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은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했던 지도자였다. 한국학의 본산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설립, 문화예술진흥원 창립, 문화공보부 발족 등은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공이다. 크게는 선열들의 유업을 찬양하고 높임으로 민족문화 창달에 심혈을 기울였고 작게는 세종문화회관 건축시 기둥의 크기까지 일일이 각별한 의견을 제시했던 박정희 대통령, 나는 아직도 그분을 문화대통령으로 기억한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문예진흥원, 문공부 등 설립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창달 위업을 얘기하기엔 역부족인 사람이다. 문화 예술 분야에서 평생 일해 왔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단편적인 일부분에 불과해 자칫 그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공헌에 누를 끼칠까 우려된다. 다만 내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새로운 한국적 민족 문화예술 창달의 기초를 쌓은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분의 문화창달 사상이 구체적으로 표출된 것은 72년에 제정된 문예중흥 선언이었다. 이것이 탁상공론으로 끝나지 않고 문화정책으로 구체화되어 한국학의 본산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설립되었고, 문화예술진흥원이 창립되었으며, 문화공보부(지금의 문화관광부)가 발족되어 오늘날까지도 문화예술 정책을 입안하고 관리하는 부서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문화사의 일획을 그은, 문예중흥 5개년 계획
문화공보부 개편에 따라 70년대 초반부터 국가발전 계획의 일환으로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다. 우리 역사상, 정부가 문화발전에 관심을 갖고 이러한 정책을 입안한 것은 실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국적 있는 교육을 주장했으며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골몰하였다. 특히 우리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선열들의 유업을 찬양하고 높임으로 민족문화창달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글 전용화 정책을 강하게 밀어 붙였고, 이충무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아산 현충사를 중건했으며, 권율 장군의 충장사를 복원했는가 하면, 많은 유적 유물들을 발굴하고 이를 선양시킨 것도 박 대통령의 공이었다.
정신운동이자 잘 살기 위한 운동인 새마을운동이 제대로 계승되지 않은 것은 통탄할 일이다. 새마을운동은 단지 잘살기 운동만이 아니라 문예운동이기도 하였는데 당시 전 국민의 애창곡이었던 행진곡풍의 새마을노래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눈물 젖은 두만강’ 등 체념과 한(恨)의 곡조 일색이던 우리네 정서를 뒤바꾼 일대 개혁이기도 했다.
서울시 중구 남산동에 청사를 짓고 61년 12월 30일 개국한 KBS TV 방송국을 관료조직에서 떼어낸 용단도 박 대통령의 공적 중 하나이다. 한국방송공사를 출범시키지 않았던들 방송의 발전을 꾀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독재를 했다고들 하나 사실 언론정책은 그때가 더 융통성이 있었다.
3공 시절 문화정책의 기조는 민족문화 정체성의 확립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미래에 대한 방향설정의 가장 중요한 기반 구축이기도 했다. 이승만 박사 시절에도 그런 기조가 있긴 하였으나 정책으로 구현하기에는 기간이 짧았다.
보릿고개를 넘어 “잘 살아보세!”
아시아 영화제와 더불어 문화의 개벽이라 평가된 ‘5.16 1주년기념 서울음악제’에 이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민족의 제전’이라는 축제가 열렸다. 그 때 제작되어 나온 노래가 바로 ‘잘 살아보세’다. 한운사 작사ㆍ김희조 작곡인 민요풍의 이 노래는 보릿고개를 넘어 문화국가를 지향하는 서곡으로 꼽을 수 있다.
당시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베이스 이인영과 소프라노 황영금이 독창을 맡았고 대광고등학교 합창단을 비롯한 몇 개의 합창단이 뒷받침을 해주었다.
그 뒤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ㆍ작곡한 것도 문화에 대한 열정의 표시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관은 소박한 것이었지만, 그분의 문화예술적 소양은 전인교육을 지향하고 당시 가난하지만 머리가 좋은 사람들을 선별해 교육시켰던 대구사범 시절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문화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
얼마 전 광화문의 현판을 떼는 문제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결국은 그대로 두는 것으로 낙찰되었는데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광화문을 복원한 것은 박 대통령의 치적이다. 광화문 복원을 놓고 그는 많은 고민을 했다. 옛 모습대로 복원하기를 희망했지만, 그 당시 목재를 구하기란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정부가 돈도 없었고 더구나 헐벗은 산에서 나무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던 것이다. 고육지책으로 콘크리트 공법을 이용해 옛 모양으로 짓기로 결정했다. 당시 하갑청 문화재관리국장을 질책해가며 창의적으로 지은 것이 지금의 광화문으로 콘크리트 건축의 새로운 길을 튼 작품이다. 따라서 거기에 박 대통령의 휘호가 걸려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후 국회의사당, 장충동의 국립극장은 이러한 콘크리트 건물양식을 발전시켰는데 이에 대한 박 대통령의 관심은 역시나 깊었다. 뿐만 아니라 결정판인 세종문화회관의 건축에도 깊은 관심을 표해 심지어 기둥의 크기에까지 각별한 의견을 제시했다.
아산의 현충사를 건립할 때, 박 대통령은 조경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병철씨를 불러 소나무를 옮겨 심는 방법을 연구시켰는데 오늘날 조경 식수의 기본으로 소나무가 들어가는 것은 박 대통령과 이병철씨의 공로이다.
박 대통령은 민족문화가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했고 그것이 박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의 중 하나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박 대통령을 문화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싶다.
/ 이상만(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