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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작소설비평회♣ 원문보기 글쓴이: cafe
엄마들
김이설 “간염, 풍진, 매독, 에이즈, 암 검사, 모두 이상 없습니다.” 간호사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진단서를 내밀었다. 여자는 자신이 예약해 놓은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병원에서 학교까지는 한 시간 거리였다. 재학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떼야 했다. “꼭 이래야 되겠니?” 휴학계를 내던 날이었다. 그는 옳지 않다고 했다. “그럼 장기라도 팔까?” 나는 그의 침묵을 응시하다, 이내 등을 보였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연애의 종결은 명료했다. 교정은 앙상한 나무들뿐이었지만 분명 물기를 머금은 싹이 숨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연둣빛은 보이지 않았다.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 조금 더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두 번째 휴학 중이었고, 성적은 3학년 1학기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교문 주변의 무리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들의 얇은 스커트가 추워 보였다. 어쩐지 봄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계절 같았다. 크고 깊은 동공을 가진 여자였다. 감색 정장이 깡마른 몸을 더 부각시키고 있어서, 마치 옷을 겨우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풍성한 웨이브 머리칼은 어딘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여자는 내게 키위 주스를 마시라고 했다. 진단서, 재학증명서, 성적증명서를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꼼꼼히 읽어 내렸다. 여자 앞의 커피는 진한 향을 냈다. 나는 시큼한 주스보다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쓴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여자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동의하죠?” “네.” 주스를 한 모금 마신 후 서명을 했다. 키위 씨가 입 안에 남아 불쾌했다. “병원은 내일로 예약해 뒀어요. 시간 지켜주고요.” 여자가 먼저 일어섰다. 커피는 그때까지도 희미하게 김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여자가 남긴 커피를 마시며 담배 두 개비를 피우고 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시술이었지만 몸은 금세 묵직해졌다. 여자가 부축했지만 나는 뿌리쳤다. 여자가 다시 강압적으로 내 팔을 잡았다. 나는 더 이상 만류하지 못했다. 여자가 차 문을 열었다. “데려다 줄게.” 여자는 어느새 말을 놓고 있었다. 내가 여자의 고용인이 되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리는 셈이었다. 여자의 세단은 좁고 어둔 골목에 어울리지 않았다. 어디선가 갓난아이가 사납게 울고 있었다. 여자의 미간이 잠깐 좁혀졌다. 내가 가리킨 철문 안으로 여자가 성큼 들어섰다. 계단 아래로 다닥다닥 붙은 알루미늄 문들이 나타났고 여자는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여자가 이불을 폈다. “누워.” 눕고 싶지 않았지만 여자의 말을 어길 수가 없었다. 여자는 키위 한 봉지와 두 권의 육아서를 이불 발치에 내려놓더니 거침없이 싱크대를 뒤져 과도를 찾아왔다. 그리고 누운 내 앞에서 키위 껍질을 벗겼다. 먹는 걸 보고서야 가겠다는 심사였다. 과도를 잡은 여자의 손놀림이 생전 처음처럼 서툴렀다. “햇빛이 너무 안 들어오네.” 그러나 그 말은 틀렸다. 한 조각 빛조차 허락하지 않는 지하방이었으니까. 여자가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구석에는 풀지도 않은 가방 두 개가 오롯이 세워져 있었다. “착상이 되면 집을 옮기자. 그때까지는 여기서 그냥 지내. 내가 수시로 올게.” 키위 두 개를 다 먹는 걸 보고서야 여자는 갔다. 이제 여자는 매일 전화를 걸거나 정말 매일 찾아와 내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그 계약서가 법적 효용이 있든 없든, 나는 적어도 여자에게 돈을 받기 위해서라면 계약대로 이행해야 한다. 나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착상이 되면 얼마간의 돈을 먼저 받을 수 있다. 여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큰돈이었다. 들큼한 키위 냄새가 섞인 곰팡내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착상은 성공되었다. 나는 원룸으로 옮겨졌다. 건물 앞에는 편의점과 식당가가 있었고 시장도 가까웠다. 마치 외떨어진 휴양지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본격적으로 여자의 사정거리로 들어선 참이었다. 어쩌면 이번엔 운이 좋은 지도 모른다. 첫 번째 의뢰인에 비한다면 여자는 분명 좋은 고용주였다. 첫 의뢰인은 아들이 아니라고 낙태를 요구했다.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나는 부당하다고 항변했지만, 결국 연락이 두절되었다. 나는 의뢰인을 수소문하느라 다섯 달이나 채운 뒤에 낙태를 했다. 계약서 따위는 처음부터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낙태를 한 지 석 달도 되기 전에 다시 글을 올려야 했다. 26세, L대 법대생. 165cm, 54kg. 술, 담배 안 함. 유전적 질병, 정신적 결함 없음. 남자 친구 없음. 브로커 없는 직접 거래 요망. 일 년만 숨어 살면 목돈을 쥐는 일이었다. 합법적이지 않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빚을 지지 않고, 도망칠 수 없는 나락에 빠지는 위험 없이 오천만 원을 벌 수 있는 일이란 대리모 외에는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열 번도 더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답신을 준 의뢰인들의 메일을 읽으면서 나는 생활비, 착상 성공비, 계약 금액을 나눠서 지불할 수 있는가를 따졌다. 