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고도 푸르고 생은 아름답다고 고요히 중얼거리게 되는 가운데,
이 손이 연 상자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 희망이 아니라 해도,
설령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이라 해도, 피가 마르는 고독이라고 해도,
깨달았음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결코.
.......확신하십니까?
'이 모든 일이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선택할 수 있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에겐 선택권이 없다는 모순때문이다.'
그들이 창조된 이래,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시간은 직선이 아
니니까. 순환이라고 하는 것도 어딘가 맞지 않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뭐가 처
음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비틀린 고리 중 어느 한 점에서 우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밀알
한톨의 부피도 차지 하지 못하는 사소한 죽음이 있어 그로 인해 많은 마음들이 부서졌다.
물에 젖은 종이에 쓰여져있던 잉크처럼 희미하게 사라졌어야 할 감정과 추억들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고 언데드처럼 어설프게 부활하기 시작한 최초의 때, 그는 수많은 의문
과 원망들을 마주하며 그저 담담히 말했었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남은 침묵의 무게는 한없이 퇴적하는 습지의 이끼처럼 메마르지도 덜어
지지도 않았다.
.....지금까지는.
검고 커다란 물체가 차가운 허공을 가로지르며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빛을 반사해내는 빙벽
에 가 부딪혔다. 부서지는 얼음조각과 함께 바닥에 흐트러지던 것이 분노같지는 않았다.
'......무슨 짓이냐?'
묻는 그 말에도 열기는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거기에 갔느냐?'
높은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 물음을 받아 대꾸한 자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었다.
널부러진 몸은 그 자체의 무게만으로도 추스르는 데 많은 기운을 소모했으며 그는 이미 다
른 말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듯 했다.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또한 짐작
에 불과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로로 베는 칼의 동선처럼 예리한 선을 그리며 그는 뒤돌아섰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모르겠다만, 내 흉내는 내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는 약간 망설이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에선 다를 바가 없다.'
"아두스!"
세라자드는 오랜 친구의 이름을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어조로 불렀다.
"폐하."
확실히 세월의 힘이란 대단해서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세라자드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 눈에 실린 마음과 미소는 여전히 고집쟁이 공주님을 향한 것이었다.
"아두스.. 아두스... 너무 오랜만이에요!"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을 보자마자 세라자드는 그동안 잊고 있었
던 그리움까지 북받치는 기분이었다. 그 옛날 아직 조그마했던 그녀를 그가 안고 다녔을 때
처럼 세라자드는 달려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내 얼굴 못 알아볼까봐 걱정되지도 않았어요?"
복면을 벗은 남자의 얼굴은 평범했다. 햇빛에 그을린 안색은 투르인라면 당연했고 약간 지
친 듯한 기색도 그 나이대의 남자라면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 다만 그 남자가 짓고 있는 표
정이,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그 몸에 새긴 흉터만큼 차곡차곡 쌓여왔을 경험들이 그를
정확한 치수의 정육면체처럼 치밀하고 안정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제 얼굴을 잊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폐하의 용안을 잊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세라자드는 옅게 웃으면서 한번 더 그를 끌어안았다. 안 그런 듯 하면서 팔의 힘과 눈동자
의 초점을 날카롭게 주시하던 아두스는 세라자드의 건강을 가벼운 마음으로 확신했다.
"걱정했습니다. 폐하."
"미안해요. 아두스."
세라자드가 유나를 만나기 전부터, 살라딘을 만나기 전부터 둘은 이런 말을 수도 없이 주고
받았을 것이다. 저 간단한 대화 사이에 어떤 세월이 있는 지, 어떤 마음이 있는 지는 아마
저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멀찌기 선채 두 사람을 주시하던 케먈은 아두스 베이를 다시금 세라자드의 호위역으로 돌
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일단 그 결심을 유나에게 전했다.
"확실히 나쁘지 않지."
"더할 나위없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거야 그렇지만 사실 아두스 베이의 전력은 별 게 아니지 않나? 실제로 그는 전투원보다
는 어쌔신의 능력을 이용해 정보전을 벌일 때 더욱 유능했어."
"12명의 예니체리가 붙는다고 해도 폐하의 안전을 책임질 순 없습니다. 다만 그와 있으면
아무래도 폐하께서 정서적으로 안정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 군식구를 하나 더 붙인다고?"
"예전에는 지금 제 앞에 계시는 분이 자동적으로 그 역할까지 해주셨는 데 요새는 뭐가 잘
못됐는 지 일이 뒤틀려버려서 말입니다."
"아하, 여전히 멋진 비꼬기로군. 감탄을 금치 못하겠어."
"........역시 그렇게 까지 말씀하실 건 없었습니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아닌, 담담하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나는 한동안 케먈을 응시했다.
"못가게 막고 싶었어. 절대로."
그것은 자신이 잘 알지는 못하는 일에 대해 완고해질 때의 눈빛이었다. 예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직감에 의해 움직일 때의 모습.
"하지만...."
"그래, 승낙했지. 머리로는 인정할 수 밖에 없잖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 걸. 될 대로 되라
는 식의 기분이기도 했고."
"불안하십니까?"
"응. 계속, 말이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유나는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가 한숨처럼 내쉬었다. 그것은 크게 요동치려는 감정을 진정시
키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쓸 때의 버릇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가 아닐까... 나 대신 그녀가 죽었다가 기적처럼 다시 살아돌아왔을 때."
그때의 상실감, 분노, 증오, 절망. 케먈은 땅이 꺼질까봐 무서울 정도로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셨던 겁니까?"
"그럴 리가. 그때는 말그대로 기뻐서 제정신이 아니었지. 다만..."
"다만?"
"그녀는 확실히 변했잖아. 좀 더 치밀해지고..."
"정치적이 되셨죠."
"기왕이면 영민해졌다고 해줘."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난... 젠장, 모르겠네... 이상하긴 하잖아! 안 그래? 마치... 그래, 누군가 짜놓은 시나리오 대
로 일이 흘러나가는 것처럼 말이야. 그녀가 살아돌아와서 기뻐. 안그랬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할 수 없어. 난 정말로 광인처럼 팬드래건군을 몰살시켜버렸을 거고 그 뒤에 남은
건 정말로 파멸 뿐이었겠지. 하지만 그 파멸을 막기 위해서 그녀가 살아난 건 아니야! 그녀
의 의지가 그대로 생을 포기하기엔 너무 강했기 때문에, 또.... 그녀를 사랑한 누군가가 그녀
를 지켜주었기 때문이지..."
"누군가 폐하를 살려냈다고요?"
"뭐.. 근성좋게 황천을 떠도는 시스콤 유령씨가 도와줬다면 할 말은 없지만."
".......선대 술탄에 대한 평가들 중 가장 유니크하군요.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아냐. 그 사람은 아냐. 그토록이나 사랑하는 누이의 문제라 해도 정도를 넘어설 정
도의 간섭을 하지 않을 거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어."
"확신하시는 군요."
"응?"
"그 분이 혼백의 모습으로나마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신념이나 믿음의 문제가 아닌 걸."
"예?"
유나는 잠시 말썽을 수습하려는 소년처럼 장난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더니 제 풀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야. 됐어. 그 문제는 그만 두자. 어차피 더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문제니까."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열명이든 스무명이든 상관은 없네."
