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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2년 9월 18일 주일 오전 예배
사도행전 설교
성경낭독 : 렘 8:18-9:1; 눅 16:1-13
본문 : 행 13:13-16, 42-52
제목 :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2편 3,4,5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1편 1,2,3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16편 1,3,5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93편 1-4
성찬식 찬송 – 시 65편 5,6 (고정)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 받는 성도 여러분!
두 가지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서론 : 두 이야기로 시작
1.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
먼저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유아세례가 ‘언약의 표’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유아세례가 언약의 표라는 말의 의미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편에서 무언가를 잘 해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겠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아세례를 받는 아기들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해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아세례가 ‘언약의 표’가 되는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곧 유아세례를 이렇게 요약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유아세례를 통하여 이 아이를 계속해서 붙들고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말하자면 유아세례에서의 언약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기들의 부모님들이라면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시면 됩니다.
“우리 아이는 언약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코 붙들고 놓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아이야!”
우리는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아이들의 구원에 대하여 안심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누가 이렇게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도르트 신조 1장의 마지막 항목은 넣지 말았어야 해. 너무 나갔어. 유아 때에 죽은 아이가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는 것을 신조에 넣은 것은 도르트 신조의 실수였어.”
저는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 이 사람은 도르트 신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제가 도르트 신조를 설교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도르트 신조 1장의 마지막 항목, 곧 “유아기에 죽은 자녀들”에 대한 가르침은 그 앞의 항목인 “자기의 구원을 확신하여 못하여 불안해하는 신자”를 위로하기 위하여 쓰여진 가르침과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곧 “자기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여 불안한 사람”, 그리고 “일찌기 죽은 자기 자녀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여 불안한 사람” 이 둘에 대하여 ‘위로를 주기 위하여’ 쓰여진 대단히 목회적인 항목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항목이야말로 도르트 신조 1장, 곧 예정과 관련된 항목의 보석과 같은 항목입니다.
우리가 이런 신조의 내용을 만날 때, “유아기때 죽은 아이가 어떻게 천국에 갈지 우리가 알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합리주의의 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아이가 천국에 갈지 안 갈지는 모르는 일이지!”라는 것이 마치 신중한 판단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불신앙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고는 이와 다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죽는다고 해서 그 아이가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성경의 인물들은 자녀가 어릴 때에는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모른다고,‘합리적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까?
‘유아세례’가 ‘내가 하나님 앞에 무얼 얼마나 잘 하느냐’에 달려있는 언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유아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를 붙들고 계시겠다는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는 ‘적어도 자기가 그 언약으로부터 자발적으로 탈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무한한 보호를 받습니다. 단지 하나! 그 아이가 믿는 부모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믿음의 자녀’라고 받으시고, 그 아이를 향하여 ‘언약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와 사랑을’ 주십니다.
그것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단 하나 뿐입니다. 아이가 어려서 죽는 것과 같은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자기가 자원하여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뛰쳐 나가는 경우입니다.
곧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의 독특한 성격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망치는 것은 우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태도를 생각할 때, 늘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2. “나는 선택되었는가?” 예배와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태도
이제 둘째 이야기로 가 봅시다.
이것은 ‘예배’와도 연관되어 있고 ‘교회 됨’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도들께서는 자주 들으신 주제이니, 다시 한 번 복습하면서 정리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시다. 둘째 주제는 ‘선택’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에 오신지 오래되지 않은 성도들은 쉽사리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이는 우리 주변의 많은 교회들에서 소위 식견이 있고, 신앙이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주 쉽게 빠지는 함정이기도 합니다. 곧
“교회 안에는 택자와 불택자가 섞여 있다.”