결과적으로 내가 고용되는 일이지만 계약서를 쓰기 전까지는 나도 선택권이 있었다. 첫 번째 실수를 만회해야 했으므로 나는 조금 더 철저해야 했다. 남편과 내가 동문이어서 마음에 든다고 여자는 첫 문장을 시작했다. 두어 번의 메일 교류 후 여자와의 계약을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사항에 쉽게 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자가 제시한 내용에 대해서도 나는 별 불만이 없었다. 적어도 나는 나의 요구 사항이 관철되는 것으로 모든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자는 매일 전화를 걸어 내 상태를 확인했고, 일주일마다 병원에 데리고 갔다. 5주가 되어서야 질 초음파가 아닌 배 초음파로 아기집 흔적이 잡혔다. 티끌 하나가 검은 우물 속에 박혀 있었다. 그날 여자는 나를 원룸 건물 앞에 내려 주었다. 원룸은 이미 세간들이 꾸려져 있었다. 집세는 물론, 공과금과 여자에게 새로 건네받은 휴대전화 요금까지 일체 여자가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매달 받는 생활비는 식비 외에 쓸 곳이 없었다. “물건은 내가 챙겨다 줄게.” 지하방에서 가져올 물건이어야 책과 옷가지가 들어 있는 두 개의 가방 외에는 없을 것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40주 동안 나는 당신의 몸이 아닙니까. 여자는 모차르트를 틀어놓고 갔다. 나는 창문에 비켜서서 여자를 훔쳐보았다. 주차장으로 들어서기 전, 여자가 잠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2층 아래, 여자의 도드라진 눈가의 주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무엇이든지 너무 자세히 보이게끔 하는 6월의 햇빛이 골목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엄마는 벽면 타일을 닦고 있었다. 부연 유리문 저편의 엄마를 지켜보다가, 옷을 벗고 탕으로 들어갔다. 특유의 푹한 기운은 없고, 오히려 서늘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사람 없는 초여름의 목욕탕은 을씨년스러웠다. 훈기가 없으니 금세 소름이 돋았다. 뜨거운 물로 몸을 덥히니 간신히 허연 물때가 솟았다. 엄마는 네 개의 욕조에 새로 물을 받기 시작한 후에야 내게 왔다. 등을 미는 엄마의 손목 힘이 예전 같지 않았다. 욕탕을 나오니 새벽 2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찜질방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개 수면실에서 자고 있었고, 젊은 애들 두엇이 구석에 엉켜 있었다. 엄마와 나는 미역국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어느새 겨드랑이와 옆구리가 쓰렸다. 슬쩍 소매를 걷어보니 벌겋게 피가 맺혀 있었다. “생일 상 받아먹으려고?” 엄마는 나와 동생을 한 계절에 낳았다. 게다가 엄마의 생일도 일주일 뒤였다. 모녀가 찜질방에 마주 앉아 미역국을 먹는 일이 새삼스럽게도, 쓸쓸했다. 저녁을 걸렀는지 엄마는 미역국을 마시듯이 들이켰다. 트림을 하며 뒤로 내앉은 엄마는 곧이어 계란 껍데기를 까기 시작했지만 내 미역국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젊은 게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얼굴은 엄마가 더 형편없었다. 평생 살림만 하던 사람이 오십 줄이 넘어 시작한 목욕탕 일이 녹록할 리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 소식을 물으려다가 말았다.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라고 아버지는 절박하게 쳐다보는 식구들을 향해 말했다. 부채를 떠넘기고 도망치는 가장의 목소리치고는 너무 우렁찼다. 그것이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이었다. 엄마는 아버지와 연락을 하는 눈치였지만 엄마도 늘 같은 말을 했다.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살게 돼 있다. 가족이 와해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혈연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술한 구조였던가, 의아해 할 사이도 없었다. 증오나 분노, 체념마저도 흐물거리는 미역처럼 빠르게 삭혀졌다. 문제는 현실이었다. 엄마는 구운 계란 하나를 내 앞에 두고 남은 세 개를 연거푸 입에 넣었다. 살아 있으면 살게 되어 있다, 라니. 그게 먹히는가. 엄마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차라리 그렇게 먹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역국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비린내가 나서 반도 더 남기고 수저를 놓았다. 새 연락처와 모아 두었던 생활비, 착상 사례금 전부를 엄마 앞으로 내밀었다. 엄마는 이제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건 엄마도 똑같이 고달픈 일상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순이 다 되어가는 엄마가 젊은 것들의 때를 벗기는 일이나, 시퍼렇게 젊은 내가 수정란을 받아 키우는 것이나, 연고 없이 떠돌고 있는 아버지도 따지면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공평하다고 생각하자. 앞일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행이든 불이든, 그건 개인의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 정말 공평한 것일까.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의 손에는 꽉 쥐어진 지폐가 구겨지고 있었다. 낮게 코 고는 소리가 수면실에 울렸다. 엄마는 잠에 취해 있었다. 여자들은 자식을 낳은 달에 앓는다고 했다. 둘이나 낳았으니 엄마의 삭신은 제 것이 아닐 것이다. 얼굴을 한번 쓰다듬을까 하다, 그냥 일어섰다. 괜한 미안함이라도 들까 두려웠다. 