 신실함을 인정을 받았던 부부였습니다. 다시 한번 4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성도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10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열심히 교사로, 찬양팀으로, 예배안내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항상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열정적인 헌신과 봉사가 잘못되어 공동체에 심한 누를 끼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인정은 커녕, 책망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동역자들은 인정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40여명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인정을 받을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큰소리로 고함을 쳐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 영향력을 끼칩니다. 가정에서 인정을 받을 때, 가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인정받는 것은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꼭 필요한 사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저는 자와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에도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 우리도 하나님의 동역자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능력있게 사역을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바로 그에게 동역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과 동역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훌륭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참모 없이 온전하게 나라를 통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장군이라 할지라도 혼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같은 목적을 가진, 같은 비전을 가진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복음전파의 과업을 이루기 위한 동역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나 홀로 사역을 하지 않고, 수많은 동역자들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 동역자들과 더불어 로마제국을 다니면서 힘있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에게는 성별을 초월한 남녀의 동역자들, 목숨을 건 동역자들, 헌신한 동역자들, 인정받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고전3:9)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제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한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동역자가 되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1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 예배만 드리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일에 동역할 때 기뻐하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목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전도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귀한 동역자임을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감당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한축을 담당하는 하나님의 귀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교 동역자
로마서 16:1-16 / 이필재 목사
일주일동안 한반도에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킨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불행한 사건으로는 한반도에서 핵이 터졌다는 것이고, 반가운 일은 세계 평화의 가장 중요한 자리인 유엔 사무총장에 우리 한국 사람이 선출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할 생각은 이 세상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 요소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일을 전력을 다해 하다보면 맨 마지막에는 허망한 좌절에 빠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온 세계가 북한을 그토록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유엔 기구에서 도와준 것은 고사하고 한국 정부가 10년 동안에 6조5천8백억 원이나 지원했고 민간단체, 온 세계 교회가 북한을 향해서 한 것이 이루 말도 못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도와준 이유 중에 하나가 핵 실험 같은 것은 하지 말고 평화스럽게 함께 살자고 열심히 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니까 지금까지 북한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모두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계속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유엔 안보리에서는 하지 말자고 지금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일이 너무나 바빠서 협조하지 못하겠다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다 우리들이 해야 될 일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되는 마음을 이번을 계기로 또 한 번 가져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 가지로 온 세상이 뒤숭숭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북한을 더 이상 원조할 필요가 없다는 유엔의 결의를 보니까 더 큰일 났습니다. 북한의 민중들이 더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치 지도자 몇 사람들의 생각이 온 세상을 이렇게 어렵게 만드는 것을 우리가 또 한 번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두 가지입니다. ‘동역자’라는 말과 ‘문안하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마지막 장을 쓰면서 자신의 선교 사역 일대기에 도움을 주었던 많은 동역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안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2000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세계 선교에 가장 큰 공로자가 있다면 바울 사도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성지순례를 하는데 여러 가지 성지순례 코스 중에서 ‘사도 바울 선교지 순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1, 2, 3차 전도 여행을 했고, 마지막에는 4차로 로마에 갔는데, 선교하면서 지나갔던 그 길을 답사하는 코스로 저도 한번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문명의 혜택에서 잘 되어있는지 모릅니다. 첨단 과학적인 공법으로 잘 정리된 아스팔트 도로가 어디를 가나 잘 되어있어서 다니는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또, 타고 다니는 버스는 그 나라에서 제일 수준급의 버스를 타고 다닙니다. 의자가 편안해서 피곤하면 뒤로 젖히고 침대같이 잠을 자도 될 정도입니다. 추우면 히터가 나와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 주고 더우면 에어컨이 나와서 시원하게 만들어줍니다. 목이 마르면 시원한 콜라나 다른 음료수가 언제나 버스 안에 준비가 되어 있고, 식사 때가 되면 어디를 가나 좋은 음식을 먹고 저녁이면 수준급의 관광호텔에서 잠을 잡니다. 그런데도 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똑같이 하는 말은 피곤해서 못 다니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를 생각해 봅시다. 바로 그 사막 길을 걸어서 굶주리며 매 맞으며 감옥에 갇히고 심각한 감시와 핍박을 받으며 기다리는 사람 없는 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평생을 살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들은 부끄럽고 창피스럽습니다. 바울을 보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했는데, 사실 바울의 선교 행적을 가보면 그는 사람 같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어떻게 그렇게 큰 선교 업적을 남길 수 있었는가? 오늘 성경말씀에서 전해주는 바를 우리가 기억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선교 사역을 훌륭하게 잘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서 훌륭한 동역자들을 그에게 수없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로마서에 나타난 동역자의 이름만도 29명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바울의 13서신의 모든 동역자를 다 합치면 훨씬 더 많은 숫자가 됩니다. 바울 서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마지막 부분이 축도인 것과 그동안 자신의 선교를 도왔던 동역자들에게 문안하라는 기록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 1~16절까지에만 해도 “문안하라”는 단어가 18번이나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 기억에 지울 수 없는 고마운 추억이요 잊지 못하는 선교 동역자들에게 글을 통해서 감사장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바울 사도가 아니어도 평생을 복음 전파에 몸 바친 주의 종들은 은퇴 후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회고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90퍼센트 이상의 목회자들이 다 합니다. 한 달 전에도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은사이셨던 목사님께서 80회 생일을 맞이하셔서 출판기념을 하신다고 초대하셔서 제가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인생 80년을 돌아보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과거사를 모두 기록해서 그날 참석한 1000명도 넘는 축하객들에게 다 나누어 주셔서 저도 한 권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읽어보니까 거기에 제 이름도 하나 기록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 내용은 바울 사도와 같은 흐름의 기록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기억나는 고마웠던 사람들은 모두 기록하였습니다. 아마 저 같은 사람도 은퇴 후에는 틀림없이 그런 회고록 하나는 남기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는 것은 영원성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가장 절실한 기록이 두 군데 나옵니다. 그런데 그 두 기록이 모두 승천 직전 기록으로 나타나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적 교훈이라고 설교자들이 말합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마지막 부문입니다. 28장 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사도행전 1장 기록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그 말씀대로 라고 믿는 것이 가장 정확한 판단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 사도는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크게 쓰셨던 세계 선교사라고 평가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바울 사도 자신이 고백한 선교 동역자의 역할을 세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우리 사역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말씀에 첫 번째와 두 번째 바울 사도가 강한 강조를 두어서 말한 것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기록된 문안자로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나타납니다. 이들은 부부로 아굴라가 남편이고 브리스가는 아내인데 아굴라는 유대인이고 부인은 로마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선교하러 갔을 때 돈이 없어서 취직을 하러 다녔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이 천막 만드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곳을 찾아서 가보니까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바로 그런 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취직을 해서 함께 일하면서 선교비를 조달받는 관계로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종의 이 집의 종업원이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일 가운데서 피차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 부부는 새로운 사명감이 하나 생겼습니다. 바울 사도의 동역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협조합니다. 나중에 바울 사도는 에베소로 선교지를 옮겼는데 이들 부부는 고린도의 생업 터전을 정리하고 바울을 따라서 에베소로 가서 계속하여 바울 사도의 훌륭한 선교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선교 동역 사역은 우리들에게 오늘 큰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선교 동역은 뜻이 같아야 능력으로 성취된다는 교훈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선교 현장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있습니다. 핍박인가? 그 나라 기후인가? 아니면 돈인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견딜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제일 큰 일이 뭐냐 하면 선교지에 가서 배우자인 남편이나 아내 둘 중의 하나는 하고 싶어 하는데 하나는 그만 두자고 할 때가 제일 큰 위기입니다. 이 문제는 아예 기초부터 흔들려 버리니까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그런 어려움입니다. 여기에서 선교 동역자 역할을 했던 남편인 아굴라가 반대했든지 아내인 브리스가가 반대했다면 절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교사도 아니요 목회자도 아니니까 선교사나 목회자들의 고충 같은 것들을 아마 체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같이 이렇게 목회하는 목사도 가장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사모가 된 사람이 목회를 그만 두자고 제안을 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없는 것 같지만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선교사들도 “도저히 여기서 선교 못하겠다. 돌아가자.” 부인들이 이러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면 선교사나 목회자의 부인이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나섰을 때 어떻게 하죠? “그럽시다. 하나님이 나에게 소명을 주셔서 일을 맡기셨지만 당신이 싫어하니까 나는 그만 두겠습니다.” 그래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아니다. 너 이혼하려면 이혼해라. 나는 끝까지 하겠다.” 이래야 됩니까? 이 문제는 보통 힘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나 저같이 목회자들은 나만 빼놓고 부인들에게 꼼짝도 못합니다. 그런 말이 나올까봐 아주 벌벌 떱니다. 버리지만 않으면 감사하게 살아갑니다.
지난번에 갔던 아프리카 선교사 부부가 지금 한국에 나와 있어서 만났습니다. 우리 일행이 한 열 명 정도가 갔었는데 그 선교사님이 우리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느냐 하면 “간증을 하겠습니다. 내가 간증하는 것보다 아내가 간증하는 것이 훨씬 더 실감 날 것입니다.” 그러시는 겁니다. 우리들이 “좋습니다. 들어보겠습니다.” 그랬더니 간증을 해주셨는데 무슨 간증이냐 하면 선교사역이 너무 어려워서 그동안 얼마나 심각하게 부부싸움을 했는지 남편이 있는 자리에서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심각하게 싸웠는지 마지막에 이 선교사는 자기 아내를 앉혀놓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겠다고, 이 기도를 하고 이대로 들어주시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끝내겠다고 하고는 자기 아내를 앉혀놓고 “하나님 아버지! 이 기도는 마지막입니다. 내 아내를 빨리 데려가시던가 아니면 변화시켜 주시던가 하십시오.” 그랬더니 그 말을 듣고 옆의 사모가 또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도요! 둘 중에 하나 해주세요. 못하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선교에는 절대적으로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12제자를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훈련시키셨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유언적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님을 제가 한번 모시고 오려고 하는데 눈이 작으십니다. 떴는지 감았는지 잘 분간이 안 되는 분이십니다. 실눈이라서 잘 보이지 않은 것 같이 늘 눈을 껌벅거리고 그러십니다. 그런데 이게 괜히 그러시는 게 아니고 선교하다가 하도 아내가 보기 싫어서 안 보려고 눈을 항상 감고 살다가 그렇게 되셨다고 말씀하시고, 사모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은 얼굴이 이 선교사 얼굴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서로 안보고 몇 년을 살 정도로 그렇게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지금은 사모님이 훨씬 더 열심히 하십니다. 아프리카 국적을 갖고 한국 국적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두개골을 여기에 묻자.”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선교의 역사 성취가 열매 맺히는데 이 선교 사역에는, 하나님의 사역에는 동역자가 이렇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느 정도의 선교 동역을 했는가? 오늘 말씀에 나타난 말씀을 그대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희생도 지불할 각오로 동역자로 나섰습니다. 여기 4절에 나옵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 사도의 선교 동역자들은 만약 바울 사도가 죽을 일이 생겼다면 “내가 대신 죽을 수 있습니다.”하는 정도의 선교 동역자 역할을 했다고 바울이 고백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지 그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목회 경험에서 여러 번 있었습니다. 건강이 약해졌는데 진단 결과가 건강한 사람의 장기를 하나 떼어다가 붙이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 줄 수 있는가? 이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자기 생명의 위험 부담을 안고 장기를 떼어 줄 수 있는가? 멀쩡하게 건강한 사람의 배를 째고 내 장기를 뚝 잘라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양심으로 한번 판단해 보세요. 내가 누구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쉽지가 않습니다. 요즘에는 아내나 남편이 죽으면 관 들고 가는 사람들에게 조심해서 들고 가라고 부탁한답니다. 떨어뜨리면 깨어날지 모르니까! 오다가다 나그네로 만난 바울을 위해서 어떻게 목이라도 내어놓을 수 있었는가? 그러면 성경은 거짓말을 했나? 이들은 바울 사역의 주님의 거룩성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바울 사도의 모든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취다. 그분이 살아있다는 것은 주님이 살아계신 것이요 그분이 죽는다는 것은 주님이 죽는 것이다. 순교자적 동역자가 되자! 내가 대신 죽을 수도 있다.” 지금 이렇게 강조해서 바울이 발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일본 선교사들을 위한 세미나 일 년에 1~2번 해마다 갑니다. 일본 선교사들도 저와 생각이 똑같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만약에 예수를 믿게 되면 세계 선교 사역은 달라질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일본 선교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는 일본이 세계 선교에 큰 공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특징, 가치관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문화에는 어떤 확실한 것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특성이 있는 특이한 민족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전 세계 전쟁 역사에 누구도 하지 못하는 전술법! 가미가제 특공대! 일본 밖에 못했습니다. 20대의 젊은이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면서 천황 폐하가 내려주는 술 한 잔을 마시고 자기 몸을 박살내서 죽어버리는 전술법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느 나라 국민들이 이렇게 자기의 생명을 바치겠습니까? 이것은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제가 오사카 세미나 도중에 한국 재벌 총수가 사무실에서 투신자살했다고 일본 신문에 크게 났습니다. 그날 아침 일본 목사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에도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는 모든 책임을 내가 진다는 뜻입니다. 일본 같으면 그 사람을 따라서 한 사람 내지 두 사람이 또 자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이 분을 위해서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분이 하는 일은 옳은 일이요 이분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 내 삶의 가치다. 이렇게 판단하고 열심히 도와드렸던 사람들은 나는 이제 살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 목숨을 끊는 것이 일본의 문화입니다.” 그렇게 저에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진리와 최고의 가치관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위해서 몸을 바쳐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일본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간다면 주님을 위해서 몸을 던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거야 말로 내가 찾는 진리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본 선교사님들은 거기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선교를 하시는 겁니다. 실제로 일본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보다 순교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자고 나선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무덤들이 지금 다 있습니다. 내 인생의 최고 가치 있는 일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위해 한번 모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인생에서 한번 살다 죽고 마는 것을 가지고 구질구질하게 해봤자 뭐가 좋은 게 있습니까? 사실 바울 사도는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영적으로 평가하면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죽어줄 수도 있는 동역자를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 그게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면 바울만 행복했는가? 바울의 동역자들도 똑같이 행복했습니다. “나는 옳은 일을 위해 이렇게 동역자가 된 기쁨을 가지고 목이라도 내놓았습니다.” 사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헛된 것에 인생을 맡깁니다. 왜 그런가? 그들은 거룩한 명분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텍사스에 부흥회를 하러 갔는데 다 끝나는 날 저녁에 교회 중진들이 너무 기쁘다고 늦었지만 좀 모이자고 하시며 한 30명 정도가 어느 집사님 댁에 모여서 여러 가지 대화를 하는데 그 집 주인의 삼촌이 되는 사람이 한국에서 오셨습니다. 모 대학 정치학 교수이십니다. 자기소개를 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평생에 교회를 가본 것은 이번에 3박 4일 부흥회를 처음 갔습니다.” “그러십니까?” “그런데 나는 이 부흥회를 통해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은 처음 들어보고 내 인생이 얼마나 헛살았는지 후회가 막심합니다.” 구체적으로 자기는 정치학 교수라서 언젠가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서 줄을 섰는데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틀림없이 자기가 대한민국의 훌륭한 정치인이 되는 자리를 얻을 것이라고 대학 교수 생활 하면서 모은 수십억 원의 돈을 줄 서는데 갖다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대통령이 되셨답니다. 이때나 저때나 나한테 무슨 연락이 오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연락이 없고 그래서 화병이 생겼답니다. 이제는 다 시간이 지나갔단 말입니다. ‘내 인생은 도대체 이게 뭔가?’ 그래서 화가 나서 미국 조카네 집에 지금 쉬러 왔다고 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만약 그동안의 내 정력과 재물 이런 것을 당신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 위해 거룩하게 사용했다면 지금쯤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그 진리 안에서 자신의 삶의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동역자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가 아굴라와 브리스가를 보고 ‘저런 어리석은 사람들! 아니, 돈 한 푼 없는 바울에게 충성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사실 얻을 게 없이 오히려 소비요, 희생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왜 그가 하는 일을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놓았는가? 아마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시대에 사업 잘해서 잘 먹고 잘 살고 끝났다면 그것과 지금 이들의 이름이 이렇게 거룩하게 지구상에 나면서 주님 오실 때까지 많은 설교자들의 예화 거리로 설교의 주제 인물로 등장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편이 되시겠습니까?