라는 논지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말이 틀렸나요? 아닙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는 당연히 택자와 불택자가 섞여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녀요”라는 표딱지를 달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모두 구원받은 백성인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은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에 근거해서 자꾸 사고하려고 한다’는 점이죠.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교회 안에는 여전히 불신자가 섞여 있다. 이들은 회중 속에 있지만 믿지 않는 자들이다. 자 그러면 혹 내가 그런 사람은 아닌가? 내가 그 가라지는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가라지인지 알곡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그러니 나를 따라서 이 항목들을 잘 살펴보라. 구원받은 백성들의 확실한 표식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니 하나 하나 잘 비교 분석하면서, 내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백성인지 혹 가라지는 아닌지 잘 살펴보도록 하라.”
아마 우리 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저로부터 이딴 짓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정말로 ‘이딴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네가 정말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항상 잘 살펴봐라” 이렇게 가르칩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그저 우리에게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말씀을 따라 살거라”라고 말씀할 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밀한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은 일, 곧 저 비밀한 휘장 뒤편의 이야기는 알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 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적어도 그가 교회라는 외적인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을 때’ 그가 참 신자인지 거짓 신자인지, 확인하려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히 ‘언약 안에 있는 것’과 ‘선택을 받은 것’은 같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에 언약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내적으로는 선택을 받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요지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별하려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안에’ 있기만 하면, 그 사람을 ‘선택’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택자냐 아니냐’라고 따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약 안에 있는 모두를 ‘복된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십니다. 여기에 ‘선택’에 기초해서 미래를 내다보고 ‘미리 행하는’ 그런 종류의 일은 ‘전혀’ 없습니다.
1) 예배를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선포하는 인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우리를 향해서 “너희 중 선택된 자들만 이 인사에 해당한다”고 구별하십니까? 아닙니다. ‘교회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언약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복되심 속에 들어오라는 초청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언약 안에’ 있는 이들에게 복을 약속하셨지, ‘선택 안에’ 있는 이들에게 복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예배가 마칠 때의 강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들어올리셨던 그 손, 그래서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들 중 택자들에게만 나의 이 보호하심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2) 고린도 교회나 광야에 있었던 구약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중에 악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 불택자였음이 분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멸해야 할 여리고의 탈취물을 숨겨서 그 자리에서 멸망한 아간조차, 모세에게 대항함으로써 땅이 입을 벌려 그 자리에서 그들을 삼켜 버렸던 고라나 다단이나 아비람조차, “너희는 최종적인 선택의 견지에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니, 지금 예배의 강복은 너희에게는 해당하지 않아”라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파당을 짓고, 은사를 남발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선생들조차도, 예배 때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 1:2)이라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택’의 잣대로 우리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잣대로 우리를 대하시고, 이 말은 비록 하나님의 마음속에,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비밀 속에, 저 커튼의 뒤에, 그 사람이 택자이건 불택자이건 간에, 그것은 우리가 알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단 한번도 이것을 근거로 사람을 대하거나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떠한 이유로 이렇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것이 바로 ‘언약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특성이란, 우리가 앞서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에 대해 말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의 특성은 ‘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품으시기 위한 것’이고, ‘죄인을 부르시기 위한 것’이지 ‘죄인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우리는 전도여행의 그 다음 행로를 통해서 바로 이 주제를 보게 됩니다.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
지난 주일에 우리는 ‘구브로 섬’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먼저 살라미에서, 그리고 나아가 바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특별히 거기서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만났고, 대결을 펼쳤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을 보시면 이제 이 일행들은 바보로부터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갔다고 합니다. 지중해에 있는 섬인 ‘구브로’로부터 배를 타고 육지로 들어간 것입니다. 세계지도에서 보시면 북쪽을 향한 것입니다. 여기는 크게는 ‘갈라디아’ 지역이고 지중해 북단에 있는 땅입니다. 오늘날 터키 남쪽 지역에 해당합니다.
일행들은 버가에 도착한 후에 곧바로 “비시디아 안디옥”(14절)으로 향합니다. 그들이 출발한, 안디옥 교회가 있던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이고, 여기 갈라디아 지역에 있던 안디옥은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이름이 같은 두 도시입니다.
