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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전도의 성경적 관점
전성걸 (KGLI 원장)
서론
기독교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다. 성경은 기독교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며 하나님으로 결말되어지는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역사 임을 증언한다.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성경 전체가 선교적인 책이며, 성경의 구약과 신약은 상호의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라는 통합된 관점으로 나아감을 가르쳐 준다 (Glasser 2006: 27).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의 이론과 전략과 실천은 반드시 성서에 그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하며 복음 전달은 성서적 패턴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필자는 관계 전도의 성경적 관점을 연구하기 위해 밴 엥겐의 “태피스트리(Tapestry) 방법론"을 활용하고자 한다 (Van Engen 2007: 49). 태피스트리 방법론이란, 성서를 하나님의 활동의 날줄과 씨줄로 보는 것으로써 성경을 대하는 두 가지 접근, 즉 하나님의 행동으로부터의 접근(주제) 과 사람들의 행동과 상황으로부터의 접근(컨텍스트) 모두를 활용한 성경 읽기의 통전적 방법이다.
통전적 접근법인 태피스트리 벙법론이 관계 전도의 성경적 기초 마련을 위해 유익한 이유는 첫째, 성서 속의 특정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발생 했던 관계 전도를 성서 시대적 관점에서 관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이 오늘날의 새로운 선교적 상황 속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주단과 상황적 세계관을 연결하는 이와 같은 작업은 필자가 이미 연구한 문화 속의 복음과 복음의 번역성을 모두 수용한 분석법이 될 것이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먼저 구약과 신약의 성서적 상황에서 발생한 관계 전도를 살펴보고, 이어 성서에서 발견된 관계 전도의 성서적 주단을 오늘날의 상황적 세계관과의 연결 시도를 통해 얻어질 수 있는 성경적 관계 전도의 이론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구약에 나타난 관계 전도
구약에 등장하는 관계 전도 모델의 발견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구약에 나타나는 선교적 주제의 발견을 우선적 과제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으로 성경을 관찰하게 될 때 구약 성경은 구속사와 세계 선교의 동기와 의미, 그리고 근거를 제공해 주는 보편주의의 출발점이 됨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발견되는 선교적 주제들은 하나님의 보편적 선교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로 특징지어 진다. 월터 카이저 (Walter C. Kaiser)는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원심적 선교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축복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임을 지적하며 세계 선교의 기초는 구약에서의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소명이라고 해석한다 (Kasier 2005:13). 따라서 구약적 전도는 선택된 한 민족을 통한 다수 민족의 구원이라는 민족집단적 개념, 즉 족속 구원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구약에서의 족속 구원 개념은 하나님의 보편적 축복과 구원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통한 언약이라는 점에서 개인과 가정으로부터 출발되는 작은 집단의 축복을 통한 구원이기도 하다 (Kaiser 2005: 27). 한 개인의 회심과 함께 한 민족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 등장하는 관계 전도의 발견은 이스라엘을 통한 선교라는 특수한 역사 가운데 펼쳐지는 열방의 구원을 위한 보편적 역사의 맥락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나아가 구약에서 발견되는 관계 전도의 모델들은 신약과 앞으로의 상황에서 교회의 민족 선교와 관련된 관계 전도의 성경적 기반으로 확인 된다고 하겠다.
유대 관계를 통한 관계 전도
이스라엘을 통한 구약의 특수한 선교 역사는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시작된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구속사는 그의 후손들의 계보를 통해 계속 이어져 간다. 그런점에서 구약에서 발견되는 관계 전도의 첫 번째 유형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그의 자손들의 유대 관계를 통한 구원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 (창12:2-3; 22:18)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의 부르심(12:1) 과 그를 통한 열방 구원의 계획 (12:2-3)은 구약에 등장하는 첫 번째 관계 전도의 모델로 제시될 수 있다. 열방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통한 열방의 구원 계획이 인간 유대 관계망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은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관계 중심적 전도의 표본으로 정의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립시켜 준다. 특히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 언약이 차지하는 선교적 중요성에 대한 이해를 올바로 갖는다면 언약 이행으로써의 선교적 과제는 관계의 확장을 통한 구원의 성취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언약은 하나님의 선교의 기초이다 (Bavink 1979: 34). 동시에 하나님의 선교를 이행하는 기관으로서의 언약적 성취는 언약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인간 관계망의 구조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와 같은 선교의 언약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의 활약을 고찰하게 될 때 그들의 이야기는 구약에 나타난 관계 전도의 첫 모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한 열방 구원의 언약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과 관련하여 유대 관계를 통한 전도로 관찰된다. 첫째, 언약의 증표로 주어진 “할례”의 의미와 실행이다 (창17:9-14; 23-17).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구별된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상징적 의미이다. 할례의 의미 속에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맺는 자들이 그 관계에 헌신된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외적 증표가 포함되어 있다 (Glasser 2006: 94). 흥미로운 점은 할례를 받은 실행의 대상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베푼 자들은 그의 자손의 “모든 남자들”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 그리고 아브라함의 집에서 난 이방인이었다 (17:12-13). 다시말해 영원한 축복의 대상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뿐만이 아닌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방인들이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언약 사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이라는 혈통적 관계를 통해 시작되어 이방인과 같은 비혈통적 관계로 확장되는 복음의 보편성을 증거해 준다 (갈3:29).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으로서의 열방의 구원 계획은 구심적이며, 동시에 원심적인 관계망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관계 전도의 원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둘째, 아브라함 언약이 족장들의 선교를 통해 확장됨에 따라 열방의 구원 계획은 더욱 많은 관계적 수로를 통해 흐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 언약은 그의 자손인 이삭과 야곱의 전환기적 소명을 통해 확인되었고 그들의 활약을 통해 확장되었다. 이들 족장들은 이웃 이방 민족들과 다양한 접촉을 세워 갔고 이러한 접촉들은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선교적 기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는 축복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라는 도구를 통해 각 개인과 집단들, 족속과 민족들에게 확산된 것이다 (Kaiser 2005: 28).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자손들에게 전수된 언약은 관계라는 수로를 따라 이스라엘의 선택과 선교, 그리고 그들의 봉사를 통한 열방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선교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선택된 존재로서의 이스라엘의 언약적 독특성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던 인간들에게도 새로운 관계의 재창조라는 은혜의 방편을 통해 보편화 되었음을 증거해 주었다. 결국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통한 열방의 구원 계획은 관계의 두 지평,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와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복음 전달을 위한 핵심적 선교의 도구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요셉의 내러티브 (창45:3-8)
창세기 후반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관계 중심적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버지와 요셉의 관계, 요셉과 형들의 관계, 요셉과 보디발 가정과의 관계, 요셉과 바로의 관계 등은 요셉의 주변적 관계망들이 구속사적 내러티브의 전개와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증명해 준다. 요셉의 내러티브를 다 거론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요셉의 사건들을 읽으며 관계들이 진행되어가는 과정과 관계들이 처해 있는 상황적 문제들을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격변적으로 변화되어가는 관계들과 상황 속에서도 일심의 변화도 없었던 신실한 요셉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들 가운데서도 당황하지 않고 책임을 완수하며 이방의 땅 애굽이라할찌라도 지혜와 열정을 쏟음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Glasser 2006: 105). 그 결과 요셉은 신뢰 받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요셉의 내러티브는 다음의 세 가지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관계가 차지하는 선교적 중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첫째, 신뢰와 믿음을 기반으로 형성된 요셉의 유대 관계망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이 전달 될 수 있게 하는 훌륭한 다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복음 전달자가 처해 있는 상황과 문화 속에서 반문화적이지 않는 가운데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사회와의 자기동일화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관계적 수로를 창조해 내는 지혜와 전략이 된다.
