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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無門關) 18칙 / 동산삼근(洞山三斤)
*마 삼근 화두의 핵심은 고정된 관념 틀 깨는 것. 무엇도 될 수 있는 마 삼근
승복을 모두 풀어 삼근의 마로 돌아가는 것이 해탈
스님이 스님에 머무르면 결코 부처는 될 수 없어
마 삼근 화두의 핵심은 고정된 관념 틀 깨는 것
어느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러자 동산(洞山) 스님이 말했다. “마 삼근이다.”
무문관(無門關) 18칙 / 동산삼근(洞山三斤)
마 삼근’이란 것이 승복 한 벌을 만드는 원료가 될 수 있다. 삼근의 마로는 다른 옷도 만들 수 있다.. 스님이 스님으로 머물러서는 부처가 될 수 없고, 제자가 제자로 머물러서는 선생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승복을 승복으로 유지하는 것이 집착이라고 한다면, 승복을 기꺼이 풀어내어 ‘마 삼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집착에서 벗어남, 즉 해탈이다.
1. 화두, 주인으로 살아야 풀 수 있어
선불교의 매력은 화두(話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화두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가리킨다. 뭐 그렇다고 해서 모든 풀기 어려운 문제, 그러니까 수학적 문제, 물리학적 문제, 혹은 경제적 문제 등이 모두 화두는 아니다. 화두는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은 풀 수가 없고, 주인으로 살아가는 데 성공한 사람만이 풀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화두는 깨달음의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화두를 깨치면, 깨달은 사람, 즉 부처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으로 머무는 것이다. 그러니 스님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화두를 보면 그것을 풀려고 안간힘을 쓴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화두를 넘기만 한다면, 싯다르타와 같은 반열에 올라 대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하니, 누가 이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는 말인가?
김성동(金聖東, 1947년 출생)이 1979년에 출간한 소설 ‘만다라(曼陀羅)’를 아는가. 1980년에 임권택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제작하여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법운이 품고 있던 화두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한 때 승려였던 법운은 과거 큰스님에게 화두를 하나 받은 적이 있었다. 비록 파계는 했지만 법운은 그 화두를 가슴에 품고 언제가 풀릴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은 새 새끼를 유리병 안에 집어넣어 키운다. 당연히 새는 자라지만 더 이상 유리병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이미 덩치가 너무 커져서, 어릴 때 들어왔던 그 유리병 주둥이로는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유리병도 깨지 않고 새도 죽이지 않고, 새를 유리병에서 꺼내 훨훨 날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큰스님이 법운에게 던진 화두는 분명하게 풀리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새 한 마리가 유리병에서 벗어나 훨훨 나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우리는 아직도 이 화두를 못 풀고 있지만, 마침내 법운은 풀어낸 것이다. 그러니 새를 자유롭게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큰스님은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법운이 화두를 풀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를 말이다.
아무리 영민한 아이라고 하더라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묘사하고 있는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물론 그 아이는 모범생답게 괴테와 그의 소설과 관련된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가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너무 어리니까 말이다.. 더 성장하여 사랑의 희열과 고뇌를 온몸으로 느낀 다음에야, 그 아이는 괴테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성숙한 이에게 화두는 자명
“사랑하면 함께 있으면 되고, 함께 있는 것이 불가능하면 헤어지면 되지. 왜 베르테르는 자살을 했을까?” 이것이 아마 초등학생이 괴테의 작품을 읽은 첫 소감일 것이다. 아이에게 베르테르의 자살은 풀릴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을 것이다. “사랑은 행복한 경험일 텐데, 왜 인간을 자살로 이끄는가?” 일종의 화두인 셈이다. 잊지 말라.. 화두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역설로 보이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전혀 역설이 아니라 자명한 이야기다. 고전은 어리숙한 인간에게는 난해해보이지만, 성숙한 인간에게는 자명한 이야기인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위대한 고전이 그런 것처럼 선불교의 화두도 우리의 성장을 기다리는 이야기다. 물론 여기서의 성장은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방향으로의 성장, 일반인에서 부처가 되는 방향으로의 성장을 의미한다. 자, 이제 ‘무문관(無門關)’의 열다섯 번째 관문에 우리의 성장을 기다리는 어떤 화두가 있는지 살펴보자.
어느 스님이 묻는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러자 동산(洞山, 910~990) 스님은 너무나도 쿨하게 이야기한다. “마 삼근이다!” 이제 동산의 제자 스님에게도 평생 가슴에 품고서 풀어야 할 화두가 하나 새겨진 것이다. “마 삼근!” 정말 풀기가 만만치 않은 화두다. 이건 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연하기만 하다. 정말 제대로 된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화두에도 수준 차이라는 것이 있다. 스승의 수준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어떤 화두는 500미터 정도 되는 산과 같고, 다른 화두는 8000미터 높이의 산과도 같기 때문이다. 500미터를 넘은 사람은 300미터나 400미터 산은 가볍게 넘을 수 있지만, 1000미터 이상 되는 산은 언감생심.
