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CI미술관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시원, 기억, 존재, 순환의 관점에서 성찰해 온 중견작가 차기율의 초대개인전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 2013> 展을 11월 20일부터 내년 1월 15일까지 약 두 달 간 개최한다.
차기율은 지난 20여 년 동안 ‘부유하는 영혼’, ‘땅의 기억’, ‘사유의 방’, ‘순환의 여행’이라는 주제로 작업의 근간을 확장해왔다. 작가 자신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령을 찾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금 자각하고 환기하는 것이 그의 예술 행위의 주된 지향점이다.
작가는 도처에 편재하는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으로 부유하는 영혼들을 찾아 나선다. 자연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영혼의 물질들은 나뭇가지, 돌멩이, 동물의 뼈 등과 같이 이제는 본디의 형상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가까스로 형질만 남아 있는 무명의 존재들이다. 아련히 떠오르는 이들의 태초의 원형들은 땅 속의 흔적으로, 공기 중의 기억으로, 존재와 존재 사이의 유전으로 오늘에 닿아 작가의 예민한 예술혼의 부름을 받는다.
작가에게 발견되거나 발굴된 물질의 파편들은 작가의 고뇌와 사유를 통해 존재의 의미와 근거가 복원된 채 새로운 형상의 예술태로 거듭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연의 실천적 존재 의지에 대응하는 인간의 흔적들을 개입시킨다. 즉, 자연의 품에서 문명을 이루며 역사를 이어온 인간의 의지는 지식의 축적물이나 발명된 물질 등 몇몇 대표성을 지니는 사물을 통해 대입된다. 이는 자연과 인간의 흔적들이 협업의 형태로 재조합, 재구성되어 온전한 자연의 영역도, 온전한 인간의 영역도 아닌 새로운 차원의 장으로 도약하여 영원한 순환의 여행에 진입하게 되는 순간이 된다.
이번 전시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 2013’ 展에는 존재의 근원과 생명, 정신을 재정립하고자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자기반성적으로 탐구해온 작가의 예술적 노정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번 전시가 작가 자신의 예술 의지와 사유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스스로의 다짐대로 새로운 조형적 행보들이 제시되어 눈길을 끈다.
오랫동안 전시의 주제로 삼아온 ‘순환의 여행’은 ‘방주와 강목 사이’라는 단서와 함께 작업의 범위와 여정을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즉, 방주는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고 서양문명을 상징하며, 강목은 한방에서 쓰이는 약초나 약재의 세세한 기록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따온 것으로 동양사상을 상징한다. 이는 서양으로 상징되는 ‘문명’과 동양으로 상징되는 ‘자연’과의 융합을 나타내는 것이며, 인간과 자연의 순환 구조 속에서 존재의 본질에 귀속된 시공의 기억들을 인류의 수직적 성장과정과 수평적 연대과정 속에서 추적하고자 하는 작가의 예술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이다.
차기율의 예술 표현의 기재는 자연에서 채취한 돌, 나무, 뼈 등의 다양한 천연 물질들로부터 책, 금속, 모니터, 스피커와 같은 문명의 상징물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추출된다. 이들은 모두 공간 특정적 설치 작업을 비롯하여 드로잉, 회화의 평면 작업 등 탈경계의 확장된 조형 방식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추가한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는 점토(테라코타) 작업을 새롭게 선보여 더욱 깊어진 예술 표현의 의지와 자유로운 의식의 발로를 엿볼 수 있다.
1층에 들어서면, 자연목 뿌리를 소재로 만든 유선형 구조물과 음향을 탑재한 영상물이 거대한 오브제 덩어리로 어우러져 자연과 인공/문명의 동행을 강하게 시사한다. 목조 구조물은 인간이 만든 방주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나무줄기를 끓는 물에 삶고 일일이 껍질을 벗겨낸 후 토막을 재조립하는 노동집약적 공정을 거쳐 완성되며, 나무토막 사이사이에 마디처럼 돌멩이가 삽입되고 줄기 표면에는 본초강목에서 인용한 문구가 붓글씨로 기입되기도 한다. 또한 모니터에는 하늘과 바다가 관습적 위치와 반대로 자리한 채 작가를 구성하는 기억 속 인자들을 텍스트 자막으로 하나씩 끄집어냈다가 다시 흘려보낸다. 시간과 공간 속에 배어있는 존재의 흔적들을 환기하는 작업이라 하겠다.