건물 밖은 온 몸을 간질이듯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택시를 기다리면서 담배를 하나 물었다. 욕지기가 밀려왔다. 스물여섯의 생일 새벽이었다. “이러면 곤란하죠.” 여자의 존대는 화가 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어디를, 왜 다녀왔는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요.” 계약 사항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초로의 어미의 식욕에 대해서, 사라진 아버지의 마지막 인사에 대해서, 제대를 앞둔 남동생에 대해서 그러나 그가 살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그걸 말해서 동정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말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동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목욕탕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목욕탕? 세균 감염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도대체 책을 읽기나 하는 거예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자도 더 이상 나를 추궁하지 않았다. 외박이라니, 혼잣말을 하며 여자는 원룸을 나섰다. 여자가 두고 간 쇼핑백 속에는 두 벌의 실내복과 호두와 잣이 한 봉지씩, 그리고 비타민제가 들어 있었다. 나는 여자가 건넨 육아서를 읽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호두와 잣은 아이의 머리를 좋게 할 것이고, 비타민제는 엽산 때문이었다. 여자가 놓고 간 슈베르트나 모차르트를 들으며 육아서를 읽는 일 외에는 내가 할 일이란 없었다. 혹은 창 밖을 내다보거나, 끼니 때마다 전단지를 보면서 메뉴를 정하는 일. 그것만으로도 하루는 시한부 인생의 시간처럼 지나갔다. 엄마를 보고 온 날, 여자는 밤새 나를 기다렸고, 그 일을 빌미로 매일 원룸에 왔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온다고 해서 나의 일상이 달라질 건 없었다. 실내복은 화사한 분홍색 꽃무늬가 프린트 된 원피스였다. 여자가 매일 드나들기 시작한 무렵부터 입덧 증세가 나타났다. 어쩌면 담배를 피우지 못하면서 생긴 금단 현상과 겹쳐진 증상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굳이 담배를 끊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히 몸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데도 흡연 욕구는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몸이 기억하는 습성이란 때론 무섭도록 지독했지만, 그 기억을 이기는 것 또한 몸의, 자궁의 본능이었다. 입덧은 점점 심해졌다. 게다 잦은 두통과 엉치등뼈가 아픈 골반통까지 수반되었다. 자궁이 자리를 잡으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증상이라니, 나나 여자나 속수무책이었다. 난자와 정자는 내 것이 아니지만 자궁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궁에 자리 잡아가는 수정란의 존재 흔적은 고스란히 내 몫이어야 했다. 식당 음식을 못 넘기자 여자가 음식을 해 날랐다. 여자의 집에서 일하는 아줌마의 솜씨였겠지만, 그건 먹을 수 있었다. 다만 먹을 때는 아무렇지 않던 속이, 먹고 나면 울렁거리는 것은 여전했다. 차라리 시원하게 토할 수 있으면 나을 것 같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여자는 매번 나를 부축했다. 그렇지 않아도 골반통 때문에 절뚝이며 걸어야했다. 어느새 여자의 체취가 익숙해지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체중이 2kg이나 줄었던 날, 의사는 역시 흔히 있는 현상이라며 입덧이 끝나는 3, 4개월을 넘어서면 체중이 늘게 된다고 했다. 표정이 금세 밝아진 여자가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무감하게 여자를 바라보았다. 의사와 면담을 하거나 초음파 검사를 할 때조차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여자였다. 남이 본다면 마치 애틋한 친정 언니 즈음으로 여길 것이었다. 그날이었을 것이다. 여자가 엄마에 대해서 물었다. 어머님이 입덧이 심했나? 엄마는 내 누워 있었다고 했다. 간신히 넘긴 밥은 먹자마자 게워 냈고, 그러면 며칠씩 물조차 넘기지 못했다고. 세상의 모든 냄새가 다 역겨웠다고 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의 입덧은 엄마에 비해 수월한 편이었다. 엄마는 살아 계셔? 여자의 옆모습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우리 엄마는 나 하나만 낳았어. 그 시절에 아들 하나 낳지 못했으니 말 다했지. 할머니는 씨받이를 들였고 결국 그 여자가 들어앉았어. 뻔한 얘기. 딸은 어미의 운명을 닮는다더니, 나도 별 수 없고.” 운전을 하는데도 여자의 동공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우리 엄마는 재가해서 팔자 폈어. 나도 그럴라나.” 여자가 슬쩍 웃었다. 자조가 아닌, 일말의 부질없는 희망을 간신히 품고 있는 웃음이었다. 아기집이 제대로 잘 들어섰다고, 양수도, 태아 박동수도 정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보였던 여자의 해맑은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가진 어둑한 기운과 닮아 있다고 함부로 착각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우리 엄마는 입덧이 심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말해, 수정란은 당신들 것이지만 그걸 키우는 건 내 몸이라는 확인이었다. 차라리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로는 정체였고 나는 멀미가 몰려왔다. 불쾌했다. 원룸에 들어서자마 널브러진 나는 여자가 건넨 오렌지를 먹어야 했다. 여자는 어느새 창문 앞에 서 있다. 그것이 원룸에서의 여자의 일과였으므로 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다 잠이 들었고, 깨어 보면 원룸에는 나 혼자만 남아 있곤 했다. 