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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 마리아 숭배교
카톨릭 신자들은 이런 정의를 죽기살기로 거부합니다.
자기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며, 예수님의 피로 속죄를 입었고,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으며,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며, 그저 마리아를 흠모할 따름이며, 예수님은 모본을 보여서 자기 어머니를 공경했으며,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그분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아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리아를 신으로나 여신으로 섬기는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리아를 가까이 모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인간들이 직접 교제하지 못하게하거나 마리아를 예수와 인간 사이에 넣어 직접 교제와 섬김을 막는 구조의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카톨릭 도그마, 교리 체계의 형성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습니다.
1.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우셨고, 그들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기반을 만드셨습니다.
2.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하심으로 최초의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3. 초대 교회에서부터 이미 부패와 배도의 싹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행 20:30, 행 8장 13절 시몬) 그들중에 자기를 따르게 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4. 초대교회가 100AD 에 끝니고 교회의 리더쉽은 유대인들에서 이방인들로 옮겨졌으며, 율법이 경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을 중시하던 유대인들에게서 율법을 무시하는 이방인들로 기독교 지도부가 바뀌었다는 뜻이며, 성경보다 교회를 위에 올려놓는 관행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5. 100AD 부터 251AD까지 : 마르시온파, 발렌티누스 등의 영지주의자들, 등이 있었지만, 그들이 어떤 교파나 큰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습니다.
6. 249년부터 251년까지 로마제국의 기독교인들은 혹독한 박해를 받았으며, 그들은 황제숭배와 이방신에 대한 제사에 굴복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7. 이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에 굴복했으나 일부는 그것에 저항하였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파비안이라는 감독이 순교하였고, 노바티안이 살아남았습니다.
8. 황제 데시우스가 뜻밖에도 전투에서 251년 빨리 죽자, 배교했던 기독교인들이 교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노바티안 로마 감독은 모든 배교자들이 회개하고,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코르넬리우스라는 감독은 침례가 하나이므로 ( 엡 4:4-5) 다시 침례받을 핖요가 없다고 하여 배교자들을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따라 수많은 배교자들은 그냥 코르넬리우스가 이끄는 교회들로 돌아왔고, 그것이 카톨릭 교회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9. 반면에 노바티안과 충성스러운 기독교인들은 돠돌아온 배교자들로 하여금 화개하고 재침례 받도록 했으며, 그들은 따로 모이게 되었고, 오늘날 교황사를 보면, 코르넬리우스가 교황이고, 노바티안은 안티 교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0. 그리하여 기독교와 카톨릭의 분기점이 251AD 였고, 그때가 카톨릭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11. 이후로 카톨릭은 더욱 세속적인 사람들을 많이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간 반면, 노바티안들은 믿음의 순수성과 성경적 믿음 생활을 추구하는데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12. 이후에 60년이 지난 311AD 에 다시 디오클레시안 황제와 이후의 황제들에 의한 기독교 탄압과 핍박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굴복하여 황제숭배, 우상숭배에 참여하였습니다. 황제 숭배란, 황제가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 바빌론 종교의 최고 제사장으로서 제사드리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었으며, 그런 이교도 제사 종교의 근거지는 바빌론에서 퍼가모로 옮겨왔는데 그곳의 에트루스칸 족속이 이탈리아로 옮겨와서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가 최초의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기원전 73년에 맡았던 것이며, 예수님이 계시록 2장 13절에서 퍼가모에 사탄의 보좌가 있다고 말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에트루스칸 족의 본향으로서 아직도 영적 본향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13. 311AD 에 도나투스는 황제숭배로부터 돌아온 배도자들에게 회개할 것과 재침례를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당시의 카톨릭 교회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며 배도자들을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감독은 Miltiades 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도나투스 무리와 카톨릭과의 결별,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이후에 도나투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도나티스트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14. 도나티스트들은 오늘날의 침례교인들과 같으며, 그들은 북아프리카에서는 카톨릭보다 교세가 강했으므로, 번성하였으나 690년까지 사라센 이슬람의 침략으로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15. 313AD 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공인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공인한 기독교는 도나티스트와 같은 참 기독교가 아니라 바로 배도자들의 연합체인 카톨릭교를 공인한 것이며, 도나티스트들은 그런 진실도 모르고 콘스탄틴 황제에게 어필하여 카톨릭 교도들과의 분쟁을 해결하려하기도 했으나, 오히려 콘스탄틴은 북아프리카에 원정하여 도나티스트들을 죽이고, 그들의 교회들을 파괴하거나 불태우기도 했던 것입니다. 315년.