그 다음에 바울 동역자 또 한 사람이 13절에 나타납니다.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많은 문안자 가운데 이 두 군데에 강조를 두었습니다. 이것도 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어머니라고 하는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인간관계보다 가장 진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TV 방송 뉴스에서 두 어머니의 희생을 보았습니다. 한 어머니는 비탈진 길에서 아들이 탄 자동차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자기 몸을 던져 막으려고 했다가 아들이 탄 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또 하나는 불타는 집 안에 아이가 있는 것을 구하러 불 속으로 뛰어들어 불에 타서 숨진 어머니,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라는 표현은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나를 낳아 길러주신 육신의 어머니 외에 내가 진정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의 사람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40년이 넘도록 목회하면서 수만 명의 교인들과 접촉을 하고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협조한 사람이 있고 나름대로 좋은 관계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지만 실제로 내 마음 속에 사도 바울과 같이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편의상 “주 안에서 부모, 형제, 자매된 자들이여!” 이렇게는 말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관계로 그렇게 부를 수 있을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실없는 소리를 지껄인 것인가? 이 어머니는 루포라는 아들과 알렉산더라는 아들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남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잠시나마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입니다. 그의 아내를 보고 지금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이 집은 잠시나마 예수님을 대신해서 지고 갔던 십자가 그것 때문에 온 집안이 그때부터 예수를 믿고, 그의 아내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바울에게 진정 어머니 역할을 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똑같은 동역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독신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록에는 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여!” 혹은 “디도여!” 이런 말을 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지금까지 이러한 거룩한 명분의 희생적인 동역자 관계로 세계를 복음화시킨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이 성경을 써서 후대에 남기지는 못합니다. 또 그 당시 바울 사도의 동역자가 되었던 그 사람들과 같이 목을 내놓고 어머니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회고록이 가르치는 가장 거룩한 신자의 사명에는 피차 거룩한 문안도 있어야 하고 거룩한 입맞춤도 이루어져야 됨을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영적 교훈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 올 때 내 믿음의 인생 여정에 문안하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고, 바울과 같이 넉넉한 그런 회고록은 남기지 못해도 내 인생 회고록도 바울의 회고록과 같이 남길 수 있는, 또한 다른 사람의 회고록에 내 이름이 아름답게 들어가 기록되는 거룩한 명분의 동역자 관계, 이것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피차 문안하고 피차 아름다운 관계로 주님의 구원의 성취를 위해서 이 땅에서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살 길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챤으로서 훌륭한 것인가? 말씀 가운데서 갈 길의 방향을 정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훌륭한 하나님 나라 확장의 동역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사도 바울의 리더쉽
로마서 16:1-2 / 김남수 목사
사도 바울의 리더십을 계속 공부하면서, 여러분들이 듣고 공부하는 말씀을 날마다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매주 성경을 통하여 배우는 리더십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활용하실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좋아하고 여러분과 함께 일하기를 좋아하는 훌륭한 리더십이 생겨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리더십의 특성 중 하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리더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로마서 16장에는 놀랍게도 26명이나 되는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름은 알만한 이름이고, 어떤 이름은 전혀 들어도 보지 못한 생소한 이름들도 있습니다. 로마에 가보지도 않은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느냐 하는 것도 의문이고, 또 그 많은 사람들의 다양성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 저기 다니면서 전도할 때에 만난 사람 그리고 거기서 감동을 받고 서로 교제하던 사람, 이런 사람들이 당시에 다 로마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알고, 또 그 사람들하고 좋은 교제를 갖게 된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 나오는 26명의 이름 중에 10명이 여성입니다. 그 당시에는 여성의 권위와 인격이 요즘처럼 신장되어 있지 않았을 텐데, 여성들을 잘 칭찬하고 격려를 한 것을 보면 바울은 여성의 역할을 존중하고 중요시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나오는 사람도 뵈뵈도 여성이고, 그 다음에 등장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같은 사람도 여자의 이름이 남자의 이름보다 항상 앞에 나온 것을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더 활동적이고 중요한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열매라고 초신자를 칭찬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주 안에 있는 사람이고 사도들 중에 유명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웁니다. 이 말은 유명한 사람도 무명의 사람도 가리지 않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말이고, 갓 믿은 사람도 좋아하고 오래 믿은 사람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이나 무명한 사람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유색인이나 무색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든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런 모습이 사도 바울의 위대한 리더십 중에 하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람을 좋아하는 리더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람이 붙는 것이고, 사람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지도자는 반드시 사람을 좋아해야 헙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거부하기도 하고 사람을 피하기도 하고 사람이 오면 숨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성장 과정에서 자존감이 상하면, 사람들을 기피하는 증세와 열등의식이나 우울증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을 기를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어렵고 가난하고 고통받고 복잡한 혼란기를 살았기 때문에 좋은 칭찬과 격려와 사랑으로 양육을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욕을 먹고 책망을 듣고 야단을 맞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자녀들 만큼은 잘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과 완벽주의에 사로잡혀서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절망감에 빠집니다. 그래서 부모가 강하면 아이들의 상처는 그만큼 깊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다룰 때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거친 어부들, 시골사람들, 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모으셨습니다. 이들은 모이면 싸우고 다투는 기고만장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께서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5가지 단어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넌 틀렸다’하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너를 부른 것을) 후회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너 같은 사람을 불러가지고 내가 속이 상한다’ 하고 말씀하셨다면, 주님은 말씀하고 잊어버리셨을른지 모르지만 제자들은 일생 동안 주님이 승천하신 다음에도 ‘나는 주님이 실수로 부르신 사람이다, 나는 제자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늘 우울증에 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처음 저를 부르신 그 사랑으로 끝까지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우리는 자라면서 이런 저런 상처와 아픔 때문에 우리 스스로 안된다. 못 한다 하는 철저한 열등의식과 자격지심으로 묶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여기에서부터 해방을 받고 자유를 얻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기 백불짜리 돈이 있습니다. 이 돈은 미국 은행국에서 찍어낸 돈이기 때문에 땀이 조금 뭍어도 괜찮습니다. 꾸겨져도, 조금 찢어져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돈의 가치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당신의 목숨을 걸고 건져낸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으면 여러분의 스타일이 좀 구겨져도 아직 여러분의 가치가 그대로 동일합니다. 여러분의 가치가 그만큼 소중한데, 사람들이 말한 환경과 어려움. 이런 것들 때문에 끊임없이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마귀의 치명적인 공격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스타일을 구겼어도 다시 펴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찢어졌어도 다시 궤매서 사용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십자가에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서 은혜를 주셨을 때에 여러분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자격도 없고 아무 가치도 없는데 그냥 주시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자녀가 되는 위대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그것을 다 사용하지 못합니까? 열등의식은 우리의 꿈, 거룩한 비전을 파괴시킵니다. 이 꿈을 상실하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순절 교인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꿈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을 받으면 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등의식은 끝임없이 그 꿈을 파괴하고 상실하게 만듭니다. 사람이 성형수술로 외모를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받았던 지난날의 상처나 아픔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다 못박았습니다. 장사되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옛사람을 떨처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건강한 신앙부부의 모델
로마서 16:3-4 / 이정익 목사
오늘은 성년주일입니다. 젊은이의 주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젊은이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삶과 가정과 일과 결혼의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젊은이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신앙인으로 추천할만한 사람으로 저는 본문에 나와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생각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참 건강한 부부로 나타납니다. 여기 브리스가는 로마 귀족 출신입니다. 당시 로마귀족들의 삶은 너무 타락했었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로마인들은 타락한 로마를 떠나서 조용한 곳을 택하여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브리스가도 당시 사람들이 너무 타락해서 유대인들의 청결한 삶을 동경했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가는 자주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출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유대인 청년 아굴라를 만나서 결혼하게 됩니다.
이 부부가 결혼해서 로마에서 살고 있는데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할 수 없이 고린도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도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이 부부는 바울과 함께 동역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갈 때 이 부부도 함께 따라가서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바울과 함께 동사하면서 충성스럽게 일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인생을 회고하고 사역을 정리할 때 이 아굴라 부부를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 까지도 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사람이 이렇게 살면 행복한 인생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정받았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여기 나오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보면서 우리들이 모두 이 부부처럼 살았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 결혼을 앞두거나 결혼해서 살고 있는 젊은 부부들은 이 부부처럼 향기로운 삶이 주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굴라 부부의 삶을 보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몇 가지 이상적인 모습을 한번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1. “결혼을 위해서 깊은 기도를 하는 일”입니다.
브리스가는 로마 귀족출신입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혐오하는 유대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결혼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경솔히 할 일이 아닙니다. 나의 미래와 운명과 평생이 좌우되는 순간입니다. 당연히 기도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렇게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도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너무 순간적인 감정에 좌우되어 결혼하는 일이 많습니다. 마지막 결정단계에 이르면 둘이 진지하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2. “부모와 상의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내가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좀 깊이 생각해 보면 결코 나 혼자하는 일이 아닙니다. 가족 중 한사람의 결혼은 곧 가족 모두의 일입니다. 한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일은 전 가족과 호흡이 맞아야 합니다. 그만큼 모두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결혼할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참 생각을 많이 하여야 합니다. 일평생 함께 살아갈 사람인데 너무 쉽게 감정에 이끌려서 결혼해 버리면 후에 후회할 수 있습니다. 가끔 자녀들의 결혼문제 때문에 부모와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녀는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우기고 부모는 안 된다고 우깁니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는 자녀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때 생각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 이상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반대하면 안 됩니다. 부모는 어지간하면 자녀의 선택을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혼할 때는 마음껏 축복해주는 가운데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부모가 오랫동안 반대하면 정작 결혼해서 장래를 설계해야 할 시간을 모두 갈등으로 보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막상 결혼하게 되면 그 마음 깊숙이 아픈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일에 부모의 조언을 반드시 먼저 들어야 합니다. 부모는 이 세상을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경험이 아주 풍부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진정으로 충분한 배려와 충고와 미래에 대해서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결혼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지만 한 가족이 되면 가족 전체와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나 혼자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가족 전체가 불화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보다 더 생각이 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날 결혼할 대상자라고 데리고 옵니다. 부모입장에서 보니까 이 사람은 아닙니다. 상대가 한 50점만 되어도 괜찮겠는데 이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은 절대 안 맞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하겠다고 우깁니다. 부모들이 반대하면 할수록 더 강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 부모들이 반대하다가 포기해버립니다.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면 그 결혼생활이 행복하겠습니까. 이 아들이 우겨서 결혼하더니 몇 달 살더니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문제를 인생의 경험이 많은 부모들은 첫 번 만남에서 이미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상의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부모만한 노련한 후원자, 상담자, 후견인이 없습니다. 마땅히 그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해야 합니다. 여기 브리스가가 결혼하기 까지 부모님과 얼마나 심각하고 심도 있게 생각하고 상의했겠습니까. 이것이 순서입니다.
3. “우리 부부는 하나님이 짝을 지어주셨다”는 의식입니다.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부부가 함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짝을 지어주셨다”하는 의식입니다. 그래야 그 삶이 엄숙하고 서로 존경할 수 있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건듯하면 성격차이 때문에 못살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성격이 딱 맞습니까. 한 태에서 나온 쌍둥이 형제도 마음이 안 맞고 부모 자식간에도 마음이 안 맞는데 남남끼리 만났는데 마음이 맞을 리가 있습니까. 자꾸 그렇게 불평하기 시작하면 부부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틈이 문제입니다. 축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 이 작은 틈 때문에 마침내 큰 축대가 무너집니다. 이렇게 부부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사탄이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자꾸만 작용하고 시험들게 해서 틈을 더 벌려 놓습니다. 그러면 부부가 자꾸 밖으로 돌게 됩니다. 집이 싫어지고 둘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집니다. 그래서 가정이 병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부부는 요즘 틈이 벌어져 있는가 문제가 없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해 보니까 조금 틈이 벌어져 있다 생각되면 빨리 봉합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마음이 딱 맞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바꾸어 보아도 또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 마음이 가장 잘 맞는 사람은 지금 살고 있는 부부입니다. 그 부부가 하나님이 나와 짝 지워주신 내 짝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아굴라 부부는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만나 결혼한 부부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성스럽게 살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부부에게는 이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4. “서로의 노력”입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관계일수록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간관계도 그냥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은 아내가 남편보다 능력이 더 월등한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월급이 더 많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직장에서 더 잘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아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남편을 우습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곧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남편들은 참 왜소해지는 모습을 하게 됩니다.
여기 아굴라 부부가 그렇습니다. 여기 브리스가는 남편인 아굴라보다 능력이 더 있었습니다. 브리스가는 로마귀족 출신으로 로마문화와 헬라 문화에 익숙한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인 아굴라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깨어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거기다 브리스가는 남편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고 활동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부부를 말씀할 때는 언제나 부인 이름을 먼저 씁니다. 그것은 부인이 더 적극적이고 행동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이 부부를 보면 아주 잘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더 적극적인 부인이 남편에 대해서 잔잔한 감각으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부부의 삶에는 이것 조화가 참 중요합니다.
부부사이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 말 한마디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서로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가려면 서로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감정에 배려를 하고 아내는 남편의 자존심에 배려를 해야 합니다. 오늘은 아내는 감정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남편은 자존심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결혼 3개월 된 부부가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가 참 황당한 질문을 했습니다. “자기야, 자기는 내가 저 10번처럼 섹시해서 결혼했어 아니면 5번처럼 예뻐서 결혼했어?“. 이 남편이 하마터면 웃을 뻔했습니다. 그 질문을 받고 순간 대책이 안 섰습니다. 그래서 한참 망설였습니다. 그때 말 한마디에 따라서 얼마든지 심각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당신이 그런 유머 감각이 있는 여자라서 결혼했어”. 이 유머가 얼마나 좋습니까. 서로 존중하고 서로에게 말 한마디에 상처가 안 되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5. “신뢰감”입니다.
일단 결혼하게 되면 서로를 위해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신뢰감을 가져야 합니다. 부부는 처음에는 사랑으로 맺어졌지만 그 기초에는 신뢰감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 신뢰감이 상실되면 모든 삶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브리스가는 로마귀족 출신입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인이 혐오스럽게 생각하던 유대청년 아굴라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고국인 로마와 부모 곁을 떠나 고린도를 거쳐 지금 에베소에 와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남편인 아굴라를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그런 신뢰감이 없었다면 그런 모험의 삶이 가능했겠습니까. 부부 사이에는 이 신뢰감이 참 중요합니다. 브리스가는 이 신뢰감을 바탕으로 당신 로마인들이 그렇게 경멸하던 유대청년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깁니다. 모두 신뢰감이 바탕이 된 삶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6. “뜻이 맞아야” 합니다.
부부는 평생 살아가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 보다 뜻과 생각과 철학이 맞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아굴라부부를 가장 이상적인 부부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몇 가지 이상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적인 뜻이 잘 맞았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신앙적으로 서로 뜻이 잘 맞아서 언제나 주저함 없이 바울을 따라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굴라 부부를 말할 때는 항상 부부의 이름을 함께 불렀습니다. 그것은 부부가 서로 신앙적인 뜻이 잘 맞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봉사할 때 남편은 집에 있고 나 혼자 교회에서 봉사하면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합니다. 조금만 늦어도 불안하고 식사 때가 되면 더 불안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을 기쁘고 만족하게 할 수 있습니까. 함께 부부가 성가대를 하고 교사를 하고 끝나면 함께 식사하고 함께 집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고 그 삶이 재미가 있겠습니까. 아굴라 부부가 그랬습니다. 그 부부는 언제나 함께 다니며 일했습니다. 뜻이 잘 맞는 참 행복한 부부였습니다.