메스꺼운 속 때문에 부대끼거나, 병든 닭처럼 잠에 취해 있던 사이,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기상 이변으로 7월이 되기도 전에 열대야가 시작되었다.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건 지중해의 오른쪽 하늘을 맞추고 있던 중이었다. 천 조각 퍼즐은 여자가 태교용으로 두고 간 것이었다. 바다와 섬들은 맞췄고 하늘만 남아 있었다. 워낙에 같은 색감이 연속인 풍경이어서 속도가 잘 붙지 않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제법 집중력을 높일 수 있었다. 엄마의 전화만 아니었다면 그날 새벽 나는 지중해 풍경을 완성했을 지도 모른다. 창문 밖은 푸른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낯선 목소리였지만 나는 금세 엄마라는 것을 알았다. 아침부터 초조하게 여자를 기다렸다. 식구들이 흩어진 후 엄마가 먼저 연락한 건 처음이었다. 지난번 외박처럼 여자를 예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여자에게 직접 말해야 했다. “엄마?” 여자가 되물었다. 나는 이미 외출복 차림이었다. 여자는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의아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잠깐 들여다보고 올게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같이 가.” 나는 만류하고 싶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나의 고용주지만 나의 사생활까지 당신이 들어설 이유는 없다. 아니다, 사생활 따위는 당신에게 이미 팔아 치웠구나. 나는 묵묵히 여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3개월을 넘어서지 않았으므로 유산의 위험이 있는 시기였다. 여자는 수정란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염 때문인지 목욕탕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구석에서 혼자 앓고 있었다. 망자처럼, 천장을 향해 똑바로 누워, 입을 쩍 벌린 채,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거세게 흔들었다. 엄마가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여자가 어느새 내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절박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과로와 오랜 감기 때문에 폐렴으로 발전했다는 엄마는, 다행히 나흘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엄마와 구내식당에서 설렁탕을 한 그릇씩 먹었다. 모녀의 설렁탕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둘 다 끝까지 국물을 다 마시고 일어났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고 서로에게 맹세라도 한 듯 결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살게 될 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자꾸 해야 할 것 같았다. 엄마가 돌아갈 곳이 목욕탕뿐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목욕탕 건물 앞에서 엄마에게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고 서둘러 뒤돌아섰다. 공기 속에 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어쩐지 신열이 내린 듯 온 몸이 가붓했다. 원룸에 들어서자 눅진한 사골국 냄새가 났다. 여자가 고생했다며 식탁 앞에 나를 앉혔다. 설렁탕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뽀얀 국물에 떠 있는 푸릇한 대파를 보자 참을 수 없는 식욕이 솟구쳤다. 여자가 신기한 듯 나를 보고 있었지만, 고생했다는 말이 목에 걸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포만감은 나른한 불안감과 비슷했다. 그래, 이렇게 먹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일 것이다. 여자가 물었다. “속은? 속은 괜찮아?” 입덧이 끝났다고 말했다. 여자가 그릇을 치우며 웅얼거렸다. “엄마가 대신 앓으셨네. 딸내미 덜 고생하라고 당신이 몸앓이를 하셨네.” 그런 걸 알려주는 여자가 나는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지중해 풍경은 완성되어 있었다. 배가 부른데도 허기졌다. 먹어도 먹어도 가시지 않을 듯한 무서운 식욕이 치솟았다. 나는 지중해 풍경을 헐었다. 색깔만 남은 의미 없는 파편들이 천 개로 흩어졌다. 지중해 풍경을 세 번 완성하는 사이, 내 턱 선은 눈에 띄게 무뎌졌다. 가슴이 커지고 옆구리에 둔중하게 살이 올랐다. 무엇보다도 아랫배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임산부처럼 보였다. 임신이란 내 몸을 전혀 다른 존재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었다. 몸속의 혈액량이 증가하고, 유선이 발달하고, 태반이 만들어진다. 내 몸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변해갈 것이었다.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네 번째였다. 먼저 직선이 포함된 조각들을 골라내 사각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다음은 녹색과 흰색을 가려내 섬과 섬 주변을 맞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남은 부분은 온통 푸른빛의 하늘과 바다였기 때문이다. 미세한 차이를 구별해야 했다. 동일한 색감의 이웃을 찾아 각 조각들의 요철부분을 하나하나 대봐야 한다. 조각 하나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였지만, 실제 크기의 백분의 일이나, 천분의 일도 안 될 것이었다. 막막대해와 너른 하늘이 고작 한 평도 못 되는 셈이다. 