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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택하심을 받은 자에게 문안하라
롬 16:12-16
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롬 16:12-16 / 주님의 일꾼인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주님을 위해 열심으로 일한 버시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13) 주께서 가려 뽑으신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도 문안해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입니다. 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도 문안해 주십시오. 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의 사랑을 전해 주십시오. 16) 서로 뜨겁게 손을 잡고 인사를 주고받으십시오. 여기 있는 모든 교회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사랑의 입맞춤은 아름다운 인사법이었습니다. 여기에 바울은 거룩이라는 말을 추가하면서 혹여나 해가 될 만한 것들을 경계하였습니다.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에게 문안(12) 바울은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그녀들은 유복한 가정의 쌍둥이 자매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자신들의 부유한 삶을 포기하고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충성한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출신의 버시를 향하여서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이제는 고령이 되었지만 평생 동안 수고한 그의 노고를 잊지 않고 문안하라고 합니다.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막 15:21)로서 로마에 이주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만일 루포라는 이름이 로마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면 바울은 그의 이름을 여기서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한 것은 그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동안 시몬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행 13:1).
아순그리도 … 그들과 함께 하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14-15) 본 절에 기록된 아순그리도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에 관하여 알 수 없지만, 이 문맥에서 형제들은 로마에 있는 두 회중의 지도자들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과 성도들에게 문안하라는 것은 이들의 모임과 함께 한 가정교회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16)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했습니다(고전 16:20; 고후 13:12; 살전 5:26; 벧전 5:14). 이러한 행위는 친구들이 서로의 이마, 볼, 수염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구약성경에 흔히 나오는 장면입니다. 신약시대에도 유대인은 이 관습을 계속 유지했으며, 특히 이것은 초대교회의 새 신자에게는 귀한 일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자기 가족들로부터 축출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거룩한 입맞춤으로 잃어버린 육적 가족에서 새롭게 찾은 영적 가족관계로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살전 5:26; 벧전 5:14).
적용: 바울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안인사 한 사람들이 총 26명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당신이 ‘주 안에서’ 문안할 수 있는 헌신 된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복음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는 비난받을 때 함께 비난받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 흘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공감과 연대의 과정을 거쳐서 초대교회가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현재 교회 공동체 역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서로 거룩한 삶으로 교제하고 헌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크마 주석
=====16:12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 트뤼파이난 카이 트뤼포산) - 이 두 이름의 뜻은 '화사하다' 혹은 '우아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은 동일한 어근 '트뤼파오'(* , '호화롭게 생활하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아마 이들은 같은 자매였을 것이다(Godet, Dunn). 또한 쌍동이였을 가능성이 크다(Robertson). 왜냐하면 당시 같은 어근에서 유래된 이름들은 쌍동이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같은 이름은 귀족 계층에 어울리는 이름으로서 그들은 당시 귀족 집안의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다(Harrison). 바울은 그들을 '주 안에서 수고한'(* , 타스 코피오사스 엔 퀴리오) 자들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바, 그들이 귀족적인 풍요로운 생활에서 안주(安住)하지 않고 열심으로 신앙 생활을 하며 헌신하였음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버시 - '버시'의 헬라어는 '페르시다'(* )로 '페르시아 여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 외국인들은 흔히 그들 출신 지역을 따서 이름을 명명하곤 했다(Godet). 이러한 이름은 로마나 기타 다른 지역에서 헬라어나 라틴어로 쓰여진 묘비명에서 노예나, 자유인 여자의 이름으로 발견된다(Bruce).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런 점을 참고하여 그녀가 해방된 여종이란 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Dunn). 바울은 에배네도, 암블리아, 스다구에 대해서는 '나의 사랑하는'이란 말을 붙였으나, 여기서는 그냥 '사랑하는'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그녀가 독신녀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였으므로 바울 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사랑하는' 여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Harrison). 시제상 앞의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 대해서는 현재 시제를 사용했고 '버시'에 대해서는 과거 시제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의미상으로 큰 차이는 없지만 추측해 보건대 '버시'가 수고를 많이 한 것은 이미 지난 날이었고 사도가 편지를 쓴 현재는 아마도 나이든 노령(老齡)의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연령이나 허약함으로 인해 더 이상 과거처럼 활동적으로 일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기에 시제를 과거로 썼는지 모른다(Murray, Godet).