완고하게 굴거라는 예상은 분명 편견이었겠지만 이렇게까지 물렁하게 나오면 뭔가 덧붙이
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인 법이다. 케먈은 현 팬드래건의 국왕이자 목적이 아리송한 초
기밀 프로젝트의 입안자이자 실행자이고 선대 술탄의 암살자라는 복잡한 경력의 중년남자
를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처지곤란의 거대한 문제거리를 떠맡은 듯, 불길한 느낌
이 들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원시원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데는 이 만한 말도 없었지만 케먈로서는
이 말 외에 다른 게 생각나지도 않았다. 대강 상태를 뭉기적거리며 넘기기엔 별 무리가 없
다고 생각했지만 이게 웬일. 부지런히 딴청을 피우며 노골적으로 케먈의 말을 귓등으로 듣
는 것 같던 철가면의 눈이 공격적인 빛을 띄우는 게 아닌가.
"난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네."
"............."
"그러니 부탁할 거리도 없겠지. 목적지까지의 운송서비스 정도는 제공해주겠지만 그 이상은
알 바가 아니네."
시비 거는 거로군. 이 사람. 그걸 모를 케먈이 아니었지만, 사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기도
누군가에게 좀 시비를 걸고 싶었다.
"아무리 앞을 모를 일이라지만 명색이 남의 나라 재상과 총사령관을 둘 다 데리고 가시면서
하는 말씀치고는 상당히 파렴치하군요."
아아, 일이 터지든 말든 멋대로 하라지. 언제는 내가 성질 죽이고 사는 인간이었던가. 상관
의 기분은 아랫사람에게 전염된다더니 이런 꿀꿀한 일이.
".............."
바로 튀어나오는 반격을 맞이하는 순간, 철가면의 눈에서 번뜩이던 폭발의 기미는 5초단위
로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이런,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 데. 괜시리 그 눈을 주시하던 케먈마
저 기운이 빠져버렸다. 오래된 먼지처럼 피로감만 어깨 위로 잔뜩 쌓여버리고 말다니, 젠장.
".........사과하지. 일단은."
"아니요. 저야 말로."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도무지 청년답지가 않다는 점에 자신의 가치를 두고 있는 청년을, 철가면은 처음으로 면밀
히 관찰했다. 청춘의 혈기라고 불릴 말한 것은 모조리 어딘가에 버려두고 온 사람처럼 그는
냉랭한 눈으로 철가면의 시선을 받아냈다.
"왜 말리지 않나?"
역시나. 케먈은 속으로 빙고를 외쳤다. 하긴 나라도 데리고 가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지.
"말려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자넨가?"
"예?"
"자네가 왕가의 숨은 혈통이라도 되냐고 묻는 걸세."
케먈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 무언가 표정이라도 떠올랐다면 너무 어이가 없어
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시선과 얼굴은 방금 전처럼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뭘 믿고 그러냐고 물어보셨으면 좋았을 뻔했군요."
"그걸로는 방금 전의 빚을 못 갚지 않나."
"지불방식치고는 지독하군요."
"사실이 아니면 그만 두지 뭘 그러나."
"당신도 왕인 주제에 가신에게 주군이 죽길 바라냐고 묻습니까? 그것도 이미 당신의 손에
왕을 잃었던 백성에게?"
냉랭하기만 한 무표정 너머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기를 선명하게 느껴버리곤 철가면은
케먈에 대한 아까의 평가를 수정했다. 겉으로 차가워보이는 사람일수록 속은 쩔쩔 끓고 있
는 경우가 많다더니 이 친구는 유나와 비교해도 만만치 않은 다혈질인 모양이다.
"......또 잊어버렸군."
"잘도 잊는 군요."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라고 쓰여진 얼굴로 청년은 잠시 매섭게 그를 노려보더니 이내
성정을 가라앉히고는 아까와 같은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철가면은 가볍게 감탄했다. 재
주도 좋군.
"......그만 두죠. 영양가도 없는 논쟁."
"덕분에 하고 싶은 말은 하지 않았나?"
허를 찔린 것 같은 표정의 케먈을 향해 철가면은 연륜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싱긋 웃는 얼
굴로 대꾸했다.
"빼앗아가는 게 아니야. 우린 엄밀히 거래를 했고 이젠 그녀가 지불할 차례라는 거지."
".......당신은 이번 일을 그런 식으로 표현합니까?"
"나로서도 좀 더 시적이고 정감이 넘치는 표현을 쓰고 싶지만 자네는 이쪽을 더 잘 알아들
을 것 같아서 말이지."
철가면과 케먈이 어른스럽지 못한 영역다툼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경님은 소연과 함께 자
신들의 사적인 물품을 챙기고 있었다. 곧 여행에 떠날 사람 답게. 세라자드는 절차상으로나
마 아두스에게 간단한 건강진단을 받고 있었고 유나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대강
의 물품 정리가 끝나자 경님은 습관처럼 유나를 찾아 유나가 임시로 쓰고 있는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빼꼼히 열린 문 안으로 우선 얼굴을 집어넣고 웃으려고 했는 데...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유나는 엘핀스톤과 함께 있었다.
"결국... 아니 뭐... 그래도 말은 했군요."
엿들으려고 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소리는 빛과 달라 문 옆으로 비켜서도 귀에 와 닿
는 걸 어쩌란 말인가.
"예."
"괜찮겠어요? 앞으로는 정말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인데."
"차라리 싸우는 게 낫겠습니다."
경님이 있는 위치에선 엘핀스톤이 보이지 않았기에 표정을 알 수 있을리는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 가슴 밑바닥까지 지쳐버린 목소리, 듣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괴롭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괴로워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은 거라고 경님은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뭐라고 해도 그와 함께 있는 것은 괴로우니까."
".........포기할 수 없는 건가요?"
"포기한 것이 눈 앞에 있으니까 더욱 괴로운 겁니다."
"............"
유나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톡톡 치기만 했다. 일정한 박자가 심장소리처럼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구석이 있었다. 피아노라도 치는 것처럼 손가락을 차례로 책상
위에 두드려 꼭 말발굽소리 같았다.
".....그런 가요....."
그녀는 오늘 하루에만 수십번은 쉰 것 같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와의 면담을 접었다.
"어쨌거나 정말 고마워요. 엘핀스톤. 당신이 투르에까지 신경쓸 이유는 없는 데..."
"사람은 어딜가나 똑같은 법이니까요. 안타리아나 이곳 투르나."
"고맙다고 말하면 그냥 들어요. 뭘 또 일일이 대꾸를 하시나 그래."
엘핀스톤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스쳤다. 그래, 이 느낌이다. 상대의 감정이 직격으로 가
슴을 치고 들어오는 느낌.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크게 울리는 진동. 그것이 진심임
을 아프게 실감함으로서 되려 이쪽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있어야 할 장소를 잃어버리고 수년간 떠돌며 그는 언제부턴가 남에게 자신의 생존을 확인
받곤 했다. 증오도 좋았다. 수상한 이방인에 대한 노골적인 경계도 나쁘진 않았다. 그들의
적의가 선명하면 선명할 수록 그는 분명하게 이 대지에 발을 딛고 있는 셈이었다. 호의도
적의도 사랑도 증오도 다만 그 선상이었다.