둘째, 애굽의 노예 됨을 시작으로 이방 나라의 총리가 되기 까지의 사건들을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으로 받아드린 요셉의 자기고백은 관계를 통한 전도의 분명한 목적과 비전이 생명의 구원에 있음을 명백히 해준다는 점이다 (45:5). 요셉은 자신을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모든 민들을 축복하게 될 것이라는 언약의 성취에 있음을 주저하지 않았다 (45:7).
셋째, 요셉의 삶의 관계 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역에 대한 암시적 의미를 띄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은 요셉을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공식적으로 확증하고 있지는 않지만 구약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들보다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제시하실 그분의 사역과 삶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자신을 배반한 자를 용서하며, 자기를 내쫓은 자들을 구해주고, 낮고 천한 곳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는 삶은 인간의 문화 속에 찾아 오시사 그들과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셨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역을 상기 시켜준다. 요셉의 삶으로 상기되는 메시아적 사역이야말로 복음 전달자가 맺고 있는 유대 관계망릍 통해 일어나야 할 복음적 사역이다. 따라서 복음 전달자는 인내와 용서, 구원과 자비를 흠향하는 관계적 전도자가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선포를 통한 관계 전도
구약에서 발견될 수 있는 관계 전도의 두 번째 유형은 선포의 개념을 활용한 관계 전도 방식이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요나의 니느웨 선교는 선포를 통한 관계 전도의 일면들을 제시해 준다.
바로를 향한 모세의 선포 (출5:1; 7:3-5)
출애굽 사건은 구속사의 구약적 중심 사건으로서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 비교될 만한 하나님의 선교적 역사이다 (Hedlund 1990: 7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셨고 모세는 이스라엘과 자신을 동일시 함과 더불어 변화의 대리자로 바로 앞에 섰다. 바로 앞에 나간 모세의 목표는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의 해방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모세가 바로를 향해 선포한 메시지,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라”가 이를 대변해 준다 (출5:1).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표징과 이적이 초래되었고 비로소 재앙을 경험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게 되었다 (4:21; 7:3; 12:51).
출애굽의 사건이 전개되는 초기적 사건 속에서 주시되어야 할 점은 모세가 선포한 5장1절의 내용이 10가지 재앙의 출현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바로의 강팍해 진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허락신 이유에 기인될 수 있겠으나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주라는 선포된 메시지는 10가지 재앙의 전주곡 이었다는 점이다. 그러하기에 10가지 재앙의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 모세가 바로에게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을 가늠하도록 도와 준다. 따라서 모세를 통해 바로에세 선포된 놓아줌의 메시지는 10가지 재앙과 목적상 동선상에 놓여있으며 재앙의 목적의 관찰을 통해 바로에게 선포된, 그리고 재앙을 통해 지속적으로 선포되었던 메시지의 핵심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선포를 통한 관계 전도를 관찰하려는 시점에서 재앙의 목적을 발견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재앙의 목적으로 관찰될 다음의 사항들은 구약적 맥락에서 진행되는 관계 전도의 내용과 형식을 대변해 준다. 다시말해 바로를 향한 모세의 선포와 하나님의 재앙의 목적을 발견함으로서 선포의 방식을 통한 관계 전도의 의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재앙 속에 담겨진 첫 번째 목적은 바로와 애굽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7:5; 9:14). 카이저는 이점을 분명히 한다. 모세와 바로의 대결, 재앙과 홍해 사건의 궁극적 목적은 온 천하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개인적이며 체험적인 방법으로 알리고자 함에 있었다는 것이다 (Kaiser 2005: 31). 바로 이점이 선포적 개념의 관계 전도가 지니는 핵심적 의의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다. 모세에게 알려진 야훼, 곧 “스스로 있는자”는 “전능하신 하나님 (El Shaddai)”으로 세상 가운데 선포되어야 한다. 야훼라는 하나님의 자기표현은 출애굽기 3장과 6장의 문맥으로 볼 때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음을 알리고자 했던 재앙 속의 의미는 야훼의 구원 선포로 귀결된다 (6:6). 그런 점에서 카이저는 애굽에 내린 재앙을 여호와의 승리적 개념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재앙들은 애굽의 종교적 배경을 반영한 것으로 “애굽신들을 상징하는 요소들에게 재앙이 계속 쏟아부어졌다”고 해석하며 이는 애굽신들에 대한 여호와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Kaiser 2005: 32). 때문에 바로의 강팍함과 그로 인해 계속되는 재앙의 중심적 의도는 야훼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며 주인이시며 승리자라는 것을 알리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포를 통한 관계 전도의 내용은 하나님 만이 참 된 신이시며 오직 구원은 야훼에게 있음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재앙의 두 번째 목적은 야훼가 곧 여호와 이심을 바로와 애굽만이 아닌 이스라엘에게도 알리기 위함이었다 (6:3,7).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구원은 모세도 아니며 이스라엘의 공로도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복음 선포자들이 반드시 알고 의지하고 있어여할 선포의 핵심적 내용은 구원의 은혜적 개념이다. 때문에 재앙 속에 담겨 있던 하나님의 의도는 “오직 은혜”라는 은총의 사상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포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로서의 개인과 기독교 공동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이라는 믿음과 신앙을 확증해야만 하며, 이를 기념하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고전11:23-26).
재앙의 목적 발견을 통해 관찰되는 세 번째는 재앙의 실행은 하나님의 말씀의 실행을 의미하며, 따라서 재앙의 목적은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들은 그 말씀에 순종적인 관계로 나아와야 함을 알리고자 했다는 점이다. 우박의 재앙에 대한 경고의 말씀에 순종했던 일부 바로의 신하들은 종들과 생축을 집으로 피하게 함으로 죽음을 면하였으나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생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으므로 죽음을 당하였다 (9:20-21).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역사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살아가야 한다. 구원이 임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손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포해야 할 선포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선포된 말씀으로 인해 수용자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 말씀 선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메시지를 선포하는 복음 전달자들은 관계 전도의 목적이 말씀의 전달에 있음을 기억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관계 속에서 효과적으로 선포하며 수용자들로 하여금 말씀이 이해될 수 있게 하는지에 대한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모세와 바로의 대결적 관계 구조 속에 발견되는 선포를 통한 관계 전도는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 그리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은혜의 선물임을 알리는 선교적 행위라는 것을 관찰하였다. 아울러 구원의 선포자로서 기독교 복음 사역자들은 그들이 전달해야 할 내용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더 나아가 각 문화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이며 실제적인 전략 수립이 과제로 남게 됨을 보게 된다.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선포(욘3:1-10)
요나서에서의 하나님의 선교적 활동 발견의 진의를 둘러싼 학자들 간의 의견 충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교적 행위는 선지자 요나의 행적을 통해 요나서 특유의 선교적 개념과 의미를 명백히 한다 (Kaiser 2005: 108). 요나서는 하나님의 선교를 발견하기에 충분한 자료를 제공해 주며 필자가 연구하고자 하는 구약 속의 관계 전도에 대해서도 새로운 일면을 제시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교의 대상인 니느웨로 보내셨다. 앗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느웨는 세속적 번영과 타락으로 물든 패역의 일도를 달리던 이교도들의 도시였다. 고지식한 유대인 요나에게 니느웨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만한 선교의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에게 주어진 사명은 그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3:2-4). 그 결과 선포된 심판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는 패역의 길이서 돌아서는 회개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3:5-10).
