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분들의 식견이 높으셔서 짧은 지식으로 글쓰기가 약간은 꺼려지지만 용기를 내 적어봅니다.
여기 적고자 하는 밀집보병 전술은 고대그리스 폴리스 체제에서 사용하던 전술이며 스파르타 보병을 기준으로 합니다. 군대시절 읽은 데르모필레 전투를 배경으로 하는 '불의 문' 이란 책에서 얻은 지식이니 혹시 스파르타에 관심 있으신 분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시기 적극 추천합니다. 읽은지 6년 정도 된거 같은데 최근 드라마 'ROME' 이나 글래디에이터 같은 중량감이 마구 느껴지는 책입니다.
팔랑스 전술은 고대세계에서 여러 형태로 발전해 왔지만 고대그리스를 시작으로 발전한것이죠.
고대 그리스에서의 국가간의 전투는 두 집단의 밀집보병이 평지에서 서로 맞부딧쳐서 돌격력과 밀집보병 진형의 견고함으로 승부를 겨루던, 어찌보면 조금 단순하고 빠른 시간안에 승패를 보이는 전투였습니다. 후대에 기병을 사용하면서 기존의 밀집보병 형태를 변화시킨 마케도니아에 이르기전까지 고대 그리스 국가간의 전투는 나름대로 신성한것이었고 정정당당하게 승패를 겨루는 결투 같은 성향이 강했죠. 그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국가가 스파르타인데,
단순한 전술이지만 강도높은 훈련으로 완성도를 극대화 해서 순간적인 승패에 대적할 국가가 없었죠. 잘 알려진 스파르타식 이란 말은 웬지 무식해보이고 무대뽀 느낌이 들지만 그런 강도높은 훈련을 받던 스파르타 군인들은 모두가 귀족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후대 로마 직업군인과 달리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을 가진 병사들이었죠. 스파르타는 알다시피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한 농업사회였는데, 경제부분을 모드 노예에 맞기고 귀족들은 30세까지 모두 병영에서 강도높은 훈련을 받고, 30세가 넘더라도 역시 1년내내 훈련과 전투만으로 평생을 하는 사람들이 귀족이며 사회 지도층이었으니, 군사적인 능력 외에 문화, 경제등은 발전하지 않았지만, 모든 병사는 단순한 전쟁광들이 아닌 깊은 생각을 지닌 Noble Man 이었던것이죠. 뭐 남성들이 모두 전쟁에만 종사하니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높았다는건 바이킹족과도 비슷하군요. 평생을 거쳐 전쟁에 종사하는 사회 지도층이라, 스파르타군 병사 개개인은 모두가 한명의 훌룡한 병사이자, 지휘관이었죠. 즉 방진을 형성하는 각각의 병사들이 모두가 하나의 전술과 전투방식, 그리고 이기기 위한 자신들의 역활과 진형전체를 모두 이해하는 군사집단이었던것이죠. 정말 엄청난 엘리트 군사집단이라고 밖에 할말이 없습니다.
보통 당시 보병의 장비는 2미터 20센티 가량의 투척 가능한 창과, 60센티 미만의 검, 그리고 90센티 지름의 원형방패와 보호구를 장비했는데, 저 창으로 전열 3열까지 정면으로 창을 내세웠죠. 당시 전투의 전술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단순합니다. 기병의 사용은 없었는데 말을 사용하는것은 신성한 전투에 먹칠을 하는것이었으며 중무장 밀집보병으로서 대결은 그들이 포기할 수 없는 뭔가였던 모양입니다.
