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같이 5시에 일어나 일정에 있는 대로 이런저런 일들을 끝낸 후 러닝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 언덕바지를 걸어 내려오면서 안개가 짙은 새벽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나 보단 반려견인 파이 녀석이다. 산책을 누구나 좋아하듯 이 녀석도 반려견인데 지독히 좋아한다. 아무래도 본성에 잠재된 의식이 아닌가 한다. 분지형의 외진 골짜구니이지만 일방 동행인 길은 분주할 것은 없지만 시간에 맞춰 들고 나는 사람들이 있어 간혹 차량과 조우하는 일이 종종 생기 곤한다. 협소한 길이라 그럴 경우 사람은 적당하게 피해 주면 되지만 반려견은 아무래도 인간보다 인지력이 떨어짐으로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묘안을 찾은 것은 목줄과 가슴 줄 역할을 동시에 해 주는 목, 가슴 줄을 채우고 줄은 묶지 않고 다니다 차량이 접근하면 즉시 줄을 묶은 후 대기하다 차량이 지나가면 다시 줄을 풀어주고 함께 걷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오늘따라 안개가 지독하여 가시거리가 짧아졌다. 얼굴과 종아리 부근을 흩고 지나가는 안개 입자들이 길섶에 자라고 있는 풀들을 스칠 때와 같은 느낌을 준다. 어제 산책 길에 대하여 정밀하게 거리를 재 보았다. 산막 바로 위에 있는 샘에서 출발을 하여 순환 산책 길까지 확인해 보니 1,000보였으며 산책 순환 전체 거리는 1.400보였다. 산막의 거리를 왕복으로 환산하며 2,000보 오전에 걷는 걸음은 1.400보 * 6회 = 8.400보가 되고 , 합산해 보면 10,400보가 된다. 알맞은 걸음 수다.
안개가 걷히고 여름 햇살이 쏟아지자 열기가 훅하고 달라붙기 시작한다. 작렬하는 여름 햇빛이 모든 것을 열기로 삼킬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래서 여름을 나신의 계절이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봄, 가을, 겨울과는 달리 뜨거운 열기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어 옷을 최소한으로 입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는 계절이 바로 여름이다. 밀짚모자와 머리 사이로 쉴세 없이 땀이 흐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안개는 전부 사라지고 산 정상 부근과 계곡 부근에 여름 특유의 구름 띠가 휘감고 있었다. 이것 또한 곧 사라질 것이다. 걸음을 속보로 바꾼 후 속도를 내자 반려견도 덩달아 분주하게 따라붙는다. 이 녀석은 사람을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것이 장점인 반려견이다. 충견이면서도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나기도 한 반려견이다. 단지 순발력이 너무 좋아 휘리릭하고 동작을 취하면 벌써 빠르게 전환해 버린다. 그리고 차량에 대하여 경계하기는 하는데 자신의 목적이 생기면 물불 가리지 못하는 근성이 샌 편이다. 하긴 동물들의 근성이기는 하지만... 그래 도시에 있을 때 차도 주변을 걸을 때 이 점이 조심스러워 보호 줄을 짧게 잡고 다닌다.
