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이 개혁을 논함에 있어 원시복음적 성경의 진의를 향해 내딛는 것은 장로의 유전과 전통에 반하는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것에 대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고 지적하는 등 여러차례 경고함을 봅니다(제자들도 성경 여러곳에서 경계). 여기서 말하는 유전이란 유대교의 전통적 사고관이 가치관의 바탕위에 선 일종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개혁을 논함에 있어 '목사 제도가 잘못되었다. 헌금제도가 잘못되었다. 직분을 돈을 주고 산다. 교회가 물질적 재산 가치를 너무 추구한다.......'등의 지적은 이미 그것이 갖고 있는 가치 체계가 하나의 유전과 전통이 된 가운데 성경적 진리의 본질을 재현하지 못하는 갈증을 믿는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을 들여다보면서 지금 기독교는 심층부에 메스를 들이 대어야 할 중병에 걸려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껍질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낡고 헤어진 껍질을 벗는 것에는 추호의 아쉬움도 있어서는 안되지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예수님의 본래 의도로 귀의 하는 것일 것입니다. 개혁이란 있던 껍질(즉, 가죽)을 벗어버리고 새로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던 것을 좀더 좋게 고치는 것은 개혁이라기보다 혁신이라고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숫자나 세력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날때에는 가차없이 버리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노아의 때가 그러했고, 소돔과 고모라가 그러했고, 광야생활이 끝나고 소수만 가나안에 들어갈 때가 그러했고, 유대교의 용도폐기를 알린 세례 요한의 때가 그러했고, 예수님께서 겨우 제자 열둘과 시작한 하나님나라가 그러했습니다. 이 점은 상징적으로 열처녀 비유에서 뼈저리게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1. 왕으로서 오신 예수
조직 신학에서나 전통 신학자들은 종종 기독교는 (일반적 의미의)종교가 아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 이유는 여타 제반 종교들이 사람이 신이라는 존재를 찾아가는 형태를 취하는데 반하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거꾸로 찾아오셨고(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교회를 통해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또는 내 자신)와 항상 동행하시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성경적인 표현이며 하나님의 '임마누엘(항상 너희와 함께 하겠다)' 언약을 이룬 내용 그대로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교훈의 예를 보면서도 그러한 습성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성경에서는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날 갑자기 눈을 떠보니 하나님의 진리보다 목사의 판단이나 말이, 하나님의 정의보다 교단이나 교파의 입장이, 성경의 요구보다 종교적 요구사항이 우선시 될 때에 우리는 노아의 때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돌아봐야 합니다.
평소보다 서설을 장황하게 말한 것은 오늘날 기독교가 잘못된 근본 원인을 놓고 지엽적인 것을 논할 것인가 뿌리 부분을 논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해야 되기 때문에 뜸을 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그 잘못된 원인의 뿌리격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기독교가 뭍 종교들과 별반 다를바 없는 '종교화'되었기 때문임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듯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우선 그 오심은 유대인들에게만 차별적으로 예언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를 메시아 라고 했지요.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은 오랜 세월동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전쟁, 피난, 노예생활, 소수민족의 설움등으로 지치고 지친 가운데에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아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민족 대대로 전래 되었습니다. 모든 눈물과 고통을 보상 받을만한 강력한 왕을 그들은 기다렸습니다. 이렇듯 메시아라는 단어는 the Messiah is the King of theJews 로서 정치적인 왕이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들의 기다림은 전혀 뜻밖의 상황에서 어긋나고 맙니다. 또는 그들의 기대가 하나님의 초월적 경륜과 온도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의 오심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인식이 나타난 장면은 별의 안내에 따라 동방박사 세사람이 그들앞에 나타나고부터 입니다. 동방박사 세사람도 당연히 그들이 경배하고 싶어서 먼길을 찾아온 왕은 왕궁에 태어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따라오던 별이 사라지자 왕궁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분봉왕 헤롯은 자신의 왕가를 위협할 수 있는 왕을 제거하기 위해 무차별 살해 지시를 내리게 되었고 더구나 매우 깜짝 놀랄 대목은 동방박사 세사람이 메시아가 태어날 곳을 묻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은 베들레헴이라는 구체적 지명까지 알려줍니다. 그러면서도 조상 대대로 기다려온 그들의 메시아를 단 한사람도 영접하러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멀리 이방나라에서 온 이들이 그들을 영접하는 행운을 갖게 되지요.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면서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현재 우리들 모습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세상왕 헤롯에 빌붙어서 성경이 말하는 지식을 머리로는 알기는 다 알지만 몸으로는 말씀에 헌신하지 않고 입만 살아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전통 유대인의 핵심 그룹인것처럼 스스로 자칭 유대인(또는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낮고 누추한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있는 예수님을 찾지 않으려는 것과 매우 닮았습니다. 화려한 궁전, 화려한 예배당에서 성경지식쑈와 종교적 퍼포먼스에 감동하면서 정작 예수님이 계시는 낮은데로 가지 않습니다.