반대로 8000미터 높이의 산을 오른 사람에게 5000미터 되는 산은 정말 얼마나 쉽겠는가. “마 삼근!” 8000미터 급의 화두다. 등산로 자체도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이 열다섯 번째 관문 주변에는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여전히 많기만 하다. 그 가운데 나름 설득력이 있는 소리도 두 가지 정도 섞여 있었다.
동산 스님이 당시 마(麻)를 다듬고 있어서 그렇게 말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마음이 지금 마에 가 있었기에 “마 삼근”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동산 스님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이 마에 가 있는 것으로 부처를 설명하려고 하였다면 동산은 구태여 ‘삼근’이란 단위를 붙일 이유가 없을 거다.
또 당시 당나라 때는 ‘마 삼근’으로 가사 한 벌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마 삼근’이란 바로 승복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마 삼근’은 승복의 환유(metonym)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산 스님의 “마 삼근”이란 이야기는 “승복을 입고 있는 바로 네가 부처가 아니냐!”는 의미가 되는 셈이다. 그렇지만 승복을 가리키려고 구태여 그 재료 ‘마 삼근’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조금 어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3. 승복이 이불보 될 수 있어야 자유
‘마 삼근’이란 것이 승복 한 벌을 만드는 원료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삼근의 마가 있어야 그것을 짜서 승복을 하나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렇지만 삼근의 마로 반드시 승복을 만들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 무슨 말이냐 하면 삼근의 마로는 다른 옷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하다. 스님이 스님으로 머물러서는 부처가 될 수 없고, 제자가 제자로 머물러서는 선생이 될 수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승복이 승복으로 머문다면 그것은 다른 옷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승복으로 다른 옷을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우선 승복을 풀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실타래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렸을 적 뜨개질이 보편적이었을 때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자라면 항상 이런 식으로 새 옷을 다시 짜곤 했다. 아이가 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풀어서 다시 짜야 했던 것이다.
‘마 삼근’ 화두를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등장하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이란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 ‘단하가 부처를 태웠다’는 뜻입니다.
추운 겨울 대웅전에 방치된 단하(丹霞, 739~824) 스님이 추위를 쫓기 위해 목불을 쪼개서 모닥불을 만들었습니다. 추우니까 불을 쬐어 몸을 녹이려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단하의 행동은 보통 스님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경천동지할 만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당연히 절을 지키던 다른 스님이 깜짝 놀라서 어떻게 스님이 부처를 태울 수 있느냐고 노발대발합니다. 그러자 단하 스님은 너무나도 쿨하게 말합니다. “목불에 사리가 있는지 보려고요.” 당연히 노발대발하던 스님은 말합니다. “나무에 어떻게 사리가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 스님은 깨달았던 겁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목불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말입니다. 나무토막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목불이 될 수도 있고, 땔나무도 될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밥그릇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해보세요. 사찰에 땔나무가 떨어졌다면, 그곳을 지키던 스님은 얼어 죽어야 할까요. 아니면 목불을 땔나무로 써야 할까요. 목불을 지키느라 얼어 죽은 스님이 자유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목불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땔나무로 삼아 몸을 녹인 스님이 자유로운 것일까요.
목불이 땔나무라고 보아야 하는 것처럼 승복도 ‘마 삼근’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승복을 승복으로 유지하는 것이 집착이라고 한다면, 승복을 기꺼이 풀어내어 ‘마 삼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집착에서 벗어남, 즉 해탈일 테니까 말입니다. 승복은 오직 승복으로만 기능할 뿐이지만, 삼근의 마는 승복도 될 수 있고, 다른 옷도 될 수 있고, 심지어 이불보도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이고 해탈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깨달은 사람은 마 삼근과 같은 사람입니다.
타자가 누구냐에 따라 자신을 그에 걸맞는 옷으로 만들어 그 사람에게 입혀줄 수 있으니까요. 개구쟁이 아이를 만나 자신의 머리를 만져도 껄껄 웃으면서 아이의 친구가 되거나, 실연의 아픔을 토로하는 여인을 만나면 그녀의 시린 마음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옷과 같은 오빠가 되거나, 지적인 호기를 부리는 제자 앞에서 그의 알음알이를 깨부수는 주장자를 휘두르는 사자와 같은 선생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의 행동 아닐까요. “마 삼근”처럼 말입니다.
첫댓글 선승이 무엇에 빠져 있든지, 붙잡혀 있든지, 묶여있다면 화두를 참구하며 스스로 알아차려 벗어나야한다.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마삼근이라 대답한 것도 마삼근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찾지 말고 네 스스로 안에서 찾으라는 손가락이다. 또 마삼근이 무엇인지 헤아리기 시작하면 말짱 꽝이다. 도대체 무엇에 빠지지도 사로잡히지도 말라는 말이다. 정전백수자나 간시궐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아 그런 깊은 뜻이 잠재하고 있군요. 언제나 명료한 해석으로 알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