16. 이후 로마 감독은 밀티아데스( 311- 314)에서 실베스터( 314-335)로 넘어갔고, 실베스터는 일주일의 요일 이름을 오늘날의 요일 이름들과 같은 것으로 바꾸었는데, 즉 일요일과 월요일은 태양과 달의 날로, 화요일은 마르스 신, 수요일은 오딘 신, 목요일은 쥬피터신, 금요일은 프레야 ( 비너스) 신, 토요일은 새턴신의 이름을 붙여서 요일명을 정하였습니다.
17. 이때 321년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제국 공무원들의 공휴일을 일요일로 정한다고 3월 7일 선언하였는데, 존귀하신 무적의 태양의 날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18. 실베스터는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주관하기도 했는데, 물론 콘스탄틴 황제가 지원하였고 참여하였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의결된 사항들은 1) 아리우스 이단 정죄 2) 성직자 제도, 성직자 권한 강화 3) 유월절 대신 이스터 행사로 변경 등이었습니다.
19. 이후 카톨릭은 오늘날의 카톨릭 교회와 같은 형태와 방향으로 계속 바뀌어 갔으며, 마리아를 높이고, 성직자 제도를 강화하고, 율법 대신 교회법이, 여호와의 7명절 대신 이교도 명절들이 들어오고, 안식일 예배보다 일요일 예배가 더 퍼지기 시작하며 여러가지 새로운 교리들이 추가되었습니다.
20. 363-4에 열린 라오디게아 공의회는 안식일에 예배하는 자들에게 아나떼마, 저주를 선포했고, 이후로는 일요일 예배가 보편화되었습니다. 즉 이전까지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하고는 안식일 예배가 전반적인 대세였다는 뜻이며, 그것은 예수님 십자가 이후 적어도 300년간은 안식일 예배가 대세였다는 뜻입니다.
21. 이후에 사도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이 나왔고,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사람들, 평생동정녀 등의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으며, 하느님의 어머니 호칭은 390년까지 상당히 퍼졌습니다.
22. 416년 튜니지아 부근의 밀레비 공의회에서는 유아침례를 규탄하는 결의안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당시에도 유아침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23. 431년 에페소에서 열린 공의회에서는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식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는데 약 10명의 지지 감독들과 참석하였고, 반대로 키릴은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서 약 50명의 감독들, 지지자들과 참석하였으며, 에페소는 사도행전 19장 21-41에서 보듯이 아테미 여신 숭배가 강한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키릴은 동로마제국 황제에게 뇌물을 바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네스토리우스가 정죄되었고, 감독직에서 파직되었으며, 네스토리우스는 이집트 서부 사막지역으로 유배되었다가 이집트 떼바이드 ( Thebaid or Thebais) 에서 451Ad에칼케돈 공의회가 열린후 얼마 안되어 죽었다고 합니다 키릴은 7년 앞선 444년에 죽었습니다.
