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헛소리를 한 날부터 복기해 보자.
검찰은 18일 "신군부 세력의 새로운 정권창출과 직접 연관된 5.18사건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사법적 판단대상이 될수 없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관련자 전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검찰의 이같은 결정은 지난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시작으로 본격 전개된 일련의 사건전개 과정이 당시 구헌정질서의 붕괴로 인한 극심한 소요발생등 국가적 위기상황을 수습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이기 때문에 사법기관이 그 적법성 여부를 따질 사법적 심사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에 기초해 내린 것이다.
즉 5.18사건은 10.26사태로 인한 구헌정질서의 붕괴이후 새로운 정치질서가 태동하는 과정으로서 계엄법등 당시 법률적인 토대를 기초로 행해진 합법적이고 정치행정적인 조치의 일환으로 전개됐다는게 검찰의 수사결론이다.
검찰은 이러한 판단의 논거로서 독일등 외국 헌법학자와 국내 일부 형법학자들을 중심으로 논의,연구해온 법이론중 `통치행위론'과 `성공한 쿠데타론'등을 들고 있다.(5.18사건, `공소권 없음' 결정배경과 파장, 연합뉴스, 1995.07.18.)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의 뜻에 따른 것이다. 김영삼은 처음부터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벌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93년 5.3 특별담화에 그대로 드러난다.
93년 2월 金泳三 대통령의 취임으로 일시 이 지역 주민들은 5.18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일부 학생과 주민들이 3당합당 등의 이유로 金대통령의 5.18묘역 참배를 반대하고 金대통령의 5.18관련단체의 면담거부 등으로 이때도 역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결국 金대통령은 93년 5월13일, '진상규명은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며 5.18기념공원 조성등의 재정지원 1천억원을 약속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해 5월관련단체들로 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5.18斷案...光州.全南민 투쟁의 승리, 연합뉴스, 1995.11.2)
"진상규명은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말은 "진상규명 하지 말자" 혹은 "아무도 처벌하지 말자"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이런 김영삼이 95년 11월 24일에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金泳三대통령이 24일 5.18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도록 민자당에 지시함에 따라 특별법이 제정되고 특별법에 따라 이들 학살 책임자들에 대해 어떤 처벌이 이뤄질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5.18 피해 당사자를 비롯한 광주 시민들은 金대통령이 5.18 특별법 제정의 단안을 내린데 대해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 특별검사제 도입등 특별법이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제정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金泳三대통령은 지난 93년 5.18 특별담화를 통해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 운동의 연장 선상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말하면서도 "진상 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밝혔으나 이제 5.18 해결 방향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5.18斷案...光州비극 15년만에 매듭 전망, 연합뉴스, 1995.11.24.)
그렇다면 김영삼은 왜 생각을 바꿔 특별법 제정을 지시한 것일까. 바로 전날인 95년 11월 23일 헌재의 6차 평의에서 ‘검찰의 불기소처분이 타당하지 않다’라는 판단을 내부적으로 내렸음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검찰이 기소를 포기하자 5.18 사건 고발인 28명이 헌법소원을 냈던 것이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金汶熙 재판관)는 23일 5.18 사건의 불기소 처분 헌법소원 사건에 대한 제6차 평의를 열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오는 27일 7차 평의를 갖기로 했다. (憲裁, 5.18사건 7차평의 27일 개최, 연합뉴스, 1995.11.23)
다음달 21일께 5.18 헌법소원사건에 대해 최종 결정할 예정이었던 헌재는 정치권의 선수로 헌재의 입장이 다소 무색해졌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민자당이 중심이 돼 특별법이 제정될 경우, 헌재의 결정 자체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일각에서는 헌재가 다음달 결정에서 `이 사건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며 재수사 명령을 내릴 것을 감지한 청와대측이 이같은 대안을 내 놓은 것이 아니겠느냐 며 대통령의 결단을 유도해 낸 것 만으로도 헌재는 제 몫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다.
기실 이같은 상황논리의 근거는 지난 23일 가졌던 7차 재판관 평의에서 각 재판관들의 의견이 제출돼 어느정도 의견취합이 이뤄졌던 과정으로 설명된다.
즉, 이날 가진 평의에서 재판관들 가운데 5-7명이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는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재판소 관계자는 " 이날 의견이 취합된 것 만을 놓고 볼 때 헌재는 창설이래 가장 의미있는 결정을 내릴 기회를 맞은 것 같았다"면서 " 대통령의 이번 지시가 아쉽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서 알수 있다.
이는 헌재 재판관들이 당시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는 위헌 의견으로 상당수 개진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憲裁 내달 5.18소원 결정 전망, 연합뉴스, 1995.11.25.)