두 번째는 “신앙의 질이 잘 맞는 일”입니다. 아내는 열심이고 뜨거운데 남편은 신앙이 미지근해서 서로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편 입에서 “꼭 그렇게 믿어야 하느냐”는 말이 나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참 뜻이 잘 맞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질도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바울은 “이 부부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 놓았다”고 강조했습니다. 말하자면 브리스가는 소극적인 남편 아굴라를 사랑했고 배려했고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아굴라는 자신보다 더 활동적인 아내가 하는 일을 전폭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잘 맞는 부부입니까. 아내는 더 적극적이었고 활동적이었는데 아내는 남편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서로 보조를 같이 하며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대부분 활동적인 아내는 소극적인 남편을 무시하고 강하게 잡아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랍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그런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어머니가 너무 똑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주장이 너무 강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별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 품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을 했습니다. 어느 날 20살 된 아들이 부모에 “이제 내 인생을 찾아 집을 떠나겠습니다“하고 선언했습니다. 그때 아버지 얼굴이 굳어지면서 물었습니다. “네 인생이 뭔데“. 아들이 대답합니다. “자유롭고 간섭받지 않고 세상을 훨훨 날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일어나 집을 나가려 하자 아버지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 왜 이러세요, 제발 내가 가는 길을 막지 마세요”하고 길을 막았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막긴 누가 막는다고 그러냐, 어서 앞장서라, 같이 떠나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곳은 가정입니다. 그곳에 부모가 계십니다. 내 자녀들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부가 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입니까. 이 소중한 사람들을 소중한 줄 알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곳은 가정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늙으시면 돌아가십니다. 형제들은 나뉘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내 자식들도 크면 내 곁을 떠납니다. 그런데 끝까지 남는 것은 부부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이 부부의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부부 삶에도, 가정에도, 세상에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내 마음에 각인된 이름
롬 16장 06절 / 오정호목사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인생은 관계라고 저는 정의하고 싶습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수평적으로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관계에는 아픈 관계와 좋은 관계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생애 가운데서도 그의 삶에 아픔을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디모데를 향한 사랑담긴 편지지만 또 유언적인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의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딤후 4:14-15절)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복음을 대적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에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가 바울의 마음에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또 있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 4:10) 데마라고 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해서 교회를 버리고 사도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습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에 잊혀 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로마서 16장에 약 서른일곱 명의 개인의 이름이 거론이 됩니다. 이들은 평신도들입니다. 사도바울과 동역했고 바울에게 기쁨을 준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대사회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목사들 몇 명만 잘해서 안 됩니다. 교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평신도들이 로마서 16장에 소개된 사람들처럼 올바로 소명을 발견하고 깨어나게 될 때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습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을 파괴하는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 중 세 가지.
첫째,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그 사람이 주신 모든 것이 동결됩니다. 그에게 주신 지혜, 은사, 재능, 탤런트들이 묶여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부모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지만, 부모 때문에 늘 두려움에 눌려 있게 되면 나중에 사회에 부적응자가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두려움의 사슬로부터, 그 압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가운데 우리를 묶고 있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를 얻기를 바랍니다.
둘째, 분노입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분노가 사랑을 지배하면, 나타나는 것은 파괴적인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분노는 나도 죽이고, 상대방도 죽이는 것입니다. “나는 원래 성격이 그래” 라고 하는 사람은 성격까지도 십자가 밑에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면 성격적인 면도 주님이 씻으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는 열정과 통합니다. 분노가 많은 사람이 변화 받으면 열정 있는 주의 사람으로 변화 받습니다. 분노와 열정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결과는 다릅니다. 열정은 생산적입니다. 분노는 서로 죽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혹시 분노가 자리 잡은 것이 있으면, 주의 보혈의 은혜로 분노가 변하여 사랑으로 바뀌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셋째, 유혹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유혹과 항상 같이 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대적 사탄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대하여 유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한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혹을 뛰어 넘어야 됩니다. 치우치는 것에서 정도를 걷기 위해서 힘써야 되는 것이지, 우연히 잘되는 교회와 부흥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는 유혹들을 분별해내는 안목을 주시고, 그 영을 떨쳐 버리는 영력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력이 있어야 우리에게 오는 두려움과 분노와 유혹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분노와 유혹에 굴복하면서 살면 사람은 자존감을 상실해서 “나는 가치가 없는 존재인가 보다,” 자포자기합니다. 자포자기한 사람에게는 어떤 약도 들지 않습니다. 희망의 불이 꺼진 다음에 무엇을 가지고, 마음속에 희망의 불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도 마음의 분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눌리지 않았고,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야 되는 것인가를 늘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에 이런 사람들, 즉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의 명단을 열거 했습니다.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받은 사람들입니다.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사랑이 있어야 다른 것이 빛이 납니다. 다른 것 다 갖추었는데 사랑이 빠져버리면, 불완전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 모든 것은 완성이 됩니다. 우리 결혼 생활, 부부간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8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9절) 사랑을 받으면 영혼이 미소 짓고, 영혼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죄인인 영혼이 찌들어 있거나 눌려 있을 때 어떻게 다시 생기를 가질 수 있는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쬐는 만큼 그 영혼이 주님 앞에서 꽃처럼 활짝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이 사랑을 유통하는 교회로 쓰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새로남교회하면 사랑이 충만한 교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교회라고 이웃에 소문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인격과 사명을 수행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너희를 위해서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6절) 마리아라는 여성은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땀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물질을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인격이 검증되었고, 사명을 수행할 때 인정받았습니다.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과 한국교회 모든 성도들이 인격적인 면에서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는 일들, 사명을 탁월하게 수행함으로 모두가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사람입니다.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아드로니고,”(7절) 함께 같이 있다는 것은 투옥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위하여! 온 몸을 던져 수고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10절) 인정함을 받았다는 것은 수고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고 검증되고, 그 인격이 아름답게 세워졌다 그런 의미입니다. 여기 보니까 교회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땀을 흘렸습니다. 적당한 선에 있지 않았습니다. 헌신에 열매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과 직분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인정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과 주의 교회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헌신한 흔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 그것을 가리켜 영생의 관계라고 합니다. 10-12절에도 계속해서 “주안에서”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동일한 영생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슴에 남습니까? 주안에서! 생명을 공유한 사람, 영생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영원히 남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의 기억에 남아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이천년 동안 계속해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무명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주님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혹시 사람들은 못 알아주고, 혹시 나를 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미래를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되십시다.
새로남교회는 신뢰와 사랑의 공동체로 든든히 서가기를 소원합시다.
나 자신과 우리 가정을 통하여 공동체의 건강성에 힘 있게 기여합시다.
대 사회적인 신뢰와 아름다운 평판을 통하여 생명의 복음을 확산시킵시다.
교회의 좋은 일꾼이 됩시다
롬 16장 1~2절 / 강성찬목사
1976년 정월 자스페에 있는 케이블카가 고장이 나서 18명의 사람들이나 태운 채로 공중에 달려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을 돕기 위해 용감한 사람들이 구조에 나서다 그들을 구조한 뒤 눈사태로 한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우리가 영생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우리 형제자매를 위하여 기꺼이 우리의 생명을 바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루터 룩크징거-
일꾼의 주된 임무는 돌보는 일 섬기는 일입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 동쪽 15㎞ 지점에 위치한 항구로서 에베소, 안디옥, 알렉산드리아와 연결된 무역항입니다. 이곳에는 비너스, 이시스, 에스큐라피어스 등의 이방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는데 바울은 이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행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사도 바울은 뵈뵈를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그녀는 다소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그럴지라도 자기가 교회의 종이 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구제와 손 대접을 하는 섬기는 일을 했다고 봅니다.
여기서 교회의 일꾼은 각자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교회를 섬기며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좋은 일꾼은 어떠한 일꾼일까요
일꾼이라고 인정 받아야 합니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인정 받고 있습니다. 우리도 인정 받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자기의 짐을 감당해야 합니다.
보부상 두명이 함께 고갯길을 넘게 되었습니다. 짐은 무겁고 길은 험하여 힘이 들자 한 명이 털썩 주저 앉으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난 더 이상 못 가겠으니 당신 혼자 먼저 가시오. 난 여기서 좀 쉬었다 갈 테니.""이 근처에는 쉴 만한 곳도 없고 점점 날도 저물어 가니 정 힘이 들면 그 짐을 내게 주시오. 그리고 어서 갑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보부상은 슬며시 짐을 넘겨주고 모른 척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가서 두 명은 개울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물살이 대단히 빨랐습니다. 짐을 다 건네준 보부상은 빠른 물살에 떠밀려 넘어졌지만 짐을 지고 있던 보부상은 짐의 무게덕분에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고갯길을 넘을 때는 무거운 짐이 힘들게 여겨지겠지만 물살이 심한 개울에서는 그 짐이 눌러주는 힘으로 그 물살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쉬운 일만 하려고 하고 어려운 일은 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루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렵게 여겨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유익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로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지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십니다.
우리가 그 고난에 당당히 맞서 이겨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잘했다"는 칭찬과 위로를 해 주실 겁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짐을 감당하며 일꾼으로 인정받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추천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추천은 아무나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본이 될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분들의 삶의 본이 감동과 감화를 주기 때문입니다.
손 종일 장로님이 칠원읍 교회에서 길 선주 목사님 모시고 부흥회를 하는 때에 논 5 마지기 중 3마지기를 건축헌금으로 작정하자 사모님이 다시 남은 2마지기를 바치자 농사지을 일이 없으니 아들 손 문주 씨가 일본 가서 돈 벌어 보내는데 문전옥답 20마지기를 사게 되고 후에 손 문주 씨는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텐톤은 링컨을 저급하고 교활한 어릿광대 고릴라의 원종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를 국방장관으로 기용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비난하던 그가 링컨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해 앞에서 여기 세상에 가장 훌륭한 통치자가 누워 있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유엔 사무총장 함마슐드는 죽은 후에 다른 사람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했는데 그가 사고로 죽은 후 세계가 그를 위하여 애도하였다고 합니다.
계 원식 장로님은 이북 평양 교외 기성리에서 개인 병원을 경영하며 선교사들 협조아래 옥구 익산 김제 지방 순회 진료 중 1920년 익산군 황등면 황등리에 교회를 세우고 기성의원을 세웠고 6.25때 피난도 가지 아니하고 교인과 면민 치료를 위해 일하는 중 며느리 안 인호 집사가 순교를 당하기도 했으며 자기 재산도 사회사업에 사용했으며 계 일승 박사 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합니다.
워싱톤이 시찰 중 일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는데 한사람이 당신은 왜 보고만 있느냐 하니 나는 십장이요 라고 하자 나는 이런 사람인데 도울 일이 있으면 부르시오 하고 자기의 명함을 내주자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합니다.
우리도 삶의 본을 보여 추천하고 추천 받을 수 있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우리라고 불리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뵈뵈를 우리 자매(1절)라고 합니다. 육로 된 자매가 아니라 은혜로 된 자매입니다.
모든 일꾼들은 우리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고전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나 너 우리는 인간 세계에서 없앨 수 없는 관계입니다. 82년 이전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제일 먼저 가르쳤던 말이 나 너 우리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요 천지 만물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한 개의 인격이라고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너는 친구나 손아랫사람에게 쓰이는 2인칭 대명사이지만 또한 나를 떠나서 존재하는 이웃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나와 네가 만남으로 인하여 우리라는 공동체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와 한 공동체가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동질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우리는 가정 학교 직장 사회 등 여러 종류의 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특별히 우리란 말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가정적인 우리도 있을 수 있고 사회적인 우리 혹은 국가적인 우리도 있겠지만 성경이 말하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적인 우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의 우리 곧 구원받은 우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사랑으로 일하며 땀과 눈물 피 흘리는 수고와 희생이 따르는 관계 입니다.
그림 '기도하는 손'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 뒤에는 감동적인 사랑과 희생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15세기 후반, 알베르히트와 프란츠라는 젊은 미술학도가 있었습니다. 친한 친구였던 두 사람은 함께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두 사람이 함께 공부하기에는 시간과 돈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제비를 뽑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알베르히트가 프란츠의 도움으로 먼저 그림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알베르히트는 자신이 공부를 마친 후 꼭 프란츠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학업을 끝내고 돌아온 알베르히트는 친구 프란츠가 자신을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프란츠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의 손가락은 휘어지고 굳어져서 더 이상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 알베르히트의 성공을 기뻐했습니다. 어느 날 알베르히트는 친구 프란츠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프란츠는 거칠어진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알베르히트는 재빨리 친구의 손을 스케치했습니다. 이것이 후에 알베르히트 뒤러의 명작 '기도하는 손'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조지 나이트 -하얀 마음을 만드는 소중한 이야기-)
우리라는 개념은 일체감 공통성 동질성을 주는 관계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도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우리 하나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엡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그러므로 교회는 나와 너 너와 나와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세계인 것입니다.
로댕의 조각 중 칼레의 시민이란 군상의 작품이 있습니다. 같은 제명으로 독일의 극작가 게올로그 카이서가 쓴 희곡이 있습니다. 칼레는 도버해협의 프랑스쪽 요새로 영국에서 도버로 불리는 이 해협을 프랑스는 요새 이름을 붙여 칼레 해협이라 부른다합니다. 그 옛날 영국군이 칼레로 쳐들어 와서 이 요항을 점거했을 떼 포위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칼레의 시민 5 명의 목숨을 요구해 왔습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 희생하기로 자청한 사람이 6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원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양보를 하지 않자 제비를 뽑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비에서 떨어진 사람이 5명이 적진을 향하여 가기 전에 먼저 자결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국군은 5명의 시민을 돌려보내고 칼레에 손 하나 대지 않은 채 군사를 철수시키고 말았습니다. 1명의 희생자는 목숨을 바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5명의 목숨과 조국을 위기에서 구원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관계를 잘 유지하며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부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롬 16: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녀를 주안에서…영접하라. 즉 그녀를 대접하라고 합니다.
뵈뵈를 교회의 가족과 같이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주안에서는 인종과 피부 색깔이 다르고,서로 다른 지역과 이질적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해도 언제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이 만든 이 모든 장벽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벽이 남아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간디는 학생 시절에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고려했었다고 그의 자서전에 쓰여져 있다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인도 사람들을 구별했던 카스트라는 계급제도에 대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주일,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 대해 묻고자 했으나 그가 예배당으로 들어서자 안내원은 그에게 자리를 내 주기를 거부하며 같은 계층의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간디는 만약 기독교인들에게도 계급의 상하가 있다면 그냥 힌두교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합니다.
그 안내원의 편견은 예수님을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려고 했던 사람들까지 돌려보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인종과 사회적인 신분에 관계없이 따뜻하게 반겨주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도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으나 편견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합니다.
모든 성도는 한 분이신 하나님의 자녀이고,한분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였으며 한분이신 성령의 인도와 지도를 받습니다
(엡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외지의 그리스도인이더라도 주 안에서는 하나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녀는 여자요, 로마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녀를 돕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서로의 일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뵈뵈는 분명히 로마교회를 돕기 위해 로마에 갔으며,그녀가 원만히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로마 교회 성도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올은 지금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그녀의 곁에서 그녀에게 필요한 바를 도와주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그녀로 하여금 성도와 교회가 주안에서 모든 것을 초욀하여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일 것입니다.
편협한 지역주의라든지 민족주의,인종주의 같은 것에 얽매이는 것은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못합니다.
일제시대 때에 황철도 목사님이 도쿄에서 공부하던 때의 일이라 합니다. 그는 방학 동안에 학비를 벌기 위하여 노동자를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합니다. 한번은 나고야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모아 도쿄로 인솔하게 되었는데 나고야 역에서 만나기로 한 인부들 중 이 씨라는 사람이 노름을 하다가 경찰서에 붙잡혀 있으면서 거짓으로 자기가 죽게 되었으니 와달라고 사람을 황 목사에게 보냈다합니다. 황 목사는 화가 났으나 참고 경찰서에 아는 경부를 통해 그를 풀려나게 하고 이 씨를 데리고 나고야 역에 나오니 어제 먼저 가라고 했던 사람들이 안가고 황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합니다. 황 목사는 도쿄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니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로 다시 화가 났으나 어쩔 수 없이 기차를 타려고 들어갔더니 도쿄에 지진이 나서 기차가 못 간다는 것이었다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만약 도와주어야 할 일 이 없어서 어제 마차로 도쿄로 떠났었으면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지진을 만났을 텐데 그 재해를 피하게 해 주셨던 것임을 깨닫고 감사를 드렸다합니다.