14절의 끝에 보시면 이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도 말했듯이 전도여행에서 선교사들은 언제나 어떤 지역에 가면 거기에서 ‘유대인들의 회당’에 먼저 갑니다. 이것은 흔히 선교학을 하는 사람들이 잘못 말하는 것처럼 ‘선교 전략’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연고가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공략하여 들어가서 나중에 낯선 곳으로 나아가자” 따위의 선교 전략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철저히 구속사적입니다. 또 이 구속 역사의 진행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했지요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 저희가 말씀을 맡은 자들이다!”(롬 3:2)
그리고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은 유대인들을 “원 가지”라고 부르면서, 이방인들을 “접붙인 바 된 가지”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유대인의 우선성’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우선성이야말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사랑의 인내’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자기 백성이었던’ 이들을 오래 참으십니다. 그들이 반역과 반역과 반역을 거듭해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참으시고, 또 봐주시고, 용납해 주시고, 이해해 주십니다. 그들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긋나 가버린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끝까지 그들을 기다리십니다.
새 언약 시대가 시작되고, 복음이 이방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한 이 시점에까지도 이는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 백성들이 선택되었다고 해서 옛 언약 백성들을 폐기처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부르시고 계시며, 그들에게 여전히 ‘우선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최후까지 옛 언약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했으니 내쳐버리고 멸망시켜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그들이 돌아오게끔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니까요.
앞서 말씀드린 바울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롬 11:14)
오래 전에 제가 요나서를 설교할 때 ‘요나서는 나훔과 함께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요나서를 잘못 읽어서 ‘선교적 서신’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적국 앗수르에게까지 보내셔서 그들이 회개케 하셨다!”
아닙니다. 요나서에 나오는 니느웨의 회개는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요나서 바로 뒤에 나오는 나훔은 니느웨가 얼마나 철저하게 멸망당하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구약 시대 때 하나님의 관심은 애초에 니느웨에 있지 않습니다. 요나서를 써서 누구에게 보여주었습니까? 요나서는 앗수르를 위한 성경이었나요? 아닙니다. 말 그대로 조금 전의 바울 선생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원한다!” 요나서는 니느웨조차 하나님의 은택을 입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들려주어서, 그 ‘이스라엘이 회개하도록 하려는’ 성경입니다. 요나서의 핵심은 니느웨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사들은 절대 이방인들에게 먼저 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유대인들의 회당에 먼저 갑니다. 거기서 그들이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마 18:15)이고, 듣지 않으면 “발에 먼지를 떨어버릴 것”(마 10:14; 나중에 행 13:51에 실제로 이게 나옴)입니다.
15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의 예배 정황을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고대 교회의 전통인 렉셔너리를 지금도 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시기 쉬울 것입니다. 안식일 회당예배는 “쉐마와 몇몇 기도로 시작하여 먼저 모세 오경에서 한 본문을 읽고, 그 다음에 예언서에서 나온 본문을 연달아 읽고는 이것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예배 형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15절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라는 말은 이 두 본문을 읽었다는 말입니다. 율법, 곧 모세오경에서 한 본문을 읽고, 그 다음에 선지서에서 한 본문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회당장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설교를 청합니다. 15절 뒷부분에 보시면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라고 했는데, 이는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행색이 그들이 랍비인 것을 잘 드러내는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자리에 앉은 이들 중 랍비가 있으면 그들에게 설교를 부탁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16절부터 시작되는 긴 설교는 바울의 설교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것은 다음 주일에 다뤄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 설교 내용은 뛰어넘어서,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고, 또 그들의 반응과 또 이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우리가 설교의 서론에 들었던 주제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설교 내용은 뛰어넘어 42절부터 시작되는 설교 후의 정황을 함께 보도록 합시다.
설교 후의 반응과 그 이후
1. 전향
43절 말씀은 바울이 말씀을 전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쓰고 있습니다.