요나서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학적으로 많은 의의가 담겨져 있다. 그 중 하나는 니느웨의 회개와 구원이 요나의 선포적 메시지의 전달을 통해 일어났다는 점이다. 요나의 선포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첫째, 선포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은 수용자들을 향해 선지자적인 선포 사역을 감행함으로 복음 전달을 위해 필요한 관계적 수로의 형성을 용의하게 하여 메시지의 온전한 전달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들이 이방선교를 위해 보여주었던 메시지 전달의 구약적 모델이다.
둘째, 요나가 보여준 선포를 통한 관계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가장 명료하고 담대하게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이다. 요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니느웨의 상황을 연구하거나 선교적 전략을 세우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유대주의적 사상을 반영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전하였을 뿐이다. 선포자 요나는 선포되는 메시지의 내용과는 상관 없이 의미 전달의 도구로써의 메신저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요나의 편협한 국수주의가 걸림돌로 작용되었음에도 요나의 선포는 선교의 중요한 측면, ‘하나님은 명하셨고 요나는 선포했다’는 선교의 기본적 공식을 가르쳐 주었다.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선포하는 것이다. 또한 선포의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도 두 가지 평행적 주제, 즉 심판과 회개라는 내용적인 보편성을 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구성하는 가장 간결하고도 핵심적인 요소이며 선포를 통한 관계 전도 속에 발견되어야 할 관계 전도의 단순성이다.
셋째, 선포를 통한 관계 전도는 선포자의 자민족중심주의적 세계관을 초월하는 하나님 중심적 복음 전달 법의 원형으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는 요나의 세계관과 부족함에 의해 제약 받지 않았다. 요나의 편협한 유대주의적 특수주의(particularism)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무산되지 않았다 (Kaiser 2005: 106). 선포 되어지는 메시지의 성격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포자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고 선포자에게 메시지를 위임한 메시지의 출처에 의해 주장됨이 관찰되었다.
요나가 보여준 선포로서의 메시지 전달은 관계 전도의 중요한 면을 다루어주었다. 선포를 통한 관계 전도는 관계의 수로를 개척하여 말씀을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전달함으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자비로 영혼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전달 방법이라는 것이다.
공동체를 통한 관계 전도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자손들로 전달된 구원의 계획은 이스라엘을 통한 선교라는 주제를 낳는다. 하나님의 선교적 도구로 선택 받은 이스라엘은 구속사적 공동체로서의 선교적 사명을 위해 선택 되었으며 그들의 선택은 공동체를 통한 하나님의 선교라는 소주제로 실현된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두 번째 관계 전도의 예는 공동체를 통한 관계 전도 유형을 통해 제시 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 (출19:4-6)
아브라함이 열방을 대표하는 언약의 선두주자로 택함을 받은 사건은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한 공동체의 부르심의 사건으로 비유된다. 바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이스라엘의 선택이 그것이다. 요하네스 블라우 (Johannes Blauw)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은 선택의 대상을 초월하여 선택받은 자가 행해야할 직무 수행의 주체가 된다고 지적함으로 특정한 개인의 선택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이스라엘의 선택이라는 관점으로 이해되어져야 함을 설명해 준다 (Blauw 1988::23).
섬김을 위한 도구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에게는 책임과 임무가 뒤따랐다. 출애굽기 19장 6절은 그들의 책임과 임무가 하나님과 열방을 위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임을 말씀한다. 제사장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은 분명했다. 바로 중재의 역할이었다. 중재자로서의 제사장의 역할은 먼저 제사장 자신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실현되어져야 했으며, 나아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규명되었다. 그러나 중재자의 핵심적 임무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특히 중재자로서의 이스라엘이 그들의 주변 민족들과 관계을 맺어 갈 때 중재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였다 (Kaiser 2005:34). 이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행했던 바와 같이 이방민족들과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종과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이행해 내는 임무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교사적 사명은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민족의 장벽을 넘어 계속하여 이방나라들로 확장될 수 있게 하는 구원의 다리가 되는 것이었다. 이는 카이저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의 귀중품”(treasured possession) 이 되어 하나님의 목적과 방법을 따라 나누어고 분산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Kaiser 2005: 33-34).
이스라엘의 선택과 의무는 만민의 구원과 연결되는 봉사 매체로써의 하나님의 백성에 종속 되었다. 그리고 봉사 메체로서의 본질적 임무의 승패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증표로 나타나는 이방민족들을 향한 구원의 신실한 다리가 되는 것에 좌우 되었다. 이와 같은 구원의 메신저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복음을 전달하는 다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 가운데 가능하게 하는 성경적 전략임을 발견하게 해준다. 다시말해 시내산에서 모세와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허락하시기 전 여호와의 계명을 세상에 전달해야 할 중재자적 다리로서 이스라엘을 준비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구원이 공동체를 통해 세상과의 상호 관계적 행위 가운데 전달되어야 함의 중요성을 이해시키시고자 했던 선교적 사건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남은 자 (사10:20-22)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한 구원의 확산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구약성서는 말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실하지 못하였고 유다마저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열국 가운데로 흩으셨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의 계획은 “남은 자”에 의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동체를 통한 관계 전도를 살피며 이사야서에 나타난 남은 자 사상에 대한 관찰은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남은 자에 대한 이사야의 개념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공동체로부터 교회라는 종말론적 공동체가 발견되는 분깃점이 되기 때문이다 (Bright 2003: 114). 그렇다면 왜 이사야서 속에서의 교회의 발견이 중요한가? 남은 자로 드러나는 이사야 속의 교회의 모형은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공동체로서의 본질적 사명과 목적을 극복하는 대안적인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열방들과의 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전파의 목적을 다시금 이어갈 사명자로서 혈통이 아닌 순종에 의한 자들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이사야 기록의 흥미로운 점은 남은 자들이 고난의 종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브라이트 (John Bright)는 고난의 종이란 그리스도이며, 이스라엘이며, 믿음의 의인으로서의 교회라고 해석한다 (Bright 2003: 186-187). 헤드런드 (Roger Hedlund)는 종이란 선교적 공동체인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 개개인 이며, 메시야라고 지적한다. 글라서는 고난의 종을 메시아라고 단언한다 (Glasser 2006:243). 학자들의 해석은 순위적인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으나 그들의 기본적 이해는 동일하다. 영적 이스라엘로 구별된 남은 자들과 그들의 활동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새 일을 위한 역사적 연결고리임과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부여된 열방과의 관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산이라는 사명 성취의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공동체를 통한 관계 전도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으로서의 이스라엘, 그리고 남은 자들을 거쳐 오늘날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전달되었다. 남은 자들이 보여준 신실성이란 예배와 삶과 증거라는 총체적인 면에서의 신실성이다. 그것이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으로서의 운명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 할찌라도 남은 자들을 통한, 그리고 오늘날의 남은 자로서의 교회를 통한 신실성은 선교적 맥락에서 말씀과 사회생활이라는 총체적인 면모를 지녀야 하는 당위성을 포함 한다. 그러므로 복음 전달 메체로서의 기독교 공동체의 삶은 복음 전도와 사회의 참여를 통한 복음의 총체적 전달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고난의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균형 잡힌 복음 전도자적인 공동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사야가 보여준 남은 자 개념의 교훈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하나님의 선교와 갖는 관계는 공동체의 삶을 통해 드러난 총체적 맥락에서의 관계 전도라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신약에 나타난 관계 전도
