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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곡(上谷)을 설치하여 누란(樓欄)을 막다
○ 조선사(朝鮮史)를 연구(硏究)하면서 가장 큰 애로(隘路)는 『직접(直接) 그곳을 가 볼 수 없어, 확인(確認)이 어렵다는 것과 조선(朝鮮)과 관계(關係)되는 지명(地名)이 너무 광범위(廣範圍)하게 퍼져있다.』는 점이다.
역사서(歷史書), 문집(文集), 시집(詩集), 지리지(地理志)등 많은 고문헌(古文獻)등에 『조선(朝鮮)과 관계(關係)되는 것들이 기술(記述)되어 있으며, 또한 조선(朝鮮)과는 아주 먼 거리(距離)에 있어 교류(交流)가 불가능(不可能)할 것 같은 곳의 지명(地名)이나 산(山), 하천(河川)등이 등장(登場)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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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遼東), 요서(遼西) 땅의 변방(邊方)에 있었다.』는 “오환(烏桓)”이 한 때 강력(强力)한 지도자(指導者)로 인해 흥성(興盛)해지니, 후한(後漢)의 변방(邊方)을 자주 침략(侵略), 약탈(掠奪)하였다. 이때는 후한(後漢) 말(末)이다. 조조(曹操)는 이러한 “오환(烏桓)”을 토벌(討伐)하기 위해 출정(出征)하였는데, 이곳 특이지형(特異地形)지대(地帶)를 이룬 “백용 퇴(白龍堆)”에 오르는데, “유성(柳城)” 까지 200 여리에 불과(不過)했다고 한다. 【 ‘백용 퇴(白龍堆)’에 올랐는데, ‘유성(柳城)’이 200 여리 떨어져 있었다는 말에 따르면, ‘백용 퇴(白龍堆)’ 동쪽 200 여리에 “유성(柳城)”이 있었다는 말과 같다.】과연 “유성(柳城)”이란 지명(地名)이 “신 강성(新疆省) 백용 퇴(白龍堆)” 부근에 있을까? 분명(分明)하게 “유성(柳城)”이란 곳이 있다.
● 『청사고(淸史考) 지리지(地理志) 신강(新疆)편을 보자.
《鄯善沖.漢,車師前國東境樓蘭.元魏後為高昌白棘城.唐,柳中縣,屬西州交河郡地.宋,六種,屬高昌,後入遼.元,魯克察魯地.明,柳城. : 선선(鄯善). 한(漢)의 거사전국(車師前國)의 동(東)쪽 지경 누란(樓蘭)이다. 원위(元魏) 뒤에 고창(高昌)의 백 극 성(白棘城)이다. 당(唐)의 유중(柳中)현이며, 서주(西州) 교하(交河)군 땅에 속했다. 송(宋)의 육종(六種)인데, 고창(高昌)에 속했으며, 뒤에 요(遼)가 들어왔다. 원(元)의 극 찰 노(克察魯) 땅이다. 명(明)의 유성(柳城)이다. (중략).》
라고 하였는데, 『유성(柳城)』 이란 곳은, 『곧 선선(鄯善)인 누란(樓蘭) 땅에 “유성(柳城)”이 있었으며, 명(明)때의 지명(地名)이란 말은 후대(後代) 사가(史家)들의 붓 끝에서 나온 것이다.』
『백용 퇴(白龍堆)』란 땅 이름으로(地名), 『특이(特異)한 지형지리(地形地理)를 갖고 있는 특정(特定)지대(地帶)』를 호칭(呼稱)하는 “고유명사(固有名詞)”와 같이 사용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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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럴 때 『당(唐) 현종(玄宗)시절 양귀비(楊貴妃)의 양 아들 노릇까지 해가며, 천하(天下)를 꿈꾸던 “안 록 산(安綠山)과 사 사 명(史思明)”의 근거지(根據地)』에 대한 설명(說明)을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되는데, 『안 록 산(安綠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영주(營州) 유성(柳城)의 오랑캐(胡)』로써, 녕이주(寧夷州) 출신(出身)의 『돌궐(突闕) 종(種)』으로, 이들 두 사람은 『6 개 번족(蕃族)의 언어(言語)에 능통(能通)하게 구사하여, 호시랑(互市郞)을 했다.』는 옛 역사서(歷史書)의 기록을 충분(充分)히 이해(理解)할 수 있는 것이다.