24. 카톨릭 교회에서는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기를 거부한 사실을 놓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두가지로 분리하여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어머니로는 부를수 있지만 하느님의 어머니로는 부를수 없다고 거부했다는 점을 들어서,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였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1895년 터키 동남부 극단 지역의 쿠르드 족 지역인 Qudshanis Hakari 라는 곳의 네스토리안 도서관에서 미국인 선교사가 발견한 16세기 사본인 바자르 헤라클레이데스는 카톨릭이 그동안 주장해왔던바 네스토리우스가 믿었다는 내용들은 전혀 다르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결합되었으며, 다만 그것이 일반 성도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던것으로 나옵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바자르 헤라클레이데스를 분석하며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25. 많은 카톨릭 교도들은 하느님의 어머니 호칭이 마리아에게 합당한가? 를 논할 때 항상 네스토리우스 논쟁을 거론하며, 그것은 431AD 에 끝난 논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는 다른 주장을 네스토리우스는 했던 사실이 드러났으며, 당시에는 생명과학, 인체가 어떻게 형성되며, 태아가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관한 의학이나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점과 네스토리우스가 히브리서 7장1-3절 5장 6절 등의 내용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하느님의 어머니 호칭을 정당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 때 볼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요한 8장 56절에서 58절은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이 있었기 전에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마리아보다 2천년 앞선 아브라함때의 일들을 예수님은 기억하셨으며, 그 예수님의 두뇌는 아브라함이 있었기 전에도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마리아안에 잉태되었던 태아의 두뇌는 마리아에게서 생겨난 것일 수 없는 것이 그보다 2천년 앞선 아브라함때의 기억을 두뇌에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은 마리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마리아는 그저 인큐베이터 역할이든지, 대리모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는 못했던 것이고, 네스토리우스가 수용한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호칭마저도 성경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모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낫게 여겼다고 히브리서 11장 26절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보다 2천년 앞선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두뇌를 가진 태아였습니다.
이 문제는 다른 글에서 다룰 사안이라 믿어집니다.
26. 네스토리우스는 정죄되었지만, 그를 따르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중동지방, 쿠르드 지역, 바빌론 지역, 페르시아, 등을 거쳐 중국과 만주, 한국, 일본 등지로 많이 퍼져나갔고, 중국에서는 경교라는 이름으로 번성하였는데, 중국의 도교 다음의 양대 종교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635년 알루펜의 전도로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그 이전에 6세기 경에 이미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7. 만주의 거란족의 나라 요나라가 네스토리안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것으로 들리는데 앞으로 더 많은 문헌 조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희 담판때 소손녕의 군대가 80만으로 쳐들어왔는데, 거꾸로 평안도 서북방영토를 더 얻어냈다는 말은 그들이 그만큼 신사적이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28. 네스토리안들은 경교로서 한국과 일본까지 퍼졌고, 그들은 대체로 1400년까지 번성하였는데 유교가 국교화된 명나라때에 소멸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교는 중국과 한국에 그다지 좋지 않은 영향을 많이 끼쳤지만, 네스토리안들의 경교는 많은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믿어집니다.
그들에 의해 구원얻은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로마 카톨릭에서 구원얻은 사람들의 숫자보다 훨씬 많았을 수도 있으며, 하나님만이 진실한 통계를 갖고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카톨릭은 우상교, 여신숭배교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29. 431년 에베소 공의회 이후 카톨릭은 마리아를 높이는 일들과 성직자제도, 교황권 강화, 우상숭배 보편화 등을 향해 나아갔고, 이후 연옥 교리, 외경을 성경에 편입하는것, 독신사제제, 여러가지 성례등이 추가되었습니다.
30. 그러는 동안에 참 기독교는 북아프리카의 도나티스트들, 중동의 바울파, 똔락 공동체, 보고밀, 북 이탈리아의 보도아 형제단, 알비파, 페트로 드 부르시안, 왈덴지안, 롤라드,. 훗사이트, 후터라이트, 재침례파( 1500 이전과 이후), 위그노 등을 거쳤고, 마르틴 루터 이후 메노나이트, 모라비아 형제단, 웨슬레운동, 플리머스 형제단 등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31. 즉 1517년 마르틴 루터의 개혁운동 이전에도 다수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있어왔던 것입니다.