또한 전시장 바닥에는 여름 별자리의 궤적이 드로잉으로 펼쳐지고 별자리는 돌로 표시하여 하늘과 땅이 맞닿은 비현실적 우주 공간이 창출된다. 그 위에 거대한 포도나무 구조물이 천정에 매달려 하늘을 떠도는 방주를 연상케 한다.
2층에는 강화도 근교의 갯벌에서 채집한 게가 만든 탑들을 신석기인들의 방식대로 노천소성의 과정으로 구워 미술관 공간에 대거 옮겨 놓았다. 이는 땅이 만들거나 기억하는 존재의 흔적들을 고고학적 발굴처럼 파헤치고 떼어낸 것으로 자연이 뱉어낸 방주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하겠다.
또한 책과 금속과 돌이 조합을 이룬 오브제가 제시되기도 한다. 이는 인간의 정신과 내면을 견고하게 다져온 지식의 상징물인 책과 인간의 생명활동을 유지시키고 문명을 일구어 오는데 공헌한 금속류, 억겁의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축적해온 자연물로서의 돌이 하나의 덩어리로 만나 현실의 공존 체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3층은 박물관 공간처럼 생물학적 오브제들이 유리로 만든 유물 상자 속에 담겨져 기억과 흔적이 보호/보존되는 고고학적 관점을 연장해나간다.
그 외에도 인간의 얼굴을 닮은 돌들이 자신들의 초상화와 함께 전시 공간을 메우기도 하고 드로잉과 페인팅이 존재의 흔적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차기율은 인간을 그리고 개인을 중심에 두려는 현대 미술의 구조에 반하여 자연과 인간의 상호 보완적, 순환적 관계를 통해 인간의 본질과 태도를 성찰하려는 관점을 보여준다. 또한 존재 그 자체의 문제보다 존재의 근거를 통해 정제된 이치와 본성을 지속하고 보존하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그는 방주와 강목사이에 놓인, 즉 태초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든 존재들의 기억과 흔적을 좇아, 자연으로 명멸해가고 기화되어 버린 존재의 원형들과 본질들을 조각조각 모두기를 일삼는다. 차기율은 우리 스스로가 정화되기를 바라는 바램과 삶 속 궁극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예술을 통한 구도의 여정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방주를 짓고 강목을 짓고 우주를 짓고 존재를 짓다
고충환 (Kho, Chung-Hwan 미술비평)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형식논리가 강한 작업에서 주제는 형식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이어서 작업과 주제와의 연관성이 별로 없는 편이다. 이에 반해 서사가 강한 작업에서 주제는 작업의 의미내용을 압축하거나 상징하는 것이어서 주제가 작업을 확장하고 심화하고 변주한다. 마치 그 자체가 작업의 일부인 양 작업의 능동적인 또 다른 한 축으로서의 의미기능을 도맡고 있는 것이다. 차기율의 경우가 그렇다.