【 번족(蕃族)은 청해 성(靑海省)의 청해(靑海)를 근거지(根據地)로, 흥성(興盛)할 때는 신 강성(新疆省)일부와 감 숙성(甘肅省) 서(西)쪽 일부 지방까지 진출했었다.】
【“영주(營州)와 유성(柳城)”이 현 하북성(河北省)이나 그 동쪽지방에 있었다고 하면, 중국(中國)땅은 반도(半島)와 열도(列島) 사이의 동해바다나, 열도(列島)의 동쪽 태평양(太平洋) 바다 속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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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행(燕行)기록(記錄)인 “계 산 기 정(薊山紀程) / 도만(渡 灣) / 노 룡 새(盧 龍 塞)【 계해(癸亥)년(1803, 순조 3) 12월 19일(경진) 】편을 보면,
《是古盧龍塞也.昔曺操北征烏桓軍.次无終.峕方下雨.灣滯不通.操患之.以問田疇.疇曰.舊右北平治在平剛.路出盧龍.達於柳城.今尙有微徑.遂回軍.從盧龍口越白檀之險.出空虛之地.操以疇爲鄕導.上徐无山.登白龍堆.去柳城二百餘里. : 그곳이 옛 노룡(盧龍)새이다. 옛날 조조(曹操)가 북쪽으로 오환 군(烏桓 軍)을 정벌하느라고, 무종(無終)에 머물렀다. 그때 마침 비가 와 물길이 막히고 뚫리지 않아서 조조는 그 일을 근심하고 전주(田疇)에게 물었다. 전주가 말하기를, ‘전의 우북평(右北平)의 관아가 평강(平 剛)에 있어 길이 노 룡(盧龍)으로 나 있고 유성(柳城)으로 통했습니다. 지금도 아직 샛길이 있습니다.’ 했다. 드디어 조조는 군대를 돌려 노 룡(盧龍)의 입구로부터 험준한 백단 산(白 檀 山)을 넘어, 공허한 곳으로 나가는데, 조조는 전주(田疇)를 길잡이로 삼고, 서무산(徐无山)으로 해서 ➡백룡 퇴(白龍堆)에 오르니, 유성(柳城)까지가 200여 리가 되었다. 》
【본인(本人) 주(注) : 또한 그 시(詩)에서 말하기를】
《새벽에 유관의 달을 밟고 : 曉 踏 楡 關 月 / 저녁에 노룡(盧龍)새의 눈 뚫었네. : 夕 穿 龍 塞 雪 / 예부터 황막한 땅이라 : 古 來 荒 漠 地 / 마을과 끊긴 지 오래다 : 人 煙 久 阻 絶 / 황사에는 북방 기운 흐르고 : 黃 沙 朔 氣 流 / 백룡 퇴는 천연으로 험준하다 : 白 堆 天 險 設 / 노회(老獪)한 아만(阿 瞞)이 동쪽으로 출정하자 : 老 瞞 東 出 征 / 오환이 그 굴혈을 짓이겼다 : 烏 桓 擣 巢 穴 / 열흘 내내 비 멎지 않고 : 一 旬 雨 不 止 / 잔 길은 곡절 많았다 : 小 徑 多 曲 折 / 요행히 군막에 객이 있어서 : 幸 得 帷 中 客 / 군사 돌려 이길 계획 결정되었다 : 回 軍 勝 籌 決 / 철마로 멀리 달려오니 : 鐵 馬 長 驅 來 / 팔락팔락 바람 깃발 잡아제친다. : 獵獵 風 旌 掣 / 들판이 열리니 강물에 다리 둥그렇고 : 拓 野 河 橋 圓 / 길을 쪼아내어 산 구름 이그러 졌네. : 鑿 路 山 雲 缺 / 백단 산에 군사의 방비가 없어 : 白 檀 兵 无 備 / 격전(激戰)을 칼날에 피 없이 끊었다 : 鏖 戰 刃 不 血 / 북방 길 드디어 뚫려 :北 方 道 遂 通 / 만리를 내 수레에 기름 치고 간다. : 萬 里 膏 吾 轍 / 먼 길 와서 무엇을 하려는지 : 遠 道 來 何 爲 / 날 저문 오랑캐 땅엔 바람이 맵다 : 日 暯 胡 風 烈 》하였다.