인간들은 수많은 장벽들을 만들어 서로 대치하는 관계가 되게 했지만 그리스도는 이것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하나가 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중국의 횡 장군은 아주 훌륭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가 청소년 시절인 1900년도에는 중국에서 북청사변이라는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 폭동은 중국에서 외국 사람들을 몰아내자는 비밀 결사 단체의 운동이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의 횡 장군은 폭도들이 한 선교사를 죽이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폭도들은 난폭하고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의 손목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팔목을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선교사의 발목을 잘랐습니다. 그들은 이어서 그의 두 무릎을 잘랐습니다. 처참한 선교사의 몸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습니다. 폭도들은 죽어가는 선교사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선교사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나의 아들에게 말을 전해주시오. 나의 아들에게. 선교사로 중국에 와서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가라는 말을 전해주시오.” 그러고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장면은 횡 청년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고. 그것은 너무나 거룩한 장면이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나라에 아들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고 구령을 위하여 도우라는 선교사님의 외침과 죽음의 사건은 횡 장군으로 하여금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그리스도 안의 신앙을 버리지 않는 군인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도움을 부탁하며 부탁 받을 수 있는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롬 16:2)...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사도 바울이 그녀가 베푼일에 대하여 말하며 보호자가 되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보호자(프로스타티스)는 후원자를 나타내는 말로 큰 도움을 주었음을 말합니다. 그녀는 고난과 궁핍에 처해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크게 도와주었음을 말합니다.
우리도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아침 구두 수선공인 콘라트는 매우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는 작업장을 청소하고 난로에 불을 붙인 후 식탁에 식탁보를 깔았습니다. 오늘 그는 일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아주 고귀한 손님 한 분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 손님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는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지난 밤 꿈에 주님께서 "내가 내일 너에게 손님으로 가겠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따뜻한 방안에서 식탁에 앉아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가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고 느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오셨나보다"라고 생각한 그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우편 배달부였습니다. 우편배달부는 바깥의 추운 날씨 때문에 완전히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편지를 내밀고는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뜨거운 차를 갈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우편배달부를 안으로 불러 들여 차 한잔을 대접하고는 온통 얼어 버린 그의 몸을 녹이도록 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우편배달부는 다시 추위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우편배달부가 집에서 나가자마자 그는 재빨리 찻잔을 치우고 탁자 위를 깨끗이 정돈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그의 손님이 오는지를 보기 위해 창가에 앉았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곧 오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서 입니다.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주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한 어린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유리창 가까이 갔습니다. 그는 어린 소년의 조그마한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즉시 어린 소년에게 달려가 우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곧 그는 소년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어머니를 잃었으며 더 이상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쪽지 위에 무엇인가를 쓴 다음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쪽지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 저를 기다려 주세요 저는 곧 돌아옵니다' 그는 문을 잠그지 않은 채 소년의 손을 잡고 그를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집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두워진 후에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 창가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방망이 질 쳤습니다. 이제 드디어 주님께서 그에게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자신과 같은 집의 위층에 사는 한 부인을 자신의 방 창가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녀는 피곤에 지치고 슬퍼 보였습니다. 그는 부인의 어린 아들 페트야가 아팠기 때문에 부인이 삼일 동안 한 숨도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할 정도로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인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페트야는 고열에 시달리며 조용히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페트야는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인은 자신을 도와주는 그에게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이 불행한 사고로 죽은 후부터 이 어린 아들과 단 둘이 살아왔기 때문에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인을 도와 페트야를 젖은 수건에 돌돌 싼 다음 부인이 잠시 쉬는 동안 아픈 아이의 침대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그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자정이 훨씬 지나서였습니다. 그는 매우 실망하여 피곤한 몸으로 침대에 누었습니다. 하루는 다 지나갔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오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는 갑자기 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콘라트야 내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어서 고맙구나 나에게 집으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어서 고맙구나 그리고 도움과 위안을 내게 주어서 고맙구나 콘라트야 내가 오늘 너의 손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나는 무척 기뻤단다"(청소년 예화)
우리도 보호자가되고 보호 받으며 감사하며 좋은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님께 감사하는 자녀가 효도하는 자녀요 스승님께 감사하는 학생이 모범 학생이요 임금님께 감사하는 신하가 충성하는 신하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헌신하는 성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주일 저녁 이른 시각에 교회 종이 울렸습니다. 시계를 보니 정해진 예배시간보다 30분이나 빠릅니다. '누가 장난치나?' 그러나 종 칠 사람은 김성혜 집사님 뿐입니다. 아직 저녁 설거지도 마치지 않은 집사람과 같이 웃으며 "빨리들 나와서 기도를 하라는 게지"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내심 걱정이 됩니다. 김 집사님은 중풍을 맞고 난 뒤 거동뿐만 아니라 생각도 많이 흐려지셨습니다. "몸이 더 나빠지신 건가." 빨리 종친 이유를 달리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올 여름이 고비인데…" "재발하면 안 되는데…" 아내와 함께 걱정을 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교회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예배당 바닥에 가지런히 정돈된 방석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실은 오늘부터 저녁 예배시간이 30분 앞당겨졌다는 사실을!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알았습니다. 편견과 잘못은 시간과 기계에 있지 않습니다. 더위도 아닙니다. 부실한 몸 김 집사님도 아닙니다. 내겐 잘못 없을 거라는 오만한 자신입니다. 종종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을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며 최선을 다 하므로 좋은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 웹스터는 일생동안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지금 하는 모든 일을 이다음에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질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리 하루뿐만 아니라 1년뿐만 아니라 항상 사랑 하리라는 사랑의 노래의 가사처럼 전 생애를 주님 위해 헌신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은 일꾼이라고 인정 받아야 하고 추천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우리라고 불리어 질 수 있어야 하고 부탁하고 부탁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보호자가 되고 보호 받은 일로 감사하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좋은 일꾼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진리를 위해 산 사람들
이동휘목사 / 롬1 6:1-4,13
1. 하나님께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살게 된 곳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역사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 역사는 사생영욕(死生榮辱), 죽음과 삶, 그리고 영광과 욕된 것으로 얼룩져 왔습니다. 영광된 죽음과 삶이 있는가 하면 욕된 삶과 죽음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받은 아벨이 있는가 하면,(히 11:4) 그 아벨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있었습니다. 그 아벨을 두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비록 살해되었지만 그의 믿음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69세라는 인류 역사상 최장수 인물인 므두셀라는 비록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가 1000년 가까이 살았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딛1:2) 그에 비하면 365년을 살았던 에녹은 당대에 단명(短命)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한 몸으로 변화되어 낙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의 삶을 히브리서11:5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애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에녹이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이며, 그 믿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히브리서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므로 반드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따라서 에녹은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하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기 위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평생을 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세상에 죄가 가득하게 되면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듯이, 인간은 누구든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이 시대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창6:5-7)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노아 당시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 전에 120년 동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경고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오히려 노아의 방주를 조롱하고 비웃다가 결국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방주를 만들어 그와 그 가족들이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이 시대에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노아와 같이 구원함을 받는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은 죄악이 관영할 경우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벧후3:7-9)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시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다시 말해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구원함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요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처럼 세상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인물뿐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간 수많은 인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을지라도 영원히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으로 죽기까지 깨끗하게 산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3:5입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등, 그 위치와 능력이 변변치 못해도 숱한 시련과 온갖 유혹, 그리고 어떠한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진리의 편에 굳게 서서 믿음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 사람들에게 영원한 새 이름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3:8,12을 보겠습니다.
(계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2.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세상 역사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았지만 그 이름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기록된 사람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진리 편에 서서, 믿음을 가지고 ‘진리를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진리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14:6을 보겠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이 마땅히 살아야 할 길이 되시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된 진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세상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거나 폐기되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연구나 생각에서 나온 이념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에 내려오신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갈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 있는 생명력이 있어야 참된 진리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는 도덕이나 윤리에 불과한 것으로 “진리의 영”이 없는 전혀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진리는 착하게 살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생명, 구원에는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생명의 “진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신 성령을 두고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께서 보내신 영(靈)이시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러므로 이제 예수께서 보내신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함께 해야만 ‘진리’는 살아있는 말씀,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를 살리는 생명으로 역사합니다. 인간은 착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인간은 사망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가장 좋은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히 사는 길은 진리가 되시는 예수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요14:6). 이 생명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3. 오늘 본문에 ‘진리를 위해 산 사람들’ 중 먼저, 뵈뵈가 있습니다. 이 뵈뵈를 두고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뵈뵈가 당시 교회 성도들의 인정을 받아 집사의 직무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뵈뵈는 교회 여자 집사로 심방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 그리고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 등 남자 집사들의 손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일들을 담당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겐그레아 교회는 어느 정도 교회 조직을 갖춘 교회로서 다른 어느 교회보다 사회봉사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뵈뵈를 로마 교회에 보낼 정도로 그녀는 겐그레아 교회에서 믿음이 탁월한 성도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녀를 ‘우리 자매’라고 부른 것은 실제 혈연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성도임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뵈뵈는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되어 모든 성도들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봉사에 충성을 다 했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권면하며 그 이유를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뵈뵈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보호자”가 될 만큼 교회와 복음 전도를 위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후원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사회적으로 유력하고 물질적으로도 부유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물질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겸손한 자세로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해 넉넉한 경제적 도움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은 그의 선교 사역에 경제적으로 든든한 후원자, 보호자가 되어준 뵈뵈를 평생토록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뵈뵈를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고 그녀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를 도왔던 뵈뵈를 영접하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바울을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로마 교인들에게 생소한 뵈뵈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영접하고 그를 도우면 그것이 곧, 바울을 돕는 것이 되고, 또 교회와 복음을 돕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0:40-42입니다.
(마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잠언11:25,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고 했습니다. 하물며 교회와 복음 전파를 위해 돕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영원한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뵈뵈와 같은 복음의 후원자가 되셔서 영원히 기억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있었습니다. 본문 3,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신약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보다 더 빛나는 부부는 없습니다. 이들은 원래 로마에서 살았지만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 명령 때문에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과 똑같은 천막 제조업자로서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행18:2-3)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들 부부를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부르는데 남편인 아굴라보다 그 아내인 브리스가를 먼저 호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브리스가가 아내일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남편인 아굴라보다 더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아볼로’라는 사람이 에베소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그 아볼로가 요한의 물세례만 알고 있을 뿐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와 더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을 알고 그를 데려다가 제대로 가르친 바가 있습니다. 그만큼 브리스가는 진리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신 보혜사 성령의 세례 등에 대해 정통하고 이를 바르게 가르치고 전했던 것입니다.
(행18:23-26)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이렇게 진리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믿음 또한 확실한만큼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복음 전도의 사역자를 위해서라면 자기들 목숨까지도 내놓은 부부였던 것입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다.”는 말은 원어상으로 보면, ‘사형집행자의 도끼 밑에 자기 목을 내어 놓다.’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들 부부는 핍박으로 생명의 위기에 빠진 사도 바울의 생명을 구하고자 극단적인 위험을 겪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자 사람들마다 우상을 버리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우상을 만들어 장사하던 사람들이 생업에 손해를 보게 되자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시민들을 선동해서 사도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때 바로 이들 부부가 일사각오로 사도 바울과 함께 하며 희생적으로 바울을 도왔던 것입니다.(행19:28-31,행23:12,고전16:8-9) 이러한 브리스가와 아굴라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결코 그들 부부의 희생적인 봉사와 헌신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 부부에 대해 이방인의 모든 교회들까지도 익히 알고 감사하고 있다면서 로마를 방문하게 되는 이들 부부를 정중히 문안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참으로 그들의 복음 전도를 위한 헌신적인 사역으로 이방인의 교회를 넘어 널리 그 소문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영향력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와같이 복음 전도를 위해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아름다운 성도 부부들이 날로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해 여기서 끝나지 아니하고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저의 집에 있는 교회’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가정의 집이 어디로 이사를 가든 항상 교회로 내놓았다는 뜻입니다. 이들 부부가 자기 집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복음을 전하기 위한 예배처소, 다시 말해 ‘가정교회’로 항상 내놓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독립된 교회 건물보다는 성도들의 가정집을 정규적인 회합의 장소로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정 교회가 성장해서 오늘날 독립된 건물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전형적인 ‘가정 교회’는 오늘날에도 존속하는데 가정집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되는 ‘목장 예배’(구역, 혹은 속회 예배)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가정집에 모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서로의 신앙을 돈독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을 본받아 가정에서 드리는 목장 예배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오늘 상당수 교회에 젊은 계층에서 목장 예배드리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맞벌이 부부라서 아이들 귀가 시간이 늦어 그에 맞춰 생활하다보니 목장예배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인정이 고갈되어 가는 이 시대에 가정 예배를 통해 서로의 문제를 위해 기도해주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돕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승리의 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집을 이처럼 ‘가정 교회’(House Church)로서 복음을 위해 개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가정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내 집이라는 의식이 없어지고 그리스도께서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내놓겠다는 열린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내 집이 교회의 집이요, 교인들의 집이요, 하나님의 집이다.’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복음을 위해서라면, 진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과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목장 예배같은 가정 단위의 모임이 활발해야 교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내놓은 가정 교회는 오늘 교회의 목장 예배에 있어 중요한 모체가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전도자로서, 평신도로서,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바울을 돕는 봉사자로서 복음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복음을 위한 협조자들이 있었기에 바울은 복음 전도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각자 자신의 받은 바 은사대로, 재능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그리고 각자의 소질에 따라 힘껏 봉사해서 교역자를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위한 삶이며, 진리를 위해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평가는 사람이 얼마나 유식했느냐, 부자냐, 높으냐, 미인이냐 등이 아니라, 진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의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어떻게 희생하며 살았느냐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자랑할 것은 복음을 위해 고생한 것밖에 없게 될 때, 오직 진리를 위해 살았을 때 많은 칭찬과 상급이 있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가정이 복음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가정교회로 쓰임받을 수 있는 믿음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13절에,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고 했습니다. 루포는 누구입니까? 마가복음15:21을 보면 구레네 시몬을 소개하는 글이 나오는데 거기에 루포의 이름이 나옵니다.