그래서 바로 다음날 자기가 먼저 특볍법 제정을 발표해 선수를 친 것이다. 자기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기소가 진행되면 정국 주도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김영삼의 잔머리와 졸렬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자 검찰은 나중에 이렇게 변명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 지난달 30일 서울지검에 12.12 및 5.18 특별수사분부가 전격적으로 구성된 직후 한 검사가 자조적으로 내뱉은 말이다. 다른 검찰 관계자는 "사실 이번 수사를 맡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겠느냐"고도 했다. 이미 12.12와 5.18에 대해 기소유예와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낸 검찰이 대통령의 지시 한마디로 스스로 과거의 결정이 잘못댔음을 드러내는 수사에 나서게 된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들이다. (검찰의 '과거청산' 떳떳한가. 한겨레, 1995.12.18)
이처럼 5.18 특별법이 제정되자 5.18 고소 고발인들이 헌법소원을 취하함으로써 헌법재판소의 최종결정은 무산됐다. 하지만 언론보도를 통해 헌재의 판단을 알 수는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헌재의 입장은 " 성공한 쿠데타, 즉 내란 기수범에 대해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 결정은 잘못"이란 것으로 요약된다.
헌재의 이같은 입장은 검찰이 불기소 처분의 근거로 내세운 이론이 형식논리만을 앞세운 자의적인 법 해석이라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즉,`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독일형법의 이론은 `성공한 내란의 경우,내란의 주모자들이 집권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의미이지 `성공한 내란은 어떤 경우에든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헌재의 한 연구관은 " 1920년대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에서 나온 형법이론을 그대로 응용한 것은 검찰의 무책임한 처분이었다"면서 " 국민의 기본권을 중시하는 현대국가에서 어느 나라도 이같은 법이론을 응용하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憲裁, 5.18소원 결정 내용과 전망, 연합뉴스, 1995.11.27.)
정리하자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헛소리를 한 주체는 당시의 공안검사 장윤석(지금 새누리당 의원이다)인데, 대한민국 사법부는 이런 헛소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불기소 취소 결정'을 내렸고(5.18 특별법이 제정되자 헌법소원을 취하함으로써 헌법재판소의 최종결정은 무산됐지만), 전두환과 노태우는 결국 기소되어, 1심에서 각각 사형과 22년 6개월 형을, 2심에서 무기징역과 17년 형을 선고받았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특별사면되면서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사면시켰을까. 당시의 대통령은 김영삼이었지만 사면은 당선인 신분이었던 김대중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인 12월20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자는 청와대에서 회동한 뒤, 두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특별사면과 복권을 발표했다.
사면의 명분은 국민 화합과 지역갈등 해소 등이었다. 김대중은 그동안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사면·복권에 대한 찬성 의사를 밝혀왔다. 정부는 12·12, 5·18 관련자도 특별사면하기로 했다. 정치적 타협에 의한 결정이었고,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이었다.
12월22일, 2년 남짓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전두환·노태우는 석방되었다. (전두환 사면되던 날 ‘피범벅된 머리’, 한겨레, 2012.04.17)
이런 시각은 해외언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全斗煥. 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조치는 과거 군사독재자들에 의한 암살시도와 감옥생활, 망명 등으로 점철된 金大中 당선자의 지난 40년간 정치역정을 용서로서 마무리짓는 것을 의미한다고 美ABC방송이 20일 (美동부시간) 보도했다.
이 방송은 서울발 AP통신기사를 인용, 全.盧 前 대통령에 대한 사면이 청와대 회동에서 金大中 대통령 당선자가 요청하고 金泳三 대통령이 동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전제, 이같이 보도했다. (金大中 정치역정 "全.盧 용서"로 마무리, 연합뉴스, 1997.12.21.)
앞서 언급한대로 김영삼에게 전두환과 노태우를 처벌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김영삼은 IMF로 인해 자기당 후보인 이회창에 의해 인형화형식까지 당할 정도로 '식물대통령'을 넘어 '시체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이런 대통령이 헌정 역사상 처음으로 정권교체가 된 상황에서, 그것도 전두환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김대중이 이미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에서,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김대중의 의사에 반해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시킬 수 있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후보 시절부터 사면 의사를 천명했고 당선되자 즉시 김영삼에게 사면을 요청했다. 이처럼 김대중이 원했고 김대중이 요청했기 때문에 비로소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시킬 수 있었다. 즉, 주도권과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던 건 바로 김대중이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김대중은 왜 자기가 집권한 후에 사면하지 않고 김영삼에게 사면을 요청했을까? 이는 사면에 대한 책임을 김영삼과 나누기 위해서다. 이처럼 김대중이 아니라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했다는 말은 졸렬한 책임 전가이자 사실 호도이다.
제 아무리 '국민 통합'이라는 명분이 좋다고 하더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전두환과 노태우로부터 고통을 받은 사람들 중 한 명에 불과한 김대중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전두환과 노태우의 죄를 사해준다는 말인가. 이는 당시 여권 지지자들의 표를 얻기위해 5.18피해자들의 한과 권리를 팔아먹은 것이다. 나 역시 민주화 투사이자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어려운 시기를 잘 돌파해낸 김대중을 높게 평가하지만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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