세상왕 헤롯,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주변인들이 있는 곳이 종교의 자리라면 우리 누추한 삶 가운데 직접 오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왕이었습니다.
2. 교주가 아닌 왕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
왕과 교주는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된 500년 기독교의 유전 때문에 이것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우선 종교라는 것은 교주를 필요로하는데 왕으로 자리해야할 예수님은 기독교의 교주로 강제로 앉으신 형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결코 종교의 교주가 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닌데 이상하게 이것을 이야기하면 이를 드러내고 싫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아무리 성경의 진의를 이야기하려 해도 종교의 인이 박히면 빼내기가 몹시 힘이 듭니다. 인이라는 것은 뼈를 구성하는 물질인데 뼈속 깊이 박혔으니 그것이 쉽게 빠질리가 없기는하지요.
예수님의 오심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
(마태복음 20:28)
에서 그 의도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섬긴다는 표현을 씁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또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마태복음 20: 26)라고 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야고보서 등등)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은 이처럼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너희중)약한자와 더불어 살고 자연스럽게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신 것입니다(교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목적이 이러할진대 우리는 전혀 다른 길로 갔습니다. 4복음서도 편하게 주시해보면 다양한 가르침과 사역의 내용들이 어렵고 딱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보실핌을 나타내신 것이지 어떤 새로운 종교 문화(기독교식이나 카토릭식이 아닌)를 전파하러 다니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 목적은 자신의 기적과 이적을 통하여 자신이 섬김의 대상으로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김없이 주고 죽음을 통해서까지 그러한 삶의 방법이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구현 방법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 오신 것이아니라 나라("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며")의 목적 때문에 오신 것이며 나라란 삶의 내용을 규제하는 것으로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우리 피조물이 서로 돕고 사랑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정의 자비와 믿음이 구현되는 삶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더러 백성이라고 칭하지 (종교의)신도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이는 똑바로 살아라!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나라(천국)가 세상나라와 다른 점은 하나님나라는 물리적인 영토를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과 세상 나라는 태어나면 자동으로 어느나라의 국민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는 거듭나지 않으면 그 나라의 국민이 되지 못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종교적 엑스터시나 흥분상태 또는 신비적 몰입감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래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피조물로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자신 뜻대로 살았던 방식을 그리스도의 요구대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소극적 자기사랑의 세계에서 적극적 이웃사랑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을 뜻합니다. 그 세계가 바로 왕적 제사장 역할의 수행이며 제사장이란 이웃을 위해 하나님앞에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왕이었던 그리스도는 역설적 왕으로서 섬김과 숭배를 요구하는 왕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보살피고 돌보는 착한 왕입니다. 이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이것을 표현하기를 "천국을 침노한다(짓쳐 들어간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적극적 사랑의 법인(율법에 반하는) 산상수훈적 이웃 사랑으로 명문화(하나님나라 헌법 같은 의미)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백성, 하나님나라 백성이란 산상수훈적 삶을 실천하고자 애쓰는 적극적 이웃 사랑에 빠져드는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은 삶의 방법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돕는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3. 하나님은 종교를 싫어하신다.