=====16:13
루포 - '루포'의 헬라어는 '루폰'(* )으로 '붉다' 또는 '머리카락이 붉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이름은 로마나 희랍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루포는 막 15:21에 언급되어 있는 루포와 동일 인물로서 골고다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진 바 있는 구네레 사람 시몬의 아들이다(Harrison, Meyer). 마가는 주로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는데 그가 구레네 시몬의 두 아들을 언급한 것은 로마 성도들이 그들을 알고 있었고 특히 루포는 저희 교인들 가운데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Lenski). 바울은 루포를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에클레크톤'(* )은 보통 의미의 '택하신 자'라기 보다는 다른 성도들에 비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봉사와 충성이 뛰어나게 구별된 자임을 나타낸다(Meyer, Godet, Hodge, Murray). 이러한 맥락에서 일부 영역본은 '톤에클레크톤'을 '주님을 탁월하게 따르는 분'(NEB, RSV)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그는 그의 아버지 구레네 시몬이 겪은 십자가에서의 사건 때문에 로마의 성도들 사이에서 어떤 명성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Harrison).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 루포의 어머니가 문자 그대로 바울의 친 어머니가 아니라 바울이 한때 그녀의 모성애어린 돌봄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을 암시한다(Murray). 이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헤리슨(Harrison)은 추측하기를 수리아 안디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바울이 루포를 생각할 때면 반드시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회상할 만큼 그녀는 바울에게 특별한 존재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여 자기 가족들을 떠난 후에(빌 3:8) 인간적으로 외로웠었는데 잠시 루포의 집에 유숙하는 동안 루포의 어머니가 그의 외로움을 알고 친아들처럼 그를 따뜻한 친절과 사랑으로 돌보아주었던 것 같다(Godet, Moule). 따라서 그녀가 당시 로마에 있었다는 사실은 바울로 하여금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로마 방문을 고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에게 특별한 친애(親愛)와 존경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6: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 - 이들에 대해서는 단순히 이름만 나오고 그들에 대한 칭찬이나 설명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과 바울과의 유대 관계가 앞에 언급된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는 덜 강했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모두 남성으로서 아마도 어떤 특수한 지역이나 직업에 종사하던 자들이었을 것이다(Murray). 이들의 이름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들 모두가 노예나 혹은 노예에서 해방된 자들로 노예 계급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라는 점이다(Dunn, Sanday).
=====16: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 - '빌롤로고'(* , 필롤로곤)는 황제 가문의 권속들 중에 특히 노예나 노예에서 자유롭게 된 자들의 헬라와 라틴 묘비명에서 발견된다(Lightfoot). '율리아'(* , 율리안)는 로마 여성들의 가장 보편적인 이름으로 황제 가문의 노예들 사이에도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Lampe). 이들 둘은 한 부부이거나 오누이로서 황제 가문의 노예로 생각되어진다. 또한 '네레오'(* , 네레아)와 그 자매는 빌롤로고와 율리아의 아들과 딸일 가능성이 있다(Dunn). '올름바'(* , 올륌판)는 올림피오도루스(Olympiodorus)의 약칭으로서 전로마 제국에 널려있는 흔한 이름이었다. 앞절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로마에서의 다른 가정 교회이다. 그러나 앞절과의 차이점은 본절에서는 '모든 성도'(* , 판타스 하기우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구성원에 남녀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단체가 여러 단체들 가운데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Lenski, Meyer). 이것으로 보아 이 도시에는 여러 구역의 가정 교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나오는 무리들도 로마의 여러 가정 교회 중 하나로서 정기적으로 한 곳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Liddon).
