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필독서 이광수의 유정 ,무정, 흙, 심훈의 상록수...
아침 출근 길에 상록수에 들러 최용신 선생의 묘소를 찾아보았습니다. [2007. 3. 20일. 화요일 한국의산천 ]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 최용신
소설 상록수(常綠樹)는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며 연재되었다. 그 이전인 1932년 춘원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재직하면서 장편소설 '흙'을 연재해 전국 농촌계몽운동에 활력소을 불어넣기도 했다.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힘을 기울이는'채영신'이란 여자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의 실제인물이다.
소설 상록수 박동혁과 채영신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했다가 00일보사에서 주최한 보고회 겸 위로회 석상에서 만나 동지가 된다. 동혁은 수원 고등 농림 학생이고 영신은 여자 신학교 학생이다.
▲ 경기 안산 상록수역 ⓒ2007 한국의산천
▲ 꼭 100년 전 이곳에 자리 잡은 기독교 대한감리회 샘골교회 ⓒ2007 한국의산천
1907년 7월 6칸짜리 작은 교회로 출발한 샘골 교회.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전 이곳 터에 자리잡은 교회이다. 샘골 감리교회 뒤편 야트막한 동산에 최용신 선생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 교회 뒤뜰에는 한그루의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2007 한국의산천
ⓒ2007 한국의산천
최용신의 농촌계몽운동은 기독교계통의 농촌운동의 일환으로 계획되고 추진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YWCA의 농촌파견교사로 임명되어 1931년 10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리(샘골:현재 안산시 본오동)에 파견되면서 그녀는 농촌을 사랑하고 농민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농촌 아동을 민족의 동량으로 키우는 구국교육운동에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신여성으로서의 자긍심과 처녀로서의 수줍음과 부끄러움도 버린 채 직접 발을 벗고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김을 매며 농촌부녀자들과 함께 밭을 매면서 구슬땀을 같이 흘리고, 밤에는 가갸거겨의 한글강습의 야학을 열고 아동들과 한글·산수·재봉·수예 등을 가르치는 강습소를 운영하는 등 1인 4역 또는 5역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녀가 천곡(샘골)에서 우선 실행한 것은 가르치고 배우고자 하여도 마땅한 교육장이 없는 것을 절감하고 강습소 설립에 온 힘을 경주하였다.
▲ 샘골의 유래 ⓒ2007 한국의산천
ⓒ2007 한국의산천
최용신(崔容信)선생 연보
1909년 8월 12일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崔昌熙씨 차녀로 출생 1935년 1월 23일 0시 20분 운명(26세, 만 25년 6개월)
▲ 묘 앞에 있는 비석 ⓒ2007 한국의산천
상록수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힘을 기울이는'채영신'이란 여자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의 실제인물이다. 최용신은 서기1909년 8월 함경남도 원산읍 두남리에서 최창희(崔昌熙)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은 대단히 곤궁한 생활속에서 살았지만 신앙심이 깊어 열심히 교회를 다녔으며, 그로인해 루씨(樓氏) 여자보통학교와 루씨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에 있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을 1년 앞둔 1931년 10월 최용신은 학업을 중단하고 샘골마을로 농촌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내려왔다.
전철을 이용하여 안산방면 상록수(남쪽 개찰구), 한대앞역에서 내린후 상록수 우체국방향으로 가다가 상록수 우체국 옆길로 들어가면 상록수 공원안에 최용신선생의 묘가 있다.(상록수 시내의 라성호텔에서 남쪽 방향으로 300m 지점)
지금 최용신 선생은 가고 없지만 이 시간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이웃을 위해 땀을 흘리고 봉사활동을 하고 있겠지...
▲ 샘골교회 뒤편 언덕에 자리한 최용신 선생의 묘
(지금은 없어진) 강습소가 잘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강습소 바로 옆에 마련된 최용신 선생의 묘소
소박한 최용신 선생 묘소 오른쪽에는 1926년 최용신 선생과 약혼자 였던 故 김학준 교수(장로)의 묘가 있다.(최용신 선생 곁에 묻히기를 ...김학준 교수의 유언에 따른것이다)
1935년 6월 최용신선생을 모델로 한 沈薰의 소설. 常綠樹(여주인공 채영신으로)발표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 제정
▲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피우며 봄을 알리고 있다. ⓒ2007 한국의산천
▲ 높은 첨탑을 보며 교회가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봤다.ⓒ2007 한국의산천
100년 역사의 샘골교회.(川谷.천곡교회) 샘골은 일제시대를 지나는 동안에 한자로 천곡()으로 불려지다가 광복이 된 후에도 한참 후에야 다시 샘골로 부르기 시작했다는데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샘골교회보다는 천곡교회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고 한다.