로리엔. 문득 잊었던 이름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그녀도 모른 척 했다. 바보가 아
닌 이상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인지 몰랐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아니야. 그녀의 사랑은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사랑을 하
는 것이다. 타인을 도구로 이용하는 짓따윈 그만 둬. 그녀가 바라는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이루어줄 수 없는 주제에 허울좋은 겉모습으로 상대하는 위선이라니, 상처주고 싶지 않다는
자기위주의 변명 따위, 당장 그녀의 사랑에 보답조차 못하면서...
그리고 문을 열고 나오면서 그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 옆에 서있던 경님과 정면으로 부
딪혔다. 그리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표정이었다. 로리엔이 늘 그를 볼때마다 짓는 표정. 그와 똑같은 표정이 눈 앞의 그녀에
게도 있었다. 지독한 자기혐오만큼 상대에 대한 짜증이 발작처럼 튀어나왔다.
".............."
경님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고, 가슴 아프게 할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이 엘핀스톤의 한계였다.
경님은 반쯤 열려진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맨처음의 가벼운 기분은 간 곳이
없고 잔뜩 침울해진 친구의 얼굴을 보자마자 유나는 사태를 알아차렸다.
"......만났구나."
"응."
"네가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어."
"알아. 결국 그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그것은 늘 타인에 대해서 동정적이었던 친구답지 않게 이성적인 말이라 유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어째서 모를까..."
경님은 문 너머 엘핀스톤이 사라지는 방향을 쳐다보며 차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차라리 화를 내지.. 소리치며 울어버리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바에야... 금방
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보다야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맞
고 온 모습이 낫지."
"과격하네."
유나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소리내어 웃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좀 어색했다.
"뭐야, 그 웃음은."
"아니, 정말로 좋아하나 싶어서 말이지. 해파리 공주님."
"응?"
"한번 사람을 좋아하면 앞뒤 안가리고 빠지는 거 같아도 넌 늘 자신을 지키고 있었잖아. 네
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처음봐서. 지금 남자친구한테도 그 정도는 아니고 말이야."
눈을 깜박깜박거리며 한참 멍하니 있던 경님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네..."
"자기감정도 모르고 있다니 너 답다, 으이구."
"하, 하지만 그 애랑 엘핀스톤씨는 달라!"
"당연하지. 엘핀씨는 조금만 있으면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걸. 후회를 남겨놓지 않으
려면 부지런히 달라붙어야지."
경님은 그 말을 듣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나 잠깐 다녀올께."
"어? 너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응, 그냥 짐 다 쌌다고."
".....그래, 어서 가라. 빨리 걷는 편은 아니니까 곧 따라잡을 거다."
"그 사람쪽이 아냐!"
"엥?"
순식간에 휘리릭 사라져버리는 경님의 뒷모습을 맹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유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피식 웃었다.
"좋을 때로군."
그리고 여전히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서류들을 보고 아까보다 훨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땅 꺼지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때를 맞추어 철가면과의 어른스럽지 못한 언쟁을 끝마친 케먈이 집무실 안으로 들
어왔다.
"아아, 케먈. 마침 잘 왔어. 참, 잘 싸우고 왔어?"
"예?"
"아저씨랑 당신, 아니면 당신이랑 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면서 만나기만 하면 싸우잖아.
잘 싸우고 왔냐고."
간파당하고 있었나라는 생각에 금즉하면서도 케먈은 새침하게 대꾸했다.
"실제로도 사이가 좋진 않습니다. 얀 님과는 다릅니다."
"그래? 내가 보기엔 아저씨 젊었을 적엔 딱 당신같았을 거 같던데? 둘 다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어디가요!!! 라고 격렬히 항의하고 싶은 것을 꾸욱 참고 케먈은 대화의 초점을 돌리려고 노
력했다.
"일단, 묵인이라는 형식으로 승인은 얻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아두스씨가 붙어있으면 공격은 못해도 최소한 36계 줄행랑이라도 되니까."
"정말로 포기하셨군요."
"그럼 이제와서 어쩔거야. 하지만 세라자드랑은 한동안 말 안해."
"삐지셨습니까?"
"갈수록 땡고집만 늘어가잖아. 그것도 겉모양으로나마 근거를 드는 것도 아니고 애새끼마냥
땡깡만 써. 유독 나한테만 더 그런단 말이야. 사적으로야 상관없지만 이런 일까지 그렇게 조
르는 건 안돼."
"...으음...."
케먈은 계속 묘한 소리만 내면서 한동안 뚫어져라 유나를 쳐다보았다.
"뭐냐? 할 말 있으면 해."
"엄한 엄마."
"씨끄러!!!"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폐하."
얀의 딱딱한 공식적 인사가 끝나고 세라자드와 아두스는 원래 떠나기로 결정된 일행들에게
합류했다. 백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세라자드가 궁을 비웠다는 사실은 일급 기밀에 붙
여졌다.
"약속해주십시오. 폐하."
"예, 말씀하세요. 케먈."
"이번 뿐입니다. 나중에 또 따라가시겠다고 말씀하시면 그땐 정말 호락호락하게 넘어가드리
지 않을 겁니다."
한동안 세라자드랑 말 안하겠다고 단단히 마음 먹은 터라 속으로만 품고 있었던 말을 케먈
이 대신 해주니 유나는 속이 시원했다. 케먈의 경고는 세라자드도 좀 무서웠는 지 별다른
반론도 없이 기가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신 겁니다?"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소연이 키득거리며 웃자, 옆에 있던 얀이 은근슬쩍 눈치를 주었다.
과연 얀언니의 눈길만은 무서웠는 지 소연도 헛기침을 하는 척 하며 얼버무렸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살라딘이 얀에게 다가갔다. 얀 주위에는 시반 슈미터들이 훌쩍거리며 진을 치고
있었다.
"그만 하지 못하겠나!"
그러나 얀의 일갈에 다들 쑥 들어갔다. 살라딘이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자, 얀은
설핏 그를 노려보았고 그도 아까의 소연처럼 헛기침으로 마무리를 했다.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별 다른 말은 안하겠다."
"저기, 어깨에 좀 힘을 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데..."
"네 놈한테서 듣고 싶진 않은 말이군."
"에.... 뭐 아무튼.... 잘 부탁한다. 이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염치없지만."
"알면 어서 돌아와. 언제까지 나더러 네 일까지 도맡아하라는 거냐."
과연 위기상황은 위기상황이라 본인이 뭐라고 하든 계급장과는 상관없이 리더가 정해져버
리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얀을 제외하곤 이야기가 되지 않는 상황. 살라딘은 가벼
운 마음으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그것으로 자비단에서의 일은 끝이었다. 군용지프차를 타고 가며 저 뒤로 멀어지는 술탄궁
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감회는 새로웠다.
"그나저나 팬드래건 쪽은 코빼기도 안보이는 군."
떠보는 듯한 유나의 말에 철가면이 앞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아니, 꽤나 매정하잖아요."
"존은 어제 다녀갔습니다."
"예, 당신한테만 쏙 다녀갔겠죠."
"나한테도 다녀갔네."
"아저씨는 좀 빠져요. 왕 주제에 그러고 돌아다니는 거 신하들한테 남사스럽지도 않아요?"
".......뭔가, 이 새삼스러운 어택은."
"언제는 날짜랑 시간 정해놓고 꾸사리줬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
주면 어디가 덧나나? 쪼잔하기는."