잠시 옆으로 세지만, 역사적으로 더 나은 전술이건 무언가를 내세워 승승장구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마케도니아 역시 기존의 밀집보병 전술을 버리고 새로운 팔랑스를 만들어내고 전투에 사용되지 않던 기병을 내세워 전술적 우위를 얻어 연전연승 합니다. 그런데 이때 마케도니아를 그저 변방의 야만국 정도로 생각하던 그리스에선 기병을 당하면서도 사용하지 않았다는것이죠. 새로운것을 들고 나오면 그것이 당장 상대도 배울 수 있을것 같다고 생각되어도 사실은 깨지고 나서야 변화에 따르는 경우가 역사에선 흔합니다. 콜럼부스의 달걀처럼 역사에선 그 일이 쉬운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먼저 생각하고 남들이 전혀 하지 않을 당시에 해서 이점을 얻는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보통은 아무리 새로운 방법이 쉬웠다 할지라도 그 먼저 나선 사람이 성공을 하기 전까진 기존방식을 고수하던 사람들은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보통이죠. 따라서 역사적으로 최초로 해낸 사람을 이미 노하우가 전수된 후대의 기준으로 보아 깍아내리는건 적절하지 않고, 최초의 시도자들은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 박사 같은 엄청난 상상력과, 실행력을 가진 사람들로 봐야 할듯 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고대 그리스의 전투는 비탈이 없고 넓은 평야에서 시작됩니다. 돌격력이 승패의 중요한 요인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경사가 있는 장소에선 아예 전투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지형적인 우위 선점? 뭐 그런거 일절 없었죠. 똑같은 조건을 가진 장소가 아니면 처음부터 전투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써우는 전투인만큼 어느쪽이 더 움직임이 좋느냐에 따라 승패는 결정됩니다. 전쟁이 시작하면 양족에 진을 친 두 부대는 서로를 향해 달려나갑니다. 이 경우 훈련의 정도에 따라 달리면서 진형이 흔들리거나 호흡이 흐트러질수 있는데 이경우 매우 위험해집니다. 양 진형이 부딪치면서 가장 앞렬의 병사는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됩니다. 적진과 아군의 돌격을 모두 몸으로 버텨내야 합니다. 이 진형의 돌격은 진형전체가 앞렬부터 맨 뒷열까지 빡빡하게 서로를 끼고 상대 진형과 부딧칠때 모든 열의 무게를 실어 상대방 진형에 압력을 가합니다. 보통 훈련도가 낮은 병력은 이 시점에 이미 패배합니다. 돌격시 진형의 흐트러짐이나 전투 시작시 상대방 차징을 버텨내지 못하고 진형이 흐트러져 버리는 순간 빠르게 상대방에 의해 정리되고 전투는 순식간에 끝납니다. 스파르타의 경우 이처럼 단순한 전투 방식에서도 나름대로의 전술을 발달 시켰는데. 진형을 견고하게 유지하면서 상대진형의 왼쪽, 즉 오른쪽을 포위해나가는 방식이었죠. 방패를 왼손으로 들고 무기를 오른손으로 드니 일렬의 진형으로 서로 부딧쳐도 진형은 서로 상대의 왼쪽을 감싸는 식으로 변화 됩니다. 직 사각형의 진형이 약간 태극 형식으로 감싸게 된다고 할까요. 아무튼 자신의 진형의 왼쪽을 지켜내면서 오른쪽, 즉 상대의 왼쪽을 감사 않는 식으로 어느정도 포위라고 할만한 우위를 얻게 됩니다. 아무튼 이런식으로 단순한 전투방식이지만 사소한것 하나하나 극한까지 단련한 스파르타 군은 그리스에서 최강 육군의 자리를 고수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선 스파르타 군인의 방패만 봐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조금만 덧붙이자면 데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 왕이 스파르타군 300명이 페르시아 대군을 막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얘기입니다. 기본적으로 스파르타군이 300명이 뽑혀서 간것은 맞지만, 스파르타 각각의 병사들은 자신의 종자를 데리고 다닙니다. 물론 전투에 따라 나가는 종자도 자유민입니다. 노예는 전투 참가가 금지되있었죠. 종자들은 가죽 방어구를 하고 주로 투창, 혹은 돌팔매 등으로 보병 구성에 부족한 원거리 공격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데르모필레 전투에 스파르타군 만이 참전한 것이 아니고 다른 폴리스에서도 참전을 해서 3천 정도 병력으로 막았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렇다 해도 엄청난 병력차이.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스파르타의 순수혈통을 물려받은 자는 병역의 의무가 있었습니다. 전투연령에 이른 성인남자 전원이 병사죠. 또한 농노보다는 지위가 높고 스파르타 시민보다는 지위가 낮은 페리오이코이라는 계층도 병사로 징집당했다죠.. 다만 이들에게는 참정권이 없다는... 여하튼 스파르타는 거의 모든 성인남자들이 군인이죠.