(막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군인들은 그를 보고 강제로 붙잡아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그 루포가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들입니다. 구레네는 유대인으로서 아프리카에 살다가 유월절이 되어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는 그 행렬과 만나게 됩니다. 연유야 어찌되었든 구레네는 힘겹게 지고 가시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도록 로마 병정들의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구레네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예수의 모습과 그 십자가의 장엄한 죽음 앞에서 깊은 충격과 감명을 받았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 후로 예수를 믿게 되고, 어찌해서 내가 그 십자가를 대신 졌을까 하고 평생을 십자가를 자랑하며 감격하고 눈물로 감사하며 부부가 함께 전도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억지로 졌어도 십자가는 정말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헌금하고 봉사할 때 무리가 조금 있었고 억지가 있었어도 뒤에 가서 생각하면 아주 잘했다고 후회함이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원해서 좋은 마음으로만 해야 좋은 것은 아닙니다. 좋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다가 언제 주를 위해 일하겠습니까? 억지로라도 시작하고 보면 시몬 구레네처럼 평생을 두고 기뻐할 일도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좋은 마음으로 기쁘게 나올 수만은 없습니다. 때로는 고집으로 나오고, 때로는 억지로 나왔다가 졸기만 하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나오다 보면, 억지로라도 봉사하다보면 후회하기보다는 참 잘했다는 생각과 아름다운 결과를 남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일지라도 교회에 나와 신앙 생활하는 것이 결국 선하며 영원히 아름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의 부인 즉, 루포의 어머니와 루포를 문안하며 특히 이들을 두고 ‘택하심을 입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전 시간을 바쳐서 봉사하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일평생을 바쳐서 오로지 복음만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말하면서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가 바로 내 어머니다”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루포의 어머니’가 바울의 육체적인 어머니는 아니지만 사상과 신앙에 있어서 바울과 전적으로 하나가 되어 모든 복음 사역을 돕는 후원자로서 하나님의 사업을 지켜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바울의 영적 부모요 자매 형제이며 친척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로부터 친어머니 이상으로 위로와 따뜻한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루포를 생각할 때면 반드시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회상할 만큼 그녀는 바울에게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한 후 자기 가족들을 떠나게 되었는데, 인간적으로 몹시 외로웠던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잠시 루포의 집에 유숙하는 동안 루포의 어머니가 그의 외로움을 알고 친아들처럼 따뜻한 친절과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에게 특별한 존경을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진리를 위해 루포와 같이 쓰임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로마서 16장에는 이들과 더불어 모두 26명의 ‘진리를 위해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같이 복음을 위해 사도 바울과 교회에 희생과 헌신을 아낌없이 베푼 사람들입니다. 아리스도불로같은 헤롯 왕의 손자로 귀족이 있는가 하면 우르바노,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와 바드로바, 그리고 허마, 빌롤로고와 율리아,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 등 귀족들의 노예들이거나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유대인은 물론하고 숱한 로마인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그들의 노예들 등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주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로서 따뜻한 사랑과 감사를 표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과 장점을 들어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실로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입니다. 거기에는 이미 유대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으며, 주인도 없고 노예도 없으며, 모두가 다 주안에서 새로 태어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바로 여기에 종래의 세계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을 초월하며, 신분의 높고 낮음을 초월하고, 성별의 주종을 초월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한 몸이라 일컬어지며, 한 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교회와 진리를 위해 사는 성도가 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생명책에 기록되며 금세와 내세에 아울러 하나님의 상급이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름다운 동역자
조학환목사(하강교회) / 롬 16:1~5
오늘 우리교회에서는 장로, 집사, 은퇴 임직 및 은퇴, 명예장로와 명예권사 추대식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사(人事)가 만사(萬事)’ 라는 말이 있듯이 어느 공동체든 사람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을 잘 세우고 그 세움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역할을 잘 하느냐에 따라 그 공동체가 잘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세울 때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을 두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목적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을 세우는 목적이 뭐냐? 왜 그 사람을 세우느냐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적합한 자질을 갖추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단은 그 사람을 세우는 목적을 알아야 하지요. 즉 이 사람이 무얼 할 거냐? 연구를 할 거냐, 운동을 할거냐, 노동을 할 거냐, 노래를 할 거냐? 이걸 확실히 해야 하지요. 그래야 그 목적에 부합되는 사람을 세울 수 있고, 그래야 세움을 받은 사람도 그 목적에 맞게 역할을 수행함으로 공동체가 추구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물론 그렇게 목적을 세운 다음에는 그 목적에 맞게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세워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요. 즉 목적을 아무리 확실히 해도 그 목적과 동떨어진 엉뚱한 사람을 세우면 안된다는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축구단에서는 축구를 잘하는 사람을 세워야 하고, 연구소에서는 그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을 세워야 하고, 가수를 훈련시키는 소속사에서는 노래 잘하는 사람을 뽑아야 하지 않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잘 감당하려면 교회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인물을 일꾼으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주일에 직분 자를 세우는 목적과 그 일을 감당하기에 합당한 직분 자의 기본적이고 중요한 자질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물론 하나님의 일입니다. 직분자는 물론 교회를 잘 섬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조직과 직분과 직책은 그러한 것들을 통하여 좀더 소명의식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좀 더 체계적으로 질서 있게 교회를 섬겨 보다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목적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곳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야 하고, 또한 그 일을 실행할 때에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게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고 유능해도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도 바르게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방식과 고집을 따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다가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일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이미 임직을 받으신 분들이나 오늘 임직을 받으시는 분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더욱 성령과 지혜로 충만함을 받아 오직 주님의 뜻과 방법대로 주님의 교회를 잘 섬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주님의 은총 충만하게 누리실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여기에 덧붙여 직분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 즉 어떻게 그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직분자는 헌신적인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직분 자는 성령과 지혜로 충만해야 하고 다음에는 헌신적인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죄와 무지가운데 죽어가는 인생들이 모두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이 일을 위해서 제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직분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주님의 헌신과 제자들의 헌신과 그 뒤를 이은 사역자들을 통해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져 온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직분자들은 마땅히 주님을 위해 헌신함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주님의 사역을 함께 감당했던 귀한 동역자들을 소개하며 그들에게 문안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문안하라는 것은 단지 인사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수고한 귀한 동역자들을 귀히 여기며 격려하며 칭찬하고 축복하며 동시에 그들을 본받아 로마교회 성도들도 좋은 동역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6장에서는 무려 32명의 동역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먼저 1,2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인 우리 자매 뵈뵈를 추천한다고 하였는데 일꾼이란 집사라는 뜻입니다. 또 이 여 집사님은 사도 바울과 다른 여러 사람의 보호자가 되어주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보호자는 물질적 후원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뵈뵈라는 여인은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로써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게 물질인 후원을 통하여 복음 사역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또 3~5(상)절에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말씀도 같이 보겠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여러분, 보세요. 이들은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신의 목까지 내어놓았고, 자신의 집도 기꺼이 교회로 내 놓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자기 목숨까지 내 놓았다. 자기 집을 교회로 내 놓았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 정말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모진 채찍질과 침뱉음과 뺨맞음과 온갖 모욕과 멸시천대를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놀랍고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아 영원한 형벌에서 건짐 받아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얻은 우리가 어찌 주님의 그 귀한 역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헌신하셨던 분들이 계셨기에 여기까지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져 오지 않았습니까? 또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헌신하는 분들이 있어야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주님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기 위하여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마땅한 태도이고, 진정한 신앙이고, 교회의 귀한 직분을 맡은 분들에게 주어진 책임이고 사명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이미 직분을 받은 자들이나 오늘 귀한 직분을 맡게 되는 분들은 우리가 정말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얼마나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았는지를 기억하며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헌신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직분자는 아름다운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특별히 직분자들이 헌신적으로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면서 한가지 더 기억할 것은 적극적인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능력이나 지식이나 영성이나 인격이나 다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동역자들 간에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고, 힘을 합쳐야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보다 힘입게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하나 되어 협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중요한 이유는 각각 자기 역할을 열심히 한다 해도 자기 마음대로 하면 죽도 밥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열심히 하면서 도리어 갈등과 분쟁과 시기와 질투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동력을 잃게 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림으로 도리어 주님의 교회를 헐어버리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자인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기독교역사상 전무후무한 엄청난 사역을 감당했던 분이었지만 그러나 그에게도 많은 약점과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는 몸이 매우 약한 사람으로 육신의 질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사 누가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돕지 않으면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매우 엄격하고, 단호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왔을 때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하자 바울은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에게 그 자리에서 ‘네가 어찌하여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면서 면박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를 비방하던 고린도교인들에게 내가 가면 용서하지 아니할 것이라며 엄중히 책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을 비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포용력이 없고 덕이 부족하다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도 때론 어쩔 수 없는 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내부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법과 육체의 법 간의 충돌로 인한 갈등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롬7:21절에 보면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면서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역자였지만 그에게도 약한 것도 있고, 부족한 것도, 내적인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자신이 최선을 다함과 동시에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그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 누가가 그와 함께 하며 그를 돕고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같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그의 귀한 동역자가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그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물질적인 후원자가 되어주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그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 각오를 가지고 돕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지만 동시에 바울 자신의 헌신과 그의 곁에서 그를 헌신적으로 도왔던 많은 동역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좋은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되 그러나 독단적으로 자기 방법과 지식과 경험과 고집대로 하려고하면 안됩니다. 말씀과 교회의 질서 안에서 자기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뜻 안에서 하나 되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바르게 힘있게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1:2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하나가 되어 협력하여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모두가 주님의 복음의 역사에 좋은 협력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의 귀한 직분을 맡은 분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귀한 동역자로서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귀한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자기주장과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뜻 안에서 아름답게 하나 되어 협력하여 주님의 역사를 힘 있게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동역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직분자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의 귀한 직책도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겠지만 교회의 직분자들은 세상의 그 어떤 직책이나 지위보다도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세상에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 높은 직책을 받아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기여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그래서 자신도 귀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세상의 그러한 일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게 하고,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이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크고 위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귀한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고, 특별히 직분자들은 이 거룩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특별하게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귀한 일에 우리가 필요하다고 부르셔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위대한 일을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과 감격가운데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지금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당신이 필요하니까 와서 나와 함께 일하자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어떤 큰 회사의 회장이 여러분에게 우리 회사에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니 와서 일해 달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물론 기쁘고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와같이 세상에서 우리를 알아주고 불러주어도 기쁘고 감사한 일일진대 하물며 하나님이 내가 필요해서 귀한 직분과 사명을 맡겨주셨다면 얼마나 더 기쁘고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고후3:9절을 보십시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여기서 정죄의 직분은 직접적으로는 판단하고 심판하여 정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모든 직분은 정죄의 직분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안 그래요? 아무리 세상의 높은 직책을 가졌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결국 정죄당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직분도 세상에서는 어느 정도 영광이 있을진대 의의 직분 즉 생명을 살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는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임직식과 은퇴식 추대식을 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특별히 교회의 귀한 직분을 맡아 교회를 섬기시는 분들은 우리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사명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이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 귀한 사명을 맡아 수고하시다가 은퇴를 하시는 분들은 그 귀한 직분을 맡아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특권이며 영광이었는지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이후로도 계속해서 힘닿는데 까지 기쁨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겨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하며 복된 삶을 살기 위하여 주의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 믿음과 사랑과 은혜 가운데 아름답게 하나 되어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힘 있게 이루어가며 자신과 가정도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으로 문안하고 거룩으로 경계하라
이재훈목사 / 롬 16:1~27
오늘 본문은 27절이나 됩니다. 많은 이름이 등장합니다. 총 35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한 분 한분의 이름을 얼마나 소중하게 기록했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분들의 이름을 부르는 게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마음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마음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사역에 기쁨으로 동역했고,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함께 고난 받았던 이들이기에 사도 바울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이나 친척 외에 주소록에 기록되고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복음 증거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서 함께 힘쓰는 성도들의 이름을 몇 명이나 기억하고 있습니까? 복음 사역을 위해서 함께 동역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협력하고, 믿음을 세워주기 위해서 수고하는 분들의 이름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잊을 수 없는 한 권사님이 계십니다. 제가 가난한 신학생 시절, 다른 교회 교육전도사 시절 제 모습이 조금 누추해 보이셨는지 어느 날 저를 찾아오셔서 “전도사님을 제 아들처럼 생각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냥 덕담인줄 알고 “네,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철마다 옷이 필요하면 옷을, 반찬이 필요하면 반찬을 주셨습니다. 반찬이 필요한 때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용돈이 필요하면 용돈을 주셨습니다. 저를 정말 아들처럼 생각하시고 필요를 채워주고 싶으셔서 저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제가 얼마나 힘들었을 지 생각하면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 같은 분이었습니다. 후에 그 권사님이 생각이 나서 찾아뵈었더니 지방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왜 지방에 계신가요?”라고 했더니 남편이 사업을 무리하게 하다가 파산했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빚을 한 푼이라도 더 갚으려고 지방으로 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여전히 신실한 믿음으로 사시는 모습과 저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뵈었습니다. 이 외에도 목회 여정에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하나님이 보내주신 많은 분의 지원과 중보기도와 협력이 있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많은 중보기도자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이렇게 말씀하며 저를 격려하는 성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제가 성함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저 “감사합니다”라고만 말씀드릴 때가 많습니다. 그 귀한 중보기도로 인해서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로마서> 16장을 읽으면서 그분들의 얼굴과 이름, 때로는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온누리교회 역사 속에 함께 기도하고 수고하시며 협력하신 모든 성도의 이름을 바울이 <로마서> 16장을 기록할 때처럼, 하나님이 하늘나라 생명책과 역사책에 귀하게 기록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동역자들
<로마서> 16장에 35명의 이름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것이 특이합니다.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을 보면 대개 문제를 일으키거나 모범이 되었던 몇 사람의 이름만 잠시 열거될 뿐인데, 유독 <로마서> 16장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학자들이 의아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사도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다른 곳으로 갈 편지가 잘못 편집된 것 아닌가?”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전도여행을 통해서 만났던 성도들, 특히 로마를 중심으로 왕래하며 만났던 사람들임이 틀림없습니다. 초창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왕래가 있었고, 로마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 아니겠습니까? 로마를 중심으로 뻗은 여러 경로와 이유로 왕래하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고, 함께 동역하게 된 이들과 로마 교회의 일원이 된 성도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열거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린도와 에베소에도 있었지만 원래 로마 출신입니다. 이 두 사람처럼 여러 경로로 사도 바울을 만났고, 동역했고, 바울과 함께 고난을 받았던 성도들의 이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사랑의 문안을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는 표현이 모두 다릅니다. 그들에게 각기 다른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동역자들입니다. 그들이 바울과 만난 것도 예수님 때문이고, 바울과 함께 일하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만나게 했고, 공동체로 묶어 주었습니다. 이 많은 사람의 이름을 편지에 거론하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일 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관계중심적인 인물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교리적인 논쟁을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한 영혼을 세우고, 돌보고,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세우기 위해 쓴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으로 문안하는 이들은 모두 이름 없이 헌신한 성도들입니다. 간략하게 이름을 언급하고 칭찬하는데 역사적으로 이들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들은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도 바울을 섬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섬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생명을 다하기까지 고난을 받았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도 바울을 구했다고 했습니다(4절).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7절). 수고를 더 많이 한 사람들 마리아와 버시를 기억합니다. 사도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사람들은 인종, 계층, 직업, 성별이 다양했습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를 이룬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암블리아, 우르바노, 허메는 노예 신분으로 확인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황제의 가까운 친구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아리스도불로’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손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평민처럼 살았고, 여전히 글라우디오 황제와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황제와 가까운 친구부터 노예 신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의 계층의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에배네도라는 사람은 아시아 최초로 회심한 그리스도인이었고, 마리아, 안드로니고, 유니아는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차별 없이 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9명의 여성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리더십 역할을 감당했던 공동체였다는 뜻입니다. 특히 브리스길라는 아굴라는 남편보다 훨씬 앞서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통해서 그녀의 지도력을 보여줍니다. 1절에 나오는 ‘뵈뵈’라는 여인은 여성 사업가로 확인됩니다. 여성 사업가로서 왕래를 자주했기에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편지를 받아서 로마 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던 인물이 뵈뵈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이처럼 로마 교회 당시 성도들이 여러 교회를 왕래하면서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로마 제국의 길이었고, 로마가 당시 세상에 미쳤던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뵈뵈 뿐만 아니라 아운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르도바, 허마 등의 이름도 사업가 그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양한 직업, 남성과 여성, 여러 인종이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녹아져 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영혼을 돌보는 문안
사도 바울이 문안하는 이들 중에 주목할 이름이 나오는데, 13절에 등장하는 ‘루포’입니다. 루포는 <마가복음> 15장 21절에도 나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너무 지쳐서 걸을 수 없자 로마 병사가 구레네 출신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그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루포는 <마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시몬의 아들이었을 거라고 학자들은 봅니다. 루포가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구레네 출신 시몬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셀렘에 왔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성스러운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 보게 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이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구레네 출신 시몬과 그의 아들 루포, 그의 어머니가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동역자들의 이름으로도 문안합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있는 여덟 사람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가장 가까운 디모데부터 시작해서 바울의 친척들 누기오, 야손, 소시바더, < 로마서>를 기록할 때 옆에서 받아 적은 더디오, 교회를 돌보는 가이오, 재무관 에라스도, 그의 형제 구아도 등의 이름을 알려 주면서 함께 문안합니다.
영혼을 돌보는 중요한 일은 문안입니다. 서로 기억하고 생각하며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억력이 좋았기 때문에 이 많은 사람의 이름을 기억했을까요? 기억력이 아니라 기도의 힘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기도와 사랑에서 영혼을 향한 사랑이 등장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사도 바울이 섬겼던 것입니다. 이 사랑의 문안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안에 협력하고, 서로 문안하고 돌보는 성도들의 이름이 사도 바울처럼 계속 많아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의 축복이요, 복음이 전해지는 일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거룩한 경계’를 명하다
바울은 사랑으로 문안하면서 끝맺는 것처럼 보였는데, 매섭고 날카로운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거짓과 아첨, 현혹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무너뜨리는 일을 경계하라는 ‘거룩한 경계’를 명합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배운 교훈에 역행해 분열을 일으키고 훼방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그들을 멀리하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기 배만 채우며 그럴듯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합니다”(17~18절).