● 또한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그의 시(詩)에서,
동고(東皐)의 ‘영 평 부’ 운(韻)을 차하다(次 東 皐 永 平 府 韻) / 상촌(象村)집 제12권 :
《 고향땅을 떠난 뒤로 가마아득한 세월 : 鄕 原 別 後 歲 年 遙 / 힘든 노역 지루하게 몇날 며칠 넘겼던가. : 倦 役 支 離 幾 暮 朝 / 더딘 해 들녘에는 아지랑이 피어나고 : 遲 日 郊 坰 團 野 馬 / 화한 바람에 안개는 봄 초목을 덮었구나. : 暖 風 烟 靄 冪 春 條 / 요동 변방 끝이 없는 차가운 사막 실컷 보고 : 厭 看 遼 塞 聯 寒 磧 / 또 다시 난 하 향해 끊긴 다리 건너가네. : 又 向 灤 河 渡 斷 橋 / 예로부터 노 룡 사막 험난하다 불렸나니 : 從 古 盧 龍 稱 絶 漠 / 나부끼는 깃발인가 나그네 마음 흔들려 : 覉 膓 懸 斾 正 搖 搖 》라고 하였다.
● 상촌(象村)집 18권 / 시(詩) / 갑산에 도착하여 (到 甲 山)
기이(其 二) : 백룡 퇴의 가 황사 모래벌판 / 白 龍 堆 畔 黃 沙 磧 / 팔월인데 쓸쓸하게 풀이 모두 말랐구려. / 八 月 簫 簫 草 盡 枯 / 수자리 막사에 밤이 드니 추위가 더해 가는데, / 戍 幕 晩 來 饒 朔 氣 / 작은 선우 쪽에서는 호가를 불어 보내네. / 胡 笳 吹 度 小 單 于
● 성호사설(星湖僿說) 29권/ 백룡 퇴(白龍堆) / 동방 규(東方 虯) 소군원시(昭 君 怨 詩)
《눈물을 가리며 단봉 궐을 하직하고 / 掩 淚 辭 丹 鳳 /슬픔을 머금은 채 백룡퇴로 향하노라 / 含 悲 向 白 龍 》하였는데, 이 백룡(白龍)은 백룡 퇴를 가리킨 것이다. 상고하건대, 양웅(揚雄)이 선우(單于)의 조서(朝書)를 받지 않는 것을 간하면서, “어찌 강거(康居)ㆍ오손(烏孫)이 능히 백룡 퇴를 넘어서 서쪽 변방을 침략할 것을 위함이겠습니까?” 하였고, 그 주에, ‘용퇴(龍 堆)는 형상이 토룡(土龍)의 몸과 같아서 머리는 없고 꼬리만 있는 격이며, 높은 것은 두세 길이요 낮은 것은 한 길 남짓한데, 다 동북으로 향하여 서로 비슷하다. 서역(西域) 안에 있다.’ 하였다.
● 월사 집 제7권 / 경신조천 록 상(庚申朝天 錄 上) / 새 하 곡 (塞下曲)
북쪽 사막 음산한 바람이 땅을 말아 오니 : 北 漠 陰 風 捲 地 來 / 티끌 모래 자욱해 백룡 퇴가 보이지 않아라. : 塵 沙 不 見 白 龍 堆 / 선우의 장막 속에 호가 소리가 들려올 제 : 單 于 帳 裏 笳 聲 發 / 저물녘 돌아오는 사냥꾼 불빛 멀리 보인다. : 日 暮 遙 看 獵 火 回
● 추강 집 제3권 / 시(詩) / 출정한 군인의 원망하는 노래
북방 사막 먼지바람이 휑하니 쓸고 가니 : 朔 漠 風 塵 掃 易 空 / 그 언제쯤 옥관 길로 동쪽 고향 돌아갈까 : 玉 關 歸 路 幾 時 東 / 변방에는 가을 추위가 일찍 닥치는가보다 : 塞 垣 可 是 秋 寒 早 / 하룻밤에 맑은 서리 거울 속에 가득하구나. : 一 夜 淸 霜 滿 鏡 中
북방 사막 왕의 궁궐 눈 아래 비었으니 : 朔 漠 王 庭 眼 底 空 / 백룡의 동쪽에서 오구를 새로 시험하네. : 吳 鉤 新 試 白 龍 東 / 남아에겐 나라뿐이고 몸과 목숨 없으니 : 男 兒 國 耳 無 身 命 / 이내 육신 기꺼이 풀숲 가운데 던지리라 : 戰 骨 甘 抛 草 莽 中
젊은 날 처음 정벌 나서 백산을 휩쓸었고 : 少 年 新 伐 白 山 空 / 오늘은 옮겨와서 연연 산 동쪽 공격하노라 : 今 日 移 攻 燕 然 東 / 넓고 넓은 고비사막에 급한 비 날리는데 : 瀚 海 漫 漫 飛 急 雨 / 짙은 연기 속에 한나라 변방을 돌아보네. : 回 看 漢 塞 矗 煙 中
한 해 저물녘 서리 많고 북해는 비었는데 : 歲 晩 霜 繁 北 海 空 / 옥관 산에 뜨는 달이 처음 동에서 솟아나네. : 玉 關 山 月 正 初 東 / 미미한 이내 몸은 오랑캐 화살촉 면할지라도 : 微 軀 縱 免 戎 王 鏑 / 박한 목숨 오히려 추위 굶주림에 쇠잔하리라 : 薄 命 猶 殘 凍 餒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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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말하는 『백용 퇴(白龍堆)』 는