=====16:1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표로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입맞춤으로 인사를 나누는 습관이 있었다(고전 16:20;고후 13:12;살전 5:26). 이와 같은 인사법은 전체적으로 고대 근동 지방에 퍼져 있었고 유대 전통에서도 이러한 유사한 인사법이 행해지고 있었는데 당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 역시 사랑의 표로 이를 실행했다(Dunn, Murray). 그런데 초대 교회의 이런 인사법은 결코 호색이나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과 거룩한 형제애(兄弟愛)의 구체적인 표현인 것이었다(J. Calvin).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 - 이것은 특이한 표현이다. 바울은 대개 '하나님의 교회'(고전 1:2;10:32;11:22;15:9;고후 1:1;갈 1:13;살전 2:14;살후 1:4;딤전 3:5, 15)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특히 '교제'의 측면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이 용어를 선택하였다. 바울은 몇몇 경우에도 '모든 교회를'(all the churche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4절; 고전 4:17;7:17;14:34;고후 8:18;11:28), 바울 사도가 '모든 교회들'이라고 할 때는 그의 선교 사역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다. 본문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도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들은 실제로 서신을 통해서 바울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Dunn) 아무튼 사도가 여기서 모든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한다는 인사를 전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1)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의 일체감을 상기시키며 (2) 흩어진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로 함께 묶여져 있음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 설 교 >
중심있는 여성
로마서 16:13 / 이정익 목사
오늘은 여성시대입니다. 오늘은 여서의 목소리가 커지고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어느 때 보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에 진출해 보니까 여성들의 능력도 월등하고 사회인식도 새로워졌고 그래서 오늘은 어느 때보다 여성들의 활동의 폭도 넓어졌습니다.
마사 발레타라는 분이 “여자한테 팔아라”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보면 앞으로 모든 장사는 여성을 상대로 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은행을 터는가” 그것은 “그곳에 돈이 있기 때문이다.” “왜 산에 오르는가” 그것은 “거기 산이 있기 때문이다.” “왜 여성을 상대로 해서 마케팅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여성들이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남성들은 돈이 없습니다. 남성들이 일터에 나가 일하면 월급은 자동적으로 통장으로 들어가 정작 자신은 월급을 손에 만져볼 기회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내에게 용돈을 타 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고 엄마를 무서워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들이 모든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모든 권위와 힘이 돈에서 나옵니다.
남자들은 이렇게 뒤에서 큰소리만 칠 뿐 실속이 없습니다. 현재 모든 상품의 구매를 80%를 여성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성을 상대로 선점한 기업만 10년 후에 살아남는다고 말합니다. 백화점에 가 보십시오. 전 매장의 대부분이 여성용 상품입니다. 고객의 절대부분이 여성들입니다. 남성들은 아내 뒤를 좇아가며 짐을 들고 다닐 뿐입니다.
오늘은 과연 여성시대입니다. 여성성이 가장 발달되고 참여도가 가장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는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몇 가지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1. “성경에는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남녀 차별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때 남존여비 사상이 전 세계적인 문화를 이룬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 차별이 심했던 나라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잔존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이 문제가 상당히 보편화되고 일반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남녀가 차별받는 사회는 분명 미개한 사회입니다. 더구나 사람이 차별받는 사회는 더 낙후된 사회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원칙적으로 남녀의 차별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차별이 없는 것이 복음적입니다. 더구나 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더욱 용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지니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사회나 국가는 가정 먼저 변화되는 것이 이 장벽이 허물어지는 일입니다. 차별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분명 방벽입니다. 편견입니다.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릇된 인습이나 편견 그리고 방벽들이 허물어 졌습니다. 성경은 분명 이 차별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2. “성경을 보면 여성의 역할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중요한 사역자는 모두 여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의 사역과 역할을 가감 없이 그대로 설명하고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은 예수님의 12제자들 보다 훨씬 탁월했습니다. 그의 신앙적 중심으로나 복음적인 열정으로나 주어진 현실에 대처하며 모든 어려움과 두려움들을 극복하는 자세 등을 보면 참 대단한 제자였습니다. 그 여인은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한 것도 잘 감당해 냈습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 중 언제나 보이지 않게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의 절정이었던 십자가의 길을 갈 때에도 마리아는 시종일관하며 그 뒤를 따라갑니다. 모든 제자들은 도망가서 숨어있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헌신의 삶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자주 장사 루디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은 여걸입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과감하게 전도를 위해서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전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선교에 성공한 것도 루디아의 그런 후원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 브리스가의 역할은 어떻습니까.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던 열정을 가졌던 여인입니다. 헌신적이었습니다. 