복음에 역행해서 분열과 훼방, 현혹하고, 아첨하는 거짓된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든, 어떤 교회든지 이런 이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을 경계하고 멀리하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위선적인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에게 저항하시고, 책망하시고, 그들을 경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역하는 내내 거짓 선생들, 사기꾼들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많은 사이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 종말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전쟁, 기근, 지진,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예언자들,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자들도 종말의 징조입니다. 그들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그들의 말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도리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는 아니더라도 공동체 안에서 분열, 거짓, 아첨으로 자신을 따르게 하는 이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경계해야 합니다. 영혼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악의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빨리 조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놔두면 놔둘수록 악한 영향력이 커져서 피해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신속하게 경계하고 조치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경계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선한 일에 지혜롭고 악한 일에 순진하라”
“여러분의 순종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있어 나는 여러분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하기를 바랍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여러분의 발아래서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19~20절).
우리 영혼을 진리로 계속 교훈하면 선한 일에는 순진하고, 악한 일에는 지혜롭게 됩니다. 우리는 악의 실체를 경계하면서 악에 대해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을 연구하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습니다. 어떤 분은 “세상에 악한 것도 경험해 봐야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데, 아닙니다. 악은 경험해야 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악은 연구할 필요 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악한 일에는 순진하고, 선한 일에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선을 더 묵상하고, 마음에 채우고, 더 선한 것을 이루기 위해 연구할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선한 역사의 통로가 된 분들의 삶을 연구하고, 그들처럼 살기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이 지혜는 사용할수록 더 풍성해집니다. 지혜를 선한 쪽으로 사용하는지 나쁜 쪽으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 지혜롭고 악한 일에 순진하라”는 말씀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성도들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메시아가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부순다고 했습니다. 승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완전한 승리의 기쁨을 우리에게 맛보게 하려고 사탄을 우리 발로 밟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머리를 부숨으로 승리를 이루셨고, 그 승리를 우리가 맛보고 누리도록 사탄을 발로 밟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승리 속에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에는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순진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장엄한 선언
<로마서>는 복음에 대한 장엄한 선언으로 다시 돌아와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를 따라, 그리고 비밀의 계시를 따라 능히 여러분을 견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은 영원 전부터 감춰져 오다가 이제는 나타나게 됐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로 인해 믿고 순종하게 하시려고 모든 민족에게 알려지게 됐습니다. 오직 한 분이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25~27절).
다시 복음으로 돌아와 결론을 맺습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계획이 비밀스럽게 계시되어 왔는데 이제는 밝히 드러났고, 모든 민족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알려져야 합니다.
복음은 인간이 발명하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새로운 통찰력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원은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누가 복음을 기획하고, 역사를 움직여서 사람들이 믿도록 계획하고 체계화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졌고, 우리를 통해서 전해짐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그분께 영광이 돌려져야 합니다.
여러분, 복음이 저와 여러분을 견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마치면서 복음을 더 깊이 깨닫고, 복음 안에 굳게 서고, 복음에 더 순종하고,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으로 문안했던 여러 사람의 이름처럼, 이 세상 역사에는 알려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과 하나님 나라의 사도행전적 역사책에는 우리의 이름이 소중히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복음 안에서의 삶이 더욱 견고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더 온전히 증거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안의 동역자
롬 16장 1~4절 / 김남수목사
지난 시간에는 역사적인 성전 건축을 감격 속에 기공식을 마쳤습니다.
세계 선교의 새 장을 여는 새 성전 시대, 예루살렘 대 성전 공사를 시작하면서 기공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감격 속에 기공식을 마치고, 다시 한 번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집을 지을 것인가 하는 중대한 질문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터를 놓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성전을 지어야 한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 된다 하는 말씀을 드리면서, 억지로나, 인색한 마음은 옳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또 다른 건물이 하나 선다는 이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이 계시는 집, 하나님의 집을 지어 드린다는 자원하는 심령과 기쁨으로 그 일을 해드려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큰 일을 하려면 일군이 필요합니다.
일은 일군이 하게 되는데,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땀과 수고와 눈물과 사랑을 쏟는 일군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 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일군들이 많을 때 하나님의 집이 잘 이루어 진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칭찬하고, 격려하고, 소개하는 이름들이 계속해서 나열됩니다.
특별히 로마서 16장은 사람의 이름이, 그것도 목회와 관련 되었던, 사역과 연관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중의 몇 사람을 소개하면서, 과연 어떤 사람이 일군이고, 일군이 어떻게 해야 참 일군이고, 일할 수 있는가를 말씀 드리려 합니다.
(롬 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교회의 종이고, 교회의 일군인 뵈뵈를 천거하노니, 이 사람을 나처럼 생각하고, 영접하고, 나처럼 환영해서 그를 소용되는 모든 일들을 도와주라.
아주 좋은 천거를 보냅니다.
사실, 로마서는 뵈뵈라고 하는 이 여성 성도를 통해서 겐그리아, 고린도 아래에 있는 조그만 항구 도시에서 이 글을 써서 로마로 보내는데, 이 로마로 가는 중요한 편지를 이 여성 뵈뵈라는 여성 편에 부쳐서, 그가 이 중요한 문서를, 성경의 말씀, 사도의 편지를 가지고 로마로 가는데, 그 가지고 가는 그 여성을 환영하고, 영접하고, 잘 도와주라고 설명을 합니다.
두 가지를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성, 그 수 많은 남자들을 제치고, 뵈뵈라는 이 여성이 이렇게 중요한 일을 감당하는 일군이 되었다는데 우리는 깊은 관심을 두어야 될 것입니다.
원래 교회의 일은 남자들이 다 하는 것 같이 생각하지만, 성경에 보면, 여성들의 대부분이 교회의 중요한 일들과 역사적인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금요일 예배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한국 사람들은 예수 믿고 축복 습니다. 조선 사람 예수 믿고,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몇 가지만 예를 들어도, 첫째 교육에서 입니다.
학교라는 것이 도무지 한국에 수 천년 동안 없었습니다,
서당이라는 글방이 있어 천자문 배우는 수준이 서당은 있었지만 학교는 없었습니다.
여성 교육, 현대 교육, 세계관, 역사, 수학 등 여러 가지의 진리를 가르치는 학교가 기독교 교인들, 선교사들에 의해서 학교가 지어지는 것이 우리 민족의 축복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두 번째 축복은 지위와 위치가 아주 높이 향상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옛날에 양반들은 여자들을 무시하고, 여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울고 평생을 눈물로 살아가는 이름도 없이 어려운 세월을 보내는 중에 예수 믿고, 성경에 보니 여자와 남자를 평등하게 지으시고, 존귀한 인격과 영혼과 직분을 똑같이 주시고, 특히 여성들의 역할이 사회나,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가르치면서, 한국의 여성들은 해방이 되고,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교회에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조선 사람들 예수 믿고 복 받았고, 그 중에 조선 여성들이 예수 믿고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가 생각해 봅니다.
여기도, 뵈뵈라는 여자 성도가 좋은 일군이라고 사도 바울께서 직접 천거를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한국 사람이 예수 믿고 축복 받은 것은, 미신 타파입니다.
한국 사람은 못도 제대로 못 박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못을 아무데나 박으면, 귀신이 노해가지고 눈이 먼다고 했습니다.
된장, 고추장도 아무 날에 담그면 안됩니다.
이사도 제대로 못하고, 손이 있는 날, 없는 날을 구별하여 다녀야 합니다.
도깨비는 왜 그리도 많은지, 제가 어렸을 때는 밤에 밖에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도깨비가 너무 많아서 입니다.
산에는 산 신령도 많고, 물에는 물귀신도 많아서 수영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하여튼 귀신과 도깨비와 얼마나 수 많은 미신들을 섬기면서 자유를 잃어 버렸습니다.
된장, 고추장 담글 때 도, 날짜를 물어 보아야 할 정도의 미신 숭배에서 예수 믿음으로 모든 일에서 자유를 얻게 된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날이나 못 박아도 되고, 이사를 해도 되고, 장을 담가도 되는 자유를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또 다른 축복은 일하는 축복, 노동의 가치를 인정 받게 됩니다.
여러분! 양반은 절대 일 안하고, 상 사람만 일합니다.
천한 일, 궂은 일은 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양반들은 기고 만장하게 앉아서 상투 틀고, 담뱃대 물고 호령만 하는 양반들 때문에 상사람 들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오 천년 동안 가난하고, GNP가 1950,60년대까지 65불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가난한지 예수 믿고, 노동이 얼마나 신선하고, 선교사들이 와서 농사와 축산을 가르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일 하는 것을 가르치고, 일 하지 않으려면 먹지도 말라는 성경을 가르쳐, 교회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 할 수 있도록 가르쳐서, 수 천년 된 가난을 벗어 버리고 GNP가 만 불이 되었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인 것 입니다.
여러분! 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제가 어려서 주일 학교 때부터 일하러 가세 라는 찬송을 부르고,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일 주일은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사업을 하는 것을 교회에서 가르쳐서, 수 천년 동안 끌고, 붙어 다니고, 저주같이 따라 다니던 가난을 떼어 버리게 된 것은 예수 믿고 받은 축복인 줄 믿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예수 믿고 축복을 받았는데, 그 중의 축복이 인간이 평등하고, 남녀가 존귀하고, 하나님 앞에 존귀한 직분과 역사를 누구에게나 충성된 사람은 남녀 구별 없이 일군될 수 있고, 칭찬 받는 하나님의 귀한 일군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받은 축복 중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겐그리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
교회의 일군이 된 것, 여성이지만, 이 무명의 자매이지만, 사도 바울이 높이 추천할 만한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누구를 추천할 때, 이렇게 추천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참 대단한 추천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롬 16:2)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일군이라는 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 주는 것이 일군이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일군입니다.
쟌 맥스웰, 짐 도우너라는 사람이 공저한 영향력이라는 책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라는 책인데, 그 책에 이런 시인의 들이 소개 되었습니다.
오늘이 가기 전에 내 삶은 수 십 명과 만나게 될 것이다.
저녁 해가 지기 전, 나는 좋고 나쁜 수 많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내가 항상 바라고 소망하고 기도하는 하나가 있다면, 주여! 제 삶이 나의 삶의 도중에 만나는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삶에 도움을 주게 하옵소서.
좋은 영향을 주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였습니다.
삶은 살아 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좋은 영향을 주고 받느냐, 나쁜 영향을 주고 받느냐 입니다.
그리고, 몇 사람에게 영향을 주느냐, 아니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느냐, 또 오랜 기간 동안 영향을 주느냐, 잠깐 영향을 주고 마는 것이냐 이런 차이뿐이지, 사람들은 누구나 영향을 받게 되고, 영향을 주면서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군이란 무엇이냐 면,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전 건축을 할 때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그 일군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붙잡아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수 많은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나열하면서 그가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마지막 부문에 평소에 하지 않던 한 사람의 이름을 거명합니다.
알렉산더라는 사람을 거명하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딤후 4: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딤후 4:15) 너도 나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일군으로 옆에서 저를 도왔는데, 어떤 사람은 그를 심히 대적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사도 바울을 대적하고, 저의 생애와 사역을 많은 피해와 해를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잘 들으십시오. 일군은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넘어뜨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사람을 만나서 좋은 영향을 받는 것이, 그 좋은 영향을 받는 사람이 일군이고, 또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좋은 일군이고, 그 영향이 짧게 가 아니라 길게 일생을 도움을 주는 중대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 큰 일군이라면, 그런 일군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쟌 맥스웰 목사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서로 붙잡아 주라. 서로를 잘 보살펴 주라, 서로를 도와가면서 일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의 일을 할 때에 좋은 영향을 서로 주어야 합니다.
일군은 다른 사람을 도와 주는 것이지, 넘어뜨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은 교회의 중요한 일들 일수록 교회와 합의하고, 교회를 잘 보호하고 돌봐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니, 뵈뵈라는 사람이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호자라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도의 보호자가, 이 자매가 보호자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일군이란 옆에서 지켜주고, 보호해 주고,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하려면, 목자를 쳐야 양이 흩어 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탄은 끊임없이 강단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집요하게 악의를 품고 계속 공격합니다.
그것을 일군들이 막아 주고, 보호자가 되어 주어야 강단이 살고, 강단이 살아야 여러분도 살고, 여러분이 살아야 신앙이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울타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쓸데 없고, 근거도 없는 말이 나오면 일군이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일군이 되셔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지켜 나가는 신실한 일군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20 여 년을 여러분과 같이 살았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여러분들을 지금까지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삶은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은 일군이 되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잘 지켜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성전을 건축할 때, 잡음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전 건축을 할 때, 구약 성서에도 돌 깎는 소리, 나무 베는 소리 같은 잡소리는 성전 짓는 곳에 가하지 않아서, 저 먼 곳에서 다 다듬고 골라 조용히 가져다 차곡 차곡 쌓아 하나님의 집을 잘 세워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짓는데 잡음이 일어 나서는 안되고, 교회를 지을 때에 잡소리가 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자유도 있고, 말 할 자유도 있지만, 일군답게 하나님의 교회를 늘 생각하고, 주의 종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잘 보살피고, 보호해 주고, 지켜주는 것이 일군입니다.
우리가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시고, 직분을 주시고, 직책을 주셨습니다.
장로, 권사, 집사, 목자, 예비 목자 등 수 많은 지도자들을 세우시고,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직분을 가지고, 이런 일군이 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참 좋은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일군이 많이 필요합니다.
또 일군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분이 미국에서 30년 목회하고, 신앙 잡지를 발행한 스피노스 죠디아티 라는 목사님은 살아 있는 교회와 죽어 있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비교했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교실과 주차장과 공간 때문에 늘 문제가 생긴다.
죽어 있는 교회는 공간에 대한 염려가 전혀 없다.
그러고 보니, 우리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인가 봅니다.
왜냐하면, 각 기관이 공간과 주차장 문제로 늘 신경을 써야 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그러나, 죽어 있는 교회는 늘 똑 같다.
살아 있는 교회는 아이들 소리로 시끄러우나, 죽어 있는 교회는 언제나 조용하다.
성경의 말씀처럼, 소가 없으면 구유가 깨끗하다는 말 인 것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일군이 부족하나, 죽어 있는 교회는 일군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 쓴다.
그러나, 죽어 있는 교회는 늘 은행 잔고가 많다.
우리가 헌금을 부지런히 해도 늘 재정부에서 모자란다고 하니, 아마 우리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은행 잔고가 늘 넉넉했으면 좋겠지만, 그런 교회는 죽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새 성도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 애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 있는 교회는 그럴 염려가 없다는 것입니다.
해가 바뀌어도 늘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주는 자들로 가득 차 있는데, 죽어 있는 교회는 생색 내는 자들로 가득 차 있고, 살아 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 서서 모든 일을 결정하지만, 죽어 있는 교회는 인간적인 판단으로 모든 일을 추진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는 일에 바쁘지만, 죽어 있는 교회는 언제나 편안하고, 살아 있는 교회는 전도에 힘쓰나, 죽어 있는 교회는 석회암처럼 굳어 석회화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교회는 일군이 많이 필요하고, 특별히 성전 건축이라는 거대한 새 시대에, 새 역사를 시작하는 이 때에 우리는 새로운 새 일군들이 많이 필요한 줄 믿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 마음속에 불타고, 그런 마음이 뜨거워져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내 생명이라도 바칠 수 있는 뜨거운 결심과 열정이 우리 안에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 잘 된다고 하면, 기쁜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인 줄 믿습니다.
교회 잘 된다고 하면,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소속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둠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잘 된다, 부흥된다, 축복 받았다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주님께 속한 일군들 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 된다고 하면 어떡해서든지 평가 절하 하는 사람은 옳지 않은 영에 속한 사람인 줄 아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잘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 마음에 뜨거운 소원이 있다면, 우리의 몸 담아 있는 내 제단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내 생명이라도 바칠 수 있는 뜨거운 소망과 열정,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계 선교의 위대한 꿈을 이루어드리겠다는 열정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망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묻기를 왜 사십니까? 이렇게 묻는 다면 대답할 말이 있습니까?
