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이승만
“한 위대한 한국인을 눈물로 추모하며”
지난 6월 중순 한 SNS 채널을 통해 접한 글의 제목이다. 그 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추모의 글을 시작했다.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에 있는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환자가 유명을 달리했다.”
(누군가 3년 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그 글을 다소 다듬어 여기에 공유한다)
한 달 전부터 각혈을 했다.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인 7월 18일엔 너무도 많은 피를 토했기 때문에 임종이 멀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사람은 평생 동안 곁에서 돕고 수발하던 부인과 대(代)라도 잇기 위해 들인 양자 한 명, 그리고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 호흡을 크게 한 번 들이 쉬더니 이내 영면의 눈을 감았다. 파란만장한 길을 함께 걸으며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벽안(碧眼)의 아내가 오열했다.
작가 이동욱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영결식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였는지! 그 때문에 네가 얼마나 수많은 고통을 격어 왔는지! 바로 잃어버린 조국, 빼앗긴 국토를 되찾으려는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온갖 조소와 비난받으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 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다. 그는 1920년 하와이에서 일하다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중년의 한 조선인이 찾아와 중국인 유해를 안치할 그 관(棺)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다.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다. 그는 바로 조선인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의 나이 당시 45세, 미국인 장의사의 도움으로 그는 비서 임병직과 함께 실제 관에 들어가 멀리 태평양 건너, 중국 상하이행 밀항에 성공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 그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아 왔는지 나는 알아!”
미국인 친구의 피를 토하듯 한 절규. 이 절규는 그냥 넋두리 푸념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온 통한의 절규였다.
이제 3일 후면 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58주기다. 이승만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당시 내 나이 14살. 그로부터 50여 년을 살았건만 내가 이분의 위업에 눈뜬 건 최근의 일.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른바 촛불광풍 덕분이었다.
언젠가 누군가 이스라엘에 선지자 모세가 있다면 대한민국엔 이승만 대통령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과장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3년 전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을 때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그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걸! 그런 분을 나이 70이 돼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그렇다. 만약 이승만 대통령에게 공산주의의 본질과 미국의 잠재력을 미리 내다 보는 혜안, 실로 모세와 같은 지혜와 신념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쳐다보고 있을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의 미국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 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오로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의 말이다. 하긴 이승만 대통령의 위업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우리가 시대적으로 너무도 그에 가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 하와이로 물러난 후 교포가 내 준 30평짜리 낡은 집,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집에서 어렵게 살았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친정에서 보내준 옷가지의 포장용 종이 박스를 옷장으로 사용했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 행 여비를 모은다고 이발비를 아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이 대통령이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자 부인이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한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동유럽과 인도차이나 반도를 제외한 아시아 대륙 전체가 공산주의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하고, 또 625남침전쟁으로부터 지켜낸 세계적 위인,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7월 19일 수요일,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야겠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 묘소에서 참회의 말씀이라도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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