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2)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도하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해서 사람들은 예수믿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점은 바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는 등의 이런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거나 부담으로 다가오느냐 하는 것으로 나뉩니다. 종교는 자신의 힘과 자신의 공로를 쌓는 것을 기반으로 하기 빼문에 이런 말씀도 짐으로 여겨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랍니다 주님과 사귀는 이 기한 기도를 무거운 짐으로만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기독인이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본문이 주어진 데살로니가교회 교인의 형편에서는 꼭 쉬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환란과 핍박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살전3:7) . 하지만 그들이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주안에서>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살아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이 있는 사람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든지 흔들리지 아니하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해서 바울은 이 서신을 보내면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과의 사귐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항상 기도하라는 이 권면은 짐이될 수도 있고 유익이 될수도 있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 우리가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임마누엘)을 믿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요14:1절에“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했어요.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셨으나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게 되며 이제는 제자들과 하께 하실수 없는 “또 다른 보혜사” 보내어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보혜사는 헬; 파라클레토스‘입니다. ’파라‘는 옆에서 ’클레토스‘는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제 떠나고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 보내신다 했는데 바로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돕는 자로 옆에 계시는 성령님과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전 12:3절에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님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위로해 주시고 아르 격려해주시고 나를 진리로 인도해주시고 나로 하여금 쉼 없이 기도하게하시는 분입니다. 그 보혜사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주님과 깊은 사귐 속에서 쉬지 않고 끈임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그게 가능합니다. 성령님이 안와 함께 계시는 언제 어디서든지 쉽게 나아가 성령을 믿고 의지하고 고백하고 따르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기독교 구원은 십자가사건입니다. 참된 기독교신앙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십자가 앞에서고 십자가 앞에 죽고 십자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서면 가난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나는 주님이 없으면 안 됩니다. 주님 없이 살수 없어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신과 자비를 필요한 자들임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십자가 앞에 서는 마음으로 시86편 1절에서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독교의 복은 이 가난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마5:3절 팔복의 시작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합니다. 가난한 마음이 있으면 날마다 더 주님을 갈망합니다. 우리는 이 가난한 마음을 가질 때에라야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손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기도가 대체로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기도하였다면 쉬지 않고 기도하려면 하나님 자신을 구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달라는 기도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는 그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시18:1-2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하나님 자신을 구하면 그 분 안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인 C.S. 루이스 교수의 글 가운데 이런 풍자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런던을 방문했습니다. 루이스는 런던을 방문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이 고양이의 이름은 푸쉬였는데 “푸쉬야. 푸쉬야 너 어디 갔다오니?” “예, 나는 여왕을 만나러 런던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푸쉬야 너는 무엇을 보았니?” “나는 여왕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를 보았어요. 대단히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고양이는 런던에 그 아름다운 왕궁에 가서 엘리자벳 여왕이나 찬란한 궁궐의 그 아름다운 역사적인 사적을 본 것이 아니라 겨우 여왕의 의자 밑에 기어 다니는 생쥐를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눈을 들어 우주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마치 이 고양이 같이 자기 관심 분야인 생쥐만 보려고 마음을 쏫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가장 복된 일인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주님이 주시는 어떤 현세적 복에 더 관심이 많은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어느 날 밤,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뵙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길래 나를 그렇게 사모하느냐?”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진센돌프 백작은 자기 집안의 좋은 배경과 화려한 귀족 출신의 모든 신분을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화려한 귀족의 신분까지 버리고 거리로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귀족의 신분보다 더 큰 야망이나 뜻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내 야망은 다만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주님을 소유하면, 그분에게서 주시는 풍성함 영생, 우리의 모든 필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요?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관은 그가 구하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전부이신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 주님 자신을 구하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이입니다.
그렇습니다. 루터는 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방법을 아주 짧게 기도하라, 자주 기도하라, 전심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