부유하는 영혼, 땅의 기억, 사유의 방, 그리고 순환의 여행 – 방주와 강목 사이. 세세한 차이가 없지 않지만, 작가가 그동안 자신의 작업에 붙인 주제들이다. 이 주제들 자체는 각각이지만 사실상 그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고 보아야 하고, 상호 유기적인 관계로 보아야 한다. 이 주제들에는 그동안 작가의 의식을 지배했고 그 의식을 작업으로 풀어냈던 계기들이며 단서들이 고스란히 탑재돼 있다. 그렇게 작가의 의식은 부유하는 영혼들을 향한다. 영혼은 산 자들의 몫이 아니고 유기체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혼은 산 자를 넘어 죽은 자를 향하고, 유기체를 넘어 무기질로 확장되고, 유형의 형태를 넘어 무형의 존재를 아우른다. 부유하는 영혼이란 도처에 편재하는 영혼이며 심지어 무의식마저 파고든 영혼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영혼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는 한갓 돌 속에 혼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식물의 혼을 믿는다. 그렇게 작가는 콜로세움의 대리석 조각을 취하고 고비 사막의 사암에 취한다. 심지어 백령도 해변에서 조약돌들이 서로 부닥치면서 내는 가각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태초의 아련한 기억이 떠올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식물처럼 뿌리를 내리고, 그렇게 내린 뿌리털을 매개로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고 세계와 세계가 연속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 밑바닥에는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범신론과 물활론이 깊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풍문으로나 떠돌던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숭고의 감정이 고스란히 복원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고 세계와 세계가 연속되고 주체와 타자가 연장돼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바로 기억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 기억은 예사롭지가 않은 기억이다. 아련한 기억이며, 기억할 수 없는 기억이며, 기억의 수면 아래 잠재된 기억이며, 무의식적인 기억이며,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기억이며, 땅의 기억이다. 융이라면 집단무의식 내지 원형이라고 했을 것이다. 논리로는 해명되지 않는 끌림이며 이유가 없는 끌림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땅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시간을 기억하고, 공간을 기억하고, 역사를 기억한다. 피를 기억하고, 죽음(아님 주검?)을 기억하고, 삶을 기억하고, 존재를 기억하고, 시원을 기억한다. 그 기억용량은 당연히 인간과 인류의 그것을 넘어선다. 작가는 그 기억이 궁금하다. 그래서 땅을 파헤치는데, 선사시대 유적을 발굴하고, 통의동 한옥을 발굴하고, 인천 배다리를 발굴하고, 화성 시 집터를 발굴한다. 그렇게 한국근현대사의 생활사의 한 자락이 복원되고, 작가의 유년시절의 한 모퉁이가 현재 위로 호출된다. 모든 발굴은 흔적을 향한다. 발굴이란 곧 삶과 죽음의 흔적을 발굴한다는 것이며, 존재와 시원의 흔적을 발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을 발굴하는 작가의 행위는 땅이 기억하고 있을 존재의 흔적을, 자기가 존재하는 근거를, 존재의 원형을 발굴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발굴되고 복원된 존재의 흔적이며 아득한 시원으로부터 작가에게까지 이식되어졌을 존재의 원형과 대면한 자기가 이전의 자기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작업을 사유의 방이며 장으로 본다. 존재가 거듭나고 재설정되고 재부팅되는 계기로 본다. 작가에게 작업이란 곧 사유를 의미하며, 그 사유에 의해서 존재가 거듭나지는 계기이며 실천의 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실천의 계기가 존재의 시원이며 원형을 향하는 것에, 그 원형이 현재 위로 호출돼 존재를 송두리째 바꿔놓는 것에 작가의 작업의 특이성이 있다. 그렇게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작업도 작업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른 주제가 순환의 여행 – 방주와 강목 사이이다. 그동안 경유했던 주제들, 이를테면 부유하는 영혼, 땅의 기억, 그리고 사유의 방에 연이어 최종적으로 정박된 의미론적 지점이다. 최종적으로 정박된 지점이라고는 했지만 작업에 최종이 따로 있을 수가 없듯 일정하게는 임의적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작가의 작업을 아우르는 종합의 계기 내지 분기점으로 볼 수는 있겠다.
