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 이동형(李東亨)
[본관] 여주(驪州)
[진사] 현종(顯宗) 14년(167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進士) 3등(三等) 54위(84/100)
[생졸년] 1637년(인조 15)~1717년(숙종 43) / 수(壽) 80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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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군 이공 묘갈(護軍李公墓碣銘)
우암(尤菴) 선생께서 봉산(蓬山)에 위리안치되고 아침저녁으로 화를 예측할 수 없었던 때에 마침 큰 가뭄으로 인해 이동형(李東亨) 공이 홀로 수백자 상소를 지어 궐문에서 선생의 원통함을 호소하자, 흉도들이 공을 경원(慶源: 함경북도 북단에 있는 군)에 유배하였다. 이는 무오년(戊午年, 1678, 숙종 4) 6월의 일로, 경원은 도성과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처음 상소를 올릴 적에 공이 살아계신 노모 때문에 한동안 머뭇거렸는데, 김 부인(金夫人)이 아들의 뜻을 알고서,
“생삼사일(生三事一)이 의(義)이다. 나는범방(范滂)의 어머니에게 비웃음당할까 두렵다.”
하니, 공이 마침내 떠나기로 결심을 하였다.
이별할 때 김 부인은 태연하게 처신하였다. 우암 선생께서 이 이야기를 듣고서 말씀하기를,
“아! 이 사람이 이런 아들을 둔 것이 마땅하구나.”
하였다.
이전에 김 부인의 병이 위독했을 때에 공도 동시에 전염병에 걸렸지만 자력으로 손가락에 피를 내어 올려 부인이 건강을 되찾았는데, 이후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공이 석방되어 돌아왔을 때 부인은 이미 1년 전 세상을 떠나고 없었으니, 듣는 자들이 슬퍼하였다.
공의 자는 태경(泰卿)이고, 여주(驪州) 사람이다. 족보에 보이는 자로 고려 때에 한림학사를 지낸 고(臯)와 본조에서 이조 참판을 지낸 심(審)이 가장 현달하였다. 휘 치(錙)는 판관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에 체찰부(體察府)를 위해 백의종사(白衣從事)하여특별히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사의(司議) 휘 덕언(德言)을 낳았으니, 송강(松江)의 문인으로 사우들에게 중망을 받았으며 또한 승지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훤(烜)을 낳았으니, 진사로서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바로 공의 부친이다. 모친은 본적이 순천(順天)으로, 현감 김일신(金日新)의 딸이다. 공은 숭정(崇禎)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태어나 계축년(癸丑年, 1673, 현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우암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선생께서 그 기개를 인정하였다. 유배지에 있을 때에는 북쪽 지방의 무지한 풍속을 안타깝게 여겨 재능이 출중한 자를 선발하여《소학》을 가르치고 사례(四禮)를 강하여 성취시킨 자가 많았다. 김 부인의 부고를 듣고는 통곡하며 발 구르다가 갑자기 기절하고 열흘 동안 음료를 입에 대지 않으니, 경원 사람들이 효자라고 감탄하였다.
임술년(壬戌年, 1682, 숙종 8)에 제릉 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서차에 따라 전옥서 봉사(典獄署 奉事)로 옮겼는데, 감옥 안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치워 죄수들이 잇따라 죽는 일이 없게 되었다. 선공감 직장을 거쳐 종부시와 군자감으로 옮겼다가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로 승진하고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
길에서 높은 관원을 만나면 피하지 않고 공복(公服) 차림으로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으므로 대신(大臣)도 내려서 읍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옛 규례이다. 호조와 형조의 낭관, 사직서 영, 한성부의 판관과 서윤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신녕 현감(新寧縣監), 배천 군수(白川郡守), 간성 군수(杆城郡守)를 지냈다.