白龍 堆(백룡 퇴)는, 신 강 성(新疆省) 나포 박(羅 布 泊)과 감 숙성(甘肅省) 옥문관(玉門關) 사이에 펼쳐진 사막(沙漠)지대이다. 해발고도는 약 1,000m이며, 북동(北東)쪽에서 남서(南西)쪽으로 뻗어 있는 사막(沙漠)의 형태가 용(龍) 같다고 하여 백용 퇴(白龍堆)라고 부른다. 줄여서 용퇴(龍 堆)라고도 하며, 그 땅을 빗대어 “용사(龍沙)”라고도 한다. 고대(古代) 호적 층(湖積層) 및 적색사력층(赤 色 砂 礫 層)이 바람에 잠식(蠶食)된 지역으로, 높이 25~40m의 방산(方山). 암 탑(岩 塔]. 토주(土柱) 등의 사적(沙磧)에 있다.
조선사(朝鮮史)에서는,
백룡 퇴(白龍堆)는, 옛날 서역(西域)의 사구(沙丘) 이름으로, 유사(流沙)가 끝나는 곳이다. 용사(龍沙)는 중국 신강(新疆)의 천산(天山) 남쪽에 있는 사막인 백룡 퇴(白龍堆)의 이름이다. 이 사막(沙漠)은 원래 흉노(匈奴)족의 영토 안에 있었다. 용퇴(龍 堆) : 서역(西域)의 천산(天山) 남쪽에 있는 사막(沙漠)인즉 백룡 퇴(白龍堆)의 준말이다.
용퇴(龍 堆)ㆍ대막(大漠) : 《법언》효지 편에, “龍 堆 以 西, 大 漠 以 北”이라 하였고 또 한서(漢書) 서역 전(西域 傳)에는, “동쪽 변두리에 있는 누란 국(摟 蘭 國)이 한(漢)나라와 가장 가까운데 백룡 퇴(白龍堆)란 지역에는 수초(水草)가 없다.”라고 하였다.
용사(龍沙) : 백룡 퇴(白龍堆)를 가리킨다. 황사(黃沙)는 용사(龍沙)로, 총령(蔥嶺) 근처에 있는 사막인 백룡 퇴(白龍堆)를 가리킨다. 【한서(漢書) 卷94 흉노(匈奴)전에, 원제(元帝) 때 궁녀(宮女)인 왕소군(王昭君)이 뛰어난 미모(美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제(皇帝)의 총애(寵愛)를 입지 못하다가 궁중(宮中) 화가(畵家)의 농간(弄奸)에 의해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흉노(匈奴)의 땅으로 갈 적에 변방(邊方) 땅을 지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비파(琵琶)를 뜯었다. 한(漢)나라 사람들이 이를 불쌍히 여겨, 마상 성(馬上 聲)이라는 노래를 지었다.】 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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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용 퇴(白龍堆)』지대(地帶)는 “누란(樓蘭)”국이 있었다. 또한 이곳엔 선비족(鮮卑族) “오환(烏桓)”이 있었다. 그렇다면 “누란(樓蘭)이 오환(烏桓)인가?” 시대적(時代的)으로 보면, 『누란(樓蘭)과 오환(烏桓)은 같은 시대(時代), 같은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환(烏桓)의 시원 지(始原地)는 사막(沙漠)의 가운데에 있었으며, 점차적(漸次的)으로 세력(勢力)이 확장(擴張)되어, 요동요서(遼東遼西) 땅 및 그 변방(邊方)에서 “한(漢)”의 군현(郡縣)을 약탈(掠奪)하였다고 하는데, 함께 국경(國境)을 접하고 있던 “구려【句驪 : 고구려(高句驪)】”와는 전혀 다툼이 없었다. 오히려 “한(漢)”의 군현(郡縣)보다는 광범위(廣範圍)한 지역(地域)에 국경(國境)을 접(接)하고 있던, “구려【句驪 : 고구려(高句驪)】”를 침략(侵略), 약탈(掠奪)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리(有利)한 지형지리(地形地理)이다.