신약성경은 다양한 선교 모델을 통해 다양한 복음의 전달 방식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신약의 선교적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몸된 교회에 대한 선교명령으로 집약된다는 점에서 확고한 연합 안에서의 다양성으로 이해된다 (Hedlund 1990: 240). 그리스도와 교회 중심으로 제시된 다양한 신약적 선교 모델들은 원심적이며 보편적인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과 말씀을 받아드리는 사람들 간에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에 대해 말해 준다 (Show & Van Engen 2007: 34).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의 상호 작용 속에 형성되는 관계들은 수용자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됨을 말해 준다. 따라서 이제 살펴보려고 하는 관계 전도의 신약적 근거들은 관계의 수직적 이해와 수평적 적용이라는 관점하에 복음이 신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의사소통론적으로 적절하게 전달되는 상관성 있는 복음 전달로서의 관계 전도를 제시해 준다고 하겠다. 나아가 신약에서의 관계 전도의 발견과 이해는 다원화된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 속에 적합하고 효과적인 선교 전략으로서의 관계 전도에 대한 분석과 실천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대화를 통한 관계 전도
이야기 방식을 사용한 대화로서의 관계 전도는 예수님께서 통상적으로 사용하신 복음 전달법이다. 이에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다른 두 인물과의 만남 속에 관찰되는 대화를 통한 관계 전도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만남 (요3:1-21)
대화를 통한 관계 전도의 첫 번째 예는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해 발견된다. “유대인의 관원”(3:1)으로 묘사된 니고데모는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나 구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는 구도자, 또는 종교추구자로 보여진다. 그가 예수님을 밤에 찾아 왔다는 사실과 그가 예수님을 랍비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반영한다 (3:2). 그런 점에서 그는 한 공동체, 즉 예수에 대한 연민의 심정을 소유 했으나 그를 따르는 데에는 주저 했던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상과 면모를 대표한다 (Nissen 2005: 143).
대화의 초점은 니고데모의 구원에 대한 관심에 집중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드림으로 말씀의 출처를 이해 하기 보다는 단어의 문자적 해석에 집중하였다 (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대화를 이끌어 가셨다. 즉, 거듭남을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가리워진 주제로 설명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니고데모가 이해하지 못했던 거듭남의 진정한 출처를 대화의 중심에 두신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 되는 대화 가운데 하늘로부터의 거듭남에 대해 설명하시기 위해 구약성경 (민21:4-9)의 인용을 시도하심을 보게 된다 (3:11-21). 즉, 복음 전달자로서의 예수님은 성령으로의 거듭남이라는 텍스트에 모세의 놋뱀으로 비유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의 신학적, 문화적 이해를 통합 하심으로 복음 수용자인 니고데모에게 재창조된 텍스트를 전달하신 것이다. 따라서 인자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하나님과 연결키쳐 줄 분이라는 새로운 이해가 니고데모의 유대교적 사상의 단절을 통한 구원으로의 연속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한 거듭남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의 해석적 의미는 매우 적절한 번역이 되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대화라는 인격적 관계의 다리를 통해 니고데모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의사 소통의 방식으로 상관성 있는 복음을 전달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 상호간의 대화의 방식을 통한 내러티브적 복음 전달로써의 관계 전도는 텍스트의 명제적 해석과 새로운 상황에서의 의미 해석을 대화라는 방식을 통해 풀어감으로 의미의 표층적 차원을 극복하고 의미 전달의 심층적 차원을 보다 명확하게 깨닫게 해 준 예가 된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 (요4:3-42)
대화를 통한 관계 전도의 두 번째 예는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의 대화를 통해 발견된다. 본문의 이야기는 갈릴리로 가기 위해 베뢰아를 거치는 상례를 파괴하고 사마리아 행을 택하신 예수님의 의도적인 행동으로 시작된다 (요4:3-4).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대화를 이끌어 가신다. 첫째, 여인이 처한 사회적 차원이다. 그녀는 당시 사회적 환경 속에 많은 제약을 갖고 있었던 여자였다. 또한 그녀는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부정한 자로 취급 받았던 사마리아인 이었다. 이에 더해 육체적으로 불결한 삶의 역기능적 방식을 살았던 버림받은 자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영적 차원의 대화를 통해 여인의 사회적 장애물들을 제거하신다. 바로 “생수”라는 일상적인 문제로부터 참된 예배 장소의 문제를 이야기 하심으로 자신을 메시야로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두 번째 차원의 대화 가운데 세계관의 충돌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첫째는 사마리아 여인의 세계관이며, 둘째는 유대주의적 세계관이며, 셋째는 예수님의 선포자의 세계관이다 (Shaw & Van Engen 2007: 69). 이와 같은 세계관의 충돌 과정을 거쳐 예수님께서는 예배는 장소가 아닌 “신령과 진정”의 문제라는 새로운 해석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달하셨다. 즉, 여인이 갖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 속에 함몰되어 있는 유대주의적 사상과, 산에서의 예배라는 사마리안적 민족주의 의식의 세계관을 제거하시고 여인의 형편에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영적인 차원의 예배를 제시하심으로 번역을 이루신 것이다. 이제 우물가의 상황은 여인에게 있어 예배의 상황이 되었다 (Nissen 2005:150). 그 결과, 여인은 메시아를 만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전도자가 된 것이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구원론적 대화였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버려진 자의 필요에 맞춰진 수용자 중심의 메시아 계시적 대화였다. 예수님은 대화 가운데 수용자의 상황을 존중해 주셨고 이해해 주셨다. 그리고 수용자의 관점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으셨고 결국 수용자의 세계관적 변화를 통해 구원을 가능하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수직적 차원의 관계는 곧 사람들과의 수평적 차원의 관계에 적용되는 복음의 관계 지향적 전달의 핵심을 보여 주었다. 때문에 관계 전도를 위해 선택된 대화로써의 방법은 수용자들이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느낌과 믿음, 문화 유형등에 주의하게 함으로 독백적 복음 전달의 오류와 왜곡을 피하고 수용자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복음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해줌을 확인하게 된다.
설득을 통한 관계 전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변증적 설득을 통한 복음의 전달은 신약성경 속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관계 전도 방식이다. 사도들에 의해 이행된 설득의 방식은 복음에 대한 공격과 깊은 장벽이 존재하는 상황 안에서의 복음 전달을 위해 매우 적절한 방법으로 제시된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행2:14-42)
수용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그들을 설득하는 설교의 형식은 관계 전도의 또 다른 중요한 방식이다. 신약이 보여주는 설득을 통한 관계 전도의 모델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해 확인된다. 이 설교는 상황적이고 문화적으로 적절한 전달이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원래적 의미를 상황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매우 구체적인 설득적 설명이 동반된 관계 전도의 예가 된다.