먼저 종교란 무엇일까요?
한국말로 종교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초월적 대상을 향한 인간의 숭배와 그런 결과로서 행복을 추구하는 정신문화 양식'
영어 religion의 사전적 정의는
Religion is belief in a god or gods and the activities that are connected with this belief, such as praying or worshipping in a building such as a church or temple.
(신, 혹은 신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절이나 건물에서 기도하거나 예배등을 하는 믿음과 연결되는 활동.)
성경 속에서 종교가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봅시다. 이것은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 차용된 것은 아니고 라틴어에서 유래했고
성경에서 4번 사용하였습니다.
- 갈라디아서 1장13,14절 : 유대교를 Jews' religion
- 야고보서 1장 26,27절 : Religion을 한글성경은 경건으로 번역 this man's religion is vain ※저는 의도적 오역으로 봄
- 사도행전 25장 19절 : superstition의 의미로 사용 superstition = 사교, 이단, 미신적 행위
- 사도행전 26장 5절 : (과거에) 우리 종교 곧 유대교를 의미
이처럼 성경에서는 종교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religion 또는 superstitiousness는 어떤 불가항력적 사건이나 삶의 문제를 가지고 공상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미신적 습성을 뜻하고 성경은 이것을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잘못된 부분이나 여하한 종교의 공통적 부분은 인간이 신을 찾아가 무엇인가를 빌고 바라는 것인데 이것은 복음과는 사뭇 입장이 다릅니다(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아들되신 초월적 대상이 인간의 모습으로 직접 찾아온 것으로 일반 종교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임마누엘(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의 의도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성령)께서 이미 우리 존재 안에 와 계시는데 왜 우리는 몸 밖에 있는 알지못할 신을 향해 반복된 예배의식을 하면서 위안을 얻으려 할까요? 몸 안에 있는 하나님은 무시하고 이방 종교인의 습성처럼 신당에 가서 정기적으로 절하고 빌어야 하는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그러한 폐습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감사헌금과 십일조가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 나는 너희의 시간을 맞추어 행하는 의식을 지켜보기에 지쳤다."
"교회 기념일과 주일을 지킨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도 나는 싫다.
그러니 제발 거룩한 모임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거짓된 모임을 가지는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
"내 마음이 너희의 종교 기념일과 정한 예배 날짜를 싫어한다. 그것이 내게 무거운 부담이 되어 내가 버티기 힘들다.
너희가 손을 들어 나를 부르려 하면 내가 눈을 가린다." [ 이사야서를 현대적 상황으로 약간 각색]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11]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편 51:1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13]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태복음 12:7]
종교와 하나님나라의 근본 차이점은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하나님나라는 하나님 또는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자꾸 이것을 혼동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인간의 필요성을 먼저 떠올려서 그런지 '나라'라는 단어 자체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필요를 하나님의 필요처럼 착각하여 우리가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자꾸 혼돈하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종교 의식을 필요로합니다. 또한 종교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사제와 종교건물이 필연적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것 처럼 기독교의 제의식도 하나님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사적으로 우리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부분은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칙령(AD313년)에 따라 카타콤의 교회가 박해의 위협에서 벗어난 것은 맞지만 로마교회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로마교회의 주류를 형성한 것은 카타콤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님나라 진리를 전파하려던 사람들이 아니라 태양신을 숭배하던 미트라교나 이방종교의 사제들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이 간판만 바꾸어 달은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그럴듯한 제의식을 확립하고서 전문 변론가나 소피스트들이 직업적 설교꾼으로 등장하여 소위 '강론'(가르침, 설교의 유래)을 형식화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로마교회가 초대교회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님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카토릭을 그대로 간판만 바꾸어 달은 것이 현대의 개신교입니다. 그러므로 카토릭의 의전과 개신교의 의전이 성경적 요구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님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는 종교 사제들의 훌륭한 밥벌이 도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성경에서 요구하는 복음 세계와 기독교가 추구하는 방향은 현상적으로 너무 상이해졌습니다.