이것은 선비족(鮮卑族)의 두 종족(種族)인 “선비(鮮卑)와 오환(烏桓)”은 “구려 【句驪 : 고구려(高句驪)】”에 복속(服屬)된 자들이며, 곧 구려(句驪)라 할 수 있다.
조조(曹操)가 “백룡 퇴(白龍堆)”에 올랐다면, 분명(分明) 사실(事實)일 것이며, 결국 오환(烏桓)이 강성(强性)할 때, 이곳까지 진출(進出)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곧 “구려【句驪 : 고구려(高句驪)】”이다.
● 아래의 글 하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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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選 卷 22 遊覽 / 양(梁) 나라 서 비(徐 悱)의 <古 意 詶 到 長 史 漑 登 琅 耶 城 詩 : 고 의 수 도 장 사 개 등 낭 야 성 시> 에,
《甘 泉 驚 烽 候, 上 谷 拒 樓 蘭 : 척후(斥候)와 봉화(烽火)로서 감천(甘泉)을 경계(警戒)하고, 상곡(上谷)을 설치(設置)하여 누란(樓欄)을 막아 》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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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천(甘泉) : 한(漢)나라 때 상군(上郡) 조음 현(雕 陰 縣)에 있는 “산(山)”의 이름이며, 섬서 성(陝西省) 부주(鄜州)를 말한다. 접경(接境)지대, 이곳에 봉화(烽火)를 설치하고, 척후(斥候)를 두어, 흉노(匈奴)의 침략(侵略)에 대비(對備)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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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곡(上谷) : 연(燕)나라 진개(秦開)가 동호【東胡 : 조선(朝鮮)】의 인질(人質)로 있다가 “동호(東胡) 왕(王)”의 환심(歡心)을 산 후, 풀려나 동호(東胡)의 약점【弱點 : 허실(虛實)】을 파악(把握)한 후에, 동호(東胡)의 서쪽변경지방을 침략(侵略)하여, 일천(一千)여리【일설(一說)에는 이천(二千)여리】를 빼앗은 다음, 이 땅에 다섯 개 군 【상곡 군(上谷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동군(遼東郡). 요서군(遼西郡). 어 양 군(漁陽郡)】을 두었다고 전(傳)하는데, 상곡 군(上谷郡)은 다섯 개 군(郡)의 하나이다.
『상곡(上谷)은 지명(地名)으로, 규수(嬀水) 가에 있었다.』고 하는데, “규수(嬀水)”는 “중앙아시아를 흐르는 아무다리아강”이다. 아무다리아강【A m u, D a r y a, 러시아어: Амударья, 페르시아어:آمودریا, D a r y a (바다를 의미함)】은 또 『오 호 수(烏 滸 水)』라고도 하는데. 파미르【총령(蔥嶺)】고원에서 발원(發源)하여, ‘힌두쿠시’ 산맥(山脈)을 빠져서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국경(國境) 지대의 북서(北西)쪽에서 흐르는 강이다. 원래는 ‘아랄 해’로 흘러 들어갔지만, 현재(現在)는 사막(沙漠) 쪽에서 사라지고 있다. 연장 1450km 【원래는 2400 km】이며, "다리야"는 터키어로 "강"의 의미(意味)이므로 "아무 강"이라고 표기(表記)하는 경우도 있다.
전한서(前漢書) / 서역(西域) / 안식(安息) : <地 方 數 千 里 , 最 大 國 也。 臨 媯 水 : 지방은 수천(數千)리이며, 가장 큰 나라이다. 규수(嬀水)에 임하였다.>라 하였다.
이 강(江)은 물줄기를 따라 버드나무·갈매나무·수유나무가 주로 자라며 중류(中流)에 이르면 홍수(洪水) 침전(沈澱)물로 생긴 저습지에, 다양(多樣)한 종류의 “버드나무와 포플러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버드나무·수유나무·포플러나무가 멀리 떨어진 하류(下流)지역까지 계속 이어지면서 갈대로 뒤덮인 삼각주(三角洲)에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철갑상어·잉어·돌 잉어·송어 등 여러 종류의 어류(魚類)가 발견(發見)되며 강변(江邊)에는 멧돼지·살쾡이·재칼·여우·산토끼가 서식한다. 조류도 약 200여 종이 있다. 중요한 것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이 강(江)은, “러시아의 표트르 1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734년 처음으로 비교적 믿을 만한 지도(地圖)가 만들어졌으며 19세기말 비로소 체계적(體系的)으로 연구(硏究)되기 시작했다.』는 사실(事實)이다.
