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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케 호모’, 고통이 빚은 미술기행의 힘 … 감정과 공감의 吐露 넘어설 수 있다면 |
미술밖 미술비평_ 서경식 |
서경식의 이력은 다소 복잡하다. 그는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그 와중에 이른바 재일조선인유학생 간첩단사건(1971년)으로 모국에 유학중이던 두 형(서승, 서준식)이 정치범으로 투옥됐고, 그 때문에 그는 한 동안 가업을 거들고 가족과 함께 두 형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자유기고가로 활동해야 했다. 마흔이 되면서 정치사상가 후지타 쇼조의 권유로 호세이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몇몇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하다 2000년에 도쿄게이자이 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로 임용됐다.
한국사회에서 서경식은 학자로서보다는 에세이스트나 평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06년에 번역된 『난민과 국민 사이』에서 서경식 자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저작은 크게 두 계열로 나뉜다. 하나는 예술, 문학 등 각종 문화현상에 대한 에세이 종류다. 그 가운데 한국에서 번역된 것으로『나의 서양미술순례』, 『소년의 눈물』, 『청춘의 사신』, 『디아스포라 기행』, 그리고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등이 있다. 다른 하나는 재일조선인, 역사인식, 국가, 민족 등에 관한 평론들로『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난민과 국민 사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발품파는 미술기행의 가치 알려
위에서 열거한 여러 저작들 가운데 한국 사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은 저작을 꼽으라면 『나의 서양미술순례』가 될 것이다. 1991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고, 1992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박이엽의 번역으로 출간된 이 책은 서경식 자신의 표현을 빌면 “조국 땅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서경식의 저서다. 그러나 이 책의 의의는 서경식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12쇄까지 발행한 초판에 이어 2002년에 개정판이 나온 이 책은 국내미술 분야 교양서 가운데 대표적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또한 이 책은 국내에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대중 일반에게 발품을 팔아 미술작품을 찾아다니는 미술기행의 가치와 의의를 알려준 저작이란점에서도 중요하다. 15세기 벨기에 화가 헤럴드 다비드의 작품으로 시작되는 이 책이 로베르트 캄핀, 샤임 수띤이나 코이소 료오헤이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국내에는 전문가 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폭넓게 소개한 것 역시 평가돼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 책의 각별한 의의는 “미술이 사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당연한 명제를 실제 미술작품에 대한 체험 진술과 더불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 탁월한 사회적 비평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이 책에서 다른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와의 절절한 인연에 감동해 눈물을 글썽이는 대신에 반 고흐가 그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 구절을 인용한다. “너는 단순한 꼬로의 화상이 아니다. 너는 나를 매개로 해 아무리 값이 폭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끄떡도 하지 않을 어떤 그림의 제작 그 자체에 스스로 참가한 것이다.”(반 고흐) 서경식이 보기에 고흐와 같은 예술가는 온몸으로 반항하며 가치를 창조하면서 싸우는 인간이다.
그래서 고흐는 당당하다. 하지만 그런 당당함이 그 자신뿐만 아니라 동생을 쓰러뜨린다. 동생에게 그런 형의 존재는 저주스러운 짐짝이 아닐 리 없다. 현세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그런 짐짝이 당당하게 나오는 것은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 적반하장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고흐는 동생에게 “단순한 꼬로의 화상이 아니며…”라고 당당히 말한다.
이 대목에서 서경식은 자신을 돌아본다. 그가 고흐의 편지를 주목한 것은 그 자신이 테오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일 것이다. 투옥된 형들에 대해 그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고통 받는 예술가, 반항하는 예술가, 진정한 투쟁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는 후에 이 구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저는 온몸으로 반항하며 가치를 창조하면서 싸우는 인간과, 단순히 미술로서 감상하고 있는 인간인 나 사이에 단절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당시 한국의 옥중에서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인간과 나라 밖에서 먹을 걱정은 안 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나를 대비시킨 것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단절을 언제나 의식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진정한 투쟁의 밖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 단절이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을 해버리면 저는 진정한 투쟁 밖에 인생이 끝날 때까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死神의 숨결과 미의식
『나의 서양미술순례』 이후에도 서경식의 미술에 대한 글쓰기는 계속됐다. 2002년에 김석희 번역으로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판된 『청춘의 사신』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이라는 부제를 달은 이 책은 부제 그대로 혁명과 아우슈비츠, 전쟁의 광기가 휩쓴 시대, 死神의 숨결을 끊임없이 귓전에 느끼면서 끝없는 창조의 싸움을 벌인 작가들에 대한 글들을 담고 있다.
또 『디아스포라 기행』(돌베개, 2006),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철수와 영희, 2009)에서는 그가 데라씨네(부평초), 또는 디아스포라로 지칭하는 배제된 소수자의 자리, 추방당한 자의 시선으로 작업하는 우리 시대 작가들, 이를테면 시린 네샤트, 니키 리, 잉카 쇼니바레와 조양규 등의 삶과 작품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서경식의 미술에대한 관심은 과거에서 동시대로,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으로부터 고통 일반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이 저작들을 관통하는 서경식의 관심사는 무엇보다 “제국주의적 식민지배가 수세대에 걸쳐 야기한 거대한 일그러짐”을 주시하고 비판하는 일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고통받는 자의 편에서 그 고통을 함께 하는 일이며, 다른 한편으로 지배자의 편에서 억압에 동조했던 작가들을 냉철하게 살피는 일이다.
서경식이 보기에 미술은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해주는 역할도 담당하지만 증언, 증인으로서의 역할, 달리 말해 ‘에케 호모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의 역할도 담당한다. 이 가운데 서경식은 후자에 보다 큰 애정을 보인다. 그런데 에케 호모로서의 미술은 보기 싫고 보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서경식은 그 보기 싫은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 예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새로운 미의식을 산출하는 일이다. 미의식은 사회적인 관계의 창출이다. 이렇게 증인으로서의미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경식은 리얼리스트다. 하지만 그는 여느 리얼리스트들처럼 작가들에게 중심과 주변을 분간해 핵심을 잡아낼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중, 삼중의 억압과 부조리한 폭력에 놓인 소수자에게 그 많은 이야기를 단순한 대답 속에 구겨 넣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갈래로 나뉜 것은 여러 겹으로 묻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이렇게 미술과 사회를 항상 더불어 생각하는 서경식의 미술론을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논리에 따라 비판하는 일은 큰 의미가 없다. 가령 이 기획기사의 제목인 ‘미술밖 미술비평’이라는 말도 그에게는 가치있는 제목으로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폐쇄적인 영역에서 다른 영역과 무관하게 전개되는 ‘미술’은 그에게는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그의 글에 충분히 만족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글쓰기가 보다 구체적인 분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감정과 공감의 토로로 그칠 때가 많다는 점 때문이다. 가령 그는 『청춘의 사신』에서 일본 쇼오와 시기 전쟁화를 언급하면서 “어떤 예술작품과 마주 했을 때 내가 사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양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 섰을 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내 존재의 기반 자체를 뒤흔들 수 있을 만큼 악마적인 힘을 가진 예술작품을 만나는 것을 커다란 기쁨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마음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몹시 궁금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더 분석해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것이 나는몹시 아쉽다. 그가 그 문턱을 넘어서는 때가 온다면 그 순간은 그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단절을 뛰어넘는 순간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