열정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루포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은 이름도 없습니다. 그의 헌신의 내용이 무엇인지 나타나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그 여인을 가리켜서 “루포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는 내 어머니”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없고 그가 한일이 무엇인지 소개도 하지 않고 있지만 그의 역할이 대단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를 내 어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루포의 어머니가 음으로 양으로 자신의 전도사역을 위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전도자의 길을 걷는 동안 잊지 못할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중에서도 이 루포의 어머니를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중심 있는 여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하면서도 자신이 할 일을 다 하고 한일들이 모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보통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막 15:21절을 보면 이 루포의 어머니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시던 그 길은 아주 힘든 길이었고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그 길을 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벗겨 자신이 대신 지고 갑니다. 당시는 그 일이 참으로 창피스러운 일로 생각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십자가를 아무 말 없이 지고 올라갑니다. 로마 군병들이 허기지고 상처입어 걷기도 힘들어하는 예수를 채찍질하고 발로 걷어차는 모습을 볼 때 이 시몬이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제발 예수를 때리지 말라고 항변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의 고난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시몬의 극적이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몬도 12명의 제자들보다 그 역할이 훨씬 성숙하게 나타납니다. 지금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서 그 자리에 없습니다. 요한은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따랐지만 마리아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보다 못해 시몬은 혼자서 안타까워하면서 로마군인들을 향해서 항변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바로 그 시몬의 아내가 본문에 나와 있는 루포의 어머니입니다. 이쯤 되면 그 루포의 어머니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해 알 수 있습니다.
루포의 어머니는 남편을 좋은 신앙인으로 만들어 유사시에 고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내 놓았습니다. 아들을 신앙적으로 키워서 사도바울이 선교하는 길에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전도자들의 오가는 길목에 위치해서 언제나 소리 없이 나타남 없이 할 일을 다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사도바울은 너무나 감동을 받았고 따뜻한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어머니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진정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여인이 가장 힘 있는 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은 조용히 배후에서 남성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후에서 할 일을 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자는 전면에 나타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남성은 목소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바울은 가정을 말할 때 언제나 “아내들아” 하고 남편에 앞서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3. “양육 담당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이나 자녀 양육담당을 여성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고 사명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기초적인 단체는 가정입니다. 가정이 건실해야 세상이 건실해집니다. 가정에서 사회 지도자가 양육되고 길러집니다. 그래서 가정은 기초적 교육장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가정 교육장의 책임을 여성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기초적인 근본은 가정입니다. 그리고 그 기초의 한 중앙에 있는 사람은 어머니이고 아내이고 여성입니다. 그래서 위인을 말할 때는 의례히 어머니가 등장하고 어머니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말할 때는 그의 어머니 요게벳을 말하게 됩니다. 그 여인이 모세를 양육할 때 그냥 젓만 먹이는 단순한 유모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유대인의 정신과 혼과 책임을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모세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강조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품에서 모세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무엘을 말할 때는 언제나 한나를 말하게 됩니다. 그도 사무엘에게 많은 정신을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디모데에게는 유니게 라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라나는 디모데에게 구약의 쉐마 즉 이스라엘의 전통교육을 강조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디모데라는 전도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맹자를 말할 때는 이름도 없는 어머니를 말하게 됩니다. 이름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맹자 하면 그의 어머니를 누구나 쉽게 떠오르게 합니다. 그만큼 아들 맹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 그의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율곡은 어질고 정숙한 어머니 신사임당이 배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율곡하면 그의 그 훌륭한 인품이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양육법은 사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상기의 여인들은 한결같이 자라나는 아들에게 사명을 강조하고 교육한 어머니들입니다. 함께 살고 더불어 살고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는 사명의 삶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이고 양육이고 훈련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구조가 이 사명이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무시하고 가르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함께 살아가는 사명이나 역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오늘 이처럼 서툴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서툰 것입니다.