이 이야기가 페르시아 전쟁 당시니까 BC 500 년 기준으로 봐야하니. 스파르타 계층이 시민-반자유민-노예 3가지이고 비율은 시민이 5~10%, 노예가 80% 이상이고 반 자유민은 시민의 배 가량 됐다고 하네요. 당시 시민의 수는 8천명이라고 하는데 여자도 포함하는지는 모르겠네요. 포함한다면 시민남성이 4천명일테고
그 중에 훈령중인 아동은 제외하더라도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은 한 2천명 될듯 싶네요. 시민이 남녀 포함한다고 생각해보면 대략 계산으로 시민 8천명, 반자유민 1만6천명, 노예 9만6천명 합하면 12만, 비슷한 시기 아테네 인구가 15~20만명 이었다고 하니 스파르타가 아테네보다 인구가 적었으니 시민 8천명은
여성 포함 맞는듯 하네요. 스파르타는 법적으로 시민은 노동이 금지 되있었고, 페쇄적인 농업경제 형태로 에일로타이 라고 노예들이 노동을 담당하고 시민은 6세부터 훈련받기 시작해 정년퇴직 할 때 까지 군사훈련과 전쟁에 종사했다고 하고요. 본문에 다 귀족이었다는 글은 제가 엄하게 기억하는 바람에 적은 글이네요.;
단지 귀족도 똑같은 시민으로 훈련받고 똑같은 보병으로 똑같이 방패 맞대고 싸웠다는건 맞고요. 레오니다스 왕도 일반 병사와 먹고 자고 싸우는것부터 행색까지 다 똑같았다고 하네요. 실제로 스파르타 정치 체제가 시민 전원으로 이루어진 민회에 의해 28명의 원로원과 5명의 민선장관이 뽑혔고, 아테네가 민주정인데
...;; 암튼 스파르타가 귀족정으로 알려졌지만 정치 자체는 오히려 민주적이었다고 하네요. 결국 귀족이라는 것도 시민중에 나름대로 명망있는 집안 정도 같네요. 저도 소설 내용으로 적은거라 댓글 읽다가 궁금해져서 급히 찾아본 내용인데, 병사들이 다 귀족이라 생각한건 그렇게 느껴져서 잘못 기억한거 같고
고대 그리스 시기, 스타르타의 성인 시민 숫자(=군인 숫자)는 1만 명을 넘어가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최대한 늘어난 게 1만 명 정도였고, 보통은 수천 명 수준이었죠. 이 수천 명 밖에 안되는 성인 시민으로 수십만의 헬로트 노예들을 억누르려다 보니, 모든 시민들이 군대에 들어가 먹고 자야 했던 거죠.
헬로트 노예들은 언제 반란을 일으킬 지 모를 존재들이었고, 이들을 누르기 위해 군국주의화가 진행된 게 스파르타 체제였죠. 그래서 사실 스파르타 군 대부분은 언제나 본국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원래 목적이 노예 반란 진압이니, 원정이니 뭐니 해서 주력 군사력을 오래동안 밖에서 머물게 할 수가 없었죠. 군대가 밖에
그리고 확실히 스파르트 시민들 사이에서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적 분위기가 존재했습니다. "시민이 부유해지면 법을 따르지 않게 된다"는 사고방식에 따라, 국가는 시민들 사이에 빈부격차가 생기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금화-은화를 없애고 철 돈을 쓰게 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빈부격차를 막으려 했습
니다. 그 결과 모든 시민들이 하향평준화되어서 부유한 자가 없게 되어, 평등이 유지되었죠. 모두 의식주 걱정은 없지만 풍요로운 생활과는 거리가 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관리를 뽑고 정책을 정하는 등 의외로 민주주의적인 면모도 강하게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스파르타가 과두정이라 해도 과두정이라는게 따지고 보면 요즘 정치체제와 거의 흡사한듯 하네요. 아테네의 경우 직접민주정치, 그중에 정치에 참여하는 10%정도의 시민들로 의사결정이 된 정치체제였고, 스파르타의 경우 시민들이 뽑은 원로 위원들이 정치를 담당했으니 단순히 민주적인 아테네와 다르다고
하기에는 너무 교과서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어차피 대부분의 그리스 사회는 노예의 노동력에 기반을 두고 발달한 문화다 보니 그 점은 아테네 역시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긴 했지만, 사실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지탱한것도 노예인지라 그걸 차이로 보기는 어려운듯 싶군요.