'기분이 안좋은 가보다!' 일행들은 알아서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제법 되는 거리를 달려온 지프는 짐과 인원들을 내려놓고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거대한 하얀 선체의 한쪽에서 입구가 열리고 통로가 나오자 예상했던 사람이 기다리고 있
었다. 유나는 시큰둥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할아버지."
"어째 심통맞은 표정인걸. 처녀. ......어라, 게다가 이 사람은 또 누군가?"
지그문트 박사의 눈이 세라자드 옆에 있는 아두스에게 멈췄다.
"술탄 경호원이요."
"술탄? 술탄은 왜?"
지그문트는 유나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은 무시했다. 그로서는 신분
도 국적도 제각각인 구성원들에게 까다로운 예의를 표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몰라요. 왕이면 왕답게 왕궁에나 쳐박혀있을 것이지 끝까지 따라오겠다잖아요."
"으음.... 불만인가보군."
"결과보단 과정에요."
"그다지 중요해보이지도 않는 구먼. 뭘 그러나."
"육감이라는 게 있는 법이에요."
"육감?"
"할아버지한테 시시콜콜 말할 이유가 없어요."
그걸로 유나는 쌀쌀맞게 대화를 끊어버렸다. 앞서가는 유나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그문트는
투덜거렸다.
"떽떽대기는."
그때, 멀찌기 있던 철가면이 박사에게 접근했다.
"기분 나쁘면 저렇습니다. 건드리고 멀쩡한 쪽이 다행인거죠."
유나에게 당한 일은 까맣게 잊은 듯 지그문트는 꽤나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철가면~! 자네 얼굴을 보니 꽤나 오랜만이라는 걸 실감하겠군."
"예?"
"주름이 늘었네."
"..............."
....잊은 건 아닌가보다.
"저 두사람, 싸웠습니까?"
간만에 본 램버트가 물어볼 정도로 세라자드와 유나 사이의 냉전은 티가 났다. 하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아두스한테도 실실 웃는 얼굴로 대하는 유나가 세라자드만 보면 휑 하니 돌
아서니 모를 리가 없는 거지만.
"몰라. 한때는 없으면 못살 것 같이 굴더니... 아무튼 여자들이란..."
"뭐죠, 크리스티앙? 무슨 뜻이에요?"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죠안에게 움찔한 크리스티앙.
"아, 아니. 내가 뭐랬나...;"
"............"
그리고 심히 한심스러운 지 불쌍한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 눈길로 바라보는 램버트.
"....됐습니다. 드디어 철가면단에는 쓸만한 인재라곤 저밖에 남지 않은 거로군요."
"이봐! 그거 무슨 뜻이야!"
"맞아요! 무슨 뜻이요?!"
"....루크 한센에게나 가봐야겠네요."
크리스티앙과 램버트가 실로 그들다운 방식으로 회포를 풀고 있을 때 유나일행과 철가면,
지그문트, 살라딘은 브릿지에서 한창 브리핑 중이었다.
"이쪽 루트를 통해 아드리아노플로 갈 셈이네. 되도록이면 적은 지역을 경유하여 적에게 틈
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어차피 대기권 상공을 나는 데 눈에 뛸까요?"
"아냐. 적은 이쪽 움직임에 빤하니까. 눈 가리고 아웅이 될 지언정 조심하는 게 좋지."
"설마 시즈 한 다스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뭐, 방심할 수 없을 걸세."
"이것저것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길고 지루한데...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미 그들의 목적은
완전히 분쇄되었어요. 절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고요. 철가면, 당신이라면 반드시 이뤄야만
하는 목표가 사라졌을 때 남은 전력으로 뭘 하겠어요?"
"나한테 묻지 말게. 난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야."
"...........간만에 핵심을 집어주는 군요. 곤란하기 짝이 없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묻는 지그문트에게 유나는 간단히 설명했다.
"우리들 중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배수진을 치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들어봤자 안될 게 뻔한 일을 포기도 못하고 있는 작자의 머릿속을 꿰뚫어볼 재
주는 전무하다는 거죠."
"으음.... 이런 해석은 어떨까?"
"뭐가요?"
"지금까지 투르에서 일어난 모든 소요가 술탄과 자네들을 아드리아노플로 데려오기 위해서
라고 가정한다면 말일세. 그들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 건가?"
"...........저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분풀이 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는 데요?"
그때, 박사는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선택지가 아예 하나밖에 없다면 그 하나가 다 인 거겠지."
"예? 설마 진짜 분풀이라고요?!"
"왜 그렇게 놀라나?"
"아니... 아뇨..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인간적'인 행동을 할까요?"
"자네가 정말로 궁금해하는 건, 그들이 과연 그렇게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거겠지."
"바로 그렇죠."
".....전자계산기 흉내는 낼 수 있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진짜 전자계산기는 아니네. 피
가 뛰는 심장이 있질 않나."
"기계엔진도 오래 돌리고 있으면 열을 내요."
"컴퓨터가 인간을 도발할 수 있던가?"
"가능은 하겠지만 그 도발을 즐기진 않겠죠."
"그게 전혀 유용성이 없어도 말인가?"
"..........전혀 유용하지 않은 도발을 하고 있으니 '인간적'일 거라고 믿으라는 거예요?"
"그럼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 도발이 유용하냐 무용하냐를 판단할 수 없어요. 어떤 마스터플랜인
지 조차 모르잖아요!"
"그렇다면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건 어떻게 아나?"
"그건.....!"
유나는 말문이 막혔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아차 싶었다. 일종의 유도심문에 걸려들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는 그녀 특유의 비상한 상상력에 힘입어, (수많은 가능성
들 중 절대로 불가능한 가설을 제외하고 남은 것이 겉으로는 아무리 불가능해보이더라도
결국 진실이라는, 셜록 홈즈 풍의 의심이었다) 한가지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나이스한 트릭이군요. 할아버지."
"도중에 들켰으니 패배일세."
노인답지 않은 시원시원한 몸놀림으로 그는 패배의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나 지그문트는 알지 못했다. 진짜 패배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유나는 우연찮게 얻
은 히든 카드를 가슴 속에 잘 간직하고는 사태를 빨리 마무리 짓기로 했다.
"무슨 겸손의 말씀을. 어쨌거나, 그 문제는 더 이상 의논해도 진전이 없으니 아드리아노플
공략작전이나 펴죠."
실질적인 점령작업에 주목하면서 유나는 케먈의 당부를 몸에 새겼다.
- 건물은 남겨두십시오.
"엘핀스톤씨! 있어요?"
승선하자마자 원래 자신에게 주어진 개인숙실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엘핀스톤과 그런 그를
따라 승선하자마자 작업에 들어가는 경님. 늘 사근사근하게 굴다가 한순간 차갑게 대한 것
이 그렇게도 마음에 걸렸는 지 엘핀스톤은 순순히 문을 열어줬다.
"경님씨, 아까는...."
"자, 이거요."
그녀가 내민 것은 광주리에 한가득 담긴 오렌지들과 반딱반딱한 광택의 보온병이었다.
"초콜렛을 약간 넣은 따뜻한 우유랑 오렌지예요. 같이 먹으면 맛없으니까 따로 따로 드세
요."
엘핀스톤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아무 말도 못하고 오렌지랑 보온병을
한참동안 번갈아보았다.
"이게.... 뭔가요?"
"핫 초콜렛과 오렌지요."
