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월 (외 2편)
신덕룡
쇠백로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 있다 가느다란 발목 주위로 자잘한 흔적을 남기며 지나가는 바람과 일렁이는 금빛 물살들
스윽 고개를 쳐드는 검은 부리 끝에서 파닥거리는 햇살 몇 줄기 반짝,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하다 영문도 모른 채 물고기의 한 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더 씻어 낼 것도 헹굴 것도 없는 산속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바깥은 아니다
평생 들일과 함께 허리가 굽은 아랫집 노인이 걸어가는데 중무장이다 마스크로 단단히 입과 코를 가린 기세와 달리 발걸음은 허청허청
안간힘치고는 참 헐겁다 냄새도 형체도 없이 에워싼 불운에 속절없이 당하지 않겠다는, 등 뒤가 텅 비었다 무언가 예고 없이 드나들어도 모를 만큼 넓다 불편한 동거 간밤에 무언가 다녀갔다 솔솔 재미 붙여가며 애써 가꾼 땅콩밭을 몽땅 파헤쳐놓고
늦봄에 땅을 갈아엎고 두세 알씩 정성 들여 씨앗을 묻은 뒤 텃새들 눈을 피해 종이컵까지 씌워 싹을 틔우고 여름내 보살폈는데
깊이 잠든 사이 일궈놓은 살림이 거덜 난 것처럼 허망했지만 태연과 무심을 가장하면서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았다 따지고 보면 같은 산자락에 울도 없이 얹혀살면서 주인이니 도둑이니 하는 말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짐짓 불편한 동거일 뿐이라고 다독일 수밖에 없다
길 위에서 온몸으로 비와 바람을 맞고 이편과 저편을 나누고 상처받을 때마다 결의를 다지고 살았던 짐승의 시절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다
봄 여름을 잊고 가을 한 철 목 빼고 기다리다가 허기진 놈부터 배불리 먹었다면 다행이다, 먹고 남긴 것들 추려 담을 그릇 또한 클 이유가 없겠다
칸나
쑥, 솟아올랐다
술렁이는 바람은 폭풍우의 전령이지만 고요 속에 갇혔다
폭설과 시린 별빛들 불타던 태양의 기억까지 다 끌어모은
저 꽃대는
제 안에 쌓아 올린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에 불이 곧 댕겨진다는 걸 안다
부르르 떤다 멀리까지 한 소식 전할 것이다
—시집 『단월』 2023. 1 ------------------------- 신덕룡 / 경기 양평 출생. 1985년 《현대문학》(평론), 2002년 《시와시학》(시)으로 등단. 시집 『다섯 손가락이 남습니다』 『단월』 등 6권. 저서 『환경위기와 생태학적 상상력』 『풍경과 시선』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