내 생애 절대 가 볼 수 없는 비현실적인 풍경을 완성하는 과정은, 아무 생각 없이 전념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소일이었다. 휑한 바닥을 드러낸 사각 틀이 완성되고 있었다. 여자가 원룸으로 들어선 건 마지막 조각을 사각 틀에 막 끼우려던 참이었다. 여자가 비칠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해 있었다. 곧이어 거칠게 문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축하는 나를 여자가 완강하게 뿌리쳤다. 그 바람에 퍼즐의 사각 틀이 내 뒷걸음에 부서졌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애원과 욕설이 섞인 남자의 고함이 문 밖에서 울렸다. 여자가 침대로 쓰러졌다. 여자의 전화벨 소리와 쿵쿵거리는 주먹질 소리가 반복해서 계속되었다. 여자는 미동조차 없다. 폭우처럼 시끄럽던 복도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자동차 시동 소리가 들렸다. 창밖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은색 승용차가 보였다. 어느새 여자가 침대 모서리에 불안하게 앉아 있었다. “남자 친구 없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자가 물었다. 과거에 대한 질문은 자신의 고백을 위한 전제이다. 여자는 제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적어도 소란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은 지도 모를 일이었다. 독주의 향이 여자의 호흡에 섞여 있었다. “헤어졌어요.” “사랑했니?” 여자가 낄낄거렸다. 사랑이 뭐 대수니? 그치? 여자가 허리를 젖히며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나는 그를 떠올렸지만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6년을 만났던 남자의 얼굴이 헤어진 지 반 년 만에 새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다행히, 사랑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또 시작하면 돼. 그럼, 괜찮아, 괜찮아.” 자정이 넘어 있었다. 잠든 여자의 바짝 말라 휠 것 같은 팔 다리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가는 손가락의 진주 반지가 유난히 커 보였다. 더 이상 여자의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건 나의 이야기는 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흐트러진 퍼즐 조각을 찾아 사각 틀을 맞춰나갔다. 조각 하나가 없었다. 침대 밑까지 들춰봐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한 사각형이 되지 못한 틀은 불구가 될 미완성의 명백한 증거였다. 하지만 어쩐지 그 한 조각의 틈새가 마치 숨통처럼 보였다. 정오 즈음에야 눈을 뜬 여자는 일어나자마자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속을 게워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식탁을 차렸다. 즉석 북엇국과 계란말이, 김과 오징어젓갈. 여자가 핼쑥한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았다. 여자도,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길고 지루한 식사가 끝나자 여자가 제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끝나버렸네.” 아무래도 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여자는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을 내뱉고 있었다. 어제 그 남자? 남편이 아니야. 연애가 또 끝났을 뿐이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게다가 가진 것도 없거든. 그래서 결혼이 끝나면 안 돼. 결혼은 생계 수단이니까. 그러니 애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할 수는 없어. 그것이 당신 부부의 유전자가 필요했던 것인가. 생계를 위해서라고? 생계? 그 단어가 그렇게 함부로 쓰여도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당신과 내가 같은 목적으로 이렇게 마주하고 있단 말인가. 여자가 나를 향해 비죽 웃었다. “진작부터 어긋난 부부관계를 회복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남의 자식을 키울 아량도 없거든. 그러니 그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지 마. 계약을 파기하지는 않아.” 상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 독백은 처연하다. 발산할 수 없는 나의 감정도 황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심해져야 했다. 언짢은 기분마저 무의미해야 된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현재에 대한 승복은 침묵으로 표출되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또 잠이 들었고, 저녁나절에야 일어났다. 그제야 술이 깬 듯한 말간 표정이었다.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마치 호되게 앓고 난 사람처럼 투명하고 고요한 얼굴이었다. 오랜 침묵.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배를 만져 봐도 될까?” 여자는 내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자의 목덜미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엉켜 있었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여자 앞에 섰다. 여자가 내 아랫배에 손을 댔다. “안녕, 엄마야.” 엄마. 그 단어가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이상하지? 실감이 안 나.” 입덧을 하고 골반통으로 절룩였어도 내 스스로 임신을 인식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불편한 기운과 개운하지 못한 느낌, 무겁게 짓누르는 낯선 이물스러움. 