당신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십니까?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것 때문에 삽니다. 하고 살아야 될 이유를 제시하고, 살아야 될 목적을 제시하고, 내 삶과 열정과 피를 쏟을 수 있고, 바칠 수 있고,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꿈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확실 해 지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바칠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도 몇 주를 살 수 있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몇 일을 살 수 있습니다.
산소가 없어도 몇 분 동안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이는 살 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소망이 그만큼 중요하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확실 한 것이 이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잠 13:12)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소망을 잃어 버리는 것이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더글라스 컬리겐이라는 분이 마음이 상한 자란 저서에서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이 안 된 홀아비들의 사망률을 조사했는데, 그 결과 같은 연령의 남자들에 비해서 사망률이 40%나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말은 평생을 함께 지내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서, 깊이 절망하고, 6개월 이내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40%나 높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소망이 이렇게 중요한데,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자. 건물을 또 하나 지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고,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소중한 영혼들을 살리며, 어린 심령들을 구원하고, 수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우리의 새로운 비전을, 우리의 소망으로 확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한 사회 학자는 19세기를 여성 발견의 세기라고 말하고,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요, 21세기는 노인을 발견한 세기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꿈꾸고 있는 수 많은 어린이들과 그리고, 다음 세대를 이끌고 갈 변화 시킬 우리의 젊은 영혼들과 길 거리에서 방황하는 수 많은 어린 영혼들을 주님께로 지금 인도해 놓으면, 다음 세대는 반드시 변화 될 수 있겠다는 꿈과 비전을 마음속에 확실하게 갖고, 이 역사적인 성전을, 이 위대한 하나님의 집을 세계적인 도시에, 세계적인 사역을 위해 세워 가자는 꿈을 여러분 마음속에 뜨겁게 가지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래 아이들은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1920년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만 해도 어린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일본에 유학 중이던 소파 방 정환 선생은 안타깝게 여기고, 민족의 미래는 다음 세대를 귀히 여기는데 있다고 확신하고, 여름 방학에 귀국하여 어린아이들에게 존댓말 쓰기 운동을 하여 어리신 이라는 존경어를 만들어 그것을 줄여 어린이라는 말이 생겨 났습니다.
1923년에는 순수 아동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어린이날이 생겨 났습니다.
예수님도 어린 심령 하나를 데려 놓으시고, 이 아이를 대접하는 것이 곧 나에게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권사님들이 이번에 혼두라스를 방문하였습니다.
1년 전에 가셨을 때, 그 아이들을 다 발을 씻어 주시고, 머리를 잘라 주시던 아이들인데, 그 아이들이 얼마나 변화 되었는지 모릅니다.
교복을 한 벌밖에 주지 못했는데, 그 옷을 8개월 동안 매일같이 빨아서 입고 머리도 깨끗하게 빗고 학교에 옵니다.
거짓말같이 길거리에서 거지처럼 살던 아이들이 몇 개월 만에 이렇게 변했다는 가능성을 보시면서, 또 새로 기공한 학교를 가 보고, 거기서 또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 아이들도 머지않아 이 학교에서 교복을 나눠주고, 신발을 나눠주고, 복음을 전하면 그 아이들은 진정 하나님의 사람들이 된다는 비전을 갖고, 이번에 돌아 오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꿈이 있으면 축복인 줄 믿습니다.
밥이 없으면 살 수 있습니다. 물이 없어도 살 수 있으나, 꿈이 없으면 죽는다는 말을 마음 속 깊이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좋은 일군이 필요합니다.
뵈뵈와 같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좋은 영향을 주는 그리고, 교회와 주의 종들의 울타리가 되고, 보호자가 되어서 지켜 주고, 하나님의 일이 잘 되게 할 수 있는 일군들이 새 시대에는 많이 필요한데,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 귀한 일군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좋은 일군, 여성이던, 남성이던, 젊은이던, 나이든 사람이던, 직분이 있던 없던 새 시대의 새 역사는 여러분 손으로 좋은 일군이 되어서 큰 역사를 여러분들이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고, 일군들을 세우시고, 영광스러운 직분과 세계 선교의 꿈을 주시고, 그 꿈을 반드시 이루실 수 있도록 오늘도 역사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 새 시대의 새 역사를 이루어갈 신실한 일군 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충성되어 하나님 기뻐하시는 종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 안의 동역자 II
롬 16장 1~4절 / 김남수목사
우리는 큰 일을 꿈꾸고,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 세워질 새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이 시대에 또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또 하나의 위대한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세우실 거룩한 교회이며, 역사를 바꾸어 놓을 위대한 교회로 하나님은 이 제단을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이런 큰 일을 앞두고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이런 일을 임해야 될 것이며,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군이 있어야 되며,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자세로 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냥 구경꾼이 아니고, 말썽을 부리는 말썽꾼이 아니고, 정말 일하는 일군으로 하나님과 동역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자세와 어떤 마음을 기뻐하고 쓰시는가? 하는 말씀을 계속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뵈뵈라는 사람을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이 뵈뵈라는 사람은 겐그리아 교회의 여자분이고, 집사님이고, 열심히 믿는 신자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그를 어떤 명분으로 보내면서, 역사에 남는 로마서를 그가 써서, 그의 손에 부탁하면서,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아주 정성껏 돌봐주고, 무엇이든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간 거처럼, 나를 맞이하는 거처럼, 보살펴 주라고 설명하면서, 그 사람은 이 곳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으며, 모든 사람들을 위해 수고하였으며, 특별히 나를 위해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보호자가 된 사람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이 뵈뵈라는 이름의 원어는 순결이라는 말입니다.
Purity, 이 순결이라는 단어를 가진 이 평범한 한 여성도는 참으로 사도 바울뿐아니라, 그의 교회를 세워가는데, 사도 바울의 사역뿐 아니라, 그가 세워가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유익되고, 보호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남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도와주면, 언젠가는 누구에겐가는 자기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늘 도와주는 사람 주위에는 항상 그 사람을 도와 줄 또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돕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이 순결한 뵈뵈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은 집에서나, 가정에서나, 이웃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불쌍한 사람을 도우며, 수 많은 도움을 주며, 사람들을 도와주는 그의 생애가 연속된 것이 이렇게 오늘까지 수 천 년이 지난 후에 성경에 기록되고, 우리 마음속에 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와 주의 종의 보호자가 되었다.
이 영어 성경에는 she has been a great help to many people, including me.
그는 우리의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기록이 되었는데, 우리 한국어 번역에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
보호자라는 말은 helper 도와주는 사람보다 더 강력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보호자라는 것은 막아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지켜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울타리가 되어주는 사람을 보호자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도움 자체가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그 도움은 사람들에게 울타리가 되어주고, 사람을 도와주고, 사람을 세워주고, 사람을 일으켜 준다는 것입니다.
도와준다는 것은 결국 보호해 준다는 것이고, 도와준다는 것은 지켜주고, 막아준다는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잘것없는 작은 일이라도 막아주고,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서로 서로 지켜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성도간에 서로 지켜주어야 합니다.
교회를 지켜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협력자에서 보호자까지 하나님의 일을 지켜가야 합니다.
여러분! 마귀는 하나님의 교회를 깨뜨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귀신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교회를 헐려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헐어야 여러분을 마음대로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마귀는 화가 날 것입니다.
자기 좇아서 죄를 짓고, 술집, 도박, 온갖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신나게 같이 다녔는데, 어느 날 이상하게 이 친구가 교회에 간다고 가서 영원히 돌아 오지 않는 것입니다.
화가 안 나겠습니까?
교회 가 보니, 그런 사람들로 와글 와글 하니, 이 교회만 깨트리면 마음대로 하겠는데, 어떡해서든지 교회에서 말씀 듣고, 기도하고, 마귀는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교회만 깨트리면 마음대로 여러분들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깨트리고, 교회를 공격하고, 비방하고, 시기, 질투, 온갖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를 무너트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길 자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가 교회를 이기겠습니까?
하나님을 누가 이기며, 하나님을 누가 깨트리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성도인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지켜주십니다.
여러분도 교회를 지켜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교회의 보호자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지켜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보호자가 되고, 하나님의 교회를 지켜가는 훌륭한 사역을 감당해야 될 줄 믿습니다.
뵈뵈라고 하는 순결한 여성, 그가 사도 바울같이 위대한 사도의 보호자가 되었다라고 말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할 때에, 이제는 우리가 이것을 지키고, 우리가 이것을 세워가야 될 줄 믿습니다.
세월이 꽤 지났습니다.
제가 임시 당회를 소집하고, 교회의 목회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가지 생각과 가족들과 회의를 한 다음에 제가 교회를 사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 지금은 원로 장로님들이 되셨지만, 소집하고, 제가 교회를 이런 이유로 제가 담임 목사로서의 자격이 되지 않아 교회를 사임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장로님들이 심사 숙고 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가족이 희생되었으니, 이제 교회 마저 희생 시키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제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교회는 결국 하나님께서 역사 하셔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 시간 기도하고, 장 시간 토론하고, 제가 중대한 결심을 해야 했습니다.
제가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쳐야 되는구나, 그리고 결심을 하고, 장로님들이 격려해 주시고, 힘을 모아서 교회를 세워가자는 그 격려에 힘 입어, 다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뒤에 수 많은 어려움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죽기로 결심하니, 세상 말로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나 죽었다라고 결심을 하니,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아무 것도 안 들립니다.
뉴욕 타임즈, 데일리 뉴스에 매일 나오고, 한국 신문에 매일 욕하면서 나오고, 온갖 있지도 않은 소리를 정치적인 장난으로, 교회와 개인을 비방해도, 사람이 죽기로 결심을 하니까 그것이 하나도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도 들리지도 않고, 하나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면, 그런 과정을 우리가 다 지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 여러분도 수고 하시고, 그 어려운 과정을 다 이기고, 묵묵히 동역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교회, 오직 주님과 교회, 오직 하나님과 교회만 생각하고, 여러분이 힘을 모아서 오늘이 오게 된 줄 믿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위대한 연단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 역사를 이루실 준비를 갖추시고, 새 일을 시작하실 줄 믿습니다.
사실, 그 때 여러분들과 장로님들이 막아주고, 보호자가 되어주지 않았으면, 저는 일찍 교회를 사임하고,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지켜주시고, 막아주시고, 보호해주시고, 그리고 힘을 주었기 때문에 오늘 이 하나님의 역사에 함께 참예하게 된 것입니다.
할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 재판할 때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중에 오는 것은 더 좋은 것이 오고, 천천히 오는 것은 더 귀한 것이 옵니다.
여러분이 지금 연단과 시련 속에 있어도 여러분은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느 분이 아주 어려운 연관과 시련에 고생하시는 거 같아서 e-mail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쇠를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풀무 불에 넣습니다.
풀무를 푹푹 해서 불을 뜨겁게 하면 쇠가 새빨갛게 됩니다.
그것을 망치로 여러 번 모양을 만들어 가며 두들깁니다.
그것을 쓸 만한 연장으로 만들기 위해 치게 됩니다.
조금 있으면 식어져, 다시 뜨겁게 달구고, 연단을 한 다음에 불에 넣었다, 물에 넣었다를 반복하여 날이 강하게 세워지면 숫돌에 갈아 아주 칼날이 좋은 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좌우에 날샌 검이 되어서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무기가 되는 거처럼 어려운 문제와 시련이 있다면, 아직도 연단 속에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예수 안에는 저주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의 피로 용서함 받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연단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쓰시게 될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두어 번 두들기면 금방 식습니다. 그러면 이제 연단은 끝이 났나 보다 하고 도로 마찬가지로 됩니다. 아직 덜 되었습니다. 그러면 갖다 넣고, 계속해서 두들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런 연단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큰 일을 맡기시고, 큰 일을 할 수 있는 교회가 된 줄 믿습니다.
교회가 그런 경험을 했다면, 여러분 개인도 그런 경험을 하시고, 그 경험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교회에도 역사할 수 있다는 것처럼, 여러분의 생애에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연단 후에 강하게 하시고, 반드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또 다른 인물,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브리스가는 여자이고, 그의 남편은 아굴라라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바울 사도가 아주 칭찬하면서 그의 이름을 붙이기 전에 저들은 나의 동역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역자, 사도 바울에 비친 이 내외는 복음 안의 동역자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는 처음에 천막을 만드는 세상의 일에 동역자가 되었는데, 후에 보니 복음을 전하는데 동역자가 되었고, 나중에 보니 영적인 사명에도 동역자가 되어서 일생 동안 사도 바울과 팀이 되어 일했던 것입니다.
동역자라는 말은 한문에서 나온 말입니다.
同役者 일할 때에 같이 일하는 사람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fellow workers라고 했는데, 그것은 일을 같이 하는 동역자, 우리가 쉬운 말로 하면 동업자입니다.
같이 시간 내어 투자하고, 사업하고, 이익을 내는 것을 사도 바울과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동업자가 같이 했다는 그 동업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동업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역자의 위치는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수고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앉아서 잔 소리와 비판만 하고, 한 사람은 일만 한다면 그 동업은 파업되는 것입니다.
동역자라는 것은 같이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함께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집에서도 늘 같이 일하고, 서로 수고하고, 서로 인정하고 격려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동역자가 되어서 집에서도 돕고, 협력할 때에 집안도 잘 되고, 사업도 집에서 서로 서로 도와가며 이해하고, 믿어주고,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고, 양보하고, 격려해주고, 밀어 주면, 회사도 잘 되고, 사업도 잘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업이라고 하는 것은 가정이나, 사업이나, 서로 같이 수고하고, 시간을 같이 내고, 마음을 쏟고, 힘을 써야 동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동안 주 안에서 좋은 동역자로서 보호자로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 역사를 위해 우리가 마지막으로 위대한 동역을 해야 될 시간이 온 줄 믿습니다.
동역자는 같이 일하고, 목숨을 같이 내 놓고 함께 수고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위해서 우리가 이제 동역할 필요가 있으며, 전에 어느 시간 보다 우리는 위대한 동역자들이 필요한 시간이 된 것은 이제 성전을 짓고, 세계 선교를 할 때에 수 천, 수 만의 어린 아이들, 이미 만 명의 어린 아이들에게 우리는 일생에 영향을 줄 교육을 시키며,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십 만 명, 백 만 명, 천 만 명, 여러분! 이 지구상에 가난한 아이들의 얼굴과 눈빛에 꿈과 소망을 줄 때까지, 이 지구상에 괴로움과 고통과 교육받지 못한 수 많은 어린 아이들의 얼굴과 눈 빛에 희망과 웃음과 사랑을 줄 때까지 우리는 이 위대한 역사를 계속해야 될 줄 믿습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 감사합니다.
새 역사를 시작하시고, 연단 후에 우리를 동역자로 세워주셔서, 이 일을 감당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들에게 꿈과 비전을 주셨으니, 우리의 힘과 마음을 다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 안의 동역자 III
롬 16장 1~4절 / 김남수목사
2004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역사적인 순간에 서 있으며, 세계적인 도시에서 한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할 중대한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런 중대한 시간에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해 드릴 것인가?
베들레헴 성전을 완성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금년에 끝내고, 또 맨하탄 성전과 세계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여는 큰 꿈과 비전을 시작할 역사적인 순간에 우리는 서있으며, 그 일을 위해서 힘써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해야 하며,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것인가? 하는 여러 가지 말씀을 성경에서 드리면서, 자원하는 심령으로 해야 한다, 억지로나 강제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뜨거운 마음으로 기쁨으로 해야 한다, 또 사심 없이 Purity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 드려야 한다 하는 말씀을 지난 시간까지 드렸습니다.
오늘은 충성된 마음으로 일 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로마서 16장1절부터4절의 본 문에 두 가정이 나오는데, 하나는 신실한 자매 뵈뵈라는 사람과 아주 자주 내외가 언급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는 한 신앙 가정을 소개하면서, 나의 보호자, 나의 동역자라는 단어를 쓰면서, 사도 바울이 저들의 높은 신앙과 신앙 인격과 봉사와 삶을 잘 칭찬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큰 일을 할 때는 일을 할 수 있는 일꾼이 필요한데, 그 일을 할 때의 자세는 충성된 신실한 일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 늘 지켜주고, 늘 막아주고, 울타리를 쳐 주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잘 지켜나가고, 하나님의 사역이 방해 받지 않도록 보호막이 되어서 늘 지켜가는 동역자, 함께 수고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합니다.