신녕 현감으로 재직시에는 향약(鄕約)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요역(徭役)을 줄여주었으며 효성이 뛰어난 자와 나이 많은 사람을 찾아내어 음식물을 두루 내렸다. 또 우암 선생에게 화가 일어나자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을해년(乙亥年, 1695, 숙종 21) 크게 기근이 들고 배천군이 몹시 심했는데, 공이 공무로 대궐에 나아갔을 때 상께서 불러 들여 면유(勉諭)하셨다.
공이 물러나와 울면서 마음을 다해 진휼하니 굶어죽은 백성이 없었다. 이웃 고을 백성이 억울하게 강상(綱常)의 큰 옥사에 걸리자 공이 한마디로 시비를 가려 판결하였다. 사람들은 신명하다고 칭했으나 어사가 협사율(挾私律)로 논하는 바람에 파직되고, 간성 군수로 있을 때에도 대신(臺臣)에게 탄핵되어 떠났는데, 두 고을 사람들이 그때마다 대궐 아래로 달려가 공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수원(水原) 광교산(光敎山) 아래로 돌아가 초가를 지어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어놓고 그 사이에서 시를 읊으면서 집에 식량이 자주 떨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만년에는 좌수운 판관(左水運判官)에 제수되고 통정대부로 올랐다. 숙종께서 온천에 행행하실 때 다시 가선대부로 승진하였으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 덕분이었다. 오위장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사람됨이 헌걸차고 활달하였으며 담론을 좋아하고 음주를 즐겼으니, 자제들이 일찍이 공이 눈썹을 찌푸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물을 줄줄 흘렸고, 고을을 다스릴 때엔 문을 활짝 열어놓아 궁핍한 친족이 찾아가 의지하였다.
혼수를 마련하여 사위를 맞을 때에는 자신의 딸을 제쳐두고 형님의 딸을 우선하였으며, 먼 조상을 위해 제전(祭田)을 두고, 종족을 규합하여 계법(契法)을 세웠다. 또 붕우들과 돈독하여 참마(驂馬)를 벗기고 수의(襚衣)를 보내는 일에 난색을 표하지 않았으며, 부고가 이르면 반드시 곡위(哭位)를 만들어 곡하였다.
일가의 논의가 서로 어긋나도 그 사이에서 여유롭게 잘 처신하였다. 평소에 입으로 시비를 말하지 않았지만 혹 사문(師門)을 범하는 말에는 노하여 꾸짖어 대번에 수염이 뻣뻣하게 뻗쳤다. 배위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찰방을 지내고 참판에 추증된 국헌(國憲)의 딸이다.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청주(淸州) 조차산(造次山) 해좌(亥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처음에는 광주(廣州)에 안장했다가 4년 뒤 경자년(庚子年, 1720, 숙종 46) 이곳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응(膺)은 문과에 급제하고 장령을 지냈고, 하(廈)는 직장을 지냈다.
사위는 사인(士人) 서종만(徐宗萬), 판서에 추증된 조태하(趙泰夏), 교관 송유원(宋有源), 사인 유명권(柳命權)이다. 렴(廉)과 후(厚)는 측실 소생이다. 수룡(壽龍), 수악(壽岳) 및 정언 박필균(朴弼均)에게 시집간 딸은 장남의 소생이다. 수송(壽松), 수백(壽栢) 및 진사 황붕하(黃鵬河), 사인 김전(金硂)에게 시집간 딸은 차남의 소생이다.
세 사위의 아들은 서명즙(徐命楫), 서명해(徐命楷), 서명량(徐命樑), 서명식(徐命栻), 병사 조호신(趙虎臣), 송득상(宋得相), 송옥상(宋沃相), 송명상(宋命相), 송봉상(宋鳳相)이다. 나는 공을 뵙지는 못했으나 공의 행장을 통하여 공의 실제 행동을 알 수 있었다.
