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을 읽다가 “소리에도 빛깔이 있어서 황색 목소리들은 노래를 부르고 흑색 목소리들은 껄떡거리는 반면 우리(흰색) 목소리는 말밖에 할 줄 모른다.”라는 문장을 보았다.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작가가 인종에 따른 문화 정체성의 차이를 단적으로 설명한 내용이다. 황색인들이 노래를 부른다는 표현은 문맥으로 보아 실제 노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어의 성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어에서 인토네이션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이나 베트남어의 성조는 그것보다 톤의 진폭이 월씬 크고 잦다.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흑인과 백인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 것은 브리티쉬 팝과 재즈 사이의 존재하는 뉘앙스 차이 정도를 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음악적 감성의 날을 좀 더 예리하게 다듬고 요즘 유행하는 K-pop을 들었다면... 무지개가 뜬 하늘 아래에서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고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들의 인종에 대한 편견을 깔끔하게 제거하고 “인간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좀더 넓혀”야 가능한 일이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마음에서 멀리 있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대개는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한다. 모순 같지만, 이해하려 할수록 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워지는 사람들도 한다. 한 개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행위로 드러난 사실을 근거로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가까운 사람일수록 냉정한 입장에서 파악하는 데에 방해가 될 요인이 개입될 때가 많다. 좋든 나쁘든 그들에게 편견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대개는 그들의 구체적 행적을 일일이 확인함으로써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그를 이해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말과 행위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사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난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다른 문화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는 그의 감정과 성장 과정에서 인격으로 뿌리내린 가치와 감정을 포함한다. 교육과 인간관계, 가정환경, 직업이 중요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새벽에 유튜브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벌어진 살육전과 관련한 동영상을 보았다. 세상의 모든 갈등은 상이한 세계관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런 갈등을 멀리 또 넓게 본다면, 지상에 존재했던, 존재하는 온갖 사상과 철학이 섞여 합(合)으로 향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상과 철학이 섞이는 프라이팬에 불이 붙어서 굉음이 발생할 때가 있다. 가자지구에서처럼. 나는 한 개인이 목숨을 걸고 참전하거나 가치투쟁을 벌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런 투쟁의 과정이 없으면, 개선되지 않거나 못하는 현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치를 생명보다 우선하는 사회에서는 살육을 피할 수 없다.
전쟁 도발자들은 세상이 보다 살기좋은 곳을 만들기 위해서 살육이 불가피하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역사상 종교나 국가의 지도자들에 의해 선택된 신념이 생명을 압살할 만한 가치가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공언했지만, 목숨을 바친 건 그들 자신이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영혼을 살려보려는 투쟁은 의도와 다르게 오히려 수많은 인간의 육신을 훼손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서도 그렇지만, 가치나 신념의 차이로 발발한 전쟁에서는 전장의 젊은이들 못지않게, 아니 이상으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는다. 어떤 전쟁이든지 전장에서의 전사자보다는 민간인 사망자가 많았다. 날아다니는 폭약이 전투 요원 앞에서만 폭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신이 나뒹구는 전장에서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신념은 추악한 것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신념이 생명을 넘어서 절대화되는 것이 정당화되어서는 않된다. 어떤 신념도 전장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다가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젊은이들을 위로할 수는 없다.
사상이나 철학적 신념을 넘어설 자격이 있는 유일한 가치, 즉 인권의 개념이 역사가 이집트나 중국 같이 오래된 국가나 사상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류 역사가 진실에 가까이 있는 가치에 도달하려 힘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천 년 인류 역사의 지향점이 애초에 바람직한 가치를 목표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과거의 많은 성공한(?) 국가가 추구했던 목표가 바람직한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현대 인권의 개념이 국가에 의해 추동된 가치가 아니라 국가의 이익으로 포장된 특정한 계층의 이익에 반발한 보통 사람들의 저항으로 확립된 역사가 이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