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내외입니다.
아주 신실한 부부인데, 사도 바울과 세상 직업에 동업을 했다가, 후에 복음 사역에 동역을 하고, 마침내는 사명적인, 영적 사명을 위해서 동지가 되고, 마침내 생명을 함께 나눌 이런 동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죽을 만한 위험이 있을 때, 그를 피신시키고, 그 자리에 자기가 가서 죽음을 무릎 쓰고 사도 바울을 지켜 나갔던 신실한 종으로, 사도 바울은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그런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다는 깊은 감동의 이야기 인 것입니다.
그 충성이라는 말, 목숨을 내 목을 위해, 자기의 목을 내 놓았으며, 내 목숨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 놓을 만한 충성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충성되게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한문은 참 뜻이 깊습니다. 충성이라는 말은 가운데 中에 마음 心을 넣으면 忠 자가 됩니다.
마음 깊은 곳에, 마음 가운데에 있는 생각,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사랑, 마음 깊은 곳 중심에 있는, 여기서 충성이 시작되고, 誠은 말씀 言에 이룰 成입니다.
그 마음 깊이 있는 것을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고, 그 말한 것을 끝까지 지켜 나가는 것, 이것이 충성이라고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 충성심, Loyalty가 하나님과 그의 교회,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우리는 반드시 충성심이 있어야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목숨이라도 내 놓을 수 있는 충성심이 바로 저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충성되게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말한 것을 지키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고대 희랍의 아리스토 파네스라는 사람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 부부를 연령별로 구분해서 10대, 20대, 30대로 나누었습니다.
10대는 오렌지 맛과 같다, 설 익은 사랑이죠.
20대의 사랑은 무화과 같다, 달콤한 사랑입니다.
30대는 올리브 맛이다, 떨떠름하지만, 자꾸 씹으면 몸에 좋다고 해서 그렇게 말했나 봅니다.
40대는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에서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부부여 라는 노래를 보면, 20대는 멋 모르고 서로 좋아서 사랑을 하고 살고, 30대는 눈 코 뜰새 없이 서로 바쁜 가운데 사랑하며 살고, 40대는 싫증이 났지만, 서로 버리지 못해서 같이 살고, 50대는 가엾어서 같이 살고, 60대는 지금까지 같이 살아 준 것이 고마워서 같이 산다고 합니다.
이것이 동양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 마음 먹고,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사랑이 일생 동안 괴로우나, 즐거우나, 슬프나 늘 변함 없이 평생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심이고, Loyalty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주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나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 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나와 나의 삶과 나의 생명까지라도 그리스도에게 바치기로 결정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를 위해서 충성하며,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할 때, 그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물론 충성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입니다.
제일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작은 일에 충성하라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
우리가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해서는 안되고, 큰 일이라고 신나게 해서는 안 되고,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충성되고 변함없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큰 일하면 충성하기 쉽습니다.
목사를 하면 주일날 안 빠집니다.
내가 힘이 들다, 오늘 좀 쉬자, 다음 주에 가지 하며, 목사가 빠질 수 없습니다.
목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내내 힘 들게 일하고, 피곤한데도 주일 한 번 빠지면, 주님 섭섭하시다고 생각해서 부지런히 나와서 전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이 작은 일의 충성이 쉽지 않은 것인데, 주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사실, 이 작은 일이 더 어렵습니다.
장로님이 주일 결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말 주일 학교 어린이들은 오늘 힘이 드니 집에서 쉬라고 하니, 기침이라도 하면 집에서 쉬라고 하니, 기침하면 평생토록 기침 하면 교회 안 가는 줄 알고, 일생 동안 그렇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작을 때부터 배워 나갈 때, 평생 충성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 한 것을 큰 일에 충성한 것과 동일하게, 오히려 더 중요하게 칭찬하시고, 상을 주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헌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조금만 헌금한 것이 교회에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일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꾼이 되어 충성되게 하나님의 일을 하자는 결심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맡은 일에 충성하고, 오늘도 보니, 밖에 찬 바람이 부는데, 늘 충성하시는, 늘 안내하시는 분들 아마 귀가 떨어 져 나갈 것 같은 추위에도 차를 안내하시고, 봉사하시는 분들 보면 참 충성스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추우나, 더우나, 괴로우나, 즐거우나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그 충성이 작은 것에 충성하고, 그 다음에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내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생명을 바쳐 죽도록 충성하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를 쓰면서,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쓰고, 편지를 썼습니다.
장문에, 옥중 서신, 목회 서신, 일반 서신이라고 하는 로마서부터 여러 책을 쓰는 마지막 책에 마지막 말을 다 하고, 그의 글을 끝내게 됩니다.
그는 공식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깊이 감추어 있던 깊은 말을 이야기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를 떠났다.
지금 나 혼자 있다. 겨울이 오는 데, 가죽 옷과 성경을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다 떠났다는 이야기를 두 번, 세 번합니다.
어떤 사람을 세상을 사랑해서 떠났고, 어떤 이는 이런 저런 이유로 다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음 깊이 외로움을 느끼면서, 충성심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과 동행하는 것은 피곤합니다.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는 곳 마다 돌 맞고, 가는 곳 마다 옥에 갇히고, 목숨이 위험을 받고, 그렇게 어려움을 겪습니다.
지금도 옥에 갇혀 있습니다.
평생 수고해 보아야, 좋은 일이 없으니까 얼마나 사람들이 낙심했으면, 모두 다 노 사도를 두고 다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충성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최후의 생명까지라도 바칠 수 있는 각오와 결심이 충성인 것인데, 이 결심을, 이 충성을 주님은 주님께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이라도 바칠 수 있어야 됩니다.
사실, 인생은 지나갑니다.
요즘, 김 동길 교수의 테이프를 들어 보면, 막 말을 합니다.
목숨이 몇 개 있는지 모릅니다.
이 분은 말하고 싶은 대로 막 말을 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막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사람이 죽을 자리를 찾았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이냐.
나는 죽을 각오를 했다. 내가 죽을 자리를 찾았다.
내가 조국과 민족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내가 생명을 바칠 자리를 찾았기 때문에 나는 자랑스럽다고 말을 합니다.
사실, 죽을 자리를 찾아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우리의 삶을 바치다가, 마침내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바칠 수 있다면, 이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며, 나의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평생토록 섬기고, 그리스도를 교회를 섬기고, 보호하고, 일하다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내 생명을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은 충성이며, 영광인 줄 믿습니다.
사실, 사람은 그냥 지나갑니다.
성경은 세상이 얼마나 빠른지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 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노래에도 있듯이 나그네 길이라고 했습니다.
(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 십 년 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나그네 길이라고 표시했습니다.
나그네는 정처가 없고, 어디 정착을 못하는 인생인데, 인생이란 어디 하나 정착을 못하고, 그저 이렇게 저렇게 하다 가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는 이렇게 인생을 말하기를 (사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인생이란 낙엽 지는 한 잎사귀 같다고 말했습니다.
봄에 꽃이 피고, 잎이 나고, 무성하고, 가을에 낙엽 져서 바람에 뒹구는 낙엽과 같이 한 잎사귀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또 시편 기자는 손 넓이라고 말했습니다.
(시39: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 이다{셀라}
인생의 길이가 한 자로 재서 한 뼘 정도의 손 넓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이 그렇게 짧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도 33세에 뉴욕에 왔는데, 금년이 환갑입니다.
저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인생이 이렇게 빨리 갔으며, 세월이 어떻게 이리 빨리 지나갔는지, 참 금방 지나간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욥은 꿈과 같다고 말하고, (욥7: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인생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베를 짜 보신 분은 알겠지만, 가로 세로로 틀이 빨리 왔다 갔다 하며, 가로 세로로 교차하며 베를 짜는 것인데, 젊은 분들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인생은 안개, 풀, 꽃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인생은 풀과 같아서,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 지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은 빨리 지나가는데, 정말 내가 누구를 위해 살며, 내가 누구를 위해 충성을 하며, 내가 누구를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치며, 내가 누구를 위해 나의 삶에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칠 수 있겠는가?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남겨두신 교회, 주님의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우리의 충성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각 사람이 사역하고, 봉사하는 입장도 여러 가지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사역할 수 있는 그릇도 다릅니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릅니다. 탤런트도 다릅니다.
그러나, 자기가 맡은 곳에서 충성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충성이라는 것입니다.
캐나다 퀘백의 한 작은 교회는 무려 52주 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교회의 종을 친 평신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52년 동안을 꾸준히 종을 치면서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고, 충성되고, 신실하게 자기 맡은 일을 잘 한 것이 주님 보시기에 충성스럽다고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의 천정에 대단한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허리를 늘 뒤로 젖히고 작업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허리가 굽지 않고, 뒤로 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친구가 지나가다가, 도대체 누가 본다고 그렇게 세밀하게 시간을 투자해서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래서는 손도 안 보이고, 대충해도 되는데, 누가 본다고 공을 들이냐고 말했더니, 미켈란젤로는 내가 보고, 내가 안다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안 보고, 아무도 몰라도 나는 보고, 나는 안다.
내가 충성하고, 내가 알고, 내가 보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누가 보나, 안 보나, 알아 주나, 안 알아 주나 충성되게 일해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지을 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룰 때, 우리는 충성된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책망 받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사람으로 보면, 대단히 똑똑한 사람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와서 하는 말이 (마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다른 사람은 다 감사함으로 많은 이익을 남겨서 주인에게 가지고 와서 칭찬을 받았는데, 하나를 가지고 와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충성과 불 충성의 차이는 여기 있습니다.
충성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실, 보십시오. 누가 어디 가면서 몇 만 불을 맡겨두고, 이것으로 장사를 해서 잘 이익을 남겨, 당신도 부자 되고, 원금과 이자는 나에게 주십시오, 라고 하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냥, 주야로 지켜 보는 것도 아니고,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맡겨 놓고 갈 정도가 되면, 고마운 일인 것입니다.
그만큼 신뢰했고, 믿었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하고, 부지런히 일해서 감사함으로 가져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불 충성한 사람은 사람을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당신은 나쁜 사람이라. 인색한 사람이라. 그렇게 해서 불평과 비판과 사람을 좋지 않게 보는 것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고, 책망 받는 분야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좋게 보는 것은 축복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각은 중요합니다.
충성과 불 충성의 차이는 여기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좋지 않게 평하는 것입니다.
또 불 충성은 부정적인 감정이 많습니다.
두려워서, 나가서 실패할까봐, 마음이 어둡고 두려워서 좁아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걱정과 긴장과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어둠이 떠나가고, 성령께서 성령과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 시간에도 오셔서, 여러분이 조금 잘 못하면, 교회의 예배나 모든 일에 비판하기 쉽습니다.
예배는 축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소망이시고, 희망이십니다.
사랑과 희망과 용기와 생명이시며, 그것이 공동 묘지처럼 조용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울음이 있고, 웃음이 있고, 뛰는 문제가 있듯이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항상 축제와 같이 생동감이 넘치고, 용기가 있고, 사랑함도 있는 것입니다.
무질서가 아닌 거룩한 무질서가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충성심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변함없는 일편 단심, 주님을 생각하고, 충성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 불 충성은 미련하고 게으르다는 책망을 듣게 됩니다.
(마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리고, 아주 주관적입니다.
주인을 자기의 좁은 소견으로 함부로 해석하다가, 주인의 책망을 받습니다.
(마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 말은,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고, 왜 네 멋대로 나를 해석하느냐는 것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은, 그에게 준 한 달란트를 충성되게 하라는 말이지, 앉아서 주인을 판단하고, 해석하고, 정죄하고,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불 충성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한 달란트를 가져다 잊어 버릴까, 감추었다 도로 가지고 온 것은 스마트합니다.
주인에게 잘 못하면 혼이 나겠다, 혼이 나지 않는 방법은 잘 보관했다가 돌려 주면, 본 전은 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주님이 포인트 하시는 것은 주인을 긍휼과 자비와 인자와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 인정하고, 조금 실수해도 그것도 용서해 주실 줄 믿고, 좀 손해를 봐도 잘 했다, 애 썼다고 칭찬하실 그 분을 생각하고 부지런히 일하지 못한 이 악함을 책망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주 주관적이 됩니다. 그것은 주인을 괴롭히는 것이고, 주인을 분노하게 만들어서, 자기가 그것으로 책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볼티모어의 썬이라는 신문 기자가 만일 당신이 앞으로1년밖에 살 지 못한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며 대답을 공모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것이 당선되었습니다. 메어리 데이비스 리드라는 분이 당선 되었는데, 내가 만약1년 밖에 못 산다면, 남을 도우며 살겠습니다.
사랑하며, 베풀며, 축복하며, 보다 중요한 일을 하며,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게 하기 위해 웃으며 살겠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열심히 해서, 주님 앞에 설 때, 하나님 앞에 상을 받고 싶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겠다.
내 일생이1년밖에 남았던지, 아니면 하루밖에 안 남았던지 나는 이웃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며, 도움의 손길을 펴며, 그들을 이해하며, 은혜로우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 분이 내게 주신 하루 하루를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리라. 이것이 당선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365일만 남았다고 하시면, 과연 여러분께서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계속해서 소처럼 일하시겠습니까?
그냥 놀고만 있겠습니까?
365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다가 주님 앞에 365일 마지막 날을 맞아야 될 것입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의 집에 잔치가 벌어졌는데, 누가 갈 것인가에 대해 동물들이 회의를 했습니다.
멍멍이를 불렀습니다. 요즘 주인의 기력이 몹시 쇠한 거 같으니, 보신을 위하여 탕으로 올라가주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개가 대답하기를, 내가 주인을 위하여 희생을 하는 것은 좋지만, 내가 없으면 누가 이 집의 재산을 지켜 줄 것인가? 밤에 도둑이 들면 내가 짖어야 하는데 안 된다고 했습니다.
동의 했습니다. 의장이 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닭에게 삼계탕은 어떠냐고 물렀습니다.
닭은 내가 가는 것은 좋지만, 내가 아침에 일찍 시간 맞추어 울어야 주인이 깨시고, 일어나야 나가서 일을 하시니 내가 이 집에 꼭 필요하다. 누가 알을 낳아서 주인을 줄 것이며, 누가 아침마다 시간 맞추어 주인을 깨어 줄 거이냐고 했습니다.
다음 순서는 소에게 넘어 갔습니다.
아무래도 네 갈비로 주인을 대접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잔치 상에 갈비가 제일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소 역시 변명을 했습니다. 이 집의 농사를 누가 지으며, 이 많은 농토를 누가 일구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소도 지나갔습니다.
돼지에게 삼겹살로 주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돼지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비장한 각오로 알겠습니다. 죽을 짐승은 저 밖에 없네요.
가마 솥에 물이나 끓이십시오. 라는 아이들의 재미있는 동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겠습니까? 무엇에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하겠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 목숨이라도 내 놓을 수 있는 이런 결심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윌리엄 보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큰 목장을 경영하는 부호였습니다.
고등 학교 때 여행을 보내서, 세계 견문을 넓히려고,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를 보냈는데, 그 때 결심을 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은 그 곳에 가서, 저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평생 바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안 쪽 표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No Reserve,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고, 나의 삶 전부를 바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예일 대학을 나오고, 프린스턴 신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부모에게 물려 받은 수 많은 유산을 이슬람 선교를 위해 하나님께 헌금하고, 그는 애굽으로 건너갔습니다.
사람들은 하필이면 왜 그 어려운 곳에 가서 사서 고생을 하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수 없이 들은 그는 No Retreat는 단어를No Reserve말 밑에 썼습니다.
후퇴, 철수, 은신, 피난, 도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 가서 젊은 나이에 병이 들고, 뇌막염에 걸려서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 세 번째 글을 썼습니다.
No Regret 후회함, 뉘우침, 회한, 아쉬움, 유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남김 마지막 유서에도 No Reserve, No Retreat, No Regret을 그의 비문에 썼다는 것입니다.
(마25: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기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쏟아 주신 주님!
이제 우리도 주님을 위해 살아 드릴 뿐만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위해 내 생명이라도 바칠 수 있는 충성됨과 신실함을 우리 마음에 주셔서 하나님이 맡긴 위대한 사명, 잘 이루어 드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