또한 『위(魏)의 문제(文帝) 때 이곳 사람들은 연연(蠕蠕)의 말을 사용했다고 “통전(通典)”에 기록(記錄)되어 있다는 점을 보면, 이곳 땅은 연연(蠕蠕)의 땅이었거나 그 속국(屬國)이었을 것으로 판단(判斷)된다.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은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를 연구(硏究)하는데 아주 중요(重要)한데, “연연(蠕蠕)과 고구려(高句驪)”는 “황실(皇室)간의 혼 맥(婚脈)”으로 이어져 있었다.』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조선사(朝鮮史)의 영토(領土)를 연구(硏究)하는데 참고(參考)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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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전(通典)이나 사기(史記)의 대륙사서(大陸史書)속에서의 “상곡(上谷)”은 장안(長安)의 북쪽 내몽고(內蒙古) 황하(黃河) 북안(北岸)에 있는 오원(五原)의 북쪽지방인 외몽고(外蒙古)지방에 있었다. 곧 오원(五原)에서 900 리를 가면 “조양(造陽)”이 있으며, “조양(造陽)은 상곡 군(上谷郡)의 속현(屬縣)”이라고 하였다.
○ 상곡(上谷)의 지명(地名) 이동(移動)은 아래와 같다고 추정(推定)된다.
본시(本始) : 중앙아시아 아무다리아강 연안(沿岸)
1 차 이동 : 신강 성(新疆省)과 감 숙성(甘肅省) 접경(接境)지역
2 차 이동 : 오원(五原) 북방 900 리의 외몽고(外蒙古)지방
3 차 이동 : 하 북 성(河北省) 북방(北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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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누란(樓蘭)
㉠ 한서(漢書) / 서역(西域) / 鄯 善 國, 本 名 樓 蘭, 王 治 扜 泥 城, 去 陽 關 千 六 百 里, 去 長 安 六 千 一 百 里. 地 沙 鹵, (中略). 民 隨 畜 牧 逐 水 草, 有 驢 馬, 多 橐 它. : 선선(鄯善)국이다. 본명(本名)이 “누란(樓蘭)”이며, 왕(王)은 우니 성(扜泥城)에서 다스렸는데, 양관(陽關)은 1,600 리 떨어져 있으며, 장안(長安)은 6,100 리 떨어져 있다. 땅은 소금기가 있는 모래이다. 인민들은 가축을 따라 수초(水草)를 쫓아 사는데, 나귀(驢)와 말이 있고, 낙타(駱駝)가 많다.
㉡ 통전(通典) 서융(西戎) / 누란(樓蘭) / 漢 時 通 焉. 王 理 扜 泥 城, 去 陽 關 千 六 百 里, 東 去 長 安 六 千 一 百 里. 地 沙 鹵, (中略). 人 隨 畜 牧 逐 水 草, 有 驢 馬, 多 橐 駝. : 한(漢)시에 통하였다. 왕(王)은 “우니 성(扜泥城)”에서 다스렸다. 양관(陽關)이 1,600 리 덜어져 있으며, 장안(長安)은 6,100 리 떨어져 있다. 인민들은 가축을 따라 수초(水草)를 쫓아 사는데, 나귀(驢)와 말이 있고, 낙타(駱駝)가 많다.【한서(漢書)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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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관계(關係)되는 중요(重要)한 것을 알아보았는데, 현(現)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➊『상곡(上谷)』은 “하 북 성(河北省)” 북(北)쪽에 있다.
❷ 감천 산(甘泉山)은 “상곡(上谷)”으로부터 서(西)쪽으로 1500-1700 여리 떨어져 있다.
❸ 누란(樓蘭)은 “감천 산(甘泉山)”에서 서(西)쪽으로 5,000 리 이상(以上) 떨어져 있다.