그것이 여자가 말하는 실감, 이라는 것일까. 그렇다면 타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키우게 하는 일에 대해서도 나는 실감하지 못할 것이었다. 여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똑바로 누웠다. 초음파 검사를 받듯 상의를 들어 올리고, 체모가 보이기 직전까지 치마와 속옷을 내렸다. 여자도 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여자의 손이 살에 닿았다. 천천히 배와 허리를 매만졌다. 여자의 손이 따뜻했다. “불쾌해하지 않았음 해.” 마주친 여자의 눈빛을 피할 수 없었다. 여자의 동공 속에 나를 응시하는 내가 있었다. “이 아이를, 조금만, 사랑해 줘. 엄마라는 생각으로. 나는 아이가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여자에 대한 연민을 원치 않았다. 돈 때문에, 명백한 필요에 의해 몸을 빌려준다는 거리감을 이완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내 배를 보이고 만지게 하는 것도 계약의 일부일 뿐이고 싶었다. “나는 엄마처럼 버림받고 싶지 않아.” 옷을 추스르다 말고, 나는 여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자는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 뒤로 여자와 나는 잦은 외출을 했다. 백화점을 다니면서 임부복과 단화를 사들였고, 대형 서점에서 그림책이나 태담 도서, 클래식 음반들을 샀다. 곳곳의 미술관에 갔고, 종종 음악회도 다녔다. 때때로 소문난 곳을 찾아다니면서 식도락을 즐겼다. 요가 센터에 등록했고, 여자가 다니던 피부 관리실도 함께 가곤 했다. 설원 풍경이나 명화 퍼즐이 그사이 세 개나 더 늘었고, 십자수나 퀼트 재료를 사기도 했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양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내가 원룸에 들여놓는 물건들은 모두 여자의 차에도 동일하게 실렸다. 마치 쌍둥이 자매처럼 무엇이든지 두 벌씩 샀기 때문이었다. 외출을 하지 않는 날이면 여자와 나는 클래식을 들으며 동일한 패턴의 십자수를 하거나 고개를 맞대고 퍼즐을 맞췄다. 식사도, 낮잠도, 순산 체조도, 심지어 유방 마사지도 여자와 같이 했다. 가슴 아래부터 배, 허벅지, 등과 둔부까지 골고루 원형을 그리며 튼 살 크림을 발라주는 것은 매일 저녁 여자가 원룸을 나서기 전에 하는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여자와 함께였다. 장마와 한더위가 지나자 처서도 금방이었다. 시간이 저절로 흐르는 사이 배는 더 불러왔고, 내 몸이 커져 가는대로 여자의 배도 동일하게 부풀었다. 여자는 내 배 크기에 맞춰 제 몸에 수건을 넣은 복대를 둘렀다. 수건이 하나에서 두 개, 세 개쯤 늘어났을 무렵, 9월이 시작되었다. 엄마에게서 연락이 온 건 첫 번째 목요일이었다. 동생이 목욕탕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제대였다. “너 어디서 지내니?” 그 질문이 어쩐지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나는 대답대신 동생이 지낼 곳은 있느냐고 물었다. “일단 친구 집에 있겠다더라.” “내가 연락할게.” 엄마의 말이 계속 이어졌지만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말 할 수 없고, 보일 수 없어 애가 탔다. 동생도, 엄마도 보고 싶었다. 여자는 다른 날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나는 계약 금액 분할 지급을 떠올렸다. 그것은 처음부터 동생의 제대를 예상한 조건이었다. 계약서는 30주 이후에 가능토록 명시되어 있다. 나는 25주에 막 들어선 참이었지만 사정을 밝히면 여자도 동의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여자가 술에 취해 찾아왔던 이후, 여자와 나는 친밀해지지 않았던가. 친밀은 비밀의 공유에서 시작한다면 나도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차라리 동정이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동생이 거처할 방 하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내가 돌아가 그 방에서 쉴 수만 있다면, 그래서 봄을 기다리며 헛되더라도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매달릴 수 있었다. 구걸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마치 내 요구에 냉정하게 거절하듯 오지 않았다. 전화도 없었고, 내 전화도 받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자꾸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여자의 안위를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동생의 거처가 문제가 아니었다. 계약을 파기하지 않겠다던 여자의 말을 붙들고 있었지만, 그건 너무나 조악한 기대였다. 이렇게 여자가 사라진다면 나는 어떡하는가. 장기와 얼굴이 또렷하게 다 만들어진 핏덩어리를 또 지워야 하는가. 불안은 하루가 갈수록 겉잡을 수 없는 공포로 변해갔다. 일주일을 기다린 후, 그간 모아두었던 생활비를 부쳤다. 아버지의 도주 이후 식구들은 모두 신용 불량으로 통장 거래가 불가능했으므로 등기우편으로 보내야 했다. 엄마와 동생은 연락조차 없었다. 돈만 보내고 얼굴을 비치지 않는 나를 원망할 지도 모른다. 아버지처럼 사라진 식구가 하나가 더 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불어난 몸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모두가 순식간에 나를 외면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내가 혼자라는 외로움이 엄습했다. 일하는 아줌마는 매번 외출 중이라고 대답했다. 남은 건 여자의 남편 명함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망설였다. 남편의 이름 앞에 붙은 변호사, 라는 직책이 무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법을 운운하며 내동댕이쳐지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건 아닐까. 