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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에 만들어진 <조선내란지도>
1894년, 한반도 남쪽이 붉은 불길에 휩싸였다. 동학 농민 혁명의 함성이 전라도를 넘어 충청도까지 진동하던 그해 여름, 현해탄 건너 일본에서는 기이한 지도 한 장이 빠르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강덕상자료센터가 소장한 <조선내란지도>(朝鮮内乱地圖)는 단순한 지리 정보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130년 전 일본이 조선의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 시선이 어떻게 청일 전쟁이라는 거대한 파국으로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이다.
이 지도는 일본이 제국주의의 욕망을 숨긴 채, 일본 국민들의 눈과 귀를 속이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작된 정교한 ‘선전 도구’였다. ‘혁명’을 ‘내란’으로 조작하고 파병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치밀한 ‘가짜 뉴스’가 객관성의 가면을 쓰고 횡행했다. 지도는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894년에 만든 '조선내란지도'. 이 지도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삼키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여론을 조작하고 전쟁을 기획했는지를 보여 주는 서늘한 증거다. 일본군은 총포를 쏘기 전에, 지도라는 무기로 이미 조선을 점령하고 있었다. (자료 제공 = 강덕상자료센터)
결정적 증거, “1894년 6월 10일”의 미스터리
지도의 좌측 하단,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보일 듯한 작은 글씨 속에 이 지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단서가 숨겨져 있다.
“명치 27년 6월 10일 인쇄, 동월 일 발행”
“저작자 호시노 겐(星野憲), 발행자 다나카 다키치(田中太吉)”
이 날짜가 갖는 의미는 실로 엄중하다. 1894년 6월 10일은 청일 전쟁(7월 25일 발발)이 시작되기 한 달 전이자, 일본군이 톈진 조약에 따른 ‘거류민 보호’를 핑계로 제물포에 막 상륙하여 한성으로 진입을 시도하던 시점이다.
즉, 일본은 군대를 보내는 군사 작전과 동시에 이 지도를 찍어 내는 ‘여론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일본 국민들에게 “지금 조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우리 군대가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지”를 시각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긴급 보도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나카 다키치가 발행한 이 지도는 당시 부상하던 일본 사회의 전쟁 열기에 부채질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공포의 시각화, 한반도 남부를 ‘삭제’하다
지도를 펼쳤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뒤덮은 선명한 ‘붉은색’(赤色)이다. 지도 제작자는 동학 농민군이 장악한 지역을 마치 핏빛 얼룩이나 거대한 화염처럼 묘사했다.
우측 하단의 ‘도중 기호(범례)’ 상자는 이 붉은색의 의미를 더욱 적나라하게 규정한다.
붉은색 빗금 : ‘폭동지(暴動地)’
이중 원(◎) : ‘폭동 근거(暴動根拠)’
도상학적으로 붉은색은 ‘위험’, ‘경고’, ‘금지’를 상징한다. 이 지도를 접한 일본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지도는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조선의 절반이 붉은 세력에게 잠식당했다. 조선 정부는 이 혼란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
일본은 부패한 봉건 체제에 항거한 민중의 ‘혁명’을 ‘폭동’으로 변질시켰다. 동학 농민군을 정치적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진압해야 할 ‘범죄 집단’으로 규정하는 프레임이다. 특히 ‘폭동 근거’라는 군사 용어는 농민군의 집결지를 단순한 마을이 아닌 ‘타격해야 할 군사 목표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지도의 나머지 부분이 옅은 색으로 처리된 것과 대비되어, 붉은 영역은 반드시 ‘지워져야 할 비정상적 공간’으로 타자화되었다. 이 시각적 충격은 일본 대중에게 “조선의 절반이 폭도들에게 잠식당했으니, 강력한 힘(일본군)이 개입하여 이 불길을 잡아야 한다.”는 심리적 동의를 이끌어 내는 고도의 장치였다.
