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일 연중 22주일 설교 (여성선교주일)
마르 7:1-8, 14-15, 21-23 신명 4:1-2, 6-9. 야고 1:17-27
첫 열매임을 기억하라!
오늘은 대한성공회에서 정한 여성선교주일로 지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서 신앙을 받았고, 어머니의 대를 거슬러 올라간 신앙의 전통 안에서 자랐습니다. 저를 주님이 주신 첫 열매로 알고 봉헌하신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눈물 어린 기도를 아직도 기억하기에, 그분들의 사랑과 헌신은 항상 저를 다잡는 근원이기도 하고요. 늘 지금을 돌아보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동력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 역시 여성들의 열정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았을까요?
하고 싶고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위해서는 기도와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대한성공회 여성 선교를 위해 새삼스럽게 함께 기억하고 기도합니다. 오늘 여성단체협의회에서 부탁하신 기도와 본문은 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 말씀 가운데 함께 기억할 부분을 묵상하도록 합니다.
마르코복음은 주로 사건을 이야기로 묘사하는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7장은 해설이 붙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세계를 모르면 갸우뚱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해설을 다시 해설해야 하기에 다른 장에 비해 어렵습니다. 유다교의 전통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제도와 법이 세워진 목적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개인의 권리는 지키고 규제는 최소화하며, 개인은 이를 성실히 지키고(신의 성실의 원칙),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를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율법은 오늘 신명기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절대 권위 가운데 선포되었고 세워졌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동안이나 사막에서 살았던 히브리 백성들에게 가장 큰 적은 비바람, 굶주림, 목마름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야훼 하느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보다 더 큰 위기는 공동체 안의 갈등과 분열이었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더 갖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집단적 분열로 치닫습니다. 기본적 요구를 해결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풍족하기를 원합니다. 금송아지로 상징되는 풍요와 만족감이 억압과 굴욕의 기억을 망각하게 한 것입니다. 사막에서 죽음의 위협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 간의 관계였던 것입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집단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며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었습니다.
이제 원칙 위에 규정이 세세하게 붙기 시작합니다. 규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 핵심에 있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범접하기 힘든 권력 계층이 되었습니다. 일상에서 율법 준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도 등장합니다. 손과 그릇을 씻는 것은 사막의 모래 먼지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였을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규정이 반드시 지켜야 할 제도로 굳어지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율법의 본래 의미를 잃게 됩니다.
덥고 메마른 사막 지역에서 먹는 문제도 중요했습니다. 잘못 먹으면 탈이 나는 음식 등을 규정하여 하느님의 권위로 선포된 것들이 예수님 시대에 와서 극성스러울 정도로 세세해 집니다.
더러운 손으로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었다면 분명 율법 위반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셨다면 사실보다는 그 의미를 묵상합니다.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몸(사람)에서 나오는 것이 더 부정하다는(마르 7:15)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그들이 시비를 건 것은 율법의 규정이 아닌 조상의 전통 즉 관습으로 굳어진 규정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하느님의 전통이 아닌 사람의 전통이라고 일축하십니다.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오늘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율법과 같은 모든 법규의 기본 원칙은 ‘사람 존중’입니다. 율법을 주시면서 하느님은 많은 민족이 너희 민족의 슬기로움을 인정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실제로 당시 율법에는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규정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니 율법의 본래 의미를 알게 된 우리는 이제 어떤 이유로든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여성에 대한 시각 또한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변함을 당하게 될 수 있습니다. 장애인, 소수자, 이민자, 여전히 많은 차별이 존재합니다. 이제 우리부터라도 발상과 관점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첫 열매임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야고 1:18) 공동체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큼 정확한 거울은 없다고 했습니다. 제 거울에만 비춰보면 절대로 자신의 고칠 점을 찾지 못합니다. 너무도 익숙한 ‘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이 첫 열매임을 기억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이제 다른 이들의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탄생에서부터 자라기까지 어머니라는 여성의 거울을 보며 자랍니다. 여성은 여성이어서 그리고 동등한 인간으로서 절대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모두가 첫 열매임을 새긴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를 실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듣는 일이 아닐까요? 경청은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빠짐없이 주님의 사랑받는 첫 열매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았다면, 우리는 존중하며 들어야 합니다. 듣고 숙고하는 가운데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확신이 서기 마련입니다. 복음을 듣기 전 우리는 ‘주여, 말씀하소서, 이 종이 듣고 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내 뜻을 말로 드러내고 펼치기 전 우리는 잠시 멈추고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멈추는 것부터 듣는 일의 시작입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고, 너는 우선 들으라는 말씀을 깊이 새깁니다. 그래서 진실된 경청은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라 했습니다. 나와 다름을 찾으려 하기 전에, 함께 그 마음을 공감하는 것이 경청의 힘입니다. 제도와 규정의 원칙대로만 하면 됩니다. 사람의 전통 즉 낡은 관습을 벗으면, 하느님의 전통을 깊이 새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혐오와 차별이 없는 순수함의 첫 열매로 살며 공동체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첫 열매는 어떤 일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께서도 함께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다른 이들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기보다 듣기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매음에 새긴 것은 반드시 실천에 옮기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