주제도 그렇지만 작가는 작업을 여행으로 본다. 그리고 알다시피 여행은 길이며 연극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삶의 메타포이다. 삶은 말하자면 자기를 찾아나서는 길 위에서의 여정이며, 그 길이라는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 여기서 자기를 찾아나서는 여로에 의미론적인 방점이 찍힌다. 자기를 찾아나서는? 자기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며 자아, 주체며 에고는 그 실체가 있는 것인가 아님 그저 허무맹랑한 의식의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불교에서의 진아는 무엇이며, 의식을 제로지점에다 설정하는 현상학적 에포케는 또한 무슨 의미인가(현상학에서 나의 실체는 추상된 의식이며 관념화된 의식이 아닌 지각된 의식의 소산으로 본다). 여하튼 그렇게 작가는 작업을 매개로 자기를 찾아 나선다. 그 여정에서 작가는 돌을 만나고, 식물을 대면하고, 선사와 시원과 존재의 흔적과 조우한다. 시공간적으로 작가를 초월해 있으면서 작가의 일부로서 이식된 것들이며, 작가가 분유된 성분들이다. 작가를 초월해 있으면서 작가가 분유된? 그래서 원형이다. 그 원형은 아득한 그리움으로 작가를 기다렸었고,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작가를 유인했었고, 그리고 그렇게 작가 이전에 이미 작가를 예정했었다.
이처럼 작가는 여행을 하는데, 그 여행은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려지는 여행이고, 자기반성적인 여정이며, 자기라는 폐곡선 위를 따라 걷는 순환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순환하는 여행에는 범위며 스펙트럼이 있는데, 방주와 강목 사이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 범위며 스펙트럼은 동시에 자기의 범위이며 스펙트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차기율이란 오디세이의 스펙트럼 상의 양 극에 해당하는 방주와 강목은 무슨 의미인가. 방주는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고 서양문명을 상징한다. 그리고 강목은 나무와 풀과 같은 한방에서 약초나 약재로 쓰이는 각종 식물의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을 밝힌 서책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따온 것으로서 동양사상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서양의 문명과 동양의 사상을 오디세이의 양 극으로 세팅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각각 서양으로 상징되는 문명과 동양으로 상징되는 자연을 화해시키고 종합(요새 말로 치자면 융합)을 실천한다는 의미이며 의지의 표명이 아닌가. 서양과 동양을 화해시키고 문명과 자연을 융합시킨다? 이렇게 주제를 풀어놓고 보니 불현듯 작가의 작업의 스케일이 보인다. 신이 죽고 형이상학이 죽은, 진리가 죽고 진실이 죽은, 선이 죽고 악이 죽은, 주술이 죽고 신비가 죽은 미시담론의 시대며 표면의 시대 그리고 무미건조한 논리의 형해들이 실재를 대신(대체?)하는 시대에 들려주는 거대담론의 메시지라고나 할까. 그 의미며 울림은 그래서 오히려 더 크게 와 닿는다.
그렇게 작가는 방주를 짓는다. 방주와 강목으로 설정된 주제로 볼 때 일정하게는 작가의 모든 작업이 방주를 짓고 강목을 짓는(실천하는?) 행위일 수 있다. 실재하는 방주며 강목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신화적 주체며 인문학적 주체를 지지하는 관념적 실체일 수 있다. 그런 만큼 그 꼴이 감각적 실재를 닮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얼추 비정형의 유선형으로 나타난 조형물의 구조가, 그리고 바다에 떠 있었을 노아의 방주처럼 허공에 매달린 조형물의 전시 행태가 방주의 감각적 실재를 닮았다.