안개가 사리 지자 사물들이 하나둘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벼가 어느새 성큼 자랐다. 안개가 걷힌 후 논 가운데 백로 한 마리가 먹이를 찾다 인기척이 나자 큰 날개를 휘젓더니 금세 산 너머로 사라졌다. 이곳 논에는 백로가 자주 찾아오는 곳이다. 고라니도 자주 찾아와 돌아다니다. 차량이 접근하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고라니를 자주 보았다. 벼를 보면 생명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우리들 식탁에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르는 것이 밥이기 때문일 것이다. 쌀을 먹고 자란 몸이 나 자신이기에 그러한 느낌이 강렬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 때는 쌀이 부족하여 안남미를 수입하여 정부미처럼 팔기도 하여 부모님께서 사다 온 식구들이 먹은 적도 있었다. 바람만 불어도 훅하고 날아갈 것 같은 밥이라 너무 생소했었다. 이런 일들이 엊그제 같은 일들이라 생각되는데 벌써 55여 년 전 일이다. 시간이란 존재는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간다는 특성이 있다. 기다려 주는 법도 없는 가운데 모든 생물들을 시간 속에 가두어 놓고 생사의 긴 끈을 제공한 후 하루도 빠짐없이 나이 값을 매긴다. 어느새 나잇값도 목에 차면 시간을 넘어서서 어디런가 데려간다. 믿음의 소신 끝으로 데려다 놓는 것이다. 이젠 장마도 끝물인가 보다. 폭염이 깊어지는 것 같다. 무더운 날씨를 극복하며 걸음을 끝내고 산막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언덕을 올라 산막으로 들어 가려다 꽃이 만개되어 휘어진 가지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금꿩 다리가 꽃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잠시 누운 것이다. 가만히 놓아두면 자기 스스로 다시 바르게 서서 하루를 정상적으로 보낸다. 이슬의 무게가 기울기를 만든 것이다. 물기가 사라지면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참 섬세한 꽃 이인 금꿩 다리라는 꽃이다. 살며 시 문을 열고 옆으로 넘어진 꽃대를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산막 안으로 들어섰다.
자주 눈 시선과 함께 마음이 가는 장소다 혹시 잡초라도 있을까 해서 살펴보다
벌개미취에 꿀벌이 앉아 정신없이 꿀을 채취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조용히 다가 가 핸드폰의 셔터를 눌렀다. 연속 촬영으로 고정시켜 놓아 여러 장의 사진이 만들어졌다. 인기척과 셔터 소리에 놀랐는지 벌은 꿀 채집을 멈추고 날아가 버렸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날아간 꿀벌의 위치를 확인하려 하였지만 어느새 멀리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었다. 그래도 다시 두리번거리며 찾다 등 뒤 잔디에 엎드려 있는 반려견을 발견하였다. 곤충의 세계도 해충이 존재하고 반면에 익충도 존재한다. 해충이 득세하면 익충이 존재성이 약해되면서 피해가 극심해진다. 반면 익충이 득세하면 결실이 좋아 익충의 혜택으로 삶이 윤택해진다. 인간이 의지하고 신분을 만들어 살아가는 사회에도 악한 구석보다 선함이 많으면 살기 좋은 일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동서남북에서 쏟아지는 여러 가지 정보를 news 라 함축적으로 표현되는 소식을 접하다 보면 악행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인지할 적이 참 많다. 그만큼 살기가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흙이 좋으면 재배 물의 수확량도 좋듯이 사회적 토양이 좋으면 선함이 더 많이 일상화될 텐데 갈수록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변종 창궐로 삶의 질은 최악이며 고통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당장 나의 집안에도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하루 또 하루를 힘겹게 버티는 자식이 있다. 잘 이겨내리라 믿고 있지만 갈수록 태산이란 생각이 든다. 통 크게 제약사에게 배팅하여 백신의 효과를 빠르게 느끼는 사회가 되었으면 불필요한 예산을 쏟아부어도 되지 않았을 텐데... 선견의 부족함이 만들어낸 재앙의 긴 터널이다.
더위에 지쳐버린 파이는 배를 깔고 엎드려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물을 주기 위하여 준비해 놓은 데크 위로 함께 올라가 물 잔을 놓아 주니 한 동안 머리를 물그릇에 고정한 채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나 역시 갈증이 나 견딜 수 없었지만 운동 후 체크할 일이 남아 있어 테이블에 앉아 체크기를 끌어당긴 후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5분 간격으로 다시 잰 후 기록을 남기고 물을 꺼내 두 컵을 마셔두었다. 청량감이 온몸을 타고 흐르며 상쾌한 기분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식으로 매달 30만 보를 걷고 있는 중이다 보니 몸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좋은 결과에 만족하며 하루를 또 시작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