"아니, 그건 저도 압니다만...."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으면서 엘핀스톤은 계속 곤란해했지만 경님은 계속 그 땡글땡글한 눈
동자를 크게 뜨고 그를 직시할 뿐 예전처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한참을 버벅거리던 엘
핀스톤은 마침내 어깨의 힘을 축 빼더니 자포자기한 사람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 이걸 저한테 주는 건데요?"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시종들이 그래서요. 유나나 소연이 먹으라고 부엌에
가서 이것저것 뒤져오는 김에 엘핀씨 것도 챙긴 거예요."
"하지만...."
그는 이 말이 어떻게 하면 지나치게 무례하게 들리지 않을까 고심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
었다.
"제겐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뇨. 원하질 않는 거겠죠."
이런 식의 대꾸는 상상도 못했기에 엘핀스톤은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예?"
"엘핀씨 잘 그러잖아요. 하고 싶은 일이랑 해야만 하는 일을 늘 헷갈려하고 어디서 스트레
스 받으면 혼자서 끙끙 앓다가 엉뚱한 곳에서 땅파고. 자꾸 그러면 정신건강에 안좋아요.
스트레스 쌓이면 단 거 먹고 싶어지니까 나중에라도 먹게 챙겨둬요."
"경님씨...."
"자, 일단 받으라니까요."
항상, 자신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핀스톤은
이 말을 하는 데 예상보다 마음이 아파서 솔직히 조금 당혹스러웠다.
"받을 수 없습니다."
"에? 오렌지 싫어해요? 우유 알레르기라도?"
".....갚을 수 없는 거라면 받기 싫어요."
안될 거라면 시작하고 싶지도 않다. 노력하면 할 수록 마음이 한 시점에서 묶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만 실감할 뿐이다. 불행한 것은 나 혼자만으로 족할 뿐,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
고 싶지 않아. 내 불행과 고독이 병균처럼 다른 사람한테까지 전염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한참동안 송아지같은 눈을 꿈벅거리고 있던 경님은 한 몇초 뒤에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알아들었다. 아무리 둔한 그녀라도 그 말 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역
시 그녀는 둔했고(;) 지금까지 살아오며 그것이 그녀의 단점이기보다는 장점일때가 많았듯
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아~! 난 또 무슨 말인가 했네."
이쯤 되면 당황하는 건 엘핀스톤이다.
"예?"
"어차피 불가능해요~ 그런 거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마 유나였다면 이 말 맨 뒤에다가 '주변 머리없는 사람같으니라고'라는 훈시를 잊지 않았
을 만큼 책망의 기색이 섞여있는 말투였다.
"불가능하다뇨?"
"실제로 우리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빚을 졌다고 쳐도 갚는 건 불가능하다니까
요.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두 번 다시 못만날 텐데."
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싶지만.....실제로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게 맞다. (--;)
"게다가 내가 준 건 거의 다 먹을 거잖아요. 엘핀씨가 그거 갚으려면 팬드래건에 내가 놀러
가야 되는 데 안되잖아요. 어차피 되갚아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시작한 거니 하나도 받지 않
든 주는 족족 받든 결과는 마찬가지예요. 그럴 바에야 주는 사람 기분 상하지 않게 호의정
도는 받아주는 게 좋잖아요. 안그래요?"
그리고는 대뜸 엘핀스톤의 팔에 바구니를 들려주더니 어깨를 툭툭 치고 휑하니 사라져버렸
다. 엘핀스톤은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도 잊고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녀가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항해도를 살펴보고 있던 지그문트 박사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철가면의 목소리에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정체가 궁금하긴 하네."
"으음... 하긴..."
희미하게 수긍하는 대답에 심각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어 박사는 한심한 기분을 감출 수
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스위치를 눌러 끄고는 뒤돌아섰다. 옷을 갈아입었는 지 예전에 입
던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가면은 쓰고 있지 않았다.
"자네한테 뭘 기대하는 건 포기했으니 내가 직접 나설 수 밖에. 그 막강한 정보들을 어디서
얻었는 지라도 캐낼 수 있을까 했는 데 완전히 틀려버렸군."
박사는 다시 오퍼레이트 시스템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한번 경계모드로 돌아섰으니 되돌리려면 꽤나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한마디로 아드리아노플로 가기전까진 불가능하다는 거지?"
"예. 하지만 별 걱정 없습니다."
"그 처녀에게 코 꿰인 이후론 만사가 그런 식인 주제에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지 말게."
"그렇게 걱정돼요?"
"당연한 일입니다. 폐하."
세라자드는 한동안 꺼내지 않았던 무기들까지 모조리 늘어놓고 점검 중인 아두스를 바라보
며 웃었다.
"정말이에요. 아두스. 전투에는 나서지 않을 거예요."
"제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데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엔 신빙성이 없더군요."
"우~ 그 말은 너무 했어요."
"하지만 폐하, 위험성에 대해선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셔야 합니다. 지금 아드리아노플에 있
는 자들은 무슬림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군사들입니다. 제 생각엔 투르인조차 아닌 것 같습
니다."
"내 예상이 틀렸군요."
"누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케샤 이븐 라힌 앗달라흐마."
"....그 늙은이는 죽었거나 이미 투르땅을 떠났을 겁니다."
"불가능해요. 오라버니의 즉위를 도왔던 한제국이 그를 도울리 없어요."
"숨어들어갔다면 한으로서도 도리가 없지요."
"굳이 그게 아니라도.... 그 사람이 투르를 떠날 리가 없어요."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앙그라교는 자기 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아두스는 조금 이상했다. 세라자드의 입에서 타인에 대한 평가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었다. 그가 그 느낌에 대한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천장 구석에 있는 스피커가 울리면서 기계
음성을 토해냈다.
- 이제 곧 아드리아노플에 도착합니다. 대기중인 인원은 모두 브릿지로 나와주십시오.
어둠은 깊었다. 단순히 빛이 부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어둠이라는 개체가 따로이 서식하는
듯한 어둠이었다. 그러나 그 어둠 한가운데에도 빛이 있어,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
를 지키고 있는 한 존재의 윤곽을 반사해냈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서 기
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흘러가는 매 순간순간이 못견디게 괴로울 정도로 기다렸다.
"......오셔야 합니다."
처음으로 떨리는 한숨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지 않을 수는 없어.... 당신이 있어야 해. 당신이 와야해."
당신은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절대로 당신만은 와야해. 설령 내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 해
도 당신은 와야 한다. 절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진 않을 거다. 절대로 당신을 그 평온한 삶속
에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그것만은 견딜 수 없어. 그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당신에게 순순히
버려지진 않겠다.
그리고, 그는 느꼈다.
- 도착했다.
"이상하군요."
아두스는 당혹스러워했다.
"분명 제법 되는 군사들이 결집하는 것을 보았는 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램버트는 이리저리 수풀로 뒤덮힌 땅에서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전차의 바퀴자국과 군대
의 발자국을 찾아냈다.
"군대?"
"언데드떼들이 아니고?"
"분명 열을 맞춰서 행군한 흔적이군."
"맙소사. 언데드로 모자라서 용병까지 고용했다고?"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유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설마, 정말로 그 늙은이?"
"노호가 벨제부르와 연관되어 있다고?"