작가는 주로 포도나무 줄기를 소재로서 취하는데, 다른 나무들에 비해 뒤틀림이 강해 마치 근육과도 같은 유기체의 본성을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도나무 줄기를 취해와 끓는 물에 삶아 그 껍질을 일일이 벗겨낸 연후에, 그 토막들을 연이어 조립하는 방법으로써 거대한 구조물을 만든다. 전체적으로 유선형을 그리면서 세로나 가로로 길게 설치된 그 구조물은 마구 얽히고설킨 덩굴나무를 연상시키고, 비정형의 유기체적 다발이나 덩어리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구조물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 줄기의 표면에 주로 본초강목에서 인용한 자연과 관련한 한문자들이 붓글씨로 기입된다. 여기서 한문자들은 나무줄기로 표상된 유기체적 신체에 직접 작용하는 치유력과 주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 구조물의 표면을 마치 불에 탄 숯처럼 검게 칠하기도 하는데, 마찬가지로 숯의 치유력과 재생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검게 칠해진 구조물에서도 여전히 그 밑에 한문자가 잠재적인 형태로 기입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자연으로부터 유래한 능력들, 이를테면 자연치유력이며 주술작용 그리고 재생능력이 함축된 경우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구조물은 방주와 강목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거대한 구조물이 마구 얽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마치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합체된 것 같은 이 구조물에서 역동성과 정치함이, 우연한 계획으로 나타난 이율배반적인 역학이 작동되고 있음을 알겠다. 뫼비우스의 띠란 알다시피 하나의 거대한 순환하는 고리이다. 뒤틀리고 비틀린 고리의 몸체를 따라 생과 사가 흐르고 삶과 죽음이 만나지기를 무한 반복하는, 그리고 그렇게 무한 순환하는 존재의 표상이다. 그렇게 무한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 중간 중간에 작가는 납작한 조약돌을 장착해놓고 있다. 조약돌의 가운데를 뚫어 그 구멍 사이로 나무줄기가 관통하게 한 것인데, 반복의 마디 같고, 순환의 마디 같고, 윤회의 마디 같다. 무한 반복 속에 마디가 있고, 무한 순환 속에 경계가 있고, 무한 윤회 속에 분기점의 계기가 있다. 그렇게 억겁의 시간동안 축적된 존재가 호출되고, 억겁의 시간을 넘어 존재가 복원된다. 존재가 아닌 존재들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一)이면서 다(多)인. 그렇게 마디가 있으면서 무한 순환하는 고리로부터 불현듯 질 들뢰즈의 주름이며 고원이며 뿌리(리좀)가 오롯이 복원되고 있었다. 특히 뿌리와 관련해선 서두에서도 말한 것이지만, 작가의 모든 작업엔 뿌리가 있다. 뿌리가 없는 경우에도 사실상 뿌리가 암시되고 있다. 이처럼 직접적이고 암시적인 뿌리를 매개로 생과 사가 연장될 수 있었고, 아(我)로부터 타(他)에로의 탈주를 감행할 수 있었고, 결정태로부터 가능태로의 이행이 가능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무한순환고리는 생과 사를, 아와 타를, 결정과 비결정의 계기를 한 아름에 싸안고 있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형상화해놓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에게 방주란 말하자면 우주였고 만다라(우주를 도해한)였다. 그리고 그 우주가 세상을 바라본다. 무슨 말인가. 작가는 매달린 구조물 밑에 이런저런 장치들을 보조하는데, 바닥에다 파문을 그린다. 여기서 파문은 기며 에너지를 표상한다. 그렇게 각각 나와 너로부터 발원한 에너지는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가 너에게 가닿고 나에게 미친다. 뿌리도 그렇지만, 불교의 연기설을 표상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작가는 이와는 또 다른 버전에서 전시장 바닥에다 검은 물이 가득 담긴 바트(수조)를 설치한다. 그리고 바트 속에다 돌들(존재의 섬들)을 설치하고, 종교적인 도상이며 이데올로기의 표상들(이념과 역사 아님 이념의 역사)을 설치하고, 생활 오브제들(생활사)을 설치한다. 그대로 삶이며 세상사를 재현해놓은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렇게 재현된 세상을 허공에 매달린 우주가 바라본다. 흑경처럼 반영하는 성질로 인해 세상은 세상대로 우주(바트에 담긴 우주의 반영상이며 이미지)를 바라본다. 그렇게 우주는 세상을 그리고 세상은 우주를 반영한다. 특히 바트에 담긴 돌들은 존재를 표상하고 존재의 섬들을 표상한다. 존재의 섬들 각각은 고립돼 있지만, 보이지 않는 파문으로 서로 연결된다. 가시적인 파문이 비가시적인 파문의 형태로 재차 변주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가닿고 너는 나에게 미친다. 가닿는다는 것 그리고 미친다는 것은 서로 반영하고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한 반복되고 무한 순환된다. 재차, 불교의 인드라망(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진 구슬그물)이 실현되고 있는 경우로 봐도 되겠다.