분문의 배경은 성령 강림으로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던 자들의 방언 말함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 사건이다 (2:1-13).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는 유대인들의 조롱에 대해 베드로는 그들이 술 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킴으로 그의 설교를 시작했다 (2:14-15). 그는 곧 이어 방언의 현상을 이해시키기 위해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유대인들에게 상기시키기 시작 했다. 왜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약속을 그들에게 제시하였는가? 베드로의 청중은 모두 유대인이었고 멀리서 예루살렘까지 찾아올 정도로 경건한 자들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들은 구약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성취를 소망하며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와 같은 그들의 문화적, 종교적 상황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설교를 이해시키기 위한 해석 방식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의도 중심에는 요엘의 예언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서로 연결시킴으로 현재 발생하고 있는 방언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2:16-31). 더 나아가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보다 사실적 상황에 입각하여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던 자신과 다른 사도들의 증언을 두 번째 증거로 제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구약의 예언뿐만 아니라 신약의 사도들에 의해서, 그리고 이제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음을 설명했다 (2:32-36). 그 결과 베드로 설교의 청중들은 난 곳 방언 사건의 표층적 증거들을 보았고 심층적 차원으로 이해함으로 복음을 자신들의 상황에서 이해하고 받아드리게 되었다 (2:41).
베드로의 설교는 설득적 설명을 통해 복음이 전달되는 관계 전도의 중요한 일면을 다루었다. 수용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복음 전달자들이 선택해야 할 방식은 수용자들의 상황적이고 문화적으로 접근 가능한 적절한 방식이어야 함을 다시 한 번 확인 시켜 주었으며 설득을 통한 관계 전도는 이와 같은 의사소통의 기술적 영역이 충실히 반영될 수 있게 하는 방식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설득을 통한 관계 전도의 첫 번째 예가 보여준 보다 분명한 가치성은 변증적 설교를 통한 복음 전달은 적절한 신학화의 과정을 거쳐가는 동안 복음 전달자와 수용자의 관계 가운데 발생하는 복음에 대한 공격과 비성경적인 세계관을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는 이들의 마음과 정서와 의지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전개 된다는 점이다. 이는 설득을 통한 관계 전도에 있어 복음이 전달자에 의해 종합된 진리로 명료하고도 분명하게 변호되어야 함과 동시에 복음 전달자의 변화된 자신을 진리의 증거로 삼는 법정적 자기 변호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해 준다.
바울의 아덴 설교 (행17:16-34)
설득을 통한 관계 전도의 두 번째 모델인 바울의 아덴에서의 설교는 변증적 설교를 통한 관계 전도의 또 다른 제시이다. 아덴에서의 설교는 베드로의 설득적 방법이 보여주지 않은 관계 전도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다 균형 잡힌 관계 전도의 완성을 돕는 모델로 제시될 수 있다.
아덴은 우상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17:16). 당시 문화와 종교의 중심점으로 서 있던 아덴의 우상 만현의 상황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에 그들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는 종교와 철학에의 갈망과 고갈의 현상을 반증해 준다. 이는 바울이 발견한 제단에 세긴 글로 대표된다 (17:23). 바울은 이와 같은 그들의 종교성의 실체를 파악하고 매우 격분했다 (17: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매우 창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분명 아덴 사람들의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과 헬라의 지성주의적 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거나 꾸짖는 방식을 선택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아덴 사람들의 미지의 신에 대한 깊은 종교성을 칭찬하는 재치와 상황적 분별력으로 접근했다 (17:22). 이는 수사학적 연설을 통해 아덴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 했던 바울의 계획의 일부분이었다 (Nissen 2005: 106). 글라서는 바울의 분별력이 우상숭배로도 채워지지 않는 아덴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Glasser 2006: 458). 분명한 것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세겨진 제단은 아덴 사람들의 다신교적 종교관을 나타낸 것이었으며 바울은 그들의 다신교적 표현 속에 숨어있는 신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바울의 현명함으로 선택된 접촉점으로써의 미지의 신에 대한 거론은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하나님을 그들의 관심사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하는 상황으로 인도해 주었고 바울의 연속적 설득은 아덴의 사람들이 그리던 미지의 신을 창조주 하나님과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을 경험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지 않는 가운데 아덴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복음을 전달했던 바울의 문화 변증적 설득의 노력 때문이었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논증이 받아들려지지 않음으로 인해 바울의 설교가 더 이상 지속될 수는 없었지만(17:31-33) 그의 설교는 아덴 사람들의 혼탁한 경험을 새롭고 분명한 경험으로 유도해 주기에 적절하였다. 바울의 아덴에서의 설교는 논증과, 설명과 설득이라는 복음 전달의 적절한 시도가 충실히 반영된 예가 된다. 바울의 아덴에서의 설교가 성공적이었는가를 묻는 신학자들 간의 의견 충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설교는 그런 점에서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해 3천명이 회개한 것에 견주어 볼 때 바울의 설교는 회심의 열매에 있어서 매우 소수적이었으나 (17:34) 아덴에서의 설득을 통한 바울의 설교는 복음의 수용자들의 상황을 철저히 이해한 결과 적절한 상황적 접촉점을 찾아 내었고 필요 없는 관계적 충돌을 거치지 않는 지혜를 보여 주었다. 이는 관계의 수로를 유지하는 가운데 이를 통해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바울의 우수한 전략적 성과였다. 그의 변증적 설교는 다시 한 번 관계라는 다리를 통해 효과적인 복음 전달의 목표를 이행한 것이다.
문화적 접촉점을 통한 관계 전도
이제 필자는 관계 전도의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문화 형식을 통한 관계 전도의 신약적 근거를 살펴봄으로 관계 전도의 마지막 성서적 근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사건 속에 복음의 접촉점으로 사용된 베드로의 문화 유형을 통한 관계 전도를 살펴보고, 이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문화 유형 선택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 (눅5:1-11)
누가복음 5장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사건의 전계 과정은 문화의 유형을 복음 전달의 접촉점으로 활용한 신약의 좋은 예가 된다. 이 사건 속에는 문화의 유형을 복음 전달 방식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노력하는 복음 전달자의 상황화 작업이 역력히 드러난다.