실제로 스파르타의 정치 체계를 민주정, 과두정, 귀족정 으로 다양하게 보는 시각이 있던데, 시민이 정치세력을 뽑고, 엄연히 왕이 존재한터라 왕의 독단을 막기 위해 몇몇 귀족들로 이루어진 정치단체가 있었다고 하는데, 결국 민주정과 과두정, 그리고 귀족정 중 하나로 정의하긴 어렵고 여러 요소를 띄고
시대상황에 따라 좀 더 특정한 요소가 드러났다고 보는게 적절할듯 싶네요. 다만 스파르타의 정책 자체가 페쇄적이고 많은 수의 국가노예들의 잠재적인 불만이 컷을테니 그런점이 약점이었는듯 한데, 결국 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테네나 스파르타나 확연한 세력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도
의 정치체제의 큰 차이점은 바로 시민들의 직접적인 의사표출을 담당하는 민회의 기능과 권한이 결정적이라 봅니다. 스파르타의 경우 민회는 정치적 권한이 강하질 못한 반면에, 아테네의 가장 큰 권력기구는 다름아닌 민회였습니다. 스파르타를 아테네 민주정에 비해 과두정이라 볼 수 있는 여지가 바로 여기에 있죠.
그들의 선출방식이 어떠했든 시민의 직접적인 대표기구인 민회에 권력이 없었고, 선출직이라 할지라도 5명의 감독관에게 주요 권력이 집중되 있던 것은 분명 과두정에 가까웠을 겁니다. 과두정이란 넓게 본다면 권력획득의 과정이나 선출방식에 상관없이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을 의미하니까요.
첫댓글 지식을 나누는것은 언제나 환영합니다만... 띄어쓰기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어흠)
역시 밀집 중보병이 제 로망입니다. -ㅅ-;
로마군이 포에니 전쟁중에 도입한 에스파냐 단검 `글라디우스`가 위와 같은 밀집전 상황에서 엄청난 효율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중세로 넘어와 근접용 중장보병 표준 무장이 브로드소드로 넘어간 건가요?
아무래도 판금갑옷의 발달이 가장 큰이유가 아닐가 합니다. 고대에는 로마 군단병정도의 장비도 중장비였지만 중세로 넘어오면 말그대로 중(重)장비가 되버리니까요.
전 장창병보다는 그냥 창병에 더 호감이 가더군요. 허접한 중동창병...
스파르타 군인들이 모두 귀족이었나요? 그냥 시민들 아니었나요? 스파르타 군인들이 한 5만명정도 되었다고 알고있는데요.... 귀족이 5만명이라면... 피지배층인 노예들의 수가 수백만명정도 되야할것같다는 생각이 조심스레 듭니다
모든 스파르타의 순수혈통을 물려받은 자는 병역의 의무가 있었습니다. 전투연령에 이른 성인남자 전원이 병사죠. 또한 농노보다는 지위가 높고 스파르타 시민보다는 지위가 낮은 페리오이코이라는 계층도 병사로 징집당했다죠.. 다만 이들에게는 참정권이 없다는... 여하튼 스파르타는 거의 모든 성인남자들이 군인이죠.
귀족의 경우 직접전투보단 지휘를 했겟죠 그땅에 피지배층이 수백만명이란건...;;
이 이야기가 페르시아 전쟁 당시니까 BC 500 년 기준으로 봐야하니. 스파르타 계층이 시민-반자유민-노예 3가지이고 비율은 시민이 5~10%, 노예가 80% 이상이고 반 자유민은 시민의 배 가량 됐다고 하네요. 당시 시민의 수는 8천명이라고 하는데 여자도 포함하는지는 모르겠네요. 포함한다면 시민남성이 4천명일테고
로마의멸망/그리스 세계의 경우에는 귀족들이 일선에서 창들고 방패잡고 나란히 싸웠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뒤에서 전투 지휘하는 페르시아 사령관들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죠;;
그 중에 훈령중인 아동은 제외하더라도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은 한 2천명 될듯 싶네요. 시민이 남녀 포함한다고 생각해보면 대략 계산으로 시민 8천명, 반자유민 1만6천명, 노예 9만6천명 합하면 12만, 비슷한 시기 아테네 인구가 15~20만명 이었다고 하니 스파르타가 아테네보다 인구가 적었으니 시민 8천명은
그 덕분에 훌륭한 지도자를 어이없이 잃는 경우가 많아서 그리스세계의 쇠퇴에 일조 했다는 설도 있더군요
여성 포함 맞는듯 하네요. 스파르타는 법적으로 시민은 노동이 금지 되있었고, 페쇄적인 농업경제 형태로 에일로타이 라고 노예들이 노동을 담당하고 시민은 6세부터 훈련받기 시작해 정년퇴직 할 때 까지 군사훈련과 전쟁에 종사했다고 하고요. 본문에 다 귀족이었다는 글은 제가 엄하게 기억하는 바람에 적은 글이네요.;
아마 그 노예들이...원래 미케네문명때살던 미케네인들 아닌가요 우리가 알고있는 스파르타의 전사들은 도리아 인들......