'조선소란지개도'(朝鮮騒乱地概図).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5월 31일)하기 직전, 일본 언론은 급하게 펜으로 그린 듯한 이 거친 지도를 배포했다. 핵심어는 ‘소란’이다. 아직 일본 정부의 파병 논리가 완성되기 전, 이 지도는 전라도 일대(전주, 고부, 태인)에 거친 빗금을 쳐서 “남쪽에서 불온한 사태가 터졌다.”는 ‘속보성 경보’를 울렸다. 일본 대중에게 조선을 ‘불안한 이웃’으로 각인시키고, 향후 개입을 위한 심리적 밑밥을 까는 단계였다. 《東京朝日新聞》, 1894년 5월 27일자. (자료 제공 = 강덕상자료센터)
왜 ‘혁명’이 아닌 ‘내란’인가
지도 상단에 박힌 ‘조선 내란’이라는 두 글자는 일본의 정치적 계산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894년의 봉기는 부패한 봉건 체제에 항거한 민중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철저히 치안 부재 상태인 ‘내란’으로 규정했다. ‘내란’이라는 프레임은 “조선 정부가 자력으로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는 곧 톈진 조약 등을 빌미로 “거류민 보호와 동양 평화를 위해 일본군이 파병해야 한다.”는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지도의 제목 자체가 이미 일본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현장 부재 증명)였던 셈이다. 지도 좌측의 정세 보고문에는 “동학당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청나라 군대가 아산에 상륙했으니, 우리(일본)도 군대를 보내 공사관과 상민을 보호한다.”는 내용이 버젓이 적혀 있다.
정밀한 ‘이정표’ : 지도는 진격로를 알고 있었다
<조선내란지도>가 단순한 선전물을 넘어 섬뜩함을 주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정보의 ‘치밀함’ 때문이다. 지도에는 근대적 측량 기술인 경위도선(격자망)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지도 하단의 ‘전라충청양도각지지리이정(全羅忠清兩道各地地理里程)’이다.
전주 : 62리 16정
공주 : 34리 22정
나주 : 83리 27정
경성을 기점으로 전라도와 충청도의 주요 도시까지 거리가 ‘리(里)’와 ‘정(丁)’ 단위로 오차 없이 기록되어 있다. 근대 전쟁에서 거리 정보는 보급로 확보와 부대 이동 속도를 계산하는 핵심 데이터다. 일본군은 이미 경성에서 출발해 전주성까지 가는 데 며칠이 걸릴지, 식량은 얼마나 필요할지를 계산하고 있었던 셈이다.
더욱이 ‘조선정토군지장교(朝鮮征討軍之將校)’ 명단에는 홍계훈, 이기동, 이종원 등 조선 관군 지휘관의 실명이 정확히 기재되어 있다. 이는 일본의 정보망이 조선 조정의 인사 발령과 군사 편제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증거다.
또 지도는 인천(2,504명), 부산(4,550명) 등 개항장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를 꼼꼼히 명시하여 약 8,500명이 넘는 자국민이 ‘내란의 땅’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숫자로 보여 주었다. 이는 파병을 ‘자국민 구출 작전’이자 ‘인도주의적 개입’으로 둔갑시키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자국민이 ‘붉게 물든 내란의 땅’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수치로 보여 줌으로써, 일본은 파병을 ‘자국민 구출 작전’으로 둔갑시켰다.
‘조선인국도’에 숨겨진 제국의 야심 : 한반도를 넘어 대륙으로
지도 좌측 상단에 별도로 그려진 <조선인국도>(朝鮮隣國圖)는 일본의 시선이 한반도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웅변한다. 지도는 한반도를 중앙에 두고 서쪽의 중국, 북쪽의 러시아, 동쪽의 일본을 배치했다. 이는 조선을 열강의 틈바구니에 낀 '이익선'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특히 일본 나가사키와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해, 부산, 인천을 거쳐 중국 대련과 상해로 뻗어 나가는 해상 경로가 점선으로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점선은 단순한 무역 항로가 아니었다. 유사시 일본 육군이 대륙으로 쏟아져 들어갈 ‘침략의 고속도로’였다. 실제로 1894년 6월, 일본군은 이 점선을 따라 인천에 상륙했다. 이 작은 삽도는 조선을 징검다리 삼아 대륙(청나라)을 집어삼키려는 제국주의의 거대한 ‘빅 픽처’(큰 그림)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청한연락지도'(清韓連絡地図). 풍도 해전(7월 25일) 발발 5일 전, 지도의 초점은 급격히 바뀐다. '청한연락지도'는 조선 내부가 아니라, 바다 건너 ‘지나(청나라)’를 정조준한다. 지도 위에는 중국 텐진/산둥반도와 조선을 잇는 ‘바닷길 점선’이 선명하다. “청나라가 바다를 건너 조선을 지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다. 이는 전쟁의 대상을 ‘동학 농민군’에서 ‘청나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장치였다. 일본은 이 지도를 통해 “청나라와의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해전의 명분을 만들고, 전쟁터를 한반도에서 황해 전체로 확장시켰다. 《読売新聞》 1894년 7월 20일자. (자료 제공 = 강덕상자료센터)
1592년 망령의 소환 : 역사라는 이름의 선동
지도의 우측, ‘풍공정한지고전장’(豊公征韓之古戰場)이라는 목록은 이 지도의 성격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다. 여기서 ‘풍공’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뜻한다.