이제는 단순히 자녀를 양육한다는 차원에서 사명을 강조하는 양육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건실한 교육은 사명을 강조하는 교육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교육이 가장 좋은 교육인 것입니다. 요게벳이 자라나는 모세에게 이 사명을 얼마나 심도 있게 강조했겠습니까. 한나가 사무엘에게, 신사임당이 율곡에게, 유니게가 디모데에게 얼마나 이 사명의 삶을 강조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이 땅의 여인들에게 주신 몫이고 사명이고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소중한 역할이고 사명입니까. 이 역할을 다하는 것이 여성의 여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4. “이 소중한 역할을 잊으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에는 지혜 있고 중심 있는 여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역할을 다하는 여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여인의 역할도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도 포기하는 어머니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라나는 자녀들에게 혐오감을 가정중심의 정신을 메마르게 하는 어머니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가정을 떠나 밖으로 돌며 탈선하는 자녀도 있고 남편도 있습니다. 모두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소홀히 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로버트 슈만이라는 사람은 프랑스의 외무장관을 지냈고 수상도 역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갑니다. 그분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합니다. 그때 실수로 뒤에 있는 여인의 발을 밟게 됩니다. 그래서 당황한 그는 그 여인에게 사과하려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 여인은 구두를 털면서 마치 진돗개처럼 욕을 퍼부으며 “병신아, 멍청아, 눈 뒀다 뭐하느냐”하고 욕을 해댔습니다. 한창을 욕을 하던 그 여인은 얼굴을 들고 쳐다보는 순간 얼굴이 빨개지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러더니 사과하기를 “아 선생님 미안합니다, 나는 남편인줄 알고” 라며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순간적으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갑니다. 그 여인에게서 본 그 흉악한 모습에서 이 세상의 모든 여인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 좋지 못한 순간의 모습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인생의 방향을 돌려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여인의 모습에서만 나타나겠습니까. 이 땅의 여성들 중 결혼을 포기하고 평생 독신주의를 고집하는 여성의 경우 많은 여성은 아버지에게서 본 부정적인 견해 때문이라는 조사도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세상의 남자들은 모두 아버지 같을 것이라는 편견이 마음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어쩌면 나의 한순간의 잘못된 행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씻지 못할 상처로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소홀히 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여성들에게는 섬세한 역할을 주셨습니다. 때로 그 역할이 섬세하기 때문에 작게 여겨지고 무시하게 되는데 사실은 그 역할이 거의 정신적인 역할이기 때문에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인은 주어진 역할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이 엄청난 역할을 도외시하면 안 됩니다. 진정한 여성상은 중심 있게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런 여성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여인이 루포의 어머니입니다. 이 여성이야 말로 가장 여성다운 여성상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여기 나타난 루포의 어머니는 이름도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한 일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를 가리켜서 내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나 아들이 모두 가장 절박하고 긴요한 시간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잘 소화해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가장 힘들고 절박해 할 때 남편을 투입시켜서 그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아들을 투입해서 전도자로 그를 돕게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가장 힘들고 어려워할 때 마다 자신이 나서서 그에게 안식과 쉼과 물을 마시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그는 내 어머니다”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여성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여성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면에 나서서 남자들과 똑같이 큰소리로 떠들고 의자를 나란히 놓아야 여성을 높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에게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
로마서 16:10-24
편지의 끝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과 사역을 함께 나누는 동역자들의 이름을 거명하는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명 되는 사람들은 그때마다 매우 다양했습니다. 바울은 영혼 구원자인 동시에 친구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의 친구들 중에는 그의 영향력으로 인해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기로 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복음 전도자였던 무디도 바울처럼 친구를 사귀는 은사가 있었고, 무디도 사귄 친구들을 주님의 일에 동역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위대한 설교가와 음악가들 중에는 무디가 발굴한 사람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아이라 생키(Ira sankey), 켐벨 몰간, 헨리 드러먼드(Henry Drummond), 마이어(F.B. Meyer)등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형제들이 없으면 돈과 기회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자산(資産)은 형제들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형제들을 존귀히 여기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자주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돈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훈련시키는 데 3년이란 세월을 바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주시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형제들이 예배되면, 하나님께서 기회와 돈을 공급하셔서 당신의 일이 성취되게 하십니다.