예수님의 베드로 접근은 복음 전달자가 수용자의 상황을 관찰함으로 그 대상을 이해하려는 수용자 중심의 관점 수용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한 그의 선교를 이행하시기 전,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그물을 씻는 베드로를 “보셨다”(5:1-2).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보시니”의 헬라어 “Eido”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인지함, 대상을 경험함으로 이해하고자 함”의 의미를 지닌다 (Zodhiates 1992: 900). 저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호수 저편에 많은 무리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에게 집중하심으로 그의 형편과 상황과 필요를 예의 주시하고 계셨음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사전적 이해는 곧 예수님의 상징적 행동과 언어를 통해 베드로의 상황 속에 통합 되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다 (5:3). 그리고 무리들을 가르치시신 후 베드로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리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4)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에게 있어 “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베드로에게 있어 배는 어부된 베드로의 경제적 수단이며, 베드로가 속한 사회 계층 구조의 상징이며, 그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이를 상징하는 배에 예수님께서 오르셨다는 것은 베드로의 문화 속으로 들어오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을 것을 말씀하셨다. 비록 이 과정에서 세계관의 충돌 현상이 있었으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문화 속에 들어가셔서 이끄신 접근은 어부된 베드로에게 충분히 이해 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를 의지적으로 수용한 베드로는 재창조된 메시지를 경험하게 되는 복음 제시의 심층적 차원을 자신의 상황 속에서 맞이하게 된 것이다 (5:5-11).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사건은 관계 전도에 있어 수용자 중심의 적절한 문화 유형 선택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준다. 첫째, 복음 전달은 절대적으로 수용자를 향한 관심과 이해와 필요 파악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는 기술적 차원을 넘어선 그리스도의 민망히 여기는 마음으로써의 준비라는 것이다 (마9:39). 둘째, 한 문화 안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하부구조들 속에서 발견되는 수용자들의 생활양식을 분별하는 일은 상관성 있는 복음 전달을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 셋째, 관계 전도는 항상 특정한 문화적 유형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말씀과 상황의 지속적인 대화 가운데 효과적인 접촉점으로써의 수용자 문화 유형을 연구,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접촉점을 통해 복음을 전달하는 과제는 수용자의 문화가 사용하는 유형, 즉 삶의 본질과 기본적 욕구를 반영하는 유형의 선택과 활용에 있음을 보게 된다.
소금과 빛으로의 부르심 (마5:13-16)
전도의 광의적 의미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일 것이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가능한 많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그러므로 전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문화권 속에서 성취되어야 할 명령으로 이해된다. 그런점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 중 마태복음 5장 13-16절의 “소금”과 “빛”으로써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끼쳐야할 영향력에 대한 가장 명확하며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소금과 빛은 문화를 초월한 보편적 물질 문화 유형이다. 구약에서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며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 (출3:35; 레2:13),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상징하기도 했다 (민18:19). 신약에서는 제자들의 희생적 헌신의 의미를 소금의 은유를 통해 비유되었다 (막9:49). 빛 역시 보편적으로 사용된 종교적 상징이다. 구약에서는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신약에서의 빛은 선지자들의 예언 성취로써의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요1:9; 엡5:8,9; 빌2:15).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일상적 유형으로써의 소금과 빛을 그리스도인의 영향력 설명과 연결시키신 이유를 대위임령(마28:19-20)과 관련된 마태의 선교 신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28장의 대위임령을 마태복음 5장 13-16절과 연계하여 생각해 볼 때 선교의 주된 역할은 세상의 정복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로써의 삶과 실천을 통한 증거, 즉 대위임령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드리는 자들에 의해 드러나는 삶으로써의 복음 전달을 의미하게 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Nissen 2005: 45).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복음을 선포한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고 실천하며 산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예수님께서 소금과 빛의 문화적 유형을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써의 역할과 연결시키신 이유이다. 소금과 빛이 그 효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영향력을 주어여 할 컨텍스트, 즉 그 대상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소금과 빛이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근접적 접근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Hibles 1997: 62). 그리고 효능의 발효를 위한 근접은 바로 인간의 유대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유대 관계라는 다리 없이 그리스도인이 그 효능을 발할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소금과 빛으로의 부르심은 관계적인 복음 전도자로의 부르심을 의미하며 이는 관계 전도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이며 동시에 선교의 모본임을 역설해 준다.
성경적 관계 전도 원리
지금까지 필자는 구약과 신약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 전도를 관찰함으로 관계 전도의 성서적 기초를 확인하였다. 관찰된 바와 같이 여러 형태의 관계 전도 유형 속에는 각각의 유형이 전달하고자 하는 성경적 관계 전도 이론이 함축되어 있다. 성경 속의 전도 모델들이 제시하는 이와 같은 전도 이론의 발견은 균형있고 효과적인 전도 전략을 위한 기준점이 될 수 있으며 포스트모더니티에 적합한 관계 전도의 실천을 위한 방향타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경적 관계 전도 이론의 확립 없이 사역에만 몰입하는 활동주의적 자세는 복음 전달의 내용과 방법에 있어 비효과성으로 초래되는 결과만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성급함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관계 전도의 성경적 관점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하며 본 장에서 관찰된 구약과 신약의 전도 모델들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성경적 관계 전도 원리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내러티브 관계 전도 원리
성경을 통해 확인되는 복음의 전달은 내러티브적 구조, 즉 이야기의 형식을 따라 이루어졌음이 관찰된다. 예수님의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대화라는 의사소통의 방식을 통해 복음이 이야기 형식으로 전달되었던 예를 보여준다. 이야기 형식으로서의 복음 전달은 복음 전달자와 수용자 간의 상호 관계 속에 발생되는 이야기의 출처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담론이며 그 속에서 야기되는 세계관의 갈등 해결 과정을 거쳐 결말되어지는 회심 사건을 목표로 한다. 때문에 협의적 의미에서의 내러티브는 회심을 위해 복음을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한 복음 전달의 핵심적 요소가 된다 (Van Engen 2004: 62). 그런 점에서 구약의 관계 전도 모델로 관찰되었던 아브라함, 요셉, 모세, 요나 등의 사건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 속에 암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전달과 회심의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형식을 갖춘 내러티브적 관계 전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효과적인 내러티브 관계 전도의 적용을 위해 성경 속의 관계 전도 모델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첫째, 수용자들의 상황에서 특별한 관심을 끌게 하는 성경 속의 이야기들을 선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선택된 이야기의 플롯 속에 발견되는 갈등, 긴장, 모순, 반전 등에 주의를 기울이며 수용자가 이들의 요소를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상징과 이미지를 동반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셋째, 이야기에 참여하는 수용자의 반응을 의도적으로 이끌기 위해, 또한 이야기와 수용자 자신의 삶을 동일시 하기 위해 이야기 속에 가정과 암시, 또는 감추어진 의미 등을 활용함으로 수용자가 자발적인 상상과 이해력을 동원하도록 유도해 주어야 한다. 넷째, 선택된 이야기의 전달 과정을 통해 이야기가 의도하고 있는 원래의 목적, 즉 하나님의 성품과 구원의 목적이 상실되지 않고 전달될 수 있도록 깊은 차원의 의미 전달에 집중해야 한다. 다섯째, 수용자에게 전달되는 성경 사건 이야기의 결과가 언어적 담화에 그치는 것이 아닌 말과 상황, 그리고 행동의 통합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이야기를 통한 내러티브 관계 전도는 필자가 정리한 몇가지 이론 그 이상의 더 많은 원리들을 담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되는 이론의 핵심은 성서의 내러티브를 통한 관계 전도는 이야기의 전달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적 역사에 근거를 둔 내러티브의 전달은 과거 수천년 전에 역사하였던 하나님의 활동이 현대의 수용자의 상황과 이야기 가운데 재현되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일어나게 하는 사건으로서 “성서로부터 오늘 우리 시대로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된다 (Van Engen 2004: 57). 그러므로 내러티브 관계 전도는 탈정전화의 성향 속에 해석자 중심의 상대주의를 추구하는 포스트모던니즘 사회를 향해 절대적 진리의 이야기를 현재의 개인적 사건으로 받아드리게 하는 깊이 고려되어야 할 선교 전략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문화 변증적 관계 전도 원리
복음의 내용이 변질되지 않는 가운데 문화 속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받아드려질 수 있는 방법으로 전달되어야 하는 문제는 본 연구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는 쟁점이다. 관계 전도에 있어 이와 같은 문화적 이슈들을 다루어야만 하는 이유들은 앞서 설명되었거니와 지속적으로 관찰되어야할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관계 전도의 성경적 관점 연구를 통해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문화의 옷을 입고 전달되는 복음의 번역성과 문화 속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으로 대표된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복음 전달(요4:1-26; 행17:16-34)은 문화적 관계 가운데 문화를 중심으로 그들이 갖고 있는 전제들을 대화의 접촉점으로 삼아 복음을 논증하고, 설명하며, 설득하는 변증적 관계 전도를 강조하고 있음이 관찰된다.