"흑태자교도 만들었는 데 뭔들 못하겠어요. 젠장, 생각못한 것도 아니면서... 그 늙은이를 그
때 아작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기분나쁠 정도로 고요한 걸. 그 많은 군사가 있었다고는 생각도 못하겠어."
"매복해있을 가능성은?"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아예 존재하고 있는 듯한 기미도 없네. 정말로 텅 비었어."
실제로 그토록 위세높던 칼리프궁은 폐가와 다름없이 을씨년스러웠다. 살라딘은 어딘지 착
잡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라자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들어가죠."
넓은 홀을 지나, 내딛는 발자국에 채이는 돌멩이와 나뭇잎사귀들을 처량하게 바라보면서 일
행은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찾았다. 아무래도 칼리프궁의 안내는 세라자드가 맡을 수 밖에
없어서 그녀가 앞장 섰다.
"칼리프궁은 오래된 지하템플 위에 세워진 거라서 밑으로 내려가면 내려갈 수록 벽화와 조
각물이 오래되어 역사책이나 다름없어요."
"최하층은 몇층이에요?"
"모르겠어요. 듣기로는 지하 50층 이후로는 들어간 사람이 없대요."
"어째서?"
"규모도 방대하거니와 구조가 미로급으로 복잡해서요. 실제로 이 안에서 행방불명된 무슬림
도 있고요."
"일종의 성역인가요?"
"성역이라기보다는 금지구역에 가깝죠. 아무도 들어간 사람이 없으니까."
"선대 술탄께서는?"
"......오라버니는....."
세라자드는 여전히 뻐근하게 아파오는 늑골부근을 감당하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했다.
"오라버니는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으셨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철가면의 질문에 갑자기 온 일행이 걸음을 멈춰섰다. 당황할 법도 한데, 철가면은 곧은 눈길
을 세라자드의 얼굴에서 떼지 않고 계속 그녀는 주시했다. 위압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 부
드러운 눈길이 기억 속에 오라버니랑 약간 닮아서 세라자드는 가슴이 덜컹 했다.
"......한번. 어렸을 때."
"예?!"
"정말로요?!"
아두스와 소연일행은 각자 다른 의미로 펄쩍 뛸 듯이 놀랐다.
"설마 50층 아래로 내려간 적이 있으신 겁니까?!"
"우와~ 이 어두운 데 혼자서... 용감했군요. 세라자드."
"폐하!"
"미, 미안해요. 아두스. 야단맞을 까봐 지금까지 말 못했어요."
"대체.... 대체 언제요?!"
"여, 여덟 살..."
"맙소사!"
".........보모가 하나 더 있군."
크리스티앙의 말이 끝나자 마자 유나는 뾰족하게 세운 눈빛으로 그를 위협했지만 세라자드
와 아두스는 미처 듣지 못했다.
"진정하게. 아두스."
살라딘의 손이 아두스의 어깨위에 올라왔다. 세라자드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충성을 맹세한
아두스였기에, 무엇보다 사전적 의미에 충실한 주군은 아무래도 세라자드 라기보다는 그였
기에 아두스는 입을 다물었다. 살라딘은 세라자드에게 뭐라고 말하는 대신 의미있는 눈빛으
로 그녀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 그래서 거의 70층까지는 내려가본 적이 있는 데..."
"용케도 길을 안잃어버렸군요. 어린애가 혼자서..."
"하지만 벽화를 따라 가면... 그러니까 아, 바로 여기서 시작해요. 으음..."
"이건...?"
그것은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의 형상을 그려놓은 그림
이었다. 사방으로 줄무늬가 뻗어나가는 둥글고 노란 원. 물결무늬를 잔뜩 그려놓은 파란 바
탕. 마침내 한참 후에서야 등장하는 한 명의 사람.
"......천지창조가 이루어져, 땅과 하늘과 바다가 생기고..."
세라자드가 든 등불에 따라 그림자가 일렁이며 오래된 벽화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날개 달린 것과 다리로 땅을 딛는 것. 헤엄치는 것 등 많은 생물이 번성하여 창공과 대지
와 바다를 채우자, 마침내 최초의 인간이 나타나서...."
"........일종의 창세기로군."
"천지창조라면 역시 혼돈 한 가운데 대빵신이 나타나서 '빛이 있으라~!'라고 외치거나 뭘 다
지고 두들겨서 땅 만들고 하늘 만드는 그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만 대빵신이 뭐냐, 대빵신이?"
"일신교와 다신교 둘 다를 포함할 표현을 찾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신? 아뇨. 앙그라교는 좀 달라요. 태초에 있었던 것이 무한한 혼돈이라는 것은 수세기동안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가설일 뿐, 무라마드 대제가 맨처음 받은 교시엔 태초에 대한 언급은
없어요. 다만 한 자루의 검에서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말 뿐이에요."
일행들이 그저 그렇게 듣고 있는 동안, 숙연할 정도의 침묵이 한겨울의 칼바람처럼 철가면
과 유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검?"
"예. 검이요."
유나와 철가면은 자동적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검이 열쇠가 되리라.'
"검이라니.. 좀 자세히 설명해주겠어요?"
유나는 냉전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세라자드에게 직접 말을 걸었으며 대꾸하는 세라자드 역
시 마찬가지였다.
"해주고 싶어도 불가능해요. 검에 대한 언급은 그 이상 없어요. 경전의 맨 마지막, 앙그라
마이뉴가 깨어나 새로운 세상을 위해 존재해왔던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릴 때 후계자의 손
에서 나타나리라는 구절 밖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마지막 칼리프라고 해석했죠."
"대부분의 신학자라고 함은..."
"예. 몇몇 소수의 신학자들은 다른 의견을 내놓았죠."
"그들은 뭐라고 했죠?"
"'검'은 마지막 칼리프의 은유라는 중론에 비해 그들은 검에 대한 언급은 없어요. 그들이 문
제 삼은 건 이른바 '후계자'가 누구냐는 건데, 검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인물에 대한
가설은 모두 추측이죠. 그 많은 가설들의 공통점이라고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완전히 새로
운 인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누군가라는 거죠. 당연히 칼리프이든 술탄이든 제도권내의 인
물은 절대로 아니고 앙그라교를 믿지도 않으며 심지어 인간이 아니라는 설도 있어요. 그의
검, 즉 그의 힘이 파괴신인 앙그라마이뉴를 창조신으로 바꾼다는 거죠."
"그렇다면 그 자의 힘이 앙그라마이뉴를 능가한다는 거잖아요?"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예요. 으음..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일종의 촉매와 비슷한 거예요"
"아아, 오랜만에 듣는 군. 그 단어."
"응. 수능시험 이후론 처음이지."
한편, 유나와 철가면은 어느새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 중이었다.
"촉매라고 하면... 후계자가 누구건 간에 본인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을 수도 있겠군?"
"확실히 그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면 그렇겠지만.....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아요?"
"......'검'에 대해서는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는 데 이제와서 후계자라...."
"그러니까 애시당초 뭘 그렇게 철썩같이 믿고 아수라가 검이라고 확신한 거예요?"
"만약 아수라가 검이라면..."
"알쨜없이 당신이 후계자죠. 이론에도 들어맞잖아요. 투르인도 앙그라교도도 아니고 한 20%
정도는 인간도 아니죠."
"......그 수치는 어디서 나온 겐가?"
"그냥 취향이에요."
"하지만 아수라가 검이 아니라면?"