이럴 때, 상곡(上谷)을 설치(設置)하여, 어떻게 흉노(匈奴)인 누란(樓蘭)의 침입(侵入)을 막을 수 있겠는가? 위의 것이 사실(事實)이 되고, 역사적(歷史的)인 사건(事件)이 되려면, 『상곡(上谷)은 돈 황(燉煌)이나 옥문관(玉門關) 또는 양관(陽關)에 있어야 하며, 그 서(西)쪽의 “누란(樓蘭)”의 침입(侵入)을 저지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올리는 봉화(烽火)를 감천(甘泉)에서 받아, 재빨리 장안(長安)인 경조(京兆)로 다시 보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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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룡 퇴(白龍堆)는 누란(樓蘭)이 있는 곳이며, 누란(樓蘭)의 땅이었다. 또한 이곳엔 선비족(鮮卑族) “오환(烏桓)”이 있었다. 그렇다면 “누란(樓蘭)이 오환(烏桓)인가?” 시대적(時代的)으로 보면, 『누란(樓蘭)과 오환(烏桓)은 같은 시대(時代), 같은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환(烏桓)의 시원 지(始原地)는 사막(沙漠)의 가운데에 있었으며, 점차적(漸次的)으로 세력(勢力)이 확장(擴張)되어, 요동요서(遼東遼西) 땅 및 그 변방(邊方)에서 “한(漢)”의 군현(郡縣)을 약탈(掠奪)하였다고 하는데, 함께 국경(國境)을 접하고 있던 “구려【句驪 : 고구려(高句驪)】”와는 전혀 다툼이 없었다. 오히려 “한(漢)”의 군현(郡縣)보다는 광범위(廣範圍)한 지역(地域)에 국경(國境)을 접(接)하고 있던, “구려【句驪 : 고구려(高句驪)】”를 침략(侵略), 약탈(掠奪)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리(有利)한 지형지리(地形地理)이다.
이것은 선비족(鮮卑族)의 두 종족(種族)인 “선비(鮮卑)와 오환(烏桓)”은 “구려 【句驪 : 고구려(高句驪)】”에 복속(服屬)된 자들이며, 곧 구려(句驪)라 할 수 있다.
조조(曹操)가 “백룡 퇴(白龍堆)”에 올랐다면, 분명(分明) 사실(事實)일 것이며, 결국 오환(烏桓)이 강성(强性)할 때, 이곳까지 진출(進出)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곧 “구려【句驪 : 고구려(高句驪)】”이다. 이때 한(漢)이 진실(眞實)로 존재(存在)했다면, 그들은 『백룡 퇴(白龍堆)의 서(西)쪽과 서남(西南)지방』에 있었을 것이며, 이들【한족(漢族) : 물가에 살던 소수민족(少數民族)】은 소수민족(少數民族)이었다는 옛 기록과 일치(一致)되며, “오환(烏桓)은 구려(句驪)이며, 구려(句驪)의 일원(一員)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성(妥當性)이 있다.
2012년 12월 3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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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조(曹操)가 북쪽으로 오환 군(烏桓 軍)을 정벌하느라고...'에서, 조조군은 남쪽에, 오환은 북쪽에
'노회(老獪)한 아만(阿 瞞)이 동쪽으로 출정하자..' 에서, 조조는 서쪽, 오환은 동쪽에..?
'북방 길 드디어 뚫려 :北 方 道 遂 通 / 만리를 내 수레에 기름 치고 간다..'에서, 길은 남북으로 뚫려 있은 것이므로 결국 조조는 남쪽이고 오환은 북쪽에 있음을 알수있읍니다. 현재의 옥문관 서쪽 백룡퇴를 기준으로 그 남쪽 (현, 청해성 서부)이 조조의 위나라라는 것인데 ... 납득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조조의 위나라를...황하 연안으로 보나...제[생각엔...황하연안은 고구려와 부여의 영토입니다.
삼국지상의 조조 손권 유비가 자웅을 겨룬 천하는...사천성과 티벳동부가 유비의 촉나라...조조의 위나라는 황하 남부 (오구태백제)...손권의 오나라는 양자강 상류일대입니다.
지극히 작은 관경였다 봅니다.
흔히들....백산(白山)이라 하면...무조건 백두산이라 단정하나...
제 생각엔 한중(漢中)의 북주 태백산(太白山)의 약칭이 백산일 수 있다 보입니다.
이곳에서 청해선을 건너...신장성으로 치고 올라가는 길이 오황족 정벌로이고...
당대의 오환은 고구려나 부여와 병합돼긴하겠으나...엄연히 다른 지역 다른 주체였다 보는게 맞는듯 하고..
위나라 자체가 오구태(우태)백제로 보이고...그 북방의 황하연안은...위나라의 상국인 북부여...그 신흥국인 고구려의 영토였다 보는게 맞을듯 합니다.
위나라는...남부여격인 백제(우태백제)와 관계만다 보입니다.
아무다리아...
최두환선생님 학설론...흑룡강이라 하시는데...검다는 뜻의 아무다리아가 아닙니다.
티벳이나 몽골어의 아무르'는...평안(平安)이란 뜻입니다....평안강(平安江)이 아무다리아"의 한자 직역인 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터키(투르크=투루궐=돌궐)의 강(江)이란 언어가 다리아"라 하나...이도 근세의 지명조건에 맞춘 해석일뿐이고...진짜 뜻은 티벳어나 몽골어 그대로 바다란 뜻의 달래(달라이)...바다의"라고 할 땐 "달랜"..이게 정답입니다.