성경이 보여준 문화 변증적 관계 전도의 우선적 과제는 기독교의 신앙을 변호하는 것이다. 아덴에서 설교하기 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였다(행17:2-3). 아덴에서는 아덴 사람들과 하나님에 대해 “변론”하였다 (행17:17). 두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강론”과 “변론”의 헬라어 “dialegomai”는 “to say thoroughly”, “dispute, reason (with)”의 뜻을 지닌다 (Zodhiates 1992: 895). 박아론은 기독교 변증에 대해 “하나님의 존재를 변호 증명함으로써 왜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 가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다”라고 정의 한다 (박아론 1977: 17). 관계 전도가 지니는 복음 전달의 장점 중 하나는 복음 전달자가 수용자를 향해 복음의 변증적 설명과 필요한 논쟁을 통해 기독교의 신앙과 복음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을 통해 성경과 개인의 간증을 증거로 복음의 합리성을 설명하며 복음에 대한 공격을 잘못된 세계관을 바로 잡아줌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된다.
복음의 변호적인 차원과 함께 문화 변증적 관계 전도는 복음의 공격적 차원도 고려 될 수 있다. 쉐퍼 (Francis A. Schaeffer)는 변증학의 공격적 차원의 목적은 복음의 분명한 전달이라고 말하며 공격적 복음 변증은 사람들의 전 영역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주권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인경 2003: 122-123). 좀 더 이해하자면 변증의 공격적 차원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을 다시금 주님께로 인도하려는 전도의 적극적인 면의 강조인 것이다. 그런점에서 기독교의 진리는 문화적으로 적절하면서도 문화적 상황을 초월하는 분명한 복음의 명료한 승리적 선포라고 할 수 있다.
총체적 관계 전도 원리
본 장에서 시도된 관계 전도의 성경적 관점 연구가 관찰시켜준 또 하나의 중요한 선교 이론은 총체적 전도에 대한 이론이다. 앞서 거론되었던 바와 같이 선교 개념의 정의에 있어 교회의 전도와 사회 책임의 문제는 현대 교회 역사 가운데 신중히 거론되어온 문제이다. 로잔 대회를 중심으로 몇몇 선교학자들에 의해 전도의 총체적 관점에 대한 주장들이 선교 개념의 수정을 시도해 왔고, 이에 더해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상황은 복음이 총체적인 방법으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분위로 변화해 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선교는 복음 전파가 전도와 사회 책임의 긴밀한 이해와 협력, 그리고 공존 가운데 동반자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함께 매진해 나가야 한다.
총체적 복음 전달에 있어 관계 전도의 성경적 연구는 어떤 이론들을 제시하는가? 첫째, 우리는 복음의 총체적 전달의 상례적 모델로 인식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이전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선교적 활동을 총체적 관계 전도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대위임령 (요20:21)은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가 보냄의 선교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교를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성취해 가셨다. 또한 하나님의 선교사로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 가운데 보내신 것과 같이 교회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이어가셨다. 이와 같은 보냄을 통한 선교는 사실상 구약적 개념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선교 원리이다. 앞서 관찰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열방의 선교사로 보내셨다. 그들이 보냄을 받은 목적은 제사장적 봉사의 일을 위해서 였으며 봉사의 일은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삶에 바탕을 둔 총체적인 봉사였다. 그 예가 바로 요셉의 내러티브이다. 요셉은 바로와 애굽을 위해 봉사하였고 기근에 처한 야곱의 일가의 형편을 구제해 주었다. 이는 이스라엘을 통한 구원의 확산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보여주는 하나님의 총체적 선교이다. 따라서 보냄의 선교가 품고 있는 봉사의 목적은 말과 행동을 통한 전인적이며 총제적 선교라 할 것이다.
둘째, 복음의 총체적 전달의 중요성은 소금과 빛으로의 부르심을 통해 더욱 구체화 된다는 점이다 (마5:13-16). 구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행동으로 동력화된 말씀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았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부르심은 교회의 이중적인 봉사의 사명을 뜻한다 (Stott 1981: 39). 하이블의 지적과 같이 소금과 빛은 그 대상에 근접해 있을 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책임감의 완수는 교회가 사회적 관계망 가운데 침투되어 있을 때에만 그 사명이 성취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와의 관계 구조의 활용을 통해 그들의 전체적인 행복, 즉 영혼과 육체와 사회적인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는 총체적인 복음 사역을 펼져야 하는 것이다 (Stott 1981: 38).
셋째, 복음 전달자가 수용자의 영적, 육적, 사회적 필요를 채워줌으로서 복음을 전달한다는 총체적 관계 전도의 개념은 자문화우월주의로 해석되지 않도록 분명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총체적 관계 전도는 서구식의 테크놀러지로 무장된 교회의 “out reach”가 아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총체적 관계 전도는 연약한 자를 통한 선교, 필요 가운데 그들과 함께 하는 만남을 통한 선교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 문화 관계 구조 가운데 유지해 가야하는 그들과의 관계는 사람들의 상황과 필요에 동반자로 동참하고자 하는 낮은자의 섬김적 자세를 겸비한 관계여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선교 전략의 효율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내포하는 사회 문화적 요구와 필요들에 얼마만큼 적절하게 대응하느냐와 직결되어 있다. 이에 대해 성경은 교회가 전도와 사회 활동을 이분화시키지 않는 가운데 세상과 기독교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는 단순한 관계 형성의 차원이 아닌 봉사를 통한 영혼과 사회의 변혁이라는 총체적인 구원의 보다 깊은 의미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문화 속의 관계 전도 이론
예수님과 사도들이 선택했던 전도의 방법은 문화적인 상황을 깊게 고려한 문화 속의 복음 전달 방식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결과들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과 사도들이 선택했던 방법은 어떻게 이 시대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복음 전달 과정의 공통적 원리들을 발견하도록 인도해 준다. 신약에서 복음은 다양한 방법을 따라 전달되었지만 그것을 연결해 주는 공통된 원리가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첫째, 수용자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질문하심으로 그녀의 생각을 알기 원하셨다.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도 여인의 세계관이 어떠함을 관찰하고자 하셨다. 바울은 아덴의 사람들의 우상숭배적 종교관을 재단의 글귀를 통해 짐작하고자 했으며 그들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빠뜨림 없이 기억하였다. 복음 전달자로서의 이와 같은 이해의 노력은 결국 수용자들에 대한 존중의 마음으로 표현되었고, 이를 통해 적절한 접근적 상황이 가능케 되었다. 사회로부터 거절당하고 문화적으로 부적절 한 자들, 그리고 세상적 종교관과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부류의 사람들을 존중해 주는 자세는 복음 전달을 시도하려는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둘째, 적절한 언어를 준비해야 한다. 언어는 문화의 반증이다. 언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의 대표적 표현이며 사람들의 가치관적 근거를 발견하게 해 주는 요소이다. 따라서 그들의 의도가 표현되는 언어적 의미 전달에 의해 그들의 문화적 가치관 성향이 관찰 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복음의 전달은 문화적 이해를 동반한 적절한 문화적 언어를 활용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설명하시기 위해 은유를 사용하셨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여인의 문화에 적절한 ‘우물 물’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셨다. 베드로에게는 ‘어부와 고기잡이’라는 문화적 양식과 유형을 사용하셨다. 은유와 비유와 문화적 유형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메시지를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본질적 도구였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전달하기 위해 현대적 이슈들을 선택하는 것은 복음 전달에 있어 중요하다 (Shaw & Van Engen 2007). 따라서 복음 전달자가 수용자의 문화적 언어를 도구로 적극 활용하는 것은 상관성 있는 복음 전달을 위해 필요하다.