"뭐, 검이라고 해서 꼭 검의 형태를 하고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무력이나 다른 힘
의 은유일 수도 있고..."
그러는 동안에도 세라자드는 세라자드대로 벽화를 계속 읽어나갔다.
"그리고 무지와 혼미의 시대를 지나, 선지자 무라마드가 나타나고.... 그가 부족국가로 나뉘
어져있던 투르를 통일하고 앙그라교를 창시한 뒤, 최초의 술탄 겸 칼리프인 대제가 되요. 사
실, 술탄과 칼리프는 처음부터 한 몸이었으니까 술탄 겸 칼리프란 명칭은 좀 우스울 지도."
"근데 세라자드."
"예, 말씀하세요."
"우리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예? 아, 물론이에요. 아까 말하려다가 못했는 데, 이런 식으로 벽화에 그려진 이야기를 줄
거리에 맞게 찾아가기만 하면 미로랑은 아무 상관없이 계속 밑으로 내려갈 수 있어요."
"아~ 그래서 어린애였던 세라자드가 70층까지 내려갈 수 있었던 거로군요."
"다시 올라 올때도 문제가 없고요."
"세라자드"
소연이 한숨을 쉬려다가 만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자 세라자드는 의
아해졌다.
"왜 그래요?"
"70층까지 내려온 것도 벽화를 정신없이 읽다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그렇게 된 거죠?"
".....예."
"이번엔 그렇게 정신 빼놓으면 안돼요?"
"..............예."
"그래도 용케 더 안내려가고 다시 올라갔네요."
"예?"
"착한 어린이였군요. 오빠가 걱정할 까봐 그런 거죠?"
"아, 예..."
뭔가 잊어버린 게 있는 거 같은 데... 세라자드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눈 앞에 당장 보
이는 벽화에 정신이 팔려 잊어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세라자드의 설명을 들으며 걸음을 옮
기고, 마치 경주 석굴탐험에 여행가이드를 데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 무렵, 세라자
드가 우뚝 멈춰섰다.
"....지금부터는 저도 처음 와보는 거예요."
긴장감이 물결치듯 사람들의 머리위에 내달았다.
살라딘과 엘핀스톤이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조명탄을 켰다.
"와우...."
소연이 나지막한 탄성을 터트렸다. 어둠 속에 가려저 하나의 등불만으로는 보이지 않던 부
분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하자 지하미로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있잖아...."
유나의 목소리마저 긴장과 탄복에 떨리고 있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라는 영화 생각나지 않냐?"
"그게 뭔데?"
"조지 클루니가 나오는 뱀파이어 영화인데, 국경 근처 스트립 클럽 지하에 어마어마한 피라
미드가 있거든. 근데 그 피라미드가 뱀파이어 소굴이야."
"............꼭 지금 상황에서 그 이야기해야 쓰겄냐?"
"재미있잖아."
"하나도 없어."
일렁이는 불꽃들 속에서 두런두런 오고 가는 말소리는 공간을 퍼져나가며 기묘한 울림을
일으켰다.
"......하아...."
"왜 그래요, 세라자드?"
"이 벽화들은 무라마드 대제가 본 환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들이죠. 이것을 문자로 기록한
것이 경전이에요.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평생 한 조각의 벽화도 보지 못한 채 교리를 위해
살아가죠...."
"이게 이른바 원본이라는 거군요."
"이것들은 수세기동안.... 글로는 나타낼 수 없는 수많은 의미들과 상징을 내포한 채 여기서
잠들어있었어요. 여기까지 본 사람은 금세기에 들어서는 저희이외엔 없을 거예요.... 떨려서
걷지도 못하겠어요."
"그렇다고 쓰러지면 곤란한데."
"철가면!"
"미안."
"자, 여기에요... 이 부분부터가 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유나일행은 세라자드의 손이 가리킨 곳을 향해 동시에 눈길을 돌렸다.
"검?"
"저게?"
"검이라기보다는...."
다들 망설이고 있는 와중에,
".......옥수수같군요."
".............."
엘핀스톤이 정곡을 찔렀다. 세라자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유나는 얼굴을 가까이 들
이댔다.
"으음... 이 부분이 검날이고.. 이쪽이 가드... 그럼 이쪽이 손잡이인가... 하지만 가드랑 손잡
이가 초록색같이 보이기도 하니까.... 옥수수처럼 보이기도 하는 군요."
"원래 칠한 염료가 아니라 곰팡이예요."
"어쨌거나 초록색으로 보이네요. 근데 왜 하필 옥수수예요?"
그제서야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 타인의 종교적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감지한 엘핀스톤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저, 죄송합니다."
"보이는 데로 말하는 거야 뭐 어때요. 엘핀씨는 앙그라교인도 아니니 불경죄에 해당하지도
않잖아요."
"그게 바로 비종교인의 마인드라는 거다. 해파리양. 편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 데 좀
가만히 있어!!"
있어, 있어~ 라는 말이 메아리가 되어 공간에 울려퍼졌다.
"히잉.... 맨날 나만 가지고 그래...."
"으음... 정확하게 딱 집어 말하는 건 그렇고... 식물처럼 보이긴 하는 군요. 내 눈에는 보리
같은 데요. 이부분이 지워져있지 않고 이렇게 그려져있기만 해도... 봐요."
"하지만 이 검이 아수라라고 하면 그다지 틀린 것도 아니야. 아수라는 검신과 가드의 비율
이 어긋났는 데다가 손잡이를 밑으로 해서 세워두면 꼭 작물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으음.... 그건 좀 억지예요."
"옥수수보단 나아."
"저... 그 옥수수란 말은 이제 좀 그만..."
"옥수수, 아수라, 보리, 안 나온 거 뭐있죠?"
"앙그라교의 정수를 금세기 들어 최초로 맛보는 사람들의 감상치고는 시시한데?"
크리스티앙이 뒷머리를 슥슥 긁으며 말한 바로 그 뒤였다.
"최초는 아닐세."
방금전까지만 해도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시덥잖은 소리나 해대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소리
가 들린 쪽을 향해 검을 빼어들었다. 통로는 좁고 사람들은 많았지만 전투의 베테랑들은 흐
트러짐 하나 없이 위치를 정하여 진형을 형성했다.
"윽, 손 베였어."
"앞이 안보여요!"
.......물론 몇몇 예외는 빼고.
유나는 새삼 감회가 깊은 듯한 얼굴로 눈 앞에 홀연히 나타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케샤 이븐 라힌 앗달라흐마."
"마지막은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웬일이신가. 늙어말라빠진 몸으로 잘도 여기까지 기어내려왔군 그래."
"입을 조심하시게. 젊은이."
"남의 집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에 예의를 따지나?"
"이렇게 말하긴 싫지만 말일세...."
그는 잠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쑤욱 하고 구부리고 있던 등을 펴자 그는 의외로 당당한 풍
채를 가지고 있었다.
"주소를 잘못 찾아온 건 자네들이 아닌가?"
유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주소?"
"진정으로 초대받은 적이 없는 불청객은 바로 그대가 아니냔 말이지. 이 천방지축 아가씨."
순간, 유나는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대응방식들 중 하나밖에 취할 수 없다
는 것이 진정으로 유감이었다.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이봐, 할아범. 당신 정말로 번지수를 잘못 짚는 군."
"으음?"