단지 귀족도 똑같은 시민으로 훈련받고 똑같은 보병으로 똑같이 방패 맞대고 싸웠다는건 맞고요. 레오니다스 왕도 일반 병사와 먹고 자고 싸우는것부터 행색까지 다 똑같았다고 하네요. 실제로 스파르타 정치 체제가 시민 전원으로 이루어진 민회에 의해 28명의 원로원과 5명의 민선장관이 뽑혔고, 아테네가 민주정인데
Fain// 네, 스파르타인이 그 지방에 나라를 세우면서 원래 주민을 반자유민이랑 노예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그 후에 그리스 남서쪽(메세니아)까지 정복해서 그 주민들은 다 노예로 만들엇다고 하네요.
...;; 암튼 스파르타가 귀족정으로 알려졌지만 정치 자체는 오히려 민주적이었다고 하네요. 결국 귀족이라는 것도 시민중에 나름대로 명망있는 집안 정도 같네요. 저도 소설 내용으로 적은거라 댓글 읽다가 궁금해져서 급히 찾아본 내용인데, 병사들이 다 귀족이라 생각한건 그렇게 느껴져서 잘못 기억한거 같고
전술에 대한건 소설내에서가 아니라 책 마지막에 따로 마련된 자료에서 본 내용이니 아마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봐도 좀 보기 피곤한게 뛰워쓰기는 좀 해야겠네요. -,-;
그나저나 이런 글 적었을때 지금껏 싸하던 반응과 달리 댓글이 붙는 자체가...제대로 찾아왔다는 느낌이..ㅠ.ㅠ 말 하자면? 물만난고기? 얼마전 술자리에서 비슷한 류 얘기하다가 얘기하면 할수록 뻘줌해져 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고대 그리스 시기, 스타르타의 성인 시민 숫자(=군인 숫자)는 1만 명을 넘어가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최대한 늘어난 게 1만 명 정도였고, 보통은 수천 명 수준이었죠. 이 수천 명 밖에 안되는 성인 시민으로 수십만의 헬로트 노예들을 억누르려다 보니, 모든 시민들이 군대에 들어가 먹고 자야 했던 거죠.
헬로트 노예들은 언제 반란을 일으킬 지 모를 존재들이었고, 이들을 누르기 위해 군국주의화가 진행된 게 스파르타 체제였죠. 그래서 사실 스파르타 군 대부분은 언제나 본국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원래 목적이 노예 반란 진압이니, 원정이니 뭐니 해서 주력 군사력을 오래동안 밖에서 머물게 할 수가 없었죠. 군대가 밖에
있는 동안에 노예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큰일나니까요. 스파르타 군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정복이 아니라 노예반란 진압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길러진 군사력이 너무 막강해져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확실히 스파르트 시민들 사이에서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적 분위기가 존재했습니다. "시민이 부유해지면 법을 따르지 않게 된다"는 사고방식에 따라, 국가는 시민들 사이에 빈부격차가 생기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금화-은화를 없애고 철 돈을 쓰게 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빈부격차를 막으려 했습
니다. 그 결과 모든 시민들이 하향평준화되어서 부유한 자가 없게 되어, 평등이 유지되었죠. 모두 의식주 걱정은 없지만 풍요로운 생활과는 거리가 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관리를 뽑고 정책을 정하는 등 의외로 민주주의적인 면모도 강하게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모두 헬로트 노예들의 희생을 댓가로 한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헬로트 노예들을 피지배층으로 몰아넣었기에, 시민들 사이의 평등과 정치참여가 가능했던 것이죠.