셋째,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전해야 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자 했을 때 이성에 호소하는 논리적 전달을 사용하였다. 아덴에서의 설교를 비롯하여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설교들은 매우 문화 변증적이었으며 복음 설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변증과 설득은 그 대상과 상황에 따라 시기 적절하게 변형되었던 유동적이며 창의로운 것이었다.
넷째, 의지적 도전을 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복음 전달은 수용자들의 세계관적 변화를 위한 의지적 결단에 도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의 부르심과 니고데모의 이야기 속에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달하신 메시지는 그들의 의지적 영역에서의 결단을 유도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의지적 결단을 이끌어내는 과정 속에는 그들의 죄인됨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과 또한 죄인됨을 해결할 수 있는 죄사함의 방법이 내포되었다. 그러므로 복음 전달자는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자들을 향해 근본적이며 세계관적인 도전을 줌으로 구원을 위한 그들의 의지적 결단에 도전해야 한다.
다섯째, 회개에 이르도록 인도해야 한다. 문화 변증적 관계 전도는 진리에 대한 방어와 공격을 통해 결국 죄인의 회개라는 구원의 절대적 조건을 만족시키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의지적 결단을 위한 과정 속에서 펼쳐지는 죄인됨에 대한 깨달음과 죄인됨의 해결책으로써의 회개는 바빙크가 주장한 “엘렌틱스” (elentics) 로 설명될 수 있다. 엘렌틱스란 죄의 확신과 회개에 대한 촉구를 통해 성령께서 세상의 죄를 깨닫하시는 회개의 사역이다 (Bavinck 1980: 253). 죄에 대한 깨달음 없이 의지적 결단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의지적 결단으로써의 회개가 없다면 구원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변증적 과정을 통해 수용자가 성령의 역사하심 아래 회개에 이르도록 해야 함을 잊어서는 않될 것이다.
복음 전도 준비 원리
복음 전달자가 복음을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본 장에서 시도된 관계 전도의 성격적 기반 연구로부터 다음의 세 가지 관점을 간략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복음 전달자는 하나님의 선교 원리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부르시며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닫게 됨에 따라 하나님의 언약으로써의 선교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 요나는 편협한 국수주의적 선민의식의 한계를 극복하게 되었을 때 니느웨라도 불쌍히 여기시는 선교의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요셉은 그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통해 역사하심을 배웠다. 이처럼 복음 전달자는 성경 역사를 통해 전개 되었던 성경 속의 여러 소주제들은 통합적 결속력을 지닌 분열되지 않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이어져 왔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오늘날의 복음 전달자로서의 교회를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종말론적 구속 공동체로 부르사 하나님의 선교를 이행케 하시는 사명도 이해해야 한다.
둘째, 복음 전달자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이 요구된다. 출애굽을 위한 변화의 대변자가 되어 바로 앞에 섰던 모세의 모습은 오늘날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는 자들의 자세와 인내, 그리고 순종을 가르쳐 준다. 또한 예수님의 전도 모습을 통해 전도와 선교의 출발점은 복음 전달자 자신이며, 이에 더해 복음 전달자가 인격과 영성과 문화적 준비를 갖추게 될 때 그는 진정한 복음 전달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깨닫게 해 준다. 따라서 교회 속의 교회로 칭해지는 남은 자의 교훈을 기억하고 복음 전달자는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 살아가나 이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문화를 변혁하려는 의도를 지닌 성육신적이며 성경적인 정체성을 확립해 가야 한다.
셋째,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의 확립이 필요하다. 복음 전달자는 성경 속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믿음과 순종의 자세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을 소유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창조, 타락, 구속에 대한 분면한 이해의 틀 속에 세상을 바라보았던 성경적 세계관의 소유자 였다. 그리고 그것에 입각하여 문화와 상황 속에 복음을 전하였다. 포스트모던니즘 사회 속의 복음 전달은 세계관의 대립이며 세계관의 전쟁이다. 복음 전달자가 성경적인 세계관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은 다원주의적 세계관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복음 전달의 사명을 지닌 전도자로서 말과 생각과 행동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 내려야 한다.
요약
본 장에서 필자는 구약과 신약의 성서적 상황에서 발생한 관계 전도를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에서 살펴봄으로 관계 전도의 성경적 기초를 연구해 보았다. 또한 관계 전도의 성서적 모델들로부터 오늘날의 관계 전도 상황에 적용되어야 할 관계 전도 원리들도 생각해 보았다.
구약에서 발견되는 관계 전도는 열방의 구원이라는 보편적 역사가 이스라엘을 통한 선교라는 특수한 상황 가운데 진행 되었음이 확인 되었다. 구약의 관계 전도는 혈연적 관계와 사회 유대망적 관계를 활용함으로 이방 구원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구원을 위한 구약의 관계들은 선포적 메시지와 공동체적 사명 전달의 수로로 쓰임 받기도 했다.
신약에서 발견되어지는 관계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이를 계승한 사도들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 되었음이 확인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론적 대화 관계를 통해 수신자들의 세계관적 변화와 회개에 집중하셨고, 사도들은 수용자의 문화와 상황에 따라 적절한 복음의 번역을 시도함으로 관계 전도의 중요성을 실천하였다.
성경에서 관찰된 관계 전도 모델들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사회 속의 복음 전달이 숙고해야 할 몇가지 관계 전도 이론 정립을 위해서도 도움을 주었다. 서술적이며 이야기적인 내러티브, 복음의 문화 변증적 전달, 전도와 사회 책임을 통합하는 총제적 전도법, 관계 속의 복음 전달 과정과 복음 전달자의 준비 등은 관계 전도의 성경적 모델들로부터 얻게되는 관계 전도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은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관계라는 수로를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신앙의 확장도 관계적이어야 한다. 성경은 복음이 관계적인 방법으로 전달될 때 가장 효과적이며 따라서 살아있는 관계의 상호 작용을 필요로 함을 증거 한다. 그러므로 다문화적이고 복수종교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한 선교 전략은 성경 속에서의 전도와 같이 관계적인 복음의 전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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