"한마디로 남의 판에 끼어서 돈을 다 따가니 꼴보기 싫다 이거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내
가 그따위 거에 요만큼이라도 신경쓸 줄 알아? 결국 이긴 건 나고, 판돈은 내꺼야. 졌으면
집 기둥뿌리 뽑히기 전에 얌전히 꼬리말고 도망가는 게 소위 매너라는 거라구!"
"...........정말 몰라도 한참 모르는 계집이로군."
"그래, 난 너무 젊어서 눈에 뵈는 게 하나도 없다. 당장이라도 골골해서 관속으로 다이빙하
실 늙은 개꼴을 내가 알게 뭐야."
철가면과 크리스티앙을 비롯, 그녀의 독설에 부분적으로나마 3도 화상을 입어본 적이 있는
모든 남자들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팔푼이 같은 패배자주제에."
"너는...."
마침내 그는 천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손에서 지팡이도 떨어졌는 데도 노인의 걸
음걸이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기세에 위세좋게 폭언을 퍼부어댄 유나도 움찔했다. 그의
연령을 생각해볼 때 노인의 심신은 거의 요괴의 반열에 있었다.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이해할 수 없어. 그 조그마한 머리로 수백,
수천년을 굴려보시지! 너희들... 너희들이란 종자는 늘 그 모양이야. 저 조잡한 손에 달린 미
래와 운명이라니! 자격도 가치도 없거늘!"
그러나 노인은 자신의 적을 너무 얕보았다.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기질을 가진 유나는 상
대가 위협하면 위협할 수록 겁을 먹기보다는 허세를 부려서라도 폭언을 퍼붓는 곤란한 성
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실례합니다만, 수백년 수천년동안 굴릴 머리가 애시당초 있어야지요. 그리고 '너희들은 날
이해못해'라굽쇼? 12살짜리가 그런 대사를 내뱉으면 조숙하다고 생각하고 18살짜리가 그렇
게 말하면 예민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내일 곧 죽을 늙은이가 그렇게 주절거리면 그건 노
망입니다만. 허리펴고 분기탱천해서 그렇게 외치시면 오오~ 제발 이해시켜주세요, 라고 절절
맬 줄 알았나보지? 어차피 당신은 패배자라고. 아니, 패배자라기보다는 다 쓴 일회용품이랄
까, 아무리 제대로 만들어서 갈고 닦아도 결국엔 저어기~ 폐차장에 버려질 운명이란 말이야.
동정이라도 해줄까?"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는 듯 했다. 유나는 칼 대신 혀를 휘두르는 듯 가차가 없었다.
"지그문트 박사의 말이 맞았어. 너희들은 발버둥치고 몸부림치고 온 몸으로 절규하고 있는
거야. 누구를 향해서인지 내가 알게 뭐야. 세상 일이 늘 그렇듯이 파괴하고 개혁하고 재건하
는 이의 눈에 옛것은 별 쓸모가 없어보여. 그 늙은이의 얼굴짝은 이제 그만 빌리시지. 수십
년동안 교단을 틀어잡고 앉아서 사피 알딘의 최대 골칫거리로 군림하던 게 겨우 꼭두각시
였다니, 기가 막히는 군."
이상하게, 노인은 점점 젊어져갔다. 어느샌가 아두스의 뒤에서 빠져나와 유나 바로 옆에 꼭
붙어있던 세라자드에게 노인은 유나에게서 나오는 독기와 기력을 빨아들어 기운을 회복하
는 괴물처럼 보였다. 그는 언제 흥분했냐는 듯 괴기스럽게 웃었다.
".....아직 넌 몰라."
"그래, 난 몰라."
"꼭두각시라고? 그럼 우리의 팔다리를 묶어흔드는 실이 누구의 손과 연결되어 있는 지 아
나?"
"전혀- 몰라."
순간, 파충류를 떠올리게 하는, 반들거리는 악의에 찬 눈빛이 세라자드와 마주쳤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뱀이 팔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세라자드는 저도 모르게 유나의 소매자락
을 꼭 쥐었다.
"이런, 감동적이군."
"어이어이, 그 노인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을 거라면 예의는 지켜. 칼리프이시다."
"그래, 굳이 그 직함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충분히 경의를 표할 대상이다. 기꺼이."
과장된 제스쳐로 유려하게 허리를 숙였으나 세라자드의 떨림은 점점 더해갔다. 한참동안 그
렇게 그의 얼굴을 노려보던 세라자드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당신이야...."
"...세라자드?"
유나는 놀라서 그녀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도 약간은 놀란
듯 했다.
"당신이었어.... 그 검은 남자...."
"뭐?"
"70층까지 내려갔다가... 분명 그대로 계속 읽었다면 맨 마지막 층까지 순식간에 내려왔을
텐데... 중간에서 난 누군가를 만났고... 그는 날 되돌려보냈어."
괴기스러운 웃음이 점점 얼굴에서 사라지고 거기엔 일종의 처연함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들어찼다. 나중에, 실로 나중에 생각했을 때 그 표정을... 미소라고 부를 수도 있을
만큼.
".......기억하시고 계셨군요. 여기에 오신다면 기억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내게... 무언가를 선택하게 했지."
이번만은, 정말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예. 그것도 기억하십니까?"
"선택하지 않으면 돌려보내주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 말도 기억해!"
"예. 분명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사실, 그 자리에서 당신을 죽여버릴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
지요."
현기증이 날 만큼 쇼킹한 말이 안중에도 없는 듯 세라자드는 신들린 사람처럼 갑자기 떠오
른 자신의 기억을 재빨리 말로 옮겼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어. 당신은 무서웠고 여기는 너무 어두워서... 빨리 오라버니랑 아두스
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예. 그때 당신은 선택하셨습니다.
다들 숨도 쉬지 못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게 뭐였지?"
맥이 탁 풀렸다.
"그것만은 기억이 안나시는 거군요. 좋습니다."
조금씩, 아까의 괴기함이 다시금 얼굴 위에 번지고 있었다.
"이 과정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기억나지 않으시다니....
어쩔 수 없군요."
그 과정이 무엇인지, 일행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것은 소연과 경님, 살라딘은 이미 한
번 본 모습이었다. 시즈로의 변환. 한때 이븐 시나가 지금 그가 내뿜는 독기와 맞먹을 만큼
의 광기를 품고 나타나 갑자기 세라자드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했다. 허나 실패하고 마지막
으로 '그녀'를 원망하면서 죽어가자 그의 시신이 변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시신이 더욱 차가
워져가는 과정.
"뭐였어! 당신은 내게 무엇을 물었지?!"
세라자드는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뱉어낸 원망과 한을
유나가 가볍게 짓밟았듯, 그도 똑같은 짓을 세라자드에게 했다. 그의 얼굴이 비늘같은 금속
과 혈관에 덮여 헬멧너머로 사라지면서 잠시 웃었다.
"당신이 생각해내서야 합니다."
그리고 시즈.
그 검은 갑주와 무표정의 의미는 단 하나였다.
-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
남은 것은 검의 대화, 결투 뿐이었다.
첫댓글 아..잼있다 ㅠ.ㅠ
이렇게 까지 발악을 했는데 원래 스토리로 돌아갈 결말을 생각하면..ㅠ_ㅜ
헉, 60화 안에 끝나나요??
멋져요~~!! 푸른고래님 최고~~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