차마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자가 찾아오지 않는 동안 불면의 밤이 계속되었다. 첨예하게 날이 선 불안이 찾아오면 극성스런 공복감도 어김없이 몰려왔다. 나는 끊임없이 배가 고팠다. 그때마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폭식을 해야 겨우 안정이 되곤 했다. 부조리하게도 머리와 가슴을 앞서는 것은 몸뿐이었다. 냉장고에 먹을 수 있는 것은 사과 두 알과 베이컨밖에 없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생활비가 다 떨어졌다는 걸 알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선 채로 시든 사과와 익히지도 않은 베이컨을 먹었다. 나는 주저앉았다. 버저 음을 내는 열린 냉장고에서 쏟아진 냉기가 온 몸을 감쌌다. 허기가 가시지 않은 배가 앞으로 툭 불거져 있었다. 공포의 근원을 찾은 것처럼 온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나는 양 팔로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그때였다. 내 몸의 깊은 저편에서 작은 소리가 느껴졌다. 물 속의 생명체 하나가 내뱉은 숨 한 조각이 수면에 맞닿아 터지는 순간, 수면에 파동을 만드는, 아주 작고 고요한 진동. 태동이었다. 첫 태동을 느낀 것이었다. 나는 원피스를 들어 올리고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뱃속의 꿈틀거리는 그것, 그것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소리의 체감을 나 혼자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서글펐다. 자신의 아이를, 진짜 내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라면 이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까. 나는 내 감정의 정체에 대해 혼란스러웠다. 기쁘지만 슬퍼야 할 것 같았고, 흉측한 느낌이어야 할 것 같은데 섬뜩하도록 순수한 감동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16주가 지나면 태동을 느낄 수 있다고 여자는 매일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젓는 내가 미안한 기분마저 들었던 나날들. 도대체 여자는 어디에 있는가. 여자는 정확히 한 달 만에 왔다. 첫 태동을 느낀 다음 날이었다. 욕실을 나오니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안도라기보다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나를 방치해도 되느냐고, 어떻게 나를 잊고 지낼 수 있었느냐고 따지며 달려들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여자의 머리에 꽂힌 흰 리본을 보고 침묵했다. 여자는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여자의 배가 앞으로 비죽 솟아 있었다. 여자의 어미가 죽었다. 그것 외에는 그간의 여자의 행로에 대해서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내가 만약 여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엄마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되거나, 아버지의 혹은 동생의 부음을 받는다면, 우습게도, 한 줌의 뼛가루도 못 만지겠구나, 곡도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배불뚝이가 된 내 외양의 변화를 이해시키는 일이란 불가능하다는 것. 유일했던 최선의 선택이 현실 앞에서 외면당해야 된다는 무참한 실제만 분명했던 것이다. 그러자 슬퍼졌다. 여자의 어미는 자살이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여자를 위무할 수 있었다. “태동을 느꼈어요.”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울고 있었는지,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태동을 느꼈어요. 여자가 비로소, 간신히 웃었다. 나는 여자를 안아주고 싶었다. 서로의 부른 배 때문에 품에 안을 수 없더라도, 힘껏 팔을 뻗고 싶었다. 예정일을 3주 앞두고 이른 외출을 서둘렀다. 정기검진이 있었고, 그 전에는 산후 조리원을 몇 군데 들러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백화점도 가야 했다. 그날 의사로부터 딸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환하게 웃었다. 배냇저고리에 이불, 젖병과 기저귀 등 출산 준비물은 끝도 없이 많았다. 여자는 주로 분홍색과 노란색을 골랐다. 덩치가 큰 것들은 배송을 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양손에는 들기 어려울 정도로 쇼핑백이 가득했다. 하지만 원룸에 들여놓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 쇼핑이었던 것이다. 빈손으로 원룸에 들어서며 나는 절감했다. 계약이 끝나고 있다는 것을, 이제 남은 건 한 가지 외에는 없다는 것을. 여자가 등 뒤에서 크림을 발라주면서 말했다. “이름을 지었어. 다예, 라고. 다 예쁘다, 의 다예.” 여자를 닮으면 아이는 크고 깊은 눈동자를 가질 것이었다. “내일은 못 올 거야. 엄마 사십구재거든.” 여자의 마사지가 다른 날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저번 엄마 일 있었을 때, 미안하다는 말을 못했어.” “신경 쓰지 마세요.” “엄마가 죽고서야 알았어.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그런데 엄마는 끝까지 그걸 외면했어. 이제야, 가슴이, 저려.” 여자의 손가락 마디마다 물기가 배어 있었다. “다예, 예쁜 이름이에요.” 여자의 엷은 웃음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 힘들었지?” “아니요.” 아니, 힘들었어. 하지만 힘들 수 없는 일 년이었다. 성과물을 받기 위해 소비된 시간이었으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니 공평하다. 공평하지 못한 건 그저 운명뿐이지 않은가. 여자가 뒤에서 내 어깨를 안았다. 여자의 부른 배가 등에 닿아 호흡을 따라 움직였다. 