지도 제작자는 1894년의 조선 지도 위에 300년 전 임진왜란의 전적지를 겹쳐 놓았다.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울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평양),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가덕) 등 침략의 선봉장들이 활약했던 장소를 나열하며, “과거 명나라 군대를 격파했다”는 승리의 기억을 소환한다.
이는 곧 닥쳐올 청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일본 국민들에게 “우리는 과거에도 대륙과 싸워 이겼다”는 민족주의적 열기를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1592년의 야망을 1894년의 현실로 연결하려는 역사적 활용인 셈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한국원정 고전장'(豊臣秀吉の韓国遠征古戦場). 일본군이 제물포에 상륙하던 6월, 지도는 갑자기 300년 전의 역사를 소환한다. 6월 18일 발행된 이 지도는 노골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한국 원정’을 제목으로 달았다. 지도의 굵은 선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진격로(부산 → 서울 → 평양)를 보여 준다. 이는 1894년 일본군이 밟아 갈 침략 경로와 정확히 겹친다. 일본은 이 지도를 통해 “1592년 우리 조상들이 갔던 그 길을, 1894년 우리가 다시 간다.”는 식의 민족주의적 열기를 주입했다. 침략 전쟁을 ‘미완의 과업을 완수하는 성전(聖戰)’으로 포장하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読売新聞》, 1894년 6월 18일자. (자료 제공 = 강덕상자료센터)
총보다 먼저 도착한 지도
1894년 6월 10일 인쇄된 이 <조선내란지도>는 일본의 함대가 풍도 앞바다에서 포탄을 쏘기(7월 25일) 훨씬 전부터 이미 ‘이미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폭동’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학살의 명분을 만들고, ‘인국도’를 통해 대륙 진출의 꿈을 자극하며, ‘6월 10일’이라는 절묘한 타이밍에 배포된 <조선내란지도>는 정밀한 측량과 정보 수집, 위기의 시각적 조장, 역사적 명분 조작이 결합된 ‘총체적 통제 기술’의 산물이었다. 일본은 총포를 쏘기 전에 이미 지도를 통해 조선을 점령하고 있었다.
붉게 칠한 한반도 지도. 그것은 근대화라는 가면을 쓴 제국주의가 조선을 어떻게 ‘바라보고’, ‘상상’하고, 끝내 ‘사냥’하려 했는지를 보여 주는 서늘한 증거로 우리 앞에 남아 있다.
'우리 육군이 성환에서 대승리'(我陸軍が成歓で大勝利), 전쟁 초기 승패가 갈린 직후인 8월 3일, 지도는 ‘환희’ 그 자체로 변한다. 성환 전투의 승리를 알리는 이 지도는 지형도라기보다 만화에 가깝다. 성환 지역에는 ‘방사형 폭발 무늬’가 그려져 있고, ‘제국육군 만세’, ‘대승리’, ‘지나병 격퇴’라는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다. 이전 단계의 지도들이 파병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였다면, 이 지도는 국민들을 전쟁의 광기로 몰아넣는 ‘마약’이었다. 이 지도를 본 일본인들은 열광했고, 전쟁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조차 환호성 속에 묻혀 버렸다. 《読売新聞》, 1894년 8월 3일자. (자료 제공 = 강덕상자료센터)
이규수
동농문화재단 부설 강덕상자료센터장. 한국근현대사 전공. 역사문헌을 바탕으로 근현대 일본인의 한국인식과 상호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강덕상 소장자료의 정리와 분류, 목록화 작업 등의 기초작업을 통해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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