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27년인 1890년 평양에서 출생해 1910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이슬처럼 사라진 고귀한 생명 이재명. 그가 바로 순국열사 이재명의사다.
그는 20대의 젊고 혈기 왕성한 시기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평양역에서 잠복하던 중 안창호선생의 만류로 유보하였으나 그해 안중근의사가 이토를 살해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국노 이완용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으로 변경한다. 그리하여 여러 동지들과 모여 거사(巨事)를 결심하게 되는데 때마침 매국노 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이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에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천주교회당 문 앞에서 군밤장수로 가장하고 기회를 엿본다.
오전 11시 30분경 추도식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 등을 품안에 숨기고 있던 단도를 꺼내 3번에 걸쳐 찔러 쓰러트리고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기쁨도 잠시, 일본경찰에게 이재명의사는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잡혔지만 주위의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는 대담(大膽)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또한 서울지방재판소에서 일본인 재판장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예가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란 재판장의 말에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라며 강건(剛健)함을 보여주었다고 하며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2,000만 민족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술국치로 강제로 국권을 빼앗긴 지 1개월만인 1910년 9월 30일, 결국 경성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이 때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여담으로 비록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완용은 이때 입은 상처 때문에 17년간 폐렴을 고질병으로 달고 다니며 고생하다가 결국 1926년에 그로 인해 죽었다. 어찌 보면 17년에 걸친 암살. 근데 이완용은 을사오적 중에서는 오래 살았다.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세워졌다.
그로 인해 그해 9월 13일 이재명 의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가 후손들에 의해 이재명의사 추모사업회(이사장 이경선)가 만들어졌고 2001년 6월 12일 이 의사 추모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의사(義士) 이재명 동상. 마이산이 보이는 전북 진안군 진안읍 진안이씨 문중 재실 앞에 우뚝하다. 평북 선천 출신인 이 의사는 매국노 이완용 처단 실패 후 이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으나 받을 후손이 없었다. 2000년 문중과 진안 지자체가 성역화에 나섰다.
한말 독립운동가로 이재명의사는 일제탄압에 항거하고 숭고한 국가관과 민족관, 독립정신을 함양하여 계승 발전시키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올바른 겨레사랑 나라사랑의 정신함양을 목적으로 이재명의사 독립운동 성역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성역화 사업은 진안읍 군하리 산23-1번지 임야 5,310㎡외 6필지이며 총면적은 6,591㎡이다. 올해부터 2009년 12월까지 5년간에 걸쳐 이재명의사 기념관, 의열사, 충의당 등 시설을 확충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재명 의사 독립운동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 숭고한 업적을 함양하고 올바른 역사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켜 독립운동사 교육 및 홍보의 장을 마련함과 동시에 진안과 마이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한편 진안 이씨 종친 회원들은 2001년부터 진안읍 북부 마이산 방향 대로변에 이재명의사의 동상을 건립하고 그 주변을 역사화해 이재명의사 추모제 거행과 청소년의 역사문화 탐방교육, 현장학습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나도 목을 칠 민족반역자 놈이 하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