4. 아! 하나님나라여
출생 : 예수님의 오심은 구약에서 예언한대로 유대인의 왕인 '메시아'로서 태어나셨고
예고 : 세례 요한이 메시아 왕국이 시작됨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면서 하나님나라가 예고되었고
사역 : 예수님은 시골 갈릴리의 후미진 곳에서 산상수훈의 하나님나라 법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시작하셨으며
정점 : 유대교 지도자의 음모에 따라 국가전복(또는 반역) 혐의를 받고 재판받아 십자가형을 받았고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나셨으며 왕으로 사셨고 그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도 가족도 따르던 이도 모두 떠난가운데 하나님나라를 흠모하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부활을 예비하면서 극적 대반전이 시작됩니다. 그것을 일컬어 첫 열매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이 과정 속에는 종교적 냄새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는 종교 교주의 모습이 없습니다. 오직 왕으로 왔고 그의 백성을 인도해 내기 위하여 장렬히 십자가에서 산화하였습니다.(왕의 본분은 군림하고 세금이나 착취하는게 아니라 다스리고 보호하는데 있음)
예수님의 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며......"
"너희는 가장 먼저 하나님나라와 그의 정의를 찾아라(SEEK)" 예수님의 염원도 명령도 모두 나라에 촛점이 있습니다.
4복음서는 온통 '나라'에 대한 이야기들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중심 줄거리 자체가 '나라'입니다. 그러나 너무 애석하게도 현실은 '나라'나 '왕국'을 말하면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이를 드러내면서 싫어하는 것은 도무지 왜 그럴까요? 아마도 이것은 성경적인 지식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종교라는 틀에서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학습한데서 오는 생소함으로 생긴 갈등으로 여져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라란 무엇일까요?
나라라는 것은 통치자와 통치대상(백성), 그리고 나라의 정체성을 담은 헌법이 삼요소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종교는 교주, 신도, 교리가 삼요소입니다.
둘의 목적은 다릅니다. 하나님나라의 목적은 백성들이 하나님나라의 법에 따라 통치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 출발점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종교의 목적은 출발점이 인간의 종교적 욕망 충족 입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교주가 필요하고 그것을 합리화 하기 위해 교리가 갖추어집니다. 예수님이 종교의 교주가 되기를 원하시고 있으실까요?
하나님의 의도는 자신의 피조 세계인 이 지구가 원래 창조의 그 지으신 목적대로 인간의 삶이 통치되기를 바라시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숭배 받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자신의 의도를 뚜렷하게 상기시킨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이 땅에 예배당을 퍼뜨리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서로 돕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와 신뢰를 바탕으로 창조의 피조물들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의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지난번 짐승의 예배를 상기하면서 봐주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요한계시록 17:17]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시점에서 드디어 그 짐승의 전횡은 끝날것입니다.
by 하나님나라 빌더 -iDeaRush-
첫댓글 4복음서에는 천국-천당이 아닌-에 대한 말씀이 무수히 있습니다!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요.. 그리고 '종교의 영'.. 이게 무서운 것이지요.. 열정도 기쁨도 뺐어갑니다!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교류도 어렵게 되지요..
그러게요. 한국사람은 유독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앞뒤 안따지고 원수가 되려고 하지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성취되어 갈 것입니다.
오랬만에 iDeaRush님글 반갑습니다.
성경은 영적인 글인것을
자꾸 세상것과 연결 시키려는
무리들이 문제이지요...
네 반갑습니다. 세상을 선도하고 리드 해야 하는 빛과 소금된 우리들이 오히려 세상 기준을
쫒고 있다면 반성 해야 할 문제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