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는 늘 진지한 척이었다
성장과 죽음이 같은 궤도에 있는 줄 알았어
양 끝에서 달려오다 힘껏 부딪히는 거야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반복
반복 미련 없이
그렇지만’
- 윤유나 詩
『한 번도 본 적 없는 경치를 보러 가고 싶으세요?』
- 시집〈잠과 시〉
교정지에 적어놓은 메모들을 지우려고 하는데 지우개가 없다. 좀처럼 지우개 쓸 일이 없긴 하다. 요즘은 키보드 위 삭제 버튼을 누르면 되니까. 내친김에 하나 사두어야겠어, 문구점 앞에 서서, 얼마 만에 느끼는 감각인가 싶어졌다. 꾹꾹 눌러 쓴 글씨를 박박 지워내고 탁탁 털어낼 필요라니.
지우개 코너에는 십여 종의 지우개가 진열돼 있었다. 모양만 다른 게 아니라 쓰임과 특징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무르고 어떤 것은 단단하다. 희소해진 손글씨와 함께 차츰 잊히는 와중에도 지우개는 묵묵히 제 몫의 변화를 치러온 모양이다. 새삼 지우는 일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지우기. 어떤 자취가 ‘있었다’를 전제하고 인정하는 행위. 애써 바로잡으려 하는 노력. 분명 힘이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흔적이 남는 일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백스페이스키를 눌러 감쪽같이 사라지게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실제와 가상 사이에서 자주 착각하곤 한다. 아무도 몰래 지워낼 수 있다고. 섣부른 착각은 우리를 괴롭히지 않나.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감정에 따라 섣불리 행동하게 만든다. 하지만 지우기는, 완전한 백지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새로 시작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다. 그러기 위해 힘주어 지우개로 문지른다. 고심 끝에 종류별로 네댓 개를 집어 값을 치렀다. 집에 하나, 사무실에 하나, 가지고 다닐 것 하나. 손이 닿는 곳마다 가까이 챙겨두고 싶었다. 지우는 일의 의미를, 그에 필요한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