1. 디모데(16:10-11)
디모데는 디도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특별한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항상 디모데를 가장 험난한 곳으로 파송했습니다. 디모데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나긴 했지만(딤후1:5) 젊은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낳은 아들”(딤전1:2)이라 부릅니다. 요한 마가가 바울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바울의 동역자로 부름받은 사람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행16:1-5).
디모데는 훈련을 잘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봉사에 커다란 발전이 있었습니다(빌2:20-22). 마침내 디모데는 전도가 가장 힘든 지역인 에배소에서 바울을 대신해서 사역하기에 이르렀습니다(바울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때 디모데는 에베소를 떠나려고 했으나 바울이 그곳에 머물도록 권고했습니다(딤전1:3).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충고한 것을 보면(16:10). 젊은 디모데가 육체적인 문제와 정서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딤전5:23/ 딤후1ㅣ4). 디모데에겐 그가 받을 수 있는 모든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종과 함께 수고했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종들이 모두 바울 같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역을 시작한 젊은이들에게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2. 아볼로(16:12-14)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복음을 철저하게 배운 능변(能辯)의유대인이었습니다(행18:24-28).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능력있는 사역을 했고, 고린도 교회에는 아볼로를 추종하는 분파가 있었습니다(1:12/3:4-8)
(고전1: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나는 아볼로에게,나는 게바에게,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3:4)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전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전3: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그러나 아볼로가 이러한 분열을 조장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만 주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열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더 많은 사역을 위해 고린도롤 되도랑 가라고 서슴없이 아볼로에게 권면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 사이에는 시기심이나 경쟁심이 전혀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타인의 의사를 좌우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또 당시 아볼로는 자신이 다시 고린도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바울은 아볼로의 결정에 따라야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과 아볼로가 함께 일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생각하고 13,14절 말씀과 같은 훈계를 주었을 것입니다. &985172;깨어&985173;라는 말은 단순히 “경계하라” 또는 “주의하라”는 의미입니다. 대적은 항상 가까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절대 안전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분명히 고린도 교회를 공격해서는 디모데난 아볼로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라는 말은 성숙하고 견고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앞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미숙한 어린아이들로서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3:1이하). “남자답게 강건하여라”는 말을 덧붙은 것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 어른처럼 행동하라는 뜻임에 분명합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성숙한 지도력이 필요한 경우 용감한 남자처럼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남자다운 지도력은 사랑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독재(獨裁)가 되기 쉽습니다. 바울은 13장에서 사랑의 가치와 그덕성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할 때 아브라함 링컨이 “부드러운 강철”(velvet steel)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성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참다운 남성다움이란 부드러움을 겸비한 것이어야 합니다.