이처럼 작가가 방주를 짓고 우주를 짓고 작업을 짓는 동안 자연은 자연대로 집을 짓는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가 인천 강화 작업실로 옮긴 이후 제작된 신작 이야기다. 알다시피 강화도는 서해에 위치해있고,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편이라 광활한 갯벌이 조성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게 물이 빠지면 게들이 갯벌에 집을 짓는데, 갯벌 위로 흙을 퍼내 생긴 구멍 주변으로 일종의 방벽을 쌓는다. 이때 큰 집게손으로 흙을 돌돌 말아 밀어 올리는데, 그 흙 알갱이가 무슨 벽돌 같다. 해서, 게들이 집을 지을 때면 갯벌은 온통 게들이 만든 구멍과 방벽들로 장관을 이루는데 그 자체가 흡사 갯벌에 난 숨구멍 같다. 흔히 숨 쉬는 갯벌이니 정화하는 갯벌이라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님을 알겠다. 그러나 이렇듯 어렵사리 지은 집들은 잠시잠간 동안만 집 구실을 하는데, 다시 물이 들어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이처럼 매번 일시적인 집을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게의 본성(?)이 놀랍고 경이롭다. 사람으로 치자면 애써 그린 그림을 어떠한 미련도 없이 지워 없애는, 그리고 그렇게 허상과 이미지의 무상함을 실천해 보이는 티베트 승들의 모래 만다라에나 견줄 수가 있을까. 사람은 불심(?)을 깨쳐서 얻지만, 자연은 미처 깨칠 일도 없이 저절로 획득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작가는 그 게가 예쁘고 그 집이 경이롭다. 그래서 그 집 그대로를 떠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모종삽 같은 도구를 이용해 게집 주변으로 사각을 찔러 넣어 집 그대로를 떠내야 하는데, 이때 집의 원형 그대로를 보존할 수 있을 만큼 흙이 적절하게 굳어 있어야 한다. 평소 때는 그렇게 굳지도 않을뿐더러, 적당하게 굳었을 때에도 여차하면 타임을 놓치기가 쉽다. 조수간만의 차이에 대한, 물이 가장 많이 그리고 멀리 빠질 때(간조와 사리)에 대한, 물이 들고나는 때에 대한 평소 세심한 관찰과 이해가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작가는 이렇듯 오랜 기다림과 지난한 과정을 거쳐 떠낸 게집들을 자연 상태 그대로 소성하는데, 대개는 락꾸소성이나 노천소성의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작가는 게가 만든 집을 모나드 삼아 또 다른 집(작업)을 짓는다. 이를 통해 작가는 아마도 숨 쉬는 자연이며 자연의 숨구멍을 조형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트의 어원을 보면, 원래 아르스(ars)보다는 테크네(techne)라는 말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테크네는 이런저런 일을 해내는 능력을 의미했고, 원래 거미나 개미 그리고 벌이 집 짓는 것에서 착상되었다고 한다. 그 의미가 독일어 빌덴(bilden)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처럼 조형은 무엇보다도 집을 짓는 행위와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방주를 짓고 강목을 짓고 우주를 짓고 작업을 짓는, 그리고 종래에는 자연이 지은 집을 원형 그대로 가져다가 자신만의 또 다른 집을 짓는 작가의 작업은 어쩌면 작업의 수위를 조형의 원천으로 소급시키는 행위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조형의 근본에 대해서, 조형의 이유에 대해서, 조형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자연에 조형이 개입해 들어가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면서 자연을 변형시키는 과정과 방법과 태도와 입장에 대해서 심각하게 재고하게끔 유도한다. 그렇게 반쯤은 자연이 조형하고 생성시킨 유기체를 떠올리게 하고, 자연의 본성에 존재의 본성을 합치시키는 미덕이 있고 겸허함이 있다.