아무다리아는...근세에는강줄기였으나...중세 이전엔 고지도상 엄청난 수량의 알알해의 바다입니다.
30여년간 알알해의 수랼은 7배가 감소했다니...역으로 추산하면..
중세까지의 알알해는 고지도 그대로...현 카스피해 버금가는 대형 내륙해였을 겁니다.
아무다리아 시르다리아 전체는 강줄기가 아니라...알알해(천해)의 바다속에 있었단 겁니다.
아무다리아...시르다리아...이지명도 원체는 바다를 말합니다.
알알해(천해.북해)를 이르는 겁니다.
카자흐스탄이 타타르청나라의 주요 근거지라고 저도 보는데...
그 상당수의 토지는...중게까지는 대부분 바다(알알해)에 잠겨있던 지역이며...그 북단이 청나라(타타르)의 주요 근거리라 보이고...청나라는 별 수 없이 신장성 북단 중가르지대에서...카자흐 북단 과 러시라의 깊착크한국이자 카사르몽골을 병합한나라고...그 알알해란 엄청난 지현적 장해물 남단이 남명의 후기영토이자...무굴의 후기영토라 보입니다.
제일 중요한건 연경(燕京)인데...연경은...청나라(달단)의 최 동남단 영토이자...명나라(무굴=티벳과 북인도&페르시아)의 최 북단 영토로 봄이 함당할까 합니다.
물론 고려나 조선의 최 서북단 고토가 되는 센니겠고여...
사막 한가운데의 이 불모지 성체가 중요했던 이유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교통의 요지인 천자의 자리란 점 때문이기도하나...
이 자리가 원체 과거부터의 천자들이 애용하던 도읍지인 이유때문이며...천자의직할 땅이라서...
천산(天山)...천해(天海=알알해&중가르사막)이란 지명이 꾸준히 붙은 것이지...
국벽한 오지 오랑케들의 땅에...천자의 천(天)자를 함부로 붙일순 없단 이치입니다.
천산지역은...
중세 이전엔...거대 알알해와 중가르 내륙호인 천해(天海)에 둘러 쌓이고...
라포박일대의 원조 요동이자 원조 황하상류의 큰물(발해)에 둘어 쌓이고...
타클라마칸일대 타림강 주위 거내 내륙해에 둘러 쌓인...천혜의 내륙해 안의 섬인 지대로...
유라시아 교통의 요지이자...방어가 용이한 내륙해 속의 거대한 섬..해내(海內)라고 전 생각합니다.
동서양 모든 종교가 얘기한 애덴(천국)이 바로 이 곳에 있으나...
그 수량이 격감한 중세부터 현재까지의 사막화로...그 옛 영광의 유추가 어려워 졌을 뿐이라 보입니다.
텬(天)자는 아무데나 함부로 못 쓰는 지명입니다.
함부로 쓰다간 천자국에게 디집니다.
텐(天)은 그대로..몽골족의 탱그리의 약자도 돼며...한자의 천(天)이자...
천산은...탱그리산(한탱그리산)이 있는 파미르와 ...그 동쪽 줄기인 천산을 이르며...
이를 기련산이라 함은...탱그린(하늘의~)란 뜻의 몽골어에 기인함이고...
청해성 기련산은...조선 후기 백두산을 가리고자...그 천산의 동쪽 지맥인 백두산을 같이 천산(기련산)이라 총칭하며 조작한 결과로 보입니다.
2013년!
새해가 막 시작되었군요. 새 해에는 여러가지 많은 변화가 예상됩니다. 우리 카페도 좋은 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사실 조조와 오환의 격전지를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조군이 백룡퇴까지 진군했으며, 그곳에 유성과 오환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조조는 분명 오환을 좇아 동쪽으로 진군했다는 것이 기록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이해되려면 여러가지 고증이 되어야 합니다. 조조는 조선의 일개 신하였다고 보는 시각도 고려되어야 하며, 전한과 후한은 고구려(구려)이다라는 시각도 중요합니다. 여러가지 측면이 고려돼야 합니다. 궐한님괴 맑은 영혼님! 모두 늘 건강하세요
아랄해의 수량이 최근에 급격히 감소한 것은, 아랄해의 두 상수원인 아무다리아와 시르다리아의 강 중류에 큰 댐이 건설되였기 때문입니다. 댐의 물을 가까운 사막에 보내는 이른바 관개 농업 [灌漑農業]으로 인하여 강물이 하류로 흐르지 못하기때문이죠.. 물론 건조한 기후탓도 상당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