43절 :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여기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도 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만, 오늘 본문 16절에도 보면 이 두 구분이 나옵니다. 바울은 거기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두 부류로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그렇습니다. 전자는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God-Fearer’, 곧 ‘경외자들’이라고 불린,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전향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는 유대인들도 있었고, 이방인들 중 유대교를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는데, 43절에 의하면 이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가 바울의 설교를 듣고서는 그를 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증가
다음 단계는 44절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굉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성에 있던 사람들 거의 전부가 바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든 것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새로운 종교에 대하여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역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예수가 누구신지도 모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만 알고 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선지자이심이 선포되자! 굉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듣고, 빛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것은 대단한 인파를 형성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든 것입니다.
3. 거절과 버림
우리가 주목하려 하는 것은 바로 그 다음입니다.
42절부터 44절까지, 이 놀라운 일들, 곧 복음으로 인하여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을 보았을 때, 그때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반응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성경은 한 단어로 요약하여 말씀해주고 있는데, 바로 45절에 나와 있는 “시기”입니다. 45절은 유대인들의 반응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헬라어에서 이 ‘시기’라는 말은 영어의 ‘jealousy’의 기원이 된 말인데, 그야말로 ‘시기’, ‘질투’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일전에도 우리가 들은 바 있지만, 헬라어에서 이 말은 영어에서도 그렇지만 쌍방의 의미를 다 나타냅니다. 곧 좋게 사용될 때 이 말은 ‘열심’이라는 의미이고, 나쁘게 사용될 때 ‘시기’, ‘질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이 똑같은 말을 들었지요! 바울 사도께서 로마서에서 한 말씀입니다.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이 원가지에 접붙임받는 이 일을 보면서 “아무쪼록 내 동포들이 시기가 좀 나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건전하고 바르게 사용된다면, 이것은 ‘예수를 향한 열심’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떠했나요?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였습니다. ‘열심’ 대신 ‘시기’였습니다. 마음에 선한 영향력이 작동되는 대신, 악감과 적의가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구속 역사의 전환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태도를 잘 지켜보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46절이 제일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건 사실 바울 사도의 입으로 전해졌다 뿐이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유대인의 우선성’을 여기에서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이 먼저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이 우월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도 여전히 미치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으실 때 그 언약을 끝까지 지키려 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을 보십시오.
3-1. 이 연관성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바울 사도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인 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로마서에서도 보았듯이, 그는 이방인의 사도라는 자신의 직무가 ‘영광스러운 것’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로 나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이것은 순서를 따릅니다. “너희가 버리고”, 또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그들이 버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그 다음 수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도록 계획하셨다고 해서 유대인들을 몰수해버리시고 이방인에게로 가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시는 사랑’이고, ‘끌어안는 사랑’이고, ‘기다려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유대인들이 돌아와 함께 새 언약 시대의 교회로 합병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승차를 거부했고,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떠나갔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그 일어난 일 때문에 다시 또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47절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것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 안에서는 두 가지 사실이 서로 이율배반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을 구원’하시는 일, 곧 사도 바울의 일행을 “이방의 빛”을 삼으시는 일을 “유대인의 거역의 토대 위에서” 하셨지만, 그것이 “유대인을 버리거나 멸망시키려는 방식으로” 전혀 진행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일 뿐인 우리는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미움도 선이고, 사랑도 선입니다. 유대인의 거역으로 그들을 버리는 일조차 합력하여 선이 됩니다. 바울이 이방의 빛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유대인의 거절 때문에 오게 되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유대인을 거절하게 해서 바울을 이방의 빛이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정반대의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이율배반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악이 하나님의 선을 이루지만,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기 위하여 악을 도모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만 행하시고, 악을 행하는 쪽은 언제나 인간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잠깐 이야기했던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는 것”이 51절에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에 다시 이율배반적 일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발에 티끌을 떨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저주 행위’입니다. 소위 ‘아나테마’의 성경 예적 행위가 바로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는 것”입니다(마 10:14; 막 6:11; 눅 9:5; 눅 10:11)
하지만 그 다음절을 보십시오! 희한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우리 인간의 성정으로서는 제아무리 평정을 유지하더라도 ‘저주하는 일’은 씩씩거리는 분노를 동반하기 일쑤일텐데, 52절을 보면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주하시지만’, ‘분노로 일을 그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주도 선하고, 분노도 선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이율배반적인 일을 행하시지만, 둘 모두를 통해 영광받으십니다. 곧 유대인의 배반은 슬픈 일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일을 이루는 견인차가 되고, 그들에게 쏟아져버리는 저주는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가 됩니다.