스파르타와 구별해서 아테네를 민주정이라 하는 것은 국가권력행사가 시민의 직접적인 의사결정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민회의 결정과 직접민주정... 스파르타는 엄연히 과두정이 맞지요.
그런데 결국 스파르타가 과두정이라 해도 과두정이라는게 따지고 보면 요즘 정치체제와 거의 흡사한듯 하네요. 아테네의 경우 직접민주정치, 그중에 정치에 참여하는 10%정도의 시민들로 의사결정이 된 정치체제였고, 스파르타의 경우 시민들이 뽑은 원로 위원들이 정치를 담당했으니 단순히 민주적인 아테네와 다르다고
하기에는 너무 교과서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네요. 그리고 어차피 대부분의 그리스 사회는 노예의 노동력에 기반을 두고 발달한 문화다 보니 그 점은 아테네 역시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긴 했지만, 사실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지탱한것도 노예인지라 그걸 차이로 보기는 어려운듯 싶군요.
실제로 스파르타의 정치 체계를 민주정, 과두정, 귀족정 으로 다양하게 보는 시각이 있던데, 시민이 정치세력을 뽑고, 엄연히 왕이 존재한터라 왕의 독단을 막기 위해 몇몇 귀족들로 이루어진 정치단체가 있었다고 하는데, 결국 민주정과 과두정, 그리고 귀족정 중 하나로 정의하긴 어렵고 여러 요소를 띄고
시대상황에 따라 좀 더 특정한 요소가 드러났다고 보는게 적절할듯 싶네요. 다만 스파르타의 정책 자체가 페쇄적이고 많은 수의 국가노예들의 잠재적인 불만이 컷을테니 그런점이 약점이었는듯 한데, 결국 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테네나 스파르타나 확연한 세력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도
두 폴리스가 힘을 잃게 되는 시기 또한 비슷하니 둘을 비교해서 당시 세력적인 영향력 측면에서 한쪽을 높이는건 정말 어려운 일인듯 하네요. 제가 볼때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구분지어지는 주요요인은 정치체계보다 오히려 정책의 차이를 중요한 부분으로 봐야할거 같네요.
물론 당시 영향력 외에 후대의 문화, 사회적인 영향력에 있어서는 비교자체가 필요없다는건 확실하지만요.
분명 스파르타에는 민회, 60세 이상의 시민으로 구성된 장로회, 두명의 왕과 5명의 에포로이가 상호견제와 균형을 통해 운영되는 정치체제로 단순히 민주정인다 과두정이다 말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아테네 민주정과 스파르타
의 정치체제의 큰 차이점은 바로 시민들의 직접적인 의사표출을 담당하는 민회의 기능과 권한이 결정적이라 봅니다. 스파르타의 경우 민회는 정치적 권한이 강하질 못한 반면에, 아테네의 가장 큰 권력기구는 다름아닌 민회였습니다. 스파르타를 아테네 민주정에 비해 과두정이라 볼 수 있는 여지가 바로 여기에 있죠.
그들의 선출방식이 어떠했든 시민의 직접적인 대표기구인 민회에 권력이 없었고, 선출직이라 할지라도 5명의 감독관에게 주요 권력이 집중되 있던 것은 분명 과두정에 가까웠을 겁니다. 과두정이란 넓게 본다면 권력획득의 과정이나 선출방식에 상관없이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리고 Mesura님의 지적대로 국가조직의 형태와 정책상 운영차이 역시 두 나라를 구분하는 주요 기준이라 봅니다.
불의문,.,.ㅠㅠ.,.결말이 무척 감동적..
저도 불의문 못찾아서 리브로에서 시켜서 정말 감동적으로 봤음
불의 문.. 처음 나왔을 때 샀다가, 친구 빌려줬는데 감감무소식. 벌써 10년은 되었네요.. -_-
도서관에 있어서 보려는 중인데 .. 지금은 알렉산더 대왕을 읽고 있답니다 .ㅎ
화살과 투창을이용한 집중사격이 제 로망입니다.
강희제님과 싸우면 따가운 햇살 걱정은 않해도 되겠군요;; 그늘밑에서 싸울수 있으니 좋구나~ 잇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