카톨릭은 251AD 에 배도자들을 채침례 없이 다수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교세를 빠르게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만, 참 기독교는 많은 핍박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뿌리는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카톨릭은 사실상 251AD까지 올라갑니다. 즉 기독교에서 카톨릭이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들은 이런 해석이나 역사관을 극렬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통해 카톨릭 교회를 세우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어느 누구도 마리아에게 기도하지 않았으며,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른 사람도 없고, 마리아를 하늘 여왕으로 부른 사람도 없고, 마리아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앞에서 기도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사도도 없었습니다.
32. 오늘날의 카톨릭 교회는성경 읽기를 허용하고있지만 그들은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Sola Scriptura 를 반대합니다. 그들은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위에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모순되는 어떤 교리나 외경도 하나님 앞에서는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3. 그외에 카톨릭 교회들이나 공의회가 평신도들의 성경 읽기를 금지한 사실들이나, 성경번역자인 윌리암 틴데일을 처형한 사실, 카톨릭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1854년 선언한 교황 피오 10세는 사실 그 이전부터 있어왔던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는 주장들을 좀더 한정시킨 것이라 믿어지며,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임을 형성한 것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잘못 인식한 것이라 믿어집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Extra_Ecclesiam_nulla_salus#:~:text=In%20it%2C%20Boniface%20declared%2C%20%22,and%20no%20remission%20of%20sins%22.
34. 한가지 기억할 것은 카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카톨릭 교회는 그들의 교리 문답 841에서 창조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보호하심을 받는다는 식으로 구원을 암시합니다. 즉 카톨릭의 모든 교리나 주장들은 참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강경합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자꾸만 포용하려 하면서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기독교인들에게만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지만, 교황이 이슬람국가들을 방문해서는 마리아가 알라의 어머니이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즉 카롤릭이나 교황이나 바티칸은 참 기독교인들, 그들이 소위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라고 비아냥하는 사람들에게만 강력합니다. 그들은 알라가 마리아의 아들이요, 마리아는 알라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지 못하고, 한적도 없습니다.
35. 앞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산, 성전으로 바티칸 교황청을 옮길 것으로 예상됩니다. 2015년 6월 26일 팔레스타인과 체결한 조약이 그런 이전을 염두에 두었다고 믿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로마 카톨릭과 이슬람은 연합하고 단결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최대 대적은 참 기독교인들과 이스라엘 국가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36. 그때에, 세계 통합종교의 수장인 교황이 하느님의 대리자를 자처하며, 그 성전에서 앉고 일어설 것입니다. ( 마태 24:15, 살후 2장 4-8). 또한 그들이 참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것입니다만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심으로 그 집단을 치실 것입니다. ( 살전 4:16, 살후 2장 8, 계 19:20). 오늘날은 아직 그들의 전성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37. 오늘날 카톨릭 교도들은 자기들이 우상을 만들어놓고 절하고 기도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상숭배자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계시록 21장 8절, 22장 15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무수한 변명들은 유구무언이 될 것입니다.
2024. 4. 15 하토브
첫댓글 카톨릭 교회의 시발점을 251AD 로 보는 것은 아마도 제가 처음일 수 있겠습니다.
제가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에서 많은 토론을 거치면서도 카톨릭 교도들이 많이 반박하지는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카톨릭 자체의 기록들이 있어서 그해에 노바티안과 코르넬리우스가 갈라진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배도자들이 있었고
사도 요한이 아직 살아있을 때에도 배도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조직적으로 교회들이 갈라진 것은 251년이 처음입니다.
물론 카톨릭도 자기들의 근원은 초대교회, 사도행전 2장으로 올라간다고 하며, 더욱,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했으며 그 교회가 카톨릭 교회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에 나오는 카타와 올레를 합하여 만들어낸 카톨릭은 우상제작, 우상앞의 기도, 마리아에의 기도, 마리아를 하늘여왕으로 올려놓고 하느님의 어머니라 불러서 하느님 위에 마리아를 올려놓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