▲ 최용신 기념관 공사가 한창이다.ⓒ2007 한국의산천
심훈 문학의 산실 당진 필경사 답사 [2005. 5. 22일. 일요일 한국의산천 ]
▲ 필경사 이정표 ⓒ2007 한국의산천
7,300m 길이의 서해대교를 넘어서 송악IC를 빠져나와서 왜목마을 가는 길에 잠시 심훈 문학의 산실인 필경사를 둘러보았습니다. 대로에서 약 500m정도에 위치하고 있기에 접근하기가 쉬운곳입니다.
심훈은 <직녀성>을 조선 중앙일보에 연재하여 그 고료로 부곡리에 집을 지어 '필경사'라고 불렀다. 이 필경사에서 쓴 <상록수>가 1935년 동아일보 15주년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상금 5백원을 받아 그 중에서 상록학원을 설립한다. 1936년 9월 6일 대학병원에서 급서(急逝)하여 심훈의 문학은 더 펼치지 못하고 만다.
▲ 필경사가 있는 마을 작은 송림공원에 세워진 시비. ⓒ2007 한국의산천
▲ 1996년 한국문인협회가 세운 시비(그날이 오면) ⓒ2007 한국의산천
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 필경사 ⓒ2007 한국의산천
필경사의 옥호는 상록수 집필에 앞서인 34년 11월에 쓴 그의 고백수기 '필경사 잡기'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1930년에 <그날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다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못냈는데 그 시집 원고 중에 있는 필경이란 시의 제목에서 딴 것이라고 그의「필경사 잡기」란 글에서 밝히고 있다.
'필경사 잡기'는 그 시기에 그가 인생의 방향을 확정짓기 위해 고뇌했던 흔적과 그 사상을 보여준다. 「...나는 어려서부터 문예에 뜻을 두었었다. 시를 쓰는 체, 각본을 꾸미는 체하고 영화박이는 흉내도 내고 여러해 보람없는 저널리스트 노릇도 하다가 최근에는...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바늘구멍으로 낙타를 끄집어 내려는 대담함에 식은 땀이 등어리를 적심을 스스로 깨달을 때가 많다. 동시에 더욱이 문예의 길이란 가시밭을 맨발로 밟고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이 가난한 것을 깨달았다...적어도 한 십년하고 살을 저미고 뼈를 깎아내는 듯한 노력과 수련을 쌓는 시기가 있어야 비로소 제일보를 내어 디딜수가 있을 것이다.
▲ 심훈 선생의 부조 ⓒ2007 한국의산천
심훈(沈熏)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 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당하였다. 같은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동방의 애인>,<불사조> 등 두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문화관광부 선정 1996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 필경사 뒤뜰의 대나무 숲 ⓒ2007 한국의산천
▲ 필경사 내부 ⓒ2007 한국의산천
필경사는 심훈 문학의 산실이다. 심훈은 1933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곳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와 한 동안 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면서 영원의 미소, 직녀성 등을 집필하였다. 1934년에 독립하여 살집을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 필경사이다.
▲ 필경사 사랑방 ⓒ2007 한국의산천
▲ 왼쪽이 필경사 오른쪽이 상록수기념관. ⓒ2007 한국의산천
필경사 가는 길 서울, 경기, 천안에서 ○ 천안 IC( 경부 고속도로) - 아산(39번국도) - 삽교호관광지(38번국도) - 송악 IC(서해안고속 |
출처: 한국의산천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의산천
첫댓글 농민문학의 장을 연 독립 투사의 얼을 산천님의 영상에 관류 시켜느껴 봅니다. 필경사의 아늑한 서기는 상록수가 태어 날 곳임을 입증해 줍니다 꽃삽 어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