그제야 나는 여자에게 말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당신과 일 년간을 함께 지내야만 했는지 설명할 기회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나 역시 엄마가 그립다는, 나 또한 세상에 혼자는 아니라는 것을, 살아 있으면 살아야 한다는, 어쩌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 이야기를 여자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갑자기 배가 꿈틀댔다. 나를 안고 있던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배 위에 올려놓았다. 쿨렁, 쿨렁. 아이가 거듭 발을 찼다. 여자가 나를 더욱 세게 안았다. 아이와 나, 여자는 한 곳을 바라보는 한 몸이 되어 같은 박동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선험자들은 초산모에게 산고에 대해서 알려 주지 않는다. 그 절대적 고통에 대해서 함묵한다. 그것은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조산이었다. 나는 열세 시간의 진통을 겪고서 아이를 낳았다. 다예, 라고 불릴 여자아이였다. 그날 새볔, 가진통이 시작되어 잠이 깼다. 이불이 벌써 흥건했다. 양수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득한 현기증이 몰려들었다. 진통이었다. 나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결이었던가, 설핏 여자가 보였다. 그것이 내가 본 여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여자가 계약서대로 하지 않은 것은 내가 산후조리원에서 보름간 지낼 수 있도록 해 준 일이었다. 그 보름 동안 나는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미역국이나 호박죽을 먹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도 아니면 나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속된 부채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살아 있는 한 살아야 한다는 말을 그악스럽게 되뇌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여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방문 옆에 허름한 가방 두 개가 놓여져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가. 까마득히 잊고 있던 내 가방이었다. 손잡이가 새까맣게 때가 탄 가방을 노려보며 나는 마지막 미역국을 먹었다. 가방 속에는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 들어 있지는 않을까. 지중해 풍경이 신기루처럼 머릿속에 조각조각 흩어졌다. 브로커 없는 직접 거래 요망. 남자 친구 없음. 술, 담배 안 함. L대 법대생. 27세. 어느새 앞섶으로 누런 젖 얼룩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심사평 1년간 시공간ㆍ문장력 조화 응모자 94명의 투고 작품은 총 115편이었다. 이 중에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6편. ‘찰나’(정이환)는 의욕적이긴 했으나 문장과 구성에 문제가 컸다는 결함이 지적되었다. ‘소금창고’(홍영애)는 소설 기법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주인공의 내면 묘사에 치밀성과 성실성이 돋보였다. 그러나 유년기 죄의식과의 연결점은 매우 불투명하게 처리된 점이 아쉬웠다. ‘응달’(정장화)은 정직하다는 장점은 있었으나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감이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고정임)은 아기를 잃은 여인의 내면을 심도있게 다루었으나 결말이 불투명하게 처리된 점이 결함이었다. ‘우랄알타이족의 거울’(유청산)은 속담이 많이 인용돼 유려한 점은 인정되나 계몽소설투라는 결함이 지적됐다. ‘엄마들’(김이설)은 주인공 여대생이 대리모가 되어 겪게 되는 1년간의 시공간과 문장력이 조화롭게 배분 구성되었고 그녀가 자기 자신을 찾게 되는 결말이 장점으로 지적되었다. 하여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당선자는 물론 투고자 모든 분들의 건필을 기원한다. 심사위원 김윤식 김문수 |
당선소감 “겸허하게 정진하는 길” 경험하지 않은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겠구나, 라는 걸 깨달을 때가 있다. 어쩌면 너무 섣부른 경험은 아닌가 싶어 송구스럽기까지 했던, 산고(産苦). 진부하지만 올 겨울의 나에게 그 단어는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280일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세상에 어서 내놓고 싶어 안달했다. 꺼내놓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종결이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미련하게나마 품고 있는 것이, 그래서 차라리 내가 비대해지는 것이, 끝이라 맹신하고 달려가는 길이, 차라리 덜 불안하다는 것을. 부끄러움은 쉽게 사라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종결은 언제나 다시 시작점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어미들은 산고를 기꺼이 겪고 또 겪는다. 나 또한 그런 어미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아니, 마땅히 그래야 하겠다. 겸허하게 정진하는 길, 그것으로 모진 산통을 이겨내겠다. 졸작에 귀 기울여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온 가슴으로 크게 부르고 싶은 이름들이 너무 많다. 언제나 그 이름 고이 간직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겠다. 무엇보다도 산고의 시절 내내, 산통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던 내 여린 어머니에게 이 큰 기쁨을 바치고 싶다. 김이설 ▲1975년 충남 예산 출생 ▲1998년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