4. 그리고 마지막 :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것을 48절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저주하시지만 그로 인하여 결코 실패하지 않으심이 48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성공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듭되는 유대인들의 반역과 악감 때문에 자신의 구원 역사를 그르치시지 않습니다. 아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키시며, 나약을 강건함의 기초로 삼으시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습니다. 비록 유대인의 반역이 하나님의 심기를 아프게 찔렀더라도, 하나님은 그 심장의 상처로 인하여, 그 심장의 상처의 독소로 인하여 쓰러지거나 넘어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찔린 심장의 상처를 벌어지게 하셔서 바로 거기에서 꽃이 피어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유대인의 반역은 슬프고 괴롭고 통탄할 만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담대히 사용하셔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다 믿도록” 하셨습니다.
정리 : 무엇을 믿을 것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엇을 깨닫게 되셨습니까?
1) 우리는 우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처럼 ‘선뜻 내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붙드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우리편에서 내팽개치지 않는 이상 절대로 깨뜨려지지 않는 언약입니다. 언제나 버리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항상 붙드시고 계시는 우리 아버지를 발견하고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2)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이런 슬픔에도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하나님께 감정이입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연인에게 버림받은 신파극의 주인공’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한때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를 신파조로 변형시킨 이야기가 복음주의권에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추운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셔! 네가 문을 열지 않으면 하나님은 들어오시지 못해!” 이런 것 말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하나님을 신파극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더라도, 문학적 감성을 있는 끝까지 끌어올려서 하나님을 피해자로 만들고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만들고 싶더라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어떠한 환경도 ‘그를 제약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제약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제약당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방편들이, 한꺼번에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만드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제아무리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훼방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훼방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시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제아무리 그리스도를 죽여도, 하나님은 도리어 그 상황을 통해 구원을 이뤄 버리십니다. 제아무리 아합과 같은 악한 왕이 이스라엘을 장악해도, 이스라엘의 왕을 제아무리 이방여자 이세벨을 통하여 꼭두각시처럼 만들더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선지자를 이세벨의 고향 땅에 사는 과부를 통해 공궤받도록 하셔서 사탄의 궤계를 비웃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정황에서도 실패하지 않으시니 우리는 이 아버지를 믿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한계 상황’이라는 말은 나한테나 적용되는 것이지,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갈라진 심장을 꽃을 피우는 토양으로 사용하실 수 있는 분께 어떤 제약이 과연 그 기능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굳세게 우리 아버지를 붙들 수 있습니다.
3) 마지막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합니다. 선도, 악도, 꽃도, 나비도, 폭풍우도, 해일도, 익어가는 벼들도, 썩은 석류도, 죽은 송아지도, 버팔로의 뿔들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합니다. 그 어떤 것도 ‘목적지를 향하여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고, 이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발걸음을 향하여 온 우주의 찬양소리는 그 누구도 그치게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찬송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영광받으십니다. 우리들이 이 역사를 통해 영광받으십니다. 우리의 미흡함을 통해 영광받으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좌절, 우리의 역경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받으십니다. 언제나 최후의 승자는 항상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사실을 나중에 죽어 하나님 앞에 가서 섰을 때에야 비로서 ‘모조리 빠짐없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