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수필을 말한다
김 상 립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이후부터 시작된 여행바람은 2000년이 지나면서 더욱 거세져 그 기세가 대단했다. 여행은 국민들의 소중한 꿈이 되었고, 버킷리스트에도 여행이 상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젊은 이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택하기도 했고, 신혼여행도 웬만하면 외국으로 나갔다. 사진전문가들은 오지를 여행하며 그 기록을 책으로 제작하였고, 여행가이드란 직업도 빛을 보게 되었다.
이런 추세에 따라 여러 TV방송국에서는 여행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었다. 기행 물 방송은 잘 편집된 영상과 성우들의 낭송이 깃들어져 더욱 인기를 끌었다. 또 여행 프리렌스 작가들의 활동도 왕성해져서 그들의 기록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에 뒤질 새라 세계의 유명관광지들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여러 나라 언어로 만들어진 여행안내서를 내놓았다. 이런 책자들은 과거와는 많이 달라져 고급화, 다양화 되고, 상세해 졌다. 거기다가 일반 여행자들조차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며 여행관련 글들은 차고 넘친다.
문인들도 문학기행이란 이름으로 국내나 국외로 단체여행가기를 즐긴다. 수필가들이 보통사람들과 다른 점은 여행길에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문학작품으로 남긴다는 것일 게다. 어쩌면 잘 쓰기가 어려운 글 감인데도, 작가가 직접 체험한 일이니, 일단은 확실한 소재라 여기고 너나없이 쓴 결과일 게다. 하지만 요즈음 발표되는 작품들 중에는 굳이 기행수필이라기보다 그냥 기행일지라고 불러야 알맞을 글들도 있고, 배경이나 내용이 서로 엇비슷한 경우도 눈에 띄어, 다른 여행관련 글들과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수필은 주제가 있는 글이다. 주제와 연관성을 가지고 일관되게 글이 진행되지 않으면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여행을 소재로 하여 얻은 여러 다른 얘기를 한꺼번에 옮기려다 보면, 자칫 횡설수설 하게 되어 알맹이가 없는 글이 되기 쉽다. 또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지역을 이미 여행했을 수도 있는 내용을 다루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만의 주제를 설정해야 차별화가 가능할 것이다. 각 나라의 역사를 쓸 것인가, 건축양식을 거론할 것인가, 음악이나 그림을 말할 것인가, 음식에 관한 것을 적을 것인가, 주민들의 생활양식을 주로 그려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여행지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정리해 보거나, 현지에 숨어있는 재미난 얘깃거리를 건져내어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도 좋으리라.
또 여행 일정상 여러 나라를 한꺼번에 돌아 보았다 하더라도, 전부를 적지 말고 가장 인상 깊었던 한 개 나라만을 선택하여 따로 작품을 만드는 것도 성공가능성을 높여주리라 본다. 또 작가가 택한 나라 중에서도 유독 정감 가는 도시만을 골라 잡거나, 이름난 곳이 아닐지라도 놓쳐서는 안될 소중한 얘기가 있다면 소재로 삼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또 길가에 나붙은 간판 하나에서도 그들의 문화를 읽을 수가 있을 것이요, 오가다 만난 이국의 보통 사람들에 대한 느낌도 유용하리라 본다.
작가가 제대로 된 기행수필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행지에서 겪었던 자기 체험이 독자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적기보다는 작가의 새로운 시각(視角)을 활용해야 한다. 예하면, 이름난 건물이나 멋진 다리를 보았다 해도, 있는 모양 그대로 쓰면 차별화가 어렵다. 건물 뒤편에 숨겨진 특성이나 주변 거리 얘기나, 다리부근에 서성이는 사랑 얘기를 함께 써주면 도움이 되지 않겠나 싶다. 기행수필에서는 대상을 재해석해 내는 노력이 글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행전문가들은 독자들의 입맛에 맞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보조수단을 활용한다. 그런 글들은 무조건 독자를 늘려 매출을 올려야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문학작품인 기행수필과 상업성으로 치장된 기행문을 굳이 구분하여 읽지는 않는다. 순수 예술과 실용작품은 애당초 거리가 있기 마련이지만, 독자들은 제게 유용하거나 재미있고, 취향에 맞으면 기꺼이 선택할 뿐이다. 수필가들은 이렇게 바뀌어진 기행수필의 입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부분은 과감히 시도해봐야 한다.
필요에 따라 사진도, 스케치그림도, 도면도, 부호도 사용하고, 형식의 변화도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다만, 글을 수필적으로 쓰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 요즈음은 직업적인 여행전문가 못지 않는 수필가들이 생겨나 좋은 기행수필을 쓰고 있다. 나는 그런 수필가들의 글을 일부러 찾아 자주 읽는다. 다양화 되어가는 세상의 흐름에 맞추어 자기 특기를 살려나가는 작가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고맙다.
나는 어디를 가든 그 곳에 있는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편이다. 설명되어 있는 내용을 따로 기록하지도 않고, 그냥 열심히 눈으로 보거나 만져서 감지한다. 가능한 한 많이 보고, 많이 느껴 그것들로부터 받은 감흥이 내 가슴으로 젖어 들기를 말없이 기다리다, 이제 되었다 싶으면 적절히 활용한다. 기행수필은 자연이나 문화의 흔적을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이 본분이 아니고, 대상을 넘어서서 인류역사를 관통하고 삶의 본질에 다가가는 자세를 요구하는 글이라 생각한다. 또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인종의 차이를 부각하기 보다는, 보편적 인간 삶의 진실된 모습이나 선을 지키기 위한 용기 있는 행동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애써야 할 것이다.
기행수필은 머리를 굴려가며 쓸 것이 아니라, 가슴을 데워가며 써야 할 글이라 생각한다. 이미 써놓고도 발표하지 못한 작품이 한 두 편이 아니니, 나에게서 기행수필은 참 어려운 글 쓰기다.
첫댓글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실내에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굴리는 일보다
여행지에서 발품을 팔며 다닐 때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생깁니다.
모름지기 수필가라면 많이 다니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참 어려운 글쓰기가 기행수필일 겁니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적 바탕이 있어야 하고 '재미'를 느낄려면 공격적인 여행자세가 요구된다고 할까요.
약간의 필력이면 누구나 쓸 수 있지만 현장감이 없어서 재미가 없는, 한마디로 쉽고도 어려운 장르이겠지요.
가이드가 하는 말, 풍경 묘사에만 그치면 누가 읽겠습니까.
요즘 시대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시각적인 요소가 필수적이라 '디카수필'이란 말도 생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