벼슬할 때와 집에 있을 때의 행실에 기록할 만한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보다 더 큰 일이 있다. 영릉(寧陵효종)의 성세(盛際)에 우암 선생이 조정에서 은밀한 계획을 세웠는데, 공은 당시 선생을 뵙기 이전이고 약관의 어린 나이였지만 손으로 검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좋은 기회다, 좋은 기회다!”라고 하였으며,〈출사표(出師表)〉를 읽을 때마다 개연히 크게 탄식하였으니, 그 지기(志氣)가 크다고 이를 만하다.
근세의 사대부들이 더 이상 ‘복수하여 치욕을 씻는다.〔復雪〕’라는 두 글자를 알지 못한 지 오래되었으니, 아! 공과 같은 사람을 어디에서 얻는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선생의 제자가 되는데 손색이 없는 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 이 노인은 / 嗟哉是翁
문서 속에 파묻혔다가 / 陸沈兮朱墨
오두막에서질장구치고 노래하였네/ 缶歌兮蓬蓽
소싯적 장대한 마음 그 누가 알리요 / 少時壯心兮誰知
옛 검의 광채 서릿발 같았네 / 古劒顔色兮霜雪
아득히 험준한 길에서 두 다리 피가 났지만 / 雲天嶔兮兩脚血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의리는 해처럼 빛났네 / 事如一兮義炳日
지금 사람들은 어찌 유독 이런 본성이 없는가 / 今之人何獨無此性兮
더러 상대의 공격을 도와 스스로 끊어버렸네 / 或助攻而自絶
내가 그 큰일을 모아 기록하여 / 我最其大兮
우매한 자를 꾸짖노라 / 昧者之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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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호군 이공 묘갈:
이 글은 이동형(李東亨, 1637~1717)의 묘갈이다. 이동형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태경(泰卿)이다.
[주02] 생삼사일(生三事一):
아버지와 스승과 임금을 똑같이 섬겨야한다는 뜻이다.《국어(國語)》〈진어(晉語)〉에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아가니, 똑같이
섬겨야 한다. 아버지는 낳아주시고 스승은 가르쳐 주시고 임금은 먹여 주셨으니, 아버지가 아니면 태어나지 못하고 임금이 먹여주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고, 스승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지 못하니 낳아 주신 것과 똑같다.[民生于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
之. 非父不生, 非食不長, 非敎不知, 生之族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3] 범방(范滂)의 어머니:
후한(後漢)의 범방이 죽음의 길로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자, 그 어머니가 “네가 이제 이응(李膺), 두밀(杜密)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죽는다 한들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라고 위로하였다.《後漢書 卷67 黨錮列傳 范滂》
[주04] 임진왜란 …… 백의종사(白衣從事)하여:
한국문집총간 197집에 수록된《여호집(黎湖集)》권27〈간성군수이공묘지명(杆城郡守李公墓誌銘)〉에 따르면, 이치(李錙)는
평민의 신분으로 불려와 체부 종사관(軆府從事官)이 되었다.
[주05] 참마(驂馬)를 벗기고:
부의(賻儀)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위(衛)나라를 지날 때 옛날 여관 주인의 상을 접하고는 들어가서 슬피 곡하고 나온
뒤 자공(子貢)으로 하여금 수레에 매인 참마를 벗겨 부의로 내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禮記 檀弓上》
[주06] 좋은 기회다 …… 기회다:
청나라에 복수할 좋은 기회라는 말이다. 이는 괴통(蒯通)이 한신(韓信)을 찾아가 모반을 종용할 때 한 말로, “공은 이루기는 어려워
도 망치기는 쉽고, 때는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 지금과 같은 좋은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夫功者難成而易敗, 時者難
得而易失也. 時乎時乎不再來.]” 하였다.
[주07] 질장구치고 노래하였네:
생사(生死)의 이치를 잘 알아 편안하고 즐겁게 노년을 마무리했다는 뜻이다.《주역》〈이괘(離卦) 구삼(九三)〉에 “기운 해가 걸려
있음이니, 질장구를 두드리며 노래하지 않으면 노년을 한탄하는 것이니 흉하다.[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