작가 약력
학력
인천대학교 미술학과 졸 동 교육대학원 졸업
현재
국립 인천대학교 교수
개인전
2012 Meteor- 차기율 최경태 전( 인천 아트 플랫폼, 인천)
2011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LA ARTcore, LA, CA, USA )
2010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갤러리 이마주, 서울)
2010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갤러리 쿤스트 독, 서울)
2009 세개의 장소 (공간 화랑, 서울)
2009 무뢰한의 방 (꽃+인큐베이터, 서울)
2008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벨벳 인큐베이터, 서울)
2007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갤러리 벨벳, 서울)
2007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관훈갤러리, 서울)
2007 도시 시굴/삶의 고고학 (갤러리 쿤스트독, 서울)
2006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관훈갤러리, 서울)
2005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관훈갤러리, 서울)
2005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인천)
2004 오픈 스튜디오 -창동명월- (국립창동미술스튜디오, 서울)
2004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사이 (국민아트갤러리, 서울)
2003 사유의 방 (국립창동미술스튜디오갤러리, 서울)
2002 땅의 기억 (Red mill Gallery, VT, USA)
1999 땅의 기억 (토탈미술관, 경기도)
1999 땅의 기억 (토탈미술관, 경기도)
1997 땅의 기억 (원터갤러리, 경기도)
1995 부유하는 영혼-분향리 소고 (갤러리21, 서울)
1992 부유하는 영혼 (단성갤러리, 서울)
주요 단체전
2013 제3회 인천 평화미술 프로젝트 (백령도 심청각, 인천 아트 플랫폼)
차기율, 우종택 2인전 (브라파대학교 갤러리, 촌브리, 태국)
2012 천애약비린전 (인천광역시 평생 학습관 나무 갤러리, 인천)
제2회 인천 평화미술 프로젝트 “평화의 바다 물위의 경계” (인천 아트 플랫폼)
Dialogue about Invisibility-Invisible Exhibition ( 화이트 블록, 보안여관, 추계예술대)
2011 인천 평화미술 프로젝트 “분쟁의 바다 평화의 바다” (인천 아트 플랫폼)
메이크샵 아트 스페이스 개관기념 “아니마투스” (파주 출판도시)
What do you think about Nature? (Gallerie 89, 파리)
부드러운 힘 (Sky Moca Museum, 북경)
2010 부산 비엔날레 “진화속의 삶”(부산 시립미술관)
2009 노마딕 프로젝트”Time & Space”(남고비, 몽골리아)
제주 도립 미술관 개관기념 “숨비 소리”(제주 도립 미술관, 제주)
이천 아트쎈터 개관기념 “미술에 대해 알고 싶은 일곱 가지 것들”(이천 아트 쎈터)
2008 오늘의 한국조각 2008-조각의 허물 혹은 껍질(모란 미술관,마석)
차기율/데미세 히사오 2인전 (이와사키 뮤지엄, 요코하마)
2007 생명의 장-한국 현대미술에 나타난 몸전(캘리포니아주립대 CSUS Library gallery)
소마 드로잉쎈터 개관기념2부 막긋기 (소마 미술관,서울)
2006 유령의 정원 (쿠베르탱 재단, 파리)
2005 베를린에서 DMZ까지 (올림픽미술관, 서울)
대표선정 ․ 수상
2010 부산비엔날레 한국대표작가, 4인의 세계대표작가 선정
2010-2009 노마딕 레지던시 프로그램 한국작가 선정
201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 아카이브작가 선정
2001-2002 Vermont Studio Center Freeman Fellowship
2000 22회 중앙미술대전 우수상 (중앙일보사 주최,호암갤러리, 서울)
거주 프로그램
2010 Nomadic Arts Residency program-2010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외교통상부, 제주도)
2009 Nomadic Arts Residency program-2009 (한국문화예술위원회, gobi,Mongolia)
2006-2007 쿤스트독 국제 창작 스튜디오 예술현장 통의동 입주작가 (서울)
2004-2005 스페이스하제 창작스튜디오 단기입주작가 (파주)
2003-2004 국립창동미술스튜디오 입주작가(2기) (국립현대미술관)
2001-2002 Vermont Studio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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