3. 스데바나의 집(16:15-18)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은 아가야에서 첫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1:16).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헌신함으로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작정하다”(15절)는 동사는 그들이 그를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사역에 임명했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그들 스스로 지도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필요할 때면 굳이 요청이 없어도 지체하지 않고 일해 그 부족을 보충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조력자(助力者)로서 주님을 위해 수고하였습니다(여기서 “수고하다”라는 말은 전력을 다해 애쓰는 것을 뜻합니다) 지역 교회 안에서 한 가족이 전부 주님을 위해 신실하게 일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스데바나는 교회 문제에 관해 바울과 협의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가 에배소에 파송한 공식 위원들인 브드나도와 아가이오와 합류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전 교회의 대표로 여겼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없을 때 바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고린도 교회의 부족을 메꾸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하게 해주었고 그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의 성도들이 그들의 목사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흔히 신자들은 문제거리나 고민은 목사와 함께 나누지만 기쁨이나 축복은 좀처럼 함께 나누지 못합니다. 목사들의 목사는 누구입니까? 목사가 영적으로 새 힘과 격려를 얻으면 그것은 결국 누구에게 되돌아갑니까? 성도들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목사를 기쁘게 할 수 있으며 목사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주 특별한 가정인 이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충성된 성도들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4. 아굴라와 브리스가(16:19)
이들은 주님께 헌신한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삶과 사역은 바울의 사역과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바울처럼 장막 만드는 자들이었습니다(행18:1-3). 이 경건한 부부는 아굴라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로마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기 이해 그들을 고린도로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였습니다.
브리스가는 뛰어난 여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부부의 이름은 신약성경에서 여섯 번이나 언급되었는데, 그 중 네 번은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등장하고 있었습니다(가장 믿을 만한 사본은 행18:26에서 브리스가의 이름을 먼저 언급합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브리스가는 남편보다 더 강했고 헌신적인 지도자이자 복음 증거자였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들은 함께 주님을 섬기고 바울을 도왔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옮기자 아굴라와 브리스가도 사업을 정리해 바울을 따라 에베소로 가서 그 척박한 도시에 교회를 세우는 바울을 도왔습니다(행 18:18이하). 그들은 매우 유능했기 대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사역을 맡기고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아볼로에게 복음의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가르쳐 준 것은 에베소에 머물 때였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처럼 주(主)를 섬기며 목회자를 돕는 부부에게 모든 지역 교회는 감사드려야 합니다. 아내인 브리스가가 더 훌륭하다고 해서 그 사실이 함께 사역하는 아굴라의 입장을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드르이 집에서 모였는데, 이 사실은 그들의 친절함을 보여 줍니다. 로마서 16장4절에는 그들 부부가 바울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위험까지 감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롬16: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롬16: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행19:29)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 (행19: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행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그러나 아굴라와브리스가는 에베소에서 계속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은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그들 부부를 로마인들에게 소개시키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롬16:3). 로마에서도 역시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자기 집에서 교회가 모이게 했습니다(롬16:5).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편지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문안하라고 그때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말합니다(딤후4:19). 이 훌륭한 부부는 로마를 떠나 이제 에베소에 가 있었고, 이번에는 바울을 도왔던 것처럼 디모데를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부부들 중 주님을 좀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자주 이동하는 자들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들 부부는 이사할 때마다 그들의 사업 거점도 옮겨야 했습니다. 오늘날 그들 부부와 같은 헌신과 희생을 지닌 성도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정말 지역 교회의 위대한 자신입니다.
바울의 맺음말에 주춤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룩한 입맞춤”(16:20)은 그 당시 흔한 인사법으로서, 남자는 남자에게, 여자는 여자에게 입맞춤으로 인사할 수 있었습니다(롬16:16/ 고후13:12/ 살전5:26/ 벧전5:14) 만약 바울이 오늘날 교회에 편지했다면, “서로 악수함으로 인사하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대개 편지를 구술(口述)한 후에 끝에 가서 팬으로 직접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습니다. 또 그 편지가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은혜의 축도를 덧붙였습니다(갈6:11/ 살후3:17참조)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모든 불신자들은 저주를 받습니다(요3:16-21). &985172;마라나타&985173;는 헬라어이며 “우리 주님께서 오신다” 또는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계22:20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또한 주님의 재림을 또한 사모합니다(딤후4:18).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편지의 끝에서는 자신의 사랑을 그들에게 확신시킵니다. “친구들의 통책(痛責)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니”(잠27:6). 바울은 우리에게 많은 영적 지혜를 들려줍니다. 겸손함으로 받아서 실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