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에 있는 사당 ‘황조별묘’. 광동 진씨 시조인 진린 장군의 초상화가 내부 중앙에 걸려 있다.
해남 집성촌서 400년 거주 … 진린 명예회복이 가문의 꿈
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 11일 오후 논과 야산 사이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농가 마을은 고즈넉했다. 하루에 버스가 다섯 차례밖에 다니지 않는, 구멍가게 하나 없는 외딴 마을에서는 길을 물을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었다.
황조마을 전경. 72 가구 중 60여 가구가 광동 진씨 집안이다.
지난 4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400년 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한·중) 양국 국민은 (왜적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어깨를 나란히 해서 전쟁터로 향했다. 명나라 등자룡(鄧子龍)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다”고 말했다. 이어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의 후손들은 오늘까지도 한국에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황조마을은 시 주석이 한·중 양국의 역사적 공조를 강조하며 언급한 바로 그 명나라 장수의 후예들이 집성촌을 이뤄 사는 곳이다. 마을회관에 누워 TV를 보던 할머니의 인도로 만난 박오수 이장에 따르면 이 마을에는 72가구가 산다. 그중 60여 가구가 광동 진(陳)씨 집안이다. 진씨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만 홀로 사는 집이 꽤 있어 마을 전체에 있는 광동 진씨는 50명 안팎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광동 진씨인 박 이장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진씨 집이 100호가 넘었으나 하나둘씩 외지로 떠났고, 젊은이들이 도시로 가면서 부락의 규모가 줄었다”고 설명했다.
황조별묘의 진린 장군 초상화. 중국 광둥성 웡위안현 지방 정부에서 기증했다.
진린, 정유재란 때 명군 이끌고 조선 도와
이들의 조상이 한반도 서남단 지역에 뿌리를 내린 사연은 이렇다. 1598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온 진린 제독은 이듬해 전쟁이 끝나자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그의 손자인 조(詔)가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라는 벼슬을 버리고 난징(南京)에서 배를 타고 떠나 경남 거제시 장승포에 도착했다. 조는 조부의 군대가 주둔했던 완도군 고금도로 옮겨 정착했고, 이후 그의 아들 석문(碩文)이 황조마을로 이주해 자손을 퍼뜨렸다. 청의 박해를 피해 망명한 진린 장군의 후손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청의 추적에 대비해 산골 마을로 숨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광둥(廣東)성 출신인 이들은 진린 장군을 시조로 삼아 광동 진씨 가문을 개창했다. 진린 장군의 14대 손인 종친회장 진방식(80·전 방송통신대 교수)씨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 있는 광동 진씨는 약 2000명. ‘陳’을 성으로 쓰는 약 14만 명의 한국인 가운데 1.4%에 해당된다.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문중 인사는 찾기 힘들다. 진상욱(40) 변호사와 진혜원(39) 검사가 ‘출세한’ 자손으로 꼽힌다.
황조마을의 복판에는 진린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황조별묘(皇朝別廟)’가 있다. 매년 한식날 제사를 지낸다. ‘중국 황제의 조정’에서 공을 세운 집안이 뿌리는 내렸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에 ‘皇朝(황조)’를 붙였다.
광동 진씨 족보. 시조 진린(陳璘) 장군과 조선에 망명한 그의 손자 조(詔), 해남 황조마을에 정착한 증손자 석문(碩文)의 혈연 관계가 기록돼 있다.
시 주석 언급 때 눈물 흘린 자손들
광동 진씨들은 한국에서의 진린 장군에 대한 평가 때문에 힘든 세월을 보냈다고 얘기한다. 종친회장 진씨는 “왜곡된 역사 때문에 가문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사는 사람도 있다. 시 주석이 진린 장군에 대해 언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광동 진씨 중에는 같은 중국 출신 가문인 여양(驪陽) 진씨로 집안을 합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황조마을의 최연장자 진병천(90)씨는 “자손들이 미욱해 진린 장군의 진면모를 세상에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진린 장군에 대한 ‘부당한 평가’는 주로 소설과 TV 드라마를 통해 한국에서 ‘상식’으로 굳어진 내용이다. 춘원 이광수는 1931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이순신』에서 “이순신 혼자만이 넉넉히 적을 소탕할 능력이 생길 만한 때에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1만 명에 가까운 수군을 끌고 강화도로부터 내려왔다. 이름은 청병이었으나 기실은 순신의 행동을 방해하여 적을 놓아 보내 마침내는 순신을 죽게 하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고 썼다. 이후 김훈의 『칼의 노래』나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김탁환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에서 진린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공을 가로채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회유에 휘둘려 왜적의 퇴로를 열어준 것으로 묘사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유성룡의 『징비록』에 진린 장군이 공적에 욕심을 부리고 정유재란 말기에 퇴각하는 왜군을 쫓는 데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기술된 부분이 있다. 김훈 작가는 “명나라 수군은 조선군이 수세일 때는 움직이지 않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등장했으니 우리를 도와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린 장군을 달리 보게 하는 사료도 많다. 『선조실록』에는 “진린은 어떤 인물이냐”는 선조의 물음에 좌의정 이항복이 “명장입니다”라고 답하는 대목이 있다. 또 노량해전이 끝난 뒤 순천에서 왜군이 쌓아놓은 수만 석의 곡식을 접수했으나 조선에 넘겨준 것으로 기술돼 있다. 진린 장군이 이순신 장군을 높이 평가하고 명나라 황제에게 벼슬을 내리도록 진언했다는 것도 문헌으로 확인된다.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통곡한 뒤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준 것도 그였다. 그는 충무공의 공적을 명의 신종에게 보고하며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 있는 인물로 설명했다. 장경희(54)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진린 장군은 한국에서 과도하게 폄하됐다. 객관적 자료들을 근거로 다시 정밀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패권주의 부활의 시대에 남중국해를 제패했던 명나라 장수가 400여 년 만에 한국 역사의 무대에서 다시 조명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